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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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초기 역사 ( ~ 1095년)
- 3. 중세 헝가리 유대인 (1095년 ~ 1526년)
- 4.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1526년 ~ 1740년)
- 5.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시대 (1740년 ~ 1790년)
- 6. 헝가리 혁명과 유대인 해방 (1790년 ~ 1867년)
- 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 (1867년 ~ 1918년)
- 8. 제1차 세계 대전과 혁명 (1914년 ~ 1920년)
- 9. 전간기 (1920년 ~ 1939년)
- 10.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1939년 ~ 1945년)
- 11. 공산주의 시대 (1945년 ~ 1989년)
- 12. 1990년대 이후
- 13. 결론
- 참조
1. 개요
헝가리 유대인은 헝가리에 거주해 온 유대인 공동체를 지칭하며, 그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헝가리 유대인들은 초기에는 상업 활동에 종사했으며, 10세기에는 카자르 왕국과의 교류를 통해 유입되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는 헝가리 왕들의 통치 하에 다양한 차별과 보호를 경험했으며, 18세기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의 개혁 정책을 통해 제한적인 권리를 얻었다. 19세기에는 헝가리 민족주의 운동과 유대인 해방 운동이 전개되었고, 1867년 유대인 해방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반유대주의가 심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홀로코스트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유대교가 억압받았으나, 1990년대 이후 민주화와 함께 유대인 사회가 부흥하고 과거사 청산 노력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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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 유대인 | |
|---|---|
| 기본 정보 | |
| 그룹 명칭 | 헝가리 유대인 |
| 현지 명칭 | hu (마자르 지도크) he (예후다트 훈가리아) |
| 인구 | |
| 총 인구 | 152,023명 (헝가리 + 이스라엘 총 추정치, 다른 국가 제외) |
| 헝가리 | 48,600명 (핵심 인구, 추정치) (2010년) 120,000명 (추정 인구) (2012년) 10,965명 (종교적으로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밝힌 사람, 2011년 인구 조사) |
| 이스라엘 | 32,023명 (이스라엘 이민자) (2010년) |
| 언어 | |
| 사용 언어 | 헝가리어 히브리어 이디시어 |
| 관련 민족 | |
| 관련 민족 | 아슈케나지 유대인 기타 유대인 |
| 역사 | |
| 역사 | 헝가리 유대인 역사 |
2. 초기 역사 ( ~ 1095년)
헝가리에 유대인이 언제 처음 정착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11] 전설에 따르면, 데케발루스 왕(재위 다키아 87–106 CE)은 로마와의 전쟁에서 자신을 도운 유대인들이 자신의 영토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11] 다키아는 오늘날 헝가리의 일부 지역을 포함했다. 유대-로마 전쟁의 포로들은 판노니아(서부 헝가리)에 주둔한 로마 군단에 의해 이 지역으로 끌려왔을 가능성이 있다.[1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75년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을 시리아에서 판노니아로 이동시켰는데, 이들은 안티오크와 헤메사(현재 홈스)에서 모집되었으며 당시 상당한 유대인 인구가 있었다.[12] 안티오크 군은 울키시아 카스트라(오늘날 센트엔드레)로, 헤메시안 군은 인터키사(두나우이바로시)에 정착했다.[12]
라파엘 파타이에 따르면, 유대인을 언급하는 석비가 브리게티오(현재 쇠니), 솔바(에스테르곰), 아퀴쿰(부다페스트), 인터키사(두나우이바로시), 트리키나이(사르바르), 돔보바르, 시클로스, 소피아나이(페치), 사바리아(솜바트헤이)에서 발견되었다.[12] 라틴어 비문인 셉티마 마리아의 묘비는 시클로스(크로아티아 국경 근처 헝가리 남부)에서 발견되었으며, 그녀가 유대인임을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Judaea").[11] 인터키사 석판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치세 동안 새겨졌다.[12] 2008년에는 고고학자 팀이 할브투른에서 서기 3세기 부적을 발견했다.[13] 헝가리 부족들은 650년 후에 이 영토에 정착했다.[13]
헝가리어에서 유대인을 뜻하는 단어는 ''지두''(zsidó)인데, 슬라브 언어에서 유래했다.[11][14] 헝가리의 유대인과 관련된 최초의 역사적 문서는 약 960 CE에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가 카자르의 요셉 왕에게 보낸 편지이다.[11] 동시대에 이브라힘 이븐 야곱은 유대인들이 사업상 목적으로 헝가리에서 프라하로 갔다고 언급했다.[11] 대공 시대에 유대인들은 헝가리에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11]
1061년, 벨라 1세 왕은 시장이 토요일에 열리도록 명령했다.[11] 성 라슬로 치세에, 사볼치 종교회의는 1092년 5월 20일 유대인이 기독교인 아내를 두거나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금지했다.[11] 헝가리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작은 정착촌을 형성했고, 랍비가 없었지만, 유대교 율법과 관습을 엄격히 준수했다.[11] 한 전통은 레겐스부르크 출신의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헝가리 유대인의 의례는 독일 관습을 반영했다.[11]
2. 1. 유대-로마 전쟁과 유대인 정착
헝가리에 유대인이 언제 처음 정착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11] 전설에 따르면, 데케발루스 왕(재위 다키아 87–106 CE)은 로마와의 전쟁에서 자신을 도운 유대인들이 자신의 영토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11] 다키아는 오늘날 헝가리의 일부 지역을 포함했다. 유대-로마 전쟁의 포로들은 판노니아(서부 헝가리)에 주둔한 로마 군단에 의해 이 지역으로 끌려왔을 가능성이 있다.[1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75년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을 시리아에서 판노니아로 이동시켰는데, 이들은 안티오크와 헤메사(현재 홈스)에서 모집되었으며 당시 상당한 유대인 인구가 있었다.[12] 안티오크 군은 울키시아 카스트라(오늘날 센트엔드레)로, 헤메시안 군은 인터키사(두나우이바로시)에 정착했다.[12]라파엘 파타이에 따르면, 유대인을 언급하는 석비가 브리게티오(현재 쇠니), 솔바(에스테르곰), 아퀴쿰(부다페스트), 인터키사(두나우이바로시), 트리키나이(사르바르), 돔보바르, 시클로스, 소피아나이(페치), 사바리아(솜바트헤이)에서 발견되었다.[12] 라틴어 비문인 셉티마 마리아의 묘비는 시클로스(크로아티아 국경 근처 헝가리 남부)에서 발견되었으며, 그녀가 유대인임을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Judaea").[11] 인터키사 석판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치세 동안 새겨졌다.[12] 2008년에는 고고학자 팀이 할브투른에서 서기 3세기 부적을 발견했다.[13] 헝가리 부족들은 650년 후에 이 영토에 정착했다.[13] 헝가리어에서 유대인을 뜻하는 단어는 ''지두''(zsidó)인데, 슬라브 언어에서 유래했다.[11][14]
헝가리의 유대인과 관련된 최초의 역사적 문서는 약 960 CE에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가 카자르의 요셉 왕에게 보낸 편지이다.[11] 동시대에 이브라힘 이븐 야곱은 유대인들이 사업상 목적으로 헝가리에서 프라하로 갔다고 언급했다.[11] 대공 시대에 유대인들은 헝가리에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11]
1061년, 벨라 1세 왕은 시장이 토요일에 열리도록 명령했다.[11] 성 라슬로 치세에, 사볼치 종교회의는 1092년 5월 20일 유대인이 기독교인 아내를 두거나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금지했다.[11] 헝가리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작은 정착촌을 형성했고, 랍비가 없었지만, 유대교 율법과 관습을 엄격히 준수했다.[11] 한 전통은 레겐스부르크 출신의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헝가리 유대인의 의례는 독일 관습을 반영했다.[11]
2. 2. 카자르 왕국과의 관계
10세기 경 헝가리어에서 유대인을 뜻하는 단어는 '지두'(zsidó)인데, 이는 슬라브어에서 유래했다.[11][14] 헝가리의 유대인과 관련된 최초의 역사적 문서는 약 960년경 코르도바의 유대인 정치가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가 카자르의 요셉 왕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슬라브 대사들은 슬라보니아 왕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왕은 이를 헝가리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언급되었다.[11] 또한 동시대에 이브라힘 이븐 야곱은 유대인들이 사업 목적으로 헝가리에서 프라하로 갔다고 기록했다.[11] 이를 통해 당시 헝가리와 카자르 왕국 사이에 교류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헝가리 지역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2. 3. 초기 헝가리 사회와 유대인
헝가리에 유대인이 언제 처음 정착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데케발루스 왕(재위 다키아 87–106 CE)은 로마와의 전쟁에서 자신을 도운 유대인들이 자신의 영토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11] 유대-로마 전쟁의 포로들은 프로빈치아 판노니아(서부 헝가리)에 주둔한 승리한 로마 군단에 의해 끌려왔을 수 있다.[1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75년 반란을 일으킨 그의 병사들을 시리아에서 판노니아로 이동시켰다.[12] 라파엘 파타이에 따르면, 유대인을 언급하는 석비가 브리게티오(현재 쇠니), 솔바(에스테르곰), 아퀴쿰(부다페스트) 등지에서 발견되었다.[12]헝가리어에서 유대인을 뜻하는 단어는 '지두'(zsidó)인데, 이것은 슬라브 언어 중 하나에서 유래했다.[11][14] 헝가리의 유대인과 관련된 최초의 역사적 문서는 약 960 CE에 코르도바의 유대인 정치가인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가 카자르의 요셉 왕에게 보낸 편지이다.[11] 동시대에 이브라힘 이븐 야곱은 유대인들이 사업상 목적으로 헝가리에서 프라하로 갔다고 말했다. 대공 시대에 유대인에 관해서는 그들이 그 나라에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11]
1061년, 벨라 1세 왕은 시장이 전통적인 일요일 대신 토요일에 열리도록 명령했다.[11] 성 라슬로 (1077–1095) 치세에, 사볼치 종교회의는 (1092년 5월 20일) 유대인이 기독교인 아내를 두거나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11] 헝가리의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작은 정착촌을 형성했고, 학식이 있는 랍비가 없었다.[11]
3. 중세 헝가리 유대인 (1095년 ~ 1526년)
헝가리의 콜로만 (1095–1116)은 성 라디슬라우스의 후계자로, 1092년의 사볼치 법령을 갱신하여 기독교 노예와 하인의 고용을 추가로 금지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들을 주교좌가 있는 도시로 제한했는데, 이는 아마도 교회의 지속적인 감독을 받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 법령이 반포된 직후 십자군이 헝가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헝가리인들은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고, 콜로만은 심지어 그들을 반대했다. 격분한 십자군은 일부 도시를 공격했고, 게달리아 이븐 야흐야의 말을 믿는다면 유대인들은 프랑스, 독일, 보헤미아의 동족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11]
보헤미아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잔혹 행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헝가리에서 피난처를 찾게 되었다. 부유한 보헤미아 유대인들의 이주가 콜로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상업 및 은행 거래를 규제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는 다른 규정 중 기독교인이 유대인에게서 돈을 빌리거나, 유대인이 기독교인에게서 돈을 빌릴 경우, 기독교인과 유대인 증인이 모두 거래에 참여해야 한다고 규정했다.[11]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 국왕(1205–1235) 재위 기간 동안 유대인 재무관과 주화, 소금, 세금 관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귀족들은 국왕에게 1222년의 금인칙서를 통해 유대인들을 이러한 고위직에서 박탈하도록 유도했다. 언드라시가 1226년에 돈이 필요해지자 그는 유대인들에게 세입 임대를 주었고, 이는 많은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그를 파문했는데, 1233년에 그가 교황 특사들에게 유대인과 사라센에 반하는 금인칙서의 칙령을 시행할 것을 베레그 맹세로 맹세할 때까지였습니다(이 시점에서 교황직은 바뀌었고, 이제 교황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였습니다. 그는 두 민족이 표식을 통해 기독교인과 구별되도록 할 것이며, 유대인과 사라센 모두 기독교 노예를 사거나 소유하는 것을 금지할 것입니다.[11]
1240년은 유대력의 5천 년을 마감하는 해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아의 강림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1241년의 몽골의 침략은 유대인들의 상상 속에서 곡과 마곡의 전쟁이 행복한 메시아 시대를 열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기대에 부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벨러 4세 (1235–1270)는 헤눌이라는 유대인을 궁정 재무관으로 임명했습니다(테카는 언드라시 2세 아래에서 이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뵐펠과 그의 아들 알트만과 니켈은 코마롬 성과 그 영지를 전당포로 소유했습니다. 벨러는 또한 유대인들에게 주화를 맡겼고, 이 시대의 히브리어 동전이 아직 헝가리에서 발견됩니다. 1251년 벨러는 그의 유대인 신민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1244년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에게 부여한 것과 동일했지만, 벨러는 헝가리의 상황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이 ''특권''은 모하치 전투 (1526)까지 효력을 유지했습니다.[11]
