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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홀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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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홀섬은 필리핀 비사야 제도에 위치한 섬으로, 섬의 절반이 대리석으로 덮여 있고 초콜릿 힐을 비롯한 독특한 지형과 아름다운 해변을 자랑하며 관광지로 유명하다. 서쪽으로는 세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세부 섬, 동쪽으로는 카니가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레이테 섬, 남쪽으로는 민다나오 해, 북쪽으로는 카모테스 해에 접해 있다. 1,268개의 원추형 언덕이 있는 초콜릿 힐은 건기에 갈색으로 변하며, 2023년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보홀섬은 태풍의 영향을 덜 받고 온화한 기후를 보이며, 다이빙 명소인 발리카삭과 팡라오 섬의 해변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1565년 스페인과의 혈맹을 기념하는 산듀고 축제가 열리며, 2013년에는 규모 7.2의 지진이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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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홀섬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위치비사야 제도
면적3,269 km2
인구1,137,268 명
인구 밀도276 명/km2
주요 도시타그빌라란
행정 구역보홀 주
지리
최고점아포 산 (2,954m)
초콜릿 언덕
초콜릿 언덕
필리핀 보홀
필리핀 보홀
인종
주요 민족비사야족
보홀라노
세부아노족
에스카야족
동물
서식 동물필리핀안경원숭이(Carlito syrichta)

2. 지리

보홀섬은 섬의 절반이 대리석으로 덮여 있으며, 대체로 언덕이 많은 지형이다. 섬 중앙은 불규칙한 지형의 고원 지대이며, 특히 초콜릿 힐은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서쪽으로 보홀 해협(세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세부섬, 동쪽은 카니가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레이테섬, 남쪽 민다나오해(보홀해), 북쪽은 카모테스해와 접해 있다. 해안은 백색 모래 사장이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특히 타그빌라란시 남쪽 팡라오섬 해변과 바리카사그는 다이빙 명소로 유명하다.

루손섬이나 비사야 제도 북부와 달리, 보홀섬은 태풍의 직접적인 영향을 덜 받는 편이며, 기후는 온화하다.

2. 1. 자연 지형

섬의 절반은 대리석으로 덮여 있으며, 대체로 언덕이 많은 지형이다. 섬 중앙부에는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30m~50m의 풀로 덮인 원추형 언덕이 1,268개나 늘어선 카르스트 지형 "초콜릿 힐"이 있다. 4~6월의 건기에 풀이 말라 갈색으로 보인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그 기묘한 경관이 관광 명소가 되었다[1]. 2023년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2]

로복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크루즈선에서의 풍경


서쪽으로는 보홀 해협(세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세부 섬, 동쪽은 카니가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레이테 섬, 남쪽은 민다나오 해 (보홀 해), 북쪽은 카모테스 해에 면해 있다. 중앙부는 불규칙한 지형의 고원 지대이며, 해안은 하얀 모래 사장으로, 서쪽 이웃인 세부 섬과 마찬가지로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다.

루손 섬이나 비사야 제도 북부와 달리, 보홀은 태풍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어렵다. 또한 태풍이 와도 속도가 빠르고 금방 지나가는 데다, 레이테 섬이나 사마르 섬의 산악 지대에서 세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큰 피해로 이어지기 어렵다. 이 때문에 기후는 온화하다. 11월부터 4월은 아미한이라고 불리는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몬순의 세력이 강하여, 가끔 스콜이 내리는 것을 제외하면 기온이 28°C 전후로 가장 온화한 계절이다. 5월부터 7월의 여름은 건기이지만 고온 다습하여 지내기 어렵다. 8월부터 10월은 하바갓이라는 남서 몬순으로 인해 맑은 날이 이어지거나 비가 계속 내리는 등 날씨를 예측하기 어렵다.

2. 2. 기후

루손섬이나 비사야 제도 북부와 달리, 보홀태풍의 직접적인 영향을 덜 받는다. 태풍이 와도 속도가 빠르고 금방 지나가며, 레이테섬이나 사마르섬의 산악 지대에서 세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큰 피해로 이어지기 어렵다. 이 때문에 기후는 온화하다. 11월부터 4월은 ‘아미한’이라고 불리는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몬순의 세력이 강하여, 가끔 스콜이 내리는 것을 제외하면 기온이 28°C 전후로 가장 온화한 계절이다. 5월부터 7월의 여름은 건기이지만 고온 다습하여 지내기 어렵다. 8월부터 10월은 ‘하바갓’이라는 남서 몬순으로 인해 맑은 날이 이어지거나 비가 계속 내리는 등 날씨를 예측하기 어렵다.

