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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적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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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항력적 은혜는 칼뱅주의 신학의 핵심 교리 중 하나로, 구원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시어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알미니안주의의 선행 은혜와 대립하며, 요한복음 6장과 로마서 8장 등 성경 구절을 근거로 제시된다. 불가항력적 은혜는 자유 의지를 침해하고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교리는 한국 장로교에서 주류 신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감리교 등 다른 교단에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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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적 은혜
기독교 신학
교파개혁주의
다른 이름효과적인 은혜
관련된 주제예정설, 하나님의 은혜, 구원론, 칼뱅주의

2. 교리

칼뱅주의, 알미니안주의, 루터교는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 칼뱅주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하며, 중생이 믿음에 선행한다고 주장한다.[4]
  • 알미니안주의: 하나님의 선행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인간은 이 은혜를 거부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4]
  • 루터교: 구원 사역을 단일행위론적으로 보지만, 성령의 역사 방식에 대한 이해에서 칼뱅주의와 차이를 보인다. 루터교는 성령이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외적으로 역사할 때마다, 그것들을 통해서도 항상 내적으로 역사하며, 효력 있게 역사한다고 믿는다.[19]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을 위해 선택된 자들에게 영원한 은혜의 선물을 주어, 그들이 결코 타락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다. 이 교리는 불가항력적 은혜(''gratia irresistibilis'') 교리를 낳았지만, 이 용어는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3]

2. 1. 칼뱅주의

칼뱅주의에서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하며, 중생이 믿음에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존 칼빈은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 "외부의 힘으로 사람들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꺼리고 주저했던 사람들을 기꺼이 만들도록 하는 성령의 강력한 충동"이라고 설명했다.[5] 존 길은 "이 끄는 행위는 권능의 행위이지만, 강압은 아니다. 하나님은 완고한 자를 그분의 능력의 날에 기꺼이 만드신다. 지각을 밝히시고, 의지를 굽히시며, 살로 된 마음을 주시고, 은혜의 능력으로 부드럽게 유혹하여 영혼이 그리스도께 나아가 자신을 드리게 하신다. 사랑의 끈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끄는 것은 권능과 영향을 가정하지만, 항상 강제와 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음악은 귀를, 사랑은 마음을, 쾌락은 정신을 끈다."라고 설명했다.[8]

2. 1. 1. 칼뱅주의의 관점

칼뱅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자유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받는다. 인간은 양심이 연약하거나 믿음이 굳건해서 은혜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4] 오히려 하나님께서 죄의 권세와 형벌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신실하심의 증거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와 능력이다. 죄 가운데 죽어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거나 하나님을 따를 수 없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고 죄인을 불가항력적으로 이끄심으로써 강력하게 개입하신다.[4] 즉, 칼뱅주의는 중생이 믿음보다 먼저라고 주장한다.

존 칼빈은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을 "외부의 힘으로 사람들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꺼리고 주저했던 사람들을 기꺼이 만들도록 하는 성령의 강력한 충동"이라고 설명한다.[5] 존 길은 "이 끄는 행위는 권능의 행위이지만, 강압은 아니다. 하나님은 완고한 자를 그분의 능력의 날에 기꺼이 만드신다. 지각을 밝히시고, 의지를 굽히시며, 살로 된 마음을 주시고, 은혜의 능력으로 부드럽게 유혹하여 영혼이 그리스도께 나아가 자신을 드리게 하신다. 사랑의 끈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끄는 것은 권능과 영향을 가정하지만, 항상 강제와 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음악은 귀를, 사랑은 마음을, 쾌락은 정신을 끈다."라고 덧붙였다.[8]

2. 2. 알미니안주의

알미니안주의는 칼뱅주의와 달리 하나님의 선행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은 이 은혜를 거부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4]

2. 2. 1. 알미니안주의의 반박

알미니안주의는 칼뱅주의의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침해하고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반박한다.

