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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온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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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테미시온 해전은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테르모필레 전투와 함께 벌어진 해전이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은 에우보이아섬 북쪽 아르테미시온에서 페르시아 해군에 맞서 싸웠다. 전투는 3일간 이어졌으며, 그리스군은 페르시아 해군에 피해를 입혔지만, 테르모필레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고 철수했다. 비록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지만, 아르테미시온 해전은 그리스 해군이 페르시아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후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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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온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아르테미시온 해전
전역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살라미스로 이동 중의 전투
주요 사건들을 보여주는 지도, 기원전 480년
날짜기원전 480년 7월 21–23일 또는 8월 7일 또는 9월 8–10일
장소그리스, 에우보이아 아르테미시온
좌표39°3′0″N 23°12′0″E
결과페르시아의 승리
추가 결과페르시아, 에우보이아 장악
교전 세력
교전국 1그리스 도시 국가
교전국 2아케메네스 제국
지휘관 및 지도자
그리스에우리비아데스
테미스토클레스
아데이만투스
페르시아아카이메네스
아리아비그네스
아르테미시아 1세
다마시티모스
병력 규모
그리스271척
해병 4,065명
노잡이 46,070명
페르시아1,207척
해병 36,210명
노잡이 205,190명
피해 규모
그리스100척 손실
페르시아400척 손실

2. 배경

기원전 499년부터 기원전 494년까지 아테네에레트리아페르시아 제국다리우스 1세에 대항한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비교적 젊었고, 피정복 민족들 사이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다리우스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고자 했으며, 분열된 고대 그리스를 정복할 기회로 삼으려 했다.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우스의 원정으로 트라키아를 재정복하고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491년, 다리우스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사절을 보내 복종을 요구했으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사절을 죽임으로써 강경하게 대응했다.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는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에게 군대를 주어 낙소스를 공격하고 키클라데스 제도를 점령하게 했다. 그 후 에레트리아를 파괴하고 마라톤에 상륙하여 아테네를 공격하려 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군에게 패배하여 아시아로 퇴각했다.

다리우스는 그리스 정복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으나, 이집트의 반란으로 원정이 연기되었고, 그 와중에 사망했다. 왕위는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고,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 침공 준비를 재개했다. 헬레스폰트 해협에 다리를 건설하고 아토스 산 지협에 운하를 건설하는 등 대규모 준비를 마친 후, 기원전 480년 초, 사르디스에서 출발한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는 유럽으로 진격했다.

아테네는 기원전 480년대 중반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으며, 기원전 482년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지도하에 대규모 트리에레 함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싸울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의 동맹이 필요했다. 기원전 481년,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전역에 사절을 보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제외했다. 이를 계기로 두 도시를 중심으로 동맹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481년 늦가을, 코린토스에서 도시 국가들의 회의가 열렸고,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 동맹이 결성되었다.

기원전 480년 봄, 코린토스에서 회의가 다시 열렸다. 테살리아 대표단은 템페 계곡에 병력을 집결시켜 크세르크세스의 진격을 막자고 제안했으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의 경고로 후퇴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테르모필레 협곡을 막고, 동시에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봉쇄하는 이중 전략을 제안했고, 회의는 이를 채택했다.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은 코린토스 지협 방어 계획을 세웠고, 아테네의 여성과 아이들은 트로이젠으로 피난했다.

페르시아 원정군의 침공 소식을 접한 그리스 측은 이스토모스에서 회의를 열고 육군은 테르모필레에, 해군은 에우보이아섬 북단의 아르테미시온에 배치하여 요격하기로 결정했다. 테르모필레-아르테미시온 방어선은 돌파되면 에우리포스 해협의 제해권이 페르시아 측에 넘어가 에우보이아섬이 고립되고 아티카 이북이 완전히 제압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리스 연합 함대는 마케도니아의 테르메 (현 테살로니키)에 배치된 삼단노선 1,207척을 포함, 총 3,000척이 넘는 페르시아 대함대를 상대해야 했다.

