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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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이건은 1795년경 서호주 스완 강 유역에서 태어난 와자크 부족의 누웅가르족 원주민으로, 1833년 백인 정착민과의 갈등으로 사망했다. 그는 부족의 원로인 미지구루의 아들이자, '발라로크' 계급으로, 뛰어난 신체 능력과 부족 문화를 지녔다. 1829년 영국 이민자들이 스완 강에 정착하면서 토지 사용과 자원 경쟁으로 갈등이 시작되었고, 예이건은 백인 정착민의 공격에 저항했다. 그는 1833년 배신으로 사망하고 머리가 잘려 런던으로 옮겨져 전시되기도 했다. 이후 누웅가르족의 오랜 노력 끝에 머리는 호주로 반환되어 2010년 재매장되었으며, 예이건은 호주 원주민의 저항과 문화적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삶은 다리와 광장 명명, 문학 작품, 조각상 건립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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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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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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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예이건 (Yagan) |
다른 이름 | 이건 (Eagan) |
출생 | 약 1795년 |
사망 | 1833년 7월 11일 |
민족 | 누웅가르 (Noongar) |
직업 | 전사 |
활동 시기 | 1829년 ~ 1833년 |
별칭 | 압도적인 용기를 가진 애국자 |
상세 정보 | |
주요 활동 | 백인 정착에 대한 저항 |
출생지 | 퍼스 인근 스완 강 |
사망 장소 | 스완 강 인근 |
사인 | 총상 |
국적 | 호주 |
종교 | 누웅가르 전통 신앙 |
기념 | 예이건 공원, 예이건 동상 등 |
영향 | 호주 원주민 저항 운동의 상징 |
관련 인물 | 무고루 (아버지) 윌리엄 뷰즈필드 (살해자) |
업적 | 스완 강 식민지에 대한 원주민 저항을 주도 |
유산 | 호주 원주민 문화의 중요한 인물 |
추가 정보 | 예이건의 머리는 잘려져 영국으로 보내졌으며, 1997년에 반환되어 2010년에 매장됨. |
2. 초기 생애와 배경
예이건은 1795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8] 서호주 스완 강 지역의 와자크 누웅가르족 출신 인물이다. 그는 약 60명으로 구성된 빌리아르 부족에 속했으며,[6] 아버지는 부족의 원로인 미지구루였다.[9] 그의 부족은 스완 강과 캐닝 강 남쪽, 맹글스 만까지 이르는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7]
2. 1. 출생과 가족
서호주에 거주하던 누웅가르 와자크족 출신인 예이건은 약 60명으로 구성된 빌리아르 부족에 속했다. 당시 호주 정착민이었던 로버트 라이온은 이 부족을 빌리아르라고 기록했으나, 오늘날 학자들은 저널리스트 데이지 베이츠가 언급한 더 큰 규모의 '빌가르' 부족 내 하위 집단(씨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6][74] 라이온에 따르면 빌리아르족은 스완 강과 캐닝 강 남쪽부터 맹글스 만까지의 지역을 차지했다. 이 집단은 북쪽으로는 몽거 호, 북동쪽으로는 헬레나 강까지 이르는 더 넓은 지역에 대한 관습적 토지 사용권을 가졌으며, 혈연 및 혼인 관계를 통해 이웃 부족의 영토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7][75]예이건은 1795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8] 그의 아버지는 빌리아르족의 원로인 미지구루였고,[9] 어머니는 미지구루의 아내 중 한 명이었다.[9] 예이건은 누웅가르 사회 분류상 '발라로크(Ballarok)' 계급에 속했을 것으로 보인다.[10]
역사학자 네빌 그린은 예이건에게 아내와 '나랄'(Naral), '윌림'(Willim)이라는 두 자녀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나,[11][12][76] 대부분의 다른 자료에서는 그가 독신이었고 자녀가 없었다고 본다.[9] 2019년 개정된 ''호주 인물 사전''(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항목에서는 예이건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이들이 실제로는 그의 남동생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9]
평균보다 큰 키에 인상적인 체격을 가졌던 예이건은[9] 오른쪽 어깨에 부족 법에서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독특한 문신을 새겼다.[11][76] 그는 부족 내에서 가장 신체적으로 강인한 인물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9][77] 약 22.86m 거리에서 다른 막대기를 창으로 꿰뚫거나 약 54.86m 거리에서 나무를 관통시킬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43]
2. 2. 누웅가르족의 전통과 문화
와자크 누웅가르족 출신인 예이건은 약 60명으로 구성된 부족의 일원이었다. 로버트 라이온에 따르면 이 부족의 이름은 ''빌리아르''였다. 학자들은 빌리아르족이 데이지 베이츠가 ''빌가르''라고 칭했던 더 큰 부족 내의 가족 하위 집단, 즉 씨족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6]빌리아르족은 스완 강과 캐닝 강 남쪽 지역부터 맹글스 만까지 이르는 땅을 전통적인 영역으로 삼았다. 이 집단은 이보다 훨씬 넓은 지역, 북쪽으로는 몽거 호까지, 북동쪽으로는 헬레나 강까지 관습적인 토지 사용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집단은 또한 인척 관계와 이웃 집단과의 결혼 관계 때문에 이웃의 땅을 넘나들 수 있는 특이한 자유를 누렸다.[7] 이는 누웅가르 사회 내 부족 간의 긴밀한 유대와 넓은 활동 범위를 시사한다.
