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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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는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인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였으며, 알렉산드로스 제국 분열 후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하여 총독을 역임했으며, 알렉산드로스 사후 프리기아, 리키아 등의 통치권을 위임받았다. 이후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왕을 칭했으나,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그의 사후 제국은 분열되었고,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가 안티고노스 왕조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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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382년 출생 - 필리포스 2세
필리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으로, 군사적 재능과 외교적 수완으로 마케도니아를 그리스 최강의 국가로 만들고 그리스 대부분을 정복하여 패권을 장악했으며, 군사 개혁과 정복 활동, 코린토스 동맹 결성으로 그리스 패권을 확립하고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했으나 암살당했다. - 기원전 301년 사망 - 제 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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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노스 3세 도손은 기원전 3세기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데메트리우스 2세의 사촌이자 섭정으로 왕위에 올라 클레오메네스 전쟁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고 헬라스 동맹을 재건하는 등 왕국을 안정시키고 영향력을 확대했으나, 일리리아 원정 중 병사했다.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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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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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
그리스어 음역 | Antigonos Monophthalmos |
신분 | |
칭호 | 바실레우스 |
통치 기간 | 기원전 306년–301년 |
즉위 | 기원전 306년, 안티고니아 |
이전 통치자 | 알렉산드로스 4세 |
후임 통치자 | 데메트리오스 1세 |
가문 | |
왕조 | 안티고노스 왕조 |
아버지 | 필리포스 |
배우자 | 스트라토니케 |
자녀 | 데메트리오스 1세 필리포스 |
출생과 사망 | |
출생 | 기원전 382년, 마케도니아 |
사망 | 기원전 301년 (80–81세), 입수스, 프리기아 (현재의 차이르바으, 아피온카라히사르 주, 튀르키예) |
사망 장소 | 입수스, 프리기아 |
군사 경력 | |
참전 전투 | 필리포스 2세 전쟁 페린투스 공성전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쟁 디아도코이 전쟁 오르키니아 전투 크레토폴리스 전투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비잔티움 전투 파라이타케네 전투 가비에네 전투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 입수스 전투 |
2. 생애
안티고노스 1세는 기원전 382년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야망이 깊었고, 이는 그가 마케도니아군에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보좌하며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서 활약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높은 지지를 얻었고, 권력 욕심이 더욱 커졌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자 그의 권력욕은 본색을 드러냈다.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안티고노스 1세는 기원전 382년 마케도니아에서 귀족 필리포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섬기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기원전 340년 페린토스 공방전에서 투석기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1]기원전 334년,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제국 원정에 참전하여 프리기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4] 그라니코스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페르시아 군대의 반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보급 및 통신선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5] 이수스 전투 이후 그는 대프리기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사트라프가 되었다.
