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브로시아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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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은 1609년 12월 8일 개관한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도서관이다.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이 반종교 개혁에 대응하고 가톨릭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설립했으며, 3만 점의 인쇄물과 8,000점의 원고를 포함한 소장품을 갖추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아틀란티코 코덱스》를 비롯하여 다양한 언어와 시대의 귀중한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으며, 1618년에는 미술관을 설립하여 라파엘로, 카라바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 도서관은 17세기에 유럽에서 대중에게 공개된 몇 안 되는 도서관 중 하나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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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아나 도서관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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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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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이탈리아 밀라노 피오 11세 광장 2 |
좌표 | 45.4631, 9.1854 |
설립 | 1609년 |
유형 | 도서관, 미술관 |
소장품 | 회화, 드로잉, 인쇄물, 조각품, 필사본 |
관장 | 알베르토 로카 |
웹사이트 |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
명칭 | |
이탈리아어 명칭 | Biblioteca Ambrosiana |
일본어 명칭 | アンブロジアーナ図書館 (Anburōjāna Toshokan) |
한국어 명칭 |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
역사 | |
설립 배경 |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이 예술과 학문 진흥을 위해 설립 |
초기 소장품 | 보로메오 추기경의 개인 소장품 |
주요 사건 |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일부 소장품 약탈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일부 파괴 |
복원 | 전후 복구 및 재건 |
소장품 | |
주요 소장품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스케치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 보티첼리의 텐트 안의 성모자 브라만티노의 예수 탄생 |
필사본 | 12,000점 |
인쇄본 | 500,000점 |
특징 | |
부속 시설 |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고문서 연구소, 아카데미 |
역할 | 학문 연구, 예술 감상, 문화 보존 |
중요성 | 밀라노의 중요한 문화 유산 |
2. 역사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은 16세기 말 로마에 머무는 동안(1585-1595, 1597-1601) 밀라노에 수준 높은 문화 기관을 설립할 생각을 하였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대응, 즉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가톨릭의 전통과 가치를 수호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다.[1]
보로메오 추기경은 밀라노로 돌아와 유럽 전역과 동방 국가에서 필사본과 사본을 수집하는 임무를 밀사에게 명령했다. 1603년 렐리오 부치와 프란체스코 마리아 리키니의 감독하에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1609년 12월 8일에는 열람실이 개설되었다. 당시 다른 도서관에서는 도서가 책상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지만, 이 도서관에서는 다 읽은 뒤 벽면에 있는 선반에 도서를 돌려놓는 방식이 채택되었는데, 이는 이 스타일의 초기 사례로 여겨진다. 또한 도서관에는 인쇄소와 라틴어 및 그리스어 연구소도 있었다.[10]
이후 규모 확대를 위해 수집이 계속되었고, 기증도 더해져 건물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다. 1611년, 회화를 소장하는 시설과 아카데미아(미술원)를 만들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1618년, 보로메오 추기경은 그림과 데생을 도서관에 기증했는데, 이것들이 암브로시아나 회화관의 핵심이 되었다. 1625년에는 아카데미아가 개설되었다.[1]
1631년 보로메오 추기경이 사망했지만 수집과 기증 접수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소장품의 일부는 밀라노가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였을 때 징발되었다가 일부만 반환되었다.[1]
1943년에는 폭격으로 건물과 소장품이 중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1952년이 되어서야 복구 공사가 시작되었다. 1990년부터 1997년에 걸쳐 건물이 새로 재건축되었다.[1]