예이건은 1795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8] 그의 아버지는 빌리아르족의 원로인 미지구루였고,[9] 그의 어머니는 미지구루의 세 아내 중 한 명이었다.[9] 예이건은 아마도 누웅가르 분류에서 ''발라로크''였을 것이다.[10]
역사학자 네빌 그린에 따르면 예이건은 아내와 두 자녀를 두었다.[11] 1833년 ''퍼스 가제트''(Perth Gazette)의 보고서에는 그의 자녀 이름이 9세의 "나랄"(Naral)과 11세의 "윌림"(Willim)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12] 다른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그가 미혼이며 자녀가 없었다고 진술한다. 2019년 그의 ''호주 인물 사전''(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항목이 개정되었을 때, 리스는 그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의 남동생일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9]
평균 키보다 크고 인상적인 체격을 가진 예이건은 오른쪽 어깨에 독특한 부족 문신이 있었는데, 이는 그를 "부족 법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식별하게 했다.[11] 그는 일반적으로 그의 부족에서 가장 신체적으로 강력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약 약 22.86m 거리에서 다른 막대기를 창으로 찌르거나 약 54.86m 거리에서 나무를 관통할 수 있었다고 한다.[43] 이는 누웅가르 문화에서 신체적 능력과 기술이 개인의 위상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3. 백인 정착민과의 만남과 갈등
1833년 4월, 프리맨틀에서 예이건의 형제 돔줌이 상점 침입 중 정착민 경비원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6] 이는 예이건과 정착민 사이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예이건은 부족법에 따라 복수를 다짐한 것으로 전해지며, 얼마 후 불 크릭 근처에서 정착민 톰과 존 벨빅 형제를 매복 공격하여 살해했다.[75] 이 사건은 식량 문제와 더불어 과거 벨빅 형제가 원주민에게 가했던 폭력에 대한 보복이라는 해석도 있다.[78][75]
벨빅 형제 살해 사건에 대해 부총독 프레데릭 어윈은 예이건과 그의 아버지 미지구루 등을 무법자로 선포하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미지구루와 다른 한 명에게는 각각 20GBP, 예이건에게는 생사 불문 30GBP가 걸렸다.[75] 미지구루는 곧 체포되어 사격으로 처형되었으나, 예이건은 도주하여 추적을 피했다.[75][78]
같은 해 5월 말, 도주 중이던 예이건은 정착민 조지 플레처 무어와 마주쳤다. 무어는 예이건이 피진어를 사용하여 정착민들의 토지 침탈과 폭력에 항의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기록했다.[16][17] 예이건은 미지구루의 생사를 물으며 그의 죽음에 대한 추가적인 보복을 암시하기도 했다.[17] 무어는 이 만남을 기록으로 남겼으나 예이건을 체포하려 하지는 않았으며, 그의 대담함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17]
3. 1. 초기 접촉과 우호 관계
1829년 영국 정착민들이 스완 강 지역에 상륙하여 스완강 식민지를 건설했을 때, 예이건은 대략 35세 정도로 추정된다. 식민지 건설 초기 약 2년 동안은 정착민과 누웅가르족 사이의 관계가 비교적 우호적이었는데, 이는 서로 간의 자원 경쟁이 아직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웅가르족은 백인 정착민들을 보고 그들의 조상이나 죽은 사람의 영혼이 돌아온 존재인 Djanga|장가nys로 여기며 맞이하기도 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두 집단은 잡은 물고기를 서로 나누는 등 교류가 있었다.3. 2. 갈등의 심화와 저항
영국 정착민들이 스완강 식민지를 건설한 1829년 이후 초기 2년간, 정착민과 누웅가르족 간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누웅가르족은 백인 정착민들을 죽은 자의 영혼이 돌아온 존재인 Djanganys로 여기기도 했으며, 자원 경쟁이 적어 물고기를 나눠 먹는 등 교류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토지 소유권과 자원 이용 방식을 둘러싼 두 문화 간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다. 정착민들은 누웅가르족을 유목민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땅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토지 이용 방식에 따라 목초지와 농경지에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정착민들이 더 많은 땅에 울타리를 치면서 누웅가르족은 전통적인 사냥터와 성지에 접근하기 어려워졌다. 식량 부족에 직면한 누웅가르족은 정착민들의 농작물을 습격하고 가축을 사냥했으며, 밀가루와 같은 정착민들의 식료품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이는 식민지 사회에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또한, 누웅가르족이 사냥감을 몰기 위해 덤불 지대에 불을 지르는 전통적인 불 막대 농법(firestick farming)은 정착민들의 농작물과 집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
1831년 12월, 예이건과 그의 아버지 미지구루는 서호주에서 백인 정착에 대한 최초의 중요한 원주민 저항을 이끌었다. 아치볼드 버틀러 농장의 하인 토마스 스메들리가 감자밭을 습격하던 누웅가르족 중 한 명을 총으로 쏴 살해하자, 며칠 후 예이건과 미지구루 등은 보복을 위해 농가를 습격했다. 그들은 집에 있던 다른 하인 에린 엔트위슬을 살해했다. 누웅가르족의 부족 법에 따르면, 살인에 대한 보복은 살인자의 부족 구성원 누구에게나 행해질 수 있었으며, 하인 역시 정착민 집단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누웅가르족에게 이 행위는 부족 법에 따른 정당한 보복이었으나,[7] 백인 정착민들은 이를 이유 없는 살인으로 간주하고 예이건 일행을 체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832년 6월, 예이건은 켈름스콧 근처 캐닝강 옆에서 밀밭을 파종하던 노동자 두 명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윌리엄 게이즈가 사망했고,[13] 정착 당국은 예이건을 무법자로 선포하고 그의 체포에 20GBP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예이건은 10월 초까지 체포를 피하다가 어부들에게 유인되어 붙잡혔다. 프리맨틀의 라운드 하우스로 이송된 예이건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정착민 로버트 리옹의 변호로 목숨을 구했다. 리옹은 예이건이 자신의 땅을 침략에 맞서 방어하고 있으며, 범죄자가 아닌 포로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예이건과 그의 동료들은 리옹과 두 명의 군인의 감시 아래 카낙 섬으로 추방되었다.
리옹은 예이건에게 영국식 생활 방식과 기독교를 가르쳐 누웅가르족을 식민지 체제에 편입시키려 했으나, 한 달 만에 예이건과 동료들은 관리되지 않던 딩기를 훔쳐 본토의 우드만 포인트로 탈출했다. 식민지 정부는 그들이 충분한 처벌을 받았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1833년 1월, 킹조지 만에서 온 누웅가르족 걜리퍼트와 매니앗이 퍼스를 방문했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스완강 식민지에서도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월 26일, 예이건은 몽거 호수 근처에서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무장한 누웅가르족 10명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들은 무기를 교환하고 코로보리 의식을 열었으며, 창 던지기 시합에서 예이건은 25m 거리의 목표물을 맞히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3월 3일에는 퍼스 우체국 정원에서 또 다른 코로보리가 열렸고, ''퍼스 가제트''는 예이건이 "의전의 대가였고 무한한 우아함과 위엄으로 자신을 보여주었다"고 보도했다.[14]
그러나 이러한 교류에도 불구하고, 2월과 3월 동안 예이건은 정착민들과의 작은 충돌에 계속 연루되었다. 그는 윌리엄 왓슨의 집에 침입하여 총을 요구하고 물건을 빼앗거나, 노코트 중위가 비스킷 배급을 제한하려 하자 창으로 위협하기도 했다.[15]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퍼스 가제트''는 예이건을 "모든 악행의 선두에 서 있는 무모하고 대담한 인물"로 묘사하며 비판했다.[15]
4월 29일 밤, 프리맨틀 상점에 침입하려던 누웅가르족 일행 중 예이건의 형제 돔줌이 경비원의 총에 맞아 며칠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예이건은 이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고, 50~60명의 누웅가르족이 불 크릭에서 마차로 식량을 운반하던 정착민 톰과 존 벨빅 형제를 매복 공격하여 살해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벨빅 형제가 이전에 원주민을 폭행한 전력이 있어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78][75] 식량 절도가 주된 동기였다는 주장도 있다.
벨빅 형제 살해 사건 이후, 부총독 프레데릭 어윈은 예이건, 미지구루, 먼데이를 다시 무법자로 선포하고 현상금을 올렸다 (미지구루와 먼데이 각각 20GBP, 예이건은 생사 불문 30GBP). 미지구루는 5월 17일 체포되어 즉결 처형되었고, 예이건은 도주했다.
5월 말, 조지 플레처 무어는 자신의 땅에서 예이건과 마주쳐 피진어로 대화했다고 기록했다. 무어는 ''퍼스 가제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야간은 앞으로 나아가 왼손으로 내 어깨를 짚고 오른손으로 몸짓을 하며 일종의 낭송을 하듯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유감이었지만, 어조와 태도로 미루어 보아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우리 나라에 왔습니다. 우리를 우리의 은신처에서 몰아내고 우리의 직업을 방해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땅을 걸을 때 백인들이 우리에게 총을 쏩니다. 왜 백인들은 우리를 이렇게 대해야 합니까?"[16][17]
무어는 예이건의 모국어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역사가 해슬럭은 이 이야기가 예이건의 심경을 정확하게 표현하기보다는 "백인들의 양심의 가책"을 더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예이건은 무어에게 미지구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물었다. 무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한 하인이 미지구루가 카낙 섬의 죄수라고 대답했다. 예이건은 "백인이 미지구루를 쏘면 야간이 세 명을 죽일 것이다"라고 경고했다.[17] 무어는 이 만남을 보고했지만 야간을 제지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사실 모든 사람이 그를 붙잡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그를 잡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의 대담함에는 억지로 감탄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17]

1833년 7월 11일, 10대 형제인 윌리엄과 제임스 키츠는 길드포드 북쪽 스완 강변에서 소를 몰던 중, 헨리 불의 집에서 밀가루를 배급받으러 가던 예이건을 포함한 누웅가르족 일행과 마주쳤다. 키츠 형제는 예이건에게 체포를 피하기 위해 함께 머물자고 제안했고, 예이건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형제는 현상금을 노리고 예이건을 살해하기로 공모했다. 누웅가르족이 떠나려 할 때, 윌리엄 키츠는 예이건을 총으로 쏘았고, 제임스 키츠는 다른 누웅가르족 히건을 쏘았다. 형제는 도망쳤으나, 다른 누웅가르족이 윌리엄 키츠를 따라잡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제임스 키츠는 강을 헤엄쳐 탈출한 뒤 무장한 정착민들과 함께 돌아왔다.
