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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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1826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소설가이자 풍자 작가로,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풍자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농노제, 부패, 관료주의, 지식인의 기회주의 등을 비판하며, 대표작으로 《어느 도시의 역사》, 《골로블료프 가문》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로 여러 차례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며, 막심 고리키, 블라디미르 레닌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1826년 러시아 제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부모의 영지에서 농노제의 가혹한 현실을 목격하며 성장했다.[1][6] 이러한 경험은 그의 문학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푸시킨의 모교로 유명한 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움에서 교육받으며 벨린스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졸업 후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6] 젊은 시절 페트라셰프스키의 사회주의 서클에 참여하기도 했다.[14]
2. 생애
1848년, 잡지 『조국의 기록』(Отечественные записки|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ru)에 발표한 소설 『얽힌 사건』(Запутанное дело|자푸탄노예 델로ru)이 1848년 프랑스 혁명에 민감해진 당국에 의해 문제시되어 뱌트카로 유배되었다. 이 유배는 결과적으로 그가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게 해주었다. 뱌트카에서의 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그는 지방 행정 관리로 일하며 러시아 관료 사회와 민중의 삶을 깊이 관찰할 기회를 얻었고, 이는 훗날 그의 대표작들의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니콜라이 1세 사후 1856년 유배에서 풀려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유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현의 기록』(Губернские очерки|구베른스키예 오체르키ru)을 'N. 셰드린'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체르니셰프스키, 도브롤류보프, 셰프첸코 등 당대 주요 비평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고골의 뒤를 잇는 작가로 평가받았다.[16]
이후 랴잔, 트베리 등지에서 부지사로 근무하며 1861년 농노 해방 개혁을 지지했으나, 잦은 마찰 끝에 1862년 사임했다.[10] 1863년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잡지 『현대인』(Современник|소브레멘니크ru)에 합류했으나, 내부 갈등과 재정 문제로 1864년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10]
1868년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네크라소프와 함께 『조국의 기록』(Отечественные записки|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ru) 편집을 맡아 1884년 폐간까지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러시아 사회와 관료주의, 지주 계급 등을 날카롭게 풍자한 『어느 도시의 역사』(1870), 『폼파두르와 폼파두레스』(Помпадуры и помпадурши|폼파두리 이 폼파두르시ru, 1863–1874), 『골로블료프 가문』(1880) 등 그의 대표작들을 발표하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도하는 데에도 힘썼다.
1884년 『조국의 기록』이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후에도 그는 《베스트니크 예브로피》 등 다른 지면을 통해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말년에는 우화 형식의 《공정한 연령의 어린이를 위한 동화》(Сказки для детей изрядного возраста|스카스키 들랴 데테이 이즈랴드노고 보즈라스타ru, 1869–1886)와 자전적 소설 《포셰호니의 옛 시절》(Пошехонская старина|포셰혼스카야 스타리나ru, 1887–1889) 등을 집필하며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중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그는 188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볼코보 묘지에 안장되었다.[6][23]
2. 1. 어린 시절과 교육
미하일 살티코프는 1826년 1월 27일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주 탈돔스키 구의 스파스-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예브그라프 바실리에비치 살티코프(1776–1851), 어머니는 올가 미하일로브나 살티코바(결혼 전 성씨: 자벨리나, 1801–74)였으며, 5명의 형제와 3명의 자매가 있는 대가족의 일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모로조프 보야르 가문의 분파에서 시작된 고대 살티코프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1] 이 가문은 14~15세기에 살았던 미하일 이그나티예비치 모로조프(별명: 살티크)에 의해 창시되었으며,[2][3] 폴란드의 솔티크 문장과도 관련이 있었다.[4] 살티코프 가문은 러시아 차르 프라스코비아 살티코바와 그녀의 딸인 러시아의 여제 안나 이오안노브나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살티코프의 어머니는 부유한 모스크바 상인 미하일 페트로비치 자벨린의 상속녀였다. 그녀의 조상은 상업 농민[5] 출신이었으나, 1812년 군대에 대한 기여로 세습 귀족 지위를 얻었다.[6][7] 미하일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50세, 어머니는 25세였다.[8] 그는 어린 시절을 트베리주와 야로슬라블주 경계에 있는 포셰호니예 지역의 부모 소유 대저택 스파스스코예에서 보냈다.[9]
