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 (조선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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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명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인홍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북인에 속했으나 인목대비 폐모론을 계기로 중북파에 속했다. 광해군 때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인조 반정 이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여 관직에 복귀했다. 이후 호조판서를 역임하며 재정을 관리했으나, 강압적인 국고 축적으로 사헌부의 비판을 받았다. 만년에 중풍으로 사망했으며, 인조는 그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다.
이명은 정인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권신 이량의 손자였지만 이이첨 등의 도움으로 청요직에 오를 수 있었다. 훈구 척신의 후손이었음에도 북인 당원이 되었고, 인목대비 폐모론을 계기로 이이첨과 갈라서면서 중북파에 속하게 되었다.
인조는 그가 죽자 이틀간 조회를 철조하고 예장과 부의를 보냈다. 그는 경기도 장단군 장현내면(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사향(巳向)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전후 두 부인 송씨(宋氏)와 양씨(梁氏)도 같은 언덕에 안장되었다.
2. 생애
1608년(광해군 즉위) 광해군 즉위 직후 설서, 정언이 되었고, 길주목사 성우길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609년 평안, 경상도 흉년에 구황책을 건의하고, 사간원 정언, 예조좌랑, 시강원 사서, 문학, 지평 등을 역임했다. 실록 편찬을 잘못한 자와, 청도군수 이준, 예빈시 주부 김용 등을 탄핵했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에게 생모 추숭의 부당함을 여러 번 아뢰고, 여악 설치를 반대했다. 이후 정언, 지평, 헌납, 이조좌랑, 겸문학, 세자시강원문학, 이조정랑, 교리, 응교 등을 역임했다. 1613년 영창대군에게 죄를 주는 것에 반대하다 파직되었고, 1614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공격받고 사직했다.
1615년 심경의 옥사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풀려났고, 1617년 형의 병구완을 위해 풀려났다. 1618년 소명국의 옥사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서천 군수로 발령받았다. 1621년 승지로 기용되었고, 1622년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이이첨과 대립하다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귀의 추천으로 관직에 복귀했다. 폐세자 관련 문서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풀려나고, 비변사로부터 장수의 재질이 있는 선비로 추천받았다. 162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가자되었다.
이후 모문룡과 이완의 대립 중재, 경기도, 함경도, 경상도, 황해도 관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637년 호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로부터 가혹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인조의 신임으로 여러 차례 호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정헌대부, 숭정대부로 승진했다. 그러나 1644년 사헌부의 탄핵과 비변사의 청으로 호조판서에서 물러났다.
1645년 광녕 독운사,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중풍으로 사퇴,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648년 한성부 자택에서 중풍으로 사망했고, 아들 이민화가 원종공신에 오르면서 증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인조실록에는 이명이 기국은 있으나 혹독하고 난폭했으며, 호조판서 재직 시 능하다는 평가는 있었으나 백성을 수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
정인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권신 이량의 손자였기에 청요직에 오를 수 없었으나, 이이첨 등의 힘으로 청요직에 등용되었다. 훈구 척신의 후손이었으나 정인홍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북인 당원이 되었고, 이이첨 등과 교류하다가 후일 인목대비 폐모론을 계기로 이이첨과 의견이 갈려 중북파에 속하게 되었다.
