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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자발리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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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프강 자발리슈는 독일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음악 해석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947년 아우크스부르크 오페라 하우스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1993년부터 2003년까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빈 심포니, 함부르크 필하모니, 로망드 스위스 오케스트라,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등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하우스에서 활동했으며, 1957년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최연소 지휘자로 데뷔했다. 슈만, 브람스, 브루크너 등의 작품 해석으로도 인정받았으며, 1964년부터 일본 NHK 교향악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훈3등 욱일중수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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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자발리슈
기본 정보
볼프강 자발리슈 1988년 사진
1988년,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로베르트 슈만 협회 명예 회원 수여식에서
서명[[파일:Signature Sawallisch.png|center|frameless|upright|100px]]
출생1923년 8월 26일
출생지바이에른주 뮌헨
사망2013년 2월 22일
사망지바이에른주
국적독일
혈액형미확인
학력뮌헨 음악대학
직업지휘자, 피아니스트
활동 기간1947년 - 2006년
장르클래식 음악
경력
영향미확인
관련 인물미확인
레이블미확인
프로덕션미확인
웹사이트미확인

2. 생애

볼프강 자발리슈는 1923년 뮌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작곡을 공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국방군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종전 후 뮌헨 음악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우크스부르크 시립 가극장의 코레페티토어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으며, 1949년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 듀엣 부문에서 2위를 차지하며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했다.

1953년 아헨을 시작으로 비스바덴(1958년), 쾰른(1960년) 등 여러 도시의 음악 총감독을 역임했다. 1957년에는 바이로이트 축제에 당시 33세의 최연소 나이로 데뷔하여 1962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빈 국립 오페라 극장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초청을 받았으나 경험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다.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하며 오케스트라 발전에 기여했다. 1971년부터 바이에른 국립 가극장 음악 감독(1982년부터 1992년까지는 음악 총감독)을 맡아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전곡 상연을 기획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1993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으며, 퇴임 후에는 특정 직책 없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다. 2006년 심장병 악화로 은퇴를 선언했으며, 2013년 바이에른주 그라사우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1]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토스카니니 배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부터 니키슈 메달,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로부터 브루크너 메달을 받았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볼프강 자발리슈는 1923년 뮌헨에서 마리아와 빌헬름 자발리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뮌헨에 있는 함부르크-브레머-포이어페어지히룽 보험 회사의 이사였다. 5살 위인 형 베르너가 있었다. 1942년 뮌헨 비텔스바허 김나지움에서 아비투어를 통과했다.[2]

5세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10세에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린 시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한스 크나퍼츠부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가족, 특히 미망인이 된 어머니와 형이 그의 음악 교육을 적극 지원했다. 처음에는 작곡과 피아노를 개인 교습으로 공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재정적 어려움 없이 피아니스트와 지휘자 경력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이었다. 그러나 군 복무와 포로 생활로 인해 그의 발전은 중단되었다. 전쟁 중 독일 국방군 소속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복무했고, 전쟁 말기에는 이탈리아에서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뮌헨으로 돌아온 후 요제프 하스에게서 공부했고, 한 학기 후인 1946년 뮌헨 국립음악대학에서 국가 시험을 통과했다.[2] 한스 로스바우드와 이고르 마르케비치에게 지휘를 배웠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볼프강 자발리슈는 제2차 세계 대전독일 국방군에서 통신병으로 복무했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근무했다.[2] 종전 후에는 이탈리아에서 영국군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2]

2. 3. 전후 활동 및 결혼

뮌헨으로 돌아온 후, 자발리슈는 요제프 하스에게서 공부했고, 1946년 뮌헨 국립음악대학에서 국가 시험을 통과했다.[2] 한스 로스바우드와 이고르 마르케비치에게 지휘를 배웠고, 아우크스부르크 시립 극장에서 첫 직장을 얻었다. 이 시기에 그는 뮌헨에서 만났던 오르간 제작자 마그누스 슈미트(1889-1964)의 딸인 가수 메크틸트 슈미트(1921-1998)와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 생활 내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44년에 태어난 부인의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을 입양하여 그는 자신의 가족을 꾸렸다. 메크틸트는 남편의 경력을 위해 자신의 가수 경력을 포기했다. 한편으로는 성공한 남자의 그늘에 가려지는 것에 괴로워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역할을 그의 매니저로 여겼다. 46년의 결혼 생활 후 그녀는 갑상선암으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4. 가족

볼프강 자발리슈는 마리아와 빌헬름 자발리슈의 아들로 뮌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뮌헨에 있는 함부르크-브레머-포이어페어지히룽 보험 회사의 이사였다. 볼프강보다 5살 많은 형 베르너가 있었다. 1944년에 태어난 부인의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을 입양하여 자신의 가족을 꾸렸다.

