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 '만드는 모임')은 일본의 보수 논객들이 결성한 단체로, 기존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자학사관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하며, 자유주의 사관에 입각한 교과서 제작 및 보급을 목표로 한다. 1996년 결성 이후, 위안부 문제 등 역사 기술을 둘러싸고 논란을 일으켰으며, 여러 차례 조직 변동을 겪었다. 이들은 후소샤 등 출판사를 통해 교과서를 발행했으나, 역사 왜곡, 정확성 부족 등의 비판을 받았다. 교과서 채택을 둘러싸고 찬반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일본 내 다양한 평가와 함께 한국 등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 새역모 사무소 방화사건
새역모 사무소 방화사건은 2001년 8월 7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사무실에 시한식 발화 장치를 이용한 방화 테러가 발생했으며, 경찰은 신좌익 세력의 소행으로 규정했다. -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 이에나가 사부로
이에나가 사부로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검정 제도에 반대하며 소송을 제기하여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역사학자이자 교육자이다. -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 2005년 반일 시위
2005년 반일 시위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영토 분쟁 등 여러 요인으로 중국에서 발생하여 일본 관련 시설을 공격하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였으며 중일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일본 국민주의 - 욱일기
욱일기는 태양 문양 주위로 햇살을 그린 깃발로, 일본에서 경사스러운 상징으로 여겨져 왔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한국 등 피해 국가에서는 사용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 일본 국민주의 - 일본 군국주의
일본 군국주의는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일본 사회를 지배한 군부의 팽창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부국강병 정책, 서구 열강 경쟁 의식, 대공황 등의 배경 속에서 내셔널리즘 고조, 사상 통제, 군부의 독립적인 권력 행사 등의 특징을 보이며 침략 전쟁을 일으켰으나 태평양 전쟁 패배로 종말을 맞이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 |
---|---|
기본 정보 | |
명칭 | 일본 역사 교과서 개혁을 위한 모임 |
로마자 표기 | Atarashii Rekishi Kyōkasho o Tsukuru Kai |
약칭 | 쓰쿠루카이 |
설립일 | 1997년 1월 30일 |
설립자 | 니시오 간지, 후지오카 노부카쓰 등 |
목적 | 새로운 역사 및 시민 교과서와 기타 교과서의 제작을 기획 및 제안하고, 이를 아동과 학생에게 전달하는 것 |
본부 | 일본 도쿄도 분쿄구 스이도 2초메 6-3 TOP 에도가와바시 203호실 |
관련 조직 | 자유사 일본출판협회 일본회의 |
웹사이트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
기타 | |
관련 기관 | 일본정책연구센터 |
주요 활동 | 여기 이상한 중국, 한국 역사 교과서 출판 |
2. 발족 배경 및 목적
1999년,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 つくる会)은 일본 각 현에 새로운 교과서를 위한 광고 조직을 설립했고, 2000년에는 일본의 다른 민족주의 단체들과 함께 교육위원회에 새 교과서 채택을 위한 로비를 시작했다.[5] 자민당 소속 의원들이 이 모임을 지지하는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5]
1997년 1월 21일, "만드는 모임" 회원 7명은 고스기 다카시(小杉隆) 문부대신에게 교과서 내 위안부 관련 기술 삭제를 요구했지만, 고스기는 "전 종군위안부에 대한 것은 내각 외교 심의실의 조사로 명확해졌다. 의무 교육에 도입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말하며 요구를 거부했다.[9]
1997년 6월 6일, "만드는 모임"에는 많은 저명인사가 찬성 의사를 표했고, 동의자는 204명에 달했다.[17] 1999년 9월에는 회원 수가 1만 명을 넘어 전국 48개 지부 조직(도쿄는 2개)을 만들었고, 당시 연간 1.3억엔 이상의 예산으로 활동했다.
2. 1. 발족 배경
일본 역사 교과서 개정 협회는 일본 역사에 대한 자학적인 묘사와 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설명한다.[3] 이들은 교과서가 일본 역사의 어두운 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 일본이 전쟁의 참화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한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단체는 전후 미군 점령이 일본의 역사 인식을 형성하여 일본이 다시 국제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한다.[4]걸프전 이전까지 일본 공산당 당원이었던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는 냉전 종식 후 새로운 일본 근대사관 확립의 필요성을 느껴 보수 논객으로 전향했다. 그는 자신의 역사 검증 방법을 "자유주의 사관"이라고 명명했다.
1996년 1월 15일, 후지오카가 대표를 맡은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는 산케이 신문 오피니언 면에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 연재를 시작했다.[9][10] 같은 해 6월 27일, 문부성은 다음 학년도 중학교 사회 과목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는데, 종군위안부에 대해 기술한 7권 모두가 합격했다.[10] 이튿날 28일부터 "종군" 위안부와 난징 대학살 등을 교과서에 싣는 것은 "반일적·자학적·암흑적"이라며 삭제를 요구하는 항의 활동이 벌어졌다. 8월 10일, 후지오카는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와 공동 명의로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를 출판했다.
같은 해 12월 2일, 후지오카,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등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つくる会) 결성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니시오는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7개사의 중학교 교과서는 증거 불충분 상태로 종군위안부 강제 연행설을 일제히 채택했다. 안이한 자기 악역 사관에 도달한 하나의 귀결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11][12][13]
1997년 1월 30일, "만드는 모임"은 결성 총회를 열고 공식적으로 발족했다.[15] 발족 후 약 1개월 후인 2월 27일, 자민당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일본의 장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사무국장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취임했다. 중의원과 참의원을 합쳐 62명이 참가하여 운동을 크게 후원하게 되었다.[10][16]
2. 2. 목적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일본 역사에 대한 자학적인 묘사와 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3] 이들은 교과서가 일본 역사의 어두운 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일본이 전쟁의 참화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한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후 미군 점령이 일본의 역사 인식을 형성하여 일본이 다시 국제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한다.[4]1996년 1월 15일, 후지오카 신쇼가 대표를 맡은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는 산케이 신문 오피니언 면에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 연재를 시작했다.[9][10] 같은 해 6월 27일, 문부성은 다음 학년도 중학교 사회 과목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는데, 종군위안부에 대해 기술한 7권 모두 합격했다.[10]
이러한 상황에 대해 후지오카 신쇼, 니시오 간지, 고바야시 요시노리 등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결성하여,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이 증거 불충분 상태로 종군위안부 강제 연행설을 채택했다고 비판했다.[11][12][13]
3. 주요 활동 및 주장
일본 역사 교과서 개정 협회는 자신들의 목표를 일본 역사에 대한 자학적인 묘사와 싸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3] 이들은 교과서가 일본 역사의 어두운 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후 미군 점령이 일본의 역사 인식을 형성하여 일본이 다시 국제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한다.[4]
1999년, 이 단체는 일본 각 현에 새로운 교과서를 위한 광고 조직을 설립했고, 2000년에는 일본의 다른 민족주의 NGO들과 함께 교육위원회에 새로운 교과서 채택을 위한 로비를 시작했다. 자유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일본 역사 교과서 개정 협회를 지지하는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5]
후소샤에서 출판한 그들의 역사 교과서 『新しい歴史教科書』(新しい歴史教科書|아타라시이 레키시 쿄카쇼일본어, 새 역사 교과서)는 난징 대학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위안부 제도 등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일본 전쟁 범죄에 대한 설명을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교과서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과, 센카쿠 열도에 대한 주장도 강조하고 있다.
걸프전 이전까지 일본 공산당 당원이었던 후지오카 신쇼는 냉전 종식 후 새로운 일본 근대사관 확립의 필요성을 느껴 보수 논객으로 전향했다. 자신의 역사 검증 방법을 "자유주의 사관"이라고 명명했다.
