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묜 부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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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묜 부됸니는 러시아 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소련의 군인이다. 1903년 러시아 제국 군대에 입대하여 러일 전쟁에 참전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했다. 러시아 내전에서 붉은 군대 기병대를 조직하여 승리에 기여했으며, 이후 소련 원수까지 올랐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에 포위되어 해임되었지만,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처벌을 면했다. 그는 기병 전문가로 부됸니 말 품종을 개발했으며, 부됸노프카라는 군모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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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묜 부됸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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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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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 |
로마자 표기 | Semyon Mikhaylovich Budyonnyy |
출생 | 1883년 4월 25일 |
사망 | 1973년 10월 26일 (90세) |
출생지 | 로스토프주 프롤레타르스키 군, 돈 코사크 군관구, 러시아 제국 (현재의 러시아, 로스토프주 프롤레타르스키 구역) |
사망지 | 모스크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
매장지 | 붉은 광장 묘지 |
군사 경력 | |
소속 | 러시아 제국군 (1903–1917)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1917–1922) 소비에트 연방 (1922–1954) |
복무 기간 | 1903–1954 |
최종 계급 | 소련방 원수 (1935–1954) |
병과 | 러시아 제국군 붉은 군대 소비에트군 |
지휘 | 제1 기병군 모스크바 군관구 서남 방면군 예비 전선군 북캅카스 전선군 |
참전 |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훈장 | 소련 영웅 (3회) 성 게오르기우스 십자훈장, 1등급–4등급 |
기타 | |
소속 정당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1919–1973) |
2. 생애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는 러시아 제국 남부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03년 군에 징집되어 기병으로 복무를 시작했다.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용맹함으로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으며, 특히 1차 대전 중 코카서스 전선에서 복무하며 볼셰비키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붉은 군대에 합류하여 러시아 내전 시기 제1기병군을 창설하고 지휘하며 백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시기 스탈린, 보로실로프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 소련-폴란드 전쟁에도 참전했으나 바르샤바 진격에는 실패했다.
내전 영웅으로 부상한 부됸니는 전간기 동안 붉은 군대 내 기병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하며,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등이 추진하던 군 현대화 및 기계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럼에도 스탈린과의 관계 덕분에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 연방 원수 5명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고, 대숙청의 광풍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우크라이나 방면을 책임지는 남서 방향 총사령관을 맡았으나, 현대 기갑전에 대한 이해 부족과 스탈린의 후퇴 불허 명령 등으로 인해 우만과 키예프에서 소련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초래했다. 이 패배의 책임으로 해임된 후에는 주로 후방의 예비 부대 지휘나 명예직을 맡았다.
종전 후에는 소련 농업부 차관 등을 역임하며 말 사육 분야에 기여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부됸니 종 말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는 소련 영웅 칭호를 세 차례나 받는 등 내전 영웅으로서의 명예를 유지했으며, 1973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부됸니는 용맹한 기병 지휘관이었으나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현대전에서 한계를 드러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 (1883년 ~ 1917년)
세묜 부됸니는 1883년 봄, 러시아 제국 남부 돈 코자크 지역(현재 러시아 로스토프주 프로레타르스크 지구)의 살스크 근처 코주린 농가에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코사크 지역에서 살았지만 보로네시 지방 출신의 민족 러시아인이었다. 그는 1903년 가을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될 때까지 농부, 가게 심부름꾼, 대장장이 견습생, 증기 구동식 탈곡기 운전사로 일했다.1903년 군 복무를 시작한 그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9세의 이름을 딴 프리모르스키 용기병 연대에 배치되었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 전쟁에 제46 코사크 연대(다른 자료에서는 제26 돈 코사크군 연대) 소속 기병으로 참전했다. 이때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과 만났다는 기록도 있다. 전쟁 후 그는 프리모르스크 용기병 연대로 다시 전속되었다.[3]