부다 시노드 (1279)는 헝가리의 라슬로 4세 (1272–1290) 재위 기간에 개최되었으며, 교황 특사 페르모의 필립이 참석한 가운데,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유대인은 윗옷의 왼쪽에 붉은 천을 착용해야 한다는 법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렇게 표시되지 않은 유대인과 거래하거나, 유대인과 함께 집이나 토지에 거주하는 모든 기독교인은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당해야 하며, 유대인에게 어떤 직책이라도 맡기는 기독교인은 파문되어야 합니다. 헝가리의 언드라시 3세 (1291–1301), 아르파드 왕조의 마지막 국왕은 포소니움(브라티슬라바) 공동체에 부여한 ''특권''에서 그 도시의 유대인들이 시민의 모든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르파드 왕조가 단절된 후 헝가리 왕위를 차지한 외국의 왕들의 통치 하에서 헝가리 유대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흑사병 시대(1349년)에 그들은 나라에서 추방되었다. 유대인들은 즉시 재입국되었지만, 그들은 다시 박해를 받았고, 1360년에는 앙주의 루이 1세 대왕(1342–1382)에 의해 추방되었다.[15] 루이 1세는 통치 초반에는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보였지만, 보스니아 정복 이후 현지인들에게 "이단" 보고밀 기독교에서 가톨릭교회로 개종을 강요하려 하면서 헝가리 유대인들에게도 개종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시도에 실패하고 추방했다. 그들은 몰다비아의 알렉산드루 첼 분과 왈라키아의 다노 1세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다노 1세는 그들에게 특별 상업 특권을 부여했다.[15]
몇 년 후, 헝가리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자 유대인들은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그들이 부재한 동안 왕이 ''Tödtbriefe''라는 관습, 즉, 신하 또는 도시의 요청에 따라 유대인의 증서 및 저당 증서를 펜으로 취소하는 관습을 도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루이가 만든 중요한 직책은 "헝가리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의 재판관"이라는 직책으로, 이 직책은 국가의 고위 관리, 팔라틴 및 재무관 중에서 선택되었으며, 부관의 지원을 받았다. 그의 의무는 유대인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그들의 특권을 보호하며, 지기스문트 룩셈부르크 (1387–1437)의 통치 이후 더욱 빈번해진 그들의 불만을 경청하는 것이었다.[15]
지기스문트의 후계자들: 알베르트 (1437–1439), 라슬로 포스투무스 (1453–1457), 그리고 마차시 코르비누스 (1458–1490) 모두 벨라 4세의 ''특권''을 확인했다. 마차시는 헝가리에 유대인 지방 장관 직책을 만들었다. 마차시가 사망한 후의 기간은 헝가리 유대인들에게 슬픈 시기였다. 그가 묻히자마자 사람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에게 빚진 빚을 지불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그들을 박해했다. 마차시의 사생아인 요한 코르비누스는 그들을 타타에서 추방했고, 돈이 항상 필요한 라슬로 2세 (1490–1516)는 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처음으로 화형에 처해졌고, 1494년 나지솜바트 (트르나바)에서 의례 살인 혐의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15]
보호를 위해 헝가리 유대인들은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에게 청원했다. 루이 2세와 마리아 대공비 (1512)의 결혼을 기념하여 황제는 라슬로의 동의를 얻어 지방 장관인 부다의 야곱 멘델을 그의 가족 및 다른 모든 헝가리 유대인들과 함께 그의 보호 아래 두었고, 그의 다른 신민들이 누리는 모든 권리를 그들에게 부여했다. 라슬로의 후계자인 루이 2세 (1516–1526) 치하에서 유대인 박해는 흔한 일이 되었다. 그들에 대한 씁쓸한 감정은 부분적으로 재무 차관인 세례받은 에메리히 세렌체스가 공금을 횡령했다는 사실에 의해 증폭되었다.[15]
3. 1. 성 라슬로 1세와 사볼치 종교회의 (1092년)
헝가리의 콜로만은 1092년 사볼치 법령을 통해 유대인들의 종교적, 사회적 활동에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11] 콜로만은 유대인들이 주교좌가 있는 도시에만 거주하도록 제한했는데, 이는 교회의 지속적인 감독을 받게 하려는 의도였다.[11] 이 법령 직후 십자군이 헝가리에 도착했으나, 헝가리인들은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고 콜로만은 오히려 그들을 반대했다. 격분한 십자군은 일부 도시를 공격하여 유대인들은 프랑스, 독일, 보헤미아의 동족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11] 보헤미아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잔혹 행위로 인해 많은 이들이 헝가리로 피난을 왔고, 부유한 보헤미아 유대인들의 이주는 콜로만이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상업 및 은행 거래를 규제하도록 하였다.[11]3. 2. 콜로만 왕과 십자군 (1095년 ~ 1116년)
헝가리의 콜로만 (1095–1116)은 성 라디슬라우스의 후계자로, 1092년의 사볼치 법령을 갱신하여 기독교 노예와 하인의 고용을 추가로 금지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들을 주교좌가 있는 도시로 제한했는데, 이는 아마도 교회의 지속적인 감독을 받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 법령이 반포된 직후 십자군이 헝가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헝가리인들은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고, 콜로만은 심지어 그들을 반대했다. 격분한 십자군은 일부 도시를 공격했고, 게달리아 이븐 야흐야의 말을 믿는다면 유대인들은 프랑스, 독일, 보헤미아의 동족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11]보헤미아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잔혹 행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헝가리에서 피난처를 찾게 되었다. 부유한 보헤미아 유대인들의 이주가 콜로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상업 및 은행 거래를 규제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는 다른 규정 중 기독교인이 유대인에게서 돈을 빌리거나, 유대인이 기독교인에게서 돈을 빌릴 경우, 기독교인과 유대인 증인이 모두 거래에 참여해야 한다고 규정했다.[11]
3. 3. 언드라시 2세와 금인칙서 (1222년)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 (1205–1235) 재위 기간 동안 유대인 재무관과 주화, 소금, 세금 관리들이 있었다.[11] 그러나 1222년 금인칙서를 통해 유대인들은 이러한 고위직에서 박탈되었다.[11] 언드라시 2세가 1226년에 돈이 필요해지자 그는 유대인들에게 세입 임대를 주었고, 이는 많은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11]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그를 파문했는데, 1233년에 그가 교황 특사들에게 유대인과 사라센에 반하는 금인칙서의 칙령을 시행할 것을 베레그 맹세로 맹세할 때까지였다.[11] (이 시점에서 교황직은 바뀌었고, 이제 교황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였다.) 그는 두 민족이 표식을 통해 기독교인과 구별되도록 할 것이며, 유대인과 사라센 모두 기독교 노예를 사거나 소유하는 것을 금지할 것이었다.[11]3. 4. 벨러 4세와 몽골 침입 (1241년)
헝가리의 벨러 4세 (1235–1270)는 헤눌이라는 유대인을 궁정 재무관으로 임명했고,[11] 뵐펠과 그의 아들 알트만, 니켈은 코마롬 성과 그 영지를 전당포로 소유했다.[11] 벨러는 또한 유대인들에게 주화를 맡겼으며, 이 시대의 히브리어 동전이 아직 헝가리에서 발견된다.[11] 1251년 벨러는 그의 유대인 신민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1244년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에게 부여한 것과 동일했지만, 벨러는 헝가리의 상황에 맞게 수정했다.[11] 이 ''특권''은 모하치 전투 (1526)까지 효력을 유지했다.[11]1240년은 유대력의 5천 년을 마감하는 해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아의 강림을 기대하고 있었다. 1241년의 몽골의 침략은 유대인들의 상상 속에서 곡과 마곡의 전쟁이 행복한 메시아 시대를 열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기대에 부응하는 것처럼 보였다.[11] 몽골 침입으로 헝가리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유대인들도 피해를 입었다.
3. 5. 벨러 4세의 유대인 특권 (1251년)
벨러 4세 (1235–1270)는 헤눌이라는 유대인을 궁정 재무관으로 임명하였고,뵐펠과 그의 아들 알트만과 니켈은 코마롬 성과 그 영지를 전당포로 소유했다.[11] 벨러는 또한 유대인들에게 주화를 맡겼고, 이 시대의 히브리어 동전이 아직 헝가리에서 발견된다.[11] 1251년 벨러는 그의 유대인 신민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는데,[11] 이는 1240년 유대인들의 메시아 강림에 대한 기대와 1241년 몽골의 침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특권은 본질적으로 1244년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에게 부여한 것과 동일했지만, 벨러는 헝가리의 상황에 맞게 수정했다.[11] 이 ''특권''은 모하치 전투 (1526)까지 효력을 유지했다.[11]3. 6. 부다 시노드 (1279년)
헝가리의 라슬로 4세 (1272–1290) 재위 기간에 개최된 부다 시노드(1279년)에서는 교황 특사 페르모의 필립이 참석한 가운데,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차별을 강화하는 법령이 내려졌다.[11] 모든 유대인은 공개적으로 나타날 때 윗옷의 왼쪽에 붉은 천을 착용해야 했다.[11] 이를 어긴 유대인과 거래하거나, 유대인과 함께 거주하는 기독교인은 교회 예배 참석이 거부되었고, 유대인에게 직책을 맡기는 기독교인은 파문되었다.[11] 헝가리의 언드라시 3세 (1291–1301)는 포소니움(브라티슬라바) 공동체에 부여한 특권에서 유대인들이 시민의 모든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선언했다.3. 7. 흑사병과 유대인 추방 (1349년)
흑사병 시대(1349년)에 헝가리 유대인들은 나라에서 추방되었다.[15] 앙주의 루이 1세 대왕(1342–1382)은 통치 초반에는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보였으나, 보스니아 정복 이후 현지인들에게 "이단" 보고밀 기독교에서 가톨릭교회로 개종을 강요하려 하면서 헝가리 유대인들에게도 개종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시도에 실패하고 추방했다.[15] 그들은 몰다비아의 알렉산드루 첼 분과 왈라키아의 다노 1세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다노 1세는 그들에게 특별 상업 특권을 부여했다.[15]
몇 년 후, 헝가리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자 유대인들은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그들이 부재한 동안 왕이 ''Tödtbriefe''라는 관습, 즉, 신하 또는 도시의 요청에 따라 유대인의 증서 및 저당 증서를 펜으로 취소하는 관습을 도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루이가 만든 중요한 직책은 "헝가리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의 재판관"이라는 직책으로, 이 직책은 국가의 고위 관리, 팔라틴 및 재무관 중에서 선택되었으며, 부관의 지원을 받았다. 그의 의무는 유대인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그들의 특권을 보호하며, 지기스문트 룩셈부르크 (1387–1437)의 통치 이후 더욱 빈번해진 그들의 불만을 경청하는 것이었다.[15]
3. 8. 헝가리의 루이 1세와 유대인 추방 (1360년)
아르파드 왕조가 단절된 후 헝가리 왕위를 차지한 외국의 왕들의 통치 하에서 헝가리 유대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흑사병 시대(1349년)에 그들은 나라에서 추방되었다.[15] 유대인들은 즉시 재입국되었지만, 다시 박해를 받았고, 1360년에 앙주의 루이 1세 대왕(1342–1382)에 의해 추방되었다.[15] 루이 1세는 통치 초반에는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보였지만, 보스니아 정복 이후 현지인들에게 "이단" 보고밀 기독교에서 가톨릭교회로 개종을 강요하려 하면서 헝가리 유대인들에게도 개종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시도에 실패하고 추방했다. 그들은 몰다비아의 알렉산드루 첼 분과 왈라키아의 다노 1세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다노 1세는 그들에게 특별 상업 특권을 부여했다.[15]3. 9. 지기스문트 룩셈부르크 시대 (1387년 ~ 1437년)
지기스문트 룩셈부르크 시대(1387년 ~ 1437년) 헝가리 유대인들은 왕실의 재정적 필요에 따라 관용과 박해를 반복적으로 경험했다.[15] 왕은 유대인들의 부재 기간 동안 ''Tödtbriefe''라는 관습을 도입했는데, 이는 신하 또는 도시의 요청에 따라 유대인의 증서 및 저당 증서를 취소하는 것이었다.[15] "헝가리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의 재판관" 직책이 만들어져 유대인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그들의 특권을 보호하며, 불만을 경청하는 역할을 담당했다.[15]3. 10. 마차시 1세 시대 (1458년 ~ 1490년)
아르파드 왕조 단절 이후 헝가리 왕위를 차지한 외국의 왕들 통치 하에 헝가리 유대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마차시 코르비누스 (1458–1490)는 벨라 4세의 ''특권''을 재확인하고 헝가리에 유대인 지방 장관 직책을 만들었다.[15] 마차시는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했고, 이들은 헝가리 경제와 문화에 기여했다.4.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1526년 ~ 1740년)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왕국을 꺾으면서 헝가리 유대인들의 운명도 불확실해졌다.[15] 이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했다. 수도 부다에서는 궁정과 귀족들이 일부 부유한 유대인들과 함께 도망쳤다.[15] 술레이만 1세를 앞세운 오스만 군대가 부다에 도착했을 때, 남아 있던 유대인 대표들은 항복의 표시로 도시의 열쇠를 건넸다. 술탄은 부다를 점령한 후, 2,000명 이상의 유대인들을 콘스탄티노플, 플레브나, 소피아 등 오스만 제국의 여러 도시로 분산시켰다.[15] 소피아에는 16세기 후반에 로마니오테, 아슈케나지, 세파르디, "웅가루스" 등 4개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15]
오스만군은 일시적으로 물러났지만,[16] 1541년에 다시 헝가리를 침략하여 부다를 점령했다. 헝가리를 탈출한 유대인들은 국경 너머나 서부 헝가리의 자유 왕립 도시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쇼프로 (외덴부르크) 시민들은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프레스부르크 시도 유대인 추방 허가를 받았다.[15]
1526년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열린 의회에서 서폴러이 야노시가 왕으로 선출되었고, 유대인 추방 칙령이 내려졌으나 시행되지는 않았다. 페르디난트 1세가 왕으로 선출된 프레스부르크 의회에서는 세케슈페헤르바르의 모든 칙령이 무효화되었다.[15]
1529년 페지노크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피의 모독이 제기되어 피고인들이 화형에 처해졌고, 트르나바의 유대인들도 비슷한 운명을 겪고 추방되었다.[15]
오스만 제국 점령 지역의 유대인들은 합스부르크 통치 지역의 유대인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 1546–1590년과 1620–1680년 기간 동안 부다 (오펜)의 공동체는 번성했다. 오스만 시대 말기, 부다에는 약 1,000명의 유대인들이 세 개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다음 표는 오스만 통치 시대 동안 부다에서 유대인 지즈야 세금을 납부하는 가구주의 수를 보여준다.