2. 2. 광해군 시대 활동
정인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권신 이량의 손자였기에 청요직에 오를 수 없었으나, 이이첨 등의 힘으로 청요직에 올랐다. 훈구 척신의 후손이었으나 정인홍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북인 당원이 되었고, 이이첨 등과 가깝게 지내다가 인목대비 폐모론을 계기로 이이첨과 의견이 갈려 중북파에 속하게 되었다.[1]
1608년(광해군 즉위) 광해군 즉위 직후 설서가 되고, 그해 정언이 되었다.[1] 정언으로 재직 중 공무를 소홀히 하고 청탁을 받은 길주목사 성우길(成佑吉)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1] 1609년(광해군 1년) 다시 정언이 되어 평안, 경상도 양도에 흉년이 들어 구황책을 건의하였다.[1] 그해 사간원 정언, 예조좌랑, 시강원 사서를 거쳐 두 달만에 시강원 문학으로 승진했다. 이듬해 다시 정언이 되고 한달 후 지평이 되었다.[1] 실록편찬을 잘못한 자와, 고령자인 청도군수(淸道郡守) 이준(李浚)의 직무 부적합성, 예빈시 주부 김용 등을 탄핵하여 파면, 처벌케 했다.[1]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에게 생모 추숭의 부당함을 여러번 아뢰었으나 거절당했다.[1] 지평으로 재직 중 여악의 설치를 여러번 반대했으나 거절당했다.[1] 그해 다시 정언, 지평, 이듬해 다시 여러번 사헌부지평에 재임명되었다가, 헌납으로 승진됐다.[1]
1611년 헌납, 이조좌랑, 지평, 1612년 겸문학, 지평, 다시 지평에 재임명됐다가 1612년 겸 세자시강원문학, 이조좌랑, 이조정랑, 1613년 교리, 지평, 헌납, 이조정랑, 응교 등을 지냈다.[1] 1613년 홍문관응교로 재직 중, 영창대군에게 죄를 주는 것의 부당하다고 주장하다 파직됐다.[1] 1614년(광해군 6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소극적이라는 이유와 영창대군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대북계 양사로부터 여러번 공격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1] 이어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다.[1]
1615년 절친한 동문인 심경(沈憬)의 옥사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다.[1] 그러나 죄적에 있었고, 1617년 형 이충이 병에 걸리자 병구완을 목적으로 풀려났다.[1] 1618년(광해군 10년) 소명국(蘇鳴國)의 옥사에 연루되기도 했다.[1] 그해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발령받았다.[1] 1621년 서용의 명을 받고, 승지로 기용되었다.[1] 1622년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이이첨과 대립하다가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1]
2. 3. 인조반정 이후 활동
1623년 인조반정 직후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하여 절의를 세웠다는 이유로 이귀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갔다.[1] 그해 폐세자 지가 소지한 문서에 황해 순영 서간(黃海巡營書簡)이라는 언급이 있어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별 혐의점 없어, 그는 삭탈관직하고 풀어주는 선으로 종결되었다.[1] 그해 11월 비변사로부터 선비로서 장수의 재질이 있는 10명 중 1인으로 추천받았다.[1] 162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그해 이괄의 난 당시 가장 먼저 군사를 이끌고 충남 공주의 행재소에 인조를 뵈러 왔다는 이유로 상을 받고 가자되었다.[1] 이때 이명은 그가 거느리고 온 2천 명의 군사를 나누어 일부는 임금을 호위하게 하고, 나머지 일부의 군사를 자신이 직접 거느리고 이괄군과 맞서 싸우겠다고 요청했다가 병조판서 김류의 반대로 중지되었다.[1]
1626년 모문룡과 이완이 대립하자, 조정에서 사건을 중재할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천거받았으나 이귀로부터 재주는 있으나 눈병이 심하다는 지적을 받았다.[1] 1627년 1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그해 7월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1] 1629년 경상도 관찰사가 됐다가 1632년 다시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1] 그해 겨울에 형조참판이 되었다.[1] 1633년 다시 함경도 관찰사 재직 중 업적을 많이 세웠다며 비변사의 추천으로 함경도 관찰사에 재임명됐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1] 이후 호조, 병조, 형조참판을 지냈다.[1] 1636년 산성에 들어오지 못한 경기도관찰사 서경우가 파직되자,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1] 호조참판을 거쳐 1637년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1]