1907년에는 연대 최고의 기수로 인정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기병 학교의 기병 장교 아카데미 하급 장교 과정에 보내졌다. 1908년 1년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부사관 계급으로 강사가 되었으며, 이후 상사 계급의 승마 강사로 자신의 연대로 돌아가 1914년까지 복무했다.[3]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상급 하사관이었으며, 예비 용기병 기병 대대에 합류했다.[3] 그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 제18 세베르스키 용기병 연대 소속으로 동부 전선과 코카서스 전선에서 싸웠다. 동부 전선에서는 브제지나 근처에서 독일 보급 부대를 성공적으로 공격하여 명성을 얻었고,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 4등급을 수여받았다.[3]
1916년 11월, 그가 속한 코카서스 기병 사단은 오스만 투르크와 싸우기 위해 코카서스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그는 장교들의 병사들에 대한 열악한 대우와 지속적인 식량 부족 문제로 기병대 수석 상사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수석 상사가 먼저 부됸니를 공격하자, 부됸니는 주먹으로 상사를 때려눕혔다. 이 일로 그는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고, 최소한 훈장을 박탈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부대 병사들이 심문 과정에서 부됸니를 지지하며 수석 상사가 말에게 차였다고 일관되게 증언하여 위기를 모면했다.[3]
이후에도 부됸니는 용맹을 떨쳐 반 전투에서 다시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 4등급을 받았다. 바그다드로 가는 길목인 멘델리 근처에서 투르크군과 싸운 공로로 3등급을, 22일간 터키군 후방에서 작전을 수행한 공로로 2등급을, 그리고 선임 하사관 1명과 병사 6명을 사로잡은 공로로 1등급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총 4개의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과 4개의 메달을 수여받았다.[3]
2. 2. 러시아 혁명과 내전 (1917년 ~ 1923년)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 정권이 무너진 후, 부됸니는 볼셰비키와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했다. 그는 카프카스 전선에서 소비에트파 병사를 이끌며 소대 위원회 의장과 연대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3] 카프카스 사단과 함께 민스크로 이동했을 때는 연대 위원회 의장과 사단 위원회 부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3] 1917년 8월에는 올샤에서 코르닐로프 장군 군대의 수송 열차 무장 해제를 지휘했다.10월 혁명 이후 돈 강 지방의 플라토프스크 스타니차로 돌아왔다. 1918년 1월 12일, 노동자, 농민, 코사크 및 병사 대표의 스타니차 소비에트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사리스키 구 소비에트 집행 위원회 위원 및 토지부 구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18년 2월, 부됸니는 백위대로부터 플라토프스카야를 되찾기 위해 24명의 병력으로 시작하여 혁명 기병대를 조직했다. 이 부대는 곧 신병들이 합류하며 520명 규모로 성장했고, 이 중 120명으로 붉은 군대 최초의 기병 소대를 창설했다.[4] 그는 대대 사령관으로 선출되었고, 이 부대는 점차 연대, 여단으로 발전하며 돈 지방의 백위군(백군)에 맞서 싸웠다. 1918년 7월, 부됸니는 스탈린과 보로실로프를 만났고, 그들은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를 위한 기병대 창설을 지지했다. 1918년 10월, 차리친(현재의 볼고그라드)에서 보리스 두멘코를 사령관으로 하는 제1사회주의 기병 연대가 창설되었고, 부됸니는 부사령관을 맡았다.[3] 이 부대는 1918년부터 1919년 초까지 차리친 방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19년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소련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보로실로프, 스탈린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1919년 여름, 그의 기병대는 백군 안톤 데니킨 장군과 교전하며 점차 명성을 얻었다. 1919년 8월에는 표트르 브란겔 장군 휘하의 백군 카프카스군을 격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9년 10월, 보로네시-카스토르노예 작전에서 콘스탄틴 마몬토프와 안드레이 슈크로가 지휘하는 백군 쿠반 코사크 군단을 상대로 내전 중 최대 규모의 기병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보로네시를 탈환하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백군의 위협을 제거했으며, 돈 유역에서 안톤 데니킨 군을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이 승리 이후 레프 트로츠키는 부됸니를 "노동자와 농민의 진정한 전사"라고 칭송했다.[6]
1919년 11월 19일, 공화국 혁명 군사 회의의 결정에 따라 부됸니의 기병 군단은 제1기병군으로 승격되었고, 부됸니는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23년 10월까지 이 부대를 지휘하며 러시아 내전에서 붉은 군대의 승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20년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자, 부됸니의 제1기병군은 스탈린이 지휘하는 남부 전선에 배치되어 참전했다. 4월에는 폴란드군을 우크라이나에서 몰아내는 임무를 맡아 6월 5일 키예프 탈환에 참여하고 폴란드군을 서쪽으로 성공적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8월, 바르샤바 공략을 위한 북진 과정에서 리비우 점령에 실패하고,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가 지휘하는 주력 부대가 바르샤바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제1기병군도 코마로프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해야 했다.