존 웨슬리를 비롯한 감리교 운동과 관련된 알미니안주의 신자들은 칼뱅주의 교리를 거부한다. 이들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듯이,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행 은총(앞선 은총) 덕분에 죄에서 의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은총을 베푸신 후, 이전에는 하나님께 반대하고 순종할 수 없었던 인간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순종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은 구원을 위한 강력한 초기 촉매제이지만, 결국 인간에 의해 거부되고 저항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4]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모두 은총의 저항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학 체계의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개인에게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도록 허용하고도 여전히 주권을 유지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만약 그렇다면 은총은 저항 가능하며, 그렇지 않다면 은총은 거부할 수 없어야 한다.

칼뱅주의자 찰스 호지는 알미니안주의 교리가 그들의 교리 체계의 다른 부분이 옳다면 옳고, 그 체계가 잘못되었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9] 그는 인간의 타락 이후의 자연 상태와 선택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교리가 성경적이라면, 충분한 은총이 인간 의지의 협력으로부터 효력을 갖게 되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칼뱅주의는 선행 은총을 거부하므로 인류는 전적 타락 상태에 놓이게 되며, 이는 개인이 믿거나 회개하기 전에 개인의 중생을 필요로 한다.[10] 그러나 신약은 이전에 중생했음을 암시하지 않고 개인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정기적으로 부른다.

2. 3. 루터교

루터교는 칼뱅주의와 마찬가지로 구원 사역을 단일행위론적으로 본다. 즉, 회심하지 않거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그분의 방식을 거부하고 거절한다.[12] 그러나 성령의 역사 방식에 대한 이해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루터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식별할 수 있는 확실한 표시는 복음의 순수한 설교입니다."라고 말했다.[11]

루터의 설교

2. 3. 1. 루터교의 관점

루터교는 칼뱅주의와 마찬가지로 구원 사역을 단일행위론적으로 본다. 즉, 회심하지 않거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그분의 방식을 거부하고 거절한다.[12] 화해 신조는 회심하는 동안에도, 인간이 "하나님께서 죄의 죽음에서 깨어나 그를 계몽하고 새롭게 하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거부한다고 말한다.[13] 루터교와 칼뱅주의 모두 복음 설교를 하나님께서 구원을 제공하시는 은혜의 수단으로 본다.

칼뱅주의와 달리, 루터교는 성령이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외적으로 역사할 때마다, 그것들을 통해서도 항상 내적으로 역사한다고 주장한다. 루터교는 성령이 항상 효력 있게 역사한다고 믿는다.[19]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지는 말씀은 회심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되는 말씀만큼이나 효력이 있다.[16] 화해 신조는 인간이 성령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은 말씀의 효력이 덜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르심을 통해 제공하시고, 효력 있게 되기를 원하시며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을 거스르는, 인간의 사악한 의지"의 결과라고 가르친다.[17]

루터교는 성령의 사역이 단순히 은혜의 수단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은혜의 수단이 발견되는 곳 어디에서나 항상 그것들을 통해 역사한다고 확신한다. 루터교는 성령이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만 역사하도록 제한하고 다른 곳에서는 역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18] 따라서 은혜의 수단을 거부하는 사람은 동시에 성령과 성령이 가져다주는 은혜를 거부하고 거절하는 것이다.[19]

3. 성경적 근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사람들은 반드시 완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확증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셨고, 예정하신 자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자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8, 30).[20] 그러나 베드로는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언급한다.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요한복음 6장의 해석을 두고 의견이 갈린다. 칼뱅주의는 요한복음 6장의 특정 구절들을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의 핵심 증거 구절로 본다. 알미니안주의는 이에 대해 요한복음 6:44에 사용된 "이끌다"라는 헬라어 동사(ἕλκωgrc, 헬코)가 반드시 강제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요한복음 18:10, 21:6, 21:11, 사도행전 16:19, 21:30, 야고보서 2:6과 70인역 예레미야 38:13을 근거로 하여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3. 1. 요한복음 6장

요한복음 6장은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에 대한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간의 주요 논쟁점 중 하나를 보여준다.