3. 역사

보홀섬의 주민은 필리핀에 마지막으로 이주해 온 말레이계 사람들의 후손으로, 핀타도(pintados, 문신을 새긴 사람들)라고 불린다.[1] 타그빌라란 만사사, 다우이스, 팡라오 등에서 이들의 문명에서 사용된 그릇 유적이 출토되었다.[1] 보홀이라는 이름은 현재 타그빌라란시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바랑)인 "Bo-ol"(보올)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1565년 스페인의 탐험가이자 정복자(콩키스타도르)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황금과 향료를 찾아 보홀섬에 도착했다. 그는 지방 영주들에게 "자신들은 포르투갈 사람이 아니다"라고 설득한 후[3] 다투(영주) 시카투나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평화 협정은 두 사람 간의 '''혈맹'''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서로 팔을 그어 흐르는 피를 그릇에 넣어 마시는 〈산듀고〉(Sandugo, 하나의 혈액) 방식이었다. 이 혈맹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산듀고 축제》가 열리며, 산듀고는 보홀주의 휘장 디자인이 되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보홀에서는 두 건의 큰 반란이 일어났다. 1621년에는 이 지역의 샤먼(Babaylan, 바바이란)인 탐블롯(Tamblot)이 탐블롯의 반란을 일으켰다. 1744년부터 1829년까지 85년간 프란시스코 다고호이(프란시스코 센도리야스)가 이끄는 다고호이의 난(Dagohoy Rebellion)이 산지 등을 무대로 지속되었다.

1854년 7월 22일, 보홀은 시키호르섬과 함께 분리되어 군정이 시행되었다. 1879년 조사에서는 보홀의 34개 도시에 25만 3,103명의 인구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스페인을 꺾고, 파리 조약을 통해 필리핀을 샀다. 그러나 필리핀 독립 혁명으로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구성한 독립 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보홀에서는 고비에르노 데 구획이 주지사에 취임했다.

미-필리핀 전쟁 동안 헨리 헤일 지휘 아래 미국군은 타그빌라란에 상륙하여 섬을 점령했다. 그는 페드로 삼손이라는 지역 주민을 섬 경찰 전력 편성을 위해 고용했으나, 삼손은 부대와 무기를 가지고 섬 내륙으로 옮겨 반란을 시작했다.

첫 전투에서 학살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지만, 삼손은 게릴라 전술로 바꿔 섬 내륙으로 들어가 세력을 유지했다. 한편 헤일의 부대는 섬의 중심 타그빌라란과 섬의 바깥쪽을 지배했다. 1901년 1월, 전투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미군이 한 여성을 폭행하려다가 그녀의 약혼자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 지휘관이었던 앤드류 S. 로완 경감은 보복으로 하그나(Jagna) 마을을 불태웠고, 이 때문에 보홀 주민들은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로완 경감은 보복 행위로 정직 처분을 받았으나, 부대 내부에서는 이 활동에 대한 지지가 높았다. 미군은 반란에 협력한 마을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눈에 보이는 민간인들을 잡아서 고문했다. 전투가 끝나기 전에 미군 부대는 16개에서 20개의 마을을 불태웠다. 에드윈 F. 글렌 소령은 고문을 허용했으며, 이후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샘슨과 그 부하는 1901년 12월 23일 특사를 보장받고 충성을 맹세한 후 항복했다. 전쟁은 이로써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1개월 후 샘슨은 재무장을 하고 지역 지도자 J. R. 헷그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전쟁이 다시 시작될 뻔했지만,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 마지막 미군 부대는 1902년 2월 섬을 떠났다.

1917년 3월 10일, 미국 식민지 정권은 필리핀의 대부분 주의 창설로 이어진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보홀은 독립적인 주가 되었다.