페르시아 해군은 테르메를 출발하여 10척의 쾌속선을 스키아토스에 파견, 경계 중이던 트로이젠, 아이기나, 아테네의 그리스 선박 3척을 나포했다. 그리스 함대는 스키아토스의 발화 신호에 놀라 칼키스까지 후퇴했다.

페르시아 본대는 마그네시아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으나, '헬레스폰토스풍'이라는 강풍을 만나 400척 이상이 난파되고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리스 측은 칼키스로 후퇴하여 피해를 입지 않았고, 에우보이아 고지대 망루병 덕분에 페르시아 함대의 피해를 알게 되어 아르테미시온에 다시 배치되었다.

그러나 아페타이에 정박한 페르시아 함대는 예상보다 규모가 커서 그리스군은 당황했고, 총지휘관 에우리비아데스코린토스 지휘관 아데이만토스는 철수를 주장했다. 에우보이아섬 주민들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뇌물을 주어 개전을 호소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돈의 일부를 에우리비아데스와 아데이만토스에게 주어 아르테미시온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아르테미시온 곶 해변. 저 멀리 마그네시아가 보인다.


테살리아로 출발하는 그리스 함대.


연합군은 아르테미시온에 자리를 잡고 곶에 배를 정박하여 신속하게 출항할 수 있도록 했다.[26] 스키아토스 섬에 정찰선 3척을 보내 경고를 보냈지만,[27] 2주 동안 소식이 없었다. 마침내 시돈의 삼단노선 10척이 스키아토스 앞바다에 도착했고, 연합 함대는 섬에서 불을 피워 이를 알렸다.[1][28] 그러나 연합군 순찰선은 경계하지 못해 2척이 나포되고 1척은 좌초되었다.[1]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혼란 속에서 연합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 전체의 도착을 알리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해 아르테미시온 해협으로 출항했다.[1] 페르시아 함대가 도착하지 않자, 칼키스로 항해하기로 결정하고, 에우보이아 섬의 높은 곳에 감시병을 남겨두었다.[1]

역사학자들은 연합군이 페르시아군의 움직임을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29] 봉화 신호가 단순하여 오해가 있었거나, 신호병이 페르시아 함대가 스키아토스 섬 동쪽으로 항해한다고 믿었을 수 있다.[1] 페르시아군이 에우보이아 섬 동쪽으로 항해한다면 아티카로 직행하여 연합 함대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1] 칼키스로의 후퇴는 연합군에게 탈출 기회를 제공하고, 필요하다면 아르테미시온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에우보이아 섬에 남겨진 감시병들은 페르시아 함대의 동향을 알릴 수 있었다.[1] 연합 함대는 칼키스에서 대기했지만, 페르시아 함대에 대한 불안감에 과잉 반응했을 수 있다.[1]

약 10일 후,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에 도착했고, 칼키스에 있던 연합군은 연락선(아브로니쿠스 지휘)을 통해 이 소식을 접했다.[1]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는 보이지 않았고,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에서 첫날 공격을 하지 않았다.[30] 다음 날, 페르시아 함대는 마그네시아 현과 스키아토스 섬 사이의 스키아토스 갭으로 향했고, 여름 폭풍(‘헬레스폰터’[1])을 만나 함선의 약 1/3이 파괴되었다.[1][32]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은 폭풍 기간 동안 공격을 하지 않았다.[1]

폭풍이 끝난 다음 날, 연합 함대는 테르모필레 육군을 보호하기 위해 아르테미시온으로 돌아왔다.[1] 다음 날,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에서 공격을 시작했고, 페르시아 함대는 스키아토스 갭을 통해 나타나 아르테미시온 반대편 해안, 아페타이에 정박했다.[1]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 함선 15척이 나포되었다.[33] 페르시아 함대는 폭풍 피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합군보다 우세했다.[1] 연합군은 철수를 고려했고,[34] 에우보이아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뇌물을 주어 연합 함대가 잔류하도록 했다.[1] 테미스토클레스는 에우리비아데스와 아데이만토스에게 뇌물을 주어 아르테미시온에 머물도록 했다.[1]