젊은 시절 뮌헨에서 만난 오르간 제작자 마그누스 슈미트(1889-1964)의 딸인 가수 메크틸트 슈미트(1921-1998)와 결혼했다. 메크틸트는 결혼 생활 내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남편의 경력을 위해 자신의 가수 경력을 포기했는데, 한편으로는 성공한 남자의 그늘에 가려지는 것에 괴로워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역할을 그의 매니저로 여겼다. 46년간의 결혼 생활 후 메크틸트는 갑상선암으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그의 아들 욬르크는 양아버지보다 불과 한 달 전인 2013년 1월에 사망했다.

2. 5. 말년과 죽음

볼프강 자발리슈는 1998년 12월 24일 부인 메흐틸트가 사망할 때까지 46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1][7] 가족 친구였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이 그녀의 장례 미사를 집전했다. 그녀는 이전 결혼에서 아들 요르크를 낳았고, 자발리슈가 그를 입양했다. 요르크는 2013년 1월에 사망했다.

2003년 바이에른주 그라사우에 볼프강 자발리슈 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이 재단은 음악 학교를 포함하고 있다. 2013년 2월 2일 그라사우에서 켄트 나가노의 지휘 아래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의 자선 콘서트가 열렸고, 이 콘서트에서 자발리슈는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2013년 1월호에 오페라계에 마지막 언론 인터뷰를 했다. 그의 아들 요르크는 양아버지보다 불과 한 달 전인 2013년 1월에 사망했다. 자발리슈는 50년 이상 오버바이에른의 키엠가우에 있는 그라사우에서 살았고, 그곳에 묻혔다.

자발리슈가 수십 년 동안 살았던 그라사우의 빌라는 2014년 자발리슈 재단에 인수되었으며, 가끔 그라사우 음악 학교의 콘서트에 사용된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서의 임기를 마친 후, 자발리슈는 필라델피아와 카네기 홀에서 객원 지휘로 다시 활동했다.[4] 그러나 기립성 저혈압과 관련된 건강 문제로 인해 자발리슈는 그 후 몇 년 동안 지휘를 할 수 없었다.[5] 2006년 8월 27일자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기사에서 자발리슈는 콘서트 지휘대에서 은퇴한다고 직접 밝혔다.

> "예고 없이 혈압이 너무 낮아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정성 때문에 57년간의 콘서트와 오페라 지휘 경력을 마무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6]

그는 앞서 1988년에 지휘자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자서전 "Im Interesse der Deutlichkeit"("명확성을 위하여")를 출판했다.

자발리슈는 2013년 2월 22일, 89세의 나이로 그라서 자택에서 사망했다.[8]

3. 경력

볼프강 자발리슈는 1947년 아우크스부르크 오페라 하우스에서 레페티토어로 경력을 시작하여 이후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3] 1952~1953년에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국제 여름 아카데미에서 이고르 마르케비치의 개인 조수로 활동했다.[2] 30세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1957년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며 역대 최연소 지휘자로 데뷔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제안을 거절하고, 1960년 빈 심포니 수석 지휘자(10년 역임), 1961년 함부르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10년 역임), 1970~1980년 로망드 스위스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1971년부터 1992년까지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음악 감독, 1983년부터는 총감독을 겸임하며 30년간 뮌헨 음악계에 기여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거의 모든 오페라를 지휘했고,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32회 공연했으며, 뮌헨에서만 1200회 가까운 오페라 공연을 지휘했다.

1993년 리카르도 무티의 뒤를 이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여 2003년까지 재임했으며, 이후 2013년 사망할 때까지 계관 지휘자 직함을 유지했다.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 (도쿄) 명예 계관 지휘자로 30년 이상 매년 공연했으며, 1993년 산토리 음악상을 수상했다.

2006년 심장병 악화로 은퇴를 표명하기 전까지 베를린 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토스카니니 배턴, 베를린 필로부터 니키슈 메달,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로부터 브루크너 메달을 받았다.

