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시 마사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시바시 마사시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대만에서 태어나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징집되어 육군 조장으로 복무했다. 1951년 일본사회당에 입당하여 나가사키현 의원을 거쳐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당내에서 비무장 중립론을 주장했다. 1970년 사회당 서기장, 1983년 위원장을 역임했으나 1986년 총선 참패 후 사임했다. 이후 정계 은퇴 후 1994년 훈1등 욱일대수장 서훈을 거절했으며, 2019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통일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란현 출신 - 진안 (농구 선수)
진안은 2013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WKBL 최초 귀화 선수 드래프트 진출 기록을 세운 대한민국 여자 농구 선수로, 2024년 부천 하나원큐와 FA 계약을 맺었으며 WKBL 퓨처스리그 MVP를 2회 수상했다. - 이란현 출신 - 궈싱춘
중화민국의 아메이족 출신 역도 선수 궈싱춘은 여자 58kg급과 59kg급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올림픽, 세계 선수권 대회, 아시안 게임, 유니버시아드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2020년 하계 올림픽 여자 59kg급에서는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받았다. - 일본사회당 위원장 - 아사누마 이네지로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으로서 일본 노농당 창립, 도쿄 시의회 의원, 국회 의원, 사회당 재건, 헌법 9조 개정 및 재군사화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나,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개정 반대 투쟁 중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 일본사회당 위원장 - 도이 다카코
도이 다카코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헌법학자로, 일본사회당과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일본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당수이자 중의원 의장을 역임했고,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에 기여, 진보적인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납북자 문제 대응 및 당 운영에 대한 비판과 친북 성향 논란 등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 일본의 노동 운동가 - 가가와 도요히코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의 기독교 사회주의자이자 사회운동가, 소설가로서, 빈민 구제, 노동 운동, 농민 운동, 협동조합 운동 등 사회 개혁에 헌신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전시에는 제국주의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여 비판을 받았고, 전후에는 정치 활동과 세계 평화 운동에 힘썼다. - 일본의 노동 운동가 - 다나베 마코토
다나베 마코토는 1922년 출생하여 일본사회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을 지냈고, 사회당 위원장을 역임하며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의 변모를 이끌었으며, 이후 민주당에서 활동하다 2015년 사망했다.
이시바시 마사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원어 이름 | 석교 정사 (石橋 政嗣) |
출생일 | 1924년 10월 6일 |
출생지 | 타이완 타이호쿠주이란군이란시 (현재 타이완이란현) |
사망일 | 2019년 12월 9일 |
사망지 | 일본후쿠오카현후쿠오카시 |
교육 |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 (현재 타이완 대학)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일본사회당 |
이전 소속 정당 | 사회당 좌파 |
직책 | 일본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나가사키현 제2구 (중선거구) (구) |
당선 횟수 | 12회 |
임기 시작일 | 1955년 2월 27일 |
임기 종료일 | 1990년 1월 24일 |
당 대표 경력 | |
직책 |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
임기 시작일 | 1983년 9월 7일 |
임기 종료일 | 1986년 9월 8일 |
이전 대표 | 아스카타 이치오 |
다음 대표 | 도이 타카코 |
기타 | |
로마자 표기 | Ishibashi Masashi |
2. 생애
대만일치시기 대만 다이호쿠주 기란군 기란가(지금의 이란현)에서 대만총독부 관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이베이 시립 건궈 고등학교를 거쳐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현 타이완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격화하면서 학생 징병 유예 제도가 폐지되어 학교를 조기 졸업한 뒤 징집되어 구마모토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다음 해인 1945년 견습사관이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전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조장이다.
1946년 구직을 위해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 갔다가 동향 사람의 소개로 미군을 위한 근로봉사대에 가입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학력을 가졌던 이시바시는 금방 노동자 대표가 되었고 21살의 나이로 사감이 되었다. 1947년 기지내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해 서기장이 되었다.
1951년에는 정계에 투신해 일본사회당에 가입한 뒤 나가사키현의회 의원이 되었다. 사회당이 분열하자 사회당 좌파에 속했으며 1955년에는 나가사키현 2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당내에서 와다 히로오의 파벌에 속했다. 이시바시는 방위 문제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960년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당시 기시노부스케를 압박했다.