러시아 내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부됸니와 제1기병군은 크림반도 재정복 작전에 참여했다. 1920년 11월 페레코프-총가르 작전에서 제1기병군은 페레코프 지협을 돌파하여 러시아군(백군)의 마지막 저항 거점인 크림을 점령하고 백군을 최종적으로 격퇴하여 붉은 군대의 내전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2. 3. 전간기 (1923년 ~ 1941년)
러시아 내전 이후,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부됸니는 북캅카스 군관구 부사령관을 지냈다.[3] 1923년에는 체첸에 파견되어 체첸 자치주 창설을 발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3] 같은 해 붉은 군대 기병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24년부터 1937년까지는 붉은 군대 기병대 감찰관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종마장의 조직 및 운영과 새로운 말 품종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부됸니 종과 테르스키 종이라는 성과를 냈다.부됸니는 용감하고 카리스마 있는 기병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탱크와 같은 현대 전쟁 무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고 기병의 중요성을 여전히 강조했다.[10] 이러한 그의 입장은 기계화 부대를 중심으로 군 현대화를 추진하던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와 같은 인물들과 갈등을 빚었다. 부됸니는 투하체프스키의 기갑 부대 창설 노력을 비판하며 기병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다.[13]
1932년에는 미하일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1934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 후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5년, 소련에서 계급 제도가 부활하면서 부됸니는 최초의 5명의 소비에트 연방 원수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다른 4명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바실리 블류헤르,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으나, 이들 중 부됸니와 보로실로프를 제외한 3명은 이후 대숙청 기간 동안 처형되었다.
대숙청이 본격화되던 시기, 부됸니는 1937년부터 1939년까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했다. 이는 스탈린이 니콜라이 부하린과 알렉세이 리코프 같은 고참 볼셰비키들을 숙청하면서 군사적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분석이 있다. 부됸니는 숙청 과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937년 2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는 부하린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11] 같은 해 5월에는 투하체프스키 원수와 고위 당 간부 야니스 루주타크스의 체포 결의안에 "이 쓰레기들을 없애야 한다"고 적으며 동의했다.[12] 6월에는 투하체프스키를 포함한 8명의 고위 군 지휘관들에 대한 재판에 판사로 참여하여, 투하체프스키의 독립적인 전차 부대 창설 노력이 고의적인 파괴 행위에 해당한다고 증언했다.[13] 재판 후 반세기가 지나, 소련 당국은 당시 피고인 8명 모두 무죄였으며 고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받았음을 인정했다. 부됸니는 재판 직후 보로실로프에게 보낸 메모에서 이들이 "1931년부터, 심지어 혁명 초창기부터 우리 편에 침투한 공인된 스파이"라고 주장했다.[14]
스탈린의 오랜 친구였음에도 부됸니 역시 숙청의 위협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NKVD 요원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사무실에 들이닥치자, 부됸니는 권총으로 무장하고 스탈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요원들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스탈린이 이를 받아들여 위기를 모면했다고 전해진다.[10] 이후 그는 1937년 12월, 과수원, 라즈베리 및 구스베리 관목, 역마, 검은 암소 및 약 249.48kg의 돼지가 있는 큰 별장을 배정받았다.[15]
1939년, 부됸니는 국방 인민 위원부 차관 및 동 인민 위원부 군사 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어 1952년까지 자리를 유지했다. 같은 해,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따라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 지방을 점령하는 소련군 부대를 지휘했다. 1940년에는 겨울전쟁에 참전하여 야전군을 지휘했지만 참패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8월 소련 국방 인민 위원 제1차관(사실상 국방장관 대리)으로 승진했으나, 이 자리는 그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 1945년)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부됸니는 우크라이나 방면을 담당하는 소련군 남서 방향 총사령관(главком|글라브콤ru, glavkom)에 임명되었다. 그는 남서부 전선과 남부 전선을 지휘하며 독일 남방집단군의 공세에 맞섰다. 또한 전쟁 발발 직후부터 1945년 2월까지 소련 최고 군사 지휘 기구인 스타프카(Stavka)의 일원이기도 했다.그러나 스탈린은 초기 전쟁 상황을 세세하게 관리하려 했고, 부됸니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후퇴하지 말라는 엄격한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부됸니의 군대는 1941년 9월, 우만과 키예프에서 독일군에게 차례로 대규모로 포위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특히 키예프 포위전은 군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포위 섬멸전으로 기록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약 15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사망 또는 포로로 잃었다.