2. 2.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바빌론에서 갑작스럽게 죽자, 그의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후계자를 명확히 지정하지 않고 사망했기 때문에, 바빌론 회의에서 안티고노스는 페르디카스(제국의 섭정)에 의해 프리기아, 리카오니아, 팜필리아, 리키아 및 서부 피시디아의 통치권을 받았다.[6] 그러나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가 파플라고니아와 카파도키아를 점령하는 것을 돕지 않아 페르디카스와 대립하게 되었다.[6] 레온나토스는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떠났고, 안티고노스는 혼자 카파도키아를 처리해야 했는데, 이는 지원 없이는 완수하기 어렵거나, 혹은 그가 원하지 않았던 임무였다. 페르디카스는 이를 권위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 왕실 군대를 이끌고 해당 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페르디카스는 안티고노스를 도발하기 위해 프리기아로 향했고,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와 함께 그리스로 피신하여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의 지지를 얻었다.[6] 디아도코이 전쟁 동안 안티고노스는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었다.[7]3. 디아도코이 전쟁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권력을 잡기 위해 디아도코이 전쟁을 일으켰다.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가 암살된 후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제국 재분할 회의가 열렸고, 안티고노스는 아시아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9] 그는 왕실 군대의 일부를 지휘하며 소아시아에서 페르디카스파였던 에우메네스, 알케타스 등을 공격하여 오르키니아 전투와 크레토폴리스 전투에서 승리, 에우메네스를 제외한 페르디카스파 잔당을 거의 소탕했다.[9]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카산드로스 대신 폴리페르콘을 섭정으로 임명했지만, 안티고노스를 포함한 다른 디아도코이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10] 이후 헬레스폰트 해협에 대규모 함대를 보유한 클레이토스 더 화이트를 상대로 해전을 벌여 승리했다.[11]
한편, 에우메네스는 은 방패와 히파스피스트 지휘관인 안티게네스와 테우타모스와 동맹을 맺고,[12] 상부 사트라피에서 지원을 얻으려 했다.[16]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와 파라이타케네 전투 및 가비에네 전투에서 격돌했다.[25][28] 플루타르코스와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에우메네스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동맹의 배신으로 군대 짐 수송대를 잃었고,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넘겨받는 대가로 짐 수송대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하여 결국 에우메네스는 처형되었다.[29]
결과적으로 안티고노스는 제국 아시아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의 권력은 동부 사트라피에서 시리아와 소아시아 서부까지 뻗어 있었다. 그는 수사의 보고를 점령하고 바빌론으로 들어갔다. 바빌론 총독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도망가 그,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맺었다.
에우메네스를 제거한 후, 안티고노스는 제국 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는 동맹을 맺고 안티고노스에 대항했다.[31] 기원전 314년, 안티고노스는 동맹국들의 영토 할양 요구를 거부하고 전쟁을 선포했다.[32] 그는 아리스토데모스를 펠로폰네소스에 파견하여 군대를 모집하고 오랜 적 폴리페르콘과 동맹을 맺게 했으며, 조카 폴레마이오스가 이끄는 군대를 카파도키아를 거쳐 헬레스폰트로 보내 카산드로스와 리시마코스의 소아시아 침략을 막도록 했다.[2] 그는 직접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하에 있던 페니키아를 침공하여 티레를 1년 동안 포위 끝에 점령(티레 포위전)하고 페니키아를 확보한 후, 주력 군대를 소아시아로 진격시켜 리디아와 카리아의 사트라프이자 프톨레마이오스와 카산드로스의 동맹인 아산드로스를 제거하려 했다. 그는 시리아와 페니키아 방어를 맏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맡겼다.[34]
312 BC 안티고노스는 리디아와 카리아 전체를 점령하고[35] 아산드로스를 몰아냈다. 그 후 조카 텔레스포로스와 폴레마이오스를 그리스의 카산드로스에게 보냈다. 안티고노스가 서쪽에서 교전하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남쪽에서 침략, 가자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군대와 맞붙어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후,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로 돌아가 그의 옛 사트라피를 장악하여 안티고노스에 대항하여 동부 지방을 확보했다. 기원전 311년부터 기원전 309년까지 지속된 바빌론 전쟁 이후, 안티고노스와 셀레우코스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고, 그들은 각자 영역(안티고노스는 서쪽, 셀레우코스는 동쪽)에서 권력을 공고히 했다.