1966년 비무장 중립론을 제창하며 자위대를 국민경찰대로 개편해 점진적으로 축소하여 비무장 중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당은 창당 초기에만 해도 군과 자위권을 인정하고 「일본국 헌법」 제9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았기에 이시바시의 주장은 강한 비판에 직면했다. 하지만 1980년에 사회당 기관지국에서 『비무장 중립론』이라는 책을 펴냈을 땐 30만 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70년 제34회 정기대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됐고 이후 7년 동안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와 합을 맞췄다. 이시바시는 경비를 절약해 당의 재정을 재건코자 했으며 한편으로 당의 공식 문서에 쓰이는 말을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말로 쓰도록 하고 당원들에게 일상 생활을 권하는 등 침체에 빠진 당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시바시의 노력은 일시적인 효과는 있었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1977년 제1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자 책임을 지고 나리타와 함께 동반 사임했다. 이후 위원장이 된 아스카타 이치오에 의해 부위원장이 되었지만 아스카타가 소장파 의원인 바바 노보루를 서기장에 발탁하자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사임했다.
1983년 제1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아스카타가 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이시바시가 후임 위원장이 되었다. 이시바시는 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비무장 중립론을 세계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회당의 존재감을 내세우고자 했고 공명당, 민사당과 제휴하여 사공민 노선을 추진했다. 자위대에 대해서도 위헌이지만 합법이란 논리를 내세우며 장래에는 자위대가 사라져야 하지만 자위대가 존재하는 지금의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위헌합법론에 대해 당내 비판이 일자 이시바시는 1표의 차이가 너무 커서 위헌이라 판결한 선거 결과를 합법이라 인정한 최고재판소의 판결문을 바탕으로 위헌합법론을 위헌법적 존재로 수정했다.
1986년에 「일본사회당 신선언」을 채택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목표로 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해 1964년에 채택된 「일본에서 사회주의로의 길」을 역사적 문서로 규정하고 사회당이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사회당은 여당인 자유민주당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시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며 이를 막아버렸다. 이시바시는 사회당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든 반대하는 정당이 아니고 일본공산당을 포함한 야당이 공투하는 것도 아닌 자민당과 교대로 정권을 담당할 수 있는 정당으로 인정받는 것이라 믿었다. 서구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외교나 안보 등 국가의 기본 정책에서 보수와 비슷한 입장에 서 있으며 생활에 뿌리를 둔 세부 정책에서 경쟁하는 현실적 노선을 취하고 있는데 사공민 노선이 이를 위한 제일보가 될 수 있다고 이시바시는 생각했다.
하지만 국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겉으로만 자민당과 대립하고 물밑에선 국대 정치를 통해 자민당과 협상하는 것이 당시 사회당의 현주소였다. 지방 정치에선 한 층 더 나아가 자공민 연립에 사회당까지 참여한 올 여당 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정책 입안 능력을 상실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떨쳐내지 못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밀월 관계를 형성하고 비무장 중립론에 집착하는 모습은 유권자들이 사회당으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사회당을 떠난 유권자들은 자민당 내 개혁파에게 기대를 거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986년 6월 총선에서 사회당은 1955년 통합 이래 86석이라는 가장 낮은 기록을 남기며 참패했다. 이시바시는 책임을 지고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후임 위원장이 된 도이 다카코에게 중도 정당과의 제휴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도이도 이를 받아들였지만 당내 좌파는 이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 다만 자민당이 추진한 소비세 도입 문제에 대해선 중도 정당과 함께 반대했다.
1990년 총선을 앞두고 도이는 사회당이 180명을 입후보시키며 이시바시에게도 협력을 구했지만 이시바시는 다른 야당과의 신뢰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며 거부했다. 그리고 도이의 정책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사회당은 149명을 입후보시켰고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을 다 합치면 257명을 입후보시켰는데 자민당은 혼자서 338명을 입후보시켜 격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다만 이른바 도이 붐을 일으키는 데 성공해 136명이 당선하여 제1야당으로의 체면은 지켜냈다.
은퇴한 이시바시는 회상록 등을 집필하며 여생을 보냈다. 1994년 총리부 상훈국에서 훈1등 욱일대수장 서훈 의사를 타진했지만 거절했다. 상훈국은 10년 동안 꾸준히 서훈 의사를 밝혔지만 이시바시는 마지막까지 거절했다.