정착민 일행이 도착했을 때 예이건은 이미 사망했고 히건은 죽어가고 있었다. 한 정착민은 히건의 머리에 총을 쏘아 숨통을 끊었다. 정착민들은 예이건의 머리를 잘라내고, 그의 부족 표시가 새겨진 등 가죽을 벗겨 전리품으로 챙겼으며, 시신은 근처에 묻었다.
제임스 키츠는 보상을 청구했지만, 그의 행동은 "야만적이고 배신적인 행위"라는 비판을 받았다.[18] ''퍼스 가제트''는 이를 공로로 칭찬하는 것을 역겹다고 표현했다. 반면, 데이지 베이츠는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9] 제임스 키츠는 부족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다음 달 식민지를 떠났다.
4. 체포와 죽음
예이건이 살해된 후, 그의 머리는 영국으로 보내져 식민주의 시대의 인류학적 호기심과 골상학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조지 플레처 무어는 예이건의 잘린 머리를 보고 스케치하며 "고향의 박물관에 전시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일기에 기록했고, 머리는 훈연 처리되어 보존되었다.
1833년 9월, 프레더릭 어윈 총독 대행은 런던으로 가면서 로버트 데일 소위에게 예이건의 머리를 가져가도록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21] 데일은 런던에서 머리를 팔려고 시도했으나 20GBP라는 가격에 구매자를 찾지 못했고, 결국 외과 의사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토마스 페티그루에게 머리를 넘겨 전시 및 연구에 사용하도록 했다. 페티그루는 조지 킹 사운드의 파노라마 뷰 앞에 머리를 전시하고, 골상학 검사를 의뢰하는 등 당시 유럽 사회의 원주민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머리를 이용했다.[21] 데일은 이 내용을 담은 팜플렛을 제작하여 판매하기도 했다.[24]
이후 예이건의 머리는 1835년 리버풀 왕립 협회에 기증되었고, 1894년에는 리버풀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나 전시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에 심하게 손상된 머리는 1964년 4월 10일, 박물관에 의해 페루 미라, 마오리족 머리와 함께 에버턴 묘지의 이름 없는 묘지에 매장되었다.
4. 1. 무법자 선포와 도피 생활
(내용 없음)4. 2. 배신과 죽음
1832년 4월 29일 밤, 눙가 강도단이 프리맨틀의 한 상점에서 밀가루를 훔치려다 가게 관리인 피터 치드로의 총에 맞았다. 이 사건으로 예이건의 형제였던 돔점(Domjum)이 총상을 입고 며칠 후 감옥에서 사망했다. 형의 죽음을 알게 된 예이건은 복수를 다짐하고, 프레스턴 곶(Preston Point)에서 강도단의 생존자들과 합류했다.[80] Bull Creek, Western Australia|불 크릭영어의 도로변에 모인 50~60명의 눙가 전사들은 식량을 운반하던 이주민의 짐마차 행렬을 발견하고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후, 이들은 매복 공격을 감행하여 백인 남성 톰(Tom)과 존 벨빅(John Velvick) 형제를 창으로 찔러 살해했다. 부족의 율법에 따르면 돔점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한 명의 생명으로 충분했지만, 두 명이 살해된 것이다. 나중에 집단의 일원이었던 맨디(Mandy)는 살해된 두 남자가 이전부터 원주민을 학대했으며, 특히 벨빅은 원주민이나 유색인종 선원에 대한 폭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알렉산드라 하즐락은 이를 약탈에 대한 욕구가 폭주한 결과라고 주장했지만[81],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78]벨빅 형제 살해 사건을 계기로 프레더릭 어윈(Frederick Irwin) 중령은 예이건, 미지구루(Midgegooroo), 맨디를 무법자로 규정하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미지구루와 맨디에게는 각각 20GBP, 예이건에게는 생사 불문 30GBP의 현상금이 걸렸다.[82] 맨디는 무죄를 주장하여 인정받았지만, 예이건과 미지구루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자신들의 영역을 떠나 북쪽의 헬레나 계곡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사건 발생 4일 후, 미지구루는 헬레나 강 근처에서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총살당했다. 예이건은 계속해서 도주 생활을 이어갔다.
5월 하순, 조지 플레처 모(George Fletcher Moore)는 어퍼 스완(Upper Swan) 지역에서 도주 중이던 예이건과 마주쳤다. 모는 현지 언어와 피진 영어를 섞어 예이건과 대화를 나눴다. 모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예이건이 다가와 왼손을 내 어깨에 올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며 오른손으로 제스처를 섞어가며 말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하지만 그의 말투와 행동으로 미루어 그가 말하려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온 우리 백인들 때문에 자신들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고 생활을 방해받고 있다고 말했다. 단지 자신들의 땅을 걷는 것만으로도 백인에게 총을 맞기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왜 자신들이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물었다."[83]
하즐락은 모가 예이건의 언어에 능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록에는 예이건의 실제 주장보다는 "백인 측의 양심의 가책"이 일부 반영되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81]
이 자리에서 예이건은 아버지 미지구루의 소식을 물었다. 모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용인 중 한 명이 미지구루가 카낙 섬에 투옥되었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이미 처형된 후였다.) 예이건은 "만약 백인이 미지구루를 쏜다면, 백인 세 명의 목숨으로 갚아주겠다"고 경고했다. 모는 이 만남을 행정 장관에게 보고했지만, 예이건을 체포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모두가 그의 체포를 원하겠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의 용기는 칭찬할 만한 구석이 있다"고 기록했다.[83]
현상금이 걸린 채 쫓기던 예이건은 결국 1833년 7월, 스완 강 상류 지역에서 윌리엄과 제임스 키츠 형제에게 살해당했다. (요약 정보 기반, 원본에는 직접적인 살해 정황 묘사 없음)
예이건의 머리는 잘려져 처음에는 헨리 불(Henry Bull)의 집으로 옮겨졌다. 조지 플레처 무어는 그곳에서 머리를 보고 자신의 일기에 여러 차례 스케치하며 "아마도 언젠가 고향의 박물관에 전시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머리는 훈연 방식으로 보존되었다.