그날 늦게, 페르시아 함대에서 도망쳐 온 그리스인 스킬리아스는 페르시아군이 200척의 함선을 떼어 에우보이아 섬 바깥 해안을 돌아 연합 함대의 탈출로를 막으려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1][35] 페르시아군은 연합군을 덫에 가두려 했기 때문에 즉시 공격하지 않았다.[36] 연합군은 이 분견대를 만나기로 결정하고, 페르시아군에게 들키지 않도록 해 질 무렵 출발할 계획이었다.[37]

연합군은 페르시아 함대의 고립된 부분을 파괴할 기회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1][1] 헤로도토스는 연합군이 어디에서 분견대를 만날 계획이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에우보이아 해협으로 항해하여 페르시아군을 덫에 빠뜨리거나,[1] 아페타이에서 출발하는 분견대를 매복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1] 그들은 페르시아군에게 아르테미시온에 머물 계획임을 확신시키기 위해 시위하고,[38][1] 페르시아의 항해술과 전술을 평가하는 기회로 삼았다.[1] 연합군은 전면 교전을 피하기 위해 늦은 오후까지 기다렸고,[1] 이러한 결정들은 전투의 시작으로 이어졌다.[1]

2. 1. 페르시아 제국의 팽창



아테네에레트리아는 기원전 499년부터 494년까지 다리우스 1세가 이끌던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비교적 새로운 제국이었기에 정복된 민족들 사이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4] 다리우스는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1] 이오니아 반란은 제국의 통합을 위협했고, 다리우스는 반란에 관련된 자들, 특히 페르시아 제국에 속하지 않은 국가들을 처벌하겠다고 결심했다.[5][1] 또한, 다리우스는 분열된 고대 그리스 세계로 제국을 확장할 기회를 노렸다.[6]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원정대는 그리스로 가는 육로를 확보하기 위해 트라키아를 다시 정복했고,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만들었다.[7]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6세기 말부터 페르시아의 속국 또는 동맹국이었지만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491년, 다리우스는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에 사절을 보내 복종을 의미하는 '땅과 물'을 요구했다.[8]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들이 이에 응했지만, 아테네에서는 사절들이 재판을 받고 구덩이에 던져져 처형되었고, 스파르타에서는 우물에 던져졌다.[1][9] 이는 스파르타 역시 페르시아와 전쟁 상태에 돌입했음을 의미했다.[1]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는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 휘하의 수륙 양용 부대를 편성하여 낙소스를 공격하고, 키클라데스 제도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 부대는 에레트리아를 포위 공격하여 파괴했다.[10] 이후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마라톤 만에 상륙했지만,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군에게 크게 패배하여 페르시아군은 아시아로 철수했다.[11]

다리우스는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지만, 기원전 486년에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리스 원정이 연기되었다.[12] 다리우스는 이집트로 진군하던 중 사망했고, 페르시아의 왕위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다.[13]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신속하게 그리스 침공 준비를 재개했다.[14] 그는 헬레스폰트 해협에 다리를 건설하고 아토스 산 지협에 운하를 건설하는 등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1] 기원전 480년 초, 사르디스에서 소집된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는 두 개의 부교를 이용해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넜다.[16]

2. 2.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동맹

기원전 499년부터 기원전 494년까지 아테네에레트리아페르시아 제국다리우스 1세에 대항한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지만 실패했다.[4]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비교적 젊었고, 피정복 민족들 사이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1] 다리우스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고자 했으며,[5][1] 분열된 고대 그리스를 정복할 기회로 삼으려 했다.[6]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우스의 원정으로 트라키아를 재정복하고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만들었다.[7] 기원전 491년, 다리우스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사절을 보내 복종을 요구했으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사절을 죽임으로써 강경하게 대응했다.[1][9]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는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에게 군대를 주어 낙소스를 공격하고 키클라데스 제도를 점령하게 했다. 그 후 에레트리아를 파괴하고 마라톤에 상륙하여 아테네를 공격하려 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군에게 패배하여 아시아로 퇴각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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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는 그리스 정복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으나, 이집트의 반란으로 원정이 연기되었고, 그 와중에 사망했다.[12] 왕위는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고,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 침공 준비를 재개했다.[14] 헬레스폰트 해협에 다리를 건설하고 아토스 산 지협에 운하를 건설하는 등 대규모 준비를 마친 후,[1] 기원전 480년 초, 사르디스에서 출발한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는 유럽으로 진격했다.[16]