결국 1941년 9월 13일, 스탈린은 부됸니를 패전의 희생양으로 삼아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세묜 티모셴코로 교체했다. 부됸니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 비행기로 모스크바로 탈출했으며, 스탈린과의 오랜 친분 덕분에 이렇다 할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 부됸니는 다시는 일선에서 전투 부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그는 예비 전선 사령관(1941년 9월~10월), 북 코카서스 방향 군대 총사령관(1942년 4월~5월), 북 코카서스 전선 사령관(1942년 5월~8월) 등을 역임했지만, 독일군이 캅카스 지역으로 진격해오자 다시 해임되었다. 1943년부터 종전까지는 붉은 군대의 기병 감찰관 등 주로 명예직이나 후방직을 맡았다.

비록 러시아 내전 시기 용맹한 기병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료 장교들은 부됸니가 기계화된 현대 전쟁을 지휘하는 데에는 명백히 무능하다고 평가했다. 전후 소련 연방 원수 코네프는 "부됸니는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공부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무능함을 드러냈고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회고했다.[16] 당시 독일 남방집단군 사령관이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역시 부됸니에 대해 "콧수염은 아주 굵지만, 머리는 아주 작다"는 포로 장교의 말을 인용하며 그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다.[17] 기병에 대한 그의 집착과 현대전에 대한 몰이해는 독소전쟁 초기 소련군의 막대한 손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지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전 시기의 공적과 스탈린의 후원으로 그는 전쟁 중에도 군 고위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2. 5. 전후 활동 (1945년 ~ 1973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부됸니는 1943년 1월부터 맡았던 붉은 군대 기병대 지휘관(또는 감찰관)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군사 분야 외에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 농업부 차관을 역임하며 말 사육 분야를 담당했다. 그는 기병 전문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말 품종 개량에 힘썼고, 자신의 이름을 딴 부됸니 종 말을 개발했다. 이 말은 뛰어난 지구력으로 유명하다.
1953년 5월부터 1954년 9월까지는 기병대 감독관을 지냈으며, 1954년에는 소련 국방부 주임 감찰관 중 한 명으로 임명되어 군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정치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52년부터 사망하는 1973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 후보 위원 자격을 유지했으며, 은퇴 후에도 소련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직을 계속 맡았다.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 회의의 결정에 따라 1958년 2월 1일, 1963년 4월 24일, 1968년 2월 22일 세 차례에 걸쳐 최고 영예인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73년 10월 26일, 부됸니는 90세의 나이로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은 레닌 묘와 크렘린 벽 사이에 위치한 12개의 개별 묘 중 하나이다. 그의 장례식에는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국방부 장관 그레치코 원수 등이 운구를 맡아 그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었다.
3. 사생활
부됸니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아내는 나제즈다 이바노브나로,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코사크 여성이었다. 부됸니가 군에 입대하기 직전인 1903년에 결혼했으며, 이후 7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그녀는 붉은 기병대와 함께 이동하며 식량과 의료 물품을 조달하는 일을 도왔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부부는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보로실로프 가족과 함께 살았고, 1923년에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1924년 나제즈다 이바노브나는 총기 사고로 사망했는데, 이를 둘러싸고 여러 이야기가 있다. 독소 전쟁 초기에 포로가 되었다가 서방으로 망명한 소련군 장교 미하일 솔로비예프는 부됸니가 아내의 불륜을 추궁하다 살해했다고 주장했다.[21] 반면, 부됸니는 나중에 얻은 딸에게 그녀가 결혼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스스로 총을 쏘았으며, 의도치 않은 사고였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22]
1925년, 부됸니는 자신보다 나이가 절반 정도 어린 가수 올가 스테파노브나 미하일로바와 재혼했다. 그녀는 쿠르스크 출신의 철도 노동자 딸이었다. 결혼 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했고, 볼쇼이 극장에 입단했다. 크로아티아 공산주의자 안테 칠리가에 따르면, 젊은 공산주의자 단체인 콤소몰 회원들은 부됸니가 공개 연회에서 새 신부와 입맞춤하는 모습 등을 보고 충격을 받아 문제를 일으키려 했으나, 당국에 의해 제지되었다고 한다.[23][24] 부됸니는 1937년 9월 이전에 그녀와 이혼했다.
