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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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제상은 신라 시대의 인물로, 내물왕부터 눌지왕 시기까지 활동했다. 그는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왕족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헌신적인 충절을 보였다. 눌지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있던 복호를 구출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을 구출했으나, 일본의 회유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며, 울산 치술령에는 망부석과 관련 유적이 남아있다. 박제상은 충절의 상징으로 평가받으며, 동학사, 치산서원 등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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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한글) | 박제상 |
이름 (한자) | 朴堤上 |
이름 (로마자 표기) | Bak Je-sang |
활동 시기 | 5세기 |
직위 | 신라 삽량주간 |
섬기던 군주 | 눌지 마립간 |
군주 칭호 | 마립간 |
생애 |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왜국 목도(木島) |
사망 원인 | 미상 |
매장지 | 미상 |
능묘 | 미상 |
비고 | 堤上, 毛末은 실제로 '돍맏/덝맏'이라고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堤(둑 제)와 毛(털 모)는 '둙/덝'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上(위/맏 상)과 末(끝 말)은 '맏/말'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
가문 | |
왕조 | 신라 |
가문 | 미상 |
아버지 | 미상 |
어머니 | 미상 |
형제자매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기타 | |
추증 | 대아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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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박제상은 이칠 갈문왕의 후손이라고 하나 세대는 정확하지 않다. 삽라군(歃羅郡)의 태수직을 수행하였다. 눌지 마립간 즉위 2년(418년)에 왕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복호를 구하여 신라로 돌아왔으며, 이어서 야마토에 볼모로 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하러 갔다. 왕자를 구출하여 신라로 보낸 후, 인교 천황의 신하 제의를 거절하다가 죽었다. 그의 행적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내물왕과 김제상〉 편, 《일본서기》, 《동국통감》, 《문헌빅느》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각 기록은 차이를 보인다.[1]
5세기 초, 실성 마립간은 왜국(일본)과 고구려와 강화를 맺고, 내물 마립간의 아들 미사흔과 복호를 인질로 보냈다. 눌지 마립간은 박제상에게 인질로 잡힌 형제 귀국을 도모하게 했다. 박제상은 먼저 고구려에서 복호를 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을 귀국시켰으나, 가쓰라기노 소쓰히코에게 처형당했다. 《삼국유사》에서는 미사흔·복호는 각각 보해·미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2. 1. 가계와 출신
박제상은 이칠 갈문왕의 후손이라고 하나 세대는 정확하지 않다. 삽라군(歃羅郡)의 태수직을 수행하였다. 눌지 마립간 즉위 2년(418년)에 왕명을 받아 고구려와 야마토에 볼모로 있던 왕자를 구출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행적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동국통감》, 《문헌빅느》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각 기록의 내용은 차이를 보인다.[1]김제상(金堤上)으로도 알려진 그는 내물왕 때부터 눌지왕 때까지 활동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박제상은 신라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며, 제5대 왕 파사 이사금의 5대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이고,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 물품(勿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계보는 신빙성이 높지 않다.[1]
2. 2. 관직
이칠 갈문왕의 후손이라 하나 세대는 정확하지 않다. 삽라군(歃羅郡)의 태수직을 수행하였다. 눌지 마립간 즉위 2년(418년)에 왕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복호를 구하여 신라로 돌아왔으며, 이어서 야마토에 볼모로 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하러 갔다.2. 3. 왕제 구출
눌지 마립간 2년(418년), 왕명으로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복호(卜好)를 구출하고, 야마토에 볼모로 있는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구하러 갔다. 박제상은 왕자를 신라로 탈출시킨 후, 인교 천황(允恭天皇)의 신하 제의를 거절하다가 죽었다.5세기 초, 실성왕은 왜국(일본)과 고구려와 강화하면서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과 복호를 인질로 보냈다. 내물왕의 아들 눌지왕은 박제상에게 인질로 잡힌 형제 귀국을 명했다. 박제상은 먼저 고구려에서 복호를 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을 귀국시켰으나, 가쓰라기노 소쓰히코에게 처형당했다.
402년(실성왕 1년) 신라는 미사흔(未斯欣)을 왜(일본)에, 412년에는 복호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삼국사기에는 복호와 미사흔, 삼국유사에는 보해(寶海)와 미해(美海)로 기록되어 있다. 왜와 고구려는 이들 왕자를 인질로 잡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눌지왕은 신하들에게 두 아우를 구출할 방법을 논의했고, 벌보말(伐寶靺), 구리내(仇里迺), 파로(波老)가 박제상을 추천했다.
당시 박제상은 양산 지역 지방 세력으로 사량주간(歃良州干)이었다. 418년(눌지왕 2년) 왕명으로 고구려에서 장수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데려왔다.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 미사흔 구출을 위해 떠났다. 왜에서 신라를 배신한 것처럼 위장, 백제 사신의 거짓말과 함께 신라 침공군 길잡이가 되었다. 강구려(康仇麗)와 협력, 일본 군사를 속여 미사흔을 탈출시켰으나, 붙잡혀 왜왕에게 끌려갔다. 왜왕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 신라의 충신으로 남겠다며 절개를 지켜 유배되어 불에 타 죽었다.
