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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 그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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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카르 그뢰닝은 1921년 독일에서 태어나, 나치 친위대(SS)에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경비원으로 근무하며 수감자들의 금품을 분류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학살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증언하고, 재판에서 살인 방조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2018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수감되지 않았으며, 아우슈비츠에서의 행적과 관련된 재판 과정을 거쳤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1921년 6월 10일[4]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프로이센 자유주 (현재 니더작센주)의 니엔부르크에서 숙련된 직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4살 때 사망했다.[5]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로, 전쟁에서 한쪽 눈을 잃었으며, 민족주의자이자 엄격한 보수주의자였다. 아버지는 독일의 패전 후 보수적인 참전 군인 조직인 ''철모단''에 가입했다.[6] 그는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이 받는 대우에 분노했으며,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운영하던 직물 사업이 파산하자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뢰닝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규율, 복종, 권위"가 강조되는 시기였다고 회상했다.[5] 그는 군복에 매료되었고,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정예 연대에서 복무했던 할아버지의 사진을 인상 깊게 기억했다. 2005년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는 어린 시절 집 근처 유대인 철물점 주인의 딸과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지만, 나치 돌격대가 가게 앞에 "독일인은 유대인에게서 사지 마세요"라는 표지판을 걸었을 때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1]

1930년대 초, 그는 철모단의 청소년 조직인 '샤른호르스트분트'(Scharnhorstbund)에 가입했고,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했다. 가족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그는 나치즘이 독일에 이롭다고 생각했으며, 나치당원들이 "독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그는 유대인 작가나 나치가 퇴폐 미술로 규정한 작가들의 책을 불태우는 행위에 참여했는데, 이는 독일이 이질적인 문화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나치즘이 실업률을 낮추는 등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뢰닝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은행 사무원으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함께 일하던 동료 중 상당수가 군대에 징집되었다. 이로 인해 남은 견습생들에게는 빠른 경력 발전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뢰닝과 그의 동료들은 프랑스폴란드에서의 독일군의 신속한 승리에 고무되어 전쟁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느꼈다. 그는 1939년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1940년에는 정예 조직으로 여겨지던 친위대(SS)에 자원하여 입대했다.

3. 친위대 경력

그뢰닝은 정예 군대에 입대하기를 원했고, 친위대(SS) 입대를 목표로 삼았다. 1940년, 그는 아버지 몰래 SS 모집이 진행되던 호텔에서 친위대에 입대했다.[5] 그뢰닝은 은행 근무 경험을 인정받아 입대 후 SS의 급여 관리 및 부기 등 행정 업무를 담당했으며, 스스로를 "사무직"이라 칭하며 이 역할에 만족했다고 밝혔다.

1942년, 그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로 배치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주요 임무는 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들로부터 빼앗은 돈과 귀중품을 분류하고 계산하여 베를린의 SS 본부로 보내는 것이었다.[31] 또한 수감자들이 도착했을 때 이들을 분류하는 작업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역할 때문에 그는 '아우슈비츠의 회계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우슈비츠 근무 기간 동안 그는 병장에서 상사로 진급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사한 형제의 약혼녀와 결혼했다.

그뢰닝은 아우슈비츠에서 목격한 학살 행위에 불쾌감을 느껴 여러 차례 전투 부대로의 전출을 희망했고, 1944년 마침내 전출이 허가되어 아르덴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전투 중 부상을 입고 독일 국내 병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맞았다. 그는 아우슈비츠 근무 경력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이력서에 거짓 경력을 기재하기도 했다.

1945년 6월 10일, 병원에서 영국군에 체포되어 영국으로 이송되었고 1947년까지 포로 생활을 했다. 석방 후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전직 친위대원이었다는 이유로 은행 취업이 거부되어 유리 공장에 회계사로 취직했다. 그는 이후 인사 관리 책임자 및 노동 재판 명예 판사까지 오르며 중산층 생활을 영위했다.