2019년 후쿠오카시의 한 병원에서 향년 95세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이시바시 마사시는 일본 통치 시대 타이완 자오시(礁渓) 촌에서 타이완 총독부 관리였던 이시바시 마사하치로(石橋政八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이베이 일중(台北一中)(현 타이베이 시립 건궈 고등학교)을 거쳐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현 타이완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전황 악화로 학생 징병 유예 제도가 폐지되면서, 1944년에 고등상업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군에 입대했다. 쿠마모토 육군 예비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견습 사관이 되었을 때 종전을 맞이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조장이었다.1946년, 일자리를 찾아 나가사키현 사세보시로 간 이시바시는 고향 사람 소개로 주둔군을 위한 "근로 봉사대"의 일원이 되었다. 현지 노동자 중 가장 학력이 높았던 이시바시는 곧 노동자 대표로 여겨지게 되었고, 21세에 사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에는 기지 내에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 그 서기장이 되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타이완 자오시(礁渓) 촌에서 타이완 총독부 관리였던 이시바시 마사하치로(石橋政八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이베이 시립 건궈 고등학교를 거쳐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현 타이완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악화되자 학생의 징병 유예 제도가 폐지되었고, 1944년에 고등상업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군대에 편입되었다. 이후 쿠마모토 육군 예비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에 견습 사관이 되었을 때 종전을 맞이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조장이었다.1946년, 일자리를 찾아 나가사키현 사세보시로 간 이시바시는 고향 사람의 소개로 주둔군을 위한 "근로 봉사대"의 일원이 되었다. 현지 노동자 중 가장 학력이 높았던 이시바시는 곧 노동자 대표로 여겨지게 되었고, 21세에 사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에는 기지 내에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 그 서기장이 되었다.
2. 3. 전후 활동
대만일치시기 대만 다이호쿠주 기란군 기란가(지금의 이란현)에서 대만총독부 관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이베이 시립 건궈 고등학교를 거쳐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현 타이완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격화하면서 학생 징병 유예 제도가 폐지되어 학교를 조기 졸업한 뒤 징집되어 구마모토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다음 해인 1945년 견습사관이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전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조장이다.1946년 구직을 위해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 갔다가 동향 사람의 소개로 미군을 위한 근로봉사대에 가입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학력을 가졌던 이시바시는 금방 노동자 대표가 되었고 21살의 나이로 사감이 되었다. 1947년 기지내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해 서기장이 되었다.
1951년에는 정계에 투신해 일본사회당에 가입한 뒤 나가사키현의회 의원이 되었다. 사회당이 분열하자 사회당 좌파에 속했으며 1955년에는 나가사키현 2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당내에서 와다 히로오의 파벌에 속했다. 이시바시는 방위 문제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960년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당시 기시노부스케를 압박했다.
1966년 비무장 중립론을 제창하며 자위대를 국민경찰대로 개편해 점진적으로 축소하여 비무장 중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당은 창당 초기에만 해도 군과 자위권을 인정하고 「일본국 헌법」 제9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았기에 이시바시의 주장은 강한 비판에 직면했다. 하지만 1980년에 사회당 기관지국에서 『비무장 중립론』이라는 책을 펴냈을 땐 30만 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70년 제34회 정기대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됐고 이후 7년 동안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와 합을 맞췄다. 이시바시는 경비를 절약해 당의 재정을 재건코자 했으며 한편으로 당의 공식 문서에 쓰이는 말을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말로 쓰도록 하고 당원들에게 일상 생활을 권하는 등 침체에 빠진 당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시바시의 노력은 일시적인 효과는 있었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1977년 제1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자 책임을 지고 나리타와 함께 동반 사임했다. 이후 위원장이 된 아스카타 이치오에 의해 부위원장이 되었지만 아스카타가 소장파 의원인 바바 노보루를 서기장에 발탁하자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사임했다.
1983년 제1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아스카타가 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이시바시가 후임 위원장이 되었다. 이시바시는 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비무장 중립론을 세계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회당의 존재감을 내세우고자 했고 공명당, 민사당과 제휴하여 사공민 노선을 추진했다. 자위대에 대해서도 위헌이지만 합법이란 논리를 내세우며 장래에는 자위대가 사라져야 하지만 자위대가 존재하는 지금의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위헌합법론에 대해 당내 비판이 일자 이시바시는 1표의 차이가 너무 커서 위헌이라 판결한 선거 결과를 합법이라 인정한 최고재판소의 판결문을 바탕으로 위헌합법론을 위헌법적 존재로 수정했다.
