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26위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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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26위 성인은 1597년 나가사키에서 처형된 26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1596년 산 펠리페호 사건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 정책으로 인해 체포되었으며, 4명의 스페인인, 1명의 멕시코인, 1명의 포르투갈인 선교사와 3명의 일본인 예수회 신부, 17명의 일본인 평신도가 포함되었다. 이 중 바오로 미키는 특히 유명하며, 1862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2월 5일이 축일이며, 잉글랜드 교회와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에서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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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로마 가톨릭 성인 - 바오로 미키
일본의 예수회 수도사이자 가톨릭 성인인 바오로 미키는 셋쓰에서 태어나 예수회에서 교육받고 웅변가로 활동하며 많은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으나,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박해 때 25명의 동료와 함께 나가사키에서 십자가형으로 순교하여 1862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교황 비오 9세가 시복한 복자 - 베드로 가니시오
베드로 가니시오는 종교 개혁 시기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고 독일 가톨릭 재건에 헌신하여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불리는 예수회 사제이자 신학자로서, 가톨릭 교리서 집필과 헌신으로 복자 선포 후 성인이자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일본 26위 성인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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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26 Martyrs of Japan (일본 26인 순교자) |
일본어 이름 | 日本二十六聖人 (Nihon Nijūroku Seijin) |
기념일 | 2월 5일 |
칭호 | 순교자 |
숭배 대상 | 가톨릭 교회 성공회 루터교 |
수호 성인 | 일본 박해받는 기독교인 |
생애 | |
사망일 | 1597년 2월 5일 |
사망 장소 | 나가사키, 일본 |
주요 성지 | 해당사항 없음 |
서품 | |
시복일 | 1627년 9월 14일 |
시복 장소 | 바티칸 시 |
시복자 | 교황 우르바노 8세 |
시성일 | 1862년 6월 8일 |
시성 장소 | 바티칸 시 |
시성자 | 교황 비오 9세 |
상징 | |
상징물 | 순교자의 종려나무 십자가 |
주목할 만한 구성원 | 해당사항 없음 |
2. 일본 초기 기독교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 도착하면서 가톨릭교회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쇼군과 황실 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는데, 이는 불교 세력을 견제하고 스페인 및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증진하기 위함이었다.[1][2] 그러나 15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외세의 영향과 식민주의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통치자들은 기독교에 대한 정책을 바꾸기 시작했다.
2. 1. 선교사들의 도착과 초기 활동
1549년 8월 15일, 예수회 신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후에 1622년 교황 그레고리 15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 코스메 데 토레스, 후안 페르난데스는 가톨릭교회를 전파하려는 희망을 품고 포르투갈에서 일본 가고시마에 도착했다.[1] 같은 해 9월 29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가고시마의 ''다이묘''인 시마즈 다카히사를 방문하여 일본 최초의 가톨릭 선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고, 유럽과의 무역 관계를 구축하려는 희망을 가진 ''다이묘''는 이를 승낙하였다.쇼군과 황실 정부는 처음에는 가톨릭 선교와 선교사들을 지원했는데, 이는 불교 승려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스페인 및 포르투갈과의 무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정부는 외세의 영향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고, 쇼군 또한 식민주의에 대해 걱정했다.[2]
2. 2. 기독교와 일본 통치자들의 관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1549년 가고시마에 도착하면서 일본에 가톨릭이 전파되기 시작했다.[1] 초기 쇼군과 황실 정부는 불교 세력을 견제하고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증진하기 위해 가톨릭 선교를 지원했다.[2]그러나 1500년대 후반, 외세의 영향력과 식민주의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상황이 변했다.[2]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덴쇼 15년에 바테렌 추방령을 발포하여 선교사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16] 히데요시는 기독교 신앙으로 강하게 묶인 규슈 지역 다이묘들의 결속을 경계했고, 이는 기독교에 대한 위기감으로 이어졌다.[16] 1591년 인도 총독에게 제출된 서간에는 기독교 교리를 신토, 유교, 불교와 같은 동아시아의 보편성과 비교하며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있다.[17]
하지만 히데요시는 포르투갈과의 무역 중단을 우려하여 추방령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고, 1590년대에는 기독교가 다시 복권되기도 했다.[20] 나가사키에서는 예수회의 영향력이 여전했고, 히데요시는 때때로 선교사들을 지원하기도 했다.[21][22]
1592년, 히데요시는 필리핀에 항복과 조공을 요구했지만, 필리핀 총독은 이를 거부했다.[25] 이후 1593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페드로 바우티스타가 일본에 와서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교토에 수도원을 건설하는 등 포교 활동이 활발해졌다.[23][24]
그러나 1595년 히데쓰구 할복 사건, 임진왜란 (문록·게이초의 역)의 좌절, 1596년 게이초 후시미 지진 발생, 명나라·조선과의 강화 교섭 결렬 등 여러 사건이 겹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특히 불교와 신토 세력은 교토에 진출한 프란치스코회에 대한 경계심을 높였다.