1996년 1월 15일, 후지오카가 대표를 맡은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는 산케이 신문 오피니언 면에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 연재를 시작했다.[9][10] 같은 해 6월 27일, 문부성은 다음 학년도 중학교 사회 과목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고, 종군위안부에 대해 기술한 7권 모두 합격했다.[10] 이튿날부터 "종군" 위안부와 난징 대학살 등을 교과서에 싣는 것은 "반일적·자학적·암흑적"이라며 삭제를 요구하는 항의 활동이 벌어졌다. 8월 10일, 후지오카는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와 공동 명의로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를 출판했다. 같은 달,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SAPIO』 연재 "신·고마니즘 선언"에서 종군위안부의 증언과 언론 보도 내용에 의문을 제기했다.[10] 9월 7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현행 교과서를 공격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중학교 역사 교과서와 자신들이 집필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일본의 전후 역사 교육은 일본인이 계승해야 할 문화와 전통을 잊게 하고, 일본인의 자긍심을 잃게 하는 것이었다.[24]
- 냉전 종식 후에는 자학적인 경향이 강해지면서, 현행 역사 교과서는 위안부와 같이 과거 적국의 선전 선동을 사실로 기술하고 있다.[24]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세계사적 시각 속에서 일본과 일본인의 자화상을 품격과 균형을 갖추어 생생하게 그려내고자 한다.[24]
- "위안부와 강제 연행, 난징 사건을 삭제하고 창씨개명을 정당화하는 것이 올바른 교과서인가?"라는 질문에 "1996년 이전의 한국 교과서에도 위안부는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라고 답변했다.[25]
- 후소샤판 교과서가 학교에서 사용되지 않는 것은 일본에 있는 2대 교직원 노동조합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25]
- 근대 일본을 악행으로 그리는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차세대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일본 역사의 진실된 모습을 전해야 한다.[30]
3. 1. 주요 활동
1996년 12월 2일, 후지오카 신쇼, 니시오 간지, 고바야시 요시노리 등은 아카사카 엑셀 호텔 도큐에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 '만드는 모임') 결성 기자회견을 열었다.[11][12][13] 니시오는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7개사의 중학교 교과서는 증거 불충분 상태로 종군위안부 강제 연행설을 일제히 채택했다. 안이한 자기 악역 사관에 도달한 하나의 귀결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11]1997년 1월 30일, '만드는 모임'은 결성 총회를 열고 공식적으로 발족했다.[15] 발족 약 1개월 후인 2월 27일, 자민당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장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회"가 설립되어 운동을 크게 후원하게 되었다.[10][16]
'만드는 모임'은 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24]
- 일본의 전후 역사 교육은 일본인이 계승해야 할 문화와 전통을 잊게 하고, 일본인의 자긍심을 잃게 하는 것이었다.
- 냉전 종식 후에는 자학적인 경향이 강해지면서, 현행 역사 교과서는 위안부와 같이 과거 적국의 선전 선동을 사실로 기술하고 있다.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세계사적 시각 속에서 일본과 일본인의 자화상을 품격과 균형을 갖추어 생생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2005년 5월 10일, '만드는 모임'은 일본외국특파원협회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영역 영어 번역판을 배포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25]
- "위안부와 강제 연행, 난징 사건을 삭제하고 창씨개명을 정당화하는 것이 올바른 교과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1996년 이전의 한국 교과서에도 위안부는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라고 답변했다.
- 후소샤판 교과서가 학교에서 사용되지 않는 것은 일본에 있는 2대 교직원 노동조합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일본군의 학살과 강제 연행, 난징 사건을 쓰지 않았다. 일본이 전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마치무라 외무대신(당시)도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중에서 전쟁을 미화하는 교과서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주장하고 있다.
'만드는 모임'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주요 활동 |
---|---|
1996년 | |
1997년 | |
1999년 | |
2000년 | |
2001년 | |
2002년 | |
2004년 | |
2005년 | |
2006년 | |
2007년 | |
2013년 |
3. 2. 주요 주장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 만드는 모임)은 자신들의 역사관을 '자유주의 사관'이라고 부르며, 기존 역사 교과서가 일본 역사의 어두운 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러한 역사 교육이 일본인에게 자학적인 역사 인식을 심어준다고 비판하며, 전후 미군 점령이 일본의 역사 인식을 왜곡했다고 주장한다.[3][4]1997년에 발표된 취지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24]
- 전후 일본 역사 교육은 일본인이 계승해야 할 문화와 전통을 잊게 하고, 자긍심을 잃게 한다.
- 근현대사에서 일본인은 사죄하며 살아가도록 운명 지워진 죄인처럼 다루어진다.
- 냉전 종식 후 자학적인 경향이 강해져, 현행 역사 교과서는 위안부와 같이 과거 적국의 선전 선동을 사실로 기술한다.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일본인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들고자 한다.
- 아이들이 일본인으로서 자신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세계 평화와 번영에 헌신할 수 있도록 한다.
2005년 5월 10일, 일본외국특파원협회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만드는 모임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25]
- 위안부와 강제 연행, 난징 사건을 삭제하고 창씨개명을 정당화하는 것이 올바른 교과서인가에 대한 질문에, 1996년 이전 한국 교과서에도 위안부는 기술되지 않았고, 2005년 4월 12일자 아사히 신문 기사에 따르면 모든 교과서가 위안부를 삭제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 후소샤판 교과서가 학교에서 사용되지 않는 것은 일본의 2대 교직원 노동조합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일본군의 학살과 강제 연행, 난징 사건을 쓰지 않았다. 일본이 전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는 지적에, 마치무라 외무대신(당시)도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중에서 전쟁을 미화하는 교과서는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만드는 모임은 자신들의 교과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30]
- 근대 일본을 악행으로 그리는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차세대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일본 역사의 진실된 모습을 전해야 한다.
- 이 교과서는 "계급투쟁 사관"이나 "자학사관"에서 벗어나, 세계사적 시각 속에서 일본과 일본인의 모습을 균형있게 논술하고 있다.
4. 조직 구성 및 변천
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일본어(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약칭 츠쿠루카이)는 1996년 12월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종군위안부 강제 연행설을 채택한 중학교 교과서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높아지면서, 이들은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7년 1월 30일 결성 총회를 열고 정식으로 발족했으며,[15] 초기에는 아가와 사와코(阿川佐和子), 하야시 마리코(林真理子) 등 9명이 호소인으로 참여했고, 78명의 동의자가 있었다.[11][12][13] 1999년 9월에는 회원 수가 1만 명을 넘어서고, 전국 47개 도도부현에 48개 지부(도쿄는 2개)를 조직하는 등 규모가 커졌다.[14] 연간 1억 3천만 엔 이상의 예산으로 활동했다.
2000년 4월, ‘만드는 모임’은 일본회의(日本会議)와 공동으로 “교과서 개선 연락협의회”를 설립했다.[19] 2007년 5월 31일, 7대 회장에 후지오카 노부카츠가 취임했다.[30] ‘만드는 모임’(つくる会)은 회비와 관련 서적 인세 수입을 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여러 차례 노선 대립과 분열을 겪었다.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1998년 2월: 초대 사무국장 쿠사노 다카미쓰(草野隆光) 해임.
- 1999년 7월: 후지오카 노부카츠 부회장 해임 (이사직 유지).
- 1999년 9월: 2대 사무국장 오쓰키 다카히로(大月隆寛) 해임.
- 2002년 2월: 세이부 스스무(西部邁)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탈퇴.
- 2006년 1월: 니시오 간지 명예회장 사임 및 탈퇴.
- 2006년 2월: 야기 슈지(八木秀次) 회장 해임, 다네가시마 케이(種子島経) 회장 취임.