3. 1. 초기 경력

1960년 함부르크의 볼프강 자발리슈


그는 1947년 아우크스부르크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레페티토어 직책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3] 1949년, 바이올리니스트 게르하르트 자이츠와 협연하여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1등상을 받았다. 1952~53년에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국제 여름 아카데미에서 이고르 마르케비치의 개인 조수였다.[2]

불과 30세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당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수석 지휘자였다. 1957년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며 데뷔했을 때, 그는 그곳에 출연한 역대 최연소 지휘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음악 이론, 작곡을 배웠다. 10세 무렵 처음 본 오페라,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에 감동하여 지휘자를 지망, 현대 음악 지휘로 명성이 높은 한스 로스바우트에게 사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통신병으로 징집되어 이탈리아에서 포로가 되어 종전을 맞았다. 귀국 후 뮌헨 음악 대학교에 입학하여 3개월 만에 졸업했다. 졸업 후 1947년아우크스부르크 시립 가극장의 코레페티토어가 되어 『헨젤과 그레텔』로 데뷔했다. 이 지휘가 높이 평가되어 수석 지휘자, 카펠마이스터로 발탁되었다. 1949년에는 피아니스트로 바이올리니스트 게르하르트 자이츠와 협연하여,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의 듀엣 부문에서 1위 없이 2위를 차지했다. 이후 지휘자와 피아니스트(주로 리트의 반주자)로서의 활동을 병행했다. 또한 이 시기 잘츠부르크에서 이고르 마르케비치의 지휘법 마스터 클래스의 조수를 맡았다.

1953년에는 아헨, 1958년비스바덴, 1960년쾰른의 각 시립 가극장의 음악 총감독에 취임했다. 1953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처음 지휘했다. 1954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장례식에서 베를린 필의 추도 연주를 지휘했다. 1957년에는 런던 데뷔(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반주자,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지휘)와 바이로이트 축제에 개막 공연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첫 출연을 했다. 33세의 바이로이트 출연은 당시 최연소 기록이었다(1960년로린 마젤이 30세에 첫 출연하여 현재는 이것이 최연소 기록).

3. 2. 주요 오케스트라 및 오페라 하우스 재직

1953년 아헨, 1958년 비스바덴, 1960년 쾰른의 각 시립 가극장의 음악 총감독에 취임했다.[3] 1953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처음 지휘했으며, 1954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장례식에서 베를린 필의 추도 연주를 지휘했다. 1957년에는 런던에서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반주와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지휘로 데뷔했고, 바이로이트 축제에 개막 공연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첫 출연했다. 당시 33세의 바이로이트 출연은 최연소 기록이었으나, 1960년 로린 마젤이 30세에 출연하여 최연소 기록이 바뀌었다. 바이로이트에는 1962년까지 『트리스탄과 이졸데』(1957~1959), 『방황하는 네덜란드인』(1959~1961), 『탄호이저』(1961~1962), 『로엔그린』(1962)으로 연속 출연했다. 쾰른 음악 감독 시절에는 쾰른 음악 대학교 지휘과 교수를 맡았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빈 국립 오페라 극장으로, 루돌프 빙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로 자발리슈를 영입하려 했으나, 자발리슈는 경험 부족을 이유로 모두 거절했다. 이로 인해 카라얀과 빙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카라얀에게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초청받지 못했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도 지휘하지 못했다.[20]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하며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도 활약했다.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에서는 창설자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사후 오케스트라 재건에 힘썼다. 1971년부터 바이에른 국립 가극장의 음악 감독(1982~1992년 음악 총감독)을 맡아, 젊은 가수들을 적극 등용하여 출연진의 세대교체를 이루었다. 1988년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에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모든 오페라를 상연하여 화제를 모았다.

3. 3.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재직

1971년부터 1992년까지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으며, 1983년부터 몇 년 동안은 총감독을 겸임했다. 30년 동안 뮌헨의 음악 행사에 긴밀하게 관여했다.[2]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거의 모든 주요 오페라를 지휘했으나, ''살로메''는 예외였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 사이클을 32회 지휘했으며, 뮌헨에서만 거의 1200회의 오페라 공연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1988년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모든 오페라를 상연하여 화제를 모았다.[21] 젊은 가수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출연진의 연령대를 낮추는 데 성공했다.[21]

3. 4.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재직

1966년, 유진 오르만디는 1936년부터 1980년까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맡았던 자발리슈를 초대했다.[20] 자발리슈는 이후 그곳에서 여러 차례 녹음을 했으며, 1993년 리카르도 무티의 뒤를 이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 되어 2003년까지 재임했다. 2003년부터 2013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오케스트라의 계관 지휘자 직함을 유지했다.