살티코프는 훗날 자신의 소설 ''포셰호니예의 옛 시절'' 등장인물을 통해 어린 시절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린 시절과 십 대 시절에 나는 농노제를 최악의 형태로 목격했다. 그것은 사회 생활의 모든 계층...을 무권리의 분위기로 타락시켰으며, 속임수와 책략이 일상이었고, 언제든지 짓밟히고 파괴될 것이라는 만연한 두려움이 있었다."[6] 그의 가족 생활 역시 순탄치 않았다. 독재적인 어머니는 약하고 종교적인 아버지를 지배했으며, 하인들과 자녀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러한 가정 분위기는 훗날 그의 소설 ''골로블료프 가문''에 반영되었고, "합법화된 노예 제도가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이라는 주제는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주요 모티프가 되었다. 그럼에도 어머니 올가 미하일로브나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아꼈다. 살티코프는 어린 시절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꼈으며, 자연과 격리된 환경에서 자란 것을 후회했다고 회상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자연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10]
미하일의 초기 교육은 체계적이지 않았지만, 그는 매우 총명하여 6살 때 이미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농노 신분의 화가 파벨 소콜로프와 지역 성직자에게 러시아어 읽고 쓰는 법을 배웠으며, 열렬한 독서가였다. 특히 8세 때 읽은 복음서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6] 어린 시절 친구로는 이웃 지주의 아들이자 훗날 문학가 및 잡지 편집자가 된 세르게이 유리에프가 있었다.[6] 1834년 누나 나데즈다가 모스크바 예카테린스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녀의 친구이자 가정교사인 아브도티야 바실리예프스카야가 미하일의 교육을 담당했다. 이 외에도 지역 성직자 이반 바실리에비치(라틴어 교육)와 학생 마트베이 살민이 그의 가정교사였다.[6]
10세에 살티코프는 모스크바 귀족 자제 학교(드보랸스키 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1838년까지 다녔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움에 입학하여 6년간 수학했다. 훗날 외무부 장관이 된 알렉세이 로바노프-로스토프스키 공작이 그의 동급생이었다. 살티코프는 리체움의 교육 수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가르쳐진 정보는 부족하고, 산발적이며, 거의 의미가 없었다... 교육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특권의 일부였고, 삶의 경계를 긋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11]
리체움 재학 중 살티코프는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바이런과 하이네의 작품을 번역했다. 당시 리체움에는 각 학년마다 푸시킨의 후계자를 지목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살티코프가 그중 한 명으로 꼽혔다. 그의 첫 시 '리라'는 푸시킨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1841년 잡지 ''비블리오테카 들랴 치테니야''에 실렸다. 이후 1844년부터 1845년까지 그의 시 8편이 잡지 ''소브레메니크''에 게재되었다. 이 시기 그는 미하일 야지코프의 문학 서클에 참여했으며, 그곳에서 비사리온 벨린스키를 만나 그의 글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6]
1844년 리체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살티코프는 국방부 서기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진학을 원했던 그는 이 결과에 실망했다. 같은 해 그는 ''오테체스벤니예 자피스키''와 ''소브레메니크''에 참여하여 아동 문학과 교과서에 대한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비평은 날카로웠으며 벨린스키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12] 이 무렵 살티코프는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그는 훗날 "벨린스키의 기사에 의해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서구주의자의 진영으로 흘러갔지만... 생시몽, 푸리에... 그리고 특히 조르주 상드에 본능적으로 이끌렸다"고 회상했다.[13] 그는 문학 평론가 발레리안 마이코프 및 경제학자 블라디미르 밀류틴과 교류했으며, 페트라셰프스키 서클과 가까워졌다. 살티코프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를 "사랑하고 잊을 수 없는 친구이자 스승"이라고 부르며 당시를 회상했다.[14]
2. 2. 관료 생활과 초기 문학 활동
1847년 살티코프는 첫 소설 『모순』(필명 M.네파노프)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 작품 제목은 고귀한 이상과 냉혹한 현실 사이의 대조라는 소설의 핵심 주제를 나타낸다. 이듬해 발표한 사회 소설 『복잡한 사건』(1848)은 고골의 영향을 받아 사회 부조리와 개인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현실을 다루었다. 이 소설은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로부터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진심 어린 공감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인간적인 감정과 씩씩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호평을 받았고,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는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신세대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책"이라고 평가했다. 『모순』 출판은 1848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제정 러시아 당국의 과민 반응과 맞물려, 살티코프가 뱌트카로 유배되는 결과를 낳았다. 1848년 4월 26일,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직접 그의 체포 및 추방 명령에 서명했다.