아테네는 기원전 480년대 중반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으며, 기원전 482년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지도하에 대규모 트리에레 함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17] 그러나 아테네는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싸울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의 동맹이 필요했다. 기원전 481년,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전역에 사절을 보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제외했다.[18] 이를 계기로 두 도시를 중심으로 동맹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481년 늦가을, 코린토스에서 도시 국가들의 회의가 열렸고,[19]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 동맹이 결성되었다.[20]

기원전 480년 봄, 코린토스에서 회의가 다시 열렸다. 테살리아 대표단은 템페 계곡에 병력을 집결시켜 크세르크세스의 진격을 막자고 제안했으나,[21]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의 경고로 후퇴했다.[22] 테미스토클레스는 테르모필레 협곡을 막고, 동시에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봉쇄하는 이중 전략을 제안했고, 회의는 이를 채택했다.[23]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은 코린토스 지협 방어 계획을 세웠고, 아테네의 여성과 아이들은 트로이젠으로 피난했다.[24]

페르시아 원정군의 침공 소식을 접한 그리스 측은 이스토모스에서 회의를 열고 육군은 테르모필레에, 해군은 에우보이아 섬 북단의 아르테미시온에 배치하여 요격하기로 결정했다. 테르모필레-아르테미시온 방어선은 돌파되면 에우보이아 섬이 고립되고 아티카 이북이 완전히 제압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3. 양측의 전력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0년 봄 도리스코스에 집결한 페르시아 함대의 상세한 규모를 기록했다.[90]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는 마그네시아 해안 근처에서 폭풍을 만나 함대의 1/3을 잃었다.[92] 헤로도토스의 계산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온에서 페르시아 함대는 약 800척 규모였다.[93]

도리스코스에 집결한 페르시아 함대 (기원전 480년 봄)[90]
지역선박 수
페니키아 군 (시리아 군 포함)300척[94]
이집트200척[90]
키프로스150척[95]
킬리키아100척[96]
팜필리아30척[90]
리키아 군50척[97]
도리스(소아시아)30척[98]
카리아군70척[90]
이오니아 군100척[99]
아이올리스 군60척[90]
에게해 도서 지역의 군17척[100]
합계1207척



일부 현대 학자들은 고대 자료의 일관성을 근거로 이 숫자를 수용한다.[101][102][103] 그러나 1,207척은 일리아드에 나오는 그리스 함대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며, 페르시아가 에게 해에 투입할 수 있었던 전선은 600척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90][104][105]

페르시아 제국군이 올림포스 산을 지나 해안을 따라 진격한다는 소식에 연합 함대는 북쪽의 아르테미시온 곶으로 이동했다. 7월 말이나 8월 초로 추정된다.[25] 연합군은 필요할 때 신속하게 출항할 수 있도록 곶에 배를 정박했다.[26] 스키아토스 섬에 정찰선 3척을 보내 페르시아 함대의 접근을 알렸으나,[27] 2주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시돈의 삼단노선 10척이 스키아토스 앞바다에 도착하자 연합 함대는 섬에서 불을 피워 알렸다.[1][28] 그러나 연합군 순찰선은 경계하지 못해 2척이 나포되고 1척은 좌초되었다.[1] 혼란 속에서 연합 함대는 아르테미시온 해협으로 출항했다가, 페르시아 함대가 도착하지 않자 칼키스로 항해했다.[1] 에우보이아 섬 높은 곳에 감시병을 남겨 페르시아 함선의 도착을 알리도록 했다.[1]

역사학자들은 연합군이 봉화 신호를 잘못 해석했거나, 신호병이 페르시아 함대가 스키아토스 섬 동쪽으로 항해한다고 믿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29][1] 페르시아 함대가 에우보이아 섬 동쪽으로 항해하면 아티카로 직행하여 연합 함대의 퇴각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1] 칼키스로의 후퇴는 연합군에게 탈출 기회를 제공했지만, 필요하면 아르테미시온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연합 함대는 칼키스에서 대기하며 페르시아 함대와의 조우에 대한 불안감으로 과잉 반응을 보였을 수 있다.[1]