| 1546 | 1559 | 1562 | 1590 | 1627 | 1633 | 1660 |
|---|---|---|---|---|---|---|
| 50 | 44 | 49 | 109 | 11 | 20 | 80 |
트란실바니아 (당시 독립 공국)의 유대인들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1623년 가브리엘 베슬렌 공은 스페인 유대인들에게 특권 증서를 부여했다.[17] 그러나 1588년부터 트란실바니아에 존재했던 유대교도 세클러 사바티안 공동체는 박해를 받아 1638년에 지하로 숨어들었다.[18]
1572년 막시밀리안 2세는 프레스부르크의 유대인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유대인들은 종교를 포기하지 않고 도시에 남아 있었다. 1582년 시의회는 유대인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1578년 제국 의회 칙령에서는 유대인에게 다른 시민들보다 두 배의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17]
1630년 의회는 유대인들이 세관을 담당하는 것을 금지했고, 1646년 의회는 유대인들이 불신자이며 양심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의 특권에서 제외했다.[17] 1683년 비엔나 포위 기간 동안, 도시에 돌아온 유대인들은 다시 학대를 받았다. 오스만군은 서부 헝가리의 일부 공동체를 약탈하고 구성원들을 노예로 강제 이주했다.[17]
4. 1. 모하치 전투 (1526년)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왕국을 꺾으면서 헝가리 유대인들의 운명도 불확실해졌다.[15] 이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했다. 수도 부다에서는 궁정과 귀족들이 일부 부유한 유대인들과 함께 도망쳤다.[15] 술레이만 1세를 앞세운 오스만 군대가 부다에 도착했을 때, 남아 있던 유대인 대표들은 항복의 표시로 도시의 열쇠를 건넸다. 술탄은 부다를 점령한 후, 2,000명 이상의 유대인들을 콘스탄티노플, 플레브나, 소피아 등 오스만 제국의 여러 도시로 분산시켰다.[15] 소피아에는 16세기 후반에 로마니오테, 아슈케나지, 세파르디, "웅가루스" 등 4개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15]오스만군은 일시적으로 물러났지만,[16] 1541년에 다시 헝가리를 침략하여 부다를 점령했다. 헝가리를 탈출한 유대인들은 국경 너머나 서부 헝가리의 자유 왕립 도시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쇼프로 (외덴부르크) 시민들은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프레스부르크 시도 유대인 추방 허가를 받았다.[15]
1526년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열린 의회에서 서폴러이 야노시가 왕으로 선출되었고, 유대인 추방 칙령이 내려졌으나 시행되지는 않았다. 페르디난트 1세가 왕으로 선출된 프레스부르크 의회에서는 세케슈페헤르바르의 모든 칙령이 무효화되었다.[15]
1529년 페지노크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피의 모독이 제기되어 피고인들이 화형에 처해졌고, 트르나바의 유대인들도 비슷한 운명을 겪고 추방되었다.[15]
오스만 제국 점령 지역의 유대인들은 합스부르크 통치 지역의 유대인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 1546–1590년과 1620–1680년 기간 동안 부다 (오펜)의 공동체는 번성했다. 오스만 시대 말기, 부다에는 약 1,000명의 유대인들이 세 개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다음 표는 오스만 통치 시대 동안 부다에서 유대인 지즈야 세금을 납부하는 가구주의 수를 보여준다.
| 1546 | 1559 | 1562 | 1590 | 1627 | 1633 | 1660 |
|---|---|---|---|---|---|---|
| 50 | 44 | 49 | 109 | 11 | 20 | 80 |
트란실바니아 (당시 독립 공국)의 유대인들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1623년 가브리엘 베슬렌 공은 스페인 유대인들에게 특권 증서를 부여했다.[17] 그러나 1588년부터 트란실바니아에 존재했던 유대교도 세클러 사바티안 공동체는 박해를 받아 1638년에 지하로 숨어들었다.[18]
1572년 막시밀리안 2세는 프레스부르크의 유대인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유대인들은 종교를 포기하지 않고 도시에 남아 있었다. 1582년 시의회는 유대인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1578년 제국 의회 칙령에서는 유대인에게 다른 시민들보다 두 배의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17]
1630년 의회는 유대인들이 세관을 담당하는 것을 금지했고, 1646년 의회는 유대인들이 불신자이며 양심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의 특권에서 제외했다.[17] 1683년 비엔나 포위 기간 동안, 도시에 돌아온 유대인들은 다시 학대를 받았다. 오스만군은 서부 헝가리의 일부 공동체를 약탈하고 구성원들을 노예로 강제 이주했다.[17]
4. 2. 오스만 제국의 헝가리 통치 (1526년 ~ 1686년)
오스만 제국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를 꺾고 헝가리를 통치했다.[15]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고,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수도 부다에 전해지자, 궁정과 귀족들은 일부 부유한 유대인들과 함께 도망쳤다.[15] 대 재상 이브라힘 파샤가 술탄 술레이만 1세를 앞세워 군대를 이끌고 부다에 도착했을 때, 도시에 남아 있던 유대인 대표들은 상복을 입고 그 앞에 나타나 자비를 구하며, 항복의 표시로 황폐하고 방어할 수 없는 성의 열쇠를 그에게 건네주었다.[15] 술탄은 9월 11일 부다에 입성했고, 9월 22일 부다, 에스테르곰, 기타 지역에서 체포된 2,000명 이상의 유대인들을 오스만 제국의 도시들에 분산시키라는 칙령을 내렸다.[15] 그들은 콘스탄티노플, 플레벤(플레브나), 소피아로 보내졌으며, 수십 년 동안 별도의 공동체를 유지했다.[15] 소피아에는 16세기 후반에 로마니오테, 아슈케나지, 세파르디, "웅가루스" 등 4개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15] 소피아에서 유입된 헝가리 유대인들은 나중에 카발라에도 정착했다.헝가리의 일부 유대인들이 아나톨리아로 강제 이주된 반면, 술탄의 접근에 도망친 다른 유대인들은 국경 너머나 서부 헝가리의 자유 왕립 도시에서 피난처를 찾았다.[15] 러요시 2세의 미망인인 마리아 여왕은 유대인의 적들을 선호했다.[15] 외덴부르크(쇼프로) 시민들은 그 도시의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비어 있는 집과 회당을 약탈함으로써 적대 행위를 시작했다.[15] 브라티슬라바(프레스부르크) 시도 또한 여왕으로부터 (1526년 10월 9일) 영토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추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는데, 그들이 투르크족 앞에서 도망칠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15] 유대인들은 11월 9일 프레스부르크를 떠났다.[15]
같은 날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의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서폴러이 야노시 (1526–1540)가 선출되어 페르디난트에 반대하여 왕으로 즉위했다.[15] 이 회기 동안 유대인들을 즉시 국가 전역에서 추방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서폴러이는 이 법률을 비준하지 않았고, 1526년 12월 프레스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서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가 왕으로 선출되었는데 (1526–1664), 이 의회는 서폴러이가 왕으로 선출된 것을 포함하여 세케슈페헤르바르의 모든 칙령을 무효화했다.[15]
페지노크 (Bösing)의 영주가 유대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1529년에는 이러한 불편한 채권자들에 대한 피의 모독이 제기되었다.[15] 지사인 멘델과 헝가리 전역의 유대인들이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들은 화형에 처해졌다.[15] 그 이후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페지노크에 사는 것이 금지되었다. 트르나바 (Nagyszombat)의 유대인들도 곧 비슷한 운명을 겪었는데, 처음에는 의식 살인 혐의로 처벌을 받은 후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1539년 2월 19일).[15]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헝가리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합스부르크가 통치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15] 1546–1590년과 1620–1680년 기간 동안 부다 (오펜)의 공동체는 번성했다. 오스만 시대 말기, 부다에 거주하는 약 1,000명의 유대인들은 아슈케나지, 세파르디, 시리아의 세 개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오스만이 헝가리를 지배하는 동안, 트란실바니아 (당시 독립 공국)의 유대인들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유대인 의사 아브라함 사사의 요청에 따라, 트란실바니아의 가브리엘 베슬렌 공은 아나톨리아 출신의 스페인 유대인들에게 특권 증서 (1623년 6월 18일)를 부여했다.[17] 그러나 1588년부터 트란실바니아에 존재했던 유대교도 세클러 사바티안 공동체는 박해를 받아 1638년에 지하로 숨어들었다.[18]
막시밀리안 2세 (1563–1576)는 1572년 11월 26일, 프레스부르크 (브라티슬라바)의 유대인들을 추방하려 했으며, 그의 칙령은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경우에만 철회될 것이라고 말했다.[17] 그러나 유대인들은 종교를 포기하지 않고 도시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시민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1582년 6월 1일 시의회는 아무도 유대인을 숨기거나 그들과 거래조차 하지 말라고 칙령을 내렸다.[17] 터키 지배 하에 있지 않은 국가의 유대인에 대한 감정은 1578년 의회의 칙령에서 나타나는데, 유대인에게 다른 시민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의 두 배를 부과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17]
1630년 의회가 공포한 법률의 제15조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세관을 담당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이 칙령은 1646년 의회에 의해 확정되었는데, 유대인들이 국가의 특권에서 제외되고, 그들이 불신자이며, 양심이 없다는 이유였다. (veluti jurium regni incapaces, infideles, et nulla conscientia praeditila).[17] 유대인들은 16세기 말에 제국군이 오스만으로부터 부다를 탈환하기 위해 출동했을 때 특별 전쟁세를 내야 했다. 부다 공동체는 이 포위 기간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고, 1601년 9월 제국군이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17] 많은 구성원들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렸고, 그들의 구원은 나중에 독일, 이탈리아, 오스만 유대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17] 유대인들이 평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준 후, 공동체는 부분적으로 재건되었지만, 레오폴트 1세 (1657–1705)가 유대인들을 추방했을 때 (1671년 4월 24일) 합스부르크 영토에서의 더 이상의 발전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는 몇 달 후 (8월 20일) 칙령을 철회했다. 1683년 비엔나 포위 기간 동안, 그 도시에 돌아온 유대인들은 다시 학대를 받았다. 오스만군은 서부 헝가리의 일부 공동체를 약탈하고 구성원들을 노예로 강제 이주했다.[17]
오스만 통치 시대 동안 부다에서 유대인 지즈야 세금을 납부하는 가구주의 수는 다음과 같다.
