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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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드 동맹은 1295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와 맺은 동맹이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부담해야 했지만, 유럽 강대국과의 동맹을 통해 상징적 의미를 얻었다. 백년 전쟁, 장미 전쟁 등 유럽 정세 변화에 따라 동맹은 갱신과 약화를 반복했으며,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이후 1560년 에든버러 조약으로 공식 종료되었다. 그러나 20세기까지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문화, 법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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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드 동맹 - 가르드 에코세즈
가르드 에코세즈는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으로 파견된 스코틀랜드 용병을 근간으로 15세기부터 프랑스 왕실을 호위한 근위대로, 혁혁한 공을 세우며 부르봉 왕가 시대까지 명성을 이어갔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 재건과 해산을 반복하다 1830년에 최종 해산되었다.
올드 동맹 | |
---|---|
개요 | |
별칭 | 올드 얼라이언스(Auld Alliance), 프랑코-스코틀랜드 동맹(Franco-Scottish Alliance), 낡은 동맹 |
유형 | 방어 조약 |
지속 기간 | 1295년 10월 23일 ~ 1560년 7월 15일 |
관련 지도 검색어 | 스코틀랜드, 프랑스 |
결성 | |
결성일 | 1295년 10월 23일 |
결성 장소 | 파리 |
목적 | |
목적 | 방어 협정 |
구성원 | |
구성원 | 스코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
사용 언어 | |
사용 언어 | 프랑스어 스코트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
해체 | |
해체일 | 1560년 7월 15일 |
역사적 배경 | |
기원 | 1295년 |
관련 사건 | 플로든 전투 난폭한 구애 에든버러 조약 |
2. 역사
1168년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 1세는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이는 구두 약속이었지만, 이후 양국이 정식 동맹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1290년, 스코틀랜드 여왕이자 7세였던 마르그레트의 죽음으로 인한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문제는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스코틀랜드에 개입할 기회를 주었다. 1295년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전역을 정복하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임시 위원회였던 12 의원회는 이에 대한 반응으로 동맹을 찾았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필리프 4세가 1293년에 잉글랜드가 보유한 가스코뉴 영토 몰수를 선포하면서 전쟁이 임박했고, 프랑스와의 동맹은 확실한 선택이었다. 1295년 10월 필리프에게 도착한 스코틀랜드 대사들은 파리 조약에 동의했다.[49]
이후 맺어진 올드 동맹과 마찬가지로 이 조약은 스코틀랜드보다 프랑스가 더 이득이었다. 프랑스는 가스코뉴에 대한 잉글랜드와의 투쟁을 계속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전면전에 대한 비용은 스코틀랜드가 부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멀리 변방 지역이자 가난한 스코틀랜드는 이제 유럽의 주요 강국과 맞섰다. 실질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라 할지라도 동맹의 이점은 스코틀랜드와 크게 관련이 있다.[50]
그러나 단기간 동안에 이 조약은 스코틀랜드에 대한 독립을 뿌리뽑기 위해 1296년에 스코틀랜드를 공격하여 엄청난 피해를 준 에드워드에 대한 보호를 해주지 못했다. 더욱이 1299년에 "지속적 평화와 우애" 조약에 따라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 적대 행위가 중단되면서, 에드워드는 그의 집중과 병력을 스코틀랜드에 모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의 올드 동맹보다는 로버트 1세의 군사적 감각 및 영감과 에드워드 2세의 실수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326년 로버트는 코르베유 조약으로 올드 동맹을 갱신하였다. 이 동맹을 갱신하게 된 이유는 예방 차원이었다. 하지만 이 동맹은 1330년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정복을 마치고 프랑스 지역에서 그의 영토 회복 준비를 하면서 급속히 바뀌었다.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은 처음으로 비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346년 에드워드는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괴멸시켰다. 두 달 뒤 스코틀랜드의 국왕 데이비드 2세는 네빌스크로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며, 잉글랜드 북부 침입을 실패했다. 에드워드의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의 11년간의 부재는 내부 문제와 스코틀랜드의 권력 분쟁을 증가시켰을 뿐이었다. 데이비드 2세는 그의 자유를 얻는 대가로 강화를 체결해야만 했다. 1357년 그가 석방됐음에도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관심을 막는데 남은 재위 기간을 썼다.[50]