유배 초기 살티코프는 주로 공식 문서를 베끼는 일을 했다. 이후 뱌트카 주지사의 특별 사절로 임명되어 싸움, 사소한 뇌물 수수, 횡령, 경찰 비행 등과 관련된 조사를 담당했다. 살티코프는 '뱌트카의 포로 생활'이라 부른 이 유배지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번번이 "시기상조"라는 답변만 돌아왔고, 남은 생을 그곳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는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 머리카락이 쭈뼛거린다"고 토로했다.[15] 하지만 지역 엘리트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했으며, 부주지사 볼틴을 포함한 여러 명망가의 집에서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볼틴의 딸 엘리자베타 아폴로노브나는 훗날 살티코프의 아내가 되었다.[10]
뱌트카 체류 중 살티코프는 여성 교육 개선에 관심을 가져, 당시 부족했던 역사 교과서를 직접 집필하기도 했다. 『러시아 약사』라는 제목의 이 간결한 교재는 휴가 중 작업하여 뱌트카로 보내 출판을 시도했다.[10] 1848년 페트라셰프스키 서클 구성원들이 대거 체포되자, 살티코프도 잠시 수도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해를 끼칠 의도가 없음'을 해명하고 무사히 뱌트카로 돌아갔다. 1850년 여름, 그는 지역 정부 고문이 되어 공식 업무로 구교도 관련 문제를 포함한 여러 조사를 위해 뱌트카, 페름, 카잔, 니즈니노브고로드, 야로슬라블 등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같은 해 뱌트카 농업 전시회 조직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풍자 문학에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1855년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면서 러시아 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같은 해 11월, 살티코프는 마침내 뱌트카를 떠나도록 허가받았다.[10] 1856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2월 내무성에 배속되었다. 이 시기 그는 가상의 도시 크루토고르스크를 배경으로 러시아 농노제를 비판한 단편과 에세이 모음인 ''지방 스케치''(Provincial Sketches)를 완성했다. 이반 투르게네프는 처음 원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조언과 여전한 검열 때문에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소브레멘니크''에 이 작품 게재를 거절했다. 그러나 1856년 8월, 미하일 카트코프가 발행하던 ''러시아 메신저''가 'N.셰드린'이라는 필명으로 ''지방 스케치'' 연재를 시작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농노제 반대 정서와 지방 관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긴 이 작품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며 살티코프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많은 비평가와 동료 작가들은 그를 고골의 계승자로 평가했다. 타라스 셰브첸코는 일기에 "경외감을 느낀다... 아, 불멸의 고골이여, 당신은 이제 당신의 추종자로서 이런 천재의 등장을 보며 행복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16] 1857년, ''소브레멘니크''의 도브롤류보프와 체르니셰프스키도 뒤늦게나마 살티코프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작품이 "제국의 기초를 훼손하려는 목표를 지녔다"고 평했다.
1857년 ''러시아 메신저''는 ''지방 스케치''와 유사한 분위기의 희곡 ''파주힌의 죽음''(Pazukhin's Death)을 출판했으나, "등장인물들이 우리 사회의 완전한 도덕적 타락을 증명하려 한다"는 검열관의 판단으로 공연은 금지되었다. 출세주의와 관료 사회의 부도덕을 다룬 또 다른 희곡 ''그림자''(Shadows, 1862–1865)는 1914년에야 발견되어 출판 및 초연되었다.[17]
일부 급진주의자들의 기대와 달리, 살티코프는 '제국의 기초를 훼손'할 의도는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복귀 후 그는 오히려 행정 관료로서 승진했다. 그는 "모든 정직한 사람들이 농노제 옹호자들을 물리치도록 정부를 도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문학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가 공직에 머무른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1856년 뱌트카 부주지사의 딸 엘리자베타 볼티나와 결혼하면서 어머니의 재정 지원이 줄어든 반면 생활비는 증가했기 때문이다. 1858년까지 내무성에서 근무한 그는 러시아 경찰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한 후 랴잔 부주지사로 임명되어 "부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58년 4월 15일, 그는 매우 소탈하게 일반 마차를 타고 랴잔에 도착하여 이미 '지방 스케치' 작가로 알려진 지역 사회를 놀라게 했다. 그는 작은 집에 머물며 하급 관리들의 문법 교육에 힘쓰는 등 실무에 집중했다.[10] 1862년에는 트베리로 전근되어 종종 주지사 대행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에서 그는 1861년 농노 해방 개혁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농민에게 잔혹 행위를 한 지주들을 고소하기도 했다.[10]
이 시기에도 문학 활동은 계속되어, 1860-1862년 사이에는 주로 ''브레미야''(Vremya) 잡지에 여러 스케치와 단편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이후 ''무죄의 이야기''(Innocent Stories, 1857–1863)와 ''산문 풍자''(Satires In Prose, 1859–1862)에 수록되었다. 특히 ''산문 풍자''에서는 억압받는 민중의 무관심에 대한 작가의 분노가 드러나는데, 그는 "단지 굶어 죽지 않으려는 생각에만 몰두할 때 자기 계발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18] 같은 기간 농지 개혁에 관한 다수의 글을 ''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등에 기고하며 언론인 블라디미르 르제프스키 등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10] 살티코프는 1862년 관직에서 사임했다.