1833년 9월, 프레더릭 어윈 총독 대행은 예이건 살해 사건을 포함한 자신의 임기 중 발생한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났다. 그의 부대가 인도로 이동할 예정이었음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행보였다. 식민지부는 어윈의 행정에 만족을 표했다.[20] 어윈과 동행한 로버트 데일(Robert Dale) 소위는 예이건의 머리를 입수하여 가져갔다. 역사가 폴 턴불에 따르면, 데일은 어윈을 설득하여 머리를 "인류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도록 했을 가능성이 높다.[21] 런던에 도착한 데일은 머리를 과학자들에게 팔려고 시도했지만, 20GBP라는 가격에 구매자를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해부학자이자 골상학자였던 토마스 페티그루(Thomas Pettigrew)와 18개월간 머리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계약을 맺었다. 페티그루는 고대 이집트 미라를 해체하여 부검하는 사적인 파티를 열어 런던 사교계에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22] 그는 데일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재현한 조지 킹 사운드(King George's Sound)의 파노라마 뷰 앞에 예이건의 머리를 전시했다. 머리에는 장식용 머리띠와 붉은꼬리검은유황앵무새 깃털이 꽂혀 있었다.

페티그루는 골상학자에게 머리 검사를 의뢰했다. 검사 결과는 머리 뒤쪽의 총상으로 인한 큰 뼈 골절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당시 호주 원주민에 대한 유럽인들의 편견과 일치하는 결론을 내렸다.[21] 데일은 이 내용을 자신의 팜플렛 ''조지 킹 사운드 및 인접 지역의 파노라마 뷰 등에 대한 설명적 설명''(Descriptive Account of the Panoramic View &c. of King George's Sound and the Adjacent Country)에 실었고,[24] 페티그루는 자신의 파티 손님들에게 이 팜플렛을 기념품으로 구매하도록 권했다. 팜플렛 표지에는 조지 크루크생크(George Cruikshank)가 그린 예이건 머리의 수채화 에칭이 실렸다.
1835년 10월, 예이건의 머리와 파노라마 뷰는 리버풀에 살던 데일에게 반환되었다. 10월 12일, 그는 이것들을 리버풀 왕립 협회(Liverpool Royal Institution)에 기증했고, 머리는 다른 두개골 표본들과 함께 전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894년 협회의 소장품이 흩어지면서 머리는 리버풀 박물관(Liverpool Museum)으로 옮겨졌으나 전시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에 머리는 심하게 손상되었고, 1964년 4월 10일 박물관은 머리를 페루 미라, 마오리족 머리와 함께 에버턴 묘지(Everton Cemetery)의 일반 묘역 16번 구역 296번 묘지에 매장했다. 이후 몇 년 동안 해당 묘지 주변에는 추가 매장이 이루어졌는데, 1968년에는 지역 병원에서 20명의 사산아와 출생 직후 사망한 두 명의 유아 유해가 예이건의 머리가 든 상자 바로 위에 묻히기도 했다.
5. 예이건의 머리: 수난과 귀환
1997년 8월 27일, 켄 콜벙, 로버트 브로포, 리처드 윌크스, 밍글리 완주리-눙갈라로 구성된 누응가르 대표단이 예이건의 머리를 돌려받기 위해 영국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누응가르족 내부의 이견으로 코리 보드니가 서호주 최고 법원에 유해 인도 금지 명령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27]
마침내 1997년 8월 31일, 리버풀 시청에서 열린 의식을 통해 예이건의 두개골은 누응가르 대표단에게 공식적으로 인도되었다. 이 자리에서 대표단의 켄 콜벙은 당일 발생한 웨일스 공녀 다이애나 사망 사건과 연관 지어 영국인을 비판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호주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29] 콜벙은 이후 자신의 발언이 오해받았다고 해명했다. 한편, 송환 과정에서 미국의 ''U.S. News & World Report'' 등 일부 국제 언론은 이 사안을 가볍게 다루거나 조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60]
5. 1. 영국으로의 이송과 전시
예이건의 머리는 처음에는 헨리 불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머리를 본 조지 플레처 모는 자신의 일기에 스케치를 남기고 "어딘가의 박물관에서 소장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의견을 적었다. 부패를 막기 위해 머리는 나무에 매달려 약 3개월 동안 유칼립투스 칩으로 훈제되었다.1833년 9월, 훈제된 머리는 육군 중위 로버트 데일에게 넘겨져 영국으로 옮겨졌다. 데일은 이 머리가 "인류학적 진귀한 물건"이라고 프레데릭 아윈 대령을 설득했다고 전해진다[86]。
런던에 도착한 데일은 해부학자나 골상학자들을 찾아다니며 머리를 20GBP에 팔려고 시도했으나, 구매자를 찾지 못했다. 결국 데일은 외과 의사이자 고물 수집가였던 토마스 페티그루에게 1년간 머리를 빌려주었다. 페티그루는 고대 이집트 미라를 검시하여 전시하는 개인적인 파티를 열어 런던 사교계에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데일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된 킹 조지 사운드의 풍경화를 배경으로 두고, 헤어밴드와 홍금강앵무의 깃털로 장식한 예이건의 머리를 테이블 위에 전시하여 사교 모임의 손님들에게 보여주었다.
페티그루는 또한 골상학자에게 머리 분석을 의뢰했다. 예이건의 두개골 후면에는 총격으로 인한 광범위한 골절이 있어 분석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분석 결과는 당시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 대한 편견과 예측에 부합하는 내용이었다[86]。
이 평가 내용을 포함하여 데일은 『''Descriptive Account of the Panoramic View & of King George's Sound and the Adjacent Countryeng''』(킹 조지 사운드와 주변 지역의 전경 설명)이라는 소책자를 발행했다[87]。 이 책의 표지에는 조지 크루크생크가 그린 예이건 머리의 손으로 채색된 아콰틴트 그림이 실렸고, 페티그루가 연 파티의 기념품으로 판매되었다.
1835년 초, 예이건의 머리는 풍경화와 함께 리버풀에 있는 데일에게 반환되었다. 같은 해 10월 12일, 데일은 머리를 리버풀 왕립 협회에 팔았다. 머리는 그곳에서 다른 해부학적 두개골 표본이나 밀랍 모형 등과 함께 전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94년에 협회의 소장품이 분산되면서 예이건의 머리는 리버풀 세계 박물관에 대여되었으나, 그곳에서는 전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5. 2. 반환 운동과 논쟁
1964년 4월, 손상이 심해진 예이건의 머리는 페루 미라, 마오리의 머리와 함께 합판 상자에 담겨 Everton Cemetery|에버턴 묘지eng의 일반 구역에 별다른 묘표 없이 매장되었다. 1968년에는 지역 병원이 20구의 사산아와 2명의 신생아를 이 상자 바로 위에 매장했다.[88]수십 년 동안, 적어도 1980년대 초부터 많은 누웅가르족 집단은 예이건의 머리 반환을 요구했다. 1996년 예이건에 관한 책을 쓴 원주민 켄 콜벙은 "원주민의 신앙에 따르면, 머리가 갖춰지지 않은 채로는 예이건의 영혼이 평안을 찾을 수 없다. 머리와 몸통이 따로 있으면 그의 영혼이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불멸의 여정을 시작할 수 없다"고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89]
당시 예이건 머리의 행방은 불분명했으나, 1980년대 초 부족장들의 지시를 받은 장로 켄 콜벙이 조사를 시작했다.[84] 1985년, 콜벙은 릴리 바브나 카울러를 고용해 영국 박물관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1990년대 들어 런던 대학교의 고고학자 Peter Ucko|피터 우코eng가 수사에 협력했고, 그의 연구원 크레시다 포드가 호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문헌 조사를 진행했다. 1993년 12월, 마침내 예이건 머리의 행방이 Everton Cemetery|에버턴 묘지eng로 밝혀졌다.