1371년, 스코틀랜드는 글래스고 주교와 갤러웨이 경을 프랑스에 파견하여 뱅센-에든버러 조약을 통해 동맹을 재개했다. 이 조약은 뱅센 성에서 샤를 5세가 6월 30일에, 에든버러 성에서 로버트 2세가 10월 28일에 서명했다.[51] 친프랑스 정책을 펼친 로버트 2세의 즉위는 즉시 올드 동맹의 재개로 이어졌지만, 스코틀랜드에 대한 이익은 엇갈렸다. 1385년에는 잉글랜드에 대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의 침공 계획이 취소되었는데, 여기에는 처음으로 스코틀랜드에 소규모 프랑스군을 파견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프랑스의 공격이 구체화되지 못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이 악화된 관계는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가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와 2, 3년 강화를 하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하여 이들을 파괴하길 원했다고" 쓴 내용에서 드러난다.[52]
15세기에도 잉글랜드의 랭커스터 왕가에 저항하기 위해 양국에게 동맹은 필수적이었다. 1415년 헨리 5세에게 패배 직전이었던 프랑스의 도팽 샤를 7세는 스코틀랜드에 도움을 요청했고, 1419년과 1424년 사이에 최대 15,000명의 스코틀랜드군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53][54]
프랑스와 스코틀랜드군은 1421년 보제 전투에서 잉글랜드에게 승리했다. 이는 백년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지만, 1424년 베르누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패배했다. 그럼에도 스코틀랜드는 프랑스가 잉글랜드의 우위로부터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숨을 쉴 공간을 마련해주었다.[50] 1429년에는 스코틀랜드군이 오를레앙 공성전에서 잔 다르크를 도왔고,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프랑스 국왕 친위 부대 가르드 에코세즈에서 복무했다. 프랑스로 간 많은 스코틀랜드 군인들은 그곳에 정착했고, 일부는 프랑스 내 작위와 땅을 받으며 15-16세기에 프랑스화되었다.[47]
15세기 남은 기간 동안 올드 동맹은 공식적으로 네 차례 재개되었다.[50]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최종 승리하고 장미 전쟁으로 잉글랜드가 혼란에 빠지면서 잉글랜드의 위협이 크게 줄어, 동맹은 거의 쓸모없게 되었다.
16세기 초, 헨리 7세는 평화를 위해 딸 마거릿 튜더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메리 튜더를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결혼시키면서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은 사실상 끝난 듯했다. 그러나 1512년, 1517년, 1548년에 동맹이 재개되었지만, 곧 없어졌다. 스코틀랜드는 1513년 플로든 전투에서 제임스 4세와 귀족 대부분이 사망한 후 어려움을 겪었다. 15세기 내내 잉글랜드-프랑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간 분쟁은 계속되었지만, 올드 동맹을 이끌었던 확실성은 사라졌다. 스코틀랜드에서 개신교 세력이 커지면서 프랑스보다 잉글랜드와 더 긴밀한 관계를 선호하게 되었다.[50]
1558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2세의 혼인으로 올드 동맹이 마지막으로 재건되었지만, 1560년까지만 지속되었다.[55] 1568년 메리가 잉글랜드로 추방된 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왕위와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6세에 의해 개신교 국가로 바뀌었다. 잉글랜드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그의 열망은 동맹의 필요성이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250년 이상 지속된 동맹은 1560년대 에든버러 조약으로 공식 종료되었다.[56]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으로 스코틀랜드는 개신교 국가임을 선포하고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다. 종교 개혁 기간 동안 개신교 신자들의 군주는 올드 동맹을 부정하고 마리 드 기즈에 맞서 버윅 조약으로 잉글랜드의 군사 지원을 중개했다. 200명의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위그노 전쟁에서 프랑스 국왕에 맞서 싸우던 위그노들을 돕기 위해 1562년 노르망디에 파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르드 에코세즈는 1830년 샤를 10세가 퇴위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2. 1. 동맹의 기원 (1295-1326)
1290년, 스코틀랜드 여왕이자 7세였던 노르웨이의 소녀 마거릿이 죽으면서 스코틀랜드 왕가가 단절되었다. 이는 탐욕스러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스코틀랜드 왕국에 대한 권위를 주장할 기회를 제공했다.[49] 1295년까지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정복을 획책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스코틀랜드의 임시 정부인 12인 위원회(Council of Twelve|한국어 번역영어)는 동맹국을 찾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1293년에 잉글랜드의 가스코뉴 영유를 무효화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는 곧 전쟁이 발발할 것 같았고, 프랑스와의 동맹은 스코틀랜드가 취해야 할 분명한 노선이었다.[49] 1295년 10월, 스코틀랜드 사절과 필리프 4세는 파리 조약 체결에 동의했다.[49]이후의 모든 동맹 갱신과 마찬가지로, 조약은 스코틀랜드보다 프랑스에 더 유리했다. 프랑스는 가스코뉴에서 잉글랜드와의 분쟁을 계속하기만 하면 되었지만,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유럽 변방에 위치하고 가난했던 스코틀랜드에게 유럽 강대국과의 동맹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는 컸다.[50]
그러나 조약은 단기간에 스코틀랜드를 에드워드 1세로부터 지킬 수 없었고, 에드워드 1세는 1296년에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스코틀랜드 독립의 싹을 잘랐다.[50] 1299년에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분쟁이 종결되어 '영구적인 평화와 우호' 조약이 체결되면서 에드워드 1세는 모든 군대를 스코틀랜드 공격에 사용할 수 있었다. 결국, 스코틀랜드가 살아남은 것은 프랑스와의 동맹 덕분이 아니라 로버트 1세의 군사적 식견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의 실책 덕분이었다.