1986년에 「일본사회당 신선언」을 채택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목표로 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해 1964년에 채택된 「일본에서 사회주의로의 길」을 역사적 문서로 규정하고 사회당이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사회당은 여당인 자유민주당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시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며 이를 막아버렸다. 이시바시는 사회당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든 반대하는 정당이 아니고 일본공산당을 포함한 야당이 공투하는 것도 아닌 자민당과 교대로 정권을 담당할 수 있는 정당으로 인정받는 것이라 믿었다. 서구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외교나 안보 등 국가의 기본 정책에서 보수와 비슷한 입장에 서 있으며 생활에 뿌리를 둔 세부 정책에서 경쟁하는 현실적 노선을 취하고 있는데 사공민 노선이 이를 위한 제일보가 될 수 있다고 이시바시는 생각했다.
하지만 국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겉으로만 자민당과 대립하고 물밑에선 국대 정치를 통해 자민당과 협상하는 것이 당시 사회당의 현주소였다. 지방 정치에선 한 층 더 나아가 자공민 연립에 사회당까지 참여한 올 여당 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정책 입안 능력을 상실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떨쳐내지 못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밀월 관계를 형성하고 비무장 중립론에 집착하는 모습은 유권자들이 사회당으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사회당을 떠난 유권자들은 자민당 내 개혁파에게 기대를 거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986년 6월 총선에서 사회당은 1955년 통합 이래 86석이라는 가장 낮은 기록을 남기며 참패했다. 이시바시는 책임을 지고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후임 위원장이 된 도이 다카코에게 중도 정당과의 제휴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도이도 이를 받아들였지만 당내 좌파는 이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 다만 자민당이 추진한 소비세 도입 문제에 대해선 중도 정당과 함께 반대했다.
1990년 총선을 앞두고 도이는 사회당이 180명을 입후보시키며 이시바시에게도 협력을 구했지만 이시바시는 다른 야당과의 신뢰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며 거부했다. 그리고 도이의 정책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사회당은 149명을 입후보시켰고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을 다 합치면 257명을 입후보시켰는데 자민당은 혼자서 338명을 입후보시켜 격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다만 이른바 도이 붐을 일으키는 데 성공해 136명이 당선하여 제1야당으로의 체면은 지켜냈다.
은퇴한 이시바시는 회상록 등을 집필하며 여생을 보냈다. 1994년 총리부 상훈국에서 훈1등 욱일대수장 서훈 의사를 타진했지만 거절했다. 상훈국은 10년 동안 꾸준히 서훈 의사를 밝혔지만 이시바시는 마지막까지 거절했다.
2019년 후쿠오카시의 한 병원에서 향년 95세로 사망했다.
2. 4. 정치 경력
대만일치시기 다이호쿠주 기란군 기란가(지금의 이란현)에서 대만총독부 관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징집되어 구마모토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견습사관이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전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조장이다.1946년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서 미군을 위한 근로봉사대에 가입했다. 1947년 기지내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해 서기장이 되었다.
1951년에는 정계에 투신해 일본사회당에 가입한 뒤 나가사키현의회 의원이 되었다. 사회당이 분열하자 사회당 좌파에 속했으며 1955년에는 나가사키현 2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8] 당내에서 와다 히로오의 파벌에 속했다. 이시바시는 방위 문제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960년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당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기시노부스케를 압박했다.
1966년 비무장 중립론을 제창하며 자위대를 국민경찰대로 개편해 점진적으로 축소하여 비무장 중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에 사회당 기관지국에서 『비무장 중립론』이라는 책을 펴냈을 땐 30만 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83년 총선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이시바시는 일본 사회당(JSP) 위원장직을 맡았다. 이시바시와 일본 사회당은 다른 야당들과 협력하여 당 강령을 약간 우경화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 사회당은 1983년 선거에서 상당히 선전하여 장기간 지속된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3][4] 1984년, 이시바시는 현직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워싱턴 D.C. 체류 기간 중 국방장관 카스퍼 웨인버거를 예방했다.[5] 이시바시는 1984년 9월 말에는 5일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다.[6]
1986년, 이시바시 재임 기간 중 일본 사회당은 "일본 사회당 신선언"이라는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여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가까워졌다.