1942년 3월 17일 일본군은 타그빌라란에 상륙하여 섬을 점령했으나, 주민들은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1] 1944년 미군의 탈환 작전으로 동쪽 레이테섬에 상륙이 시작되면서 보홀도 전장이 되었다. 지휘 계통을 잃은 일본군은 산으로 패주하며 산발적으로 싸웠다. 미군은 1945년 8월 11일 보홀에서 철수했다.[1]

2013년10월 15일, 보홀섬 사그바얀 마을 인근을 진앙으로 하는 모멘트 규모(Mw) 7.2의 직하형 지진이 발생했다. 필리핀 국내 사망자 198명 이상 중 보홀섬에서 185명 이상이 사망하여 피해가 집중되었다. 진앙 인근에서는 길이 5km 이상, 높이 3m에 달하는 단층애가 나타났으며, 이는 지진의 규모를 보여준다.[4][5]

3. 1. 고대

보홀 사람은 핀타도(pintados, 문신을 새긴 사람들)라고 불리며, 필리핀에 마지막으로 이주해 온 말레이계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한다.[1] 이들 문명의 그릇 유적이 타그빌라란 만사사, 다우이스, 팡라오 등에서 출토되었다.[1] 보홀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아마 "Bo-ol"(보올)이라는 이름의 현재 타그빌라란시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바랑)의 이름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3. 2. 스페인 식민 시대

1565년 스페인의 탐험가이자 정복자(콩키스타도르)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황금과 향료를 찾아 보홀섬에 도착했다. 그는 지방 영주들에게 "자신들은 포르투갈 사람이 아니다"라고 설득한 후[3] 다투(영주) 시카투나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평화 협정은 두 사람 사이의 '''혈맹'''에 의한 것으로, 서로 팔을 그어 흐르는 피를 그릇에 넣어 마시는 〈산듀고〉(Sandugo, 하나의 혈액)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혈맹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산듀고 축제》가 열리며, 산듀고는 보홀주의 휘장 디자인이 되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보홀에서는 두 건의 큰 반란이 일어났다. 1621년에는 이 지역의 샤먼(Babaylan, 바바이란)인 탐블롯(Tamblot)이 일으킨 탐블롯의 반란이 일어났다. 필리핀 역사상 유명한 다고호이의 난(Dagohoy Rebellion)은 프란시스코 다고호이(프란시스코 센도리야스)가 이끄는 반란으로, 1744년부터 1829년까지 85년간 산지 등을 무대로 반란이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보홀은 세부 지역에 속해 있었다. 1854년 7월 22일, 보홀은 시키호르섬과 함께 분리되어 군정이 시행되었다. 1879년 조사에서는 보홀의 34개 도시에 25만 3,103명의 인구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3. 3. 미국 식민 시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스페인을 꺾고, 파리 조약을 통해 필리핀을 샀다. 그러나 필리핀 독립 혁명으로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구성한 독립 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보홀은 고비에르노 데 구획이 주지사에 취임했다.

미-필리핀 전쟁 동안 헨리 헤일 지휘 아래 미국군은 타그빌라란에 상륙하여 섬을 점령했다. 그는 페드로 삼손이라는 지역 주민을 섬 경찰 전력 편성을 위해 고용했다. 그러나 삼손은 부대와 무기를 가지고 섬 내륙으로 옮겨 반란을 시작했다.

첫 전투에서 학살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지만, 삼손은 게릴라 전술로 바꿔서 섬 내륙으로 들어가 세력을 유지했다. 그동안 헤일의 부대는 섬의 중심 타그빌라란과 섬의 바깥쪽을 지배했다. 1901년 1월, 전투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미군이 한 여성을 폭행하려다가 그녀의 약혼자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 지휘관이었던 앤드류 S. 로완 경감은 보복을 위해 하그나(Jagna) 마을을 불태웠다. 그 때문에 보홀 주민은 분노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로완 경감은 보복 행위 때문에 정직 처분됐다. 그러나 결국 부대 내부에서도 이 활동에 대한 지지가 높았다. 미군은 계속해서 반란에 협력한 마을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눈에 보이는 민간인들을 잡아서 고문했다. 전투가 끝나기 전에, 미군 부대는 16개에서 20개의 마을을 불태웠다. 에드윈 F. 글렌 소령은 고문을 허용했으며, 그 후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샘슨과 그 부하는 1901년 12월 23일, 특사를 보장받고, 충성을 맹세한 후 항복했다. 전쟁은 이로써 마무리되는 듯 싶었으나, 1개월 후 샘슨은 재무장을 했고, 지역의 지도자 J. R. 헷그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전쟁이 다시 시작될 뻔 했지만,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 마지막 미군 부대는 1902년 2월 섬을 떠났다.