- 2006년 4월: 다네가시마 케이 회장, 야기 슈지 부회장 동시 사임 및 탈퇴. 다카이케 가쓰히코(高池勝彦) 회장 취임.
- 2007년: 후소샤(扶桑社)와의 관계 단절, 지유샤(自由社)와 제휴.[33]
- 2007년: 야기 슈지를 중심으로 일본 교육 재생 기구 설립.[28][29]
4. 1. 조직 구성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 ‘만드는 모임’)은 1996년 12월 2일, 후지오카 노부카츠, 니시오 간지, 고바야시 요시노리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11][12][13] 당시 종군위안부 강제 연행설을 채택한 중학교 교과서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높아지면서, 이들은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모임을 결성했다.1997년 1월 30일 결성 총회를 열고 정식으로 발족했으며,[15] 초기에는 아가와 사와코, 하야시 마리코 등 9명이 호소인으로 참여했고, 78명의 동의자가 있었다.[11][12][13] 이후 회원 수가 증가하여 1999년 9월에는 1만 명을 넘어서고, 전국 48개 지부를 조직하는 등 규모가 커졌다.[14]
'만드는 모임'은 일본회의와 협력하여 교과서 채택 운동을 전개했으며, 자민당 내 일본의 장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회와 같은 정치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10][16]
2000년대 이후 내부 갈등과 분열을 겪었다. 2006년에는 니시오 간지 명예회장이 사임하고, 야기 슈지 회장이 해임되는 등 내분이 발생했다.[36] 이후 야기 슈지 등은 일본교육재생기구를 설립하여 '만드는 모임'에서 분리되었다.[28][29]
2007년에는 주요 출판사였던 후소샤와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만드는 모임'은 지유샤와 제휴하여 교과서를 출판하게 되었다.[33]
'만드는 모임'은 회비와 관련 서적 인세 수입을 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4. 1. 1. 임원
2024년 8월 4일 현재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35]직책 | 성명 | 직함 | 비고 |
---|---|---|---|
회장 | 고이케 카츠히코 | 변호사 | |
부회장 | 오카노 토시아키 | 전 조시시 시장 전 조시시립 제5중학교 교장 | |
사라키 키쿠 | 전 산케이신문사 논설위원장 | ||
후지오카 신쇼 | 교육평론가 | ||
마츠우라 아키히로 | 전 테이쿄과학대학 특임교수 | ||
마츠키 쿠니토시 | 조선근현대사연구소 소장 | ||
모기 히로미치 | 사실을 세계에 전파하는 모임 대표 | ||
이사 | 아다치 히로시 | 전 요코하마시립 초등학교 교사 | |
아라키타 오사무 | 변호사 | ||
카이죠 토모아키 | NPO법인 손자경영학원 이사 | ||
코야마 쓰네미 | 오츠키단기대학 명예교수 | ||
타카모리 아키노리 | 일본문화종합연구소 대표 | ||
토미오카 코이치로 | 간토가쿠인대학 교수 | ||
미우라 코타로 | 아시아자유민주연대협의회 사무국장 | ||
모로하시 시게카즈 | 교육을 생각하는 이시카와현민회 회장 | 「진정한 근현대사관」현상논문 수상 경력 있음 | |
요시나가 준 | 고베대학 교수 | ||
감사 | 오자키 유키히로 | 변호사 | |
고문 | 스기하라 세이시로 | 전 조세이대학 교수 | |
나카야마 시게아키 | 전 중의원 의원 | ||
사무국장 | 에치고 슌타로 |
4. 1. 2. 역대 회장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회장 | |||
---|---|---|---|
대 | 이름 | 취임일 | 비고 |
1 | 서오 간지(西尾幹二) | 1997년 1월 | |
2 | 다나카 히데미치(田中英道) | 2001년 9월 | |
3 | 야기 슈지(八木秀次) | 2004년 9월 | |
4 | 타네가시마 케이(種子島経) | 2006년 2월 | |
- | 타카이케 카츠히코(高池勝彦) | 2006년 4월 | 회장 대행 |
5 | 고바야시 타다시(小林正) | 2006년 6월 | |
6 |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 | 2007년 5월 | |
7 | 스기하라 세이시로(杉原誠四郎) | 2011년 8월 | |
8 | 타카이케 카츠히코(高池勝彦) | 2015년 10월 |
4. 2. 조직 변천
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일본어는 1996년 12월 2일,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이들은 아카사카 엑셀 호텔 도큐(赤坂東急ホテル)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종군위안부 강제 연행설을 채택한 중학교 교과서들을 비판하며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11][12][13]1997년 1월 30일, '만드는 모임'은 정식으로 발족했다.[15] 이후, 자민당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장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회가 설립되어 '만드는 모임'을 지원했다.[10][16]
;1996년
- 8월 - 니시오 간지(西尾幹二)와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가 만나 '만드는 모임' 설립 준비를 한다.
- 12월 2일 - 창립 기자회견. 니시오 간지, 후지오카 노부카츠, 고바야시 요시노리 등 9명이 호소인으로 참여했다.[11]
;1997년
- 1월 21일 - 니시오 간지 등 7명이 고스기 다카시(小杉隆) 문부대신에게 교과서에서 강제동원 위안부 기술 삭제를 요청한다.[9]
- 1월 30일 - 창립 총회 개최. 초대 회장에 니시오 간지, 부회장에 후지오카 노부카츠가 취임한다.[15]
;1999년
- 10월 - 47개 도도부현에 48개 지부를 설립한다.
;2000년
- 4월 - '만드는 모임'은 일본회의(日本会議)와 공동으로 「교과서 개선 연락협의회」를 설립한다.
;2001년
- 9월 - '만드는 모임' 신임 회장에 다나카 히데미치(田中英道), 신임 부회장에 다카하시 시로(高橋史朗), 다네가시마 케이(種子島経), 후지오카 노부카츠가 취임한다. 니시오 간지는 명예회장에 취임한다.
;2006년
- 1월 17일 - 니시오 간지 명예회장 사임.
- 2월 27일 - 다네가시마 케이가 회장직에 취임한다.
- 4월 30일 - 다네가시마 케이 회장, 야기 슈지(八木秀次) 부회장 사임. 다카이케 가쓰히코(高池勝彦)가 회장직에 취임한다. 후지오카 노부카츠, 후쿠치 준(福地惇)이 부회장에 취임한다.
- 6월 - 고바야시 다다시(小林正)가 회장에 취임한다.
;2007년
- 5월 31일 - 고바야시 다다시 회장이 해임되고, 후임으로 후지오카 노부카츠가 회장에 취임한다. '만드는 모임'은 사실상 분열한다.
- 9월 9일 - '만드는 모임'은 새로운 교과서 출판사로 지유샤(自由社)와 제휴하는 것을 승인한다.[33]
;2011년
- 8월 - 스기하라 세이시로(杉原誠四郎)가 회장에 취임한다.
;2015년
- 10월 - 다카이케 가쓰히코(高池勝彦)가 회장에 취임한다.