2. 1. 설립 배경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1564-1631)은 16세기 말 로마에 머무는 동안(1585-1595, 1597-1601) 밀라노에 수준 높은 문화 기관을 설립할 생각을 하였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대응, 즉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가톨릭의 전통과 가치를 수호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다.[1]보로메오 추기경은 전 세계의 원고와 인쇄물을 수집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특히 동양 언어 문헌 수집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3] 1606년에는 보비오 수도원의 장서를,[5] 1608년에는 파도바의 애서가 잔 빈첸초 피넬리의 장서를 획득했다.[9]
2. 2. 초기 발전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의 구상으로 시작된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건립은 1603년 렐리오 부치와 프란체스코 마리아 리키니의 설계로 시작되었다.[1] 1609년 12월 8일,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은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으며, 초기 소장품은 약 3만 점의 인쇄물과 8,000점의 원고로 구성되었다.[3] 여기에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 과학,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자료들이 포함되었다.[3]특히, 보비오 수도원[6]과 애서가 잔 빈첸초 피넬리[9]의 장서를 획득하여 도서관의 기반을 다졌다.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은 당대 다른 도서관들과 달리 책을 책상에 묶어두지 않고 벽면 선반에 보관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공공 도서관의 초기 형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0] 또한, 도서관에는 인쇄소와 고전 언어(라틴어 및 그리스어) 교육을 위한 학교도 함께 설립되었다.[10]
2. 3. 확장과 발전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은 도서관을 확장하고 미술관과 아카데미아(미술원)를 추가할 계획을 세웠다. 1611년, 이를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1618년, 보로메오 추기경은 자신의 회화와 데생 컬렉션을 도서관에 기증하여 암브로시아나 회화관(Pinacoteca Ambrosiana)의 초기 소장품을 구성했다. 1625년에는 아카데미아가 개관하여 회화, 조각, 건축 등 예술 교육을 제공했다.[1]1631년 보로메오 추기경이 사망한 후에도 수집과 기증은 계속되었다. 17세기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아틀란티코 수고집』 12권, 루벤스의 데생 등 귀중한 수고집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밀라노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는 소장품 일부가 징발되기도 했다. 이후 『아틀란티코 수고집』은 반환되었지만, 반환되지 않은 소장품도 적지 않다.[1]
2. 4. 시련과 복구
나폴레옹 점령 기간 동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필사본을 포함한 여러 귀중한 필사본이 프랑스에 의해 징발되었고, 1815년 이후 부분적으로만 반환되었다.[3] 특히, 레오나르도의 비행 나사는 압수되어 현재 파리의 프랑스 학술원(Institut de France)에 보관되어 있다.[3] 『아틀란티코 수고집』은 반환되었지만, 미반환 소장품도 적지 않았다.[6]1943년에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4] 필사본과 인쇄본은 이미 옮겨져 온전하게 보존되었고, 전쟁 후 건물 손상은 복구되었다.[4] 하지만 라 스칼라의 대본집을 포함한 여러 권의 책이 소실되었다.[4] 건물은 1952년에 복원되었으며, 1990-97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쳤다.[4]
3. 도서관
1609년 12월 8일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23년 페데리코 추기경에게 이 도서관을 "영웅적이고 불멸의 도서관"이라고 칭송했다. 처음에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와 과학 역사에서 가장 귀중한 자료들, 즉 아라비아, 중국, 러시아, 인도, 일본 등 먼 곳에서 구입한 약 3만 점의 인쇄물과 8,000점의 원고를 포함했다. 여기에는 잔 빈첸초 피넬리가 소장했던 5세기의 일리아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베르길리우스, 아므르의 Kitāb al-Hayawān miniato, Bahr al-Giāhiz, 줄리오 알레니의 중국 지도 "만국전도" 등이 있었다. 1637년 갈레아초 아르코나티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코드를 기증하면서 도서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기부금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으며, 1909년에는 카프로티 컬렉션에서 1600개의 아랍 코드를 획득했다. 2009년과 2015년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아틀란틱 코덱스 1119장에 2000여 점의 그림 등 걸작을 전시하기도 했다.
1585년부터 1595년까지, 그리고 1597년부터 1601년까지 로마에 머무는 동안, 보로메오 추기경은 밀라노에 학자들에게 개방되고, 프로테스탄트 언론에서 발행되는 논문에 대항하여 반종교개혁에 봉사하는 가톨릭 학문의 보루 역할을 할 도서관을 설립할 것을 구상했다.
