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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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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염상섭은 파주 염씨 출신으로,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을 한국에 정착시킨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다.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20년 《폐허》 동인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단편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자연주의 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1930년대에는 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매일신보》, 《만선일보》 등에서 편집부 직책을 역임했고, 1946년에는 《경향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편집국장을 지냈다. 한국 전쟁 중에는 해군 소령으로 참전했으며,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주요 작품으로 《삼대》, 《만세전》 등이 있으며, 1963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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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 [인물]에 관한 문서
한자廉想涉
로마자 표기Yeom Sang-seop
별칭횡보
한자 (별칭)橫步
로마자 표기 (별칭)Hoengbo
기본 정보
출생일1897년 8월 30일
출생지한성
사망일1963년 3월 14일
사망지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직업소설가
언어한국어
학력
활동
활동 기간1921년 - 1963년
장르소설
주요 작품세대
데뷔 작품표본실의 청개구리
수상
수상 내역서울시 문화상
아시아 자유 문학상
예술원상
삼일 문화상
기타 정보

2. 생애

한성부 출신으로 본관은 파주(坡州)이며 아호(雅號)는 제월(霽月), 횡보(橫步)이다.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 염인식(廉仁湜)의 손자이자 가평 군수 염규환(廉圭桓)의 셋째 아들로 성장했다. 부인은 의성 김씨 김영옥(金英玉)이다.[7]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 유학 시절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경험이 있다. 1920년 귀국하여 문학 동인지 《폐허》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발표한 단편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로 평가받는다. 그는 김동인, 현진건과 더불어 한국 문단에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을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문학 활동 외에도 언론인으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동아일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 및 간부로 일했으며, 1936년에는 매일신보 정치부장, 만주 장춘에서 만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경향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초대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시에는 해군 소령으로 임관하여 해군본부 정훈감실에서 근무했으며, 1954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교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교육에도 힘썼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삼대〉, 〈만세전〉, 〈두 파산〉 등이 있으며, 단편소설로는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중 〈만세전〉은 천재교육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1963년 3월 14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인해 향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1. 출생과 성장

1897년 8월 30일, 한성부 종로구 적선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났다.[7] 본관은 파주(坡州)이며, 아호(雅號)는 제월(霽月), 횡보(橫步)이다.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를 지낸 염인식(廉仁湜)의 손자이며, 가평군수를 지낸 염규환(廉圭桓)과 경주 김씨 사이의 8남매 중 셋째 아들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부인은 의성 김씨 김영옥(金英玉)이다.[7]

어린 시절 학업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시기내용
1907년 9월관립 사범부속보통학교 입학
1909년보성소학교로 전학
1911년보성중학교 입학
1912년 9월일본으로 유학
1913년 4월도쿄 아자부중학교 2학년 편입
1914년 1월아자부중학교 중퇴, 세이가쿠인중학교 3학년 편입
1915년 9월세이가쿠인중학교 중퇴
1915년 9월교토 부립제이중학교 3학년 편입
1918년 3월교토 부립제이중학교 졸업
1918년 4월게이오기주쿠 대학 문과 예과 입학
1918년 10월게이오기주쿠 대학 중퇴 (병으로 인한 사유)



게이오기주쿠 대학 유학 시절,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오사카 텐노지공원에서 독립운동 격문을 살포하여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1심에서 금고 10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같은 해 6월 10일 석방되었다.[3]

1920년 2월, 창간을 준비하던 동아일보사 정치부 기자로 도쿄에서 활동하다가 3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동료 작가 황석우 등과 함께 문예지 창간을 준비하기도 했다.[3] 같은 해 9월에는 오산학교 교원이 되어 일본어와 작문을 가르쳤으며, 문학 동인지 《폐허》에 동인으로 참여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7월 오산학교를 사직하고 경성(현 서울)으로 돌아왔다.

2. 2. 학창 시절과 일본 유학

염상섭은 1897년 8월 30일, 한성(현: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 관립 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09년에는 보성소학교로 전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1910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1년 수료 후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2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간 염상섭은 여러 학교를 거치며 학업을 이어갔다. 1913년 4월 도쿄의 아자부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으나 중퇴하였고, 1914년 1월에는 세이가쿠인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그러나 이곳 역시 1915년 9월에 중퇴하였다. 같은 해 9월, 교토 부립제이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여 1918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18년 4월,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과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그해 10월 건강 문제로 인해 중퇴하였다. 대학 중퇴 후에는 동료 작가 황석우와 함께 문예지 창간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 시기 염상섭은 3·1 운동에 참여하여 오사카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시위를 주도하려 하였다. 이 활동으로 인해 1919년 3월 19일 오사카 텐노지 공원에서 독립운동 격문을 살포하여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1심에서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같은 해 6월 10일 석방되었다.[3]