2024년 8월 4일 현재 임원 현황은 다음과 같다.[35]
직책 | 성명 | 직함 |
---|---|---|
회장 | 고이케 가쓰히코 | 변호사 |
부회장 | 오카노 도시야키 | 전 조시시 시장 |
사라키 기쿠 | 전 산케이신문사 논설위원장 | |
후지오카 노부카츠 | 교육평론가 | |
마쓰우라 아키히로 | 전 데이쿄 과학대학 특임교수 | |
마쓰키 구니토시 | 조선근현대사연구소 소장 | |
모기 히로미치 | 사실을 세계에 전파하는 모임 대표 | |
이사 | 아다치 히로시 | 전 요코하마시립 초등학교 교사 |
아라키타 오사무 | 변호사 | |
가이죠 도모아키 | NPO법인 손자경영학원 이사 | |
고야마 쓰네미 | 오쓰키 단기대학 명예교수 | |
다카모리 아키노리 | 일본문화종합연구소 대표 | |
도미오카 고이치로 | 간토가쿠인 대학 교수 | |
미우라 고타로 | 아시아자유민주연대협의회 사무국장 | |
모로하시 시게카즈 | 교육을 생각하는 이시카와현민회 회장 | |
요시나가 준 | 고베 대학 교수 | |
감사 | 오자키 유키히로 | 변호사 |
고문 | 스기하라 세이시로 | 전 조세이 대학 교수 |
나카야마 시게아키 | 전 중의원 의원 | |
사무국장 | 에치고 슌타로 | |
역대 회장은 다음과 같다.
대 | 이름 | 취임일 | 비고 |
---|---|---|---|
1 |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 1997년 1월 | |
2 | 다나카 히데미치(田中英道) | 2001년 9월 | |
3 | 야기 슈지(八木秀次) | 2004년 9월 | |
4 | 다네가시마 케이(種子島経) | 2006년 2월 | |
- | 다카이케 가쓰히코(高池勝彦) | 2006년 4월 | 회장 대행 |
5 | 고바야시 다다시(小林正) | 2006년 6월 | |
6 |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 | 2007년 5월 | |
7 | 스기하라 세이시로(杉原誠四郎) | 2011년 8월 | |
8 | 다카이케 가쓰히코(高池勝彦) | 2015년 10월 | |
5. 제작 교과서 및 논란
일본 역사 교과서 개정 협회는 일본 역사에 대한 자학적인 묘사와 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설명한다.[3] 이들은 교과서가 일본 역사의 어두운 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일본이 전쟁의 참화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한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후 미군 점령이 일본의 역사 인식을 형성하여 일본이 다시 국제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한다.[4]
1999년, 이 단체는 일본 각 현에 새로운 교과서를 위한 광고 조직을 설립했고, 2000년에는 일본의 다른 민족주의 NGO들과 함께 교육위원회에 새로운 교과서 채택을 위한 로비를 시작했다. 자유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일본 역사 교과서 개정 협회를 지지하는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5] 결국 이 교과서는 승인되었지만 국내외 비판을 받았다. 비판 여론으로 인해 이 교과서는 일본 중학교의 0.05%에서만 채택되었다.[5]
‘만드는 모임’은 기존의 역사 교과서가 자학사관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하며, 도쿄재판 사관이나 사회주의 환상 사관을 극복하고, 자유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아이들이 일본인으로서 자신감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교과서 제작과 보급을 목적으로 결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1997년에 발표된 취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24]
- 일본의 전후 역사 교육은 일본인이 계승해야 할 문화와 전통을 잊게 하고, 일본인의 자긍심을 잃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근현대사에서는 일본인이 자자손손 사죄하며 살아가도록 운명 지워진 죄인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 냉전 종식 후에는 자학적인 경향이 강해지면서, 현행 역사 교과서는 위안부와 같이 과거 적국의 선전 선동을 사실로 기술하고 있다.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세계사적 시각 속에서 일본국과 일본인의 자화상을 품격과 균형을 갖추어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조상의 활약에 가슴 뛰고, 실패의 역사에도 눈을 돌려 그 희로애락을 재체험할 수 있는, 일본인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들고자 한다.
- 아이들이 일본인으로서의 자신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헌신할 수 있도록 한다.
2005년 5월 10일,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일본외국특파원협회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위안부와 강제 연행, 난징 대학살을 삭제하고 창씨개명을 정당화하는 것이 올바른 교과서인가?"라는 질문에 "1996년 이전의 한국 교과서에도 위안부는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2005년 4월 12일자 아사히 신문 기사에 따르면, 모든 교과서가 위안부를 삭제하고 있다. 그것은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했다. 참고로, 후소샤판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는 난징 사건에 관한 기술이 있다.(단, 2014년도 검정의 자유사판에서는 삭제)[25]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주장하고 있다.
- 근대 일본을 악행으로 그리는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차세대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일본 역사의 진실된 모습을 전해야 한다. 이 교과서는 "계급투쟁 사관"이나 "자학사관"의 구속에서 벗어나, 세계사적 시각 속에서 일본국과 일본인의 자화상을 품격과 균형을 갖추어 논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고 통독에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역사 교과서이다.[30]
5. 1. 제작 교과서
후소샤(扶桑社)에서 출판한 역사 교과서 『新しい歴史教科書』(아타라시이 레키시 쿄카쇼, New History Textbook)는 난징 대학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위안부 제도 등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일본 전쟁 범죄에 대한 설명을 축소하거나 누락했다는 비판을 받았다.[5] 이 교과서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과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에 대한 주장도 담고 있다.2001년 일본에서 일반 도서로 출판된 이 교과서는 2004년까지 60만 부가 판매되었지만,[6] 학교 채택률은 매우 저조했다.[7]
‘만드는 모임’은 기존 역사 교과서가 자학사관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하며, “도쿄재판 사관”이나 “사회주의 환상 사관”을 극복하고 자유주의 사관에 기초한 교과서 제작을 목표로 했다.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는 2001년판과 2005년판은 후소샤, 2009년판, 2011년판은 자유사에서 출판되었다.[18] 문부과학성의 검정 의견이 137곳이나 있었지만, 다른 출판사의 역사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교과서 검정에 합격하였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자신들의 교과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24]
- 전후 역사 교육이 일본인의 자긍심을 잃게 만들었다.
- 근현대사에서 일본인을 죄인처럼 묘사하고 있다.
- 위안부와 같은 적국의 선전 선동을 사실로 기술하고 있다.
- 세계사적 시각 속에서 일본인의 이야기를 균형 있게 그려내고자 한다.