3. 1. 아우슈비츠에서의 역할

1942년, 오스카르 그뢰닝은 친위대의 행정 요원 재배치 방침에 따라 베를린에서 비밀 임무 수행 지시를 받고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는 수용소 도착 직후 이곳이 단순한 억류 시설이 아니며, 도착한 유대인 수감자들이 조직적으로 학살되고 있다는 사실을 동료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뢰닝의 주요 임무는 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들로부터 빼앗은 돈과 귀중품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계산하여 베를린의 SS 경제행정본부로 보내는 것이었다. 또한, 수감자들이 가축 운반 열차로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강제 노동 가능 여부와 가스실행으로 분류하는 작업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역할 때문에 그는 '아우슈비츠의 회계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수용소 근무 중 학살 행위를 직접 목격하고 불쾌감을 느껴 여러 차례 전투 부대로의 전출을 희망했다. 특히 아기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 등을 목격한 후 상사에게 항의하며 전출을 요구했지만, 부임 전 서명했던 친위대 충성 서약 등을 이유로 거부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44년이 되어서야 전출 허가를 받아 아르덴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이러한 역할은 훗날 그가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에게 반박하는 증언을 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2014년 독일 검찰에 의해 30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살인 방조 혐의로 기소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31][32] 2015년 재판에서 그는 도덕적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큰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며 직접적인 법적 책임은 부인하려 했으나[31], 결국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34][35]

3. 1. 1. 홀로코스트에 대한 인식

그뢰닝은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직후, 이곳이 일반적인 수용소가 아니며 수감된 유대인들로부터 빼앗은 돈이 실제로는 돌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료들은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학살되고 있으며, 이는 그가 도착하기 전날 밤 들어온 수송 인원들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항공 사진으로, 1944년 5월에 건설된 수용소로 끝나는 철로에 최근 도착한 수송대가 보인다. 선택 과정이 완료되었고, 가스 처형을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 단지 부지 안으로 들어가는 열린 문을 통해 보여지는 화장터 II로 인도되고 있다.


그의 주요 임무는 도착한 수감자들에게서 압수한 각종 통화를 분류하고 계산하여 베를린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학살 과정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점차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여 몇 달 후에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근무하며 잔혹한 행위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선택 과정에서 탈락하여 걷지 못하는 이들이나 기차에 숨어있던 아이들이 총살당하는 것을 보았다. 특히, 한 SS 병사가 우는 아기의 다리를 잡고 트럭 쇠붙이에 머리를 부딪혀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아기가 울고 있었다. 그 아이는 헝겊에 싸여 램프 위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아기를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젖먹이 아이를 둔 여성들은 즉시 가스실로 보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다른 SS 병사가 아기의 다리를 잡는 것을 보았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를 괴롭혔다. 그는 트럭의 쇠붙이에 아기의 머리를 쳐서 조용하게 만들었다.[5]

이러한 경험 후, 그뢰닝은 상사에게 더 이상 아우슈비츠에서 일할 수 없다고 말하며, 유대인 학살이 필요하다면 "적어도 일정한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부임 전 서명했던 비밀 유지 서약 때문에 거부되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한 그는 비르케나우 외곽 막사에서 경보를 듣고 탈출한 유대인 수색에 동원되었을 때, 농가 형태의 가스실에서 치클론 B가 투입되는 과정과 그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침묵으로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이후 동료가 구덩이에서 시신이 불타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뢰닝은 이러한 경험들이 자신의 평정을 방해했으며, 다시 상관에게 불만을 표했지만 소용없었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수용소의 불쾌한 측면을 목격하는 것을 피하며 자신의 삶을 조절했다고 말했다.

그뢰닝은 자신이 살해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죄에 대한 죄책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을 강제적인 "톱니바퀴의 작은 부속"으로 묘사하며 간접적인 책임만을 인정하려 했다.[5] 또한 다른 SS 대원의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을 뿐 피고인이 아니었으므로 법적으로 무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5]

하지만 로렌스 리스는 저서 ''아우슈비츠: 나치와 '최종 해결'''에서 그뢰닝이 아우슈비츠를 떠나고 싶어 했던 이유는 학살 자체의 원칙이 아니라 그 실행 방식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뢰닝 스스로도 당시 나치 선전에 따라 독일의 적들을 파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으며, 가스실과 같은 학살 도구 자체에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5] 그는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죽기까지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매우 모호한" 감정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그는 아이들이 살해된 이유에 대해, 아이들 자체는 적이 아니지만 그들의 '피'가 위험하며 자라서 위험한 유대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리스는 이러한 비인간적인 논리가 그뢰닝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성장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뢰닝은 가스실의 공포가 비명 소리를 들었을 때 마침내 그에게 다가왔다고 말했다.[7]

