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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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수는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1449년에 태어나 1515년에 사망했다. 그는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469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시작으로 승지, 대사헌,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연산군 치세에는 무오사화를 피해 외직을 자청했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에 녹훈되었으나, 이후 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고 함창에 은거하며 저술 활동을 했다. 저서로는 《나재집》과 한글 소설 《설공찬전》이 있으며, 사후 임호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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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 | |
|---|---|
| 채수 | |
| 종류 | 국물 요리 |
| 기원 | 한국 |
| 주재료 | 채소 |
| 설명 | |
| 개요 | 채수는 채소를 우려내어 만든 국물이다. |
| 용도 | 채수는 사찰 음식에서 주로 사용된다. 채수는 국수, 만두, 수제비, 칼국수 등의 국물 요리에 사용된다. |
| 특징 | 채수는 고기나 해산물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채수는 비건 요리에 적합하다. |
| 재료 | |
| 기본 재료 | 무 양파 대파 마늘 생강 표고버섯 다시마 |
| 선택 재료 | 애호박 배추 양배추 당근 파뿌리 고추씨 사과 배 |
| 조리법 | |
| 기본 조리법 | |
| 추가 조리법 | 채소를 볶아서 사용하면 더욱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간장, 소금, 된장, 국간장 등으로 간을 맞춘다. 후추, 고춧가루 등으로 향을 더한다. |
| 보관법 | |
| 냉장 보관 | 2~3일 |
| 냉동 보관 | 1개월 |
2. 생애
2. 1. 초기 활동
채수는 1449년(세종 31년) 군수와 남양부사를 지내고 증 이조참판에 소성군에 추봉된 채신보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세자시강원 좌필선을 지내고 증 예조참의에 추증된 채윤이며, 증조부는 군자감 소감 채영이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로 유승순의 딸이다. 고려 의종 때의 문신 채보문의 11대손이다.[2] 그의 누이 중 1명이 효령대군의 손자 평성도정 이위의 처가 되었고, 주계군 이심원은 그의 외조카였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권이순의 딸인데, 경상북도 함창 출신이었다.11세부터 학문을 시작했고, 시문을 잘 지어 점필재 김종직에게 칭찬을 받았다.[2]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뒤에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했으며 1468년(세조 1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 1년) 성균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바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3] 1470년(성종 1년) 예문관수찬이 된 뒤, 홍문관교리·지평·이조정랑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춘추관기사관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2. 2. 관직 생활
채수는 사헌부 감찰을 시작으로 예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 이조 정랑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4] 1476년 이조정랑으로 재직 중, 그 해의 중시(重試) 문과에 2등(二等)으로 급제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1475년(성종 6년) 장악원의 일을 맡아보기도 했다.[4]1477년(성종 8년) 응교 재직 시 임사홍의 비행을 탄핵하였으며,[5] 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하며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특히, 대사헌 시절 폐비 윤씨가 원자의 생모임을 들어 휼양해줄 것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났다.[3]
1485년(성종 16년) 충청도 관찰사로 복귀, 1488년(성종 19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6] 이후 성균관 대사성, 호조 참판 등을 역임했다.[7] 연산군 즉위 후에는 한성부 좌윤 등 외직을 자청하여 무오사화를 피했다. 1499년(연산군 5년) 특진관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예조참판, 형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3]
1503년(연산군 9년)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했으나, 간관들의 탄핵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연산군이 무마시키고 평안도로 보냈다. 갑자사화 때는 폐비 윤씨 관련 상소 문제로 경상도 단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506년 병을 이유로 사직했고, 그해 용양위호군에 제수되었다.
2. 3. 생애 후반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3], 가정대부에 승진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후 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고, 경상도 함창(咸昌)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총명하고 박람강기하여 천하의 서적과 산경(山經), 지지(地誌), 패관소설(稗官小說)에까지 해박하였다.[6]1511년 한글 소설 설공찬전을 저술하였으나, 내용이 문제가 되어 금서로 지정되고 불태워지는 필화 사건을 겪었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함창현 이안(후일의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으로 낙향,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여생을 보내다가 1515년(중종 10) 사망하였다.
1703년(숙종 29년) 함창의 사림에 의하여 그의 고장에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고 표연말, 홍귀달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3. 사후
채수는 그해 3월 함창 율곡(후일의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에 매장되었다. 증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지경여춘추관사 예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가, 뒤에 증 좌찬성에 가증되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묘소는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 산 71에 있으며, 묘소 앞에는 남곤이 지은 나재 채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채수 신도비는 풍화와 마모가 심하지만 국조인물고, 나재집 등을 통해 내용을 알 수 있다. 채수 신도비는 1998년 8월 3일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가 쓴 설공찬전의 사본을 묵재 이문건이 필사한 것이 1997년 발견되었다. 나재 채수 신도비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이다.
4. 저서
- 《나재집》
- 《설공찬전》
: 1511년(중종 6년)경 저술한 한글 소설이다. 《중종실록》에는 ‘설공찬전(薛公瓚傳)’[8],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에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9]으로 표기되었고, 국문본에서는 ‘설공찬이’로 표기되어 있다. 이 소설은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어 백성을 미혹한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어 왕명으로 불태워졌다.[10] 한문 원본은 전하지 않으며, 1997년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에서 국문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국문본도 후반부가 낙질된 채 13쪽까지만 남아있지만, 어숙권의 언급[9]을 통해 결말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5. 가족 관계
6. 평가
참조
[1]
문서
채씨 문중의 '난재' 명명에 대한 설명
[2]
실록
예종실록 기사
1469-10-22
[3]
서적
용재집
[4]
실록
성종실록 기사
1475-10-26
[5]
서적
나재집
[6]
서적
국조인물고
[7]
실록
성종실록 기사
1494-06-28
[8]
실록
중종실록 기사
1511-09-02
[9]
서적
패관잡기
[10]
실록
중종실록 기사
151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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