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셀 라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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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셀 라르센은 1897년 덴마크에서 태어나 철도 노동자로 일하다가 정치에 입문하여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이후 생디칼리즘과 노동 운동의 영향을 받아 좌파 사회당을 거쳐 덴마크 공산당에 합류하여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활동했다. 소련 유학 후 덴마크 공산당 의장으로 활동하며 실업자 운동을 이끌었으나, 코민테른과의 노선 갈등으로 제명되었다. 1959년 사회인민당을 창당하여 민주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2005년에는 CIA와의 협력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으며, 덴마크 현대 정치사에서 논쟁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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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 라르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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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악셀 라르센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사회주의인민당, 덴마크 공산당, 덴마크 사회민주당,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
소속 정당 | 사회주의인민당 |
이전 소속 정당 | 덴마크 공산당, 사회민주당,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
사회주의인민당 대표 | 임기 시작: 1959년 임기 종료: 1968년 |
이전 대표 | 사무실 설립 |
다음 대표 | 시구르 외만 |
덴마크 공산당 대표 | 임기 시작: 1932년 임기 종료: 1958년 |
이전 대표 | 퇴게르 퇴게르센 |
다음 대표 | 크누드 예스페르센 |
폴케팅 의원 | 임기 시작: 1932년 임기 종료: 1941년 |
폴케팅 의원 | 임기 시작: 1945년 임기 종료: 1972년 |
무임소 장관 | 총리: 빌헬름 부흘 임기 시작: 1945년 5월 5일 임기 종료: 1945년 11월 7일 |
이전 장관 | 사무실 설립 |
다음 장관 | 사무실 폐지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897년 8월 5일 |
출생지 | 브렌데킬데, 오덴세 시, 덴마크 |
사망일 | 1972년 1월 10일 |
안장지 | 프레덴스 키르케가르, 오덴세, 덴마크 |
배우자 | 게르다 라르센 |
모교 | 국제 레닌 학교 |
2. 초기 생애
악셀 라르센은 1897년 브렌데킬데(현재 오덴세 시의 일부)에서 나무 막대 신발 제작자의 넷째 아이로 태어났다. 가족은 가난했고 여섯 명의 아이를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여러 장학금 덕분에 중학교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학교를 마친 후 그는 철도 회사 시드퓐넨 예른바네르에서 견습생으로 고용되었고, 견습 과정을 마친 1917년에는 철도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라르센은 더 큰 도시에서 살고 싶어 1918년 코펜하겐으로 이사했다.
악셀 라르센은 코펜하겐에서 자전거 배달부로 일하며 사회민주당에 입당,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배달원 노조 지부장이 될 정도로 열성적이었으나, 점차 당 노선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1920년 부활절 위기 당시 당 지도부의 타협적인 태도는 그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고, 결국 사회민주당을 탈당하고 좌파 사회당에 합류했다.
3. 초기 정치 경력
1920년 9월 덴마크 폴케팅 선거에 좌파 사회당 연사로 활동했으나 저조한 득표율로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18년 독일 혁명에 고무되어 좌파 사회당이 코민테른에 가입하고 당명을 덴마크 공산당(DKP)으로 변경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후 당내에서 선동가이자 조직가로 명성을 얻으며 코펜하겐 지부 내 도심 지부 의장 및 대(大) 코펜하겐 당 지도부 구성원으로 승진했다.
1922년 당내 분파 투쟁으로 당이 분열되자, 라르센은 "블로고르스게데 당"의 당 서기를 맡았다. 1923년 두 당이 통합되면서 당 지도부에서는 물러났지만, 1924년 덴마크 폴케팅 선거에서 활발한 선거 운동을 펼쳐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복귀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공산주의자로 남았다.
3. 1. 국제 레닌 학교
1925년 코민테른의 제안으로 덴마크 공산당 당원이었던 라르센은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새로운 레닌 강좌를 수강하게 되었다. 이 강좌는 코민테른 국제 지부에 충성스러운 지도자를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8개월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다. 강좌는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스크바로 파견될 학생은 뛰어난 언어 능력이 필요했다. 라르센은 중등 교육을 받았기에 언어 능력에서 유리했고, 1925년 9월 덴마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모스크바에서 라르센은 발트해 연안, 폴란드, 벨라루스 출신 학생들을 위한 서부 대학교에 등록했다. 6개월 후, 그는 국제 레닌 학교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강좌는 2년으로 연장되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프 트로츠키와 소련 공산당(CPSU) 내 좌익 반대파를 숙청하고 있었다. 라르센은 CPSU의 일원이었고, 스탈린에 대한 반대파를 지지했다. 1927년 당 대회에서 스탈린이 승리하고 트로츠키가 알마티로 추방된 후, 라르센은 이전 견해를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았고, 결국 심한 압박 끝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철회에도 불구하고 1928년 4월, 라르센은 국제 레닌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니즈니노브고로드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덴마크 공산당은 라르센의 귀국을 요청했고, 1929년 2월 1일 라르센은 소련을 떠났다.