그가 호조판서에 임명되자 대사헌 이식은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우며 융통성이 없다고 반대했다.[1] 그러자 그는 자신은 호조판서를 맡을 수 없다며 사양했으나 인조는 그를 호조판서로 임명했다.[1] 사헌부로부터 사무를 잘 처리하여 이름을 얻었지만 사람됨이 거칠고 사납다, 일을 맡으면 둔하고 막힌다, 여러 번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 혹독하게 강압을 일삼는다며 반대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1] 1638년 형조판서, 그해 9월 다시 호조판서, 1639년 1월 다시 호조판서에 임명되자, 나이 70세가 되어 치사를 청했으나 그의 재주를 인정한 인조는 그를 특별히 정헌대부로 승진시켜 다시 계속 호조판서직에 유임했다.[1] 1643년 1월 인조는 호조 판서 이명(李溟)은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나의 뜻에 부응하니, 특별히 한 자급을 올려 주라며 숭정대부에 승품되었다.[1] 그러나 서인 당원 사관들은 그가 아랫사람을 수탈하고 윗사람에게 아부하며,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으므로, 그가 가는 곳마다 원성이 자자하였는데, 어찌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곧 백성의 해충이고 나라의 좀 벌레라며 비토하였다.[1] 1644년 다시 호조판서에 재임명되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반려당했다.[1]
1644년 사헌부의 관원들로부터 강압적으로 국고를 축적한다며 여러 번 비판을 당하였다.[1] 사헌부지평 이산(李山+專)이 그가 백성의 고혈을 짜서 나라의 관고를 채우며 가혹하다며 탄핵하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1] 이후 집의 김익희, 장령 이시만 등으로부터 호조판서로 재직하는 7년간 가렴주구를 일삼아 부고를 채웠다며 탄핵했다.[1] 이후 양사의 거듭된 탄핵과 1644년 10월 9일 비변사의 청으로 호조판서에서 체차되었다.[1]
1645년 광녕 독운사(廣寧督運使)에서 해직된 이행원을 대신해 광녕 독운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중풍으로 사퇴, 중추부, 비변사 등의 관직을 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1]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어 전의제조(典醫提調)를 겸임했다.[1] 1648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그해 한성부 서쪽 장릉 근처 자택에서 중풍으로 사망했다.[1] 후에 아들 이민화가 원종공신에 오르면서 증 좌찬성에 추증되었다.[1]
인조실록에는 기국이 있었으나 너무 혹독하고 난폭하였다. 호조판서로 있던 7년 동안에 상당히 능하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취렴(聚斂)했다는 것으로 비난했다는 평이 있다.[1]
2. 4. 호조판서 재임과 비판
1637년 이명은 호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 대사헌 이식은 그의 거칠고 융통성 없는 성격을 이유로 반대했다.[1] 그러나 인조는 이명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임명을 강행했다. 사헌부는 이명이 지방관 시절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고 비판했지만, 인조는 듣지 않았다.[1]
1639년, 인조는 70세가 된 이명이 치사를 청하자, 그의 재주를 아껴 정헌대부로 승진시키고 호조판서에 유임시켰다.[1] 1643년 인조는 이명이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자신의 뜻에 부응한다며 숭정대부로 승진시켰다.[1] 그러나 서인 당원 사관들은 이명이 아랫사람을 수탈하고 윗사람에게 아부하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고 비판했다.[1]
1644년, 사헌부는 이명이 강압적으로 국고를 축적한다며 여러 번 비판했다.[1] 사헌부 지평 이인(李山+專)은 이명이 백성의 고혈을 짜서 관고를 채운다며 탄핵했고, 집의 김익희, 장령 이시만 등도 이명이 7년간 가렴주구를 일삼았다고 비판했다.[1] 결국 이명은 양사의 거듭된 탄핵과 비변사의 청으로 호조판서에서 물러났다.[1]
인조실록에는 이명이 기국은 있었으나 혹독하고 난폭했으며, 호조판서 재직 7년간 능하다는 평가는 있었으나 백성을 수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1]
2. 5. 말년