3. 5. 기타 활동

그는 1947년 아우크스부르크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경력을 시작했다.[3] 처음에는 레페티토어 직책을 맡았고, 나중에는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1949년,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게르하르트 자이츠와 협연하여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1등상을 받았다. 1952~1953년에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국제 여름 아카데미에서 이고르 마르케비치의 개인 조수였다.[2]

1953년,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을 때 불과 30세였는데, 당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수석 지휘자였다. 1957년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며 데뷔했을 때, 그는 그곳에 출연한 역대 최연소 지휘자였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거절한 후, 자발리슈는 1960년 빈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10년 동안 이 직책을 역임했다. 1961년에는 함부르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시작하여 역시 10년 동안 이 직책을 맡았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그는 로망드 스위스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었다.

1971년부터 1992년까지 그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이었으며, 1983년부터 몇 년 동안은 동시에 총감독을 역임했다. 30년 동안 그는 뮌헨의 음악 행사에 밀접하게 관여했다. 여기서 그는 사실상 모든 주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를 지휘했으며, ''살로메''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그는 또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32번의 전곡 사이클을 지휘했으며, 뮌헨에서만 거의 1200번의 오페라 공연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6년, 1936년부터 1980년까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었던 유진 오르만디는 자발리슈를 초대했다. 자발리슈는 이후 그곳에서 여러 차례 녹음을 했으며, 1993년 리카르도 무티의 뒤를 이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 되어 2003년까지 재임했다. 2003년부터 2013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오케스트라의 계관 지휘자 직함을 유지했다. 그는 또한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 (도쿄)의 명예 계관 지휘자였으며, 30년 이상 매년 도쿄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 그는 1993년 산토리 음악상을 수상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음악 이론, 작곡을 배웠다. 10세 무렵 처음 본 오페라,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에 감동하여 지휘자를 지망, 현대 음악 지휘로 명성이 높은 한스 로스바우트에게 사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통신병으로 징집되어 이탈리아에서 포로가 되어 종전을 맞았다.

1953년에는 아헨, 1958년비스바덴, 1960년쾰른의 각 시립 가극장의 음악 총감독에 취임했다. 1953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처음 지휘했다. 1954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장례식에서 베를린 필의 추도 연주를 지휘했다. 1957년에는 런던에서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반주와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지휘로 데뷔하였고, 바이로이트 축제에 개막 공연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첫 출연을 했다.

카라얀빈 국립 오페라 극장으로, 루돌프 빙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로 자발리슈를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자발리슈는 자신은 아직 경험 부족이라는 이유로 모두 거절했다. [20]

가극장에서의 활약과 더불어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도 활약하여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 1971년부터 바이에른 국립 가극장의 음악 감독(1982년부터 1992년은 음악 총감독)에 취임했다. 1988년에는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모든 오페라를 상연하여 화제를 모았다.

바이에른에서 퇴임 후 리카르도 무티의 후임으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에 취임했다. 필라델피아에서 퇴임한 후에는 특정 직책에 취임하지 않고 프리 지휘자가 되어 베를린 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심포니, 필라델피아,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오케스트라를 정기적으로 지휘했지만 2006년 3월, 5월 이후에 예정되었던 필라델피아나 로마 등에서의 콘서트를 심장병 악화를 이유로 취소하고 현역에서 은퇴를 사실상 표명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토스카니니 배턴, 베를린 필로부터 니키슈 메달,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로부터 브루크너 메달을 받았다.

4. 음악 스타일 및 레퍼토리

자발리슈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 해석가로 명성을 얻었다.[9][10][11] 피아니스트로서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마가렛 프라이스 등 여러 저명한 성악가들의 가곡 반주를 맡았다. 로베르트 슈만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해석으로도 명성을 얻었다.[12]

피아노 반주자로서 프란츠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와 로베르트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토마스 햄슨과 함께 녹음했다. 1994년 2월 11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공연은, 심한 눈보라로 인해 오케스트라 단원 대부분이 음악 아카데미에 도착하지 못하자 자발리슈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대신하여 바그너 전곡 연주회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13][14][15]