리스는 그뢰닝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시간을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묘사했으며, 이를 통해 전후의 자신과 죽음의 수용소 운영에 기여했던 과거의 자신을 분리하여 그곳에서의 경험에 대해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뢰닝은 가스실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가 결코 자신을 떠난 적이 없으며, 수치심 때문에 아우슈비츠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고 말했다.[7] 그는 자신이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었음에도" 유대인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조직의 일원이었던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고 밝혔으며, 신과 유대인들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7]

4. 아우슈비츠 이후

1944년, 그뢰닝은 아우슈비츠에서의 근무 중 느낀 불쾌감으로 인해 전투 부대로의 전속을 희망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아르덴 대공세의 벌지 전투에 참전하는 친위대 부대에 합류했다. 그는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부대에 복귀했지만, 결국 소속 부대는 영국군에 항복했다.

항복 후, 그뢰닝은 아우슈비츠에서의 복무 사실이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군에게 제출한 서류에 친위대 경제행정본부에서 일했다고 거짓으로 기재했다. 그는 이러한 행동의 이유로 "승자가 항상 옳다"는 생각과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들이 "항상 인권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영국에서 포로 생활을 거쳐 1947년 석방된 그는 독일로 돌아와 유리 공장에서 회계사로 일하며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영위했다. 수십 년간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에 대해 침묵하던 그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접한 것을 계기로 이에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증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은 2005년 BBC 인터뷰 등으로 이어졌지만, 역설적으로 과거 행적이 드러나면서 사법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14년 9월, 독일 검찰은 그뢰닝을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하던 기간 동안 유대인 등 30만 명의 학살을 방조한 혐의(살인방조)로 기소했다.[31][32] 2015년 4월 21일 뤼네부르크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그는 직접적인 학살 가담은 부인했지만, 수용자 분류 작업 등에 관여했음을 인정하며 "도의적인 공동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용서를 구했다.[31] 재판 과정에서 그는 "나는 큰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직접적인 책임은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2015년 7월, 법원은 그에게 살인 방조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했다. 그의 변호사는 90대가 넘은 고령을 이유로 수감이 '생명권' 침해라고 주장하며 형 집행 면제를 탄원했지만, 독일 헌법재판소는 2017년 12월 이를 기각하고 형 집행을 확정했다. 하지만 그뢰닝 측은 계속해서 선처를 바라며 항소했고, 결국 하루도 실제 수감되지 않은 채 2018년 3월 9일 병원에서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3][34][35]

4. 1. 전후 생활

영국군에 항복한 후, 그뢰닝과 다른 친위대 동료들은 옛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46년 영국으로 보내져 강제 노동을 했고, 그곳에서 "매우 편안한 삶"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그는 좋은 음식을 먹고 돈을 벌었으며, 4개월 동안 미들랜즈와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독일 찬송가와 영국 전통 민요를 불러 영국 청중들 앞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뢰닝은 1947년 또는 1948년[5]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왔다. 아내와 재회한 그는 "여보, 우리 둘 다 부탁 하나만 할게. 아무것도 묻지 마."라고 말했다.[5] 전직 SS 단원이라는 이유로 은행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던 그는 유리 공장에 회계사로 취직하여 경력을 쌓아갔고, 결국 인사 관리 책임자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또한 노동 재판소의 명예 판사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누렸다.

독일로 돌아온 그뢰닝은 장인과 함께 살았는데,[5] 식사 자리에서 장인이 아우슈비츠에 대해 언급하며 그를 "잠재적 또는 실제 살인자"로 암시하자, 그뢰닝은 격분하며 다시는 그 주제를 꺼내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후 그뢰닝은 가족에게도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4. 1. 1. 홀로코스트 부인론과의 투쟁