1326년, 로버트 1세는 코르베유 조약 (1326년)을 통해 동맹을 갱신했다. 당시 양국 모두 잉글랜드와의 분쟁을 겪지 않았고, 동맹 갱신은 예방적인 것이었다.
2. 2. 백년전쟁과 동맹의 강화 (1337-1453)
14세기 중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모두를 위협하면서 동맹은 더욱 중요해졌다.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스코틀랜드의 국왕 데이비드 2세는 네빌스크로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면서 동맹은 위기를 맞았다.[50] 데이비드 2세는 11년간 포로 생활을 하며 스코틀랜드 내 권력 투쟁을 야기했고, 결국 잉글랜드와의 강화를 통해 석방되었지만 이후에도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50]1371년 글래스고 주교와 갤러웨이 경이 프랑스에 파견되어 뱅센-에든버러 조약을 체결, 동맹이 재개되었다.[51] 이 조약은 샤를 5세와 로버트 2세가 각각 뱅센 성과 에든버러 성에서 서명했다.[51] 친프랑스 정책을 펼친 로버트 2세의 즉위로 동맹은 즉시 재개되었지만, 스코틀랜드에게는 엇갈린 결과를 가져왔다. 1385년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의 잉글랜드 침공 계획은 프랑스의 소극적인 태도로 무산되었고,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를 놔두고 스코틀랜드를 공격하길 원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52]
15세기 초, 잉글랜드의 랭커스터 왕가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은 다시 중요해졌다. 1418년 프랑스의 도팽 샤를 7세는 잉글랜드에 패배 직전에 놓이자 스코틀랜드에 도움을 요청했고, 1419년부터 1424년까지 최대 15,000명의 스코틀랜드군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53][54]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연합군은 1421년 보제 전투에서 잉글랜드에 승리하며 백년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지만, 1424년 베르누이 전투에서는 패배했다.[50] 그러나 스코틀랜드 군의 참전은 프랑스에게 잉글랜드의 공세를 막아낼 시간을 벌어주었다.[50]
1429년 스코틀랜드군은 잔 다르크의 오를레앙 해방을 지원했고, 프랑스 왕실 근위대인 스코틀랜드 근위대에서 복무했다.[47] 많은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프랑스에 정착했고, 일부는 프랑스 내 작위와 땅을 받으며 15-16세기에 프랑스화되었다.[47]
2. 3. 장미 전쟁과 동맹의 약화 (1455-1485)
장미 전쟁으로 잉글랜드의 위협이 크게 줄어들면서, 올드 동맹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는 잉글랜드 내전에 개입하여 랭커스터 왕가를 지원했지만, 요크 왕가가 승리하면서 큰 이득을 얻지 못했다.[50] 1461년, 앙주의 마가렛은 랭커스터 가문을 지원하는 대가로 베릭어폰트위드를 스코틀랜드에 넘겼다. 같은 해, 프랑스 역시 랭커스터 가문을 지원하는 대가로 저지 섬을 차지했다.[47]그러나 동맹의 주된 목적은 잉글랜드 내전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요크 가문이 부르고뉴 공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요크 가문이 왕위에 오르면 잉글랜드가 부르고뉴를 통해 프랑스를 다시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는 백년 전쟁 이후 회복 중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다. 잉글랜드가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양국은 백년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요크 가문의 적이었던 랭커스터 가문을 지원하며 대리 전쟁을 벌였다.