약 10일 후,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에 도착했고, 칼키스에 있던 연합군은 연락선을 통해 소식을 접했다.[1]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는 나타나지 않았고, 테르모필레에서 첫날 공격도 없었다.[30] 다음 날, 페르시아 함대는 마그네시아 현과 스키아토스 섬 사이의 스키아토스 갭으로 향했으나, 여름 폭풍(‘헬레스폰터’)[1]을 만나 함선의 약 1/3이 파괴되었다.[1][31][32]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은 폭풍 기간 동안 공격을 하지 않았다.[1]

폭풍이 끝난 다음 날, 연합 함대는 테르모필레 육군을 보호하기 위해 아르테미시온으로 돌아왔다.[1] 다음 날, 페르시아 함대는 스키아토스 갭을 통해 나타나 아르테미시온 반대편 해안, 아페타이에 정박했다.[1] 페르시아 함선 15척이 연합군 전열에 돌입하여 나포되었다.[33] 폭풍 피해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함대는 여전히 연합군보다 거의 3:1로 우세했다.[1] 연합군은 전면 철수를 고려했고, 에우보이아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뇌물을 주어 잔류를 요청했다.[1] 테미스토클레스는 에우리비아데스와 아데이만토스에게 뇌물을 주어 아르테미시온에 머물도록 했다.[1]

페르시아 함대에서 도망쳐 온 그리스인 스킬리아스는 페르시아 함대 대부분이 수리 중인 동안, 200척의 함선이 에우보이아 섬 바깥 해안을 돌아 연합 함대의 탈출로를 막도록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1][35] 페르시아군은 연합군을 덫에 가두려 했고, 연합군은 이를 막기 위해 해 질 무렵 출발하여 페르시아 분견대를 만나기로 했다.[36][37]

연합군은 페르시아 함대의 고립된 부분을 파괴할 기회를 포착했을 가능성이 크다.[1] 연합군은 에우보이아 해협으로 항해하여 페르시아군을 유인하거나, 아페타이에서 출발하는 분견대를 매복 공격할 계획이었을 수 있다.[1] 페르시아군에게 아르테미시온에 머물 계획임을 확신시키기 위해 시위하고, 페르시아의 항해술과 전술을 평가하기 위해 늦은 오후까지 기다렸다가 전투를 시작했다.[38][1]

전략적으로 연합군은 테르모필레 육군의 측면을 보호하고 고립되지 않아야 했다.[1][58] 페르시아는 테르모필레나 아르테미시움 중 하나를 돌파하거나 우회해야 했다.[1][59][60] 아르테미시움 해협 우회는 에우보이아 섬 동쪽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이 더 쉬웠고, 그리스의 위치는 이를 감시하기 위해 선택되었을 수 있다.[1]

페르시아는 숫자와 항해술에서 우위를 점했다.[1] 당시 해군 전술은 충돌(삼단노선은 선수에 충각이 장착)이나 백병전이었다.[62] 페르시아인과 아시아 그리스인들은 ''디에클플로스''(적 함선 사이 틈새로 항해하여 측면 충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1] 연합군은 이에 대응하는 전술을 개발했다.[1]

헤로도토스는 연합군 함선이 더 무거워 기동성이 떨어졌다고 시사한다.[63] 무거움의 원인은 불확실하지만, 함선의 부피가 크거나, 완전 무장한 호플리테 해병의 무게 때문일 수 있다.[1] 연합군은 함선의 기동성이 떨어진다면 추가 해병을 탑승시켜 백병전을 주요 전술로 삼았을 것이다.[1]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함선을 침몰시키는 대신 나포했다.[1]

3. 1. 그리스 함대

그리스 측은 페르시아의 침공 소식을 듣고 이스토모스에서 회의를 열어 그리스 연합 함대를 에우보이아섬 북단의 아르테미시온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106]

그리스 함대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도시함선 수도시함선 수도시함선 수
아테네[106]127코린토스[90]40아이기나[90]18
칼키스[90]20메가라[90]20시키온[90]12
스파르타[90]10에피다우로스[90]8에레트리아[90]7
트로이젠[90]5스티라[90]2케아[90]2 (2)
오르니토스
로크리스[90]
(7)전체271 (9)[107]



