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 바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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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라 바트만은 19세기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코이코이족 여성으로, 큰 엉덩이와 가슴의 독특한 외형으로 인해 '호텐토트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유럽에서 인간 전시물로 전시되어 인종차별과 성적 대상화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녀는 유럽으로 팔려가 동물처럼 취급받았으며, 알코올 중독과 매춘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사망 후 시신은 해부되어 뇌와 성기 표본이 파리의 인류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2002년 고향으로 반환되어 매장되었다. 세라 바트만의 이야기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여성의 몸의 상품화, 인간 존엄성 문제에 대한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흑인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을 드러내는 사례로 논의된다. 그녀의 삶은 다양한 예술 작품과 미디어에서 다루어졌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시설과 단체가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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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라 바트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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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Ssehura? |
| 출생 | 대략 1789년 |
| 출생지 | 캄투스 계곡, 이스턴케이프 주 |
| 사망일 | 1815년 12월 29일 (26세) |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 안장 장소 | 베르가데링스코프, 행키, 이스턴케이프 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
| 다른 이름 | 호텐토트 비너스, 사르키 바트만 |
2. 일생
1789년경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동케이프 주 지역에서 코이산족으로 태어났다.[10] 케이프타운 근교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중, 영국인 의사 알렉산더 던롭 등의 제안으로 돈을 벌기 위해 1810년 영국으로 건너갔다.[3][6][9]
런던 등지에서 '호텐토트 비너스(Hottentot Venus|호텐토트 비너스영어)'[11]라는 인종차별적 이름으로 불리며 구경거리로 전시되었고,[73][3] 이는 사회적 논란과 법적 다툼을 일으키기도 했다.[17][16] 1814년 프랑스 파리로 보내져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전시되었으며,[7][21] 조르주 퀴비에 등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10]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 알코올 중독 등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있으며,[22][23][3] 1815년 파리에서 병으로 사망했다.[73]
사후 시신은 해부되어 뇌와 성기 등이 포르말린 액침 표본으로 만들어져 파리 인류 박물관에 1974년까지 전시되는 등 과학적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었다.[73]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반환 요청 이후 오랜 외교적 노력 끝에 2002년 유해가 반환되어 고향인 감투스 강 계곡에 안장되었다.
세라 바트만의 삶은 19세기 유럽의 인종차별, 식민주의의 폭력성,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학대를 상징하는 비극적인 사례로 기억된다.[73] 2018년 케이프타운 대학교는 이를 기리기 위해 교내 '메모리얼 홀(Memorial Hall)'을 '세라 바트만 홀(Sarah Baartman Hall)'로 개명했다.[68]
2. 1. 남아프리카에서의 초기 생애
세라 바트만은 1789년경[10]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이스턴케이프 주 캄데부 지역 근처, 당시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에서 코이코이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출생 이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10] 일부에서는 '세후라(Ssehura)'[39]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르티에(Saartjie)'는 '사라(Sarah)'의 케이프 네덜란드어식 애칭 형태로, 당시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이 피지배 민족에게 부여하던 이름이자[32] 친밀함, 애정 또는 경멸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녀의 성은 바트만(Baartman) 또는 바트만(Bartman)으로 표기되기도 한다.[2][3]어린 시절, 바트만은 네덜란드계 유럽인 농장에서 생활했다. 그녀가 갓난아기였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7] 이후 아버지는 소를 몰다가 산족(부시먼)에게 살해당했다.[4] 그녀는 사춘기 의례를 거쳤으며, 프랑스에서 사망할 때까지 어머니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거북이 껍질 목걸이를 간직했다.