기원전 306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승리하자, 안티고노스는 아들과 함께 왕위에 오르는 것을 선언했고, 다른 디아도코이들도 이에 따라 왕을 칭하며 헬레니즘 왕국 시대가 시작되었다.[6]
기원전 302년, 안티고노스는 자신을 맹주로 하는 헬라스 동맹을 그리스에서 결성했지만, 카산드로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는 안티고노스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하여 반 안티고노스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01년, 안티고노스는 입소스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투창을 맞아 전사했다.[57]
3. 1. 페르디카스 사후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가 암살된 후,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제국을 재분할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안티파트로스가 제국의 새로운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안티고노스는 아시아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9] 안티고노스는 트리파라디소스에서 단죄된 페르디카스파의 잔당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다.[9]안티고노스는 왕실 군대의 일부를 지휘하게 되었고, 안티파트로스의 유럽 군대로부터 병력을 보충받은 후, 소아시아에서 페르디카스파였던 에우메네스, 알케타스 등을 공격했다. 안티고노스는 먼저 카파도키아에 있던 에우메네스를 상대하기로 결정하고, 오르키니아 전투에서 에우메네스를 계략으로 격파하여 노라 요새(Νῶρα|노라el)로 퇴각시켰다.[9] 에우메네스를 포위한 채, 안티고노스는 피시디아의 크레토폴리스 근처에 있는 알케타스 등의 연합군을 향해 진군했다. 안티고노스는 크레토폴리스 전투에서 기습하여 적들을 격파했다.[9] 이로써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제외한 페르디카스파의 잔당을 거의 소탕했다.[9]
3. 2.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안티파트로스가 기원전 319년에 사망하면서, 자신의 아들 카산드로스 대신 폴리페르콘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를 포함한 다른 디아도코이들은 폴리페르콘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의 야망을 꺾는 일이었기 때문이다.[10]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에우메네스는 이미 폴리페르콘에게 설득되어 제국의 다른 모든 장군들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은 상태였다. 에우메네스는 노라에서 속임수를 써서 탈출한 후, 소규모 군대를 모아 남쪽 킬리키아로 피신했다.[10]안티고노스는 헬레스폰트 해협에 대규모 함대를 보유한 클레이토스 더 화이트를 상대로 소아시아 북서부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느라 에우메네스에게 직접 대항할 수 없었다.[10] 클레이토스는 해전에서 안티고노스의 제독 니카노르를 격파했지만, 다음 날 아침 안티고노스와 니카노르가 육지와 해상에서 이중 공격을 가하자 완전히 방심하여 그의 군대 전체가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했다. (비잔티움 전투 참조).[11]
한편, 에우메네스는 킬리키아, 시리아, 페니키아를 장악하고 은 방패와 히파스피스트의 지휘관인 안티게네스와 테우타모스와 동맹을 맺었으며,[12] 폴리페르콘을 위해 해군력을 키우기 시작했다.[13] 준비가 되자 함대를 서쪽으로 보내 폴리페르콘을 지원하려 했으나, 킬리키아 해안에서 안티고노스의 함대와 마주치자 배신했다.[14]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고 동쪽 킬리키아로 진군하여 시리아에서 에우메네스와 전투를 벌이려 했다.[15] 에우메네스는 이를 미리 알고 페니키아에서 시리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여 상부 사트라피에서 지원을 얻으려 했다.[16]
에우메네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사트라프인 암피마코스의 지원을 얻었고,[17] 북부 바빌로니아로 진군하여 겨울 주둔지에 배치했다. 겨울 동안 그는 셀레우코스(바빌로니아의 사트라프)와 페이톤(메디아의 사트라프)과 협상하여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도움을 구했다.[18]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가 자신의 영토를 떠난 것을 알고 킬리키아와 북부 시리아를 확보한 후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했다. 셀레우코스와 페이톤을 설득하지 못한 에우메네스는 겨울 주둔지를 일찍 떠나 수사, 주요 왕실 보고로 진군했다.[19] 수사에서 에우메네스는 수시아나 북동쪽의 모든 사트라프에게 편지를 보내 왕의 이름으로 모든 군대를 이끌고 자신에게 합류하라고 명령했다.[20] 사트라프들이 에우메네스에 합류하자 그는 상당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안티고노스와의 전투를 어느 정도 자신 있게 치를 수 있었다.[21]