2. 4. 1. 초기 정치 활동
대만일치시기 다이호쿠주 기란군 기란가(지금의 이란현)에서 대만총독부 관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징집되어 구마모토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견습사관이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전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조장이다.1946년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서 미군을 위한 근로봉사대에 가입했다. 1947년 기지내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해 서기장이 되었다.
1951년에는 정계에 투신해 일본사회당에 가입한 뒤 나가사키현의회 의원이 되었다. 사회당이 분열하자 사회당 좌파에 속했으며 1955년에는 나가사키현 2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8] 당내에서 와다 히로오의 파벌에 속했다. 이시바시는 방위 문제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960년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당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기시노부스케를 압박했다.
1966년 비무장 중립론을 제창하며 자위대를 국민경찰대로 개편해 점진적으로 축소하여 비무장 중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에 사회당 기관지국에서 『비무장 중립론』이라는 책을 펴냈을 땐 30만 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83년 총선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이시바시는 일본 사회당(JSP) 위원장직을 맡았다. 이시바시와 일본 사회당은 다른 야당들과 협력하여 당 강령을 약간 우경화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 사회당은 1983년 선거에서 상당히 선전하여 장기간 지속된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3][4] 1984년, 이시바시는 현직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워싱턴 D.C. 체류 기간 중 국방장관 카스퍼 웨인버거를 예방했다.[5] 이시바시는 1984년 9월 말에는 5일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다.[6]
1986년, 이시바시 재임 기간 중 일본 사회당은 "일본 사회당 신선언"이라는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여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가까워졌습니다.
2. 4. 2. 안보 투쟁과 비무장 중립론
1951년 나가사키현 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55년에는 나가사키 제2구에서 일본 사회당 후보로 출마하여 일본 중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1966년에는 일본 자위대를 국가경찰로 재편하고 점진적으로 감축하여 무장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중립적인 국가를 달성하는 "무장 중립" 정책을 주장했다.[8]1966년, 이시바시는 일본 사회당의 후일 당의 당헌이 될 비무장 중립론을 제창하고, 자위대를 국민 경찰대대로 개편하여 점진적으로 축소하여 비무장 중립을 실현한다는 이시바시 구상을 발표했다. 결당 직후, 사회당 내에는 군비와 자위권을 인정하고, 일본국 헌법 제9조를 개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고, “내가 당내에서 처음으로 비무장 중립이라고 말했을 때는, 뭇매를 맞았다”라고 이시바시는 회고하고 있다. 후에 비무장 중립은 사회당의 정책으로 채택되었지만, 후술하는 “위헌 합법론”(당대회에서 위헌적 법적 존재로 수정)을 내놓았을 때는, 즉시 자위대를 없애야 한다는 당내 일부로부터,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자위대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는 비판이 일어났다. 하지만 1980년에는 사회당 기관지국에서 1권의 책 『비무장 중립론』으로 출판되어 30만 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영어영어, 러시아어ru, 독일어de, 프랑스어프랑스어, 몽골어mn, 라오스어lo로도 번역되었다.
2. 4. 3. 일본사회당 간부
1951년 나가사키현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55년 나가사키현 제2구에서 일본사회당 후보로 출마하여 중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3][4] 1966년에는 자위대를 국가경찰로 재편하고 점진적으로 감축하여 무장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중립적인 국가를 달성하는 "비무장 중립" 정책을 주장했다.1970년 제34회 정기대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7년간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과 협력하여(나리타·이시바시 체제) 사회당을 이끌었다. 이시바시는 경비 절약을 통한 재정 재건을 추진하는 한편, 문서의 표현을 일상적인 단어로 바꾸거나 당원들에게 일상 활동을 권장하는 등 장기간 침체에 빠진 당의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당세는 상승했지만, 당원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1977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자 나리타 위원장과 함께 서기장직을 사퇴했다. 아스카타 이치오 위원장 밑에서 부위원장이 되었지만, 아스카타가 서기장에 젊은 바바 노보루를 발탁한 것에 항의하여 부위원장직을 사퇴했다.