칼뱅주의자들은 요한복음 6장의 다음 구절들을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를 뒷받침하는 핵심 증거 구절로 제시한다.[20]

  • 요한복음 6:37, 3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ESV]
  • 요한복음 6:44–45: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ESV]
  • 요한복음 6:65: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안 되니라." [ESV]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요한복음 6:44에서 사용된 "이끌다" (헬라어: ἕλκωgrc, ''헬코'')[20]라는 단어가 반드시 강제적인 의미를 내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70인역의 예레미야 38:13을 예로 들며, 이 구절에서 헬라어 동사 ''헬코''는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구조될 때, 그의 의지와 협력 하에 이루어진 행동을 묘사한다고 설명한다.[21] 따라서 "이끌다"는 단어는 능력의 근원을 나타낼 뿐, 이끌림을 받는 사람의 반응 여부나 의지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칼뱅주의자들은 요한복음 6:44과 12:32에서 "이끌다"라는 단어가 그 일반적인 의미론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그들은 요한복음 12:32("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에서 "모든 사람"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의미하며, 이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린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21]

이러한 주장에 대해 알미니안주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요한복음 6:44에서 "사람의 저항이 하나님의 이끄심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22] 그러나 해설자 레온 모리스는 "(바클레이의) '이끌다'라는 동사의 예시 중 저항이 성공적이었던 경우는 하나도 없다"고 반박하며, 신약성경에서 이 동사가 사용된 모든 경우에 이끄는 힘이 항상 승리한다고 강조한다.[22]

이러한 논쟁은 칼뱅주의자들이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면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지나치게 보호하려다 죄인들의 실제적인 의롭다 함에 믿음이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부정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23]

결론적으로, "이끌다"라는 단어의 의미와 그 적용 범위에 대한 해석 차이는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간의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에 대한 이해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이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능력, 즉 선행 은총을 제공하기 위해 이끄신다고 믿는 반면, 칼뱅주의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중생으로 이끄신다고 믿는다.[24]

3. 2. 로마서 8장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사람들이 반드시 완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확증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셨고, 예정하신 자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자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8, 30).[20]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께서 특정 개인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을 때, 누가 응답하고 순종할지 고려하지 않으셨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칼뱅주의자들은 요한복음 6장의 여러 구절들을 칼뱅주의 교리의 핵심적인 증거 구절로 제시한다.

  • 요한복음 6:37, 3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요한복음 6:44–45: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요한복음 6:65: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안 되니라."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요한복음 6:44에서 사용된 "이끌다" (헬라어: ἕλκωgrc, ''헬코'')라는 단어가 "끌다"의 의미를 반드시 갖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뱅주의자들은 이것이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라고 가르친다(예: 요한복음 18:10; 21:6; 21:11; 사도행전 16:19; 21:30; 야고보서 2:6). 그들은 요한복음 12:32를 예로 든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것을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이끄시지만, 단지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갈 수 있게 할 뿐이라고 해석한다. 만약 그 부르심이 진정으로 불가항력적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70인역에서 예레미야 38:13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건져질 때, 이 헬라어 동사가 사용되었으며, 이 구조는 예레미야의 뜻과 협력하여 수행되었고, 그가 협력하지 않았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끌다"의 의미가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단지 능력의 근원을 나타내는 것이지,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 그 이끌림에 응답하는지 여부나,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끌림이 행해지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칼뱅주의자들은 (1) "이끌다"라는 단어가 요한복음 6:44과 12:32 모두에서 그 일반적인 의미론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모든"이라는 단어(12:32절에서 "모든 사람"으로 번역됨)는 "모든 개인"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람들"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3) 전자는 구원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내적 부르심을, 후자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린 것을 의미하며, 보편적이고 저항할 수 있는 내적 부르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주장은 제한 속죄 또는 보편 구원주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요한복음 12:32절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이끄실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근거에 따라 요한복음 6:44절의 본문이 함축하는 것은 보편 구원주의나 칼뱅주의(제한 속죄 포함)일 수 있지만, 알미니안주의는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21]