3. 26위 성인
1596년 산 펠리페호 사건 이후,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26명의 가톨릭 신자가 체포되었다. 이들은 4명의 스페인인, 1명의 멕시코인, 1명의 인도 포르투갈인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3명의 일본인 예수회 신부, 그리고 17명의 일본인 성 프란치스코 3회 회원이었다. 선교 신부들의 복사로 봉사했던 3명의 어린 소년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고문을 받고 신체가 훼손된 채 일본 전역의 마을을 끌려다녔으며,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 시를 내려다보는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으로 찔려 순교했다.[4][5]
1597년 박해 이후 1614년까지 약 70건의 산발적인 순교 사건이 있었고,[6] 1622년 9월 10일에는 55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나가사키에서 순교했는데, 이는 겐나 대순교로 알려졌다. 이 시기 가톨릭은 공식적으로 불법화되어 교회는 성직자 없이 운영되었고, 19세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신학적 가르침은 붕괴되었다.
이들 최초의 26위 일본 순교자는 1627년 9월 14일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13]
3. 1. 순교자 명단
- 성 프란치스코 기치
- 성 코스마 타케야
- 성 베드로 스케시로
- 성 미카엘 코자키
- 성 디다코 키사이
- 성 바오로 미키
- 성 바오로 이바라키
- 성 요한 고토
- 성 루드비코 이바라키
- 성 안토니오
- 성 베드로 밥티스타
- 성 마르티노 데 라 아센시온
- 성 필립보 데 헤스스
- 성 곤잘로 가르시아
- 성 프란치스코 브랑코
- 성 프란치스코 데 산 미겔
- 성 마티아
- 성 레오 카라스마루
- 성 보나벤투라
- 성 토마스 코자키
- 성 요아킴 사카키바라
- 의사 성 프란치스코
- 설교자 성 토마스
- 성 요한 키누야
- 성 가브리엘
- 성 바오로 스즈키
3. 2. 주요 순교자
이름 | 설명 |
---|---|
바오로 미키 | 일본인 예수회 신부. 순교 당시 십자가 위에서 군중에게 설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
필립보 데 헤스스 | 멕시코 출신 프란치스코회 수사. 멕시코 최초의 성인이다.[13] |
성 프란치스코 기치 | |
성 코스마 타케야 | |
성 베드로 스케시로 | |
성 미카엘 코자키 | |
성 디다코 키사이 | |
성 바오로 이바라키 | |
성 요한 고토 | |
성 루드비코 이바라키 | |
성 안토니오 | |
성 베드로 밥티스타 | |
성 마르티노 데 라 아센시온 | |
성 곤잘로 가르시아 | |
성 프란치스코 브랑코 | |
성 프란치스코 데 산 미겔 | |
성 마티아 | |
성 레오 카라스마루 | |
성 보나벤투라 | |
성 토마스 코자키 | |
성 요아킴 사카키바라 | |
의사 성 프란치스코 | |
설교자 성 토마스 | |
성 요한 키누야 | |
성 가브리엘 | |
성 바오로 스즈키 | |
아순시온의 마르틴 | |
프란시스코 블랑코 | |
생 미카엘의 프란시스코 | |
군디살부스 (곤살보) 가르시아 | |
야고보 키사이 | |
존 소안 데 고토 |
4. 순교
1596년 산 펠리페호 사건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프란치스코회의 선교 활동을 금교령에 대한 도발로 간주하여, 교토 봉행인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명하여 교토에 사는 프란치스코 회원과 기독교도 전원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했다. 미쓰나리는 다카야마 우콘을 체포 명단에서 제외했지만, 바오로 미키를 포함한 다른 신자들은 제외하지 못했다. 오사카와 교토에서 프란치스코 회원 7명과 신도 14명, 예수회 관계자 3명, 총 24명이 체포되었다.[4][5]