2. 3. 지방 관리 생활과 '지방 스케치'
1848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제정 러시아 당국의 과민 반응 속에서, 초기 소설 『모순』과 『복잡한 사건』 발표 후 니콜라이 1세 차르의 명령으로 1848년 4월 26일 뱌트카로 유배되었다. 이는 그의 본격적인 지방 관리 생활의 시작이었다.
유배 초기에는 주로 공문서 필사 작업을 했으나, 이후 뱌트카 주지사의 특별 사절로 임명되어 싸움, 뇌물 수수, 횡령 등 경찰의 비위 행위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 시기를 '뱌트카 포로 생활'이라 부르며 벗어나려 애썼지만, 모든 요청은 번번이 거절당했다.[15] 그러나 지역 유력 인사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했으며, 부지사 볼틴의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고, 그의 딸 엘리자베타 아폴로노브나와 후에 결혼하게 되었다.[10] 뱌트카에 머무는 동안 여성 교육 개선에 관심을 가져 직접 『러시아 약사』라는 역사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10] 1848년 페트라셰프스키 서클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잠시 수도로 소환되었으나, 혐의를 벗고 뱌트카로 돌아왔다. 1850년에는 지역 정부 고문이 되어 구교도 관련 문제 등 공식 업무로 뱌트카, 페름, 카잔, 니즈니노브고로드, 야로슬라블 등 여러 지방을 순회했다. 또한 대규모 농업 전시회를 조직하는 등,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의 풍자 문학에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1855년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고 정세가 변하면서 마침내 뱌트카를 떠날 허가를 받아[10] 1856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내무성에 배속되었다. 이 무렵 그는 가상의 도시 크루토고르스크를 배경으로 러시아 농노제의 실상을 고발하는 단편과 에세이 모음인 ''지방 스케치''(Губернские очерки|구베른스키예 오체르키ru)를 집필했다. 처음 원고를 본 이반 투르게네프는 큰 감명을 받지 못했고,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검열을 우려해 『소브레멘니크』 게재를 거절했다. 그러나 1856년 8월, 미하일 카트코프가 발행하던 『러시아 통보』(Русский вестник|루스키 베스트니크ru)가 'N. 셰드린'이라는 필명으로 이 작품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반(反)농노제 정서와 지방 관료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긴 이 작품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며 살티코프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많은 비평가들이 그를 니콜라이 고골의 계승자로 평가했으며, 타라스 셰브첸코는 일기에 "불멸의 고골이여, 당신의 뒤를 잇는 이런 천재의 등장을 보며 행복할 것"이라고 적었다.[16] 뒤늦게 『소브레멘니크』도 반응하여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는 살티코프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작품이 "제국의 기초를 흔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평했다. 1857년 『러시아 통보』는 ''지방 스케치''와 유사한 분위기의 희곡 ''파주힌의 죽음''(Смерть Пазухина|스메르티 파주히나ru)을 출판했으나, "등장인물들이 사회의 완전한 도덕적 타락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되었다.[17]
''지방 스케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살티코프는 관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정직한 사람들이 농노제 옹호자들을 물리치는 데 정부를 도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1856년 엘리자베타 볼티나와 결혼하고 경제적 필요성이 커진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했다.[10] 1858년 랴잔의 부지사로 임명되어 "부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을 얻었고, 하급 관리들의 문법 교육에 힘쓰는 등 특유의 방식으로 업무를 처리했다.[10] 1862년에는 트베리로 전근되어 부지사 및 주지사 대행으로 일하며 1861년 농노 해방 개혁을 적극 지지하고 농민에게 잔혹 행위를 한 지주들을 고소하기도 했다.[10] 이 시기에도 문학 활동을 병행하여 『무죄의 이야기』(1857–1863)와 『산문 풍자』(1859–1862)에 포함될 작품들을 발표했다.