이후 부됸니는 올가의 사촌인 마리아 바실리예브나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그녀는 부됸니보다 33살 어린 학생이었으며, 올가가 체포된 후 부됸니를 돌보았다. 이 결혼은 부됸니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세르게이(1938년생), 미하일(1944년생) 두 아들과 딸 니나(1939년생)가 태어났다.[25]
4. 유산
부됸니의 이름은 여러 곳에 남아 그의 업적과 존재를 기리고 있다.
우선, 소련군이 러시아 내전 시기부터 겨울전쟁까지 사용했던 독특한 모양의 군모인 부됸노프카(Будённовка)는 그의 이름을 땄다. 정식 명칭은 "적군 투구"였으나, 내전 영웅인 그의 이름을 따 대중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모자는 고대 루스의 전사(보가티르)가 쓰던 투구를 본뜬 디자인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뛰어난 말 사육사이기도 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말 품종인 부됸니 말(Будённовская лошадь)을 개발했다. 이 말은 뛰어난 지구력과 운동 능력으로 유명하며, 오늘날에도 러시아에서 스포츠용 등으로 널리 사육되고 있다. 품종명 "부됸노프스카야"(Будённовская)는 러시아어로 '말'(лошадь)이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여성형 형용사 형태를 띤다.
그의 군사적 명성은 여러 문화 작품에서도 기념되었다. 1920년 작곡가 드미트리 포크라스가 만든 "부됸니 행진곡"은 소련 전역에서 큰 인기를 누렸으며, 이 외에도 '붉은 기병대 노래'(Konarmieyskaya) 등 여러 군가에서 그의 용맹함이 칭송되었다.[7]
작가 이삭 바벨은 소련-폴란드 전쟁 당시 부됸니의 제1기병군과 함께 종군한 경험을 바탕으로 단편 소설 모음집 기병대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세계적인 문학적 찬사를 받았으나, 전쟁의 참혹함과 군대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내용 때문에 부됸니 자신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18][19] 부됸니는 1924년 바벨을 "문학적 타락자"라고 비난하며 자신의 군대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고, 이는 당대 최고의 작가였던 막심 고리키와의 공개적인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고리키는 바벨을 옹호했지만, 부됸니는 1928년에도 바벨의 작품을 "조잡하고 의도적인 중상"이라며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8] 부됸니 자신도 5권 분량의 회고록을 남겨 내전 시기와 제1기병대의 활동을 기록했다.
부됸니는 군사 분야 외에도 의외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마추어 바얀 연주자였으며, 친구인 코사크 바야니스트 그리고리 자이체프와 함께 듀엣으로 연주한 기악곡 비닐 레코드가 "바야니스트 듀엣"(Дуэт баянистов)이라는 제목으로 소련에서 발매되기도 했다.[20] 또한, 혁명 10주년 기념 행사 뒤풀이에서는 카마린스카야 춤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9]
그의 이름을 딴 교육 기관으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S. M. 부됸니 통신 군사 아카데미가 있다.
러시아 남부 여러 도시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물과 지명이 남아있다. 로스토프나도누에는 그의 청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도시 중심부의 타간로그스키 대로는 그의 이름을 따 부됸니 대로로 개칭되었다. 도네츠크 시청 앞에도 그의 기념비가 있다. 스타브로폴 지방의 도시 부됴노프스크는 원래 스뱌토이 크레스트(1920년부터는 프리쿰스크)였으나, 1935년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사망 후 그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5. 평가
러시아 내전 시기에는 용맹한 기병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가 창설하고 이끈 제1기병군은 내전에서 붉은 군대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스탈린, 보로실로프 등과 함께 소련의 군사 영웅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는 용감하고 카리스마 있는 지휘관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현대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병의 역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등이 추진한 기갑부대 중심의 군 현대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10] 이러한 한계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야전군을 지휘했지만 참패했으며,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우크라이나 방면 소련군 총사령관을 맡았으나 우만과 키예프에서 독일군에게 대규모 포위 섬멸을 당하는 참사를 막지 못했다. 이 전투들에서의 패배는 약 150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의 사상자 및 포로 발생이라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그는 포위 직전 해임되어 모스크바로 탈출했지만, 그의 군사적 무능함이 초래한 결과는 컸다. 전후 동료였던 코네프 원수는 그가 "완전히 무능함을 드러냈고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평가했으며,[16] 당시 독일군 남방 집단군 사령관이었던 룬트슈테트 원수 또한 부됸니의 군사적 역량을 낮게 평가했다.[17]