24명은 교토・호리카와 거리 이치조모도리 다리에서 왼쪽 귓불을 잘리고 (히데요시의 명령에서는 귀와 코를 깎아내라고 말했다) 끌려다녔다. 1597년1월 10일, 나가사키에서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고 일행은 오사카를 출발, 걸어서 나가사키로 향하게 되었다.[16] 도중에 예수회 회원을 돕던 페트로 조시로와 프란치스코회 회원을 돕던 이세의 대목수 프란치스코 요시도 체포되어 합류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일행 중에는 12세 소년 루도비코 이바라키가 있었는데, 책임자 데라자와 한자부로는 "키리시탄의 가르침을 버리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라고 권유했지만, 루도비코는 "찰나의 목숨과 영원한 목숨을 바꿀 수 없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디에고 기사이와 고토의 요하네는, 고해를 위해 온 예수회 회원 프란치스코 파시오 신부 앞에서 서원하고 예수회 입회를 허가받았다.
1597년 2월 5일, 26명은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 위에서 처형되었다. 나가사키 시내에는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4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들었다. 바오로 미키는 십자가 위에서 군중을 향해 자신의 신앙을 설파했고,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행은 창으로 양 옆구리를 찔려 절명했다.[16]
처형 후, 그들의 유해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나뉘어 일본 최초의 순교자 유해로서 세계 각지로 보내져 숭경을 받았다. 1862년6월 8일, 로마 교황비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4. 1. 산 펠리페호 사건
1596년에 발생한 산 펠리페호 사건은 일본 26위 성인 순교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1]4. 2. 체포와 처형
1596년 산 펠리페호 사건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프란치스코회의 선교 활동을 금교령에 대한 도발로 간주하여, 26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했다.[4][5] 이들은 스페인인 4명, 멕시코인 1명, 인도 포르투갈인 1명(모두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일본인 예수회 신부 3명, 그리고 일본인 성 프란치스코 3회 회원 17명이었다. 선교 신부들의 복사로 봉사하던 어린 소년 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4][5]1597년 1월, 이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전 고문을 받고 신체가 훼손된 채 일본 전역의 마을을 끌려다녔다. 교토에서는 왼쪽 귓불이 잘렸고(히데요시의 원래 명령은 귀와 코를 깎는 것이었다), 1597년 1월 10일 나가사키에서 처형하라는 명령에 따라 오사카에서 나가사키까지 도보로 이동했다.[16] 도중에 예수회 회원을 돕던 페트로 조시로와 프란치스코회 회원을 돕던 이세의 대목수 프란치스코 요시도 체포되어 합류했다. 이들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32]
나가사키 봉행 데라자와 히로타카의 동생 데라자와 한자부로는 12세 소년 루도비코 이바라키에게 "키리시탄의 가르침을 버리면 살려주겠다"고 권유했지만, 루도비코는 "찰나의 목숨과 영원한 목숨을 바꿀 수 없다"며 거절했다. 디에고 기사이와 고토의 요하네는 고해를 위해 온 예수회 회원 프란치스코 파시오 신부 앞에서 서원하고 예수회 입회를 허가받았다.