1983년 총선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이시바시는 일본 사회당(JSP) 위원장직을 맡았다. 이시바시와 일본 사회당은 다른 야당들과 협력하여 당 강령을 약간 우경화했다. 그 결과, 일본 사회당은 1983년 선거에서 상당히 선전하여 장기간 지속된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3][4] 1984년, 이시바시는 현직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워싱턴 D.C. 체류 기간 중 국방장관 카스퍼 웨인버거를 예방했다.[5] 이시바시는 1984년 9월 말에는 5일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다.[6]
1986년, 이시바시 재임 기간 중 일본 사회당은 "일본 사회당 신선언"이라는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여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시바시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강령은 유권자들에게 일본 사회당이 자유민주당(자민당) 내의 개혁파와는 달리 의미 있는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했고, 그 결과 일본 사회당은 1986년 총선에서 27석을 잃었으며 1983년 선거 대비 득표율도 2.26% 감소했다. 일본 정치의 일반적인 관행에 따라 이시바시는 이 참패 후 위원장직에서 사퇴했다.
2. 4. 4. 일본사회당 위원장
1983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자 아스카타 이치오 위원장이 사임하고, 후임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시바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에게 비무장 중립론을 세계에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회당의 존재감을 어필하는 한편, 공명당, 민사당과 제휴하여 사공민 노선을 추진했다. 자위대에 대해서는 ‘위헌 합법론’을 내세워, 장래에는 자위대를 없애고 비무장화한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당장은 자위대의 존재를 직시하는 토대를 만들려고 했다. “위헌인데 합법이라는 것은 모순이다”라는 당내외의 비판이 있었지만, 이시바시는 “일본 최고재판소는 1표의 차이가 너무 커서 위헌이라고 판결한 선거 결과를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예를 들면서 당대회에서 ‘위헌법적 존재’로 수정한 후 인정받았다.1986년에는 「일본사회당 신선언」을 채택시켜, 1964년 이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목표로 한 마르크스-레닌주의(과학적 사회주의)에 기반한 「일본에서 사회주의로의 길」을 역사적 문서로 규정하고,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사회당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사회당은 여당에 대한 대안 제시를 “자본주의 사회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며 중단하고 있었다. 이시바시의 목적은 사회당을 “무엇이든 반대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정당이 아니라, 또 일본공산당을 포함한 전 야당 연대 노선과는 달리, 자민당과의 정권 교체가 가능한 정당으로 변모시키는 데 있었다.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외교나 안보 등 국가의 기본 정책에서는 보수와 일치하면서, 생활에 뿌리를 둔 정책의 세부적인 부분에서 경쟁하는 현실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었지만, 이시바시의 “사공민 노선”도 그 노선을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이고 국민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제시할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자민당과 격돌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자민당과 ‘국대 정치’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 지방 선거에서는 자공민에 사회당도 가세한 전 여당 연대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할 수 없는 정책 입안 능력의 부족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일소하지 못한 것,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밀월 관계, 비무장 중립에 대한 고집 등이 유권자들의 사회당 이탈, 무당파층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일본 정치의 폐쇄 상태를 타파하는 데 유권자들은 사회당이 아니라 자민당 내의 개혁파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
1986년 6월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은 86석으로 참패했고, 이시바시는 위원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2. 4. 5. 신선언과 당 개혁 시도