모든 파트에 시선이 미치는 지휘자로, 함께 연주한 합창 지휘자는 "지휘대에서 투망을 걸어 놓은 것 같다"고 놀랐다. 연주 스타일은 기교를 부리는 면이 없고, 평론가 우노 코호는 "외과 의사 같다", "장래에는 뵘을 보다 현대화한 명장이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레퍼토리로는 고전파・낭만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의 정통파 곡목이 주를 이룬다.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에서도 훌륭한 연주를 펼쳤지만, 그 이상으로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R. 슈트라우스 등의 연주로 알려져 있다.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 관해서는 뵘 사후의 전도사적 존재였다 (장년기의 『카프리치오』를 시작으로 EMI에 주요 작품을 녹음했다). 멘델스존은 관현악 작품 전곡을 교정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다루었다. 슈만의 연주에 있어서는, 말러 이래 행해지던 교향곡의 개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원전을 존중하는 연주를 한다. 슬라브 계열의 곡을 즐겨, 『백조의 호수』는 3번의 녹음・수록을 하였으며, 드보르자크스메타나를 빈번하게 다루었다.

애국심이 강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여러 번 지휘한 독일인 지휘자이며(오스트리아 제국이나 나치 독일 지배의 역사도 있어 체코에서는 독일인 지휘자를 꺼리는 경향이 있어, 후년의 음악 감독 게르트 알브레히트도 단기로 끝났다), 찰스 매케라스에게 "저와 자발리슈는 체코의 음악과 오케스트라를 매우 좋아합니다"라고 말하게 할 정도이다. 근현대 작품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접근하여 녹음을 하고 있다.

5. 한국과의 관계

볼프강 자발리슈는 1964년 11월, NHK 교향악단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하였고, 이후 거의 매년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는 NHK 교향악단 객원 지휘 외에도 바이에른 국립 가극단(1974년, 1988년, 1992년) 및 필라델피아 관현악단(1993년, 1999년)과의 내한 공연을 통해 일본에서도 친숙한 거장이 되었다. 2003년 11월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내한할 계획이었으나, 건강 문제로 취소되었다.

6. 일본과의 관계

1964년 11월, NHK 교향악단의 초청으로 처음 일본을 방문한 이후 거의 매년 일본을 방문했다. NHK 교향악단 객원 지휘 외에도 바이에른 국립 가극단(1974년, 1988년, 1992년) 및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1993년, 1999년)과의 일본 공연을 통해 일본에서도 친숙한 거장이 되었다.

NHK 교향악단에서는 1967년 명예 지휘자, 1994년 계관 명예 지휘자가 되었다. N 교향악단과는 정기 공연 외에도 해외 공연 및 니키카이와 함께한 오페라 상연 등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1970년 베토벤 탄생 200주년 사이클, 1973년 NHK 홀 개관 공연, 1986년10월 1일 제1000회 정기 공연과 2001년 창립 75주년 기념 공연(모두 멘델스존오라토리오 『엘리야』) 등 N 교향악단의 중요한 연주회에 반드시 등장했다. 2004년에는 노령으로 인해 의자에 가볍게 앉아 지휘했으며, 2005년 예정되었던 공연은 건강 문제로 취소되어, 2004년의 출연(베토벤의 교향곡 7번 외)이 마지막 협연이 되었다.

자발리슈는 "일본의 다른 오케스트라와는 협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N 교향악단에 애정을 보였고, N 교향악단 또한 자발리슈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N 교향악단 단원들이 자발리슈에게 호감을 가진 이유 중 하나는 "리허설이 매우 짧고 합리적"이라는 점이었다.

은퇴 후 2006년 7월 NHK의 인터뷰를 받았으며, 일부 내용은 2007년2월 12일 방송된 N 교향악단 창립 80주년 기념 프로그램에 사용되었다. N 교향악단의 레퍼토리가 독일 음악에 편중되어 있다는 의견도 있다.

훈3등욱일중수장을 수훈했으며, 일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협회 명예 총재를 역임했다.

7. 주요 음반

볼프강 자발리슈는 EMI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카프리치오로베르트 슈만의 네 개의 교향곡을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과 함께 녹음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73년에는 EMI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마술피리를 쿼드러포닉 스테레오 앨범(아마도 유일한 앨범)으로 제작했다. 이 앨범에는 페터 슈라이어가 타미노, 아넬리제 로텐베르거가 파미나, 발터 베리가 파파게노, 에다 모저가 밤의 여왕, 쿠르트 몰이 자라스트로 역을 맡았다. 특히 이 녹음의 밤의 여왕 아리아는 1977년 NASA에 의해 보이저 골든 레코드에 포함되어 보이저 우주선에 실려 우주로 보내졌다.[16][17][18]

자발리슈의 다른 녹음(EMI, Orfeo, Philips 및 Sony)은 다음과 같다.