그뢰닝은 전쟁 후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았다.[5] 열렬한 우표 수집가였던 그는 전쟁 후 40년이 넘은 어느 날, 지역 우취 클럽의 연례 회의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정치에 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남자는 그뢰닝에게 홀로코스트 부정이 독일에서 불법인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고, 수많은 시체가 어떻게 불태워질 수 없었는지, 그리고 사용되었어야 하는 가스의 양이 주변의 모든 생물을 죽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뢰닝은 이러한 발언에 거의 응답하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 제가 조금 더 잘 알고 있으니, 언젠가 이야기해 봅시다."라고만 대답했다.[5] 그 남자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티에스 크리스토퍼슨의 팜플렛을 추천했다.[5] 그뢰닝은 팜플렛을 입수하여 크리스토퍼슨에게 보냈는데, 그 팜플렛에 대한 자신의 논평을 덧붙였고, 그 논평에는 "저는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가스실, 화장, 선택 과정을요. 아우슈비츠에서 150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했습니다. 제가 거기에 있었습니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5]

그 후 그뢰닝은 아우슈비츠가 실제로 가스실에서 인간을 절멸시키는 곳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낯선 사람들로부터 전화와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가 홀로코스트 부정을 비난하는 그의 논평이 신나치 잡지에 실렸고, 익명의 전화와 편지의 대부분이 "제가 제 눈으로 본 것, 아우슈비츠에서 경험한 것이 엄청난 실수였고, 저의 큰 환상이었으며,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온 것"임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논평의 결과로, 그뢰닝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자신이 목격한 사건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에게 보내는 자신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고 말했다. "제 말을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가스실을 보았습니다. 저는 화장터를 보았습니다. 저는 야외 화재를 보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이러한 잔학 행위가 일어났다고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가족을 위해 87페이지로 구성된 회고록을 썼다.[5] 2005년에는 영국의 BBC 방송국으로부터 장시간 인터뷰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그뢰닝 자신이 전범 혐의로 사법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 재판 및 사망

전후 평범한 삶을 살던 그뢰닝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를 반박하기 위해 2005년 BBC 인터뷰에 응했다가 독일 사법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34] 이전 1985년에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으나,[31] 2011년 존 뎀야뉴크 재판에서 강제 수용소 경비 근무 자체만으로 살인방조 유죄가 가능하다는 판례가 생기면서[9] 상황이 바뀌었다. 결국 2014년 9월, 검찰은 그뢰닝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 30만 명의 학살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했다.[31][32]

2015년 4월 뤼네부르크에서 재판이 시작되었고,[31] 그는 재판 과정에서 도덕적 책임은 인정했지만 직접적인 살인 행위 가담은 부인했다.[31][10][11] 2015년 7월 1심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고,[34] 2017년 12월 독일 헌법재판소는 고령을 이유로 한 형 집행 면제 요청을 기각하며 형을 확정했다.[34] 그러나 그뢰닝은 형 집행을 앞두고 계속 항소하며 시간을 벌었고, 결국 수감되지 않은 채 2018년 3월 9일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4][35][33]

5. 1. 재판 과정

2005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에게 반박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인터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법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34] 2011년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의 전 경비병 존 뎀야뉴크가 특정 살인 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수용소 경비 근무 자체만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법적 선례가 마련되어, 그뢰닝에 대한 기소의 길이 열렸다.[9]

2014년 9월, 검찰은 그뢰닝을 공범 혐의로 기소했다. 기소장에 따르면 그는 1944년 여름, 137번의 열차 수송을 통해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425,000명의 헝가리 유대인 중 최소 30만 명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수감자들의 소지품을 관리하고 압수된 돈을 베를린으로 보내 나치 독일의 경제적 이익에 기여함으로써 살인을 방조한 혐의를 받았다.[8][32]

2015년 4월 21일, 뤼네부르크 지방 법원(Landgerichtde)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31] 당시 93세였던 그뢰닝은 재판에서 "손에 피를 묻힌 적은 없다"며 살해 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31] 수용자들을 분류하고 그들의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 관여했음을 인정하며 도덕적 책임은 통감한다고 밝혔다. 그는 "도의적인 공동 책임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31] 자신은 "큰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했다"고 항변하며[34][5] 형사법상 유죄 여부는 법원이 판단할 문제라고 진술했다.[10][11]