1790년대, '자유 흑인'(당시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 상인인 피터 세사르스(Peter Caesar[7])의 권유로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최소 2년 동안 세탁부와 보모로 일했는데, 처음에는 피터 세사르스를 위해, 이후에는 케이프타운의 네덜란드인 집에서 일했다. 나중에는 오늘날의 우드스톡 외곽에 있는 피터의 형제 헨드릭 세사르스(Hendrik Caesars)의 집에서 유모가 되었다.[3][5] 바트만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모두 아기 때 사망했다는 증거가 있다.[3] 또한 케이프타운 근처 호우트만만에 살던 네덜란드 군인 헨드릭 반 종(Hendrik van Jong)과 관계를 맺었지만, 그의 연대가 케이프를 떠나면서 관계는 끝났다.[3]
이후 헨드릭 세사르스는 그녀를 돈을 받고 도시 병원에 보여주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외과 의사 알렉산더 던롭(Alexander Dunlop)[6]을 만나게 된다. 던롭은 영국에서 동물 표본을 쇼맨에게 공급하는 부업을 하던 스코틀랜드 군의관이었는데,[7] 바트만에게 유럽으로 가서 자신을 전시하여 돈을 벌 것을 제안했다. 바트만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던롭의 끈질긴 설득과 헨드릭 세사르스가 동행한다는 조건 하에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동의했는지 강요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3] 1810년,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영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케이프 식민지 총독이었던 칼레돈 경은 이 여행을 허가했지만, 나중에 여행의 진짜 목적을 알고는 후회했다고 전해진다.[9]
2. 2. 유럽에서의 전시
19세기 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백인들의 침략을 받았고, 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세라 바트만은 살아남았지만 유럽으로 팔려 가게 되었다.[73] 그녀의 독특한 신체적 특징, 특히 큰 엉덩이에 주목한 영국인 의사 알렉산더 던롭(Alexander Dunlop, 윌리엄 던롭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함)과 헨드릭 세사르스(Hendrik Cesars)는 이를 이용해 돈을 벌 목적으로 1810년 바트만을 런던으로 데려왔다.[10] 바트만이 자발적으로 갔는지 강요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전의 제안들을 거절했던 그녀가 결국 동의했다는 점은 자발적 선택 가능성을 시사한다. 런던 도착 후 일행은 부유한 지역인 세인트 제임스 듀크 스트리트에 함께 거주했으며, 이 집에는 던롭이 케이프타운에서 불법적으로 데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아프리카 소년도 포함되어 있었다.[3]
던롭은 바트만을 전시 대상으로 삼았고, 쇼맨이었던 세사르스가 이를 실행에 옮겼다. 바트만은 런던 피카딜리의 이집트 홀(Egyptian Hall)에서 전시되었는데,[3] 당시 유럽인들은 코이코이족을 '우수한 유인원' 정도로 여기는 인종차별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의 외모는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73][3] 그녀는 코이코이족을 비하하는 명칭인 '호텐토트'에 비너스를 결합한 '호텐토트 비너스(Hottentot Venus|호텐토트 비너스영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전시되었다.[11] 당시 전시 광고 전단에는 그녀의 키가 4피트 10인치(약 147cm)이며, 희망봉에서 600마일(약 966km) 이상 떨어진 곳 출신이라는 등의 부정확하거나 과장된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12] 이러한 인간 전시는 당시 유럽에서 존재했던 '괴물 쇼'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3] 바트만은 단순한 구경거리를 넘어 인종차별적 편견과 성적 대상화의 대상이 되었다.[15] 일부에서는 그녀가 "사람과 짐승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로 홍보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6] 하지만 바트만은 전시 중 나체 상태가 되는 것을 거부했으며, 기록에 따르면 몸에 꼭 맞는 살색 옷을 입고 있었다.[13][14]
바트만의 전시는 노예 무역 폐지법(1807)이 통과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큰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16] 영국 내 노예 폐지 운동 단체인 아프리카 협회(African Association)는 그녀의 석방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특히 노예 폐지 운동가 재커리 매콜리(Zachary Macaulay)가 적극적으로 항의하자, 세사르스는 바트만에게도 아일랜드 거인 찰스 번이나 패트릭 코터 오브라이언(Patrick Cotter O'Brien)처럼 자신을 전시하여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다고 반박했다.[10][17] 결국 이 문제는 법정으로 옮겨졌고, 1810년 11월 24일 왕립 법원에서 심리가 열렸다. 