작곡가작품명오케스트라/합창단비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아홉 개의 교향곡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요하네스 브람스독일 레퀴엠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및 합창단
네 개의 교향곡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네 개의 교향곡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톤 브루크너교향곡 1번, 4번, 5번, 6번, 9번
안토닌 드보르자크레퀴엠, 스타바트 마테르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교향곡 7번–9번, 첼로 협주곡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펠릭스 멘델스존교향곡 2번베를린 필하모닉과 뒤셀도르프 합창단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마술피리프란시스코 아라이자, 루치아 포프, 쿠르트 몰 (비디오 녹화)
프란츠 슈베르트아홉 개의 교향곡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미사곡 A flat major D 678, C major D 452, E flat major D 950, Tantum Ergo D 962, Offertorium D 963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및 합창단종교 합창 작품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관현악 편곡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간주곡, 엘렉트라, 평화의 날, 그림자 없는 여인, 아라벨라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영웅의 생애, 가정 교향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호른 협주곡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데니스 브레인 협연
베젠동크 가곡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마리아나 리포브셰크 협연
주세페 베르디맥베스실황 녹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리하르트 바그너니벨룽의 반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요정들, 사랑의 금지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탄호이저, 로엔그린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제외)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와 촬영, 트리스탄과 이졸데, 탄호이저, 로엔그린은 공식 발매
카를 마리아 폰 베버서곡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두 개의 교향곡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필라델피아에서의 마지막 콘서트와 녹음 프로젝트는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에 집중되었으며, 2003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자체 레이블로 발매되었다.[19]

8. 저서

Im Interesse der Deutlichkeit. Mein Leben mit der Musik|음악과 나의 인생 - 자발리쉬 자전de, 1988년

참조

[1] 뉴스 Maestro Wolfgang Sawallisch, 1923–2013 http://www.philly.co[...] 2014-11-26
[2] 간행물 Antonín Dvořák Symphony No. 4, Op. 88 (Philharmonia Orchestra) Columbia Records
[3] 뉴스 Old school titan https://www.theguard[...] 2007-08-08
[4] 뉴스 Channeling Bruckner, Maestro Illuminates Elusive Score https://query.nytime[...] 2007-08-08
[5] 뉴스 Report: Wolfgang Sawallisch Has Retired http://www.playbilla[...] 2008-01-11
[6] 뉴스 At home with the maestro 2006-08-27
[7] 뉴스 A 79-Year-Old Champion of Youth https://query.nytime[...] 2008-01-11
[8] 뉴스 Maestro Sawallisch, who led Philadelphia Orchestra for a decade, dies at 89 http://www.newsworks[...] 2013-02-27
[9] 뉴스 A Cheery, Old-World 'Ariadne' https://query.nytime[...] 2007-08-08
[10] 뉴스 Music: A Musical Capital Looks to America https://query.nytime[...] 2007-08-08
[11] 뉴스 A Hero's Tenure http://www.playbilla[...] 2008-01-11
[12] 뉴스 Channeling Bruckner, Maestro Illuminates Elusive Score https://query.nytime[...] 2008-01-11
[13] 뉴스 Snow or no snow, the show went on 1994-02-13
[14] 뉴스 "Bons mots" instead of notes from Maestro 1994-02-28
[15] 뉴스 Chronicle https://query.nytime[...] 2008-01-11
[16] 웹사이트 Voyager - Music on the Golden Record https://voyager.jpl.[...] 2021-05-04
[17] 웹사이트 Late Junction: The songs they sent to space https://www.bbc.co.u[...] BBC Radio 3 2021-05-04
[18] 서적 Murmurs of Earth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Publishing Group 2013-04-02
[19] 뉴스 Back to Schumann, With Care and Passion https://query.nytime[...] 2007-08-08
[20] 뉴스 Wolfgang Sawallisch obituary http://www.guardian.[...] ガーディアン
[21] 뉴스 独指揮者のサバリッシュさん死去…N響でも活躍 http://www.yomiuri.c[...] 2013-02-24
[22] 뉴스 Maestro Wolfgang Sawallisch, 1923–2013 http://www.philly.co[...] 2014-11-26
[23] 간행물 Antonín Dvořák Symphony No. 4, Op. 88 (Philharmonia Orchestra) Columbia Records
[24] 뉴스 Old school titan https://www.theguard[...] 2007-08-08
[25] 간행물 Antonín Dvořák Symphony No. 4, Op. 88 (Philharmonia Orchestra) Columbia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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