1994년 4월, 콜벙은 Burial Act 1857|1857년 매장법eng 25조에 따라 발굴 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영국 내무성은 상자 위에 묻힌 22명 신생아 친족들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콜벙 측 행정 서사는 발굴이 예이건 친족과 호주 국가 전체에 매우 중요하므로 이 제약이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퍼스의 누웅가르족 공동체 내부에 분열이 생겼다. 일부 장로들은 반환 운동에서 콜벙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했고, 리버풀 시의회에 콜벙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누가 예이건의 머리를 받을 문화적 계승자인지에 대한 논쟁도 벌어졌다. 1994년 7월 25일 퍼스에서 열린 공개 토론에서 참가자들은 이견을 접고 머리 반환이라는 "국가적 성공"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예이건 운영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콜벙의 활동은 계속 인정받았다.
1995년 1월, 영국 내무성은 신생아 친족들의 동의 없이는 발굴을 진행할 수 없다고 콜벙에게 통보했다. 내무성이 연락한 5가족 중 단 1가족만이 무조건적인 동의를 표했다. 결국 같은 해 6월, 내무성은 발굴 허가 신청을 공식적으로 거절했다.[88] 9월 21일, 예이건 운영 위원회는 호주와 영국 정부에 협력을 요구하는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1997년 5월 20일, 콜벙은 영국 정부의 초청과 비용 지원을 받아 영국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언론에 보도되며 정치적 압력을 강화했고, 전 호주 총리 존 하워드의 협력 약속도 얻어냈다.
1997년 8월 27일, 켄 콜벙, 로버트 브로포, 리처드 윌크스, 밍글리 완주리-눙갈라로 구성된 누웅가르 대표단이 예이건의 머리를 인수하기 위해 영국에 도착했다. 당초 대표단 규모는 더 클 예정이었으나, 영국 연방의 자금 지원이 막판에 철회되었다. 누웅가르족 코리 보드니가 예이건 유해 인도를 막기 위해 서호주 최고 법원에 금지 명령을 신청하면서 인도 절차는 또다시 지연되었다. 보드니는 자신의 가족만이 예이건 유해에 대한 단독 책임을 가지며, 발굴 자체가 불법이고 머리를 호주로 옮겨야 할 전통이나 믿음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8월 29일, 헨리 월워크 판사는 보드니가 이전에 현재 합의에 동의했었다는 점, 그리고 다른 누웅가르 원로(예이건의 가까운 친척이라 주장하는 앨버트 코루나)와 인류학자 팻 베인스가 보드니의 주장을 반박한 증언을 근거로 금지 명령 신청을 기각했다.[27]
마침내 1997년 8월 31일, 리버풀 시청에서 열린 의식을 통해 예이건의 두개골이 누웅가르 대표단에게 인도되었다. 두개골을 수령하며 콜벙은 같은 날 발생한 웨일스 공녀 다이애나의 죽음과 예이건의 죽음을 연결짓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자연은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운반합니다. 그리고 폼족(영국인)이 잘못된 일을 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29]이 발언은 호주 언론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고, 신문에는 비판적인 독자 편지가 쇄도했다. 콜벙은 이후 자신의 발언이 오해받았다고 해명했다.
송환 과정에서 일부 국제 언론은 이 사안을 가볍게 다루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U.S. News & World Report'' (미국 뉴스 & 월드 리포트)는 "잃어버린 머리카락의 약탈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예이건의 머리를 "절인 골동품"이라 칭하고 콜벙의 행동을 홍보용 속임수처럼 묘사했다.[60]
퍼스로 반환된 예이건의 머리는 계속해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재매장 책임은 리처드 윌크스가 이끄는 "예이건의 카트 재매장 위원회"에 주어졌다.[30] 그러나 매장 위치를 둘러싼 장로들 간의 이견, 특히 예이건의 나머지 시신 행방이 불확실하다는 점과 머리를 시신과 함께 묻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재매장은 계속 지연되었다.
예이건의 시신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퍼스 외곽 벨허스의 웨스트 스완 로트 39번지에서 여러 차례 시신 수색 시도가 있었다.[31] 1998년 원격 감지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2년 후 고고학 조사 역시 실패로 끝났다. 이후 머리를 시신과 분리하여 매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윌크스는 예이건이 살해된 장소에 머리를 안치하면 드림타임 영혼이 유해를 재결합할 수 있으므로 분리 매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32]
1998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계획 위원회와 원주민 문제부는 공동으로 ''예이건의 묘지 마스터 플랜'' 문서를 발표하여 해당 부지의 소유권, 관리, 개발 및 향후 사용 문제를 논의했다. 이 부지를 수도권 묘지 위원회가 관리하는 원주민 묘지로 전환하는 방안도 고려되었다.
예이건의 머리는 은행 금고에 보관되었다가 법의학 전문가에게 넘겨져 모형이 재구성되었고, 이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의 영안실에 보관되었다. 재매장 계획은 계속 연기되었고, 이는 누웅가르족 집단 간의 갈등을 지속시켰다.[33] 2008년 9월, 예이건의 머리가 11월에 재매장될 것이며, 약 99.6만호주 달러의 예산으로 예이건 기념 공원이 조성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34] 그러나 같은 해 11월, 물류 문제로 재매장이 2009년 7월로 연기되었다고 발표되었다.[35] 2009년 3월에는 가족, 주택, 지역 사회 서비스 및 원주민 문제부가 공원 개발을 위해 스완 시에 50만호주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고 발표되었다.[36]
5. 3. 발굴과 귀환
수십 년 동안, 적어도 1980년대 초부터 많은 눙가 집단은 예이건의 머리 반환을 요구해왔다. 1996년 예이건에 관한 책을 쓴 원주민 켄 콜벙(Ken Colbung)은 "원주민의 신앙에 따르면, 머리가 몸과 함께 있지 않으면 예이건의 영혼이 평안을 찾을 수 없다"고 설명하며,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상태에서는 그의 영혼이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여정을 시작할 수 없다고 믿었다.[89] 그러나 당시 예이건의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1980년대 초, 부족 장로들의 지시를 받은[84] 켄 콜벙은 예이건의 머리를 찾기 위한 조사를 시작했다. 1985년에는 연구원 릴리 바브나 카울러를 고용하여 영국 전역의 박물관에 문의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90년대에 들어 런던 대학교의 고고학자 피터 우코(Peter Ucko)가 조사에 협력했고, 그의 연구원 중 한 명인 크레시다 포드(Cressida Fforde)가 호주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문헌 조사를 진행했다. 마침내 1993년 12월, 포드는 예이건의 머리가 리버풀의 에버턴 묘지(Everton Cemetery)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에 콜벙은 1994년 4월, 1857년 매장법(Burial Act 1857) 25조에 따라 발굴 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영국 내무성은 예이건의 머리가 묻힌 상자 바로 위에 1968년에 매장된 22명의 신생아 유족들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통보했다.[88] (예이건의 머리는 1964년 4월 10일, 박물관에서 폐기 결정 후 페루 미라, 마오리족의 머리 등과 함께 합판 상자에 담겨 에버턴 묘지의 일반 구역 16번 296묘에 묘비 없이 묻혔었다.[88]) 콜벙 측 변호사는 발굴이 예이건의 친족뿐 아니라 호주 국가 전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하며 이 제한 조건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내무성은 주소가 확인된 5가족 중 1가족만이 무조건적인 동의를 표했고, 결국 1995년 6월 발굴 허가 신청을 공식적으로 거절했다.[88]
