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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17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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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승훈(1756년)은 1756년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자이다. 1784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한국 천주교 전파에 기여했으며, 한국 양반 계급 최초의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고, 북경을 방문하여 세례를 받은 후 귀국하여 초기 천주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으며, 그의 가족 역시 순교하며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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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1756년)
기본 정보
이름이승훈
다른 이름베드로 리
로마자 표기I Seunghun
한자 표기李承薰
출생일1756년
출생지서울, 조선
사망일1801년 4월 8일
사망지서울, 조선
직업양반
주요 활동초기 한국 천주교 개종자
인물 정보
활동 시기조선 후기
한국어 표기
한글이승훈
한자李承薰
로마자 표기I Seunghun
일본어 표기い・すんふん
종교
종교천주교

2. 생애

이승훈은 17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창 이씨 출신의 이동욱으로 참판(차관)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1801년 이승훈과 함께 순교한 이가환의 누이였다.[4] 1779년 이벽을 통해 처음으로 가톨릭과 접촉했다.[1]

1783년에서 1784년 사이, 아버지와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외교 사절단에 동행했고, 이벽의 제안으로 그곳의 가톨릭 사제들과 접촉하여 1784년 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는 한국 양반 계급 인물이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으로 세례받은 첫 사례였다.[1] 그는 책, 십자가, 그리고 다른 가톨릭 유물들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벽이 완전히 확신을 갖게 된 후에 이승훈은 자신과 다른 개종자들에게 가톨릭 세례를 베풀었다. 1785년 초 서울의 신자들은 이벽의 집에서 김범우의 집으로 정기적인 예배 모임 장소를 옮겼는데, 그곳은 현재 명동대성당이 있는 언덕 위에 있었다. 곧 당국은 그 집을 도박장으로 의심하여 급습했는데, 귀족들로 가득한 것을 보고 당황했다. 이승훈은 이 사건의 공식 보고서에 이름이 언급되었다.[2]

그해 후반 이벽이 사망한 후 이승훈은 그의 역할을 이어받았다. 1786년 봄, 한국에는 아직 정식으로 서품된 사제가 없었기에 최창현, 이탄원 등 여러 한국 평신도 지도자들이 "임시 사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789년 베이징의 주교 구베아(Mgr. Gouvea)로부터 그러한 관행은 교회 교리에 위배되므로 중단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3] 한국에 정식 서품된 사제는 1795년 중국인 사제 주문모가 도착할 때까지 없었는데, 그때 교회 신자 수는 4000명이 넘었다. 이벽이 1786년 사망한 후 이승훈과 정약종은 서울 공동체의 주요 지도자였다.

1801년 한국 가톨릭 교회는 정부의 첫 번째 대규모 탄압(신유박해)을 받았는데,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승훈은 1801년 2월 26일(음력, 양력 4월 8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4] 이 시기에 남아 있는 기록물은 거의 없지만, 1970년경 여러 초기 신자들의 글 모음인 『만천유고』(蔓川遺稿)가 발견되었다. ‘만천’은 이승훈의 호였으며, 그의 글이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이벽 등의 글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1784년 베이징에 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평양에서 기독교 예배소를 설립한 것이 조선에서의 기독교 시작이 된다.[5] 이승훈은 베이징에서 구베아 주교를 만나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는데, 선교사 뱅타봉(Vantavon)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6]

이 기록에서 이승훈이 천주교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베이징에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7]

2. 1. 출생과 성장

盤石坊중국어 중림동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3] 아버지는 참판 이동욱이며, 어머니는 공조판서를 지낸 이가환(李家煥)의 누이이다. 장성하여 마재[馬峴]의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약전, 정약현, 정약종, 정약용과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10]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20세 전후에 고명한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780년(정조 4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14] 벼슬에는 큰 뜻이 없어 학문에 전념하였다.[15]

17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창 이씨 출신의 소암 이동욱(蘇巖 李東郁, 1739-?)으로 참판(차관)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1801년 이승훈과 함께 순교한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의 누이였다.

이승훈은 1779년 이벽을 통해 처음으로 가톨릭과 접촉했다.

2. 2. 천주교 입문

그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 학문, 즉 서학은 남인 소장 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고, 이승훈도 자연스럽게 서학을 접하게 되었다.[10] 그는 서학 모임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벽과 친분을 맺으며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10] 1777년부터 1779년까지 이벽, 정약용, 권일신 등 남인 소장파 학자들과 함께 천진암과 주어사라는 외딴 절에서 서양 학문과 천주학을 연구하고 강학회를 열기도 했다.[16] 강학회에 참석했던 이들 중 일부는 천주학 교리를 실천적인 학문으로 받아들여 주일을 제정하여 지키기도 했다. 양력이 도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음력으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주일로 정하여 엄격하게 지켰다.[17] 그러나 이승훈은 서양 역법과 기하학 등에 많은 관심을 가졌을 뿐, 천주교 교리를 듣고 좋아하기는 했지만 교리를 따르지는 않았다.[18]