4. 덴마크 공산당 의장 시절
1932년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은 1.1%의 득표율을 얻었고, 악셀 라르센과 아르네 문치-페테르센은 처음으로 덴마크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4] 라르센은 트로츠키주의 경력 때문에 스탈린과 모스크바 양쪽 모두에서 인기가 없었지만, 당내 인재 부족과 실업자 운동의 성공, 선거 승리로 인해 1932년 당대회에서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4]
당시 덴마크 공산당은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1929년 선거에서 역사적인 패배를 겪었다.[1] 코민테른은 덴마크 공산당에 제6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결정된 극좌 노선을 따르고 "우익의 위험"에 대한 탄압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1]
라르센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덴마크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수정하는 능력이 있었다.[3] 그는 코민테른 정책을 단순 번역하는 것을 넘어 극좌 노선을 완화하고, 모스크바의 지시와 달리 당원들에게 사회민주주의자를 주 적으로 여기는 것을 경고했다(사회 파시즘 참조).[3]
라르센은 덴마크식 공산주의를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코민테른 제7차 세계 대회에서 인민 전선 전략이 채택된 이후 이러한 생각은 더욱 커졌다.[4] 그는 사회민주주의자와의 협력을 모색했지만, 그들의 비우호적인 태도에 협력 가능성에 의문을 품고 덴마크 사회자유당과 인민 전선을 발전시키는 것을 선호했다.[4]
코민테른은 덴마크 공산당과 라르센의 트로츠키주의 경력을 우려했고, 의견 불일치가 심화되면서 라르센과 모스크바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5] 코민테른은 라르센이 증액된 군사 예산에 반대하는 두 편의 기사를 발표한 후 그를 협상 소환했다.[5] 라르센은 모스크바의 승인 없이 기사를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이익에 반하는 견해를 표명했다.[5] 덴마크는 발트해로 향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덴마크 방위는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소련 공격의 교두보로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5]
4. 1. 귀국과 초기 활동
덴마크로 돌아온 라르센은 당내 인재 부족으로 인해 코펜하겐 당 서기로 선출되었다. 당은 내부 갈등으로 찢어졌고, 1929년 선거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역사적인 패배였다. 그들은 총 투표수의 0.2%에 해당하는 3,656표만 얻었다.[1] 1930년 초 집행위원회에 독일 대표를 파견하면서 내부 갈등은 더욱 악화되었다.[1]
내부 갈등의 두 주요 경쟁자는 악셀 라르센과 토거 토거센 (da)이었지만, 라르센은 빠르게 성장하는 실업자 운동을 이끌고 조직함으로써 우위를 점했다. 1930년 3월, 라르센은 코펜하겐에 모인 10만 명이 넘는 실업자들에 의해 전국 실업자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3] 그는 경찰의 체포 시도를 피하면서 1931년 10월 9일 슬로트스홀멘 주변 운하에서 보트를 타고 연설을 하여 유명해졌다.[3]
실업자 운동은 당 역사상 가장 큰 대중 운동이었다. 당원 수가 증가했고, 당 기관지의 발행 부수도 증가했다.[4] 1932년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은 1.1%의 득표율을 얻었고, 악셀 라르센과 아르네 문치-페테르센 (da)은 처음으로 두 명의 공산주의 국회의원이 되었다.[4] 트로츠키주의 과거를 불신했지만, 실업자 운동의 성공과 선거의 성공으로 인해 1932년 당대회에서 라르센을 당 의장으로 선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4]
4. 2. 모스크바와의 갈등
악셀 라르센은 스탈린에 반대하여 덴마크 공산당과 모스크바 양쪽 모두에서 인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르센은 당 내 인재 부족으로 코펜하겐의 당 서기로 선출되었다. 당은 내부 갈등으로 찢어졌고, 1929년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역사적인 패배를 겪었다.[1] 코민테른은 덴마크 당이 제6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결정된 극좌 노선을 따르고 "우익의 위험"에 대한 탄압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1]라르센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덴마크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수정하는 능력이 있었다.[3] 그는 코민테른 정책을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정했는데, 극좌 노선은 완화되었고, 모스크바의 지시와 달리 당원들에게 사회 민주주의자를 주 적으로 여기는 것을 경고했다(사회 파시즘 참조).[3]
