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문익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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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덕형(1561년 ~ 161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시기 외교와 군사 분야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8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율곡 이이에게 발탁되어 홍문관에서 활동했다. 임진왜란 발발 후에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이여송을 수행하며 군사 정책을 수행했다. 정유재란 때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이후 영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 시대에는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사후 복권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식과 강직한 성품으로 평가받으며, 용연서원에 배향되었고, 관련 드라마에서도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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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첨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광해군 시대 대북파의 영수로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조의 총애를 받았고 광해군을 지지하여 권력을 잡았으나, 잔혹한 정치 행위로 인조반정 후 역적으로 몰려 참수당했으며, 그의 정치적 행보와 인물 평가는 현재까지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 형난공신 - 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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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첨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광해군 시대 대북파의 영수로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조의 총애를 받았고 광해군을 지지하여 권력을 잡았으나, 잔혹한 정치 행위로 인조반정 후 역적으로 몰려 참수당했으며, 그의 정치적 행보와 인물 평가는 현재까지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 익사공신 - 이원익
이원익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대사헌, 이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하며 활약했고, 대동법을 건의하여 백성을 구휼하였으며,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로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이다. - 동인 - 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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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 (문익공)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이덕형 |
한자 이름 | 李德馨 |
자 | 명보(明甫) |
호 | 한음(漢陰) |
본관 | 광주 |
당파 | 남인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광주부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이민성 |
어머니 | 문화 류씨 |
배우자 | 한산 이씨 |
학력 및 경력 | |
학력 | 1580년 문과 급제 |
직업 | 문관 |
직책 | 조선의 영의정 |
경력 | 영의정 |
서훈 | |
서훈 |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 |
휘 | 덕형(德馨) |
2. 생애
1561년 서울 남부 성명방(誠明坊 :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 사이)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의 누이동생인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두뇌가 영특하여 소년 시절에 벌써 글 잘하고 얌전하기로 이름났고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문장과 인품에 감동받았다고 한다.[1] 14세 때에 영의정으로 있던 외숙부 유전의 집이 있는 경기도 포천의 외가로 가서 지냈는데, 당대의 글 잘하기로 이름 높던 양사언, 양사준, 양사기 형제들과 어울렸다. 그밖에도 어려서 만난 이항복과도 오래 교류하였다.
일찍이 윤우신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였으며, 이때 만난 이귀와 절친이 되어 오래 교류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 실력이 뛰어났다. 이후 명망 있던 문신 겸 서예가, 학자인 이산해의 둘째 딸이자 이지함의 종손녀인 이씨와 혼인하였다. 뒤에 그는 가문을 따라 남인이 되었고, 장인 이산해와 처남 이경전 등은 북인이 되었지만, 이산해의 사위였던 덕에 화를 모면했다. 실록에 의하면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화패(禍敗)를 면할 수 있었다.[2]'고 한다.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려운 처지에 있던 친구들을 도왔으며, 비단옷을 입지 않고,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1580년(선조 14년) 20세 때 문과 별시에 을과 1위(전체 2위)로 급제하였다.[3] 이어 승문원에 보직되고 대제학인 율곡 이이에게 발탁되어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다. 이때 25세인 백사 이항복도 문과에 급제하고 이덕형의 집안 형님인 이정립도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 ‘세 이씨’가 바로 그들이었다고 한다. 과거 합격 동기로 급제한 이 세 사람은 뒤에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나란히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한 뒤 함께 옥당인 홍문관의 직책에 배치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그 뒤 이덕형은 박사(博士), 수찬(修撰), 교리(校理),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90년 당상관에 올라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591년 31세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서 조선시대 최연소 대제학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그의 처남 이경전이 사가독서에 선발되지 않았으므로 장인 이산해가 크게 노하였는데, 이때 장인 이산해의 부탁을 받고 다시 아뢰게 하여 이경전이 마침내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4]
1592년(선조 25년) 사헌부 대사헌 직책에 있을 때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은 좌의정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1] 중추부동지사로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와 화의 교섭을 했으나 실패, 결렬되었다.[1] 그 후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원군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1] 1593년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가 되어 이여송을 수행하였고, 이후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우참찬, 우찬성을 지냈으며 특히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정책을 수행하였다.[1]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울 방어를 강화하였으며, 1598년 4월 38세의 젊은 나이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1] 그러나 임진왜란 중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의 아내 한산 이씨는 왜군에 포로로 사로잡혔고, 왜군에게 능욕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하였다.[1]
1599년(선조 32년) 겸문학을 지내고, 그해 12월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1600년 1월 행 지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곧 도원수를 겸하였다. 1601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의 4도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종결 후의 군대 정비 및 민심 수습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1602년 3월 영의정이 되었다.[1] 1604년 임진왜란 중의 공신을 책봉할 때 호성공신, 선무공신에 모두 추천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였다.[1] 1606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1608년 6월 진주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같은 해(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1] 1609년 10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1] 명나라에서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존재를 이유로 광해군을 적통을 이어받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자, 그는 스스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설득하고 되돌아왔다.[1] 1611년 8월 좌의정, 1612년 11월 영의정이 되었다.[1]
1612년(광해군 4년) 이덕형은 광해군에 의해 공신에 녹훈되고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북인 유영경(柳永慶) 등의 반대로 공신록에서 삭제되었다.