2005년 기자회견에서 ‘만드는 모임’은 위안부, 강제 연행, 난징 대학살 관련 질문에 대해 증거가 부족하다는 등의 답변을 했다.[25]
‘만드는 모임’은 자신들의 교과서가 근대 일본을 악으로 묘사하는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자랑스러운 일본 역사를 전달한다고 주장한다.[30]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 목록'''
제목 | 대표 집필자 | 감수 | 집필 |
---|---|---|---|
『중학 사회 새로운 역사 교과서』 | 서미간지 | 이토 타카시(겸·집필자), 오이시 신사부로, 다카하시 시로, 타나쿠보 타다에, 호가 토오루 | 고바야시 요시노리, 사카모토 타카오, 타카모리 아키노리, 타나카 히데미치, 히로타 요시노부, 후지오카 신쇼, 야기 아키라, 타니하라 시게오 |
『중학 사회 새로운 시민 교과서』 | 세이부 마이 | 사에키 케이스케, 사토 히카루, 야기 슈지, 미야모토 미쓰하루, 스기무라 요시미, 타나이 히로토, 오쓰 기쇼자에몬 | |
『중학 사회 개정판 새로운 역사 교과서』 |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 | 이토 타카시(伊藤隆), 오이시 신자부로(大石慎三郎),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겸·집필자), 니이타 히토시(新田均), 호가 토오루(芳賀徹) | 쿠리 いく히코(九里幾久雄), 코바야시 코우지(小林弘治), 사카모토 타카오(坂本多加雄), 타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히로타 요시노부(広田好信) |
『중학 사회 신정판 새로운 시민 교과서』 | 야기 슈지(八木秀次) | 이소마에 슈지(磯前秀二), 시마다 요이치(島田洋一), 타쿠보 타다에(田久保忠衛) | 엔도 코이치(遠藤浩一), 오츠 기쇼자부로(大津寄章三), 코가 카쓰지로(古賀勝次郎), 코바야시 코우지(小林弘治), 후지모토 히야오(藤本百男) |
『새롭게 편찬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新編 新しい歴史教科書) |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 | 이지리 센오(井尻千男), 가세 히데아키(加瀬英明), 스기하라 세이시로(杉原誠四郎)(겸・집필자), 타쿠보 타다에(田久保忠衛), 후쿠치 준(福地惇)(겸・집필자) | 쿠리 키쿠오(九里幾久雄), 사이토 타케오(齋藤武夫), 사카모토 타카오(坂本多加雄), 타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 니시오 칸지(西尾幹二), 마츠모토 켄이치(松本謙一) |
『새로운 역사 교과서』(新しい歴史教科書) |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 | 이지리 센오(井尻千男), 가세 히데아키(加瀬英明), 타쿠보 타다에(田久保忠衛) | 우에하라 타쿠(上原卓), 오카노 토시아키(岡野俊昭), 구리 いく히코(九里幾久雄), 사이토 타케오(齋藤武夫), 사카모토 타카오(坂本多加雄), 타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후쿠치 준(福地惇), 마츠우라 아키히로(松浦明博), 야마모토 시게루(논픽션 작가)(山本茂 (ノンフィクション作家)) |
『새로운 시민 교과서』(新しい公民教科書) | 스기하라 세이시로(杉原誠四郎) | 안도 유타카(교육학자)(安藤豊 (教育学者)), 코야마 쓰네미(小山常実), 타카이케 카쓰히코(高池勝彦), 토요시마 노리오(豊島典雄), 하토리 고(服部剛), 요시나가 준(吉永潤), 와타나베 마사시(渡辺眞) |
5. 2. 주요 논란 내용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교과서는 여러 논란을 낳았는데, 주로 일본의 전쟁 범죄를 축소하거나 정당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주요 논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난징 대학살''': 1937년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면서 많은 중국군과 민간인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사건(난징 사건)에 대해, 새역모 교과서는 피해자 수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기술하며 그 규모를 축소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8]
-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외곽 마르코 폴로 다리 근처에서 발생한 일본군과 중국군 간의 충돌 사건(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을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고 기술하며, 현지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원령 발표로 일본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8]
- '''대동아공영권''': 일본이 전쟁과 아시아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 이념을 내세웠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기술하면서도,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이 피해 국가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했고, 일본군이 아시아에서 철수한 후 전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하는 데 일본이 기여했다고 주장한다.[8]
- '''일본의 행동이 아시아인들에게 영감을 주다''': 일본군이 서유럽 세력을 몰아낸 것에 대해 아시아인들이 놀라움과 자신감을 얻었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소개하며, 일본군을 환호했다는 말레이시아 독립 운동 지도자의 글을 인용한다.[8]
- '''쇼와 천황''': 쇼와 천황에 대해 "국민과 함께 걸어온 생애"라는 긍정적인 내용으로 2페이지에 걸쳐 서술하며, 맥아더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종전의 성단 등을 묘사하여 "쇼와 천황 신화"를 만들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71]
- '''요사노 아키코''': 요사노 아키코가 일러전쟁 당시 발표한 시 『군신이 죽는 일 없기를』을 집안의 존속을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이라고 해석하며, 반전의 진의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사노 아키코의 사상과 생애는 종래의 가족 제도적 도덕에 반하는 것이었다는 반론이 있다.[73]
새역모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일본에 유리하게 해석하거나 왜곡하여 서술함으로써, 일본의 과거사를 미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75] 또한, 교육칙어 전문을 게재하고 주석까지 달고 있는 반면, 교육기본법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언급하여 전후 교육의 변화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다.[76]
6. 비판 및 평가
일본 역사 교과서 개정 협회는 일본 역사에 대한 자학적인 묘사와 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3] 이들은 교과서가 일본 역사의 어두운 면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 일본이 전쟁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후 미군 점령이 일본의 역사 인식을 왜곡하여 일본이 다시는 국제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4]
1999년, 이 단체는 일본 각 현에 새로운 교과서를 위한 광고 조직을 설립했고, 2000년에는 다른 민족주의 NGO들과 함께 교육위원회에 새 교과서 채택을 위한 로비를 시작했다. 자유민주당 의원들도 이 단체를 지지하는 조직을 설립했다. 이 교과서는 승인되었지만 국내외 비판을 받았고, 이로 인해 일본 중학교의 0.05%에서만 채택되었다.[5]
후소샤(扶桑社)에서 출판한 역사 교과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新しい歴史教科書)는 난징 대학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위안부 제도 등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일본 전쟁 범죄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거나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교과서는 또한 독도(일본명 다케시마)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강조하고 있다. 센카쿠 열도는 일본이 관리하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대만) 모두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01년 6월 일본에서 일반 도서로 출판된 이 교과서는 2004년 6월까지 60만 부가 판매되었다.[6] 상업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소수의 학교에서만 채택되었는데, 이는 2002년 학년도 중학교 학생의 0.03%에 해당한다.[7]
걸프전 이전까지 일본 공산당 당원이었던 후지오카 신쇼(藤岡信勝)는 냉전 종식 후 새로운 일본 근대사관 확립의 필요성을 느껴 보수 논객으로 전향했다. 그는 자신의 역사 검증 방법을 "자유주의 사관"이라고 불렀다.
1996년 1월 15일, 후지오카가 대표를 맡은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는 산케이 신문 오피니언 면에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 연재를 시작했다.[9][10] 같은 해 6월 27일, 문부성은 다음 학년도 중학교 사회 과목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고, 종군위안부에 대해 기술한 7권 모두 합격했다.[10] 다음날부터 "종군" 위안부와 난징 대학살 등을 교과서에 싣는 것은 "반일적·자학적·암흑적"이라며 삭제를 요구하는 항의 활동이 벌어졌다. 8월 10일, 후지오카는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와 공동 명의로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를 출판했다. 같은 달,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는 위안부 증언과 언론 보도 내용에 의문을 제기했다.[10] 9월 7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현행 교과서를 공격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같은 해 12월 2일, 후지오카,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고바야시 등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つくる会) 결성 기자회견을 열었다. 니시오는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7개사의 중학교 교과서는 증거 불충분 상태로 종군위안부 강제 연행설을 일제히 채택했다. 안이한 자기 악역 사관에 도달한 하나의 귀결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11][12][13]
1997년 1월 21일, "만드는 모임" 회원들은 코스기 타카시(小杉隆) 문부대신을 면회하여 교과서 위안부 관련 기술은 검정 기준에 위반된다며 삭제를 요구했지만, 코스기는 거부했다.[9] 같은 해 1월 30일, "만드는 모임"은 결성 총회를 열고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발족 후 약 1개월 후인 2월 27일, 자민당 국회의원 중심으로 "일본의 장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사무국장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취임했다. 중의원과 참의원을 합쳐 62명이 참가하여 운동을 크게 후원하게 되었다.[10][16] 1999년 9월에는 회원 수가 1만 명을 넘어 전국 48개의 지부 조직을 만들었고, 당시 연간 1.3억엔 이상의 예산으로 활동했다.
‘만드는 모임’은 일본 전국에서 모이는 회비와 관련 서적의 인세 수입을 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 4월 4일, ‘만드는 모임’은 일본회의와 공동으로 “교과서 개선 연락협의회”(약칭: 개선협)를 설립했다. ‘만드는 모임’은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와 “일본의 장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과 결탁하여 교육위원회와 지방의회에 압력을 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19]
2007년 5월 31일, 7대 회장에 후지오카 신쇼가 취임했다[30]. ‘만드는 모임’의 지방 지부 외에도, 현지 재계와 옛 군 관계자들에 의한 채택 지원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 등 회의 주장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 보수 정치인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20]
‘만드는 모임’은 미국 하원 121호 결의에 대해 민주당의 위안부 문제와 난징 사건의 진실을 검증하는 모임과 함께 강하게 반발[22]했으며, 오키나와 지상전에 관한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23]을 취하고 있다.