라르센은 덴마크식 공산주의를 발전시키고 싶어했고, 코민테른 제7차 세계 대회에서 인민 전선 전략을 채택한 이후 이러한 생각은 더욱 커졌다.[4] 그는 사회 민주주의자와의 협력을 모색했지만, 그들의 비우호적인 태도는 라르센이 협력 가능성에 의문을 품게 했다.[4] 대신 라르센은 덴마크 사회자유당과 인민 전선을 발전시키는 것을 선호했다.[4]
코민테른은 덴마크 당과 라르센의 트로츠키주의적 과거를 걱정하기 시작했고, 의견 불일치가 심화되면서 라르센과 모스크바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5] 코민테른은 라르센이 증액된 군사 예산에 반대하는 두 편의 기사를 발표한 후 그를 협상을 위해 모스크바로 소환했다.[5] 라르센은 모스크바의 승인 없이 기사를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이익에 반하는 견해를 표명했다.[5] 덴마크는 그 위치 때문에 발트해로 향하는 관문이며, 강력한 덴마크 방위는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소련 공격의 교두보로 사용하는 것을 막을 것이었다.[5]
4. 3. 대숙청 생존
1937년 5월 20일, 라르센은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당시 모스크바는 공포, 반트로츠키주의 선전, 집단 히스테리가 만연했다. 라르센의 옛 지인들 중 상당수는 실종되었거나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코민테른과의 협상은 라르센에 대한 정치 재판으로 이어졌는데, 그는 과거 트로츠키주의 경력 때문에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덴마크 공산당(DKP)의 노선을 옹호했지만, DKP가 인민 전선 전략을 따르겠다는 선언에 서명해야 했다. 그는 암을 앓고 있는 아내를 돌보고 의회에서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귀국해야 한다고 코민테른을 설득한 후에야 모스크바를 떠날 수 있었다.그가 국회의원이었던 점이 그의 생명을 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소련 내무부가 라르센을 체포하려 했지만, 코민테른의 사무총장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외국 의회 의원을 체포하는 것을 원치 않아 개입했다는 설이 있다. 라르센과의 협상에 참여했던 아르네 뭉크-페테르센은 그러한 보호를 받지 못했고 1937년 7월 26일에 체포되었다. 3주간의 고문과 심문 끝에 그는 트로츠키주의 활동을 자백했고 투옥되었다. 그는 1940년 부티르카 감옥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악셀 라르센과 공산당 지도부는 1938년 1월에 아르네 뭉크-페테르센의 체포 소식을 접했다. 그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모스크바와의 관계를 심각하게 손상시키지 않고 그를 도울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이 사실을 대중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가족에게도 숨겼다.
4. 4. 제2차 세계 대전과 저항 운동
1939년 8월 23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중 전선 정책은 무너졌다. 라르센은 조약에 대해 혼란스러워했지만, 스탈린의 결정을 옹호했다. 폴란드 침공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 그리고 히틀러와 스탈린 간의 폴란드 분할은 공산주의 운동에 더 큰 혼란을 야기했는데, 이는 소련에 대한 이전의 이미지가 "파시즘"에 대항하는 "보루"였기 때문이다.상황은 어려웠지만 라르센은 소련을 옹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는 그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었고, 9월에 그는 당 서기국과 나중에는 코민테른에 의장직 사임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지도자 교체가 당에 대한 긴장을 증가시킬 것이라는 우려로 인해 이 요청은 거부되었다. 라르센은 소련이 핀란드에 카렐리아를 철수하라고 압력을 가했을 때 다시 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또 거절당했다. 1939년 11월 30일 소련의 핀란드 공격과 겨울 전쟁은 덴마크 국민들 사이에서 핀란드에 대한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반대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지지했기 때문에 경멸을 받았고, 라르센은 대중의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겨울 전쟁이 시작된 직후, 라르센이 연단에 섰을 때 전체 폴케팅이 항의하며 퇴장했다.