1613년 6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대북파의 탄핵에 몰렸으며, 병을 얻어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 그의 일족인 이이첨이 대북의 영수였으나 그는 인목대비 폐모와 영창대군의 사형을 극력 반대하였다. 같은 해 9월 이항복과 함께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였으나 북인의 탄핵을 받았다.
이후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는 상소와 함께 병을 이유로 의정부영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모든 관직이 삭탈되었다. 그는 용진(龍津)으로 내려갔다.
1614년(광해군 6)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1] 1623년 인조 반정 뒤에도 불이익이나 추탈을 당하지 않았다.[1]
경기도 포천시에 위치한 용연서원에 제향되었다.[1] 용연서원은 1691년(숙종 17년) 이덕형과 조경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되었고, 1692년(숙종 18년) '용연(龍淵)'으로 사액되었다.[1]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의 공로가 인정되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유지되었다.[1] 1976년 8월 27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다.[1]
《한음이덕형선생묘및신도비》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번지에 있으며, 부인 한산 이씨와의 합장묘이다.[1] 봉분 아랫부분에는 화강암 석재를 이용한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1] 묘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묘비 좌우에는 망주석이 있다.[1] 상석 좌우에는 동자상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1] 묘역 아래 300m 지점에는 조경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있는데, 효종 4년(1653)에 세워졌다.[1] 1985년 9월 2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1] 1759년(영조 35) 김재로의 상소로 불천지위가 되었다.[1]
2. 1. 출생과 유년기
이덕형은 1561년 서울 남부 성명방(誠明坊 :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 사이)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의 누이동생인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두뇌가 영특하여 소년 시절에 벌써 글 잘하고 얌전하기로 이름났고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문장과 인품에 감동받았다고 한다.[1] 14세 때에 영의정으로 있던 외숙부 유전의 집이 있는 경기도 포천의 외가로 가서 지냈는데, 당대의 글 잘하기로 이름 높던 양사언, 양사준, 양사기 형제들과 어울렸다. 그밖에도 어려서 만난 이항복과도 오래 교류하였다.일찍이 윤우신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였으며, 이때 만난 이귀와 절친이 되어 오래 교류하였다.
2. 2. 청년기
어렸을 때부터 문학 실력이 뛰어났다. 이후 명망 있던 문신 겸 서예가, 학자인 이산해의 둘째 딸이자 이지함의 종손녀인 이씨와 혼인하였다. 뒤에 그는 가문을 따라 남인이 되었고, 장인 이산해와 처남 이경전 등은 북인이 되었지만, 이산해의 사위였던 덕에 화를 모면했다. 실록에 의하면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화패(禍敗)를 면할 수 있었다.[2]'고 한다.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려운 처지에 있던 친구들을 도왔으며, 비단옷을 입지 않고,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2. 3. 관료 생활 초반
1580년(선조 14년) 20세 때 문과 별시에 을과 1위(전체 2위)로 급제하였다.[3] 이어 승문원에 보직되고 대제학인 율곡 이이에게 발탁되어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다. 이때 25세인 백사 이항복도 문과에 급제하고 이덕형의 집안 형님인 이정립도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 ‘세 이씨’가 바로 그들이었다고 한다. 과거 합격 동기로 급제한 이 세 사람은 뒤에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나란히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한 뒤 함께 옥당인 홍문관의 직책에 배치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그 뒤 이덕형은 박사(博士), 수찬(修撰), 교리(校理),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90년 당상관에 올라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591년 31세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서 조선시대 최연소 대제학이 되었다.
1591년 8월 그의 처남 이경전이 사가독서에 선발되지 않았으므로 장인 이산해가 크게 노하였는데, 이때 장인 이산해의 부탁을 받고 다시 아뢰게 하여 이경전이 마침내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4]
2. 4. 임진왜란 전후
1592년(선조 25년) 사헌부 대사헌 직책에 있을 때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은 좌의정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1] 중추부동지사로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와 화의 교섭을 했으나 실패, 결렬되었다.[1] 그 후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원군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1] 1593년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가 되어 이여송을 수행하였고, 이후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우참찬, 우찬성을 지냈으며 특히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정책을 수행하였다.[1]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울 방어를 강화하였으며, 1598년 4월 38세의 젊은 나이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1] 그러나 임진왜란 중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의 아내 한산 이씨는 왜군에 포로로 사로잡혔고, 왜군에게 능욕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하였다.[1]
2. 5. 전란 종결 이후
1599년(선조 32년) 겸문학을 지내고, 그해 12월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1600년 1월 행 지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곧 도원수를 겸하였다. 1601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의 4도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종결 후의 군대 정비 및 민심 수습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1602년 3월 영의정이 되었다.[1] 1604년 임진왜란 중의 공신을 책봉할 때 호성공신, 선무공신에 모두 추천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였다.[1] 1606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1608년 6월 진주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1] 1609년 10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1] 명나라에서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존재를 이유로 광해군을 적통을 이어받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자, 그는 스스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설득하고 되돌아왔다.[1] 1611년 8월 좌의정, 1612년 11월 영의정이 되었다.[1]2. 6. 광해군 정권과 갈등 후 은퇴
1612년(광해군 4년) 이덕형은 광해군에 의해 공신에 녹훈되고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북인 유영경(柳永慶) 등의 반대로 공신록에서 삭제되었다.1613년 6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대북파의 탄핵에 몰렸으며, 병을 얻어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 그의 일족인 이이첨이 대북의 영수였으나 그는 인목대비 폐모와 영창대군의 사형을 극력 반대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9월 이항복과 함께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였으나 북인의 탄핵을 받았다.