연도내용비고
1907년관립 사범부속보통학교 입학
1909년보성소학교 전학
1910년보성소학교 졸업, 보성중학교 입학
1911년보성중학교 수료, 일본 유학 시작
1913년도쿄 아자부중학교 2학년 편입중퇴
1914년도쿄 세이가쿠인중학교 3학년 편입중퇴
1915년교토 부립제이중학교 3학년 편입
1918년교토 부립제이중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과 예과 입학10월 중퇴


2. 3. 3·1 운동 참여와 투옥

게이오기주쿠 대학 재학 중이던 염상섭은 3·1 운동에 참여하여 오사카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1919년 3월 19일, 그는 오사카 텐노지공원에서 독립운동 격문을 살포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금고 10개월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같은 해 6월 10일에 석방되었다.[3]

2. 4. 문단 활동과 언론인 경력

1920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문예지 《폐허》 동인으로 참여하며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21년 발표한 단편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로 평가받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김동인, 현진건 등과 함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을 한국 문단에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대에 그는 한국의 민족 문학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어로 글을 쓰거나 친일적인 글을 발표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3]

이후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 및 편집자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다. 1923년에는 주간지 『동명』의 편집장을 맡았고, 1925년에는 『시대일보』 사회부장을 지냈다. 1929년에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3] 1935년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겼다. 1936년에는 만주 장춘으로 건너가 『만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민주당 계열 신문인 경향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다. 이는 해방 후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기여하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행보로 평가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해군 소령으로 임관하여 해군본부 정훈감실에서 편집과장으로 복무했으며, 1953년 전역했다.

2. 5. 한국전쟁과 문학 활동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해군 소령으로 임관되어 해군본부 정훈감실에서 편집과장으로 근무하며 언론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1953년까지 복무하고 전역하였다. 이후 1954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어 후학 양성에 기여했다.

2. 6. 사망

1963년 3월 14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세계

염상섭은 김동인, 현진건 등과 함께 한국 근대 문학 초기에 자연주의사실주의를 도입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들은 당대 현실을 객관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하며, 특히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혼란기의 사회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내면, 지식인의 고뇌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염상섭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과 민족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표본실의 청개구리, 만세 전, 삼대, 두 파산 등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문학은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 문제를 제기하며 당대 지식인의 시대정신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 1.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

염상섭은 김동인, 현진건 등과 더불어 한국 근대 문학 초기에 자연주의사실주의를 도입하고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당대 현실을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선으로 포착하며, 복잡한 인간의 내면 심리와 사회 구조의 모순을 세밀하게 그려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지식인의 고뇌와 좌절을 담아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암울한 현실과 민족적 비애를 그린 만세 전(1923, 초기 제목 '묘지')은 주인공 '이인화'의 여정을 통해 당대 사회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품이다.

1931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삼대는 염상섭 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이 작품은 한 가족 삼대에 걸친 이야기를 통해 봉건적 가치관과 근대적 가치관의 충돌, 식민지 사회의 경제적 모순과 계층 갈등을 심도 있게 다루며 사실주의 문학의 성취를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에도 염상섭은 두 파산(1947), 취우(1952) 등의 작품을 통해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변화하는 시대 속 개인의 삶을 꾸준히 탐구하며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를 이어갔다.

다음은 염상섭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발표 연도작품명비고
1921년표본실의 청개구리
1921년이심
1922년암야
1922년애와 죄
1922년사와 그림자
1923년해바라기후에 "신혼기"로 개제
1923년만세 전후에 "묘지"로 개제
1924년
1924년작은 일거리
1924년잊을 수 없는 자들
1924년금반지
1925년전화
1925년윤전기
1925년고독
1930년광분
1931년삼대
1932년무화과
1934년모란꽃 필 무렵
1935년불연속선
1946년해방의 아이
1947년曉風 (효풍)
1947년두 파산
1947년인연
1947년영감승과 쇠붙이
1948년임종
1948년曉風 (효풍)
1948년일대의 유업
1949년채석장의 소년
1950년난류
1951년하코방 구함
1951년비스켓과 수류탄
1952년취우 (驟雨, 소나기)
1953년홍염
1954년종의 거처의 풍경
1954년추도
1954년협위
1954년미망인
1955년부부
1955년지평선
1956년후덧침
1956년짖지 않는 개
1956년어머니
1956년부성애
1956년자취
1956년젊은 세대
1957년댄스
1957년사선
1958년절곡


3. 2. 대표작 《삼대》

염상섭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1931년에 출판된 472쪽 분량의 장편 소설 『삼대』이다. 당시 관례에 따라 이 소설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처음에는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책으로 출판된 것은 1948년이 되어서였다. 『삼대』에서 염상섭은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의 삶을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1930년대 지식인과 도시 중산층 가정의 삶에 주목한다.

3. 3. 민족주의적 성향과 비판 의식

염상섭은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당시 지식인들의 고뇌를 작품 속에 담아냈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함께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예로 1923년에 발표된 소설 〈만세전〉(초판 제목 '묘지')을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암울한 사회 분위기와 그 속에서 지식인이 느끼는 무력감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받는다.