신라는 그의 죽음을 애도, 대아찬 벼슬 추증,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봉하고,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았다.
2. 4. 최후
눌지 마립간의 명으로 고구려와 야마토에 볼모로 잡혀 있던 왕의 동생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박제상은 미사흔을 신라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박제상은 인교 천황의 신하가 되라는 설득을 거절하고,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다"며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결국 그는 유배되어 불에 타 죽는 형벌을 받았다.이 소식이 신라에 전해지자 눌지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대아찬 벼슬을 내리고, 그의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봉했다. 또한, 그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았다.
3. 망부석 설화
망부석 설화는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을 그리워한 그의 부인에 얽힌 설화이다.
《삼국유사》의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편에 따르면, 눌지왕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두 아우를 그리워하자, 박제상이 고구려에 있던 복호를 구출하고 일본으로 가 미사흔을 구출하였다. 왕이 이미 복호를 만나자 미사흔을 더욱 그리워하며 슬퍼했고, 박제상은 이 말을 듣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栗浦) 물가로 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의 아내는 이 소식을 듣고 율포로 달려갔으나, 이미 남편은 배 위에 있었다. 아내가 간절히 불렀지만, 박제상은 손만 흔들고 떠났다.
이후 박제상의 부인은 망덕사 문 남쪽 모래밭(장사)에서 크게 울부짖었고,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곳은 벌지지(伐知旨)라 불리게 되었다. 오랜 후 부인은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세 딸과 함께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으며, 지금도 사당(은을암)이 남아있다.[3]
3. 1. 장소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사람들은 그녀의 절개를 칭송했으며, 박제상의 아내는 죽어서 치(鵄)라는 새가 되었고, 함께 기다리다 죽은 세 딸은 술(述)이라는 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3]《삼국유사》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다 망덕사 문 남쪽 모래밭에서 크게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모래밭은 장사(長沙)로 불리게 되었고, 부인이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곳은 벌지지(伐知旨)라 불리게 되었다. 훗날 부인은 세 딸과 함께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왜국(倭國)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생을 마쳤고,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다고 한다.[3]
치술령은 울산에 있으며, 정상의 바위는 망부석이라 불린다. 인근의 은을암(隱乙岩)은 죽은 아내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든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 망부석과 은을암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 『박제상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3]
이 이야기와 관련된 망부석은 여러 곳에 전해진다. 부산 태종대에는 일본의 쓰시마 섬을 볼 수 있는 망부석이 있고,[4] 울산 울주의 박제상 유적지에도 망부석이 있다.[5]
3. 2. 화석 모티프
망부석(望夫石) 설화는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을 그리워한 박제상의 부인과 관련된 설화이다. 삼국유사의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편에 따르면, 박제상이 일본으로 떠난 후, 부인은 망덕사 문 남쪽 모래사장에서 통곡하다가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왜국(倭國)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생을 마쳤다고 한다.치술령은 울산에 있으며, 정상의 바위는 남편을 그리워하던 바위라 하여 망부석이라 불린다. 죽은 아내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든 곳이라는 은을암(隱乙岩)과 함께 망부석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 『박제상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5]
사람들은 박제상의 아내를 칭송했으며, 그녀는 죽어서 치(鵄)라는 새가 되었고, 함께 기다리다 죽은 세 딸은 술(述)이라는 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3] 사람이 돌이 된다는 화석 모티프는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지만, '돌'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칭송할 만한 기념비라는 의미를 가진다.[3]
이 이야기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망부석은 태종대[4]와 울산 울주 박제상 유적지[5] 등에 있다.
4. 저서
눌지 마립간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러 삼도(三島)로 건너가기 전에 《징심록》(부도지)을 저술하였다고 전해진다.
5. 가족 관계
6. 유적
계룡산 동학사에 있는 동계사에 박제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936년 류차달이 초혼하여 제사하고 왕명으로 동계사를 건립하였다. 이후 훼손되어 철향되었다가 1956년 중건되었다. 또한 울산 치산서원에는 박제상 부부의 위패를 모셔 충절을 기리고 있다.[1]
7. 평가
눌지 마립간은 박제상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에게 대아찬 벼슬을 추증했으며, 그의 부인을 국대부인으로 봉하고, 그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았다.
참조
[1]
백과사전
박제상(朴堤上)
http://encykorea.aks[...]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2-11-30
[2]
백과사전
박제상설화
http://encykorea.aks[...]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2-11-30
[3]
백과사전
망부석설화
http://encykorea.aks[...]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2-11-30
[4]
웹사이트
망부석 - 태종대유원지
https://www.bisco.or[...]
2022-11-30
[5]
웹사이트
울산광역시 기념물 박제상유적 (朴堤上遺蹟)
http://www.heritage.[...]
2022-11-30
[6]
문서
삼국사기 권 제 45 열전 제 5
[7]
문서
신라 박씨 선원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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