스탈린과의 오랜 친분은 그의 정치적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숙청 기간 동안 NKVD 요원들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스탈린에게 직접 전화하여 위기를 모면했으며,[10] 키예프에서의 참패 이후에도 스탈린의 비호 아래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명예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숙청 과정에서 단순히 수혜자였던 것만은 아니다.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붉은 군대 고위 지휘관 8명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하여 이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는 데 일조했으며,[13] 니콜라이 부하린과 같은 정치적 인물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11]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과 별개로, 부됸니는 소련 사회와 문화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의 이름을 딴 '부됸니' 말 품종은 뛰어난 지구력으로 유명하며, 러시아 내전 시기부터 사용된 독특한 모양의 군모 '부됸노프카'(Будённовка|부됸노프카ru) 역시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작곡가 드미트리 포크라스가 만든 '부됸니 행진곡'은 소련 전역에서 큰 인기를 누린 군가였다.[7] 반면, 작가 이삭 바벨이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당시 제1기병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집 《기병대》에서의 묘사에 대해서는 "중상"이라며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갈등을 빚기도 했다.[8]
종합적으로 볼 때, 부됸니는 러시아 내전의 영웅이었으나 기병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현대전에는 적응하지 못한 구시대적 군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스탈린과의 개인적인 관계 덕분에 정치적으로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의 군사적 역량 부족은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안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6. 수상 내역
'''러시아 제국'''
훈장 이미지 | 훈장 이름 | 비고 |
---|---|---|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 | 4개 등급 전체 수훈 (Full Cavalier) | |
성 게오르기 메달 | 4개 등급 전체 수훈 (Full Cavalier) |
'''소련'''
훈장 이미지 | 훈장 이름 | 수훈 횟수 및 날짜 |
---|---|---|
![]() | 소련 영웅 | 3회 (1958년 2월 1일, 1963년 4월 24일, 1968년 2월 22일) |
![]() | 레닌 훈장 | 8회 (1935년 2월 23일, 1939년 11월 17일, 1943년 4월 24일, 1945년 2월 21일, 1953년 4월 24일, 1958년 2월 1일, 1968년 2월 22일, 1973년 4월 24일) |
![]() | 적기 훈장 | 6회 (1919년 3월 29일, 1923년 3월 13일, 1930년 2월 22일, 1941년 1월 8일, 1944년 11월 3일, 1968년 6월 24일) |
![]() | 수보로프 훈장, 1급 | 1회 (1944년 2월 22일) |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적기 훈장 | 1회 (1923년 11월 29일) | |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노동 적기 훈장 | 1회 (1930년 1월 19일) | |
![]() | 모스크바 방어 메달 | 1회 (1944년) |
![]() | 세바스토폴 방어 메달 | 1회 (1942년) |
![]() | 오데사 방어 메달 | 1회 (1942년) |
![]() | 코카서스 방어 메달 | 1회 (1944년) |
![]() | 1941–1945년 대조국 전쟁에서 독일에게 승리한 훈장 | 1회 (1945년) |
![]() | 일본에 승리한 훈장 | 1회 (1945년) |
![]() | 1941–1945년 대조국 전쟁 승리 20주년 기념 메달 | 1회 (1965년) |
![]()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 | 1회 (1969년) |
![]() | 노동자-농민 적군 창설 20주년 기념 메달 | 1회 (1938년) |
![]() | 소비에트 육군 및 해군 30주년 기념 메달 | 1회 (1948년) |
![]() | 소련군 40주년 기념 메달 | 1회 (1958년) |
![]() | 소련군 50주년 기념 메달 | 1회 (1968년) |
![]() | 모스크바 800주년 기념 메달 | 1회 (1947년) |
![]() | 레닌그라드 250주년 기념 메달 | 1회 (1957년) |
'''명예 무기'''
'''외국 훈장'''
훈장 이미지 | 훈장 이름 | 수여 국가 |
---|---|---|
중소 우호 훈장 | 중국 | |
![]() | 수흐바타르 훈장 | 몽골 (2회) |
![]() | 적기 훈장 | 몽골 (1936년) |
우호 훈장 | 몽골 (1967년) | |
몽골 인민 혁명 50주년 기념 메달 | 몽골 (1970년) | |
몽골 인민군 50주년 기념 메달 | 몽골 (1970년) | |
![]() |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훈장, 3급 | 폴란드 (1973년) |
'''기타'''
- 세르푸호프 명예 시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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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Romanization of Russ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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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로마자 표기로는 Semiyon Mikhailovich Budyonny이다. 다른 로마자 표기로는 Budennii, Budenny, Budyenny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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