1862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모스크바에서 잡지 창간을 시도했으나 허가받지 못했다.[10] 18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네크라소프의 『소브레멘니크』에 합류하여 활동했지만[10], 잡지 내외의 논쟁과[19] 재정적 어려움[10]으로 인해 1864년 11월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펜자, 툴라, 랴잔의 재무부 책임자로 일했다. 재무부 장관 미하일 라이테른의 지원 아래 다소 공격적인 재정 정책을 펼치면서[10] 여러 지역 행정가들과 마찰을 빚었다. 비록 부하들에게는 엄격하지만 공정한 상사로 평가받았으나[10], 그의 비판적인 태도와 잦은 충돌은 결국 문제가 되었다. 헌병대 총장 슈발로프 백작은 살티코프가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사상을 퍼뜨리고 정부 질서를 해친다는 보고를 받았고, 결국 1868년 7월 14일 살티코프는 최종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훗날 그는 관료로서의 경험이 자신의 문학, 특히 러시아 관료 사회를 꿰뚫어 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을 인정했다.[20]
2. 4. '소브레메니크'와 '오테체스벤니예 자피스키' 활동

1862년 살티코프는 정부에서 퇴직하고 자신의 잡지를 창간할 목적으로 모스크바로 갔으나, 교육부 특별위원회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10] 1863년 초, 그는 네크라소프가 이끌던 ''소브레멘니크'' Современник|소브레멘니크rus (현대인)에 합류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당시 ''소브레멘니크''는 도브로류보프의 사망과 체르니셰프스키의 체포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살티코프는 이 잡지에서 ''폼파두르'' 연작의 첫 스케치를 게재했으며, N.셰드린, K.투린, 미하일 즈미예프-믈라덴체프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풍자 부록인 ''스비스토크''(휘파람)에도 참여했다.[10]
그는 "우리 사회 생활"(1863–1864)이라는 일련의 기사를 통해 "러시아 허무주의의 새로운 경향"을 검토했는데, 이는 급진적인 ''루스스코예 슬로보'' Русское слово|루스코예 슬로보rus (러시아의 말)와 갈등을 일으켰다. 살티코프는 러시아 지식인들이 자연과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피사레프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이에 피사레프는 ''루스스코예 슬로보''에 "무고한 유머의 꽃"이라는 기사를 게재하며 살티코프가 피상적인 웃음만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살티코프는 이에 대해 고립주의와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며 응수했다. 이러한 논쟁은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둘러싼 열띤 논쟁과 맞물려,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러시아 허무주의의 분열(라콜)"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19]
또한 살티코프는 도스토예프스키 형제의 잡지 ''그라즈다닌'' Гражданин|그라즈다닌rus (시민)과도 대립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브로류보프의 죽음과 체르니셰프스키의 투옥 이후 러시아 급진주의 운동이 생명력을 잃고 교조적으로 변했다고 주장하자, 살티코프는 그와 그의 동료 포치벤니크들을 '반동주의자'로 규정하며 비판했다. 결국, 막심 안토노비치와의 갈등(그리고리 엘리세프의 지지를 받음)으로 인해 살티코프는 ''소브레멘니크''를 떠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쓴 일부 이야기와 스케치는 나중에 그의 저서(''무고한 이야기'', ''시대의 징표'', ''폼파두르'')에 포함되었다.
''소브레멘니크''에서의 낮은 급여 때문에 살티코프는 부업을 찾아야 했고, 네크라소프와 자주 다투며 문학을 그만두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브도탸 파나예바는 회고록에서 당시 살티코프의 기분이 어두웠으며,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서 벗어나려는 듯 목을 경련적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고 언급했다.[10]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살티코프는 결국 1864년 11월 정부로 복귀하여 펜자의 재무부 부서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툴라, 랴잔 등지에서 근무하며 재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보수적인 지방 행정 관리들과 마찰을 빚었다. 슈발로프 백작 등 고위 관료들은 살티코프가 고위 공무원으로서 부적절한 사상을 퍼뜨리고 지방 정부와 갈등을 일으킨다고 지적했고, 결국 1868년 7월 14일 그는 다시 공직에서 물러났다.
