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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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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심원은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성리학자로, 태종의 후손이며 김종직의 문인이다. 그는 성리학 연구와 사림파 활동을 하며 훈구파와 대립하였고, 성종에게 임사홍의 간사함을 고발하기도 했다. 무오사화 때 화를 입었으나, 중종 반정 이후 복권되어 충신으로 추앙받았다. 저서로는 《성광유고》가 있으며, 송시열과도 인척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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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원
기본 정보
이시원
이시원
본명이보람
출생1987년 8월 29일 (36세)
국적대한민국
신체166cm, 49kg, O형
가족부모, 2녀 중 장녀
학력서울대학교 경영대학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산업공학과 석사
데뷔2012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
소속사935엔터테인먼트
링크이시원 인스타그램
이시원 공식 팬카페

2. 생애

2. 1. 가계와 초기 생애

2. 2. 성리학 수학과 사림파 활동

이심원은 1454년(단종 2)에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증손으로 태어났다.[2] 보성군 이갑의 손자이며, 평성군 이위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인천 채씨(仁川蔡氏)로 군수 채신보 (蔡申保)의 딸이다. 같은 김종직 문하의 동문인 채수(蔡壽)는 그의 외삼촌이다.[2] 7세 때인 1460년(세조 6)에 학문에 입문하여 13세이던 1466년(세조 12)에 이미 학문의 깊이가 있었으며, 종실(宗室)의 영재(英材)라고 칭찬받았다.[2] 18세 때인 1469년, 왕족의 신분이었으나 김종직의 문하생이 되었다. 김굉필, 최부, 정여창, 김일손, 남효온 등과 동문수학하였으며,[2] 김공량, 윤탁, 이자, 송세충등이 그의 제자이다.

1477년(성종 8) 24세에 유가의 의관 문제 및 축수제 혁파에 대해 상소하였고,[2] 다음해에는 국가의 정황에 대해 상소하면서 세조조의 공신을 등용하지 말것을 주창하였다. 이때 홍문관과 예문관 관원들이 유자광과 임원준, 임사홍 부자를 탄핵했다가 도리어 이들이 하옥되자, 이심원은 어전에서 이들의 죄상을 자세히 폭로하고, 성종은 이들을 대질시켜 죄상이 사실로 밝혀지자, 이들을 유배 조치하고 관원들을 풀어주고 원상복귀했다. 이 사건으로 이심원은 훈구파의 공격과 견제를 받게 되었다.[2]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종학(宗學)에 봉직할 때 정읍 사람 정극인에게 감화를 받았다.[2] 그는 "태인의 정극인, 함양의 정여창(鄭汝昌), 은진의 강응정(姜應貞)은 성현의 동아리다."라고 평하며[2] 훈구공신의 퇴진을 주장하였다. 그 뒤 단종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 여론이 나타났고, 성균관 유생 남효온은 현덕왕후의 복위를 주장하였다.[2]

주계부정으로 있을 때 고모부인 임사홍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가 간사한 인물임을 알고 친고모부임에도 성종에게 독대를 청하여 임사홍의 술수와 비행을 고발하였다. 이를 알고 분개한 할아버지 보성군 갑은 그를 폐고시켜야 된다며 분해하였고, 임사홍과 짜고 손자를 공격했다. 그러다가 아들 평성도정 위를 시켜 그가 불효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하였으나 성종이 그의 충심을 알고 듣지 않았다.

그는 정몽주-김종직 학파의 사람으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김종직 사후에는 그의 문인인 김굉필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인용문|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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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권근

권우세종대왕

정인지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굉필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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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국

→주계부정 이심원

→손중돈→이언적

김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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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훈구파와의 갈등

2. 4. 임사홍과의 관계

2. 5. 성종의 신임과 좌절

2. 6. 무오사화와 죽음

이심원은 연산군김종직의 문인들이 화를 당할 때, 고모부 임사홍연산군의 최측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직의 제자이자 김굉필에게서도 수학하였으므로 두 아들과 함께 화를 당하였다.[3]

이후 학자였던 그는 부귀영화를 버리고 강호에서 시문으로 소일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는 김공망 등이 배출되었다. 중종 반정 이후 복권되고, 흥록대부 주계군에 추봉되었으며, 그의 집이 있던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현 계룡시)에 충신 정려가 세워졌다.[3]