알미니안주의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요한복음 6:44에 언급된 "사람의 저항이 하나님의 이끄심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해설자 레온 모리스는 "(바클레이의) '이끌다'라는 동사의 예시 중 저항이 성공적이었던 경우는 하나도 없다. 사실 더 나아가 말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 이 동사가 사용된 예 중에서 저항이 성공적이었던 경우는 하나도 없다. 항상 이끄는 힘이 승리하며, 여기에서도 그렇다."라고 반박한다.[22] 이러한 주장은 칼뱅주의자들이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지나치게 보호하려다 죄인들의 실제적인 의롭다 함에 믿음이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부정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킨다.[23] 그러나 이끄는 힘이 항상 승리한다 하더라도,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은 요한복음 12:32의 "이끌다"라는 단어의 의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끌다"가 무엇을 성취하려는 의도인지에 달려 있다. 칼뱅주의는 예수님이 "이끄시는" 사람들이 중생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알미니안주의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로 이끌려져 은혜를 부여받는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에서 '그분의 이끄심'이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 정의하지 않으시고, 단지 그것을 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4] 심지어 "이끌다"의 의미론이 칼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단지 이끌 능력의 충분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요한복음 21:6절에서처럼 "이끌 수 없었다"거나 요한복음 21:11절에서처럼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자들에게 무엇을 하시는지 정의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인 중생을 목적으로 이끄신다는 칼뱅주의의 가르침을 거부한다. 오히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능력이나 가능성을 제공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이끄신다고 믿으며, 이는 선행 은총이 가르치는 바와 같다.

3. 3. 기타 성경 구절

바울은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사람들이 반드시 완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셨고, 예정하신 자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자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8, 30).[20] 그러나 베드로는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언급한다.

칼뱅주의자들은 요한복음의 여러 구절들을 칼뱅주의 교리의 핵심적인 증거 구절로 제시한다.

  • 요한복음 6:37, 3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요한복음 6:44–45: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요한복음 6:65: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안 되니라."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요한복음 6:44에서 사용된 "이끌다" (헬라어: ἕλκωgrc, ''헬코'')[20]라는 단어가 "끌다"의 의미를 반드시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칼뱅주의자들은 이것이 일반적인 의미라고 가르친다(예: 요한복음 18:10; 21:6; 21:11; 사도행전 16:19; 21:30; 야고보서 2:6).[20] 그들은 요한복음 12:32를 예로 든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20]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것을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이끄시지만,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갈 수 있게 할 뿐이며, 만약 그 부르심이 불가항력적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해석한다.[20] 또한 70인역 예레미야 38:13에서 헬라어 동사가 예레미야가 자신의 팔 아래 밧줄을 잡은 후에 그의 구조자들이 수행한 행동에 사용되었으며, 이 구조가 예레미야의 뜻과 협력하여 수행되었고, 그가 협력하지 않았다면 실패했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고 말한다.[20] 그러므로 "이끌다"의 의미가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단지 능력의 근원을 나타내는 것이지,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 그 이끌림에 응답하는지 여부나,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끌림이 행해지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20]

칼뱅주의자들은 (1) "이끌다"라는 단어가 요한복음 6:44과 12:32 모두에서 그 일반적인 의미론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1] (2) "모든"이라는 단어(12:32절에서 "모든 사람"으로 번역됨)는 "모든 개인"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람들"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21] 따라서 (3) 전자는 구원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내적 부르심을, 후자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린 것을 의미하며, 보편적이고 저항할 수 있는 내적 부르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1] 이 주장은 제한 속죄 또는 보편 구원주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요한복음 12:32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이끄실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21]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근거에 따라 요한복음 6:44의 본문이 함축하는 것은 보편 구원주의나 칼뱅주의(제한 속죄 포함)일 수 있지만, 알미니안주의는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21]