1866년 7월 1일 ''소브레멘니크''가 폐간된 후, 네크라소프는 출판인 안드레이 크라예프스키로부터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 Отечественные записки|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rus (조국의 기록)를 임대했다. 1868년 9월, 살티코프는 개편된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에 저널리즘 부서 책임자로 합류했다. 1874년 건강 문제로 잠시 해외 요양을 떠났을 때, 네크라소프는 파벨 안넨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살티코프의 공백을 아쉬워하며 그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살티코프 자신도 1884년 안넨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것은 자신의 얼굴을 가진 유일한 잡지였습니다… 가장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마치 집처럼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네크라소프와 함께 잡지를 이끌며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젊은 작가들을 지도했다.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 시절 살티코프는 중요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869년 출판된 ''시대의 징후''와 ''지방에 관한 편지''는 개혁의 실패와 농민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러시아의 현실을 비판했다. 그는 "쇠창살은 무너졌지만 러시아의 심장은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 농노제는 폐지되었지만 지주들은 기뻐했다"고 썼다.
1870년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느 도시의 역사'' История одного города|이스토리야 오드노고 고로다rus가 출판되었다. 이 소설은 가상의 도시 '글루포프'(바보들의 도시)를 배경으로, 무능하고 폭압적인 통치자들 아래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그린 우화적인 연대기이다. 이는 러시아 제국의 관료주의적 병폐, 억압, 민중의 무관심 등을 풍자한 것으로 해석되어 큰 논란을 일으켰다.[21] 알렉세이 수보린과 같은 비평가들은 작가가 러시아 역사와 국민을 모욕했다고 비난했지만, 살티코프는 특정 시대 상황을 비판한 것이지 국가 전체를 조롱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이와 연관된 ''폼파두르와 폼파두레스'' Помпадуры и помпадурши|폼파두리 이 폼파두르시rus (1863–1874) 연작은 현실의 삽화를 통해 환상적인 연대기를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22]
1873년에는 ''타슈켄트인 클리크'' Господа Ташкентцы|고스포다 타슈켄치rus가 출판되었는데, 이는 제국 변방에서 민중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행정관들을 풍자하며('타슈켄트인'은 셰드린이 만든 용어), 우익 인사들을 비판하는 사회 소설의 새로운 시도였다. 1877년에는 ''절제와 정확성의 영역에서''를 통해 폰비진, 그리보예도프, 고골 등 고전 작가들의 인물들을 당대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는 풍자적인 스케치를 선보였다.
1884년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가 정부에 의해 폐간된 후에도 살티코프는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동화 형식을 빌려 경찰 국가, 언론인,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 등을 풍자했으며, 만년에는 중병에 시달리면서도 죽을 때까지 집필을 계속했다.
2. 5. 만년
1884년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의 폐간은 살티코프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는 "독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겼고, 이 고통은 다른 어떤 고통보다 강하다"고 불평했다.[10] 코롤렌코는 1889년에 "러시아 언론 전체가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의 폐쇄로 고통을 받았다… 활기찬 조직이 있었던 곳에 이제 빈 공간의 심연이 있다. 그리고 셰드린의 삶은 아마도 이 '제거'로 인해 수년간 단축되었을 것이다"라고 썼다.[30]
폐간 이후 살티코프셰드린의 마지막 작품들은 《베스트니크 예브로피》와 《루스스키예 베도모스티》에 게재되었다. 이 시기 작품에는 풍자적인 우화와 동화 모음집인 《공정한 연령의 어린이를 위한 동화》(Сказки для детей изрядного возрастаrus, 흔히 《우화》로 알려짐)와 일상적인 공포에 의해 파괴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스케치 모음집 《삶의 작은 것들》(Мелочи жизниrus, 1881–1887)이 포함된다. 그는 또한 동화 형식을 빌려 경찰 국가, 언론인,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 등을 풍자했다.
살티코프의 마지막 출판물은 1887년부터 1889년까지 《베스트니크 예브로피》에 게재된 반자전적 소설 《포셰호니의 옛 시절》(Пошехонская старинаrus)이었다.[23] 만년에는 중병에 시달리면서도 죽을 때까지 집필을 계속했다. 그는 《잊혀진 단어》(Забытые словаrus)라는 또 다른 작품을 계획하며 죽기 얼마 전 니콜라이 미하일롭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시다시피, 러시아어에는 명예, 조국, 인류와 같은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썼지만, 시작하지는 못했다.[24]
미하일 예브그래포비치 살티코프셰드린은 뇌졸중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마지막 소원에 따라 볼코보 묘지에 투르게네프 옆에 안장되었다.[6]
3. 주요 작품 및 평가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풍자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작품들은 당대 러시아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특히 농노제와 그 폐해, 관료주의의 병폐, 지배층의 위선과 탐욕, 민중의 무기력함 등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러시아 제국의 현실을 우화적으로 그린 《어느 도시의 역사》와 몰락하는 귀족 가문의 도덕적 타락을 그린 《골로블료프 가문》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문학은 후대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미하일 불가코프 역시 살티코프의 영향을 받은 작가 중 하나였다.