1623년 인조 반정 직후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한 절의를 세웠다는 이유로 이귀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다시 나갔다. 그해 폐세자 지가 소지한 문서에 황해 순영 서간(黃海巡營書簡)이라는 언급이 있어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삭탈관직하고 풀어주는 선에서 사건이 종결되었다.[1] 그해 11월 비변사로부터 선비로서 장수의 재질이 있는 10명 중 한 명으로 추천받았다.[1] 162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그해 이괄의 난 당시 가장 먼저 군사를 이끌고 충남 공주의 행재소에 인조를 뵈러 왔다는 이유로 상을 받고 가자되었다.[1] 이때 이명은 자신이 거느리고 온 2천 명의 군사를 나누어 일부는 임금을 호위하게 하고, 나머지 일부 군사는 자신이 직접 거느리고 이괄군과 맞서 싸우겠다고 요청했으나 병조판서 김류의 반대로 중지되었다.[1]
1626년 모문룡과 이완이 대립하자, 조정에서 사건을 중재할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천거받았으나 이귀로부터 재주는 있으나 눈병이 심하다는 지적을 받았다.[1] 1627년 1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그해 7월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1] 1629년 경상도 관찰사가 됐다가 1632년 다시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1] 그해 겨울에 형조참판이 되었다.[1] 1633년 다시 함경도 관찰사 재직 중 업적을 많이 세웠다며 비변사의 추천으로 함경도 관찰사에 재임명됐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1] 이후 호조, 병조, 형조참판을 지냈다.[1] 1636년 산성에 들어오지 못한 경기도관찰사 서경우가 파직되자,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1] 호조참판을 거쳐 1637년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1]
그가 호조판서에 임명되자 대사헌 이식은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우며 융통성이 없다고 반대했다.[1] 그러자 그는 자신은 호조판서를 맡을 수 없다며 사양했으나 인조는 그를 호조판서로 임명했다.[1] 사헌부로부터 사무를 잘 처리하여 이름을 얻었지만 사람됨이 거칠고 사납다, 일을 맡으면 둔하고 막힌다, 여러 번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 혹독하게 강압을 일삼는다며 반대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1] 1638년 형조판서, 그해 9월 다시 호조판서, 1639년 1월 다시 호조판서에 임명되자, 나이 70세가 되어 치사를 청했으나 그의 재주를 인정한 인조는 그를 특별히 정헌대부로 승진시켜 다시 계속 호조판서직에 유임했다.[1] 1643년 1월 인조는 호조 판서 이명은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나의 뜻에 부응하니, 특별히 한 자급을 올려 주라며 숭정대부에 승품되었다.[1] 그러나 서인 당원 사관들은 그가 아랫사람을 수탈하고 윗사람에게 아부하며,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으므로, 그가 가는 곳마다 원성이 자자하였는데, 어찌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곧 백성의 해충이고 나라의 좀 벌레라며 비판하였다.[1] 1644년 다시 호조판서에 재임명되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반려당했다.[1]
1644년 사헌부의 관원들로부터 강압적으로 국고를 축적한다며 여러번 비판을 당하였다.[1] 사헌부지평 이인(李山+專)이 그가 백성의 고혈을 짜서 나라의 관고를 채우며 가혹하다며 탄핵하고 사직상소를 올렸다.[1] 이후 집의 김익희, 장령 이시만 등으로부터 호조판서로 재직하는 7년간 가렴주구를 일삼아 부고를 채웠다며 탄핵했다.[1] 이후 양사의 거듭된 탄핵과 1644년 10월 9일 비변사의 청으로 호조판서에서 해임되었다.[1]
1645년 광녕 독운사(廣寧督運使)에서 해직된 이행원을 대신해 광녕 독운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중풍으로 사퇴, 중추부, 비변사 등의 관직을 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1]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어 전의제조(典醫提調)를 겸임했다.[1] 1648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그해 한성부 서쪽 장릉 근처 자택에서 중풍으로 사망했다.[1] 후에 아들 이민화(李敏華)가 원종공신에 오르면서 증 좌찬성에 추증되었다.[1]
인조실록에는 기국이 있었으나 너무 혹독하고 난폭하였다, 호조판서로 있던 7년 동안에 상당히 능하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취렴(聚斂)했다는 것으로 비난했다는 평이 있다.[1]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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