모스크바 평화 조약은 당의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덜어주었지만, 1940년 4월 9일 독일의 덴마크 점령이 시작되었다. 라르센은 당시 모스크바에 있었지만, 4월 22일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가지고 코펜하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덴마크 공산당은 여전히 합법이었지만, 코민테른과 덴마크 당 지도부는 당이 곧 금지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DKP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합법적인 당으로 남으려고 노력하고, 지하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러한 예상에도 불구하고, 1941년 6월 22일 주요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면서 덴마크 경찰은 그들을 놀라게 했다. 두 달 후인 8월 22일, 의회가 공산당법을 통과시키면서 당과 공산주의 이념은 금지되었다.
라르센은 체포를 피했고 숨어 들어갔다. 그와 당은 덴마크 레지스탕스 운동의 일환으로 공산주의 금지에 반대하는 불법 간행물과 1941년 8월 20일 토르발 스토닝 총리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하며 정치적 활동을 계속했다. 1942년 1월, 라르센은 같은 이름의 불법 간행물을 발행하는 레지스탕스 조직 "프리트 단마르크(Frit Danmark)"(da) (자유 덴마크)의 공동 창립자였다.

다음 달, 라르센은 DKP가 독일 점령군에 대한 파괴 공작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당 지도부 회의를 주재했다. 라르센은 1942년 11월 5일 덴마크 경찰에 체포되어 베스트레 펭셀(Vestre Fængsel)에 수감되었기 때문에 파괴 공작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곳에서 그는 독일군에게 넘겨졌고, 1943년 8월 28일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이 있는 높은 벽으로 수용소의 나머지 부분과 격리된 독방에 갇혔다.
4. 5. 전후 활동과 냉전
1945년 덴마크 폴케팅 선거에서 덴마크 공산당(DKP)은 12.5%의 득표율로 18석을 얻어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악셀 라르센은 개인 득표수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4] 그러나 해방 직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사이의 우호 관계는 곧 사라지고, 전쟁 전의 대립이 다시 나타났다.[4]냉전의 시작과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는 소련 및 동유럽 위성 국가들에서의 새로운 숙청 및 재판과 결합되면서 덴마크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대중의 경멸 대상이 되었다. 라르센은 소련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다.[4]
라르센은 덴마크식 공산주의를 추구했지만, 소련 공산당의 조언을 구하며 모스크바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다. 그는 노르웨이 공산주의 지도자 페데르 푸루보튼 숙청을 도운 후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스탈린주의자 중 한 명"이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냉전이 심화되면서 DKP는 점점 더 고립되었지만, 라르센은 웅변과 공개 토론 기술로 유권자 지지도 감소를 늦추는 데 기여했다.[4]
1949년, 전쟁 중 라르센에 대한 게슈타포 심문 내용이 보수 신문에 보도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그는 저항 동지들을 배신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당과 저항 운동 참전 용사들의 변호를 받았다. 이 심문 내용은 이후 몇 년 동안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그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4]
1951년, 라르센은 모스크바 체류 중 아르네 문크-페데르센이 1940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은 언론과 의회에서 계속 제기되었지만, 라르센은 침묵을 지켰다.[4]
스탈린 사후, 의사 음모 사건 재판의 피고인들이 재활되면서 라르센은 공산주의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니키타 흐루쇼프의 흐루쇼프 해빙 정책은 그의 신념을 강화시켰다. 필립스 공장 파업과 당원 증가는 라르센에게 당의 밝은 미래를 확신하게 했다.[4]
5. 사회인민당 창당과 활동
악셀 라르센은 덴마크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자로 남았다. 1958년 11월 20일, 새로운 정당 창당에 대한 아이디어가 공개되었고, 다음날 라르센을 대표로 하는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3] 사회인민당(SF)은 11월 24일에 의회에 등록되었고, 1959년 2월 15일 코펜하겐에서 창당 대회를 열었다.[3] 사회인민당은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기초"했지만, 덴마크의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평화적 경로를 촉구했다.[3]
1960년 덴마크 총선을 앞두고 갤럽 여론조사는 사회인민당에 유리하지 않았지만, 라르센은 교통 사고로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대중에게 연설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3] 사회인민당은 6.4%의 득표율로 11석을 얻었고, 공산당은 모든 의석을 잃었다.[3] 사회인민당 구성원 다수가 전직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다른 정당에서는 이들을 위장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받아들여졌다.[3]
1966년 덴마크 총선에서 사회인민당과 사회민주당은 과반수를 확보하여 연립 내각 구성 논의가 있었으나, 사회인민당은 사회민주당의 조건을 수용할 수 없었다. 대신 옌스 오토 크라그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이 사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내각을 구성했고, 두 정당은 공동 연락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이는 곧 "레드 캐비닛(da)"으로 불렸다.