2013년 9월 11일에는 『벌거벗은 참상』이 일본군의 만행을 그렸고, 천황과 君가요를 비판하는 등 학습지도요령에 위반하고 있어 학교 도서관에서 배제하도록 요구하는 요망서를 문부과학성에 제출했다.[34]
오쓰키 다카히로(大月隆寛) 등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우익과 좌익의 논쟁에 염증을 느낀다는 전제하에, 2001년도판 다른 역사 및 시민 교과서와 무엇이 다른지를 분야별로 세밀하게 검증하고, 독자적으로 어느 쪽이 더 정확한 설명을 하고 있는지 판정하였다. 그들은 14개 분야를 '만드는 모임' 교과서의 승리로, 30개 분야를 다른 대형 교과서의 승리로, 18개 분야를 무승부로 판정하였다.[83]
2001년 검정 백색 표지본의 내용이 유출·보도되었던 ‘새로운 역사 교과서’는, 서문 “역사를 배우는 것”의 서두에서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사실이 밝혀졌다.[84] 이로 인해 강한 비판을 받았으며, 기존에 ‘つくる会’에 우호적이었던 많은 역사학자들로부터조차 지지를 잃는 결정타가 되었다.[85]
2002년도에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채택한 곳은 사립 중학교 20개교와 공립학교 6개교였지만, 공립학교에서 채택된 곳이 모두 특수학교였기 때문에, 장애인 단체로부터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86]
사토 마나부(佐藤学) 도쿄대학 대학원 교수는 ‘つくる会’를 “정치 조직이자 기업 조직”이라고 주장[87]하고 있으며, 그에 따르면 “‘대동아 전쟁은 일본의 자위 전쟁이며 아시아 해방 전쟁이었다’는 주장은 특정 계층에게 상품 가치가 있으며, ‘난징 사건과 종군 위안부는 허상이었다’는 주장을 출판하여 판매하는 것”이라고 한다.
야마자키 마사히로(山崎雅弘)는 전후 역사관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는 세력은, 종전 중 일본 제국이 국책으로 전개했던 “사상전”이나 “선전전”의 계속이라고 하며, 일중전쟁(지나사변),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 중에 일본 제국이 전개했던 “사상전”이나 “선전전”이 일본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고려함으로써, “사상전”이나 “선전전”의 앞날과 그것이 일본 국민에게 가져올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일본이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패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88]
6. 1. 일본 내 비판
일본 내에서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 '만드는 모임')의 역사 교과서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주로 역사적 사실 왜곡, 특정 정치적 관점 반영, 교육적 부적절성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역사적 사실 왜곡 및 축소: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는 난징 대학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일본군 위안부 제도 등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전쟁 범죄에 대한 내용을 충분히 다루지 않거나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 예를 들어, 난징 대학살에 대해 "일본군에 의해 민중에게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만 언급하여 전쟁 피해를 경시하려는 서술이라는 지적이 있었다.[70]
- 정치적 편향성: '만드는 모임'은 일본의 과거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자학사관을 극복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교과서 내용에도 반영되어, 일본의 정당성에 대한 치밀한 서술 없이 극동국제군사재판을 감정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다.[76]
- 교육적 부적절성: 일본 신화 서술에서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끌어내기 위해 춤을 춘 아마노우즈메노미코토에 대한 성적인 묘사가 문제가 되었다.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지만, 교과서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사춘기 학생들에게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있었다.[68]
- 기타 문제점: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해군의 활약에 대한 사실 왜곡[69]
- 쇼와 천황에 대한 "신화" உருவாக்க[71]
- 은륜 부대의 활약을 과장하여 전시 일본의 선전을 그대로 소개[72]
- 요사노 아키코의 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반전의 진의를 왜곡[73]
- 중앙 권력 이외의 역사·문화에 대한 무관심
- 고대 왜인과 일본인을 동일시하여 고대 일본인의 전체상을 파악하지 못함[78]
- 일본의 핵무장론 주장 (2001년판 시민 교과서)[82]
이러한 비판에 대해, '만드는 모임' 측은 좌파 세력이 채택 반대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교과서가 일본의 역사를 올바르게 묘사하고 있다고 반박했다.[25] 그러나,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는 일본 내에서도 역사학자, 교육자, 시민단체 등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일부 보수 인사들조차도 '만드는 모임'의 역사 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6. 2. 한국의 시각 및 비판
일본의 역사 교과서 개정 움직임에 대한 한국의 시각은 매우 비판적이다. 특히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교과서는 일본 전쟁 범죄를 축소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간주된다.- 역사 왜곡 문제: 새역모의 역사 교과서는 난징 대학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제국주의의 과오를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는다.[5] 이는 피해국인 한국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역사 왜곡으로 여겨진다.
- 영토 문제: 새역모 교과서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담고 있다. 이는 한국의 영토 주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로 간주된다.
- 우경화 우려: 새역모의 활동은 일본 사회의 우경화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식된다. 이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는 태도와 함께 동아시아 지역의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 정치권의 지원: 자유민주당 의원들이 새역모를 지지하는 단체를 설립하고, 아베 신조와 같은 정치인이 새역모 활동을 후원하는 것은 일본 정치권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10][16] 이는 한국에서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는 요인이다.
- 언론 및 시민단체의 비판: 새역모 교과서에 대한 비판은 한국의 언론과 시민단체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MBC TV는 새역모의 교과서를 "한국판 후소샤"라고 비판하며, 한국 보수 단체의 역사 인식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우려를 반영한다.
6. 3. 기타 평가
일본 역사 교과서 개정 협회는 일본 역사에 대한 자학적인 묘사와 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3] 이들은 교과서가 일본 역사의 어두운 면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 일본이 전쟁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후 미군 점령이 일본의 역사 인식을 왜곡하여 일본이 다시는 국제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4]1999년, 이 단체는 일본 각 현에 새로운 교과서를 위한 광고 조직을 설립했고, 2000년에는 다른 민족주의 NGO들과 함께 교육위원회에 새 교과서 채택을 위한 로비를 시작했다. 자유민주당 의원들도 이 단체를 지지하는 조직을 설립했다. 이 교과서는 승인되었지만 국내외 비판을 받았고, 이로 인해 일본 중학교의 0.05%에서만 채택되었다.[5]
후소샤(扶桑社)에서 출판한 역사 교과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新しい歴史教科書)는 난징 대학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위안부 제도 등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일본 전쟁 범죄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거나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교과서는 또한 독도(일본명 다케시마)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강조하고 있다. 센카쿠 열도는 일본이 관리하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대만) 모두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01년 6월 일본에서 일반 도서로 출판된 이 교과서는 2004년 6월까지 60만 부가 판매되었다.[6] 상업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소수의 학교에서만 채택되었는데, 이는 2002년 학년도 중학교 학생의 0.03%에 해당한다.[7]
걸프전 이전까지 일본 공산당 당원이었던 후지오카 신쇼(藤岡信勝)는 냉전 종식 후 새로운 일본 근대사관 확립의 필요성을 느껴 보수 논객으로 전향했다. 그는 자신의 역사 검증 방법을 "자유주의 사관"이라고 불렀다.