1597년 2월 5일, 26명은 나가사키 시를 내려다보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으로 찔려 처형되었다.[4][5] 그리스도가 처형된 골고다 언덕과 닮았다는 이유로 니시자카 언덕을 처형 장소로 원했다고 한다. 나가사키 시내에는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4000명이 넘는 군중이 몰려들었다. 바오로 미키는 십자가 위에서 군중에게 신앙을 설파했고,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행은 창으로 양 옆구리를 찔려 죽임을 당했다.[16]

처형 후, 이들의 유해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나뉘어 일본 최초의 순교자 유해로서 세계 각지로 보내졌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순교자의 유해나 유물 (성유물)을 존중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1862년 6월 8일, 로마 교황 비오 9세는 이들을 성인으로 추대했다.
26성인은 모두 남성이었으며, 일본인 20명, 스페인인 4명, 멕시코인과 포르투갈인이 각각 1명이었다. 다음은 26성인의 명단이다. (26성인 기념비의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이름 | 출신/직책 | 비고 |
---|---|---|
프란치스코 키치 | 일본인 목수 | 프란치스코 회원을 간호하다 도중에 체포 |
코스메 타케야 | 일본인, 38세 | 오사카에서 체포 |
페트로 조스케 | 일본인 | 예수회 회원을 돕다 도중에 체포 |
미카엘 코자키 | 일본인, 46세 | 교토에서 체포, 토마스 코자키의 아버지 |
디에고 키사이 | 일본인, 64세 | 오사카에서 체포, 비젠국(備前国) 오카야마번(岡山藩) 출신, 예수회 회원 |
바오로 미키 | 일본인, 33세 | 오사카에서 체포, 예수회 회원 |
바오로 이바라키 | 일본인, 54세 | 교토에서 체포, 레오 카라스마의 형 |
고토의 요한 소안|고토노 요한 소안es | 일본인, 19세 | 오사카에서 체포, 예수회 회원 |
루도비코 이바라키 | 일본인, 12세(최연소) | 교토에서 체포, 바오로 이바라키, 레오 카라스마의 조카 |
나가사키의 안토니오|나가사키노 안토니오영어 | 일본인, 13세 | 교토에서 체포, 아버지는 중국인, 어머니는 일본인 |
페드로 바우티스타 | 스페인인, 48세 | 교토에서 체포, 프란치스코회 사제 |
마르티노 데 라 아센시온|마르티노 데 라 아센숀es | 스페인인, 30세 | 오사카에서 체포, 프란치스코회 사제 |
펠리페 데 헤수스|펠리페 데 헤수스|pt|Filipe de Jesus|en|Philip of Jesuses (본명 펠리페 데 라스 카사스[46]) | 멕시코인, 24세 | 교토에서 체포,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멕시코 최초의 성인 |
곤살로 가르시아 | 포르투갈인, 40세 | 교토에서 체포,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
프란치스코 블랑코|프란시스코 브랑코|en|Francisco Blanco (martyr)gl | 스페인인, 28세 | 교토에서 체포, 프란치스코회 사제 |
프란치스코 데 산 미겔 | 스페인인, 53세 | 교토에서 체포,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
마티아스 | 일본인 | 교토에서 체포, 세례명이 같다는 이유로 체포 |
레오 카라스마 | 일본인, 48세 | 교토에서 체포, 바오로 이바라키의 동생, 루도비코 이바라키의 삼촌 |
보나벤투라 | 일본인 | 교토에서 체포 |
토마스 코자키 | 일본인, 14세 | 오사카에서 체포, 미카엘 코자키의 아들 |
요아킴 사카키바라 | 일본인, 40세 | 오사카에서 체포 |
의사 프란치스코 | 일본인, 46세 | 교토에서 체포 |
토마스 단기자 | 일본인, 36세 | 교토에서 체포 |
비단 상점의 요한 | 일본인, 28세 | 교토에서 체포 |
가브리엘 | 일본인, 19세 | 교토에서 체포 |
바오로 스즈키 | 일본인, 49세 | 교토에서 체포 |
5. 시성
순교자는 훨씬 더 많았지만, 처음 26명의 선교사와 개종자들이 특별히 존경받게 되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바오로 미키였다. 이들은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7] 달력에는 '성 바오로 미키와 그의 동료들'로 등재되어 있고, 사망일인 2월 5일이 아가타 축일이기 때문에 2월 6일에 기념된다.