재판 과정에서는 60여 명의 공동 원고인[12] 중 다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증언했다.[13] 아우슈비츠 도착 당시 10세였던 에바 모제스 코르는 자신과 쌍둥이 자매가 나치 인간 실험 대상이었으며 부모님과 두 언니를 수용소에서 잃었다고 증언했다. 코르가 증언 후 그뢰닝과 포옹하자, 법정에 있던 다른 생존자들이 이에 항의하기도 했다.[14][13] 15세에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맥스 아이젠은 희생자들의 금니를 뽑는 일을 포함한 수용소의 잔혹한 절멸 과정을 상세히 증언했다. 영국인 생존자 수잔 폴락(당시 84세)은 헝가리에서 아우슈비츠와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경험과 비참했던 수용소 생활을 묘사하며 "800명 정도의 소녀들과 병영에 있었는데… 우리는 살이 빠지고 더 이상 정신을 사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15] 또 다른 영국인 생존자 이보르 펄(당시 83세)은 12세에 아우슈비츠에 도착해 부모와 일곱 형제자매를 잃었다고 증언했다.[15][16] 미국인 생존자 아이린 바이스(당시 84세)는 1944년 헝가리 유대인 대량 이송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가족과 헤어졌고, 부모, 네 형제자매, 열세 명의 사촌을 잃었다고 증언했다.[17]

그뢰닝의 고령과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실제 수감 여부를 두고 논쟁이 일기도 했다. 일부 생존자들은 그가 수감되는 대신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알리는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31]

2015년 7월, 법원은 그뢰닝에게 유대인 30만 명에 대한 살인 방조 혐의를 인정하여 징역 4년형을 선고했다.[34] 그뢰닝 측 변호사는 90대 노인의 수감은 '생명권' 침해라며 항소했지만, 독일 헌법재판소는 2017년 12월 이를 기각하고 형 집행 판결을 내렸다.[34] 그러나 그뢰닝 측은 계속해서 선처를 호소하며 항소했고, 결국 형이 집행되기 전인 2018년 3월 9일, 병원에서 96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결국 수감되지 못했다.[34][35][33]

5. 2. 판결 및 사망

그뢰닝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근무 기간 동안 유대인 30만 명의 살인을 방조한 혐의로 2015년 7월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변호사는 90대 고령자의 수감은 '생명권' 침해라고 주장하며 수감 면제를 요청했으나, 독일 헌법재판소2017년 12월 이를 기각하고 형 집행을 확정했다.[34] 그뢰닝 측은 계속 선처를 호소했지만, 결국 하루도 형을 살지 못하고 2018년 3월 9일 병원에서 96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사망했다.[34][35][33]

6. 한국 사회에 주는 의미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Oskar Gröning, the 'Bookkeeper of Auschwitz,' Is Dead at 96 https://www.nytimes.[...] 2018-03-12
[2] 웹사이트 'Auschwitz book-keeper' Oskar Groening sentenced to four years - BBC News https://www.bbc.co.u[...] Bbc.co.uk 2015-07-15
[3] 뉴스 'Bookkeeper of Auschwitz' dies before entering jail https://www.theguard[...] 2018-03-13
[4] 웹사이트 The case against the 'accountant of Auschwitz' http://www.dw.de/the[...] 2015-04-21
[5] 뉴스 An SS Officer Remembers: The Bookkeeper from Auschwitz http://www.spiegel.d[...] 2015-04-22
[6] 웹사이트 'A small cog in the Nazi death machine': Oskar Groening, 96, dies without serving sentence https://edmontonjour[...] 2018-03-13
[7] 웹사이트 Auschwitz guard's nightmares linger http://www.theage.co[...] The Age 2009-04-07
[8] 뉴스 Gröning will bei Selektion von Juden nur ausgeholfen haben http://www.zeit.de/w[...] 2015-07-03
[9] 뉴스 Auschwitz guard to go on trial in Germany https://www.telegrap[...] 2015-07-03
[10] 웹사이트 Ex-Nazi 'bookkeeper of Auschwitz' asks for 'forgiveness' https://news.yahoo.c[...] AFP 2015-04-21
[11] 웹사이트 Auschwitz guard trial: Oskar Groening admits 'moral guilt' https://www.bbc.com/[...] BBC 2015-04-21
[12] 문서
[13] 뉴스 Zu groß für Vergebung http://www.zeit.de/h[...] 2015-07-03
[14] 뉴스 Oskar Groening trial: Holocaust survivor Eva Kor hugs Nazi SS Auschwitz guard in German court http://www.ibtimes.c[...] 201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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