1996년 1월 15일, 후지오카가 대표를 맡은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는 산케이 신문 오피니언 면에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 연재를 시작했다.[9][10]
같은 해 6월 27일, 문부성은 다음 학년도 중학교 사회 과목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고, 종군위안부에 대해 기술한 7권 모두 합격했다.[10] 다음날부터 "종군" 위안부와 난징 대학살 등을 교과서에 싣는 것은 "반일적·자학적·암흑적"이라며 삭제를 요구하는 항의 활동이 벌어졌다. 8월 10일, 후지오카는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와 공동 명의로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를 출판했다. 같은 달,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는 위안부 증언과 언론 보도 내용에 의문을 제기했다.[10] 9월 7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현행 교과서를 공격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같은 해 12월 2일, 후지오카,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고바야시 등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つくる会) 결성 기자회견을 열었다. 니시오는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7개사의 중학교 교과서는 증거 불충분 상태로 종군위안부 강제 연행설을 일제히 채택했다. 안이한 자기 악역 사관에 도달한 하나의 귀결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11][12][13]
1997년 1월 21일, "만드는 모임" 회원들은 코스기 타카시(小杉隆) 문부대신을 면회하여 교과서 위안부 관련 기술은 검정 기준에 위반된다며 삭제를 요구했지만, 코스기는 "전 종군위안부에 대한 것은 내각 외교 심의실의 조사로 명확해졌다. 의무 교육에 도입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말하며 거부했다.[9] 같은 해 1월 30일, "만드는 모임"은 결성 총회를 열고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발족 후 약 1개월 후인 2월 27일, 자민당 국회의원 중심으로 "일본의 장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사무국장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취임했다. 중의원과 참의원을 합쳐 62명이 참가하여 운동을 크게 후원하게 되었다.[10][16] 1999년 9월에는 회원 수가 1만 명을 넘어 전국 48개의 지부 조직을 만들었고, 당시 연간 1.3억엔 이상의 예산으로 활동했다.
‘만드는 모임’은 일본 전국에서 모이는 회비와 관련 서적의 인세 수입을 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 4월 4일, ‘만드는 모임’은 일본회의와 공동으로 “교과서 개선 연락협의회”(약칭: 개선협)를 설립했다. ‘만드는 모임’은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와 “일본의 장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과 결탁하여 교육위원회와 지방의회에 압력을 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19]
2007년 5월 31일, 7대 회장에 후지오카 신쇼가 취임했다[30]. ‘만드는 모임’의 지방 지부 외에도, 현지 재계와 옛 군 관계자들에 의한 채택 지원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 등 회의 주장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 보수 정치인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20]
‘만드는 모임’은 미국 하원이 일본 정부에 대해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를 요구한 미국 하원 121호 결의에 대해 민주당의 위안부 문제와 난징 사건의 진실을 검증하는 모임과 함께 강하게 반발[22]했으며, 오키나와 지상전에 관한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23]을 취하고 있다.
2013년 9월 11일에는 『벌거벗은 참상』이 일본군의 만행을 그렸고, 천황과 君가요를 비판하는 등 학습지도요령에 위반하고 있어 학교 도서관에서 배제하도록 요구하는 요망서를 문부과학성에 제출했다.[34]
오쓰키 다카히로(大月隆寛) 등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우익과 좌익의 논쟁에 염증을 느낀다는 전제하에, 2001년도판 다른 역사 및 시민 교과서와 무엇이 다른지를 분야별로 세밀하게 검증하고, 독자적으로 어느 쪽이 더 정확한 설명을 하고 있는지 판정하였다. "도쿄 서적·제국서원·일본서적 등 대형 교과서 출판사 대 '만드는 모임' 교과서"라는 불공정한 구도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14개 분야를 '만드는 모임' 교과서의 승리로, 30개 분야를 다른 대형 교과서의 승리로, 18개 분야를 무승부로 판정하였다.[83]
2001년 검정 백색 표지본의 내용이 유출·보도되었던 ‘새로운 역사 교과서’는, 서문 “역사를 배우는 것”의 서두에서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사실이 밝혀졌다.[84] 이로 인해 강한 비판을 받았으며, 기존에 ‘つくる会’에 우호적이었던 많은 역사학자들로부터조차 지지를 잃는 결정타가 되었다.[85]
2002년도에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채택한 곳은 사립 중학교 20개교와 공립학교 6개교였지만, 공립학교에서 채택된 곳이 모두 특수학교였기 때문에, 장애인 단체로부터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86]
사토 마나부(佐藤学) 도쿄대학 대학원 교수는 ‘つくる会’를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같은 극우 단체가 아니다. 내셔널리즘을 내건 애국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정치 조직이자 기업 조직”이라고 주장[87]하고 있으며, 그에 따르면 “‘대동아 전쟁은 일본의 자위 전쟁이며 아시아 해방 전쟁이었다’는 주장은 특정 계층에게 상품 가치가 있으며, ‘난징 사건과 종군 위안부는 허상이었다’는 주장을 출판하여 판매하는 것”이라고 한다.
야마자키 마사히로(山崎雅弘)는 전후 역사관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는 세력은, 종전 중 일본 제국이 국책으로 전개했던 “사상전”이나 “선전전”의 계속이라고 하며, 일중전쟁(지나사변),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 중에 일본 제국이 전개했던 “사상전”이나 “선전전”이 일본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고려함으로써, “사상전”이나 “선전전”의 앞날과 그것이 일본 국민에게 가져올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일본이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패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88]
참조
[1]
서적
The Battle for Hearts and Minds. Patriotic Education in Japan in the 1990s and Beyond.
Routledge
2006
[2]
서적
Japan's Relations With China: Facing a Rising Power
Routledge
2006
[3]
논문
Japanese colonialism and the Asia-Pacific War in Japan’s history textbooks: Changing representations and their causes.
http://www.jstor.org[...]
2013
[4]
논문
The Japanese history textbook controversy and the legacy of the textbook reform of the Allied Occupation
2005
[5]
논문
The coexistence of nationalism and cosmopolitanism, 1997–2015.
http://www.jstor.org[...]
University of Hawaiʻi Press
2017
[6]
뉴스
http://www2.asahi.co[...]
Asahi Shimbun
2004-07-20
[7]
뉴스
0.03% of junior high students to use disputed textbook
http://www.findartic[...]
Kyodo
2001-08-20
[8]
간행물
New History Textbook (Chapter 4 & 5) 2005 version
http://www.tsukuruka[...]
2005-05
[9]
뉴스
ビッグ追跡 従軍慰安婦、中学の歴史教科書に―教科書をつくる会、削除を要求
毎日新聞
1997-02-26
[10]
서적
歴史と責任―「慰安婦」問題と一九九〇年代
青弓社
2008-06-15
[11]
뉴스
『従軍慰安婦強制連行』削除を 歴史教科書でもゴーマニズム宣言 書き直しを陳情
毎日新聞
1996-12-03
[12]
서적
会創設にあたっての声明を出した同会呼びかけ人(一九九六年十二月二日)声明文
国書刊行会
2018-12-25
[13]
서적
なぜ私は行動に立ち上がったか―新しい歴史教科書の戦い
国書刊行会
2018-12-25
[14]
웹사이트
「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呼びかけ人と賛同者名簿
http://www.jca.apc.o[...]
JCA-NET
2023-08-10
[15]
웹사이트
「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のExit, Voice, Loyalty
http://www.kiss.c.u-[...]
東京大学大学院総合文化研究科
2022-06-13
[16]
웹사이트
安倍首相の評価が真っ二つに分かれる「これだけの理由」 (3/5)
https://gendai.media[...]
講談社
2019-07-08
[17]
서적
同会賛同者名簿(一九九七年六月六日現在)
国書刊行会
2018-12-25
[18]
웹사이트
つくる会日本がつながるリンク
http://www.tsukuruka[...]