| 1546 | 1559 | 1562 | 1590 | 1627 | 1633 | 1660 |
|---|---|---|---|---|---|---|
| 50 | 44 | 49 | 109 | 11 | 20 | 80 |
4. 3. 합스부르크 왕가의 헝가리 통치 (1526년 ~ 1740년)
1686년 제국군이 부다를 탈환하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고, 이후 헝가리 전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7] 레오폴트 카를 폰 콜로니치 백작은 유대인을 점진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프레스부르크(1687–1688) 법령으로 유대인에게 이중 과세가 부과되었다.[17] 유대인은 농업, 부동산 소유, 기독교인 하인 고용이 금지되었다.[17] 1690년 빈 정부는 쇼프론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고, 유대인들이 징세관 직책에서 물러나도록 조치했다.[17]프란츠 2세 라코치의 쿠루츠 반란은 헝가리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17] 쿠루츠는 국왕 편에 선 유대인들을 투옥하고 살해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빈, 비너노이슈타트 등으로 피난을 갔다.[17] 국왕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요구했지만, 유대인들에게 반란 진압 자금을 제공하도록 명령했다.[17]
평화 회복 후, 에스테르곰은 성 슈테판을 낳은 도시가 유대인에 의해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추방했다(1712년).[17] 카를 3세는 유대인 수를 줄이려 했고(1725년), 1726년에는 오스트리아 지방에서 유대인 가족당 한 명의 남자만 결혼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발표했다.[19] 이 법령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이 헝가리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모라비아 유대인들은 헝가리에 계속 살면서 모라비아에 세금을 납부하겠다는 서약을 했다.[19] 1734년, 트렌친의 유대인들은 우헤르스키 브로트의 유대인 법정에만 복종하겠다는 비밀 서약을 했다.[19]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 이후 이민 간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인도하도록 명령했다.[19] 그러나 정부는 대규모 이민을 막을 수 없었고, 카운티들은 박해보다는 자비를 구하는 보고서를 보냈다.[19]
국왕은 채광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내쫓으려 했으나(1727년), 유대인들은 계속 정착했고, 왕의 명령은 무시되거나 천천히 이행되었다.[19]
4. 4. 카를 6세 시대 (1711년 ~ 1740년)
카를 6세(1711년 ~ 1740년)의 통치 기간에도 헝가리 유대인들의 처지는 개선되지 않았다.[17] 그는 자신의 영토 내 유대인 인구를 줄이고자 했으며, 1726년에는 오스트리아 지방에서 유대인 가족당 한 명의 남자만 결혼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발표했다.[19] 이는 유대인의 자연 증가를 제한하여 헝가리 유대인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19] 오스트리아 지방에서 결혼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헝가리로 이주하여 북서부 카운티인 니트라(니트라), 프레스부르크(브라티슬라바), 트렌친(트렌친) 등에 정착했다.모라비아 유대인들은 헝가리에서 모라비아 신분으로 계속 거주하며 모라비아에 세금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헝가리에서 결혼과 정착을 허가받았다.[19] 1734년, 트렌친의 유대인들은 운가리쉬-브로트(우헤르스키 브로트)의 유대인 법정에만 복종하겠다는 비밀 서약을 하기도 했다.[19] 시간이 지나면서 이민자들은 오스트리아 지방에 세금 납부를 거부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 이후 이민 간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인도를 명령했다.[19]
카를 6세는 채광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려 했으나,[19] 유대인들은 도시 근처에 계속 정착하며 상품을 전시하고, 사그(사싱코보)에 제련소를 설립하기도 했다.[19] 왕의 추방 명령(1727년 3월)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세 달 후 칙령이 다시 내려져야 했다.[19]
5.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시대 (1740년 ~ 179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1740–1780)의 통치 기간 동안, 1746년 유대인은 부다에서 추방되었고, 헝가리 유대인에게는 "관용세"가 부과되었다.[19] 1749년 9월 1일, 사트마르 주를 제외한 헝가리 유대인 대표단은 프레스부르크에 모여 왕립 위원회를 만났는데, 위원회는 유대인들이 이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나라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통보했다.[19] 겁에 질린 유대인들은 즉시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했고, 위원회는 연간 ƒ 50,000의 세금을 요구했다. 대표단은 항의했고, 여왕이 최소 세금을 ƒ30,000으로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8년 동안 연간 ƒ20,000을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할 수 있었다.[19]
여왕은 8년 조항을 제외하고 이 위원회의 합의를 확인했으며, 기간을 3년으로 변경한 후 5년으로 연장했다. 이처럼 여왕이 비준한 합의는 11월 26일 법원에 회부되었으나, 법원은 유대인들에게 이른바 ''말케겔트''(이디시어로 "여왕의 돈")의 지불을 면제할 권한이 없었다.[19]
새로운 세금에 시달리게 된 유대인들은 억압적인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프레스부르크에 있는 동안 대표단은 혼합 위원회에 자신들의 고충을 제기했다. 그들은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바라냐 및 헤베시 주, 또는 여러 자유 왕립 도시 및 지역에서 살 수 없었으며, 그곳의 시장을 방문할 수도 없었다. 슈툴바이센부르크(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는 하루 동안이라도 도시에 들어갈 경우 1굴덴 30크로이처의 인두세를 내야 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보다 더 높은 다리 통행료와 나룻배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다.[20]
위원회는 이러한 불만을 여왕에게 제출하여 그들이 어떻게 구제될 수 있는지 밝혔으며, 그들의 제안은 이후 여왕의 뜻에 따라 법으로 제정되었다. 여왕은 상헝가리에서만 유대인에게 관용세를 면제했다. 다른 불만 사항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이 세부 사항을 명시하고 정부가 관할 구역 내에서 시정하도록 명령했다.[20]
관용세가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하엘 허쉬는 정부에 헝가리 유대인의 수장이 되어 그들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임명해 줄 것을 청원했다. 정부는 허쉬를 추천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이 세금 납부를 거부할 경우 이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수장을 임명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20]
5년의 기간이 끝나기 전에 유대인 대표단은 프레스부르크(브라티슬라바)에서 다시 위원회를 만나 여왕이 향후 10년 동안 그 금액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세금을 연간 25,000굴덴으로 인상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왕은 유대인들의 갱신된 ''고충''을 기각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더 엄격한 규정을 부과했다. 그들의 ƒ20,000의 세금은 1760년에 ƒ30,000으로, 1772년에 ƒ50,000으로, 1778년에 ƒ80,000으로, 1813년에 ƒ160,000으로 인상되었다.[20]
요제프 2세는 1781년 헝가리 유대인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칙령(Systematica gentis Judaicae regulatiola)을 발표했다.[20] 이 칙령으로 유대인은 광산 도시를 제외한 왕립 자유 도시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고, 전국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20] 법적 문서는 히브리어, 이디시어 대신 라틴어, 독일어, 헝가리어로 작성해야 했으며, 히브리어 책은 예배에만 사용하도록 제한되었다.[20]
유대인에게는 초등학교 설립이 의무화되었고, 국립 학교와 동일한 교과서와 과목을 가르쳐야 했다.[20] 초기에는 기독교인 교사가 채용되었으나, 종교적 문제에는 관여할 수 없었다.[20] 10년 후에는 학교를 다녔다는 증명서가 있어야 사업이나 무역에 종사할 수 있었다.[20] 유대인 청소년은 아카데미와 대학에서 신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을 공부할 수 있었고, 농지를 임대할 수도 있었다.[20]
유대인은 행상을 포함한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고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으며, 인장을 새기고 화약과 초석을 판매하는 것도 허용되었다.[20] 기독교인 주인은 유대인 견습생을 둘 수 있게 되었고, 유대인이 착용하던 특징적인 표시는 폐지되었으며, 칼을 휴대할 수도 있었다.[20] 그러나 종교적 이유로 수염을 기르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그 외의 특징적인 표시는 금지되었다.[20]
1787년, 황제는 모든 유대인이 독일식 성을 선택하도록 명령했고, 1789년에는 징병을 수행하도록 명령했다. 요제프 2세 사후, 일부 왕립 자유 도시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가 나타났지만, 정부의 개입으로 유대인의 권리는 유지되었다.[21]
5. 1. 마리아 테레지아의 유대인 정책 (1740년 ~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1740–1780)의 통치 기간 동안, 1746년 유대인은 부다에서 추방되었고, 헝가리 유대인에게는 "관용세"가 부과되었다.[19] 1749년 9월 1일, 사트마르 주를 제외한 헝가리 유대인 대표단은 프레스부르크에 모여 왕립 위원회를 만났는데, 위원회는 유대인들이 이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나라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통보했다.[19] 겁에 질린 유대인들은 즉시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했고, 위원회는 연간 ƒ 50,000의 세금을 요구했다. 대표단은 항의했고, 여왕이 최소 세금을 ƒ30,000으로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8년 동안 연간 ƒ20,000을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할 수 있었다.[19]여왕은 8년 조항을 제외하고 이 위원회의 합의를 확인했으며, 기간을 3년으로 변경한 후 5년으로 연장했다. 이처럼 여왕이 비준한 합의는 11월 26일 법원에 회부되었으나, 법원은 유대인들에게 이른바 ''말케겔트''(이디시어로 "여왕의 돈")의 지불을 면제할 권한이 없었다.[19]
새로운 세금에 시달리게 된 유대인들은 억압적인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프레스부르크에 있는 동안 대표단은 혼합 위원회에 자신들의 고충을 제기했다. 그들은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바라냐 및 헤베시 주, 또는 여러 자유 왕립 도시 및 지역에서 살 수 없었으며, 그곳의 시장을 방문할 수도 없었다. 슈툴바이센부르크(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는 하루 동안이라도 도시에 들어갈 경우 1굴덴 30크로이처의 인두세를 내야 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보다 더 높은 다리 통행료와 나룻배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다.[20]
위원회는 이러한 불만을 여왕에게 제출하여 그들이 어떻게 구제될 수 있는지 밝혔으며, 그들의 제안은 이후 여왕의 뜻에 따라 법으로 제정되었다. 여왕은 상헝가리에서만 유대인에게 관용세를 면제했다. 다른 불만 사항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이 세부 사항을 명시하고 정부가 관할 구역 내에서 시정하도록 명령했다.[20]
관용세가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하엘 허쉬는 정부에 헝가리 유대인의 수장이 되어 그들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임명해 줄 것을 청원했다. 정부는 허쉬를 추천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이 세금 납부를 거부할 경우 이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수장을 임명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20]
5년의 기간이 끝나기 전에 유대인 대표단은 프레스부르크(브라티슬라바)에서 다시 위원회를 만나 여왕이 향후 10년 동안 그 금액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세금을 연간 25,000굴덴으로 인상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왕은 유대인들의 갱신된 ''고충''을 기각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더 엄격한 규정을 부과했다. 그들의 ƒ20,000의 세금은 1760년에 ƒ30,000으로, 1772년에 ƒ50,000으로, 1778년에 ƒ80,000으로, 1813년에 ƒ160,000으로 인상되었다.[20]
5. 2. 요제프 2세의 유대인 정책 (1780년 ~ 1790년)
요제프 2세는 1781년 헝가리 유대인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칙령(Systematica gentis Judaicae regulatiola)을 발표했다.[20] 이 칙령으로 유대인은 광산 도시를 제외한 왕립 자유 도시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고, 전국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20] 법적 문서는 히브리어, 이디시어 대신 라틴어, 독일어, 헝가리어로 작성해야 했으며, 히브리어 책은 예배에만 사용하도록 제한되었다.[20]유대인에게는 초등학교 설립이 의무화되었고, 국립 학교와 동일한 교과서와 과목을 가르쳐야 했다.[20] 초기에는 기독교인 교사가 채용되었으나, 종교적 문제에는 관여할 수 없었다.[20] 10년 후에는 학교를 다녔다는 증명서가 있어야 사업이나 무역에 종사할 수 있었다.[20] 유대인 청소년은 아카데미와 대학에서 신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을 공부할 수 있었고, 농지를 임대할 수도 있었다.[20]
유대인은 행상을 포함한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고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으며, 인장을 새기고 화약과 초석을 판매하는 것도 허용되었다.[20] 기독교인 주인은 유대인 견습생을 둘 수 있게 되었고, 유대인이 착용하던 특징적인 표시는 폐지되었으며, 칼을 휴대할 수도 있었다.[20] 그러나 종교적 이유로 수염을 기르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그 외의 특징적인 표시는 금지되었다.[20]
1787년, 황제는 모든 유대인이 독일식 성을 선택하도록 명령했고, 1789년에는 징병을 수행하도록 명령했다. 요제프 2세 사후, 일부 왕립 자유 도시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가 나타났지만, 정부의 개입으로 유대인의 권리는 유지되었다.[21]
6. 헝가리 혁명과 유대인 해방 (1790년 ~ 1867년)
헝가리 민족주의 운동과 함께 유대인 해방 운동이 전개되었다.