도서관 소장품은 추기경의 일원 또는 성직자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구매 담당자 팀에 의해 이전 6년 동안 수집되었다. 지중해 전역을 여행한 이 사절들은 밀라노로부터 엄격한 재정적 통제를 받았으며, 추기경이 고안한 계획에 따라 활동했다. 이 계획에서 천 개가 넘는 그리스어 필사본은 르네상스 이후 일반화된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했지만, 동양 언어는 이전의 공공 수집물보다 더 큰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로마의 아스카니오 콜론나 추기경의 도서관과 베네치아의 자코모 바로치 및 피에트로 벰보의 도서관을 구매하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연애 편지는 아마도 후자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북부 이탈리아의 교회와 수도원은 중요한 공급원이었다. 추기경 대주교는 이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다. 이 방식으로 얻은 가장 가치 있는 필사본은 아마도 6세기 파피루스 요세푸스로, 밀라노의 성 암브로지오 성당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장 큰 성과는 '더 유용한' 현대 서적과 교환하여 보비오 수도원의 고대 도서관 일부를 획득한 것이다. 보비오는 7세기 초에 성 콜룸반 휘하의 아일랜드 수도사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베로나 대성당 밖에서 이탈리아의 캐롤링거 이전 필사본을 상당량 소유하고 있었다.
페데리고 추기경은 잔 자코모 발레리를 특사로 임명했다. 1605년에 협상이 시작되어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약 74개의 필사본이 암브로시아나에 도착했는데, 그 중 적어도 두 개는 아일랜드에서 작성되었고(하나는 다운 주, 뱅고어에서), 여러 팔림세스트가 있었으며, 그 중 한 텍스트는 키케로의 잃어버린 연설 3개였다.
안토니오 올지아티는 남부 독일, 남부 네덜란드, 프랑스로 구매 임무를 수행했다.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디노 페라리는 나중에 올지아티의 후임으로 감독관이 되어 스페인으로 비슷한 여행을 했다. 안토니오 살마지아는 1607년~1608년 동안 코르푸에서 그리스어 필사본을 찾아다녔다. 자금 이체 지연과 코르푸인들의 적대감에 시달렸지만, 113개의 필사본을 무게로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필사본 1코르푸 파운드 무게는 5밀라노 리라였다). 그리스어 필사본 그룹은 베네치아에서 구매했으며, 다른 필사본은 키오스에서 온 수송품으로 받았고, 아브루초의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히브리어 필사본과 희귀한 인쇄본은 보르냐와 기타 이탈리아 마을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획득되었다.
동양 언어 작품은 암브로시아나의 창립 이래 소장품의 특징이었지만, vecchio fondo의 340개의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필사본이 어떻게, 어디서 획득되었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610년부터 1617년까지 레반트에 레바논 기독교인이 파견되었지만, 마론파 총대주교의 '칼데아어 서적' 선물 외에는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기록되지 않았다. 토스카나 대공과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단장에게 카이로와 '그 지역'을 방문할 때 아랍어 필사본을 대량으로 구매하도록 지시할 것을 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립자의 이국적인 것에 대한 욕구는 충족되지 않았다. 그는 글라골 문자로 된 작품(크로아티아의 중세 알파벳)과 1596년 아마쿠사에서 인쇄된 일본어 ''경멸''을 소유했으며, 오타비오 반디니 추기경의 비서에게 그에게 상형 문자 서적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1601년 잔 빈첸초 피넬리가 파두아에서 사망했다. 200권의 국가 서류 사본이 베네치아 공화국에 압수되었고, 바르바리 해적이 새로운 대주교를 시칠리아로 호송하는 제노바 함대를 기다려야 했다. 결국 1609년 중반에 550개의 필사본, 그 중 거의 절반이 그리스어로 된 것이 밀라노에 도착했다.