이 과정에서 퍼스의 눙가족 커뮤니티 내부에서는 콜벙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이견이 제기되고, 누가 예이건의 머리를 받을 문화적 계승자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5년 7월 25일, 퍼스에서 열린 공개 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은 내부 이견을 접어두고 머리의 송환이라는 "국가적 성공"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예이건 운영 위원회'(A Yagan Steering Committee)가 설립되어 송환 관련 조정을 맡았고, 콜벙은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위원회는 1995년 9월 회의를 통해 호주와 영국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97년 5월, 콜벙은 영국 정부의 초청과 비용 지원을 받아 영국을 방문했고, 이 방문은 언론에 보도되며 정치적 압력을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당시 호주 총리였던 존 하워드로부터 협력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1997년 8월 27일, 켄 콜벙, 로버트 브로포, 리처드 윌크스, 밍글리 완주리-눙갈라로 구성된 누웅가르 대표단이 예이건의 머리를 인수하기 위해 영국에 도착했다. 대표단 규모는 당초 계획보다 축소되었는데, 이는 영국 연방의 자금 지원이 막판에 철회되었기 때문이다. 머리 인도 과정은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누웅가르인 코리 보드니가 자신의 가족만이 예이건 유해에 대한 단독 책임을 지며, 발굴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서호주 최고 법원에 인도 금지 명령을 신청한 것이다. 그러나 8월 29일, 헨리 월워크 판사는 보드니가 이전에 현재의 송환 합의에 동의했었다는 점, 그리고 예이건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주장하는 다른 누웅가르 원로 앨버트 코루나와 인류학자 팻 베인스가 보드니의 단독 책임 주장을 반박하는 증언을 한 점 등을 근거로 보드니의 금지 명령 신청을 기각했다.[27]
마침내 1997년 8월 31일, 리버풀 시청에서 열린 공식적인 의식을 통해 예이건의 두개골은 누웅가르 대표단에게 인도되었다. 두개골을 수령하는 자리에서 콜벙은 그날 새벽 발생한 웨일스 공녀 다이애나 사망 사건을 언급하며 "그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자연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가져갑니다. 그리고 폼족(영국인)이 잘못된 일을 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29]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호주 언론에서 즉각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신문에는 그의 발언에 충격과 분노를 표하는 독자들의 편지가 쇄도했다. 콜벙은 나중에 자신의 발언이 오해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송환 과정 전반에 걸쳐 일부 국제 언론 매체, 예를 들어 미국의 ''U.S. News & World Report''는 이 이야기를 "잃어버린 머리카락의 약탈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예이건의 머리를 "절인 골동품"으로 칭하고 콜벙의 행동을 홍보용 속임수처럼 취급하는 등 가볍거나 희화화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60]
5. 4. 재매장과 기념
1997년 8월 27일, 켄 콜벙, 로버트 브로포, 리처드 윌크스, 밍글리 완주리-눙갈라로 구성된 누응가르족 대표단이 예이건의 머리를 돌려받기 위해 영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대표단 규모는 영국 연방의 자금 지원이 막판에 철회되면서 축소되었다. 누응가르족인 코리 보드니가 예이건 유해 인도를 막기 위해 서호주 최고 법원에 금지 명령을 신청하면서 인도 절차는 잠시 지연되기도 했다. 보드니는 자신의 가족만이 예이건 유해에 대한 책임을 지며, 머리를 호주로 옮겨야 할 전통이나 믿음은 없다고 주장했다.[27] 그러나 8월 29일, 법원은 보드니가 이전에 현재 합의에 동의했었고, 다른 누응가르 원로와 인류학자의 증언(보드니의 단독 책임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을 근거로 금지 명령 신청을 기각했다.[27]예이건의 두개골은 1997년 8월 31일 리버풀 시청에서 열린 의식을 통해 누응가르 대표단에게 공식적으로 인도되었다. 두개골을 수령하는 자리에서 대표단의 켄 콜벙은 그날 새벽에 일어난 웨일스 공녀 다이애나 사망 사건과 예이건의 죽음을 연결 짓는 듯한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연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운반한다. 영국인들이 잘못된 일을 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29] 이 발언은 호주 언론에서 큰 비판을 받았고, 콜벙은 나중에 자신의 발언이 오해받았다고 해명했다. 일부 국제 언론, 예를 들어 ''U.S. News & World Report''는 이 이야기를 "잃어버린 머리카락의 약탈자"라는 제목으로 다루며 예이건의 머리를 "절인 골동품"이라 칭하고 콜벙의 행동을 홍보용 속임수처럼 취급하는 등 조롱 섞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60]
머리가 호주로 돌아온 후에도 재매장 장소와 방식을 둘러싼 논쟁 등으로 인해 즉시 매장되지 못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2010년 7월 10일, 예이건이 마지막으로 온전히 살아있었던 날의 기념일이자 2010년 NAIDOC 주간이 끝나기 하루 전날, 그의 머리는 마침내 땅에 묻혔다. 매장식은 초대받은 누응가르 장로들만 참석한 비공개 장례식으로 치러졌다.[37][38][39] 매장 장소는 벨러스에 있는 예이건 기념 공원(Yagan Memorial Park)으로, 이곳은 예이건의 나머지 시신 매장 추정지와 가까워 선택되었다.[40] 재매장과 동시에 약 300명의 누응가르 장로들과 주 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예이건 기념 공원 개장 행사가 열렸다.[39] 당시 서호주 주 총리였던 콜린 바넷은 이 행사를 "모든 서호주인에게 훌륭한 날"이라고 평가했다.[39]
예이건 기념 공원에는 그의 삶과 유산을 기리기 위한 원주민 예술가들의 작품이 설치되었다. 피터 파머, 산드라 힐, 제니 도슨, 카일리 릭스가 디자인에 참여했다.[41] 도슨과 힐은 예이건의 이야기를 담은 입구 벽을, 파머는 공원 입구 문구를, 릭스는 여성용 쿨라몬 조형물을 디자인했다.[42]
한편, 예이건의 머리가 반환된 직후인 1997년 9월 6일,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안 신문에는 딘 알스턴의 만화 ''아, 가엾은 예이건''이 실렸다.[53] 이 만화는 예이건의 머리 반환이 오히려 누응가르족 공동체 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풍자했는데,[54] 일부에서는 이 만화가 누응가르 문화를 모욕하고 혼혈 원주민의 동기와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석하여 큰 반발을 샀다.[54] 누응가르 원로 그룹은 이 만화를 인권평등기회위원회에 제소했다.[54] 위원회는 만화가 누응가르 신념에 부적절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고 인정했지만, "예술 작품"이며 "합리적이고 선의로" 출판되었다는 이유로 1975년 인종차별금지법의 면제 조항에 해당하여 법 위반은 아니라고 판결했다.[46] 이 판결은 호주 연방 법원 항소심에서도 유지되었다.[54] 이후 일부 학계에서는 이 판결이 인종차별금지법의 면제 조항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하여 법이 제공하는 보호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55][56]