1464년, 잉글랜드의 헨리 6세와 마가렛이 스코틀랜드로 피신했을 때, 에드워드 4세는 요크 조약을 통해 스코틀랜드와 평화를 맺었다. 그러나 요크 가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랭커스터 가문을 몰살시키면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요크 가문은 1468년에 프랑스로부터 저지 섬을 되찾았고, 1482년에는 스코틀랜드로부터 버윅을 되찾았다.
랭커스터 가문이 몰락한 후, 튜더 왕조의 헨리는 브르타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헨리가 프랑스로 망명했을 때, 프랑스의 샤를 7세로부터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받아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요크 가문의 리처드 3세를 물리쳤다. 헨리 7세가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서 잉글랜드의 내전은 종식되고 튜더 왕조와 함께 점진적인 회복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초, 헨리 7세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딸 마거릿 튜더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메리 튜더를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결혼시키면서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은 사실상 끝난 것처럼 보였다.
2. 4. 종교개혁과 동맹의 종말 (1517-1560)
16세기 초,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딸들인 마거릿 튜더와 메리 튜더가 각각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결혼하면서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50] 그러나 1512년, 1517년, 1548년에 올드 동맹이 다시 갱신되면서 극적인 부활을 겪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9] 스코틀랜드는 1513년 플로든 전투에서 제임스 4세와 귀족 대부분이 사망한 후에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다.[50] 16세기 전반에 걸쳐 잉글랜드-프랑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간의 분쟁은 계속되었지만, 올드 동맹을 이끌었던 확실성은 사라져 갔다.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과 함께 프로테스탄티즘이 스코틀랜드에서 세력을 얻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보다 잉글랜드와의 더 긴밀한 관계를 선호하게 되었다.[50]1558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와 프랑스의 왕세자 프랑수아의 결혼으로 올드 동맹은 마지막으로 재건되었지만,[55] 1560년 프랑수아 2세의 이른 죽음으로 오래가지 못했다.[21] 1568년 메리가 잉글랜드로 망명한 후,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6세에 의해 개신교 국가로 바뀌었고, 그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이기도 했다. 잉글랜드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그의 열망은 동맹의 필요성을 상실했음을 의미했다. 1560년대에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간의 공식적 조약들은 에든버러 조약으로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56]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과 함께 스코틀랜드는 개신교 국가임을 선포했고, 개신교 국가인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선택했다.[22] 종교 개혁 기간에 개신교 신자들의 군주는 올드 동맹을 부정하고 프랑스의 섭정 마리 드 기즈에 맞서 버윅 조약으로 잉글랜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중개했다.[22] 1562년 위그노 전쟁 동안 200명의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프랑스 국왕에 맞서 싸우던 프랑스 위그노들을 돕기 위해 노르망디에 보내지기도 했다.[22]
2. 5. 동맹 이후 (1560-현재)
샤를 드 골은 1942년 6월 에든버러에서 한 연설에서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동맹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동맹"이라고 묘사했다.[61] 그는 또한 "프랑스의 운명을 결정한 다섯 세기 동안의 모든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은 프랑스인들과 항상 한편에서 싸웠고, 프랑스인들은 이런 우애를 지닌 여러분들보다 더 훌륭한 이들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1995년에는 양국에서 동맹 7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48]
2011년, 영국의 역사학자 쇼반 탤벗 박사는 이 주제를 다룬 연구 결과를 출판했고, 올드 동맹이 깨진 적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62]
올드 동맹은 가톨릭 스코틀랜드인들과 계속 이어졌다. 스튜어트 왕가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17세기 내내, 삼국 전쟁과 올리버 크롬웰의 단명한 잉글랜드 연방을 제외하고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프랑스 사이의 관계는 중립적이었다. 이는 윌리엄 전쟁에서 스튜어트 가톨릭 왕 제임스 7세와 2세가 프로테스탄트 윌리엄 3세와 2세에게 왕위를 빼앗기면서 모두 바뀌었다. 윌리엄 3세와 2세는 제임스의 장녀인 메리 2세의 남편이었다. 아일랜드에서 패배하고 17세기 말에 스코틀랜드에서도 패배한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그의 후손들은 18세기 초중반에 걸쳐 자코바이트 전쟁에서 가톨릭 스코틀랜드인들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동맹국들과 함께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보니 프린스 찰리는 더비 인근의 스워크스톤 다리까지 남쪽으로 진격했지만, 스코틀랜드로 후퇴했다. 1746년 컬로든 전투 이후, 그리고 곧 이어진 고지대 강제 이주 이후, 신세계로 망명한 일부 자코바이트들은 7년 전쟁에서 프랑스 동맹국을 지원했으며, 심지어 미국 독립 전쟁에서 애국자들 편에 서기도 했는데, 이는 거의 500년 전에 올드 동맹이 시작되었을 때의 상황과 비슷했다. 1418년에 창설된 스코틀랜드 근위대는 412년 후인 1830년 프랑스 샤를 10세가 퇴위할 때까지 프랑스 왕들을 계속 보호했다. 1848년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 1815년에 왕정을 복고시킨 후 군주제를 폐지하고,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다시 프랑스 제2공화국이 되었다.