아테네는 기원전 483년부터 아이기나와의 분쟁을 위해 대규모 함대를 건설해 왔는데, 이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페르시아와의 충돌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108][109] 아테네는 연합군의 지휘권을 요구했지만, 연합군의 단결을 위해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에게 양보했다.[110]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그리스 함대는 위 표와 같이 각 도시 국가에서 파견한 함선 271척과 펜테콘테르 9척으로 구성되었다.[54] 2일째에는 아테네의 원군 53척이 추가로 합류하였다.

3. 2. 페르시아 함대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0년 봄 도리스코스에 집결한 페르시아 함대의 상세한 규모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90]

페르시아 함대 구성
지역선박 수지역선박 수지역선박 수
페니키아시리아[41]300이집트[1]200키프로스[42]150
킬리키아[43]100이오니아[44]100폰토스[1]100
카리아[1]70아이올리스[1]60리키아[45]50
팜필리아[1]30소아시아 출신 도리아인[46]30키클라데스[47]17
총계1207



그러나 함대가 마그네시아 해안에서 폭풍에 휩쓸린 후, 함대의 약 3분의 1이 손실되었다.[31] 따라서 헤로도토스의 계산에 따르면, 페르시아 함대는 아르테미시온에서 약 800척의 삼단노선을 보유했을 것이다.[1]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 숫자를 받아들였는데, 특히 고대 자료들이 이 점에 대해 이례적으로 일관성을 보이기 때문이다.[48][49][50] 다른 저자들은 이 숫자를 거부하며, 1,207이라는 숫자는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그리스 함대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보고, 페르시아인들이 에게해에 600척 정도의 군함을 투입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1][51][52]

4. 전투의 경과

페르시아 전쟁의 일부인 아르테미시온 해전은 기원전 480년, 3일에 걸쳐 벌어졌다.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이스토모스 회의를 통해 육군은 테르모필레에서, 해군은 에우보이아섬 북단의 아르테미시온에서 방어하기로 결정했다.[39][40] 이 방어선은 에우리포스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에우보이아섬과 아티카 이북 지역을 방어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그리스 연합 함대는 테르메(현재 테살로니키)에 정박한 페르시아 함대(삼단노선 1,207척 포함, 총 3,000척 이상)를 요격해야 했다. 페르시아 해군은 테르메를 출발하여 10척의 쾌속선을 스키아토스에 파견, 그리스 선박 3척을 나포했다. 그리스 함대는 이 소식을 듣고 칼키스로 후퇴했다가, 페르시아 함대가 폭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아르테미시온으로 복귀했다.

아페타이에 정박한 페르시아 함대는 예상보다 규모가 커서 그리스군은 철수를 고려했다. 에우보이아섬 주민들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뇌물을 주며 개전을 요청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돈으로 그리스군 지휘관들을 설득하여 아르테미시온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온 해전의 연대기 (레이젠비와 홀랜드의 추정)[39][40]
날짜사건
−15페르시아군, 테르마 출발
c. -13페르시아 정찰 함대, 스키아토스 도착. 동맹군은 칼키스로 후퇴.
−4페르시아군, 테르모필레 도착. 페르시아 함대, 테르마 출발.
−3폭풍의 첫째 날.
−2폭풍의 둘째 날.
−1폭풍 종료. 동맹 함대, 아르테미시온으로 귀환.
1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의 첫 번째 공격. 페르시아 함대, 아르테미시온 도착. 페르시아 별동대, 에우보이아로 파견. 아르테미시온 해전의 첫 번째 교전.
2두 전투의 둘째 날.
3두 전투의 셋째 날. 테르모필레 후위 부대 포위되어 전멸.



3일 동안의 전투에서 그리스 함대는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분전하여 페르시아군과 대등하게 싸웠다. 그러나 피해가 누적되었고,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 육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 섬으로 철수했다.