이후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는 상소와 함께 병을 이유로 의정부영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모든 관직이 삭탈되었다. 그는 용진(龍津)으로 내려갔다.
2. 7. 사후
1614년(광해군 6)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1] 1623년 인조 반정 뒤에도 불이익이나 추탈을 당하지 않았다.[1]경기도 포천시에 위치한 용연서원에 제향되었다.[1] 용연서원은 1691년(숙종 17년) 이덕형과 조경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되었고, 1692년(숙종 18년) '용연(龍淵)'으로 사액되었다.[1]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의 공로가 인정되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유지되었다.[1] 1976년 8월 27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다.[1]
《한음이덕형선생묘및신도비》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번지에 있으며, 부인 한산 이씨와의 합장묘이다.[1] 봉분 아랫부분에는 화강암 석재를 이용한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1] 묘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묘비 좌우에는 망주석이 있다.[1] 상석 좌우에는 동자상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1] 묘역 아래 300m 지점에는 조경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있는데, 효종 4년(1653)에 세워졌다.[1] 1985년 9월 2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1] 1759년(영조 35) 김재로의 상소로 불천지위가 되었다.[1]
3. 가족
이덕형은 조선 성종 때 정승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이극균(李克均) 부자의 후손으로, 이극균은 이덕형의 5대조이다.[5]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이첨은 이덕형과 친족 관계였는데, 이덕형의 5대조 이극균은 이극돈의 동생으로, 이들 형제는 각각 이인손의 넷째 아들과 다섯째 아들이었다.[5]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이수충(李守忠) | |
할아버지 | 이진경(李振慶) | |
아버지 | 이민성(李民聖)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어머니 | 문화 류씨(文化柳氏) | 류예선(柳禮善)의 딸 |
외조부 | 류예선 | |
외조모 | 양세보(楊世輔)의 딸 | |
외삼촌 | 류전 | 영의정 |
외사촌 | 류희서 | 임해군에 의해 살해 |
처부 | 이산해(李山海) | |
배우자 | 한산 이씨 | |
장남 | 이여규(李如圭) | 판결사 |
차남 | 이여벽(李如璧) | 현감 |
삼남 | 이여황(李如璜, 1590 ~ 1632) | 관찰사 |
장녀 | 정기숭(鄭基崇)의 처 |
4. 평가
이덕형은 임진왜란 때 뛰어난 외교적,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국난 극복에 큰 공을 세웠다. 류성룡, 이항복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1]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여 성공하였고, 이여송을 수행하며 군사 정책을 수행하였다.[1]
광해군 시대에는 올바른 정치를 주장하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면모를 보였다. 그의 이러한 곧은 절개와 우국충정은 이항복과의 깊은 우정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1]
5. 저서
《한음문고》
6. 관련 드라마
다음은 이덕형을 연기한 배우들이다.
작품명 | 방송사 | 방영 연도 | 배우 |
---|---|---|---|
임진왜란 | MBC | 1985년~1986년 | 이영후 |
서궁 | KBS 2TV | 1995년 | 김시원 |
천둥소리 | KBS 2TV | 2000년~2001년 | 김경하 |
왕의 여자 | SBS | 2003년~2004년 | 김호영 |
불멸의 이순신 | KBS1 | 2004년~2005년 | 최재원, 황준욱 |
징비록 | KBS1 | 2015년 | 남성진 |
화정 | MBC | 2015년 | 이성민 |
참조
[1]
웹인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1) 한음 이덕형의 생애와 흔적을 찾아서(上)
http://news.khan.co.[...]
[2]
역사기록
제독 접반사 이덕형이 찰원에게 남쪽 왜적의 섬멸을 청할 일로 보고하다
선조실록
1593-09-05
[3]
웹사이트
이덕형-과거 및 취재
http://people.aks.ac[...]
2016-03-13
[4]
역사기록
간원이 독서당 간택을 다시 할 것을 청하다
선조실록
1591-08-10
[5]
문서
촌수로는 12촌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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