3. 1. 주요 소장품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은 고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귀중한 필사본들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1637년, 토머스 하워드, 애런델 백작의 제안을 거절하고 가레아초 아르코나티 후작으로부터 입수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12개 필사본 중 ''코덱스 아틀란티쿠스''[1]는 레오나르도의 가장 큰 드로잉 세트로, 조각가 폼페오 레오니가 구성하였다.[1]3만 점의 필사본 중에는 히브리어, 시리아어, 아랍어,[1] 에티오피아어, 터키어, 페르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의 자료들이 있다. 그중에는 기원후 170년경의 무라토리 단편(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 정경 목록), 루카 파치올리의 ''신성한 비례'' 원본 사본 등이 있다.
1608년 보로메오 추기경이 구입한 잔 빈첸초 피넬리의 도서관에는 550점의 필사본과 골동품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4~5세기경의 삽화가 있는 호메로스(암브로시아나 이리아드), 10~11세기경의 호라티우스, 1355년경 파도바에서 쓰여진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사본, 피에트로 벰보가 주석을 단 조반니 보카치오의 ''라 피아메타'' 등이 있었다.[1]
기독교와 이슬람 아랍어 필사본 중에는 의학 논문, 시인들의 독특한 11세기 디완, ''시바웨이''의 가장 오래된 사본 등이 있다.[1]
도서관의 보물 중에는 5세기경의 그리스 토라 오경, 초기 플라우투스를 포함한 여러 팔림세스트, 울필라스의 고트어 성경 단편, 페트라르카의 주석이 달린 베르길리우스 사본 등이 있다.[1]
다음은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이 소장한 주요 필사본 목록의 일부이다.
종류 | 명칭 및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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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셜체 | 언셜체 0135 -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의 단편 |
소문자 | 343, 344, 345, 346, 347, 348, 349, 350, 351, 352, 614, 615 |
성구집 | ℓ 102, ℓ 103, ℓ 104, ℓ 105, ℓ 106, ℓ 284, ℓ 285, ℓ 286, ℓ 287, ℓ 288, ℓ 289, ℓ 290 |
기타 | 암브로시아니 사본 (고트어 포함), ms. D 437 inf. (16세기) - 13세기 후반 마이스터 베르나르두스에 따른 색의 책의 사본, 암브로시아누스 사본 435, 암브로시아누스 837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문 영혼에 관하여 |
3. 2. 의학 박사원 (College of Doctors)
도서관 헌장의 가장 독창적인 특징은 관리 책임과 장서의 학술적 활용 책임을 분리한 것이었다. 전자는 7명의 보존 위원에게 맡겨졌으며, 여기에는 보로메오 가문의 최고위 구성원이 포함되었다. 후자의 목적을 위해 의학 박사원(College of Doctors)이 설립되었다. 박사원 구성원들은 다양한 분야를 전공하도록 권장되었으며 모든 일상적인 의무에서 해방되었지만, 임명 후 3년 이내에 학술 저서를 출판해야 했다. 사서에게는 새로운 도서 구입, 연구 주제에 대한 박사들의 조언 등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다.암브로시아나의 가장 저명한 박사들로는 주세페 리파몬티, 루도비코 안토니오 무라토리, 주세페 안토니오 사시, 추기경 안젤로 마이, 20세기 초의 안토니오 마리아 체리아니, 미래의 교황 비오 11세가 된 아킬레 라티 (1888년 11월 8일),[2][3] 조반니 메르카티가 있다. 라티는 1582년 추기경 페데리코 보로메오가 처음 출판한 라틴어 저서인 ''Acta Ecclesiae Mediolanensis'' ("밀라노 교회 행적")의 새로운 판을 저술했다.[3][2]
4. 미술관
암브로시아나 미술관(Pinacoteca Ambrosiana)은 1618년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이 자신의 그림과 드로잉 컬렉션을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에 기증하면서 시작되었다.[1] 이 기증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카라바조, 라파엘로, 티치아노, 베르나르디노 루이니 등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의 초기 컬렉션이 형성되었다.