1790년 11월 29일, 헝가리 유대인들은 레오폴트 2세에게 다른 시민들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21] 국왕은 헝가리와 모라바 사무국에 의견을 물었고, 12월 2일 국가 의회는 유대인 보호 의지를 담은 법안을 작성했다.[21] 나지솜바트(트르나바)는 국회에 도시 특권 보호를 요구하는 각서를 제출했지만, 국회는 유대인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21]
유대인들은 국왕의 결정이 유리할 것이라 확신하며 1790년 11월 15일 국왕 대관식 날 축하 행사를 열었다.[21] 1791년 1월 10일, 국왕은 국회 법안을 승인했고, 2월 5일 스테판 아첼 판사가 "De Judaeis" 법을 낭독했다.[21] 이 법은 헝가리와 그 부속 국가 내 유대인들이 1790년 1월 1일 당시와 동일한 조건으로 모든 왕립 자유 도시와 기타 지역(왕립 광산 도시 제외)에 머물 수 있도록 규정했다.[21]
''De Judaeis'' 법은 유대인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문제 해결에 대한 확신을 주었기에 감사하게 받아들여졌다.[21] 그러나 헝가리 유대인의 상황 개선은 페르디난트 1세 치하인 1839-1840년 국회 회기까지 반세기 동안 지연되었다.[21] 1815년에서 1840년 사이에 헝가리의 유대인 인구는 왕의 관용에 대한 인식으로 인한 이민 증가로 약 80% 증가했다.[22]


페스트 유대인들의 청원에 따라, 1839년 6월 10일 필립 야코보비치는 유대인들이 헝가리어를 채택하려 한다면 다른 헝가리 시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지시를 초안했다.[21] 이때부터 학교에서 헝가리어 교육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모리츠 블로흐(발라기)는 오경을 헝가리어로 번역했고, 모리츠 로젠탈은 시편과 ''피르케 아보트''를 번역했다.[23] 다양한 공동체가 헝가리어 독서 모임을 설립했고, 헝가리 의상과 언어가 점점 더 많이 채택되었다. 많은 공동체가 그들의 봉인과 문서에 헝가리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일부 자유주의 랍비들은 심지어 그 언어로 설교를 시작했다.[23]
1848년 3월 초부터 유대인들은 국민 방위대에 참여했다.[23] 페슈트에서는 유대인 국민 방위대가 별도의 부대를 형성했다.[23] 파파의 국민 방위대가 크로아티아인에 대항하여 동원되었을 때, 파파의 랍비인 레오폴트 뢰프는 헝가리 대열에 합류하여 격려의 말로 동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23] 유대인들은 자원 부대, 혼베드, 란트슈룸 등 헝가리 군대에서 복무하며 조국을 위해 싸웠다.[23] 헝가리 군대에서 유대인 병사들의 용맹함은 죄르지 클라프카 장군과 아르투르 괴르게이 장군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23]
헝가리 유대인들은 군 복무 뿐만 아니라, 자금 지원을 통해서도 조국에 헌신했다.[24] 공동체와 개인, 케브라 카디샤 및 기타 유대인 단체들은 은과 금, 갑옷과 식량을 기부했고, 병사들에게 옷과 음식을 제공했으며, 헝가리 야영지에 린트와 기타 의료 용품을 공급했다.[24]
유대인 해방을 위해 헝가리의 모든 유대인들은 1848년 7월 5일 페스트에서 열린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회에 해방을 청원했지만, 효과가 없었다.[24] 세게드의 국민 의회는 1849년 7월 28일 유대인의 해방을 허가했고, 유대인들은 완전한 시민권을 얻었다.[24] 이 법안에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결혼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었는데, 러요시 코슈트와 개혁당 모두가 옹호했다.[24]
하지만 유대인들의 시민적 자유는 빌라고스 항복 이후 2주만에 끝났다.[24] 헝가리 혁명 참여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율리우스 야코프 폰 하이노 원수는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전쟁세를 부과했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23][24]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쟁세를 면제했지만, 헝가리 유대인들은 유대교 학교 기금으로 100만 플로린을 기부해야 했다.[24]
합스부르크가가 헝가리를 통치하는 동안 유대인 해방은 연기되었다.[25] 1859년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에서 패배하자 활동가들은 자유를 요구했다. 그해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의장을 맡은 내각은 유대인의 지위를 시대에 맞게 규제하되, 여러 지역과 지방의 상황을 고려하여 규제해야 한다고 칙령을 내렸다. 1861년 4월 2일 황제가 국회를 소집했을 때 유대인들은 해방을 추진했지만, 국회가 조기에 해산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25]
헝가리의 절대주의 10년(1849–1859) 동안 유대인들은 학교를 설립했고, 대부분은 훈련된 교사들이 담당했다. 유대인 학교 기금을 바탕으로 정부는 셔토럴러우이헤이, 테메슈바르(티미쇼아라), 페치, 페슈트에 모범 학교를 설립했다. 페슈트에는 1859년 이스라엘 국립 교사 세미나리가 설립되었으며, 아브라함 레더러, 하인리히 도이치, 요제프 바노치가 교장을 역임했다.[25]
1861년 의회가 해산되면서 유대인 해방은 프란츠 요제프의 대관식으로 연기되었다. 1867년 12월 22일, 이 문제는 하원에 상정되었고, 칼만 티서와 지그몬트 베르나트의 긍정적인 보고서에 따라 해방을 지지하는 법안이 채택되었고, 다음 날 상원을 통과했다.[25] 주요 신문 편집자이자 언론인인 막사(막시밀리안) 팔크는 1867년 해방이후 비엔나에서 헝가리로 돌아왔다. 그는 1875년부터 1905년까지 전국적인 정치인이었다.
1877년 10월 4일, 부다페스트 유대교 연구 대학교가 부다페스트에서 개교했다. 이 대학교는 여전히 운영 중이며, 2007년 10월 4일에 130주년을 기념했다. 개교 이후 중앙 및 동유럽 전체에서 유일한 유대교 연구 기관이었다.
1890년 헝가리 인구 조사에서 유대인 인구의 64.0%는 모국어로 헝가리어를 사용한다고 응답했고, 33.1%는 독일어,[26] 1.9%는 슬로바키아어, 0.8%는 루마니아어, 0.2%는 루테니아어를 사용한다고 응답했다.
6. 1. 레오폴트 2세와 유대인 문제 (1790년 ~ 1792년)
헝가리 유대인들은 1790년 11월 29일 빈에서 레오폴트 2세에게 다른 시민들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전달했다.[21] 레오폴트 2세는 헝가리와 모라바의 사무국에 의견을 물었고, 이 문제는 12월 2일 국가 의회에 회부되었다.[21] 국회는 유대인을 보호할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법안을 작성했으나, 나지솜바트(트르나바)는 국회에 도시의 특권을 보호할 것을 요구하는 추가 각서를 제출했다.[21]유대인들은 국왕의 결정이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1790년 11월 15일 국왕의 대관식 날 축하 행사를 열었다.[21] 1791년 1월 10일, 국왕은 국회의 법안을 승인했고, 2월 5일 회의에서 스테판 아첼 판사가 다음 법을 낭독했다.[21]
"유대인의 상황이 [...] 규제될 수 있도록 [...] 국회는 국왕의 승인을 받아, 헝가리와 그에 속한 국가의 경계 내에 있는 유대인들이 [...] 1790년 1월 1일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조건으로 유지되도록 결정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어디에서든 추방되었다면, 그들은 소환되어야 한다."[21]
이로써 1790–1791년 국회 법률의 38조를 구성하는 ''De Judaeis'' 법이 발효되었다.[21] 이 법은 유대인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그들의 문제가 곧 규제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21] 1791년 2월 7일, 국회는 위원회를 임명했지만, 헝가리 유대인의 상황 개선은 페르디난트 1세 치하인 1839–1840년 국회 회기 동안에야 이루어졌다.[21]
6. 2. De Judaeis 법 (1791년)
1790년 11월 29일, 헝가리 유대인들은 레오폴트 2세에게 다른 시민들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21] 국왕은 헝가리와 모라바 사무국에 의견을 물었고, 12월 2일 국가 의회는 유대인 보호 의지를 담은 법안을 작성했다.[21] 나지솜바트(트르나바)는 국회에 도시 특권 보호를 요구하는 각서를 제출했지만, 국회는 유대인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21]유대인들은 국왕의 결정이 유리할 것이라 확신하며 1790년 11월 15일 국왕 대관식 날 축하 행사를 열었다.[21] 1791년 1월 10일, 국왕은 국회 법안을 승인했고, 2월 5일 스테판 아첼 판사가 "De Judaeis" 법을 낭독했다.[21] 이 법은 헝가리와 그 부속 국가 내 유대인들이 1790년 1월 1일 당시와 동일한 조건으로 모든 왕립 자유 도시와 기타 지역(왕립 광산 도시 제외)에 머물 수 있도록 규정했다.[21]
''De Judaeis'' 법은 유대인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문제 해결에 대한 확신을 주었기에 감사하게 받아들여졌다.[21] 그러나 헝가리 유대인의 상황 개선은 페르디난트 1세 치하인 1839-1840년 국회 회기까지 반세기 동안 지연되었다.[21] 1815년에서 1840년 사이에 헝가리의 유대인 인구는 왕의 관용에 대한 인식으로 인한 이민 증가로 약 80% 증가했다.[22]
6. 3. 1848년 헝가리 혁명과 유대인
1848년 3월 초부터 유대인들은 국민 방위대에 참여했다.[23] 페슈트에서는 유대인 국민 방위대가 별도의 부대를 형성했다.[23] 파파의 국민 방위대가 크로아티아인에 대항하여 동원되었을 때, 파파의 랍비인 레오폴트 뢰프는 헝가리 대열에 합류하여 격려의 말로 동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23] 유대인들은 자원 부대, 혼베드, 란트슈룸 등 헝가리 군대에서 복무하며 조국을 위해 싸웠다.[23] 헝가리 군대에서 유대인 병사들의 용맹함은 죄르지 클라프카 장군과 아르투르 괴르게이 장군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23]헝가리 유대인들은 군 복무 뿐만 아니라, 자금 지원을 통해서도 조국에 헌신했다.[24] 공동체와 개인, 케브라 카디샤 및 기타 유대인 단체들은 은과 금, 갑옷과 식량을 기부했고, 병사들에게 옷과 음식을 제공했으며, 헝가리 야영지에 린트와 기타 의료 용품을 공급했다.[24]
유대인 해방을 위해 헝가리의 모든 유대인들은 1848년 7월 5일 페스트에서 열린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회에 해방을 청원했지만, 효과가 없었다.[24] 세게드의 국민 의회는 1849년 7월 28일 유대인의 해방을 허가했고, 유대인들은 완전한 시민권을 얻었다.[24] 이 법안에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결혼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었는데, 러요시 코슈트와 개혁당 모두가 옹호했다.[24]
하지만 유대인들의 시민적 자유는 빌라고스 항복 이후 2주만에 끝났다.[24] 헝가리 혁명 참여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율리우스 야코프 폰 하이노 원수는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전쟁세를 부과했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23][24]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쟁세를 면제했지만, 헝가리 유대인들은 유대교 학교 기금으로 100만 플로린을 기부해야 했다.[24]
6. 4. 유대인 해방 (1867년)
합스부르크가가 헝가리를 통치하는 동안 유대인 해방은 연기되었다.[25] 1859년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에서 패배하자 활동가들은 자유를 요구했다. 그해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의장을 맡은 내각은 유대인의 지위를 시대에 맞게 규제하되, 여러 지역과 지방의 상황을 고려하여 규제해야 한다고 칙령을 내렸다. 1861년 4월 2일 황제가 국회를 소집했을 때 유대인들은 해방을 추진했지만, 국회가 조기에 해산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25]헝가리의 절대주의 10년(1849–1859) 동안 유대인들은 학교를 설립했고, 대부분은 훈련된 교사들이 담당했다. 유대인 학교 기금을 바탕으로 정부는 셔토럴러우이헤이, 테메슈바르(티미쇼아라), 페치, 페슈트에 모범 학교를 설립했다. 페슈트에는 1859년 이스라엘 국립 교사 세미나리가 설립되었으며, 아브라함 레더러, 하인리히 도이치, 요제프 바노치가 교장을 역임했다.[25]
1861년 의회가 해산되면서 유대인 해방은 프란츠 요제프의 대관식으로 연기되었다. 1867년 12월 22일, 이 문제는 하원에 상정되었고, 칼만 티서와 지그몬트 베르나트의 긍정적인 보고서에 따라 해방을 지지하는 법안이 채택되었고, 다음 날 상원을 통과했다.[25] 주요 신문 편집자이자 언론인인 막사(막시밀리안) 팔크는 1867년 해방이후 비엔나에서 헝가리로 돌아왔다. 그는 1875년부터 1905년까지 전국적인 정치인이었다. 반유대주의 정당이 의회에 진출했지만, 나라의 정치 엘리트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선동은 성공하지 못했다(티서에슬라르 사건 참조).