에우메네스는 남동쪽으로 페르시아로 진군하여 추가적인 증원을 받았고,[22] 안티고노스는 수사에 도착하여 그곳을 포위하기 위해 셀레우코스를 남겨두고 자신은 에우메네스를 뒤쫓았다. 코프라타스 강에서 에우메네스는 강을 건너는 동안 안티고노스를 기습하여 그의 병사 4,0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23] 재앙에 직면한 안티고노스는 도하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돌아서서 메디아로 진군하여 상부 사트라피를 위협했다.[24] 에우메네스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안티고노스의 보급선을 끊고 싶었지만, 사트라프들은 자신들의 사트라피를 포기하는 것을 거부했고 에우메네스는 동쪽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316년 늦여름,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전투로 유도하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다시 남쪽으로 이동했다. 마침내 두 군대는 남부 메디아에서 격돌했고, 승패를 가리지 못한 파라이타케네 전투가 벌어졌다.[25] 사상자가 더 많았던 안티고노스는 다음날 밤 군대를 안전하게 강행군시켰다.[26] 기원전 316~315년 겨울, 안티고노스는 사막을 가로질러 군대를 진군시켜 적을 방심하게 하여 페르시아에서 에우메네스를 기습하려 했지만, 불행히도 현지인들에게 발각되어 그의 적들에게 보고되었다.[27] 며칠 후 양 군대는 전투를 벌였다. 가비에네 전투는 이전의 파라타이케네 전투만큼이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28]
플루타르코스와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에우메네스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의 동맹 페우케스타스의 배신 또는 무능함으로 인해 군대의 짐 수송대를 잃었다. 이 손실은 은 방패에게 특히 심각했는데, 짐 수송대에는 30년 동안의 성공적인 전쟁에서 그들이 축적한 전리품과 병사들의 여성과 아이들이 들어 있었다. 지휘관 중 한 명인 테우타무스가 접근하자,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넘겨받는 대가로 짐 수송대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은 방패는 이에 응하여 에우메네스와 그의 부하들을 체포하여 넘겨주었다.[29] 이렇게 전쟁은 끝났다. 에우메네스는 감금되었고 안티고노스는 그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와 함께 죄수를 살려주려 했지만, 회의에서 이를 뒤엎고 에우메네스는 처형되었다.[30]
결과적으로 안티고노스는 이제 제국의 아시아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의 권력은 동부 사트라피에서 시리아와 소아시아 서부까지 뻗어 있었다. 그는 수사의 보고를 점령하고 바빌론으로 들어갔다. 바빌론의 총독인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로 도망가 그,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맺었다.
3. 3.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
Ἀντίγονος ὁ Μονόφθαλμος|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grc는 에우메네스를 제거한 후, 제국의 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그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는 동맹을 맺고 안티고노스에 대항했다.[31] 기원전 314년, 안티고노스는 동맹국들로부터 영토 할양 요구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선포했다.[32]안티고노스는 아리스토데모스를 펠로폰네소스에 파견하여 군대를 모집하고 그의 오랜 적 폴리페르콘과 동맹을 맺도록 했다. 그들은 폴리페르콘과 함께 카산드로스와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33] 또한, 조카 폴레마이오스가 이끄는 군대를 카파도키아를 거쳐 헬레스폰트로 보내 카산드로스와 리시마코스가 소아시아를 침략하는 것을 막도록 했다.[2] 그는 직접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하에 있던 페니키아를 침공하여 티레를 포위, 티레 포위전은 1년이 걸렸다.[34] 페니키아를 확보한 후 그는 그의 주력 군대를 소아시아로 진격하여 리디아와 카리아의 사트라프이자 프톨레마이오스와 카산드로스의 동맹인 아산드로스를 제거하려 했다. 그는 시리아와 페니키아 방어를 그의 맏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맡겼다.[34]
312 BC에 안티고노스는 리디아와 카리아 전체를 점령하고[35] 아산드로스를 몰아냈다. 그 후 그는 조카 텔레스포로스와 폴레마이오스를 그리스의 카산드로스에게 보냈다. 안티고노스가 서쪽에서 교전하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남쪽에서 침략했다. 그는 가자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의 군대와 맞붙어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후,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로 돌아가 그의 옛 사트라피를 장악하여 안티고노스에 대항하여 동부 지방을 확보했다. 셀레우코스의 정복은 바빌론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 기간 동안 셀레우코스는 데메트리오스와 안티고노스 모두를 격파하고 동부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기원전 311년부터 기원전 309년까지 지속된 바빌론 전쟁 이후, 안티고노스와 셀레우코스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고, 그들은 각자의 영역(안티고노스는 서쪽, 셀레우코스는 동쪽)에서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서쪽에서 안티고노스는 그의 적들을 지치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평화를 강요했다.[36] 이 평화로 그는 권력의 절정에 도달했다.[37] 안티고노스의 제국과 동맹 시스템은 이제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페니키아, 북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했다.