6. 유산과 영향
오스트레일리아 인물 사전에서 리스(Reece)는 예이건에 대해 "대부분의 정착민들이 그를 잔혹하고 무차별적인 살인자로 생각했지만", 그는 누응가르족과 식민지 개척자들 간의 갈등 해결을 위해 누응가르족의 보복 정의 시스템을 "유일한 근거로" 삼아 시행하려 했다고 평가했다.[9] 리스는 예이건이 누응가르족의 조직적인 저항이 부재했던 상황에서 '저항 지도자'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자신의 백성과 그들의 권리를 위해 행동하여 악명을 떨친 대담하고 용감한 전사"로서 독특한 인물이었다고 덧붙였다.[9]
예이건은 오늘날 호주 전역에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며,[88] 특히 누응가르족에게는 "존경받고, 소중히 여겨지며, 영웅적인 인물 ... 서호주 남서부의 애국자이자 선구적인 영웅"으로 여겨지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45] 그의 머리 반환은 그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부 호주 원주민들에게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평가받는다.[46] 그의 이름은 다리, 광장 등 여러 장소에 명명되어 기념되고 있다.[47][48]
6. 1. 역사적, 문화적 의의
호주 인물 사전에서 리스는 예이건에 대해 "대부분의 정착민들이 그를 잔혹하고 무차별적인 살인자로 생각했지만" 그는 누응가르족과 식민지 개척자들 간의 갈등 해결을 위해 누응가르족의 보복 정의 시스템을 "유일한 근거로" 삼아 시행하려 했다고 평가했다.[9] 리스는 누응가르족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이 부재했던 상황에서 예이건을 '저항 지도자'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백성과 그들의 권리를 위해 행동하여 악명을 떨친 대담하고 용감한 전사"로서 오히려 독특한 인물이었다고 덧붙였다.[9]예이건은 현재 호주에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며,[88] 『호주 인물 사전』에 등재되었고,[97] 서호주 주의 학교 교육 과정에도 포함되어 있다.[98] 특히 누응가르족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물로서,[88] "존경받고, 소중히 여겨지며, 영웅적인 인물 ... 서호주 남서부의 애국자이자 선구적인 영웅"으로 평가받는다.[45][89]
1980년대 초부터 여러 누응가르 집단은 예이건의 머리를 호주로 반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원주민들은 예이건의 유해가 불완전하여 그의 영혼이 땅에 묶여 있으며, 머리와 몸통이 결합되어야만 영혼이 영원한 여정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었다.[45] 당시 머리의 행방은 알 수 없었으나, 부족 원로들의 위임을 받은 켄 콜벙이 런던 대학교 고고학자 피터 우코와 연구원 크리시다 포르데의 도움으로 1993년 12월 마침내 머리의 위치를 찾아냈다.[25][26]
그러나 반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콜벙이 영국 내무부에 유해 발굴을 신청했지만, 함께 묻힌 다른 유해 친족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규정 때문에 거부되었다. 또한, 퍼스 지역 누응가르 공동체 내부에서는 콜벙의 역할과 머리 소유 자격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학자 해나 맥글레이드는 이러한 분열이 언론, 특히 더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안에 의해 조장되었다고 주장한다.[27] 결국 1997년, 콜벙을 포함한 누응가르 대표단이 영국 정부의 초청과 존 하워드 당시 호주 총리의 지지를 얻어 영국을 방문했다. 코리 보드니라는 누응가르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반환 금지 소송을 제기하는 등[88] 추가적인 어려움이 있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27]
1997년 8월 31일, 리버풀 시청에서 열린 의식을 통해 예이건의 두개골은 누응가르 대표단에게 마침내 인도되었다. 이 자리에서 콜벙은 같은 날 발생한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사망과 관련하여 영국인을 비판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호주 언론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콜벙은 나중에 자신의 발언이 오해받았다고 해명했다. 반환 과정에서 일부 국제 언론은 이 이야기를 농담거리로 취급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U.S. News & World Report''는 예이건의 머리를 "절인 골동품"이라 칭하고 콜벙의 노력을 홍보용 속임수로 묘사했다.[60]
예이건의 머리 반환은 일부 호주 원주민들에게 1993년 갈리폴리에서 호주의 무명 용사 유해를 송환한 사건에 비견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46] 이는 원주민 권리 회복 운동의 중요한 성과이자 식민지 유산 청산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반환된 두개골은 매장지를 둘러싼 누응가르 공동체 내부의 의견 차이와 부지 확보 문제 등으로 인해 즉시 재매장되지 못했다. 머리와 몸통을 함께 묻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91] 여러 차례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시신이 묻힌 정확한 위치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88] 오랜 논의 끝에 2010년 7월 10일, NAIDOC Week 마지막 날 전날, 예이건의 두개골은 벨러스에 있는 그의 시신 매장 추정지 근처에서 비공개 의식을 통해 재매장되었다.[93][94][95] 같은 날 '예이건 기념 공원' 개원식이 열렸으며, 콜린 바넷 당시 서호주 주 총리는 "서호주 모든 사람들에게 훌륭한 날"이라고 축하했다.[95]
예이건을 기리기 위한 노력은 이전부터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누응가르 공동체는 예이건의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나, 찰스 코트 당시 주 총리는 예이건이 동상을 세울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했다.[57] 그럼에도 누응가르 공동체는 '예이건 위원회'를 설립하고 기금을 모아 조각가 로버트 히치콕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1984년 9월 11일, 스완 강의 헤이리슨 섬에 실물 크기의 청동 동상이 세워졌다.
그러나 1997년 예이건의 머리가 반환된 지 일주일 만에, 반달족이 동상의 머리를 절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교체된 머리도 다시 도난당했다. "영국 왕당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콜벙의 다이애나 비 발언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했으나,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58] 이 사건에 대해 더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안의 한 칼럼은 유머러스하게 다루었지만,[59] 스티븐 뮤케와 아담 슈메이커 등 학자들은 이를 "원주민의 우려를 풍자적으로 사소하게 만드는 행위"이자 인종차별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심각한 사건으로 분석했다.[59][60][61] 이후 동상의 성기 노출에 대한 논란과 함께, 법의학적 복원 결과에 맞춰 동상을 새로 제작하는 방안도 논의되었다.[62]
이 외에도 예이건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물이 세워졌다. 벨러스의 스완 강을 가로지르는 그레이트 노던 고속도로의 다리는 2010년 '예이건 다리'로 명명되었고,[47] 퍼스 중심 업무 지구의 퍼스 시티 링크 재개발 프로젝트로 조성된 광장은 '예이건 광장'으로 이름 붙여져 2018년 3월 3일에 개장했다.[48][50][51][52] 이 광장에는 9m 높이의 조각상 'Wirin'이 설치되어 있다.[49]
예이건의 삶과 그의 사후 이야기는 다양한 문화 예술 작품에도 영감을 주었다.