1877년 10월 4일, 부다페스트 유대교 연구 대학교가 부다페스트에서 개교했다. 이 대학교는 여전히 운영 중이며, 2007년 10월 4일에 130주년을 기념했다. 개교 이후 중앙 및 동유럽 전체에서 유일한 유대교 연구 기관이었다.
1890년 헝가리 인구 조사에서 유대인 인구의 64.0%는 모국어로 헝가리어를 사용한다고 응답했고, 33.1%는 독일어,[26] 1.9%는 슬로바키아어, 0.8%는 루마니아어, 0.2%는 루테니아어를 사용한다고 응답했다.
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 (1867년 ~ 1918년)
헝가리 유대인들은 상업, 금융, 산업,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48년 헝가리 혁명 이전에는 토지 소유가 금지되어 사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1910년에는 상인의 60.96%, 제책업자의 58.11%, 여관 주인의 41.75%가 유대인이었으며, 헝가리 의사의 48.5%가 유대인이었다.
19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유대인의 수는 911,227명으로 헝가리 인구의 4.99%를 차지했다. 이는 1890년 인구 조사 이후 28.7% 증가한 수치이며, 전체 인구 증가율보다 높았다. 유대인 인구의 대다수(75.7%)는 헝가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으며, 인구 조사에서 민족적으로 헝가리인으로 간주되었다.
1910년 헝가리 유대인의 약 22.35%가 부다페스트에 거주했다. 부다페스트는 뉴욕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유대인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도하니 거리 회당, 룸바흐 거리 회당, 카진치 거리 정통 유대교 회당 등 주요 유대교 회당이 부다페스트에 있었다.
헝가리 유대인들은 시온주의에 반대하며 헝가리 사회에 통합되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사업, 문화, 정치에서 놀라운 업적을 달성했다. 1910년까지 유대인은 상업 사업주 중 54%, 은행 및 금융 기관 이사 및 소유주 중 85%를 차지했다. 또한, 전체 의사의 48.5%, 변호사/법률가의 49.4%를 차지했다. 이슈트반 티사 총리 내각에는 사무 하자이, 야노스 하르카니, 야노스 텔레츠키 등 세 명의 유대인 장관이 임명되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1783년 이전에 성(姓)이 없었다. 요제프 2세 황제는 1783년부터 유대인들에게 독일식 성을 선택하거나 지역 위원회에서 부여하도록 명령했다. 헝가리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1840년에서 1849년 사이에 성씨의 헝가리화가 일어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성씨를 독일식에서 헝가리식으로 변경했다.
7. 1. 유대인의 사회 경제적 발전
헝가리 유대인들은 상업, 금융, 산업,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48년 헝가리 혁명 이전에는 토지 소유가 금지되어 사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1910년에는 상인의 60.96%, 제책업자의 58.11%, 여관 주인의 41.75%가 유대인이었으며, 헝가리 의사의 48.5%가 유대인이었다.19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유대인의 수는 911,227명으로 헝가리 인구의 4.99%를 차지했다. 이는 1890년 인구 조사 이후 28.7% 증가한 수치이며, 전체 인구 증가율보다 높았다. 유대인 인구의 대다수(75.7%)는 헝가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으며, 인구 조사에서 민족적으로 헝가리인으로 간주되었다.
1910년 헝가리 유대인의 약 22.35%가 부다페스트에 거주했다. 부다페스트는 뉴욕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유대인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도하니 거리 회당, 룸바흐 거리 회당, 카진치 거리 정통 유대교 회당 등 주요 유대교 회당이 부다페스트에 있었다.
헝가리 유대인들은 시온주의에 반대하며 헝가리 사회에 통합되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사업, 문화, 정치에서 놀라운 업적을 달성했다. 1910년까지 유대인은 상업 사업주 중 54%, 은행 및 금융 기관 이사 및 소유주 중 85%를 차지했다. 또한, 전체 의사의 48.5%, 변호사/법률가의 49.4%를 차지했다. 이슈트반 티사 총리 내각에는 사무 하자이, 야노스 하르카니, 야노스 텔레츠키 등 세 명의 유대인 장관이 임명되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1783년 이전에 성(姓)이 없었다. 요제프 2세 황제는 1783년부터 유대인들에게 독일식 성을 선택하거나 지역 위원회에서 부여하도록 명령했다. 헝가리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1840년에서 1849년 사이에 성씨의 헝가리화가 일어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성씨를 독일식에서 헝가리식으로 변경했다.
7. 2. 헝가리 유대교의 분열
7. 3. 반유대주의의 등장
8. 제1차 세계 대전과 혁명 (1914년 ~ 1920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1만 명 이상의 헝가리 유대인들이 헝가리를 위해 싸우다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49] 그러나 이러한 희생은 전후 혼란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빛이 바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와 해체 이후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에 따라 영토와 인구의 상당 부분을 이웃 국가에 할양해야 했고, 이는 헝가리인들에게 깊은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50]
전후 카로이 미하이가 이끄는 최초의 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나, 1919년 3월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당 연립 정부 구성원들이 카로이를 축출하고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중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쿤 벨러, 자뮬리 티보르, 란들러 예뇌 등 유대인 혈통의 지도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는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악화시키고 유대인-볼셰비키 음모론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50]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은 초기에는 부다페스트의 진보적 엘리트 계층과 프롤레타리아 계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반체제 인사들을 억압하기 위한 "혁명적 테러"를 자행하고, 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가 점령한 영토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실패하면서 민심을 잃었다. 쿤 정권은 루마니아 군대가 부다페스트에 입성하면서 4개월 반 만에 무너졌고, 호르티 미클로시가 이끄는 반동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헝가리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동맹으로 지목된 유대인, 진보주의자, 농민 등에게 보복을 가했는데, 이를 백색 테러라고 부른다.[51] 이 테러로 인해 쿤 정권의 탄압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50][54][55]
8. 1. 제1차 세계 대전과 헝가리 유대인
8. 2.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1만 명 이상의 헝가리 유대인들이 헝가리를 위해 싸우다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49] 그러나 이러한 헝가리 유대인들의 희생은 전후 혼란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빛이 바랬다.[10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와 해체 이후,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에 따라 영토와 인구의 상당 부분을 주변국에 할양해야 했고, 이는 헝가리인들에게 깊은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50]머테이 카로이가 이끌던 전후 첫 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나, 1919년 3월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당 연립 정부 구성원들이 카로이를 축출하고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중단되었다.[110] 이는 헝가리 유대인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은 초기에는 부다페스트의 진보적인 엘리트 계층과 프롤레타리아 계층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으나, 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가 점령한 영토를 되찾으려는 노력은 거의 실패했다. 특히 '혁명적 테러' 실행을 위해 조직된 잔혹한 젊은이들의 집단은 반체제 인사들을 위협하고 억압했다.[110] 쿤 벨러, 자뮬리 티보르, 란들러 예뇌 등 혁명 지도자 대부분은 유대인 혈통이었으며, 이는 유대인-볼셰비키 음모론을 확산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50]
쿤 벨러 정권은 루마니아 군대가 부다페스트에 입성하면서 4개월 반 만에 무너졌고, 호르티 미클로시가 이끄는 반동 세력이 뒤를 이었다.[110] 짧은 혁명 기간 동안의 고통과 극우 민족주의 운동의 선동은 비유대인 헝가리인들 사이에 유대인에 대한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기존의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강화했다.[50] 1919년 7월부터 호르티의 군대는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맹자들에게 보복을 가했으며, 유대인, 진보주의자, 농민 등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학살은 백색 테러로 알려져 있다.[51] 호르티의 백색 테러 가담 정도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지만,[52] 백색 테러는 쿤 정권의 탄압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50][54][55]
8. 3. 백색 테러 (1919년 ~ 1920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1만 명 이상의 헝가리 유대인들이 헝가리를 위해 싸우다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109][49] 그러나 이러한 희생은 전후 혼란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빛이 바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와 해체 이후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에 따라 영토의 3분의 2와 인구의 3분의 2를 이웃 국가에 할양해야 했고, 이는 헝가리인들에게 깊은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110][50]전후 최초의 민주 정부는 카로이 미하이가 이끌었으나, 1919년 3월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당 연립 정부에 의해 전복되었다. 쿤 벨러가 이끄는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은 초기에는 인기가 있었지만, 반체제 인사들을 억압하기 위한 "혁명적 테러"를 자행하고, 거르버이 샨도르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유대인 혈통이라는 점은 유대인-볼셰비키 음모론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110][50]
쿤 정권이 붕괴된 후, 호르티 미클로시가 이끄는 반동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1919년 7월부터 호르티의 국민군 장교들은 공산주의자, 유대인, 진보주의자, 농민 등을 대상으로 잔혹한 보복을 자행했는데, 이를 백색 테러라고 한다.[111][51] 이 테러로 인해 수천 명이 희생되었으며, 이는 쿤 정권의 탄압보다 훨씬 더 큰 규모였다.[110][114][115][50][54][55] 호르티의 개인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는 폭력을 부인하지 않았다.[112][52]
9. 전간기 (1920년 ~ 1939년)


1920년대 헝가리 사회는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 체제 하에 점차 우경화되며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강화되었다. 당시 유대인은 전체 대학생의 4분의 1, 부다페스트 공과대학교의 43%를 차지할 정도로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다.[116] 1920년에는 헝가리 의사의 60%, 변호사의 51%, 개인적으로 고용된 엔지니어와 화학자의 39%, 편집자와 언론인의 34%, 음악가의 29%가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밝혔다.[116]
그러나 이러한 유대인의 성공은 헝가리 사회 내에서 반유대주의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호르티 제독은 스스로 "반유대주의자"라고 공공연히 밝히며, 헝가리의 주요 산업, 금융, 상업 시설이 유대인의 손에 있다는 것에 불만을 드러냈다.
1920년, 호르티 정부는 뉴머러스 클로시스 법을 통과시켜 대학 내 유대인 학생 비율을 5% 이하로 제한했다.[110] 이는 유대인의 사회 진출을 억제하려는 명백한 차별 정책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는 많은 영토를 잃었고, 슬로바키아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 등 다른 소수 민족들이 헝가리에서 분리되었다. 이로 인해 헝가리에 남은 가장 눈에 띄는 소수 민족은 유대인이 되었고,[110] 이는 유대인들이 경제, 언론, 전문직 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과 맞물려, 유대인을 국가 문제의 희생양으로 삼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110]
헝가리 지도자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와 동맹을 맺으면서, 반유대주의 정책은 더욱 억압적으로 변했다.[110]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헝가리 국가사회당과 화살십자당과 같은 파시스트 단체들이 생겨났다.
9. 1. 호르티 정권과 유대인 정책
호르티 미클로시 정권 시기 헝가리에서는 반유대주의 정책이 강화되며 유대인들의 사회 경제적 활동이 제한되었다.[50] 1920년 호르티 정부는 "뉴머러스 클로시스" 법을 통과시켜 대학 내 유대인 학생 비율을 5% 이하로 제한했다.[50] 이는 당시 유대인이 전체 대학생의 4분의 1, 부다페스트 공과대학교 학생의 43%를 차지하는 상황에서[56], 유대인의 사회 진출을 억제하려는 조치였다.1920년 당시 헝가리 의사의 60%, 변호사의 51%, 개인적으로 고용된 엔지니어와 화학자의 39%, 편집자와 언론인의 34%, 음악가의 29%가 유대인이었다.[56] 이러한 유대인의 높은 사회적 지위는 헝가리 사회 내에서 불만을 야기했다. 호르티 제독은 스스로를 "반유대주의자"라고 선언하며, 헝가리의 모든 주요 산업, 금융, 상업 시설이 유대인의 손에 있다는 것에 불만을 표출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트리아농 조약으로 인해 헝가리는 많은 영토를 잃었고, 헝가리 내 소수 민족 중 유대인이 가장 눈에 띄는 집단이 되었다.[50] 이는 유대인이 경제, 언론, 전문직 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과 맞물려, 유대인을 국가 문제의 희생양으로 삼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50]
헝가리 지도자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와 동맹을 맺으면서, 반유대주의 정책은 더욱 억압적으로 변했다.[50] 제2차 세계 대전 사이 헝가리 국가사회당과 화살십자당과 같은 파시스트 단체들이 생겨났다.