법무 장관은 바트만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를 위해 윌리엄 불록과 아프리카 협회 비서의 진술서를 제출했다. 이 진술서들은 바트만이 재산처럼 취급되어 영국으로 왔으며, 굴욕적인 환경에서 전시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14] 바트만은 통역을 통해 자신이 유창하게 구사하는 네덜란드어로 심문에 응했다. 그녀는 자신이 강제로 억류된 것이 아니며, 성적으로 학대받지 않았고, 자유 의지로 런던에 왔다고 진술했다. 또한 수익의 절반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으며 가족에게 돌아갈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17] 이 진술에 따라 사건은 기각되었지만,[16] 일부 역사가들은 당시 바트만 진술의 진실성과 독립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의 진술이 매콜리 등 목격자들의 증언과 상반되는 부분이 있었고,[13] 제출된 계약서가 법적 기만이라는 주장도 있다.[3][10]
법정 공방 이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바트만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10] 그녀는 런던 외에도 잉글랜드 다른 지역을 순회했으며, 1812년에는 아일랜드 리머릭의 박람회와 서퍽의 버리 세인트 에드먼즈 박람회에도 전시되었다.[3] 1811년 12월 1일에는 맨체스터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같은 날 결혼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19][20]
1814년 9월경, 헨리 테일러(Henry Taylor)라는 남자에 의해 바트만은 프랑스 파리로 보내졌다. 테일러는 그녀를 동물 조련사로 알려진 S. 레오(S. Reaux)에게 팔았는데, 그의 본명은 장 리오(Jean Riaux)였으며 반역 행위로 케이프 식민지에서 추방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7][21] 리오는 바트만을 팔레 루아얄(Palais-Royal) 등지에서 15개월 동안 더욱 열악하고 압박적인 환경 속에서 전시했다. 프랑스에서의 그녀의 삶은 사실상 노예 상태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에서의 전시는 과학적 인종차별과 더욱 노골적으로 결부되었다. 프랑스 과학자들은 프랑수아 르바일란트(François Levaillant)와 같은 이전 박물학자들이 다른 코이코이 여성들에게서 관찰했다고 주장했던 늘어진 음순(Elongated labia, 호텐토트 앞치마)을 바트만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21]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를 비롯한 저명한 프랑스 박물학자들이 그녀를 방문하여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1815년 3월에는 왕의 정원(Jardin du Roi)에서 그녀의 신체를 연구하고 여러 과학적인 그림을 남겼다.[10]
바트만은 부유층의 사적인 파티나 살롱에서도 전시품으로 동원되었다.[6] 파리에서는 노예 상태에 대한 법적 제약이 덜했기 때문에 그녀의 처우는 더욱 비참해졌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전시 중 목에 쇠사슬을 차기도 했으나, 이것이 실제 구속인지 공연 소품인지는 불분명하다.[3] 말년에는 나폴레옹 패배 이후 프랑스 경제가 침체하면서 그녀를 보러 오는 유료 관람객이 줄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해졌다.[3]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녀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매춘부로 일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22][23] (클리프턴 크레이스와 파멜라 스컬리의 전기에 따르면, 그녀가 매춘 업소에서도 전시되었기 때문에 매춘 가능성이 언급되지만 확정적인 사실은 아니다).[3] 결국 세라 바트만은 외모와 인종 때문에 극심한 차별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훗날 여성 학대, 식민 통치의 잔혹성, 인종차별의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되게 되었다.[73]
3. 사망과 그 이후
바트만은 1815년 12월 29일경 26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했다.[2]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24] 천연두,[25][26] 매독,[33] 폐렴 등 염증성 질환으로 추정된다.[3]
프랑스의 저명한 해부학자 조르주 퀴비에는 바트만의 사망 원인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부검 없이 시신을 해부했다.[3] 퀴비에는 바트만이 지적인 여성이었으며, 모국어 외에 네덜란드어, 약간의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했고 구슬 하프 연주와 춤에도 능했다고 기록했다.[27][28]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비에는 당시 팽배했던 사회 다윈주의와 과학적 인종차별 사상에 입각하여 그녀의 신체적 특징을 유인원과 유사하다고 해석하는 등 인종적 편견을 드러냈다. 그는 그녀의 작은 귀를 오랑우탄의 귀와 비슷하다고 여겼고, 생전의 활발함을 원숭이의 민첩함에 비유하기도 했다.[10][6] 퀴비에는 바트만의 뇌, 성기, 골격 등을 적출하여 표본으로 만들었다.[6]