1983년 제1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자 아스카타 이치오 위원장이 사임하고, 후임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시바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와 비무장 중립론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논쟁을 벌이며 사회당의 존재감을 어필하는 한편, 공명당, 민사당과 같은 중도 정당과의 연대, 즉 사공민 노선을 추진했다. 자위대에 관해서는 ‘위헌 합법론’을 내세워, 장래에는 자위대를 없애고 비무장화한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당장은 자위대의 존재를 직시하는 토대를 만들려고 했다. “위헌인데 합법이라는 것은 모순이다”라는 당내외의 비판이 있었지만, 이시바시는 “일본 최고재판소는 1표의 차이가 너무 커서 위헌이라고 판결한 선거 결과를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예를 들면서 당대회에서 ‘위헌적 합법적 존재’로 수정한 후 인정받았다.[3][4] 1984년, 이시바시는 현직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워싱턴 D.C. 체류 기간 중 국방장관 카스퍼 웨인버거를 예방했다.[5] 이시바시는 1984년 9월 말에는 5일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다.[6]1986년에는 「일본사회당 신선언」을 채택시켜, 1964년 이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목표로 한 마르크스-레닌주의(과학적 사회주의)에 기반한 「일본에서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역사적 문서로 치워두고,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사회당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사회당은 여당에 대한 대안 제시를 “자본주의 사회의 인정으로 이어진다”고 하여 중단하고 있었다. 이시바시의 목적은 사회당을 “무엇이든 반대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정당이 아니라, 또 일본공산당을 포함한 전 야당 연대 노선과는 달리, 자민당과의 정권 교체가 가능한 정당으로 변모시키는 데 있었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외교나 안보 등 국가의 기본 정책에서는 보수와 일치하면서, 생활에 뿌리를 둔 정책의 세부적인 부분에서 경쟁하는 현실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었지만, 이시바시의 “사공민 노선”도 그 노선을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이고 국민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제시할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자민당과 격돌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자민당과 ‘국회 대책 정치’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 지방 선거에서는 자공민에 사회당도 가세한 전 여당 연대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할 수 없는 정책 입안 능력의 부족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일소하지 못한 것,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밀월 관계, 비무장 중립에 대한 고집 등이 유권자들의 사회당 이탈, 무당파층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일본 정치의 폐쇄 상태를 타파하는 데 유권자들은 사회당이 아니라 자민당 내의 개혁파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6년 6월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당은 86석으로 참패했고, 이시바시는 위원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2. 4. 6. 정계 은퇴
1990년 도이에 대한 항의의 의미를 담아 정계에서 은퇴했다. 같은 해 총선거에서 사회당의 후보는 149명이었고, 그 외에 사회당이 추천에 참여한 "연합" 계열 후보도 있었다. 사회당·시민·공산당 연대와 사회민주연합을 합친 공인 후보는 257명으로 과반수(정수 512명 중 257명)에 간신히 도달했지만, 연합 계열 등 야당 계열 무소속이 35명 정도 있었다. 한편, 자민당은 공인만으로 338명으로 사회당·시민·공산당 연대와 사회민주연합을 압도했다(그 외 보수 계열 무소속은 109명).[9]도이는 1990년 차기 총선거에서 180명을 공천하기 위해 이시바시에게도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시바시는 "다른 야당과의 신뢰 관계를 손상시킨다"며 반발하여 협력을 거부했다.
은퇴 후에는 회고록 등을 집필했다. 1994년, 훈일등 욱일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 수여가 총리부(総理府)상훈국(賞勲局)에서 있었지만, 이를 거절했다. 이후 10년 동안 매년 있는 수여 제안을 계속 거절했다. 1964년부터의 생존자 훈장 부활에 대해서는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를 상대로 국회에서 단호히 반대하는 논쟁을 펼쳤다.[9]
2019년 12월 9일, 노쇠(老衰)로 인해 후쿠오카시 시내에 있는 입원 중인 병원에서 사망했다.[10][11][12][13]
2. 5. 사망
이시바시는 1990년 총선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였으며, 1994년 욱일장 수훈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이후 10년 동안 매년 유사한 훈장 수여 제안을 모두 거절하였다. 그는 1964년부터 생존자 훈장 부활에 대해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케다 하야토를 상대로 국회에서 단호히 반대하는 논쟁을 펼친 바 있다.[9]이시바시는 일본사회당 당수 도이 다카코의 자문역을 맡아 중도 정당과의 협력 강화를 추진했다. 1990년 총선에서 도이 다카코의 선거운동 지원 요청을 거절했는데, 이는 중도 연합 정당의 선거 전망을 해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7]
2019년 12월 9일, 후쿠오카시의 한 병원에서 노쇠로 인해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10][11][12][13]
3. 통일교 비판
이시바시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과 통일교의 반공 정치단체인 국제승공연합에 대해 정부가 엄중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1977년 2월 7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통일교로 인한 피해자가 많다고 지적하며 당시 총리대신 후쿠다 야스오에게 "이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15] 또한 1956년 양원 법무위원회가 만장일치로 결의한 부정한 종교 활동에 대한 결의를 인용하며, 통일교 문제에 대한 엄정한 조사를 문부성에 요구했다.[15]