1917년 3월 10일, 미국의 식민지 정권은 필리핀의 대부분 주의 창설로 이어진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보홀은 독립적인 주가 되었다.

3. 4. 제2차 세계 대전

일본군은 1942년 3월 17일 타그빌라란에 상륙하여 점령했다. 주민들은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1] 1944년 미군의 탈환 작전으로 동쪽 레이테섬에 상륙이 시작되면서 보홀도 전장이 되었다. 지휘 계통을 잃은 일본군은 산으로 패주하며 산발적으로 싸웠다. 미군은 1945년 8월 11일 보홀에서 철수했다.[1]

3. 5. 현대

2013년10월 15일, 보홀섬 사그바얀 마을 인근을 진앙으로 하는 모멘트 규모(Mw) 7.2의 직하형 지진이 발생했다. 필리핀 국내 사망자 198명 이상 중 보홀섬 사망자는 185명 이상으로 집중되었다. 진앙 인근에서는 길이 5km 이상, 높이 3m에 달하는 단층애가 나타났으며, 이는 지진의 규모를 뒷받침한다.[4][5]

4. 문화

보홀섬에서는 영어 외에 필리핀의 주요 언어 중 하나인 세부아노어, 보호라노어가 사용되고 있다. 주요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이며, 개신교도 소수 존재한다.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가 세운 필리핀 독립교회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4. 1. 민족

세부아노어, 보호라노어가 영어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주요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이며, 개신교도 소수 존재한다.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가 세운 필리핀 독립교회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아글리파이 교회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직자의 결혼이 허용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로마 가톨릭교회와 큰 차이가 없다.

4. 2. 종교

주요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이며, 개신교도 소수 존재한다. 또한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가 세워서 필리핀에 널리 확산된 독자적인 교회인 필리핀 독립교회는 보홀이 발상지이다. 아글리파이 교회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직자의 결혼이 허용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로마 가톨릭교회와 큰 차이가 없다.

5. 관광

섬의 절반은 대리석으로 덮여 있으며, 대체로 언덕이 많은 지형이다. 그 중에서도 대리석 높이 30m~50m 잔디로 덮인 원추형 산이 1,268개나 늘어선 초콜릿 힐이라는 장소가 있고, 5월부터 건기에는 말라서 갈색으로 보인다. 그 괴상한 경관도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1] 2023년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2]

서쪽으로 보홀 해협(세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세부섬, 동쪽은 카니가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레이테섬, 남쪽 민다나오해(보홀해), 북쪽은 카모테스해에 접해 있다. 해안은 백색 모래 사장이 있어 서쪽 이웃의 세부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로 붐빈다. 특히 타그빌라란시의 남쪽에 있는 팡라오섬 해변과 다이빙 장소는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다. 또한 다이버가 동경하는 명소인 바리카사그에는 전 세계의 다이버들로 붐빈다. 이 리조트로 온 여행객 중 상당수는 세부 발로 타그빌라란이 섬 관광의 거점으로 되어 있으며, 섬의 남쪽 해안에는 호텔이나 코티지가 많이 있는 리조트 숙박 시설이 있다.

참조

[1] 뉴스 チョコレートヒルズ/フィリピン 日本経済新聞 2017-07-09
[2] 웹사이트 Bohol Island UNESCO Global Geopark https://www.unesco.o[...] UNESCO 2023-05-24
[3] 문서 フェルディナンド・マゼランは1521年にマクタン島を襲い戦闘になっている。
[4] 뉴스 フィリピン地震、長さ5キロ以上の岩壁が出現 http://topics.jp.msn[...] フランス通信社 2013-10-25
[5] 웹사이트 2013年10月15日 00:12 (UTC) フィリピンボホール島の地震 (Mw 7.2) http://www.isn.bosai[...] 防災科学技術研究所 201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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