바트만의 유해는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소유가 되었고,[10] 그녀가 인류의 특이한 표본이라는 이유로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취급되었다.[10] 그녀의 골격과 신체 모형은 앙제 자연사 박물관을 거쳐 1937년 설립된 파리의 인류 박물관(Musée de l'Homme)에 전시되었다. 특히 그녀의 지방 둔부증(엉덩이 부위에 지방이 과도하게 축적되는 현상)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전시되어 많은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나, 이는 비인간적이고 여성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골격은 1974년, 신체 모형은 1976년에 전시가 중단되었다.[10]
사망 이후에도 바트만의 유해는 인종차별적인 시각 속에서 연구 대상으로 취급되거나 박물관 전시품으로 전락했다.[74] 이후 유전자 감식 결과 바트만이 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동물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74]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는 '타국에서 유입된 유물은 프랑스 소유'라는 국내법 규정을 내세워 유해 반환을 오랫동안 거부했다. 이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와 인권 단체들은 '사람의 신체는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는 국제적 원칙을 들어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며 반환을 촉구했다.[74]
1940년대부터 유해 반환 요구가 간헐적으로 제기되었고, 1998년 남아프리카 시인 다이애나 페러스가 쓴 시 ''나는 당신을 집으로 데리러 왔습니다''(I've come to take you homeeng)는 반환 운동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29][33]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총선에서 아프리카 민족 회의(ANC)가 승리한 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프랑스 정부에 공식적으로 유해 반환을 요청했다. 오랜 법적, 정치적 논쟁과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의 토론 끝에, 프랑스는 악화되는 국제 여론을 고려하여 2002년 3월 6일 유해 반환을 최종 결정했다.[74]
마침내 2002년 5월 6일, 바트만의 유해는 거의 200년 만에 고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왔다.[30] 같은 해 8월 9일, 그녀의 고향 이스턴케이프 주 행키(Hankey) 근처 감투스 강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베르가데링스코프', Vergaderingskop)에 안장되었다.[31] 안장식에는 당시 대통령 타보 음베키와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을 비롯한 8천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하여 그녀의 안식을 기원했다.[75]
2018년 케이프타운 대학교는 인종차별적 과거를 청산하고 바트만을 기리기 위해 교내 '메모리얼 홀'(Memorial Hall)의 명칭을 '세라 바트만 홀'(Sarah Baartman Hall)로 변경했다.[68]
4. 유산과 상징성
세라 바트만의 이야기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여성의 몸에 대한 상품화, 그리고 인간 존엄성 문제에 대한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있다.[10][16] 그녀의 유해는 조르주 퀴비에에 의해 뇌, 생식기, 골격 등이 보존되었으며,[6]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요청으로 과학적 연구 대상이라는 명목 하에 보존되었다.[10] 그녀의 골격과 신체 모형은 앙제 자연사 박물관을 거쳐 1937년 설립된 인류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1970년대 후반까지 관람객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그녀의 지방 둔부증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전시되어, 여성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비판이 제기되기 전까지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비판에 따라 골격은 1974년에, 신체 모형은 1976년에 전시에서 제외되었다.[10]