3. 4.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과 최후
기원전 306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승리하자, 안티고노스는 아들과 함께 왕위에 오르는 것을 선언했다. 다른 디아도코이들도 이에 따라 왕을 칭하며, 헬레니즘 왕국 시대가 시작되었다.[6]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6]기원전 305년, 데메트리오스는 로도스를 공격했으나, 1년간의 로도스 공방전 끝에 로도스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여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6] 로도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제외한 모든 적에 대항하여 안티고노스를 돕기로 약속했다.
기원전 302년, 안티고노스는 자신을 맹주로 하는 헬라스 동맹을 그리스에서 결성했다. 그러나 카산드로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는 안티고노스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하여 반 안티고노스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01년, 안티고노스는 입소스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투창을 맞아 전사했다.[57] 그의 나이 81세였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재통일은 불가능해졌고, 제국은 분열되었다.
4. 안티고노스 왕조
기원전 306년 안티고노스 1세가 왕을 칭한 후,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도 함께 왕을 칭하며 안티고노스 왕조를 세웠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도 이에 질세라 각자 왕조를 세웠다.
5. 가족 관계
안티고노스 1세는 마케도니아의 귀족 필리포스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슬하에 형제로는 데메트리오스, 폴레마이오스가 있었다. 또한 어머니가 펠라의 페리안드로스와 재혼하여 낳은 이복 동생 마르시아스도 있었다.
안티고노스는 형의 미망인이었던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여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필리포스, 두 아들을 두었다.
관계 | 이름 |
---|---|
아버지 | 필리포스 |
어머니 | (이름 불명) |
형 | 데메트리오스 |
동생 | 폴레마이오스 |
이복 동생 | 마르시아스 |
아내 | 스트라토니케 |
아들 |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필리포스 |
6. 평가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보좌하며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한 안티고노스 1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였다.[57] 알렉산드로스 사후 혼란기에 그는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헬레니즘 세계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야망은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경계를 불러일으켰다.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1세가 전사하면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재통합은 불가능해졌고 헬레니즘 세계의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7. 대중문화
메리 르노의 소설 ''장례 게임''에서 안티고노스의 별명을 "외눈"으로 번역했다.
2004년 영화 ''알렉산더''에서 올리버 스톤 감독은 이안 비티가 안티고노스 역을 연기했다.
L. 스프라그 드 캠프의 역사 소설 ''아리스토텔레스의 코끼리''와 ''로도스의 청동 신''에 안티고노스(Antigonos)라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등장한다.
크리스찬 캐머런의 역사 소설 ''A Force of Kings''의 주요 적대자로 등장한다.
알프레드 더건의 역사 소설 ''코끼리와 성'' (미국 제목: ''도시 포위자'')의 초반부에 등장한다.
에릭 플린트의 대체 역사 소설 ''알렉산더의 유산''과 그 속편 ''마케도니아의 위험''에서 조연 악당으로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Antigonos the One-Eyed and the Creation of the Hellenistic Stat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2]
간행물
Bibliotheca Historica
[3]
간행물
Antigonos the One-Eyed and the creation of the Hellenistic State
[4]
간행물
Antigonos the One-Eyed
[5]
간행물
Historia Alexandri Magni
[6]
위키백과
Antigonus Cyclops
EB1911
[7]
간행물
Ta Met' Alex.
[8]
간행물
History of the Diadochi
[9]
간행물
Antigonos the one-eyed and the creation of the Hellenistic State
[10]
간행물
Bibliotheca Historica
[11]
간행물
Bibliotheca Historica
[12]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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