알미니안주의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요한복음 6:44에 언급된 "사람의 저항이 하나님의 이끄심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22] 해설자 레온 모리스는 "(바클레이의) '이끌다'라는 동사의 예시 중 저항이 성공적이었던 경우는 하나도 없다. 사실 더 나아가 말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 이 동사가 사용된 예 중에서 저항이 성공적이었던 경우는 하나도 없다. 항상 이끄는 힘이 승리하며, 여기에서도 그렇다."라고 반박한다.[22] 이러한 주장은 칼뱅주의자들이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지나치게 보호하려다 죄인들의 실제적인 의롭다 함에 믿음이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부정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킨다.[23] 그러나 이끄는 힘이 항상 승리한다 하더라도,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은 요한복음 12:32의 "이끌다"라는 단어의 의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끌다"가 무엇을 성취하려는 의도인지에 달려 있다.[24] 칼뱅주의는 예수님이 "이끄시는" 사람들이 중생할 것이라고 가정한다.[24] 알미니안주의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로 이끌려져 은혜를 부여받는다고 말한다.[24]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에서 '그분의 이끄심'이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 정의하지 않으시고, 단지 그것을 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4] 심지어 "이끌다"의 의미론이 칼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단지 이끌 능력의 충분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요한복음 21:6에서처럼 "이끌 수 없었다"거나 요한복음 21:11에서처럼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자들에게 무엇을 하시는지 정의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24]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인 중생을 목적으로 이끄신다는 칼뱅주의의 가르침을 거부한다.[24] 오히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능력이나 가능성을 제공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이끄신다고 믿으며, 이는 선행 은총이 가르치는 바와 같다.[24]

4. 역사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발전되어 왔다.

일부에서는 4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교리의 초기 형태를 제시했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을 위해 선택된 자들에게는 결코 타락할 수 없는 영원한 은혜가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불가항력적 은혜'(''gratia irresistibilis'')라는 용어로 발전했지만, 이 용어 자체는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3]

16세기 말, 가톨릭 교회 내에서는 효력 있는 은혜와 자유 의지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조 위원회(Congregatio de Auxiliis)를 설립했다. 도미니코회는 효력 있는 은혜의 역할을 강조한 반면, 예수회몰리니즘을 통해 의지에 더 큰 자유를 부여했다. 이러한 논쟁은 프랑스에서 얀센주의와 예수회의 대립으로 이어진 공식 논쟁으로도 이어졌다.

4. 0. 1.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을 위해 선택된 자들에게 영원한 은혜의 선물을 주어, 그들이 결코 타락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다. 이 교리는 불가항력적 은혜(''gratia irresistibilis'') 교리를 낳았지만, 이 용어는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3]

4. 0. 2. 종교 개혁 시기

종교 개혁 시기,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칼뱅주의는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은 죄의 노예이므로 스스로 하나님을 따를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개입하셔서 죄인을 이끄신다는 것이다. 존 칼빈은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이 폭력적인 강요가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충동으로 이전에 꺼리던 사람들을 기꺼이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5] 존 길은 "끄는 행위는 권능의 행위이지만, 강압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완고한 자를 그분의 능력으로 기꺼이 만드시고, 사랑의 끈으로 이끄신다고 설명했다.[8]

반면, 알미니안주의는 선행 은혜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복음에 응답할 의지를 갖게 된다고 주장했다.[4] 이는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는가에 대한 칼뱅주의와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러한 논쟁은 도르트 신조에서 5개조 칼뱅주의로 정의되었는데,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칼뱅주의의 예정론이 자유 의지를 부정하고, "영원히 지옥에서 고문할 목적으로 인류의 대다수를 정죄하고,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을 거부했다.[25]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효력 있는 은혜와 자유 의지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이는 보조 위원회(Congregatio de Auxiliis)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효력 있는 은혜의 역할을 주장한 반면, 예수회는 의지에 더 큰 자유를 부여하는 몰리니즘을 지지했다.

4. 1. 도르트 회의

칼뱅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간의 논쟁은 도르트 회의에서 5대조 칼뱅주의가 확립되면서 정점에 달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칼뱅주의의 예정론에 반대하며, 자유 의지를 부정하고 "영원히 지옥에서 고문할 목적으로 인류의 대다수를 정죄하고,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을 거부했다.[25]

도르트 회의에서 정의된 5대조 칼뱅주의에서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칼뱅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자유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받는다. 즉, 인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연약한 양심이나 더 굳건한 믿음을 가져서 은혜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죽어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을 당신께로 불가항력적으로 이끄심으로써 강력하게 개입하신다. 칼뱅주의는 중생이 믿음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행 은혜가 중생 전에 하나님을 알고 복음에 응답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4]

존 칼빈은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이 "외부의 힘으로 사람들을 강요할 만큼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이전에 꺼리고 주저했던 사람들을 기꺼이 만들도록 하는 성령의 강력한 충동이다."라고 설명했다.[5] 존 길은 "이 끄는 행위는 권능의 행위이지만, 강압은 아니다. 하나님은 완고한 자를 끌어당기실 때 그분의 능력의 날에 기꺼이 만드신다... 그분은 사랑의 끈으로 이끄신다."라고 덧붙였다.[8]

칼뱅주의 교회에서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는 구원 계획 및 타락 이후 인류의 상태와 관련하여 언급되지만, 그 자체로 설교나 연구의 흔한 주제는 아니다.