[19]
웹사이트
「慰安婦」問題と歴史修正主義についての略年表
http://www.dce.osaka[...]
大阪産業大学
2022-06-23
[20]
웹사이트
つくる会WEBニュース平成19(2007)11月30日を参照のこと
http://www.tsukuruka[...]
[21]
서적
「マンガ嫌韓流」のここがデタラメ
コモンズ
2015-09
[22]
웹사이트
米国下院が「慰安婦対日非難決議」を採択「つくる会」は「河野談話」破棄を求める声明を発表
http://www.tsukuruka[...]
2007-08-01
[23]
웹사이트
アーカイブされたコピー
http://www.tsukuruka[...]
2008-03-08
[24]
웹사이트
趣意書|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
http://www.tsukuruka[...]
[25]
웹사이트
つくる会WEBニュース2005年5月12日
https://web.archive.[...]
[26]
웹사이트
「つくる会」教科書 扶桑社側が漏らす
https://web.archive.[...]
2005-04-07
[27]
뉴스
産経新聞
2006-03-28
[28]
뉴스
日本教育再生機構 22日にタウンミーティング
毎日新聞
2006-10-05
[29]
뉴스
こちら特捜部 『安倍氏』ブレーンどんな人?(下) ベストセラー『美しい国へ』 自立日本 思想くっきり
東京新聞
2006-09-09
[30]
웹사이트
新会長に藤岡信勝氏を選出 小林会長は解任 新副会長に杉原誠四郎氏
http://www.tsukuruka[...]
2007-05-31
[31]
웹사이트
誤った内容の文書配布撤回を小林前会長に要請 撤回なき場合は会則第20条の適用を通知
https://tsukurukai.c[...]
2007-07-25
[32]
웹사이트
つくる会WEBニュース2007年6月15日
http://www.tsukuruka[...]
[33]
웹사이트
つくる会WEBニュース2007年9月10日
http://www.tsukuruka[...]
[34]
뉴스
つくる会、「ゲン」撤去を要望 有害図書として
https://web.archive.[...]
共同通信
[35]
웹사이트
「つくる会」の役員を紹介します。(令和5年月6月8日現在)
https://tsukurukai.c[...]
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
2024-08-04
[36]
웹사이트
種子島会長・八木副会長辞任に至る議論の経過
https://tsukurukai.c[...]
2022-06-23
[37]
뉴스
こちら特捜部 『安倍氏』ブレーンどんな人?(上) 靖国、拉致、教育問題...思いっ切り保守5人組
東京新聞
2006-09-09
[38]
웹사이트
つくる会WEBニュース平成19(2007)年6月22日
http://www.tsukuruka[...]
[39]
뉴스
産経新聞
2007-06-01
[40]
뉴스
朝日新聞
2007-06-01
[41]
블로그
西尾幹二のインターネット日録「自由社の『自由』について」
http://www.nishiokan[...]
2007-09-09
[42]
웹사이트
つくる会WEBニュース平成19(2007)年5月25日
http://www.tsukuruka[...]
[43]
웹사이트
中学教科書検定 主体的な学び手厚く 検定意見、集団的自衛権に6件
https://www.tokyo-np[...]
東京新聞
2020-07-28
[44]
웹사이트
つくる会教科書、異例の不合格 「欠陥」405カ所指摘
https://www.asahi.co[...]
朝日新聞社
2020-07-28
[45]
간행물
『北朝鮮スパイ』リストに『文科省調査官』の衝撃真相
徳間書店
2020-07-30
[46]
웹사이트
教科書検定に関与!「文科省調査官」に“北朝鮮工作員”が紛れ込んでいた!
https://asagei.biz/e[...]
徳間書店
2020-07-28
[47]
웹사이트
「コラム【風を読む】教科書調査官と北朝鮮の闇」論説委員長・乾正人
https://www.sankei.c[...]
産経デジタル
2020-07-28
[48]
웹사이트
つくる会、検定不合格の歴史教科書再申請へ 「自虐史観克服の土台石に」
https://www.sankei.c[...]
産経デジタル
2020-07-28
[49]
뉴스
自由社の中学歴史 再申請で合格 3年度採択目指す 教科書検定
https://www.sankei.c[...]
2024-04-09
[50]
뉴스
教科書検定「違法」と提訴 自由社
https://www.sankei.c[...]
2024-04-09
[51]
뉴스
教科書検定「不公正」 つくる会、文科相に公開質問状
https://www.sankei.c[...]
2024-04-09
[52]
웹사이트
「つくる会」歴史・公民教科書(扶桑社版)採択をしないように求めます
http://ajwrc.org/jp/[...]
[53]
뉴스
扶桑社教科書 大田原市で選定
2005-07-13
[54]
뉴스
「中核派の関係者が暴行」「つくる会本部へ反対派が放火ゲリラ」
2005-08-04, 2002-08-09
[55]
간행물
平成14年度版 『内外情勢の回顧と展望』
公安調査庁
[56]
뉴스
2005-08-04
[57]
뉴스
2005-12-27
[58]
뉴스
https://japanese.joi[...]
2006-06-27
[59]
웹사이트
http://mindan.org/si[...]
[60]
웹사이트
外国人参政権が国民生活を壊す
http://voiceplus-php[...]
Voice
2011-02-13
[61]
뉴스
韓国の歴史研究家が今治市教育長と面談
2010-02-18
[62]
뉴스
新しい歴史教科書:続けて採択しないで 韓国市民グループ、今治市教委に要望 /愛媛
2011-04-06
[63]
뉴스
橋下維新「自虐史観でない教科書を」 大阪市会で決議提案へ
https://web.archive.[...]
2011-07-15
[64]
뉴스
大阪維新の会:中学歴史教科書「自由社、育鵬社使用を」
http://mainichi.jp/s[...]
2011-07-15
[65]
뉴스
<Special Wide>韓日友好の熱気凍らせない(04.7.14)
http://www.mindan.or[...]
2014-02-28
[66]
간행물
教育再生
2014-04-23
[67]
뉴스
杉並区が扶桑社版採択 中学の歴史教科書
https://web.archive.[...]
47NEWS
2015-04-15
[68]
서적
トンデモ本 男の世界
扶桑社
[69]
서적
安田・吉村 2001
[70]
서적
安田・吉村 2001
[71]
서적
安田・吉村 2001
[72]
서적
安田・吉村 2001
[73]
서적
安田・吉村 2001
[74]
간행물
「つくる会」の歴史教科書を斬る―在日中国人学者の視点から
日本僑報
[75]
서적
谷沢 2001
2012-06
[76]
서적
歴史学研究会 2001
[77]
서적
歴史学研究会 2005
2012-06
[78]
서적
歴史学研究会 2001
[79]
서적
安田・吉村 2001
[80]
서적
ゴー宣・暫
[81]
서적
安田・吉村 2001
[82]
서적
安田・吉村 2001
[83]
서적
どうちがうの? 新しい歴史教科書vsいままでの歴史教科書
夏目書房
[84]
뉴스
産経新聞記事(松本健一証言)
産経新聞
2001-05-18
[85]
뉴스
朝日新聞, 北海道新聞, 週刊東洋経済
2001-04-10, 2001-05-14, 2001-05-05
[86]
서적
村野・事件犯罪研究会 2002
[87]
서적
安田・吉村 2001
[88]
서적
歴史戦と思想戦 ――歴史問題の読み解き方
集英社新書
2019-05
[89]
웹인용
概要 2.教科書が使用されるまで
http://www.mext.go.j[...]
2010-09-02
[90]
웹인용
일본의 제도
http://www.ktbook.co[...]
2010-09-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