이승훈은 1779년 이벽을 통해 처음으로 가톨릭을 접했다. 1783년에서 1784년 사이, 그는 아버지와 함께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 베이징으로 갔고, 이벽의 제안으로 그곳의 가톨릭 사제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1784년 봄, 이승훈은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 양반 계급 인물이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은 첫 사례였다.[1] 그는 책, 십자가, 그리고 다른 가톨릭 유물들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2. 3. 북경 방문과 세례

1783년(정조 7년) 황인점을 정사(正使)로 하는 사절단이 구성될 때,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북경에 가게 되었다.[19] 이 소식을 접한 이벽이 이승훈을 찾아와 사절단에 동행하여 천주학 자료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16] 이승훈이 승낙하자 이벽은 천주학을 연구하던 이들과 함께 여비를 모아 주며[20] 교리와 그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필 것 등 여러가지를 상세히 일러주었다.[21] 11월 8일(음력 10월 14일) 한양을 떠나 1784년 1월 13일(1783년 음력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했다.[22]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천문학, 수학, 과학을 배우며 견문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

이승훈은 북경 북천주당을 찾아가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는데, 신묘하고 오묘한 가르침에 끌렸고 결국 자진하여 세례 받기를 청하였다.[23] 1784년 음력 1월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24]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25] 당시 북경에 있던 서구 선교사들은 이 사건을 매우 놀라워했다.[23][26] 선교사가 가서 찾아보지도 않은 미개척지의 젊은 청년이 자진하여 찾아와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된 사례는 로마 가톨릭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19]

선교가 아닌 구도(求道)에 의해서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된 이승훈은 1784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기하학, 각종 과학서적, 성서, 천주교 자료, 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에 돌아왔다.

2. 4. 초기 천주교회 설립과 전교 활동

이승훈은 북경 북천주당에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우며 깊이 감화받아 자진하여 세례를 청했다.[23] 1784년 음력 1월,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24][25] 당시 북경의 서구 선교사들은 이 사건에 매우 놀랐는데, 선교사가 파견되지 않은 나라의 젊은이가 스스로 찾아와 세례를 받은 것은 로마 가톨릭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19][23][26]

구도(求道)를 통해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된 이승훈은 1784년(정조 8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기하학, 과학 서적, 성서, 천주교 자료, 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으로 돌아왔다.[19] 귀국 후 이승훈은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벽의 집을 거점으로 전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벽은 권철신, 권일신 형제를 비롯하여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지황 등 중인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파했다. 권일신은 이단원(천안), 이존창(아산), 유항검(전주) 등을 입교시켰는데, 이들은 훗날 충청 내포 지역 천주교회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7]

초기에는 양반 남성을 중심으로 전교가 이루어졌으나, 점차 중인, 상인, 부녀자들에게도 전교가 확대되었다. 부녀자 전교는 이벽의 부인 유한당 권씨, 이승훈의 부인 나주 정씨, 권일신의 부인 광주 안씨 등 양반 신자 부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서울 수표동 이벽의 집에 모여 신앙 활동을 하였으나, 양반 집에 중인과 상민의 출입이 잦아지자 주변의 이목을 끌었고, 장소도 비좁아졌다. 이에 명례방(현 명동)에 있는 중인 출신 역관 김범우의 집으로 모임 장소를 옮겼다.[27]

2. 5. 명례방 사건과 시련

1785년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은 오늘날 천주교 연구가들에게 '명례방공동체'라고 불리며,[28] 이 신앙 공동체 모임은 조선 천주교회의 시작으로 여겨진다.[29][30][31] 그러나 이 비밀 모임은 이듬해 3월 형조 포졸에게 적발되어 참석자 전원이 체포되었다.[32] 모임 장소를 제공한 김범우만이 투옥되었고, 이승훈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훈방되었다.[32]

석방된 권일신 등 다섯 사람은 형조에 가서 압수한 성상과 물건들을 돌려달라고 항의했다.[32] 형조판서 김화진은 사건 확대를 막고자 압수 물품을 돌려주고 김범우밀양으로 유배보내 사건을 마무리했다.[32] 김범우고문으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1787년 귀양지 밀양에서 사망했다.[33][34]

사건 직후 성균관 유생들이 천주교 배척을 요구하는 통문을 돌려[35] 양반 출신 천주교도들과 양반 가문을 압박했다. 이승훈은 친척, 가족, 문중의 거센 추궁에 시달리다 천주 서적을 불태우고, 천주학을 사학이라 배척한다는 내용의 벽이문(闢異文)을 작성하여[12][37][38]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고 교회를 떠났다.[39] 이벽은 부친과 갈등 속에 식음을 전폐하다 사망했다.[40] 이로 인해 신앙 모임의 주축이었던 양반 출신 교인들이 배교하고 떠나면서 '명례방 공동체'는 와해되었다.