1940년대부터 그녀의 유해 반환 요구가 간헐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1998년, 코이코이족 후손인 남아프리카 시인 다이애나 페러스가 쓴 "나는 당신을 집으로 데리러 왔습니다"라는 시는 유해 반환 운동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9][33]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1980년대에 ''인간 척도''를 저술하면서 이 사건은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3]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총선 이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프랑스 정부에 공식적으로 유해 반환을 요청했다. 여러 법적 논쟁과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의 토론 끝에 프랑스는 2002년 3월 6일 요청을 수락했다. 그녀의 유해는 2002년 5월 6일 고향인 감투스 계곡으로 송환되었으며,[30] 같은 해 8월 9일 행키 마을의 베르가데링스코프 언덕에 안장되었다.[31]
바트만의 이야기는 때때로 사회적, 정치적 긴장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면서 일부 사실이 왜곡되기도 했다. 서케이프 대학교의 이베트 아브라함스 박사는 "우리는 사라 바트만을 상징 이상으로 보는 학문적 연구가 부족하다. 그녀의 이야기는 항상 다른 주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므로 주변부로 밀려난다"고 지적했다.[32] 그녀는 유럽으로 끌려간 많은 코이코이족 중 한 명이었지만, 그녀의 신체에 대한 광범위한 착취와 검사, 그리고 생전과 사후에 겪은 부당한 대우 때문에 서구에서 아프리카 차별과 고통을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진다.[32] 그녀의 유해가 150년 동안 인류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사실 또한 대중의 인식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32]
그녀의 이름과 "호텐토트 비너스"라는 명칭은 식민주의적 통제와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요소로 분석된다.[3][10][16] 그녀의 출생 이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없으며,[32]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은 그녀에게 "사르티에(Saartjie)"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사라"의 케이프 네덜란드 형태로 하인을 의미하는 동시에 애칭의 성격도 지녀 애정과 착취의 긴장을 담고 있다. 성씨인 "바트만(Baartman)"은 네덜란드어로 "수염 난 남자"를 의미하며, 동시에 미개함, 야만성을 내포한다. "호텐토트"라는 용어 역시 코이코이 언어의 딸깍거리는 소리를 네덜란드식으로 비하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코이코이 언어의 특징을 이상하고 "짐승 같은" 것으로 여겼다.[10][35] 이 용어는 20세기 후반까지 사용되다가 경멸적인 용어로 인식되었다.[36] 이러한 언어적 통제는 식민주의자들이 코이코이족에게 권위를 행사하고 문화를 왜곡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10][34]
유럽의 여행기는 아프리카를 "미개"하고 "야만적인" 곳으로 묘사했으며, 특히 흑인 여성을 "성적으로 원시적"인 존재로 그려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았다.[10] 바트만의 사례는 이러한 시각을 강화하고, 아프리카 여성을 "사납고 길들여지지 않은" 존재로 상징화하여 식민주의적 담론 형성에 이용되었다.[37] 유해 반환 논의 과정에서 필립 메네시어 국립자연사박물관 부관장이 "과학적 가치"를 이유로 반환에 반대한 것은, 그녀가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대상화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10]
최근 몇 년간 일부 흑인 여성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힘의 원천으로 삼아, 백인 중심의 미의 기준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재해석하기도 한다.[53] 가우텡 코이 및 산 위원회 의장 글렌 타아이보쉬는 오늘날 그녀를 "우리의 호텐토트 여왕"이라 부르며 기린다고 밝혔다.[6]
사라 바트만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역사의 여러 측면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으며, 그녀를 기리기 위해 여러 시설과 장소에 이름이 붙여졌다.
| 명칭 | 설명 | 설립/개명 연도 |
|---|---|---|
| 사르티 바트만 여성 아동 센터 | 가정 폭력 생존자를 위한 보호 시설 | 1999년 (케이프타운) |
| 사라 바트만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해양 환경 보호선 | - |
| 사라 바트만 지방 자치 단체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방 자치 단체 (구 카카두 지방 자치 단체) | 2015년 |
| 사라 바트만 홀 | 케이프타운 대학교 기념관 (구 제임슨 홀) | 2018년[68] |
5. 미디어와 문화적 재현
세라 바트만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여러 미디어와 예술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현되고 해석되어 왔다. 대한민국의 EBS 《지식채널e》의 "이상한 쇼" 에피소드나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2010년 1월 31일 방영분) 등에서도 그녀의 삶을 다룬 바 있다.