레드 캐비닛은 1967년 12월까지 지속되었는데, 사회인민당 의원 20명 중 6명이 크라그 정부의 임계 지불 동결 제안에 반대표를 던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임시 당 대회에서 라르센은 자신의 정치 노선에 대한 지지를 얻었지만, 당 대표와 원내대표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12월 17일 소수파는 좌파 사회주의자라는 신당을 창당했다.[4] 라르센은 시구르 외만에게 사회인민당 대표직을 물려주었고, 사망할 때까지 국회의원으로 남았다.
5. 1. 덴마크 공산당과의 결별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 참석했지만, 라르센은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을 직접 듣지는 못했다. 그는 3월 16일 ''뉴욕 타임스'' 보도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1] 라르센은 소련 대사관에서 그 연설을 읽고 모스크바에 덜 의존적인 당 노선을 제안했다.[1]1956년 단체 교섭 협상과 총파업으로 덴마크 공산당(DKP)이 강화되었고, 라르센은 더 독립적인 노선을 추구하기 위해 당의 지지를 얻었다.[2] 그러나 그의 계획은 모겐스 포그를 설득하여 당에 재가입하도록 하여 "광범위하고, 국가적이며, 사회주의적인 당"으로 변모시키도록 도왔다.[2]
1956년 10월 소련의 헝가리 침공으로 덴마크 공산주의자들에게 긍정적인 상황은 급격히 변화했다.[3] 공산주의자들은 여론에서 멸시받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3] 라르센은 침공을 지지하는 당 핵심 세력과 반대하는 당원 및 지식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3] 내부 긴장이 고조되어 1957년 1월 특별 당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악셀 라르센은 1932년 이후 처음으로 중앙위원회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연례 보고서를 발표했다.[4] 당대회는 라르센의 노선에 반대하는 압도적인 다수로 새로운 중앙위원회와 집행위원회를 선출했다.[4]
당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내부 갈등의 화약고 위에 앉아 있었다.[5]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이 덴마크 공산당 대표단을 1958년 당대회에 초청하면서 이 상황이 촉발되었다.[5] 소련 공산당(CPSU)과 다른 공산당들도 초청을 받아들였지만, 갑자기 소련 공산당은 당대회를 보이콧하기로 결정하고 다른 공산당들에게도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다.[5] 라르센이 어쨌든 참석하겠다는 결정은 덴마크 집행위원회의 지지를 받았지만, 크누드 예스페르센과 뵈르게 호우만이 라르센 대신 유고슬라비아에 가기로 결정되었다.[5]
유고슬라비아 당대회 이후에도 내부 갈등이 계속되었고, 1958년 7월 8일 라르센은 1930년대부터 생각해온 독자적인 덴마크식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을 되살려 당 지도부에 더 독립적인 노선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다.[6] 라르센은 또한 덴마크 당이 소련과 소련 공산당의 행동을 반드시 지지하고 옹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6]
격렬한 파벌 투쟁이 일어났고, 라르센은 1958년 10월 당대회에서 패배했다.[7] 1958년 11월 16일, 공산주의 신문 ''란 오그 폴크''는 그가 당에서 제명되었음을 발표했다.[7]
5. 2. 사회인민당 창당
라르센은 더 이상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사회주의자였다. 1958년 11월 20일, 새로운 정당 창당에 대한 아이디어가 공개되었고, 다음날 라르센을 대표로 하는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3] 사회인민당(SF)은 11월 24일에 의회에 등록되었고, 1959년 2월 15일 코펜하겐에서 창당 대회를 열었다.[3] 사회인민당은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기초"했지만, 덴마크의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평화적 경로를 촉구했다.[3]1960년 덴마크 총선을 앞두고 갤럽 여론조사는 사회인민당에 유리하지 않았지만, 라르센은 교통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병상에서 시청자들에게 연설하면서 당시 새롭게 등장한 매체인 텔레비전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 새로운 정당은 득표율 6.4%를 기록하며 의회에서 11석을 얻었고, 공산주의자들은 6석 모두를 잃었다.[3] 사회인민당의 많은 구성원이 전직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다른 정당의 일부 구성원은 사회인민당이 위장한 공산주의자라고 믿었다. 이러한 의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식었고, 정당은 점차 받아들여졌다.[3]
5. 3. '레드 캐비닛'과 정치 활동
1966년 덴마크 총선에서 사회인민당과 사회민주당은 과반수를 확보했고 연립 내각 구성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사회인민당은 사회민주당이 요구하는 조건을 수용할 수 없었다. 대신 사회민주당의 옌스 오토 크라그가 사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내각을 구성했고, 두 정당 간의 공동 연락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곧 "레드 캐비닛"(da)으로 불리게 되었다.레드 캐비닛은 1967년 12월까지 지속되었는데, 당시 사회인민당 의원 20명 중 6명이 크라그 정부의 임계 지불 동결 제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임시 당 대회가 열렸고, 라르센은 자신의 정치 노선에 대한 지지를 얻었지만, 당 대표와 원내대표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하지만 분열을 피할 수 없었고, 12월 17일 소수파는 좌파 사회주의자라는 신당을 창당했다.[4] 그는 사회인민당 대표직을 시구르 외만에게 물려주었고, 사망할 때까지 국회의원으로 남았다.