- 문학: 메리 듀락은 1964년 아동 소설 ''The Courteous Savage: Yagan of the Swan River''(1976년 ''Yagan of the Bibbulmun''으로 개명)을 출판했다.[63][64] 원주민 작가 아치 웰러는 1997년 동상 참수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단편 소설 ''Confessions of a Headhunter''를 썼다.[65]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호주 시인 존 마티어는 2002년 시집 ''Loanwords''의 한 섹션("In the Presence of a Severed Head")을 예이건에게 헌정했다.[69][70]
- 영화: 아치 웰러의 소설은 샐리 라일리 감독과 협력하여 각색되어 2000년 단편 영화 ''Confessions of a Headhunter''로 제작되었고,[66] 이 영화는 오스트레일리아 영화 협회상 최우수 단편 영화상을 수상했다.[67] 각본은 2001년 서호주 주 총리 도서상 각본상을 수상했다.[68]
- 다큐멘터리: 2012년에는 ABC 인터내셔널과 스크린 오스트레일리아의 지원으로 켈릭 마틴이 쓰고 연출한 2부작 미니시리즈 ''Yagan''이 제작되어 방영되었다.[71][72]
6. 2. 현대 사회에 미친 영향
오스트레일리아 인물 사전에서 리스는 예이건에 대해 "대부분의 정착민들이 그를 잔혹하고 무차별적인 살인자로 생각했지만" 그는 누웅가르족과 식민지 개척자들 간의 갈등 해결을 위해 "유일한 근거로" 누웅가르족의 보복 정의 시스템을 시행하려 했다고 평가했다.[9] 리스는 예이건이 누웅가르족의 조직적인 저항이 없었던 상황에서 '저항 지도자'로 불리기는 어렵지만, "자신의 백성과 그들의 권리를 위해 행동하여 악명을 떨친 대담하고 용감한 전사였다"고 덧붙였다.[9]예이건의 머리가 반환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는 호주 전역에서 유명한 역사적 인물로 여겨지며,[88] 오스트레일리아 인물 사전[9][43][97] 및 서호주의 학교 교육 과정과 같은 공식 자료에도 등장한다.[44][98] 특히 누웅가르족에게 예이건은 "존경받고, 소중히 여겨지며, 영웅적인 인물 ... 서호주 남서부의 애국자이자 선구적인 영웅"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45][89] 그의 머리 반환은 일부 호주 원주민들에게 1993년 11월 갈리폴리에서 호주의 무명 용사 유해가 의례적으로 송환된 것에 비견되기도 했다.[46]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여러 장소와 사물에 '예이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벨러스의 스완 강을 가로지르는 그레이트 노던 고속도로의 옛 상부 스완 다리는 2010년 예이건 다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47] 퍼스 중심 업무 지구에는 퍼스 시티 링크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예이건 광장이 조성되었다.[48] 이 광장에는 9m 높이의 "Wirin" 조각상이 설치되었으며,[49] 호스슈 다리 옆에 위치하여 2018년 3월 3일에 개장했다.[50][51][52] 또한 1989년 9월, 서호주 농무성은 모래 땅에서 조기 수확이 가능한 보리 품종에 "Hordeum vulgare (Barley) c.v. Yagan"이라는 학명을 부여했다. 이 보리는 일반적으로 "예이건"으로 불린다.[108]
=== 동상 건립과 훼손 논란 ===
1970년대 중반, 누웅가르 공동체는 스완 강 식민지 150주년 기념(WAY 79) 행사의 일환으로 예이건의 동상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서호주 주 총리였던 찰스 코트는 한 역사학자로부터 예이건이 동상을 세울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조언을 받고 이를 거부했다.[57] 켄 콜벙은 코트 총리가 "납세자의 돈을 낭비하여 서호주의 첫 번째 주지사인 제임스 스털링 선장의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묘지를 보수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고 비판했다.[45][89]
정부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누웅가르 공동체는 예이건 위원회를 설립하고 기금 모금 운동을 벌여 호주 조각가 로버트 히치콕에게 동상 제작을 의뢰했다. 어깨에 창을 걸치고 서 있는 실물 크기의 청동 나체상으로 제작된 이 동상은 1984년 9월 11일, 퍼스 근처 스완 강의 헤이리슨 섬에 세워졌다.
1997년, 예이건의 머리가 퍼스로 반환된 지 일주일 만에 동상의 머리가 앵글 그라인더로 잘려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체된 머리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잘려 도난당했다. "영국 왕당파"를 자처하는 익명의 인물들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에 대한 콜벙의 발언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했으나, 서호주 경찰은 범인을 특정하거나 머리를 회수하지 못했다.[58]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더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안''의 한 칼럼은 머리를 "본스(bones)", "노긴(noggin)" 등으로 부르며 사건을 가볍게 다루었지만,[59] 스티븐 뮤케는 이를 "원주민의 우려를 풍자적으로 사소하게 만드는 행위"라고 비판했고,[59] 아담 슈메이커는 해당 칼럼이 "가벼운 유머와 코믹한 안도감의 소재"로 삼았을 뿐 사건의 악의적인 동기나 반달리즘적 성격은 간과했다고 지적했다.[60] 반면 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더 심각하게 분석하여, 데이비드 마틴은 2007년에 머리 절단을 "백인 정착민의 인종차별의 지속성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기념물과 기념비에 그들만의 생명을 불어넣는 미메시스의 힘을 말해주는 행위"라고 평가했다.[61]
동상의 모습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2002년 앨프레드 코브 선거구의 국회의원 자넷 울라드는 동상의 성기를 가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5년 11월에는 리처드 윌키스 역시 예이건이 실제로는 가리개를 착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역사적 정확성을 위해 사타구니를 가리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법의학적으로 복원된 예이건의 머리 모양과 더 유사한 형태로 동상을 새로 제작하는 방안도 논의되었다.[62][102]
=== 문학과 예술 ===
예이건의 삶과 그를 둘러싼 사건들은 다양한 문학 및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소설: 작가 겸 역사가 메리 듀락은 1964년 아동 소설 ''The Courteous Savage: Yagan of the Swan River''를 출판했다.[63] 이 책은 1976년 재발행 시 인종차별적이라는 지적을 받아 ''Yagan of the Bibbulmun''으로 제목이 변경되었다.[64][104] 1997년 예이건 동상의 머리가 반복적으로 훼손된 사건은 원주민 작가 아치 웰러에게 영감을 주어 단편 소설 ''Confessions of a Headhunter''를 쓰게 했다.[105]
- 영화: 아치 웰러는 영화 감독 샐리 라일리와 협력하여 자신의 단편 소설을 각본으로 각색했고,[65] 2000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35분짜리 영화 ''Confessions of a Headhunter''가 개봉되었다.[66] 샐리 라일리가 감독한 이 영화는 2000년 AFI 어워드에서 최우수 단편 영화상을 수상했으며,[67] 각본은 2001년 서호주 주 총리 도서상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68] 또한, ABC 인터내셔널은 켈릭 마틴이 각본과 연출을 맡고 데릭 조우시가 제작한 2부작 다큐멘터리 미니시리즈 ''Yagan''을 제작하여 2012년에 공개했다.[71] 이 작품은 스크린 오스트레일리아의 지원을 받았으며, SBS 온 디맨드에서 시청할 수 있다.[72]
- 만화: 1997년 9월 6일,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안'' 신문은 딘 알스턴의 만화 ''아, 가엾은 예이건''(Alas Poor Yagan)을 게재했다.[53][99] 이 만화는 예이건의 머리 반환이 누웅가족 공동체의 통합보다는 갈등을 유발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그렸으나,[54] 일부에서는 누웅가 문화의 특정 측면을 모욕하고 혼혈 원주민의 동기와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논란이 되었다.[54] 많은 원주민들이 불쾌감을 표했고, 누웅가 원로 그룹은 이 만화를 인권평등기회위원회에 제소했다.[54] 위원회는 만화가 누웅가의 신념에 부적절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고 인정했지만, "예술 작품"이며 "합리적이고 선의로" 출판되었다는 이유로 1975년 인종차별금지법의 면제 조항에 해당하여 법 위반은 아니라고 판결했다.[46][100] 이 판결은 호주 연방 법원 항소심에서도 유지되었다.[54][101] 이후 일부 학술 평론가들은 이 판결이 면제 조항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하여 법이 제공하는 보호를 약화시켰다는 우려를 제기했다.[55][56]
- 시: 200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호주 시인 존 마티어는 네 번째 시집 ''Loanwords''를 출판했다.[69][107] 이 시집의 네 섹션 중 세 번째인 ''In the Presence of a Severed Head''는 예이건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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