그러나 서케이프 대학교의 이베트 아브라함스 박사는 바트만이 단순한 상징 이상으로 연구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며, 그녀의 이야기가 종종 다른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정작 바트만 자신은 주변부로 밀려난다고 비판했다.[32] 실제로 바트만 외에도 많은 코이코이족 사람들이 유럽으로 끌려가 전시되었지만, 바트만의 사례는 조르주 퀴비에와 같은 과학자들에 의한 신체 연구와 사후 박물관 전시 등으로 인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32] 역사학자 닐 파슨스는 1845년 프로이센 왕국에서 열린 박람회에 전시된 코이코이족 아이들이나, 1846년부터 1855년까지 유럽을 순회한 '보스예먼스' 쇼, P. T. 바넘 쇼에 등장한 플로라와 다른 코이코이족 아이들의 사례를 기록하기도 했다.
바트만의 삶과 그녀가 겪었던 착취는 후대의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아래는 세라 바트만을 다룬 주요 미디어 및 문화 작품 목록이다.
| 연도 | 장르 | 작가/감독 | 작품명 | 비고 |
|---|---|---|---|---|
| 1811 | 연극 | 호텐토트 비너스 | 런던 뉴 극장 팸터마임[57] | |
| 1847 | 소설 |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 허영의 시장 | 등장인물이 바트만을 언급하며 비하 |
| 1863 | 시 | "크리놀리나" | 크리놀린을 입은 여성을 바트만에 비유[58] | |
| 1916 | 소설 | 제임스 조이스 | 젊은 예술가의 초상 | 여성미에 대한 논의 중 바트만 언급 |
| 1922 | 시 | 데임 이디스 시트웰 | "혼파이프" (파사드 수록) | 은유적 언급[59] |
| 1934 | 소설 | 진 리스 | 어둠 속의 항해 | 주인공이 "호텐토트"라 불림 |
| 1987, 1990 | 시, 시집 | 엘리자베스 알렉산더 | 비너스 호텐토트 | 바트만의 이야기를 탐구 |
| 1993 | 시 | 모르데차이 겔드만 | "호텐토트 비너스" (눈 수록) | 히브리어 시[60] |
| 1996 | 연극 | 수잔-로리 파크스 | 비너스 | 바트만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함 |
| 1998 | 다큐멘터리 영화 | 졸라 마세코 | 사라 바트만의 삶과 시대 | [61] |
| 2000 | 사진 | 라일 애슈턴 해리스, 르네 밸러리 콕스 | 호텐토트 비너스 2000 | [62][39] |
| 2003 | 소설 | 바바라 체이스-리보드 | 호텐토트 비너스: 소설 | 바트만을 인간적으로 묘사 시도 |
| 2007 | 시 | 캐시 박 홍 | "호텐토트 비너스" (모엄 번역하기 수록) | |
| 2008 | 연극 | 리디아 R. 다이아몬드 | 비너스의 관음증 환자 |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조명[63] |
| 2010 | 영화 | 압델라티프 케시시 | 블랙 비너스 | 야히마 토레스 주연 |
| 2010 | 오페라 | 헨드릭 호프메이어 | 사르치에 | 20분 길이 오페라 |
| 2010 | 소설 | 요안나 바토르 | Chmurdalia | 가상의 후손 언급 |
| 2012 | 시 | 더글러스 키어니 | "Drop It Like It's Hottentot Venus" | [64] |
| ? | 소설 | 다이앤 오버벅 | 가정 치료 | 바트만을 중심 줄거리로 사용, 상징화 비판[65] |
| ? | 설치 미술 | 브렛 베일리 | 전시회 B (인간 동물원) | 바트만 묘사[66] |
| 2016 | 음악 | 재밀라 우즈 | "Blk Girl Soldier" (헤븐 수록) | "그들은 그녀의 몸을 항아리에 넣고 잊어버렸다" |
| 2017 | 음악 | 니티 스콧 | "For Sarah Baartman" (CREATURE! 수록) | |
| 2018 | 음악 | 더 카터스 (제이 지, 비욘세) | "Black Effect" (에브리씽 이즈 러브 수록) | "사라 바트만 엉덩이로 뽐내세요" |
| 2019 | 연극 | 조드와 뇨니 | A Khoisan Woman | 바트만에 대한 연극[67] |
| 2020 | 음악 | 로이스 59" | "Upside Down" | 바트만 언급 |
