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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모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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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모는 백제의 좌평으로, 529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으나 패배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 사신 작막고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연모는 대성팔족 중 하나인 연씨 출신으로, 연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토착 백제인, 금강 유역 토착민, 중국계 이민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웅진 시대에 활발히 활동했으나 사비 천도 이후 자취를 감추었고, 이후 연문진이 수에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다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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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모 (백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연모
한글연모
한자燕謨
일본어 (히라가나)えん ぼ
로마자 표기Yeon Mo
귀족 정보
이름연모
원어 이름燕謨
작위백제좌평
재위알 수 없음
재임알 수 없음
전임자알 수 없음
공동 재위자알 수 없음
후임자알 수 없음
군주백제 성왕
섭정알 수 없음
국적백제
성별남성
출생일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일미상
사망지미상
매장지알 수 없음
능묘알 수 없음
왕조백제
가문연씨
아버지알 수 없음
어머니알 수 없음
배우자알 수 없음
형제자매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친인척알 수 없음
종교알 수 없음
군사 정보
복무백제군
복무 기간알 수 없음
소속알 수 없음
근무백제육군
근무 기간알 수 없음
최종 계급알 수 없음
충성알 수 없음
주군백제 성왕
지휘3만 백제군
참전오곡지원 전투

2. 생애

백제좌평(佐平)을 지낸 인물이다.

2. 1. 고구려와의 전투 패배

529년 (성왕 7년) 10월, 고구려안장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침략하여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이에 성왕은 연모에게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주어 맞서 싸우게 하였다. 연모는 군대를 이끌고 오곡원(五谷原)으로 나아가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크게 패하여 2,000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1].

오곡원의 위치는 오늘날의 황해도 서흥(瑞興) 일대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백제6세기 전반에 이미 한강 유역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2. 2. 일본과의 관계

일본서기》에 따르면, 516년(무령왕 16)에 일본에 파견된 백제 사신 작막고(灼莫古)가 연모와 동일 인물이라는 견해가 있다.[1]

3. 출신

대성팔족 중 하나인 연씨 출신이다.[2] 연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금강 유역의 토착 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4][5][6], 한성 시대 이후 웅진 천도 시기에 등장한 점, 중국식 성씨를 사용한 점 등을 근거로 중국인 이민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3][4][5][6]

3. 1. 연씨의 기원 논쟁

연씨백제대성팔족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의 『두산 세계대백과사전』은 연씨의 시조와 그 유래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다고 설명한다.[2]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연씨의 기원에 대해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한국 고대사학자 정재윤은 연씨가 대성팔족에 속하므로 백제 토착 세력으로 볼 수도 있지만, 몇 가지 이유로 의문을 제기한다. 대성팔족은 본래 백제 건국 시조 온조왕을 따라 남하한 여덟 가문을 의미하는데, 연씨는 한성 시대 이후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야 역사 기록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정재윤은 연씨가 "연(燕)"이라는 중국식 성을 사용한 점, 주로 군사 분야에서 활동하며 세력을 키운 점, 그리고 이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금강 유역에 이미 예씨(예숭, 예복 등)나 진씨(진명, 진춘 등)와 같은 대규모 중국인 이민 집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연씨가 중국계 이주민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3]

한국 고대사학자 이홍직과 김영관 역시 연씨를 금강 유역의 토착 세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본래 한반도 북부의 대방군 지역에 살다가 백제로 이주해 정착한 중국인 후예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4][5][6]

김영관은 연씨가 웅진 시대에 활발히 활동하다가 사비로 천도한 성왕 18년(540년) 이후 한동안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가, 무왕 8년(607년) 연문진에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다시 등장한다고 지적했다.[6] 당시 백제는 장위, 장무, 고달, 회매, 모유, 양무, 왕무, 장새, 진명, 왕변나, 왕효린 등 중국계 인물들을 대중국 외교에 적극적으로 기용했는데, 연문진 역시 중국계 혈통이었기 때문에 수나라와의 외교를 위해 발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연씨 가문이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준다.[6]

3. 2. 사비 천도 이후

웅진 시대에 활발히 활동했던 연씨 세력은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성왕 18년(540년) 이후로는 기록에서 그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6]。 약 60여 년이 지난 무왕 8년(607년), 연문진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에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연씨는 다시 역사 기록에 나타난다[6]

김영관은 연씨가 다시 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 당시 백제중국과의 외교에서 중국계 인사를 기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6]。 백제는 장위, 장무, 고달, 회매, 모유, 양무, 왕무, 장새, 진명, 왕변나, 왕효린 등 중국계 인사를 대중국 외교에 기용했던 전례가 있었다[6]연문진 역시 중국계 출신이었기에 수나라와의 외교를 위해 기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연씨가 다시 등장한 배경이라고 보았다[6]

참조

[1] 뉴스 연모(燕謨) http://encykorea.aks[...] 韓国民族文化大百科事典
[2] 뉴스 연 燕 https://www.doopedia[...] 斗山世界大百科事典
[3] 서적 중국계 백제관료에 대한 고찰 高麗大学歴史研究所 2012
[4] 뉴스 수서(隋書) > 동이열전(東夷列傳) > 백제(百濟) > 大業 3년(A.D.607; 百濟 武王 8)에 璋이 使者 燕文進을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5] 서적 百濟人名考 新丘文化社 1971
[6] 서적 백제 말기 중앙 귀족의 변천과 왕권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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