5. 1. 시성 과정
순교자는 훨씬 더 많았지만, 처음 26명의 선교사와 개종자 순교자들이 특별히 존경받게 되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바오로 미키였다. 일본 순교자들은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7] 달력에는 '성 바오로 미키와 그의 동료들'로 등재되어 있으며, 그들의 사망일인 2월 5일이 아가타 축일이기 때문에 2월 6일에 기념된다. 1969년에 처음으로 로마 일반 달력에 포함되었다. 이전에는 지역적으로 존경받았지만, 1962년 로마 미사 경본의 ''Missae pro aliquibus locis''(일부 지역을 위한 미사) 섹션에도 그들을 위한 특별 미사는 포함되지 않았다.[8]5. 2. 기념
순교자는 훨씬 더 많았지만, 처음 26명의 선교사와 개종자 순교자들이 특별히 존경받게 되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바오로 미키였다. 일본 순교자들은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7] 달력에는 '성 바오로 미키와 그의 동료들'로 등재되어 있으며, 그들의 사망일인 2월 5일이 아가타 축일이기 때문에 2월 6일에 기념된다. 그들은 1969년에 처음으로 로마 일반 달력에 포함되었다. 이전에는 지역적으로 존경받았지만, 1962년 로마 미사 경본의 ''Missae pro aliquibus locis''(일부 지역을 위한 미사) 섹션에도 그들을 위한 특별 미사는 포함되지 않았다.[8] 이를 기반으로 한 21세기 출판물 중 일부는 2월 13일에 그러한 미사를 포함하고 있다.[9][10]잉글랜드 교회 또한 일본 순교자들을 전례적으로 2월 6일에 기념한다.[11] 일본 성공회(''Nippon Sei Ko Kai'')는 성공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1959년에 일본의 모든 순교자들을 기리는 연례 2월 5일 기념일에 이들을 추가했고, 감독교회도 이를 따랐다.[12]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는 2월 5일 기념일을 달력에 추가했다.
성 일본 순교자 교회(체르베테리, 이탈리아)는 나가사키 26성인에게 헌정된 가톨릭 교회이다. 이 교회는 일본 예술가 하세가와 루카의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6. 평가
26위 성인 순교 사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 정책과 바테렌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일본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 사건은 당시 일본의 국내 정치, 종교 상황, 그리고 국제 관계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진다.
6. 1. 역사적 의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바테렌 추방령을 발포하여 기독교 선교사들의 추방을 명령했다.[16] 이는 국내 정치와 종교의 연결, 특히 규슈 정벌 당시 기독교 신앙으로 강하게 결속된 기리시탄 다이묘들을 보며 느낀 위기감 때문이었다.[16] 1591년 인도 총독의 대사로 온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에게 제출된 서한에서는 기독교 교리를 신토, 유교, 불교 등 동아시아의 보편성과 비교하며 단죄하기도 했다.[17]그러나 히데요시는 포르투갈과의 무역 중단을 우려하여 추방령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고, 1590년대에는 기독교를 사실상 복권시켰다.[20] 나가사키에서는 예수회의 힘이 여전했고, 히데요시는 때때로 선교사를 지원하기도 했다.[21][22]
1592년 히데요시는 필리핀에 항복과 조공을 요구했지만, 필리핀 총독은 이를 거부했다.[25] 이후 양국 관계는 긴장 상태에 놓였고, 1593년에는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페드로 바우티스타가 일본에 파견되어 히데요시를 알현하기도 했다.[23][24]
이러한 상황에서 1596년 게이초 후시미 지진으로 후시미성이 붕괴되고, 조선 침략과 명나라와의 강화 교섭이 난항을 겪는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불교나 신토 등 기존 종교 세력은 기독교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강화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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