4. 2. 현대 신학 논쟁

현대 신학에서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칼뱅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죄의 권세 아래 있기에 스스로 하나님을 따를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개입하셔서 죄인을 불가항력적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존 칼빈은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이 "외부의 힘으로 사람들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충동으로 이전에 꺼리고 주저했던 사람들을 기꺼이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5] 존 길은 "이 끄는 행위는 권능의 행위이지만, 강압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은 사랑의 끈으로 사람들을 부드럽게 이끄신다고 덧붙였다.[8]

반면, 알미니안주의는 선행 은혜를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중생 전에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고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4] 즉,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시는가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구분하는 핵심이다.

일부에서는 4세기 교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구원을 위해 선택된 자들에게 영원한 은혜의 선물을 주어 그들이 결코 타락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고 주장하며, 이 교리가 불가항력적 은혜(''gratia irresistibilis'') 교리의 기원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는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3]

5. 한국 교회의 상황

한국 개신교 내에서는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장로교칼뱅주의 전통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며, 인간의 자유 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반면, 감리교는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선행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4]

5. 1. 장로교

칼뱅주의에 따르면,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 즉, 인간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연약한 양심이나 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은혜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와 능력은 하나님께서 죄의 권세와 형벌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신실하심의 증거이며, 인간은 죄 가운데 죽어 죄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스스로 결정하거나 하나님을 따르도록 유혹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을 주시고 죄인을 불가항력적으로 당신께로 이끄심으로써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 요컨대 칼뱅주의는 중생이 믿음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알미니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행 은혜가 중생 전에 하나님을 알고 복음에 응답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4]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는가이다.

존 칼빈은 이러한 개입에 대해 "그것은 외부의 힘으로 사람들을 강요할 만큼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이전에 꺼리고 주저했던 사람들을 기꺼이 만들도록 하는 성령의 강력한 충동이다."라고 설명했다.[5] 칼빈과 칼뱅주의 고백서에서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6][7] 존 길은 "이 끄는 행위는 권능의 행위이지만, 강압은 아니다. 하나님은 완고한 자를 끌어당기실 때 그분의 능력의 날에 기꺼이 만드신다. 그분은 지각을 밝히시고, 의지를 굽히시며, 살로 된 마음을 주시며, 그분의 은혜의 능력으로 부드럽게 유혹하시고, 영혼이 그리스도께 나아가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데 관여하게 하신다. 그분은 사랑의 끈으로 이끄신다. 끄는 것은 권능과 영향을 가정하지만, 항상 강제와 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음악은 귀를 끌고, 사랑은 마음을 끌고, 쾌락은 정신을 끈다."라고 설명했다.[8]

5. 2. 감리교

칼뱅주의와 달리 알미니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행 은혜가 중생 전에 하나님을 알고 복음에 응답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4] 한국 감리교는 알미니안주의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다고 믿는다.

5. 3. 기타 교단

제시된 자료에는 성결교, 침례교 등 한국의 다른 개신교 교단들의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6. 비판과 반론

일부에서는 4세기 교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구원을 위해 선택된 자들에게 영원한 은혜의 선물을 주어, 그들이 결코 타락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이 교리는 불가항력적 은혜(''gratia irresistibilis'') 교리를 낳았지만, 이 용어는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3]

6. 1. 자유 의지 문제

칼뱅주의에 따르면,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 즉, 인간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연약한 양심이나 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은혜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와 능력은 하나님께서 죄의 권세와 형벌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신실하심의 증거이며, 인간은 죄 가운데 죽어 죄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스스로 결정하거나 하나님을 따르도록 유혹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을 주시고 죄인을 불가항력적으로 당신께로 이끄심으로써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 요컨대 칼뱅주의는 중생이 믿음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알미니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행 은혜가 중생 전에 하나님을 알고 복음에 응답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4]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는가이다.