4. 1. 1일차 전투

그리스의 삼단노선 스케치


에우보이아 동쪽 해안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재앙


에우보이아의 동쪽 해안, 아케메네스 함대의 상당 부분이 난파된 "할로우"


아페타이에 정박한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 함대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정면 공격 시 그리스 함대가 도주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200척의 함대를 에우보이아섬 바깥쪽으로 우회시켜 에우리포스 해협을 통해 그리스 함대를 협공하려는 전략을 세웠다.[64] 그러나 이 정보는 페르시아 측에 있던 그리스인에 의해 누설되었고, 그리스 함대는 한밤중에 출항하여 우회 부대를 먼저 격파하려 했다.[1] 하지만 우회 부대가 나타나지 않자, 다음 날 오후 그리스 해군은 페르시아 본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67]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함선이 소규모임을 알고 포위 대형을 갖췄지만, 그리스 함선은 선수(船首)를 활용한 전술로 분전하여 페르시아 함선 30척을 나포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1] 그리스 함대는 "선수를 야만인들을 향하게 하고, [그리고] 선미를 가운데로 모으는" 전술을 사용했는데,[65] 이는 뱃머리가 밖을 향하는 원형 대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66] 투키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두 번이나 이와 비슷한 대형을 취했다고 기록했다.[1]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라젠비는 250척의 배로 원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리스 함대가 초승달 모양에 가깝게 대형을 갖춰 페르시아 배의 우회를 막았을 가능성을 제시했다.[1] 이러한 기동은 우수한 페르시아의 항해술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

미리 정해진 신호에 따라 대형을 갖춘 그리스 함선들은 두 번째 신호에 페르시아 배에 돌입하여 혼란에 빠뜨렸다.[1] 이 교전에서 페르시아는 30척의 배를 잃었고, 레姆노스의 안티도루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배가 그리스 측으로 귀순하기도 했다.[1] 밤이 되면서 전투는 종료되었고, 그리스 함대는 예상보다 좋은 결과를 얻었다.[1]

밤중에 폭풍(아마도 동남풍을 동반한 천둥 번개)이 몰아쳐,[1] 그리스 함대는 에우보이아 바깥으로 파견된 페르시아 분견대에 대응하기 위해 남쪽으로 출발하지 못했다.[1] 그러나 이 폭풍은 페르시아 함대 분견대를 강타하여 에우보이아의 '할로우' 해안으로 몰아넣었고, 이로 인해 페르시아 함대의 상당수가 난파되었다.[68]

4. 2. 2일차 전투

둘째 날, 아테네에서 53척의 배가 증원군으로 합류했고, 동시에 에우보이아를 우회하던 페르시아 함대의 우회 부대가 전멸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1] 이에 사기가 오른 그리스 함대는 킬리키아 선단을 공격하여 격파했다.[1] 이 킬리키아 선단은 에우보이아를 돌아오다 난파된 부대의 생존자이거나, 외딴 항구에 정박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한편, 페르시아 함대는 전날의 폭풍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 데 집중했다.

4. 3. 3일차 전투

3일째 전투는 페르시아 함대가 초승달 모양의 진형을 구축하여 그리스 함대를 포위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69][70] 양측 모두 과감하게 전투에 임하면서 격전이 벌어졌고,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1]

페르시아 함대가 집결하는 것을 본 그리스 연합군은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최대한 막으려 시도하며 페르시아의 공격을 기다렸다.[1] 페르시아는 함선을 반원 형태로 정렬하여 연합군 함대를 포위하려 했고, 이에 연합군은 노를 저어 전진하며 전투에 돌입했다.[70] 전투는 하루 종일 격렬하게 벌어졌고, 연합군은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1] 해 질 녘에 양측 함대가 교전을 중단했을 때, 양측 모두 거의 같은 손실을 입었다.[1]

그러나 소규모의 연합군 함대는 이러한 손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1] 아테네 함대(함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절반이 손상되거나 손실되었다.[71]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테네인들은 연합군 측에서 최고의 전사였다. 아케메네스 왕조 측에서는 그리스 중장보병에 필적하는 중무장을 한 이집트인들이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두어 그리스 함선 5척을 격파했다.[72]