이시바시는 자민당과 통일교, 국제승공연합, 희망의 날 페스티발 간의 연관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며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고, 이는 다른 의원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16][17]
이시바시의 질의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일본사회당 의원 니시미야 히로시는 통일교 관계자들로부터 "이시바시의 발언은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항의를 받았다고 전했다.[18] 한편, 통일교 피해자들은 이시바시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으며, 이 편지의 내용은 1977년 4월 6일 중의원 법무위원회 심의에서 소개되었다.[19]
4. 평가
5.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 | 회차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 여부 | 비고 |
---|---|---|---|---|---|---|---|---|
1955년 총선거 | 27회 | 나가사키현 2구 | 좌파사회당 | 50,800표 | 16.5%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8년 총선거 | 28회 | 나가사키현 2구 | 일본사회당 | 55,043표 | 16.7%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0년 총선거 | 29회 | 나가사키현 2구 | 일본사회당 | 71,706표 | 21.5%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3년 총선거 | 30회 | 나가사키현 2구 | 일본사회당 | 53,814표 | 17.4%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7년 총선거 | 31회 | 나가사키현 2구 | 일본사회당 | 59,259표 | 19.9%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9년 총선거 | 32회 | 나가사키현 2구 | 일본사회당 | 57,156표 | 18.5%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2년 총선거 | 33회 | 나가사키현 2구 | 일본사회당 | 82,680표 | 26.5%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6년 총선거 | 34회 | 나가사키현 2구 | 일본사회당 | 86,472표 | 28.2%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9년 총선거 | 35회 | 나가사키현 2구 | 일본사회당 | 59,279표 | 17.3%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0년 총선거 | 36회 | 나가사키현 2구 | 일본사회당 | 69,629표 | 20.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3년 총선거 | 37회 | 나가사키현 2구 | 일본사회당 | 79,433표 | 23.5%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6년 총선거 | 38회 | 나가사키현 2구 | 일본사회당 | 60,625표 | 17.2%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6. 저서
- 非武装中立論일본어, 일본사회당 중앙본부 기관지국, 1980년 10월 25일. 복각판은 아키시키 서점, 2006년 9월, 271쪽. ISBN 4-7503-2398-5
- 石橋が叩く―政界四十年、社会党への最後の叱咤일본어, 네스코(ネスコ), 1991년. ISBN 4890368256
- 「55年体制」内部からの証言―石橋政嗣回顧録일본어, 타바타 서점(田畑書店), 1999년. ISBN 480380298X
참조
[1]
뉴스
Ministers Reshuffled by Tanaka
https://news.google.[...]
1974-11-11
[2]
웹사이트
Ex-Japan Socialist Party Head Masashi Ishibashi Dies at 95
https://www.nippon.c[...]
2019-12-13
[3]
논문
Japan in 1984: The Nakasone Era Continues
https://online.ucpre[...]
1985-01-01
[4]
논문
Japan's December 1983 House of Representatives Election: The Return of Coalition Politics
https://www.jstor.or[...]
1984
[5]
논문
The United States and Asia in 1984
https://www.jstor.or[...]
1985
[6]
논문
North Korea in 1984: "The Hermit Kingdom" Turns Outward!
https://www.jstor.or[...]
1985
[7]
웹사이트
https://mainichi.jp/[...]
Mainichi Shimbun
2019-12-13
[8]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
三省堂
[9]
서적
勲章 知られざる素顔
岩波新書
[10]
웹사이트
元社会党委員長の石橋政嗣さん死去 安保国会で政府追及
https://www.asahi.co[...]
朝日新聞デジタル
2019-12-13
[11]
웹사이트
元社会党委員長の石橋政嗣氏死去 現実政治重視した路線推進
https://web.archive.[...]
共同通信
2019-12-13
[12]
웹사이트
「非武装中立論」石橋政嗣・元社会党委員長死去 95歳 中曽根元首相らと論戦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9-12-13
[13]
웹사이트
旧社会党の石橋政嗣 元委員長が死去
https://web.archive.[...]
[14]
간행물
第八十回国会衆議院予算委員会議録
衆議院事務局
1977-02-12
[15]
간행물
第八十回国会衆議院予算委員会議録
衆議院事務局
1977-02-12
[16]
간행물
第八十回国会衆議院予算委員会議録
衆議院事務局
1977-02-12
[17]
기타
[18]
간행물
第八十回国会衆議院法務委員会議録
衆議院事務局
1977-04-15
[19]
간행물
第八十回国会衆議院法務委員会議録
衆議院事務局
1977-04-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