보로메오 추기경은 피렌체와 로마의 예술 학교에 필적하는 예술 학교를 설립하고자 1620년에 회화, 조각, 건축의 기초를 가르치는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1] 조반니 바티스타 크레스피(일명 체라노), 잔 안드레아 비피, 파비오 만고네가 각각 회화, 조각, 건축 감독으로 임명되었다.[1]
현재 미술관은 24개의 전시실에 이탈리아와 유럽의 걸작 3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1] 2013년 도쿄 전시를 포함하여 해외에서도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개최하였다.[1]
4. 1. 주요 소장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음악가의 초상》,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밑그림, 브라만티노의 《아기 예수 숭배》, 보티첼리의 《성모자와 세 천사》, 베르나르디노 루이니의 《성 가족과 성 안나, 세례자 요한》, 그리고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예술가들의 드로잉 12,000여 점 등이 주요 소장품이다.[1]

5. 대중문화 속 암브로시아나
17세기 가브리엘 노데는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을 보들리안 도서관, 안젤리카 도서관과 함께 유럽에서 대중에게 공개된 단 세 곳의 도서관 중 하나로 평가했다.[4] 1816년 10월 15일, 바이런 경은 이 도서관을 방문하여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피에트로 벰보 사이의 편지에 매료되었고, 보르자의 머리카락 한 다발을 훔쳤다고 주장했다.[7][8][9] 메리 셸리는 1840년 9월 14일 이 도서관을 방문했지만, "페트라르카의 유물 중 일부"를 훔치려 했던 사건으로 인해 보안이 강화되어 실망했다.[10]
6. 평가 및 의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와 같은 귀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반종교개혁 시기 가톨릭 학문의 보루 역할을 수행했다.[1] 도서관의 소장품은 지중해 전역을 여행한 추기경의 사절들에 의해 수집되었으며, 그리스어 필사본뿐만 아니라 동양 언어의 자료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2] 보비오 수도원에서 가져온 고대 필사본들과 키케로의 잃어버린 연설 3개가 포함된 팔림세스트 등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3]
초대 감독관인 안토니오 올지아티는 남부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에서 자료를 수집했으며, 그의 후임인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디노 페라리는 스페인에서 비슷한 임무를 수행했다.[4] 안토니오 살마지아는 코르푸에서 그리스어 필사본을 찾았고, 히브리어 필사본과 희귀 인쇄본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획득되었다.[5] 동양 언어 작품들은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으며,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필사본들도 소장되었다.[6] 글라골 문자로 된 작품과 일본어 ''경멸'' 등 희귀한 자료들도 소장되어, 동서양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보여준다.
참조
[1]
서적
Catalogue of the Arabic Manuscripts in the Biblioteca Ambrosiana
[2]
서적
Le Particolarità Del Rito Ambrosiano
https://archive.org/[...]
2022-04-10
[3]
간행물
Achille Ratti and the Biblioteca Ambrosiana
https://www.persee.f[...]
2018-12-27
[4]
서적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
Oxford University Press
[5]
뉴스
Ian Thompson, review
The Spectator
2005-06-25
[6]
간행물
Pietro Bembo: A Renaissance Courtier Who Had His Cake and Ate It Too
http://www.caxtonclu[...]
2005-10
[7]
웹사이트
The Byron Chronology: 1816–1819 – Separation and Exile on the Continent
http://www.rc.umd.ed[...]
2019-02-23
[8]
웹사이트
Byron
https://www.fulltext[...]
[9]
웹사이트
Letter to Augusta Leigh, Milan, 15 October 1816
http://engphil.astat[...]
2008-05-09
[10]
서적
Travel Writing
Pick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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