광복 이후에는 분단이라는 새로운 현실과 해방 직후의 사회적 혼란상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포착했다. 1947년에 발표된 단편 소설 〈두 파산〉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으며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파산해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염상섭은 당대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했으며, 이러한 그의 문학 세계는 일제강점기해방 공간을 살아간 지식인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4. 주요 작품 목록

(내용 없음)

4. 1. 장편 소설


  • 표본실의 청개구리 (1921년)
  • 이심 (1921년)
  • 사랑과 죄 (1922년, 원제: 애와 죄)
  • 만세전 (1923년, '묘지'로 개제)[8]
  • 광분 (1930년)
  • 삼대 (1931년)
  • 무화과 (1932년)
  • 모란꽃 필 때 (1934년, 원제: 모란꽃 필 무렵)
  • 불연속선 (1935년)
  • 두 파산 (1947년)
  • 임종 (1948년)
  • 취우 (1952년, 한자: 驟雨)
  • 절곡 (1958년)
  • 견우화
  • 백구
  • 얼룩진 시대 풍경

4. 2. 중·단편 소설


  •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 이심
  • 1922년: 암야, 사랑과 죄(애와 죄), 사와 그림자
  • 1923년: 해바라기(후에 "신혼기"로 개제), 만세전(후에 "묘지"로 개제)[8]
  • 1924년: 밥, 작은 일거리, 잊을 수 없는 자들, 금반지
  • 1925년: 전화, 윤전기, 고독
  • 1930년: 광분
  • 1931년: 삼대
  • 1932년: 무화과
  • 1934년: 모란꽃 필 때(모란꽃 필 무렵)
  • 1935년: 불연속선
  • 1946년: 해방의 아이
  • 1947년: 두 파산, 曉風(효풍), 인연, 영감승과 쇠붙이
  • 1948년: 임종, 曉風(효풍), 일대의 유업
  • 1949년: 채석장의 소년
  • 1950년: 난류
  • 1951년: 하코방 구함, 비스켓과 수류탄
  • 1952년: 취우(驟雨)
  • 1953년: 홍염
  • 1954년: 종의 거처의 풍경, 추도, 협위, 미망인
  • 1955년: 부부, 지평선
  • 1956년: 후덧침, 짖지 않는 개, 어머니, 부성애, 자취, 젊은 세대
  • 1957년: 댄스, 사선
  • 1958년: 절곡
  • 연도 미상: 견우화, 백구, 얼룩진 시대 풍경

5. 언론 활동

염상섭은 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언론인으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1920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창간을 준비하던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언론 활동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3월 귀국하여 정식 기자로 활동했다.[3] 이후 여러 언론사를 거치며 한국 언론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일제강점기 동안 그는 일본어로 글을 쓰거나 친일적인 글을 발표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3]

염상섭의 주요 언론 경력
연도언론사직책비고
1920년동아일보정치부 기자창간 준비 참여 및 기자 활동
1923년동명편집장주간지
1925년시대일보사회부장
1929년조선일보학예부장[3]
1935년매일신보편집부
1936년만선일보주필 겸 편집국장만주 장춘
1946년경향신문편집국장창간 참여
1950년 ~ 1953년대한민국 해군정훈감실 근무한국 전쟁 중 언론 활동



광복 이후인 1946년 9월, 서울로 돌아와 경향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본부 정훈감실 소속으로 언론 관련 업무를 수행했으며, 1953년 전역했다.

6. 김동인과의 갈등

1932년 김동인이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하자, 염상섭은 이 소설이 늦장가를 간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고 생각해 김동인과 설전을 벌였다. 당시 문단 일각에서는 염상섭의 아이가 친자가 아닐 수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김동인이 이러한 시점에 해당 소설을 발표한 것이 갈등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당대 문단을 이끌던 두 사람은 15년 동안 관계를 단절하고 지냈다.[9]

7. 수상 경력

연도상 이름
1954서울특별시 문화상
1956아시아 자유 문학상
19623·1 문화상
연도 미상한국예술종합학교 공로상


참조

[1] 웹사이트 염상섭 biographical PDF http://klti.or.kr/ke[...]
[2] 간행물 On Yom Sang-seop’s Masterpiece, Three Generations
[3] 서적 Three Generations Archipelago Books 2005
[4] 웹사이트 (133)파주 염씨(坡州廉氏)-53,539명 http://www.seoulecon[...] 2015-02-19
[5] 웹사이트 염상섭 http://srchuci.chosu[...] 2012-01-03
[6] 웹사이트 염상섭 http://people.search[...] 2012-01-03
[7] 웹사이트 염상섭 http://encykorea.aks[...]
[8] 웹사이트 만세전 http://navercast.nav[...]
[9] 뉴스 평론가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 출간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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