3. 영향
올드 동맹은 군사, 외교적 협력 외에도 스코틀랜드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건축, 법률, 스코틀랜드어, 요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57] 특히, 스코틀랜드 법률은 프랑스 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많은 스코틀랜드 법학자들이 프랑스 대학에서 유학했고, 일부는 나폴레옹 전쟁 시대까지 이어졌다.[57]
1333년 모레이 주교 데이비드 드 모라비아는 파리 대학교의 스코틀랜드 칼리지 설립을 도왔다. 프랑스 대학교에서 공부하거나 가르친 스코틀랜드인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 | 분야 | 비고 |
---|---|---|
존 바버 | 시인 | |
조지 뷰캐넌 | 시인 | |
헥터 보이스 | 역사가 | |
헨리 워들로 |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설립자 | |
윌리엄 엘핀스톤 | 애버딘 대학교 설립자 | |
조지 맥켄지 | 변호사 도서관 설립자 | |
토마스 어쿼트 경 | 프랑수아 라블레의 저명한 번역가 |
프랑스식 건축 양식을 따라 지어진 스코틀랜드 성으로는 보스웰 성과 킬드러미 성이 있다.[59]
동맹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는 프랑스어가 스코틀랜드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현재의 스코틀랜드어에서도 프랑스어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 역사학자 J. B. 블랙은 올드 동맹에 대해 "올드 동맹에 대한 스코틀랜드인들의 사랑은 문화 공동체에 의해 키워진 긍정적인 감정이 결코 아니었지만, 잉글랜드를 향한 증오에 대한 부정적인 기반에 인위적으로 창조된 애착이었으며, '나의 적의 적은 우리의 친구'라는 철학적 이론에서 온 한낱 이익이었을 뿐이었다"라고 평가했다.[60]
4. 유산
1942년 6월, 샤를 드 골은 에든버러에서 한 연설에서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동맹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동맹"이라고 표현했다.[61] 그는 "프랑스의 운명을 결정한 다섯 세기 동안의 모든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은 프랑스인들과 항상 한편에서 싸웠고, 프랑스인들은 이런 우애를 지닌 여러분들보다 더 훌륭한 이들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라고 덧붙였다.[25][44]
1995년에는 양국에서 동맹 7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48] [6][45]
2011년, 영국의 역사학자 시오반 탈보트(Siobhan Talbott) 박사는 올드 동맹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적이 없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62] [46]
육상 경기 선수권 대회에서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이탈리아가 참가하는 럭비 유니언 토너먼트에서 스코틀랜드와 프랑스가 경기를 할 때 올드 동맹 트로피가 수여된다.
참조
[1]
문서
Vieille Alliance
[2]
웹사이트
FR01 – Auld Alliance
http://www.scottishd[...]
2018-02-23
[3]
웹사이트
In a paper Dr Siobhan Talbott has argued the Franco-Scottish Auld Alliance of 1295 survived centuries of enmity and war between Britain and France – even after the Act of Union was signed in 1707.
http://www.mancheste[...]
2011-11-14
[4]
웹사이트
Beyond "The Antiseptic Realm of Theoretical Economic Models": New Perspectives on Franco-Scottish Commerce and the Auld Alliance in the Long Seventeenth Century
https://www.academia[...]
2020-01-12
[5]
서적
Franco-Scottish Alliance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6]
논문
Scotland’s ‘Auld Alliance’ with France, 1295–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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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Franco-Scottish Alli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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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웹사이트
BBC – 23 October in Scottish History
https://www.bbc.co.u[...]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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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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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imes Book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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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David II
Tuckwell Press Ltd.
2004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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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ckwell Press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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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 paper to be published next year, Dr Siobhan Talbott argues the Franco-Scottish Auld Alliance of 1295 survived centuries of enmity and war between Britain and France – even after the Act of Union was signed in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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