6. CIA 협력 논란
2005년 덴마크 국제 연구소(DIIS)는 라르센이 1958년부터 1971년까지 냉전 시대 덴마크의 동맹국과 비밀리에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라르센은... 분명히 서방 정보 기관의 요원이었다."라고 결론지었다.[2]
같은 해 역사학자 페르 헨리크 한센은 자신의 저서 ''피르마의 가장 큰 업적''(Firmaets største bedrift)에서 악셀 라르센이 미국 중앙 정보국(CIA)에 포섭되었다고 주장했다. 한센에 따르면, 라르센은 1958년 11월 자택에서 미국 요원들과 처음 만났으며, 정보''(Dagbladet Information)에 따르면, 당내 강경파의 정서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는 대가로 당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CIA는 수년 동안 덴마크 공산당 부의장 알프레드 옌센의 아파트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여 당 지도부의 긴장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센에 따르면, 악셀 라르센은 KGB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첫 만남에 친구를 총과 함께 데려가 보디가드 역할을 하게 했다. 라르센의 당 동료 폴 담은 소련의 침공에 대비해 숨을 준비를 했다고 보고했다. 한센은 악셀 라르센이 CIA와 협력한 것이 CIA가 공산주의자에 대한 정보를 얻고 라르센은 KGB로부터 보호받는 거래의 일환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8년 이상 라르센은 CIA와 여러 차례 만나 소련과 다른 국가의 공산당 간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덴마크 공산당이 소련을 위해 첩보 활동을 하고 있는지, 또는 불법 당 기구를 준비하고 있는지 질문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직접적인 지식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당이 소련과 동독의 첩보 활동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고 요원에게 말했다. 한센의 일부 출처에 따르면, 라르센은 협력의 대가로 휴가, 저녁 식사, 돈을 받았다.
라르센은 자유의 라디오와 관련된 CIA 요원과 만났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국제 공산주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덴마크 공산주의자, 특히 모스크바가 그들에게 자금을 어떻게 지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덜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는 여러 번 자신의 전 당과 소련의 지시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센에 따르면, 소련은 라르센의 CIA 협력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덴마크 정보 기관도 1958년부터 라르센과 CIA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CIA의 작전은 덴마크 법에 따라 불법이었지만, 덴마크 정보 기관은 정보 보고서의 기록을 받는 대가로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7. 유산과 평가
악셀 라르센은 사망할 때까지 논란이 많은 인물로 남았다. 그는 새로운 정당에서 인정을 받았고, 지지자들은 그를 존경하며 "라르센주의"라는 특별한 종류의 사회주의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원칙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 그는 소련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고, 아르네 뭉크-페테르센의 운명을 은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 그러나 그는 존경받는 국회의원이자 덴마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1]
소련과 독립적인 "제3의 길" 형태의 공산주의를 발전시키려는 라르센의 시도는 일부 사람들에게 유로코뮤니즘의 선구자 중 하나로 여겨진다.[2]
그는 폴케팅 복도에 흉상이 놓여 기념된 국회의원 중 한 명이다.[3]
참조
[1]
뉴스
Danish Reds Expel Leader from Party
1958-11-16
[2]
웹사이트
Denmark During the Cold War: Highlights of the DIIS report
http://www.diis.dk/g[...]
Danish Institute for International Studies
2005-06-30
[3]
뉴스
Valgets første skærmtrold
https://www.berlings[...]
Berlingske
[4]
간행물
det røde kabinet
http://denstoredansk[...]
Den Store Danske
[5]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European Labor Leaders
Greenwood Press
[6]
뉴스
Danish Reds Expel Leader from Party
1958-11-16
[7]
웹인용
Denmark During the Cold War: Highlights of the DIIS report
http://www.diis.dk/g[...]
Danish Institute for International Studies
200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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