9. 2. 누메루스 클라우수스 법 (1920년)
1920년 호르티 미클로시 정부는 소수 민족 학생들의 수를 인구 규모에 비례하여 제한하는 누메루스 클라우수스 법을 통과시켜, 대학 내 유대인 등록을 5% 이하로 제한했다.[110] 당시 유대인은 전체 대학생의 4분의 1, 부다페스트 공과대학교 학생의 43%를 차지했다.[56] 또한, 1920년대 헝가리 의사의 60%, 변호사의 51%, 개인적으로 고용된 엔지니어와 화학자의 39%, 편집자와 언론인의 34%, 음악가의 29%가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밝혔다.[116]이러한 상황은 헝가리 사회에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호르티 제독은 자신이 "반유대주의자"라고 선언했고, 총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헝가리에서 모든 공장, 은행, 큰 재산, 사업, 연극, 언론, 상업 등 모든 것이 유대인의 손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유대인들은 헝가리, 특히 해외에서 반영된 이미지가 되어야 한다."라고 언급했다.[56]
트리아농 조약으로 인해 슬로바키아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 등 다른 소수 민족이 헝가리에서 분리되면서, 유대인은 헝가리에 남은 가장 눈에 띄는 소수 민족이 되었다. 이는 1919년 공산주의 독재 정권의 지도력뿐만 아니라 경제, 언론, 직업에서 유대인의 두드러진 역할과 맞물려, 유대인을 국가 문제의 희생양으로 삼는 결과를 초래했다.[50] 이후 헝가리 지도자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와 동맹을 맺으면서, 반유대주의 정책은 더욱 억압적으로 변했다.[50]
9. 3. 반유대주의 법안 (1938년 ~ 1942년)
1938년부터 미클로시 호르티 치하의 헝가리는 독일의 뉘른베르크법을 모방하여 일련의 반유대주의 조치를 통과시켰다.[110]- '''"제1차 유대인법"''' (1938년 5월 29일)은 각 상업 기업, 언론, 의사, 엔지니어, 변호사 등의 유대인 수를 20%로 제한했다.[110]
- '''"제2차 유대인법"''' (1939년 5월 5일)은 처음으로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정의했다. 유대인 출생 조부모가 두 명, 세 명 또는 네 명인 개인은 유대인으로 선언되었다.[110] 제2차 유대인 법 시행 이전에는 보르쇼드 현(미슈콜츠 제외) 유대인 인구의 약 31%인 2496명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법안이 통과되고 한 달도 안 되어 열린 다음 선거에서 특권을 가진 유대인은 38명에 불과했다.[110]
- '''"제3차 유대인법"''' (1941년 8월 8일)은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결혼 및 성관계를 금지했다.[110]
- '''"제4차 유대인법'''" (1942년 9월 6일)은 유대인의 토지 소유 및 구매를 금지했다.
이러한 법률로 인해 정부는 어떤 수준에서도 유대인을 고용할수 없었고, 신문 편집자가 될 수 없었으며, 극장 및 영화 배우,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의 수는 6%로 제한되었다. 사기업은 유대인을 12% 이상 고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25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이 소득을 잃었다.[110]
1941년 1월 31일 인구 조사에 따르면, 당시 인종법에 따라 유대인으로 간주된 인구는 13,643,621명 중 6.2%인 846,000명이었다.[60] 1941년 4월, 헝가리는 점령된 유고슬라비아에서 바츠카 (바치카), 무라쾨즈 (메지무르예주) 및 무라비데크 (프레크무르예) 지역을 병합했는데, 여기에는 15,000명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1,025,508명이 있었다(데이터는 1941년 10월 기준).[60] 이는 1941년 5월 헝가리 국경 내에 최소한 절반 이상이 유대인으로, 따라서 유대인으로 간주되는 861,000명(5.87%)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중 725,000명(4.94%)은 유대교 율법에 따른 유대인이었다(1938년 이전 헝가리에서는 4.30%, 1938–1940년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로부터 병합된 영토에서는 7.15%, 194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병합된 영토에서는 1.38%).
1920년, 호르티의 정부는 인구의 크기에 비례하는 소수 학생들의 수에 제한을 두는 "뉴머러스 클로시스" 법을 통과시켰고, 따라서 대학에서의 유대인 등록을 5% 이하로 제한했다.[110] 당시 유대인은 전체 대학생의 4분의 1, 부다페스트 공과대학교의 43%를 차지했고, 1920년에는 헝가리 의사의 60%, 변호사의 51%, 개인적으로 고용된 엔지니어와 화학자의 39%, 편집자와 언론인의 34%, 음악가의 29%가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밝혔다.[116]
10.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1939년 ~ 1945년)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고, 헝가리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겪었다.[64] 1941년 인구 조사에서 10,000~20,000명의 유대인 난민이 포함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850년 이후 합법적인 거주를 증명할 수 없는 약 20,000명은 남부 폴란드로 추방되어, 그곳에 버려지거나 1941년 7월 15일부터 8월 12일 사이에 독일군에게 넘겨졌다.[64] 이들 대다수는 8월 말 카메네츠-포돌스키 학살에서 학살되었다.[64][65]
1942년 1월, 헝가리군과 "젠다르메리(헌병)"는 노비 사드 학살을 일으켜 2,550~2,850명의 세르비아인, 700~1,250명의 유대인, 60~130명의 기타 사람들을 살해했다.[64] 전쟁 중 유대인들은 "노동 부대"에 소집되어 철도 수리, 공항 건설, 지뢰밭 청소 등 위험한 작업에 동원되었다.[64] 약 42,000명의 유대인 노동 부대 군인들이 소련 전선에서 사망했으며, 많은 이들이 혹독한 환경과 잔혹한 대우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64]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은 독일의 압력에 저항하여 헝가리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추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1944년 3월 독일군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64] 아돌프 히틀러는 호르티를 회담에 소환하여 헝가리의 더 큰 묵인을 요구했고, 독일 전차가 부다페스트로 진입했다.[64] 되메 스토야이 정부가 수립되고 화살십자당이 합법화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본격화되었다.[64] 내무부는 반유대주의 정치인 라슬로 엔드레와 라슬로 바키의 손에 넘어갔고, 안도르 야로스 또한 열성적인 반유대주의자였다.[64]
독일과 헝가리 당국은 유대인 평의회(Judenrats)를 설립했고, 1944년 4월, 되메 스토야이 총리와 독일은 헝가리가 30만 명의 유대인 노동자를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64] 며칠 후, 엔드레, 바키, 아돌프 아이히만은 헝가리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64]
1943년 BBC 폴란드 서비스가 대학살에 대해 방송했지만, BBC 헝가리 서비스는 유대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66] 대부분의 헝가리인이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에 유대인을 언급하면 많은 사람들이 소외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66] 대부분의 유대인은 홀로코스트가 헝가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67] 1944년 5월, 아우슈비츠로의 추방이 시작되었을 때, 시온주의 청소년 운동은 헝가리 유대인의 루마니아 밀수를 조직하여 약 4,000명의 헝가리 유대인이 루마니아로 피신했다.[68] 그러나 루마니아 역시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루마니아 통제 지역에서 38만~40만 명의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되었다.[69]
전쟁 이후 부다페스트에서 약 119,000명의 유대인이 해방되었고, 시골 지역의 강제 노동자 20,000명이 해방되었다.[92] 1941~1944년 국경 내 유대인으로 간주된 861,000명의 원래 인구에서 약 255,000명이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92]
10. 1. 헝가리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0. 2. 헝가리 유대인에 대한 박해
헝가리에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점차 강화되었다. 1941년 인구 조사에서 10,000~20,000명의 유대인 난민이 포함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64] 1850년 이후 합법적인 거주를 증명할 수 없는 약 20,000명의 유대인은 남부 폴란드로 추방되거나 1941년 7월 15일부터 8월 12일 사이에 독일군에게 넘겨졌다.[64] 이들 대다수는 카메니에츠-포돌스크(카메네츠-포돌스키 학살)에서 학살되었다.[64]1942년 1월에는 노비 사드 학살에서 헝가리군과 헌병에 의해 2,550~2,850명의 세르비아인, 700~1,250명의 유대인 등이 살해되었다.
전쟁 중 유대인들은 노동 부대에 소집되어 철도 수리, 공항 건설, 지뢰밭 청소 등에 동원되었다. 약 42,000명의 유대인 노동 부대 군인들이 소련 전선에서 사망했다. 보르, 세르비아의 구리 광산에서도 4,000명의 강제 노동자들이 사망했다.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과 칼라이 총리는 독일의 압력에 저항하여 헝가리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추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1944년 3월 독일군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944년 3월 18일, 아돌프 히틀러는 호르티를 회담에 소환했고, 독일 전차가 부다페스트로 진입했다. 3월 23일, 되메 스토야이 정부가 수립되었고, 화살십자당이 합법화되었다. 내무부는 라슬로 엔드레와 라슬로 바키에게 넘어갔고, 안도르 야로스 또한 반유대주의자였다. 점령 직후, 독일과 헝가리 당국은 유대인 평의회를 설립했다.
1944년 4월 9일, 되메 스토야이 총리와 독일은 헝가리가 30만 명의 유대인 노동자를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 4월 14일, 엔드레, 바키, 아돌프 아이히만은 헝가리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1943년 BBC 폴란드 서비스가 대학살에 대해 방송했지만, BBC 헝가리 서비스는 유대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66] 칼라일 매카트니는 대부분의 헝가인이 반유대주의자라고 믿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홀로코스트가 헝가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67] 예후다 바우어에 따르면, 1944년 5월에 아우슈비츠로의 추방이 시작되었을 때, 시온주의 청소년 운동은 헝가리 유대인의 루마니아 밀수를 조직했다. 약 4,000명의 헝가리 유대인이 루마니아로 밀수되었다.[68] 그러나 루마니아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었고, 이온 안토네스쿠 독재 하에 38만~40만 명의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되었다.[69]
10. 3.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의 이송 (1944년)
1944년 3월 18일, 아돌프 히틀러는 호르티를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회담에 소환하여 헝가리 국가의 더 큰 묵인을 요구했다. 호르티가 회담에 참석하는 동안 독일 전차가 부다페스트로 진입했다. 3월 23일, 되메 스토야이 정부가 수립되었고, 화살십자당을 합법화했다. 독일 점령 이후 4일간의 과도기 동안, 내무부는 유대인에 대한 적대 행위로 잘 알려진 우익 정치인 라슬로 엔드레와 라슬로 바키의 손에 넘어갔다. 점령 직후, 독일과 헝가리 당국은 전국에 유대인 평의회(Judenrats)를 설립했다.4월 9일, 되메 스토야이 총리와 독일은 헝가리가 30만 명의 유대인 노동자를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 5일 후인 4월 14일, 엔드레, 바키, 그리고 SS 장교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헝가리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1943년 BBC 폴란드 서비스가 대학살에 대해 방송했지만, BBC 헝가리 서비스는 유대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66] 대부분의 유대인은 홀로코스트가 헝가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67] 예후다 바우어에 따르면, 1944년 5월에 아우슈비츠로의 추방이 시작되었을 때, 시온주의 청소년 운동은 헝가리 유대인의 루마니아 밀수를 조직했다. 약 4,000명의 헝가리 유대인이 루마니아로 밀수되었다.[68]


유대인 학살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던 ''SS-Obersturmbannführer(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70]은 부다페스트와 그 교외 지역 외 헝가리 지방에서 유대인들을 신속하게 체포하기 시작했다. 노란 별과 게토화 법, 그리고 추방은 헝가리 당국, 특히 헌병(''csendőrség'')의 열정적인 도움을 받아 8주도 안 되어 완료되었다. 5월 중순부터 매일 4대의 열차로 총 45개의 가축차를 사용하여 12,000명의 유대인을 시골에서 아우슈비츠로 추방하는 것이 계획의 시작이었다.