2. 6. 가성직 제도와 성직자 영입 운동

1786년, 이승훈은 은밀히 회심하여 다시 복교한 이들과 조직 재건에 힘썼다.[41] 그는 북경 교회 체제를 본떠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 정약전, 최창현, 유항검, 이존창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하여 교회를 운영했다.[42][43] 그러나 교리문답을 연구하던 중, 사도의 계승을 받은 성직자 없이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교회법에 어긋날 수 있다는 의문이 생겼다.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북경 교구가 담당하였으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경의 주교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해야 했다. 1789년, 이승훈은 윤유일을 밀사로 임명하여 동지사를 따라 북경에 가서 구베아 주교에게 답신을 받아오게 했다.[44]

윤유일은 1790년 3월에 귀국하여, 그가 가져온 회답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는 교회법에 어긋나는 가성직 제도를 폐지하고 자치 교회를 해체하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시작했다.[45] 1790년 9월,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윤유일을 다시 북경에 밀사로 파견했다.[44]

2. 7. 반회 사건과 신해박해

1787년(정조 11) 10월경, 반촌의 김석태(金錫泰) 집에서 정약용, 이승훈, 강이원 등이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토론했다.[46] 이 사실을 안 이기경(李基慶)이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에게 알리자, 척사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랐다. 이로 인해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처벌은 없었으나, 천주교 서적의 도입과 유포가 문제되어 조정에서 그 폐해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47] 한글 번역 천주교 서적은 목판으로 간행되어 저렴한 가격에 팔렸고, 충청도 산골마을에까지 보급되었다.[47] 1788년 8월 이경명이 서학 엄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48] 정조는 전국에 천주교 관련 서학서적을 색출, 소각하라는 명을 내렸다.[49]

1790년 음력 10월 음서로 관직에 나가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고,[50] 1791년(정조 15년, 신해년) 2월 서부도사를 거쳐[51] 6월에 평택현감으로 부임하였다.[52] 이때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이 돌아와 선교사를 보내주겠다는 중국 교회의 약속과 함께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 구베아(Gouvea)의 명을 전달받았다.[10] 이승훈은 제사불가라는 교리에 심히 고민하다가 다시 배교를 선택한다. 그의 신앙의 출발은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를 통해 주장한 보유론(補儒論)에 기반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훈은 세도정치, 쇄국과 개화, 근대화, 제국열강의 침노속에 무능한 조선조정 등 조선후기의 혼란속에서 지배이념으로서의 유학의 한계를 천주학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유교적 가치와 천주교회법의 충돌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어 고민하던 끝에 다시 교회를 떠났다.[10]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이 천주교도로서 조상제사 불가 등의 종교적 가르침을 지키고자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후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 파장이 일어나는 진산사건이 발생했다. 윤지충이 남인이었던 관계로 서인들의 공격을 받으며 당쟁으로 비화됨에 따라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하에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참수당했다. 이승훈은 조상제사 불가라는 교리 때문에 이미 배교를 한 상태였으나 반회사건(1787년)이 빌미가 되어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었다. 서양 서적을 구입해 온 사실 등으로 문초를 받고 관직을 삭탈당했으며(음력 11월)[53][54][55] 권일신은 예산으로 귀양을 가던 중 고문으로 얻은 장독(杖毒)으로 죽었다.[56] 이승훈은 투옥 중 이미 배교했다는 변론이 받아들여져 곧 석방되었다.[37][57] 1792년 초에는 한해 전에 평택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다는 소문 때문에 다시 한 번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2. 8. 을묘박해와 말년

1795년 중국에서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하자, 배교 후 천주교인들과 교류를 끊었던 이승훈은 다시 교인들과 접촉하였다.[58] 같은 해 6월, 포도청이 주문모 신부 체포에 실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59] 이 사건 관련자로 최인길, 윤유일, 지황이 체포되어 순교하였고, 이승훈도 연루되었다는 서인들의 모함으로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승훈은 유배 생활 중 〈유혹문 牖惑文〉을 지어 유포하고, 1796년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주자백록동연의 朱子白鹿洞衍義〉를 짓는 등 천주교 활동을 단절한 입장을 밝혔다.[58]

2. 9. 신유박해와 순교

1801년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대비의 섭정 하에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는 집권 세력인 노론이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이를 빌미로 남인들을 숙청하여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60] 정약종, 이가환, 권철신, 주문모, 강완숙 등 약 300명이 처형되었고, 정약용정약전 등 많은 사람들이 유배되었다. 이승훈도 체포되어 서대문 형장에서 사형당했다.[60]

이승훈은 1784년 베이징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1] 1795년에는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천주교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와 함께 조선 천주교 공동체를 이끌었다.[3]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이승훈은 1801년 2월 26일(음력, 양력 4월 8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4] 1868년 그의 뒤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순교하고, 1871년 증손까지 순교하여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60]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이태석(李泰錫)
할아버지이광직(李光溭)
아버지이동욱(李東旭)
어머니여주 이씨(驪州 李氏) - 이용휴의 딸, 이가환의 누이
동생이치훈(李致薰)
부인나주 정씨(羅州 丁氏) - 정약전, 정약용의 누이
장남
차남
삼남이신규(李身逵)



정약용은 그의 묘지명에 이승훈의 가족 관계를 기록했다.[1]

참조

[1] 서적 Confucius et Jesus Christ Beauchesne
[2] 서적 Confucius et Jesus Christ Beauchesne
[3] 서적 Confucius et Jesus Christ Beauchesne
[4] 서적 Confucius et Jesus Christ Beauches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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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논문
[7]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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