| 2019/20 | 논픽션 | 테사 맥와트 | Shame on Me: An Anatomy of Race and Belonging | 바트만과 호텐토트 용어 논의 |
| ? | 연극 | 메건 스와비 | 비너스의 딸 | 식민주의와 문화 탐구 |
현대에 와서도 바트만의 이미지는 논쟁적으로 소비되곤 한다. 2014년 11월, 잡지 페이퍼 매거진은 킴 카다시안이 자신의 엉덩이 위에 샴페인 잔을 올려놓은 모습을 담은 표지를 공개했다.[41][70] 이 이미지는 사진작가 장 폴 고드가 1976년 촬영했던 "캐롤리나 보몽" 사진을 재현한 것이었으나,[43] 많은 비평가들은 이것이 19세기 바트만이 "호텐토트 비너스"로 전시되며 겪었던 인종차별적이고 성적인 대상화를 연상시킨다며, "흑인 여성의 신체에 대한 착취와 페티시즘"을 조장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41][42][71][72] 작가 제네바 S. 토마스는 식민주의 역사 속 흑인 여성의 재현 방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카다시안의 사진이 바트만의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지적했다.[42] 장 폴 고드 자신도 과거 인터뷰에서 "정글 열"이 있었으며 "흑인은 내 작품의 전제"라고 말한 바 있어[44], 그의 작품 세계와 카다시안 이미지 재현 방식은 바트만의 신체를 대상화했던 19세기 시선과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45]
이 논란에 대해 클레우치 데 올리베이라는 제저벨에 기고한 글에서 바트만이 "항상 자신의 길을 가는 주체"였다고 주장하며 다른 해석을 내놓았으나,[46] 문학 교수 닐리카 자야와르데네는 이를 "역사적 기록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고 비판하며, 역사적 인물에게 거짓된 주체성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촉구했다.[47][48]
바트만의 사례는 스포츠계에서도 소환되었다. 사회 과학자 제임스 맥케이와 헬렌 존슨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테니스 선수 비너스 윌리엄스와 세레나 윌리엄스 자매에 대한 언론 보도가 바트만에게 가해졌던 "포르노적 에로티시즘"과 "성적 그로테스크함"이라는 인종차별적 서사를 반복한다고 분석했다. 특히 백인 남성 기자들이 자매의 경기력보다는 근육질 몸매, 특히 세레나의 가슴과 엉덩이 크기에 집착하며 이를 남성적, 동물적, 과도하게 성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방식이 바트만의 신체를 구경거리로 삼았던 과거를 반영한다고 지적했다.[50]
또한, 헤더 라드케는 2022년 저서 ''Butts: A Backstory''에서 여성 엉덩이의 문화사를 탐구하며 바트만의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었다.[51][52]
2018년 12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대학교는 교내 기념관(Memorial Hall)의 이름을 '사라 바트만 홀(Sarah Baartman Hall)'로 변경하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56][68] 이는 바트만을 기억하고 그녀가 겪었던 고통의 역사를 되새기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5. 1. 페미니즘적 관점
많은 아프리카계 여성 디아스포라 예술가들은 바트만의 전통적인 도상학을 비판해 왔다.[38] 현대 페미니스트들의 연구에 따르면, 바트만의 전통적인 도상학과 역사적 삽화는 역사적으로 미술에서 흑인 여성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38] 이러한 연구는 19세기에 흑인 여성 신체의 전통적인 도상학이 제도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어떻게 정의되었는지 평가한다.[38][69]르네 콕스, 르네 그린, 조이스 스콧, 로르나 심슨, 캐리 메이 윔스, 데보라 윌리스 등은 아프리카 여성 신체를 여전히 둘러싼 현대 사회적, 문화적 문제를 탐구하는 예술가들이다.[38] 문화 및 문학 역사가인 샌더 길먼은 "19세기에 많은 아프리카 흑인 집단이 유럽인들에게 알려졌지만, 호텐토트는 흑인, 특히 흑인 여성의 본질을 대표하는 존재로 남았다. 두 개념 모두 세계의 인식과 표현에서 도상학적 기능을 수행했다"고 말한다.[38] 그의 논문 "흑인 신체, 백인 신체: 19세기에 예술, 의학 및 문학에서 여성 성의 도상학으로"는 유럽 예술에서 흑인 여성에 대한 미술사 기록을 추적하며, 중세 시대부터 흑인 여성과 색욕의 연관성이 미술사에서 일관되게 묘사되었음을 증명한다.[38]