존 칼빈은 이러한 개입에 대해 "그것은 외부의 힘으로 사람들을 강요할 만큼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이전에 꺼리고 주저했던 사람들을 기꺼이 만들도록 하는 성령의 강력한 충동이다."라고 하였다.[5] 칼빈과 칼뱅주의 고백서에서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6][7] 존 길은 "이 끄는 행위는 권능의 행위이지만, 강압은 아니다. 하나님은 완고한 자를 끌어당기실 때 그분의 능력의 날에 기꺼이 만드신다. 그분은 지각을 밝히시고, 의지를 굽히시며, 살로 된 마음을 주시며, 그분의 은혜의 능력으로 부드럽게 유혹하시고, 영혼이 그리스도께 나아가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데 관여하게 하신다. 그분은 사랑의 끈으로 이끄신다. 끄는 것은 권능과 영향을 가정하지만, 항상 강제와 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음악은 귀를 끌고, 사랑은 마음을 끌고, 쾌락은 정신을 끈다."라고 하였다.[8]

6. 2. 하나님의 공의 문제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에 대해 칼뱅주의 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칼뱅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즉, 인간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연약한 양심이나 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은혜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와 능력은 하나님께서 죄의 권세와 형벌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신실하심의 증거이다. 인간은 죄 가운데 죽어 죄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스스로 결정하거나 하나님을 따르도록 유혹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을 주시고 죄인을 불가항력적으로 당신께로 이끄심으로써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4] 요컨대 칼뱅주의는 중생이 믿음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알미니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행 은혜가 중생 전에 하나님을 알고 복음에 응답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4]

존 칼빈은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 "그것은 외부의 힘으로 사람들을 강요할 만큼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이전에 꺼리고 주저했던 사람들을 기꺼이 만들도록 하는 성령의 강력한 충동이다."라고 설명했다.[5] 존 길은 "이 끄는 행위는 권능의 행위이지만, 강압은 아니다. 하나님은 완고한 자를 끌어당기실 때 그분의 능력의 날에 기꺼이 만드신다. 그분은 지각을 밝히시고, 의지를 굽히시며, 살로 된 마음을 주시며, 그분의 은혜의 능력으로 부드럽게 유혹하시고, 영혼이 그리스도께 나아가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데 관여하게 하신다. 그분은 사랑의 끈으로 이끄신다. 끄는 것은 권능과 영향을 가정하지만, 항상 강제와 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고 덧붙였다.[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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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The Quest for Truth: Answering Life's Inescapable Questions Randall House Publication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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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Our Wesleyan Heritage http://www.umc.org/w[...] 2018-09-25
[5] 서적 Commentary on John
[6] 웹사이트 Reformed Documents, Chapter X https://reformed.org[...] 2023-05-17
[7] 웹사이트 The Canons of Dort {{!}} Christian Reformed Church https://www.crcna.or[...] 2023-05-17
[8] 서적 John Gill's Exposition of the Bible
[9] 서적 Systematic Theology
[10] 서적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11] 서적 Selected Writings of Martin Luther https://books.google[...] Fortress Press 2007
[12] 간행물 Formula of Concord http://www.bookofcon[...]
[13] 웹사이트 Solid Declaration, art. ii, par. 59 http://www.bookofcon[...] 200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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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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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웹사이트 Solid Declaration, article xi, "Election", par. 41 http://www.bookofcon[...] 200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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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웹사이트 A Logical Analysis – John 6:44 http://www.geocities[...] 2009-03-26
[22] 서적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1995
[23] 서적 That Error and Pillar of Antinomianism': Eternal Justification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1
[24] 웹사이트 Being drawn to God? Calvinism and Arminianism in John 6:44 and John 12:32 http://yuriystasyuk.[...] 2017-05-29
[25] 웹사이트 Why Calvinism Makes Me Want to Gouge My Eyes Out http://www.patheos.c[...] 2017-04-16
[26] 서적 The Quest for Truth: Answering Life's Inescapable Ques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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