추방이 시작되기 직전에 브르바-베츨러 보고서가 연합국 관료들에게 전달되었다. 보고서의 세부 사항은 6월 15일 BBC에 의해 방송되었고, 6월 20일 ''뉴욕 타임스''에 게재되었다.[71] 교황 비오 12세(6월 25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6월 26일),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6월 30일)를 포함한 세계 지도자들은 이후 호르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추방을 중단하도록 간청했다. 7월 7일 호르티는 마침내 수송 중단을 명령했다.[73] 역사가 페테르 시포스에 따르면, 헝가리 정부는 이미 1943년부터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다.[74] 브르바-베츨러 보고서는 늦어도 1944년 4월 28일까지 헝가리 시온주의 지도자 루돌프 카스트너에게 전달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카스트너는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78]
아우슈비츠로의 첫 번째 수송은 1944년 5월 초에 시작되었으며, 소련군이 접근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헝가리 정부는 유대인의 북부 국경까지의 수송을 전적으로 담당했다. 카사 (코시체) 철도역의 헝가리 사령관은 출발지와 내부 인원수를 기록하며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열차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첫 번째 열차는 5월 14일에 카사를 통과했다. 전형적인 날에는 3~4대의 열차가 있었고, 각 열차에는 3,000명에서 4,000명 사이의 사람들이 있어 매일 총 약 12,000명의 유대인이 처형 시설로 이송되었다. 6월 16일까지 이 33일 동안 109대의 열차가 있었다. 6월 25일부터 29일까지 10대의 열차가 있었고, 7월 5일부터 9일까지 18대의 열차가 추가로 있었다. 카사를 경유하여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138번째 기록된 열차는 7월 20일에 있었다.[79] 다른 경로를 통해 아우슈비츠로 10대의 열차(24,000명 이상)가 보내졌고,[80] 6월 25일부터 28일 사이에 스트라스호프로 7대의 열차(20,787명)가 갔다. 독특한 카스트너 열차는 6월 30일에 1,685명의 사람들을 태우고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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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이것은 아마도 세계 역사상 저질러진 가장 크고 끔찍한 범죄일 것이다 ..."
|source=윈스턴 처칠, 1944년 7월 11일[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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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9일까지, 헝가리 주재 제국 전권 대사인 에드문트 페젠마이어의 공식 독일 보고서에 따르면 437,402명의 유대인이 추방되었다.[82] 147대의 열차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도착하자마자 살해되었다. 화장터가 시체를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신을 태우는 특별 구덩이가 그들 근처에 파졌다.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된 희생자의 3분의 1이 헝가리인으로 추정된다.[83]
헝가리 헌병들의 "최종 해결책"에 대한 헌신은 아이히만 자신조차도 놀라게 했다.[85]
10. 4. 국제사회의 구호 노력
1944년 6월 말, 교황 비오 12세,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헝가리 내 유대인 추방을 즉시 중단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86] 호르티는 7월 6일 모든 추방을 중단하라고 명령했지만, 그 이후에도 트란스다뉴비아 지역과 부다페스트 외곽에서 45,000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추방되었다.[86]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독일군은 호르티 정권에 더 큰 규모의 추방을 계속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을 중단했다.[87] 8월 말, 호르티는 아이히만의 추방 재개 요청을 거절했고, 힘러는 아이히만에게 부다페스트를 떠나라고 명령했다.[87]하인리히 힘러는 8월 25일, 독일의 요구가 충족될지 여부를 살리 마이어가 약속한 것 외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헝가리로부터의 추가 추방을 취소하라고 명령했다.[89]

10. 5. 화살십자당의 만행
1944년 10월 15일 헝가리에서 화살십자당의 쿠데타가 발생한 후, 부다페스트의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강제 이송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베르겐-벨젠 등으로 추방되었다. 부다페스트에는 두 개의 게토가 설치되었는데, 하나는 중립국 보호를 받는 "국제 게토"였고, 다른 하나는 에르제베트바로스 지역에 설치된 큰 부다페스트 게토였다. 스위스는 7,800개, 스웨덴은 4,500개, 바티칸, 포르투갈, 스페인은 총 3,300개의 슐츠파스(보호 문서)를 발급했다. 그러나 화살십자당원들은 게토에서 정기적으로 습격과 대량 처형을 자행했으며, 1944년 11월부터 1945년 2월까지 다뉴브 강둑에서 1만~1만 5천 명의 유대인을 총살했다. 소련군은 1945년 1월 18일 부다페스트 게토를 해방시켰고, 2월 13일 부다를 점령할 때까지 화살십자당의 만행은 계속되었다.라울 발렌베리, 카를 루츠, 앙헬 산스 브리스등의 외교관들과[90] 펄 설러이, 커로이 서보 같은 군경, 벌러 호르바트와 같은 내무부 관리, 그리고 일부 교회 기관 및 인물들이 유대인 구출에 기여했다.[90] 루돌프 커스트너는 아돌프 아이히만과의 협상을 통해 유대인들의 아우슈비츠 추방을 막으려 노력했고, 커스트너 열차로 1,680명의 유대인을 구출했다.[91]
11. 공산주의 시대 (1945년 ~ 1989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에는 14만 명의 유대인만 남았으며, 어려운 경제 상황과 반유대주의적 태도로 인해 1945년에서 1949년 사이에 4만~5만 명의 유대인이 헝가리를 떠났다.[96] 1948년에서 1951년 사이에는 14,301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96]
헝가리 공산 정권 초기에는 머티어시 라코시, 외뢰 괴뢰, 페테르 가보르 등 유대인 출신 지도자들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이들은 유대교를 부인하고 공산주의 교리에 따른 무신론자들이었다. 1948년부터 1988년까지 공산주의 통치하에 시온주의는 불법화되었고 유대교 준수는 억압되었다. 1950년대 초에는 유대인과 기독교인 상류층 구성원들이 지방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이슈트반 앙갈과 같은 유대인 무장 반군 지도자도 있었고, 티보르 데리 같은 유대인 작가와 지식인들은 개혁 운동의 선두에 섰다. 혁명 이후 약 2만 명의 유대인이 헝가리를 떠났으며,[98][99][100] 헝가리 유대인 인구는 이민, 동화, 혼인, 낮은 출생률로 인해 계속 감소했다.[101]
야노시 카다르 정권 시기에는 좌익 유대 지식인들이 헝가리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과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반유대주의 캠페인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11. 1. 공산주의 정권과 유대인 정책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에는 14만 명의 유대인만 남았으며, 어려운 경제 상황과 반유대주의적 태도로 인해 1945년에서 1949년 사이에 4만~5만 명의 유대인이 헝가리를 떠났다.[96] 1948년에서 1951년 사이에는 14,301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96]헝가리 공산 정권 초기에는 머티어시 라코시, 외뢰 괴뢰, 페테르 가보르 등 유대인 출신 지도자들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이들은 유대교를 부인하고 공산주의 교리에 따른 무신론자들이었다. 1948년부터 1988년까지 공산주의 통치하에 시온주의는 불법화되었고 유대교 준수는 억압되었다. 1950년대 초에는 유대인과 기독교인 상류층 구성원들이 지방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이슈트반 앙갈과 같은 유대인 무장 반군 지도자도 있었고, 티보르 데리 같은 유대인 작가와 지식인들은 개혁 운동의 선두에 섰다. 혁명 이후 약 2만 명의 유대인이 헝가리를 떠났으며,[98][99][100] 헝가리 유대인 인구는 이민, 동화, 혼인, 낮은 출생률로 인해 계속 감소했다.[101]
야노시 카다르 정권 시기에는 좌익 유대 지식인들이 헝가리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과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반유대주의 캠페인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11. 2. 1956년 헝가리 혁명과 유대인
11. 3. 유대인 인구 감소
12. 1990년대 이후
헝가리의 유대인 인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거의 50만 명에서 1920년과 2010년 사이, 1939년과 1945년(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사이, 그리고 1951년과 1960년(1956년 헝가리 혁명) 사이에 계속 감소했다. 2010년 기준으로 헝가리는 구소련을 제외한 동유럽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많았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헝가리에는 유대인 출신의 총리인 언털 요제프(1990년~1993년)와 호른 줄러(1994년~1998년)가 있었다.[117]
1997년 4월 헝가리 의회는 나치와 공산주의 시절 유대인 피해자들로부터 훔친 재산을 돌려주는 유대인 보상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재산과 금전적인 지불은 유대인 공공 유산 재단과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돌려졌다.[118]
비평가들은 그 합계가 상징적인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랜돌프 L. 브라함에 따르면, "공산주의 시대의 공포에 대한 정치적으로 지도된 선입견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무색함은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희생자들의 보상을 나치즘의 희생자들보다 우선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산당 정권에 의해 국유화된 재산에 대해 보상을 받은 불확실한 수의 기독교 희생자들은 사실 나치 시대에 유대인들로부터 '합법적으로' 또는 부정하게 그것들을 취득했습니다. 이러한 가상의 외설을 더 복잡하게 만들면서, 오르반 빅토르 정부는 1998년 말에 생존자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그들의 특정 직계 가족 구성원들에게 약 150달러를 지불함으로써 그들에게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국가의 집단적 양심을 완화하려고 했습니다."[119]
12. 1. 민주화와 유대인 사회의 부흥
헝가리의 유대인 인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117] 특히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1956년 헝가리 혁명을 거치면서 크게 줄었다. 2010년 기준으로 헝가리는 구소련을 제외한 동유럽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많았다.[117]공산주의 붕괴 이후 헝가리에는 유대인 출신 총리인 언털 요제프(1990년~1993년)와 호른 줄러(1994년~1998년)가 있었다.[117] 1997년 4월 헝가리 의회는 나치와 공산주의 시절 유대인 피해자들로부터 훔친 재산을 돌려주는 유대인 보상법을 통과시켰다.[118] 그러나 랜돌프 L. 브라함은 공산주의 희생자들의 보상을 나치즘의 희생자들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오르반 빅토르 정부의 보상 노력은 생존자들이 홀로코스트 희생자 가족임을 증명해야 하는 등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고 비판했다.[119]
12. 2. 반유대주의 문제의 지속
헝가리의 유대인 인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년에서 2010년 사이, 특히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1939년~1945년), 그리고 1956년 헝가리 혁명(1951년~1960년)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감소했다.[117] 2010년 기준으로 헝가리는 구소련을 제외한 동유럽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공산주의 붕괴 이후 헝가리에는 유대인 출신 총리인 언털 요제프(1990년~1993년)와 호른 줄러(1994년~1998년)가 있었다.[117] 1997년 4월, 헝가리 의회는 나치와 공산주의 시절 유대인 피해자들로부터 훔친 재산을 돌려주는 유대인 보상법을 통과시켰다.[118] 이 법에 따라 재산과 금전적인 지불은 유대인 공공 유산 재단과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돌아갔다.[118]
랜돌프 L. 브라함에 따르면, 공산주의 시대의 공포에 대한 정치적 선입견으로 인해 홀로코스트가 무색해졌고, 공산주의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나치즘 희생자들보다 우선시되었다.[119] 오르반 빅토르 정부는 1998년 말, 생존자들이 가족 구성원이 홀로코스트 희생자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특정 직계 가족 구성원들에게 약 150달러를 지불하여 보상하려 했다.[119]
12. 3. 헝가리 정부의 과거사 청산 노력
공산주의 붕괴 이후 헝가리에는 유대인 출신의 총리인 언털 요제프 (1990년~1993년)와 호른 줄러 (1994년~1998년)가 있었다.[117]1997년 4월 헝가리 의회는 나치와 공산주의 시절 유대인 피해자들로부터 훔친 재산을 돌려주는 유대인 보상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재산과 금전적인 지불은 유대인 공공 유산 재단과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돌려졌다.[118]
랜돌프 L. 브라함에 따르면, "공산주의 시대의 공포에 대한 정치적으로 지도된 선입견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무색함은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희생자들의 보상을 나치즘의 희생자들보다 우선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산당 정권에 의해 국유화된 재산에 대해 보상을 받은 불확실한 수의 기독교 희생자들은 사실 나치 시대에 유대인들로부터 '합법적으로' 또는 부정하게 그것들을 취득했습니다. 이러한 가상의 외설을 더 복잡하게 만들면서, 오르반 빅토르 정부는 1998년 말에 생존자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그들의 특정 직계 가족 구성원들에게 약 150달러를 지불함으로써 그들에게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국가의 집단적 양심을 완화하려고 했습니다."[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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