라일 애슈턴 해리스와 르네 밸러리 콕스는 공동으로 사진 작품 《호텐토트 비너스 2000》을 제작했다. 이 작품에서 해리스는 바트만처럼 보이는 빅토리아 콕스를 촬영했는데, 그녀는 몸에 부착된 크고 조각적인 금속 가슴과 엉덩이를 착용하고 있다.[39]
"허용된(Permitted)"은 르네 그린이 사라 바트만에게 영감을 받아 제작한 설치 작품이다. 그린은 흑인 여성 신체에 대한 유럽의 인식을 "이국적", "기괴", "괴물"로 탐구하기 위해 특별한 관람 구성을 만들었다. 관람객들은 바트만이 전시되었을 수도 있는 무대를 연상시키는 설치된 플랫폼에 올라가도록 유도되었다. 그린은 바트만 전시의 기본 설정을 재현한다. 플랫폼 중앙에는 바트만의 대형 이미지와, 관람객에게 바트만의 엉덩이를 측정하도록 권장하는 프랜시스 골턴의 각인이 새겨진 나무 자 또는 슬랫이 있다. 또한 설치 작품에는 관람객이 상자 위에 서 있는 바트만의 이미지를 볼 수 있는 구멍도 있다. 윌리스에 따르면, 이 구멍은 19세기에 흑인 여성의 형태에 대한 민족지학적 이미지가 바트만 전시회에 참석한 유럽인들에게 일종의 포르노그래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39]
Trinh T. Minh-ha는 그녀의 영화 ''Reassemblage: From the firelight to the screen''에서 식민주의자의 시선이 여성의 누드 형태에 적용하는 민족 중심적 편견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러한 편견이 유럽 또는 서구 문화의 맥락에서 누드 여성 신체를 본질적으로 성적으로 도발적이고, 문란하며, 포르노그래피적으로 보이게 한다고 주장한다.[40]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은 바트만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데 관심을 가지며, 바트만의 생애 전, 중, 후에 발생한 미술사적 표현과 도상학을 바탕으로 흑인 여성 신체를 둘러싼 고정 관념과 민족 중심적 편견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한다.[3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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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personality was lively, her memory good and, after a gap of some weeks, she recognised someone she had seen only the once. She spoke reasonable Dutch, which she had learned in The Cape, knew some English, and was beginning to say a few words in French. She danced according to the fashion of her own country, and played on the instrument they call the 'jew's harp' quite by ear....her shoulders, back, and upper chest were graceful...Her arms (rather slender) were very well-made, and her hand charming. Her foot was also very pret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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