살티코프셰드린의 작품과 사상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그의 문학적 성과와 한계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3. 1. 주요 작품
살티코프는 1847년 첫 소설 『모순』(필명 M.네파노프)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 작품은 고귀한 이상과 현실의 비참함 사이의 대조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이듬해 발표한 『복잡한 사건』(1848)은 사회 소설로, 사회의 부조리와 개인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현실을 그렸다. 이 작품은 고골의 영향을 보여주며,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로부터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진심 어린 공감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인간적인 감정과 씩씩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호평을 받았다.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역시 이 소설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신세대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책"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모순』 출판 이후 1848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과민 반응 속에서 살티코프는 뱌트카로 유배되었다.
뱌트카 유배 시절, 그는 관리로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조사를 수행했는데,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의 풍자 문학에 귀중한 소재가 되었다. 또한 당시 러시아에 제대로 된 역사 교과서가 없다는 생각에 직접 『러시아 약사』라는 간결한 역사서를 집필하기도 했다.[10]
1868년, 살티코프는 니콜라이 네크라소프가 운영하던 잡지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에 합류하여 저널리즘 부서를 이끌었다. 이 시기 발표된 ''시대의 징후''와 ''지방에 관한 편지''(1869)는 농노 해방 이후에도 러시아 사회의 본질적인 변화가 없음을 지적하며, 개혁의 한계를 비판했다.
1870년 발표된 ''어느 도시의 역사''(История одного городаrus)는 그의 대표적인 풍자 소설이다. 가상의 도시 '글루포프(바보들의 도시)'를 배경으로 무능하고 폭압적인 통치자들과 그 아래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모습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작품은 만성적인 행정 부실, 억압적인 통치, 그리고 민중의 무관심이라는 러시아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다루었다.[21] 소설의 파격적인 내용과 결말은 급진적인 정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해석되기도 했으며, 일부 보수 비평가들로부터 러시아 역사와 국민을 모욕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살티코프는 국가 전체가 아닌 특정 사회 상황을 비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와 유사한 주제를 다룬 ''폼파두르와 폼파두레스''(Помпадуры и помпадуршиrus, 1863–1874)는 ''어느 도시의 역사''의 현실판 삽화처럼 읽히기도 한다.[22]
1873년에는 ''타슈켄트인 클리크''(Господа Ташкентцыrus)를 발표했다. '타슈켄트인'은 제국의 변방에서 민중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관료들을 지칭하기 위해 살티코프가 만든 용어로, 작품은 이러한 행태를 정당화하는 우익 인사들을 비판하며 새로운 형태의 사회 소설을 시도했다. 1877년에는 ''절제와 정확성의 영역에서''를 통해 폰비진, 그리보예도프, 고골 등 고전 작가들의 인물들을 현대 정치 상황에 빗대어 풍자했다.
《선의의 연설》(Благонамеренные речиrus, 1876)은 새롭게 부상하던 러시아 부르주아 계층의 속물적인 모습을 그렸다. 이 작품에 처음 등장했던 골로블료프 가문 이야기는 이후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골로블료프 가문》(Господа Головлёвыrus, 1875-80)으로 발전했다. 이 소설은 몰락해가는 러시아 지주 귀족 가문의 3대에 걸친 도덕적, 육체적 쇠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당시 사회의 기반으로 여겨졌던 가족 제도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쳤다.[21] 특히 주인공 '이우두쉬카' 포르피리 골로블료프는 극단적인 위선과 탐욕, 자기 파괴적인 이기심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이 외에도 그는 자신의 지주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한 《몬 레포 하벤》(Убежище Монрепоrus, 1879)과 《일년 내내》(Круглый годrus), 서구 사회의 이면을 파헤친 《해외》(За рубежомrus, 1880–1881), 체제에 순응하는 지식인들을 풍자한 《현대적 목가》(Современная идиллияrus, 1883) 등을 발표했다.