ἐν ταύτῃ δὲ τῇ ναυμαχίῃ ἀριστεῦσι Αἰγυπτίων οἱ περὶ θάλασσαν, οἵτινες ἄλλα τε μεγάλα ἔργα ἀπεδείξαντο καὶ νέας Ἑλληνίδας αὐτοῖσι ἀνδράσι εἷλον πέντε.|크세르크세스 군대의 그 해상전에서 이집트인들이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들은 다른 많은 위대한 무훈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함선 5척과 그 선원들을 포획했다. 그날 그리스인 중에서는 아테네인들이 가장 뛰어났고, 아테네인 중에서는 클리니아스 알키비아데스의 아들이 돋보였다. 그는 사비로 200명의 병력과 자신의 함선을 전쟁에 투입했다.grc



아르테미시온으로 돌아온 연합군은 그들의 손실이 너무 커서 아마도 하루 더 전선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1] 따라서 그들은 테르모필레로부터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아르테미시온에서 철수할지 여부를 논의했다.[1] 테미스토클레스는 에우보이아인들의 가축을 도살하고 훈제하도록 명령하여 페르시아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했다.[74] 아브로니쿠스는 테르모필레에서 연락선으로 도착하여 연합군에게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연합군 후위 부대가 궤멸되었음을 알렸다.[75]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지키는 것이 이제 전략적 목적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그들의 손실을 감안하여, 연합군은 즉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1]

5. 전투의 영향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패배하면서, 그리스는 전략적 요충지인 에우리포스 해협을 페르시아에게 빼앗기고 아티카 북쪽 지역을 내주게 되었다. 페르시아군은 진군하면서 여러 도시들을 파괴했고,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끄는 주력군은 아테네를, 별동대는 델포이를 목표로 삼았다.[76]

그리스 함대는 아르테미시온에서 철수한 뒤 함대 집결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스파르타코린토스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반도 도시들은 코린토스 지협 방어를 주장하며 이스토모스 집결을 원했지만, 아테네는 시민들의 피난을 위해 살라미스 집결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함대는 살라미스에 집결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살라미스 해전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5. 1. 전략적 영향

테르모필레-아르테미시온 방어선이 돌파되면서 그리스 측은 전략적 요충지인 에우리포스 해협을 페르시아에게 내주었고, 아티카 이북 지역은 완전히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76] 페르시아 원정군은 진격로에 있는 폴리스들을 파괴하며 진군했고,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끄는 주력 부대는 아티카를 침공하여 아테네로 향했다. 별동대는 파르나소스 산을 우회하여 델포이로 진격했다.[76]

그리스 함대는 아르테미시온에서 철수한 후 함대 집결 장소를 논의했다. 스파르타, 코린토스펠로폰네소스반도의 폴리스들은 코린토스 지협 방어선 구축을 주장하며 이스토모스 집결을 제안했지만, 아테네는 시민들의 피난을 위해 살라미스 집결을 강력히 요청했다. 결국 함대는 살라미스에 집결하기로 결정되었고, 이는 살라미스 해전의 배경이 되었다.

5. 2. 전술적 교훈

비록 아르테미시온 해전은 결정적인 승패를 가르지 못했지만, 그리스 함대는 이 해전을 통해 귀중한 전술적 경험을 얻었다.[1] 특히,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함대를 상대로 효과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방법을 익혔다.

그리스 함대는 좁은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포위 기동을 저지하고, 근접전과 충파 전술을 활용하여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 아테네 함대는 연합군 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이집트 중장보병은 페르시아군 측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쳐 그리스 함선 5척을 격파하기도 했다.[72]

Ἡροδότου|헤로도토스grc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크세르크세스 군대의 그 해상전에서 이집트인들이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들은 다른 많은 위대한 무훈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함선 5척과 그 선원들을 포획했다. 그날 그리스인 중에서는 아테네인들이 가장 뛰어났고, 아테네인 중에서는 클리니아스 알키비아데스의 아들이 돋보였다. 그는 사비로 200명의 병력과 자신의 함선을 전쟁에 투입했다.[73]

이러한 경험은 훗날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함대가 승리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르테미시온 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는 전략을 세웠고, 좁은 해협에서의 전투를 통해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페르시아 함대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8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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