1509년 조광조 등이 정몽주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건의할 때 이심원을 함께 거론하였으나, 정광필이 반대하고 임금도 이에 동의하여 무산되었다.[4]

2. 7. 사후 복권과 평가

이심원은 1509년 8월 조광조의 주도로 복권되었다.[4] 조광조는 이심원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건의했지만, 정광필이 반대하고 임금도 이에 동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 김정이 대학연의를 강의하다가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기도 했다.[4]

조광조는 주강에서 이심원이 성종에게 임사홍의 간사함을 아뢰고 나라를 위해 충성한 점을 들어 그의 절개와 의리를 높이 평가했다.[5] 또한, 이심원이 채수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충신도에서 제외된 것을 지적하며, 그의 충절을 기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광필 역시 이심원의 사적 편찬 과정을 언급하며 그의 충절을 증언했고, 대사헌 최숙도 이심원의 절의를 숭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임금은 이심원의 일을 재조사하고 표창할 것을 명했고, 결국 증직과 함께 정문이 세워졌다.[5]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포춘리 선영하에 있다. 그의 아버지 평성군 이위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동면 정수리(井水里) 강대위(康大衛) 마을 동불당곡 임좌(東佛堂谷壬坐)에 있다.

주계군의 저서는 그의 문인이자 역시 왕족인 명양부정(鳴陽副正) 이현손(李賢孫)이 환란 중에 산실된 것을 수습하여 소장하였으며 임종시에 그 부인에게 전하였고, 그 부인은 외손 추파 송기수(秋坡 宋麒壽)에게 전하였다. 송기수는 송시열의 증조부이며 이심원의 사위 송세충의 종증손이다.

송시열의 고조부 송세량의 형 세충(世忠)이 효령대군의 증손인 주계군 이심원의 딸과 혼인했다.[6]

3. 사상과 학문

그는 정몽주-김종직 학파의 사람으로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였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김종직 사후에는 그의 문인인 김굉필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이심원은 한원당 김굉필과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최부, 정여창, 김일손, 남효온 등과 동문수학하였다.[2] 그는 "태인의 정극인, 함양의 정여창(鄭汝昌), 은진의 강응정(姜應貞)은 성현의 동아리다."라고 칭찬하며 훈구공신의 퇴진을 주장하였다.[2] 종친이자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왕실 교육기관인 종학(宗學)에 봉직할 때 정읍 사람 정극인에게 감화를 받았다.[2] 그 뒤 단종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 여론이 나타났고, 성균관 유생 남효온은 현덕왕후의 복위를 주장하였다.[2]

3. 1. 성리학 연구

이심원은 한원당 김굉필과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최부, 정여창, 김일손, 남효온 등과 동문수학하였다.[2] 그는 "태인의 정극인, 함양의 정여창(鄭汝昌), 은진의 강응정(姜應貞)은 성현의 동아리다."라고 칭찬하며 훈구공신의 퇴진을 주장하였다.[2] 종친이자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왕실 교육기관인 종학(宗學)에 봉직할 때 정읍 사람 정극인에게 감화를 받았다.[2] 그 뒤 단종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 여론이 나타났고, 성균관 유생 남효온은 현덕왕후의 복위를 주장하였다.[2]

3. 2. 제도 개혁 주장

3. 3. 훈구파 비판

4. 저서


  • 성광유고(醒狂遺稿)

5. 후대의 평가

천성이 엄명하고 강직하였다.

5. 1. 긍정적 평가

천성이 엄명하고 강직하였다.

5. 2. 부정적 평가

천성이 엄명하고 강직하였다.

6. 가계

7. 기타

그와 함께 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임희재임사홍의 아들로 그의 고종사촌 동생이었다.[6] 역시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사림파로 활동하며 연산군을 비판하다가 유배당한 지정 남곤은 고모부 임사홍의 외사촌 동생으로 그와 사돈간이었다.[6] 송시열의 고조부 송세량의 형 세충(世忠)이 효령대군의 증손인 주계군 이심원의 딸과 혼인했다.[6]

참조

[1]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2] 뉴스 "[이종범 교수의 호남인물열전] [8] 정극인… 백성과 섞여살며 '사회운동' 빛 밝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3] 웹사이트 이심원 충신정려 현판 http://www.visitkore[...]
[4]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 간행물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갑자화적(甲子禍籍)에서
[6]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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