말년에는 검열 강화 속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풍자적인 우화와 동화 모음집인 《공정한 연령의 어린이를 위한 동화》(Сказки для детей изрядного возрастаrus, 1884, 흔히 '우화'로 알려짐)와 평범한 사람들의 고된 삶을 그린 스케치 모음집 《삶의 작은 것들》(Мелочи жизниrus, 1881–1887)을 발표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반자전적 소설인 《포셰호니의 옛 시절》(Пошехонская старинаrus, 1887–1889)이다.[23]
다음은 살티코프셰드린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3. 2. 평가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풍자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비평가 마리아 고랴치키나는 그가 당대 러시아 사회의 '풍자 백과사전'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의 풍자는 초기에 농노제와 그 사회적 폐해를 겨냥했으며, 이후에는 농노제 폐지 이후 사회의 부패, 관료주의, 지식인들의 기회주의, 권력자들의 탐욕, 그리고 민중의 무관심과 사회적 타성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대표작으로는 풍자 연작 《우화》, 소설 《어느 도시의 역사》와 《골로블료프 가문》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막심 고리키는 1909년 그의 풍자가 지닌 중요성을 강조하며, 살티코프셰드린이 1860년대 이후 러시아 사회의 변화 과정을 예리하게 통찰했다고 평가했다.
비평가 제임스 우드는 셰드린을 크누트 함순과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보며, 특히 《골로블료프 가문》의 포르피리 같은 인물 유형(스스로 위선자임을 모르는 위선자)이 도스토옙스키에서 함순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있다고 분석했다.[25]
소비에트 시대 비평가들은 그를 '진정한 혁명가'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본주의의 진보적 역할이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요성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셰드린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지만[26][27], 《몽 레포에서의 피난처》의 결말이 약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푸시킨, 고골과 더불어 셰드린을 높이 평가한 러시아 작가 중 한 명이었다.[28][29]
일부 동시대인들(피사레프, 수보린)은 그의 작품을 단순한 '웃음을 위한 웃음'으로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코롤렌코는 이러한 비판에 반박하며, 셰드린의 웃음이 러시아 현실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깊은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자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도덕적 힘 덕분이라고 옹호했다.[30]
D.S. 미르스키는 살티코프셰드린의 작품 대부분이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풍자적 저널리즘 성격이 강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퇴색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어느 도시의 역사》(러시아 역사를 우화적으로 그린 작품)와 《골로블료프 가문》은 높이 평가했는데, 특히 후자를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암울한 작품 중 하나로 꼽으며 주인공 '이우두쉬카' 포르피리 골로블료프의 공허한 위선을 분석했다. 미르스키는 또한 작가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에소포스식 화법이 작품 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문체 자체도 당시 저널리즘의 영향을 받아 세련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32]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는 살티코프셰드린이 서구에서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만큼 명성을 얻지 못한 이유로 이러한 에소포스식 화법과 함께, 그의 문학이 라블레와 유사한 환상성을 지니면서도 러시아 현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 보편적 공감을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31]
나로드니크 운동가였던 전기 작가 세르게이 크리벤코는 살티코프셰드린의 작품이 기존의 장르 구분을 넘어서며, 시, 다큐멘터리, 서사, 풍자, 비극, 희극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그는 살티코프셰드린의 문체가 당대의 새로운 사상과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 반복적인 서술 역시 당대 러시아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크리벤코는 그의 재능이 고골에 버금간다고 평가했다.[10]
그는 종종 '애국심 부족'이나 부정적인 태도에 대해 비판받았지만, 스스로는 평범한 민중의 힘을 믿는다고 주장했다. 이반 투르게네프는 비판에 낙담한 살티코프셰드린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작품이 강한 호불호를 낳는 것은 그가 러시아 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며, 이는 작가로서 만족해야 할 결과라고 격려했다.
살티코프셰드린은 개별 인물의 심리 묘사보다는 사회적 경향, 집단 심리, 그가 '현대인의 군중 본능'이라 부른 것들을 포착하고 풍자하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말년에 그는 당시 급진적인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었다. 1885–1886년에 블라디미르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와 누이 안나 울리야노바도 그를 병문안했던 학생 대표단 중 하나였다. 레닌 자신도 살티코프셰드린을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았으며, 그의 작품 속 인물들, 특히 '이우두쉬카'를 자신의 정치적 적수들을 비판하는 데 자주 인용했다.
같은 페트라셰프스키 그룹 출신이었던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주요 비판자 중 한 명이었다. 반면, 벨린스키의 후계를 자처한 계몽주의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지닌 기록적 가치와 사회 문제에 대한 혁신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그의 풍자가 지닌 예술성은 인정하면서도, 검열을 의식한 에소포스식 화법은 때로 '무의미한 수다'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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