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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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젠국은 7세기 후반 기비국이 분할되어 성립된 일본의 옛 행정 구역이다. 현재의 오카야마현에 해당하며, 고대부터 농업과 철 생산, 해상 교통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에는 일본도 제작이 활발했으며, 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카마쓰 씨가 수호로 임명되었다. 센고쿠 시대에는 우키타 나오이에가 세력을 확장하여 미마사카국과 비추국 일부를 병합, 다이묘로 군림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케다 씨가 지배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오카야마현에 편입되었다. 비젠국은 비젠야키, 비젠도 등 다양한 특산물과 독특한 무술, 인술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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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젠국 - 마쓰라토
마쓰라토는 사가 겐지 마쓰라씨와 와타나베씨를 중심으로 와타나베토에서 분파된 수군 집단으로, 마쓰라 히사시가 장관이 된 후 무역과 해적 활동을 하며 연합체를 이루었고, 가마쿠라 막부 고케닌으로 편입되었으나 남북조시대에 각기 다른 행보를 보였다. - 산요도 - 빈고국
빈고국은 7세기 후반 기비국에서 분할되어 설치된 일본의 옛 국으로, 현재의 히로시마현, 오카야마현, 시마네현 일부 지역에 해당하며, 에도 시대에는 여러 번이 존재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히로시마현에 편입되었으며, 국분사, 신사 등의 시설과 안나군, 후카쓰군 등 여러 군으로 구성되었다. - 산요도 - 아키국
아키국은 7세기에 설치되어 쇼무 천황 시대에 국분사가 세워지고, 헤이안 시대에는 이쓰쿠시마 신사가 번성했으며, 센고쿠 시대에는 모리 씨와 아사노 가문이 지배했던 옛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히로시마현 대부분에 해당한다. - 오카야마현의 역사 - 미마사카국
미마사카국은 오카야마현 북동부에 위치했던 옛 지방으로, 713년에 비젠국에서 분리되어 설치되었으며, 기비국 붕괴 이후 야마토 왕권의 통제를 받았고, 센고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에는 쓰야마 번 등이 존재하다가 1876년 오카야마현에 통합되었다. - 오카야마현의 역사 - 구마자와 반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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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
기비국이 7세기 후반에 비젠국(備前国), 비추국(備中国), 비고국(備後国)으로 분할되면서 성립되었다. 『와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키비노미치노쿠치(きびのみちのくち)"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분할 후에는 기비도(吉備道)에 속한 한 국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 이때의 비젠국은 후의 미사키국의 영역과 렌토(코지마군 도라향(児嶋郡都羅郷)), 쇼도시마(小豆島), 나오시마 제도(直島諸島) 북부를 포함하고 있었다.[1]
기비국은 7세기 후반 율령 행정 개혁으로 비젠국(備前), 비추국(備中), 빙고국(備後)으로 분할되었다. "비젠"이라는 이름은 기비에서 첫 번째 한자를 따왔고, 두 번째 한자는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지리적 위치를 나타낸다.[1] 당시 비젠국은 나중에 미마사카국이 되는 지역과 쓰라시마(도라고, 고지마군), 쇼도시마, 나오시마 제도 북부를 포함했다.[1] 와도 6년(713년) 4월 3일, 비젠의 북쪽 6개 군인 에이다군, 가쓰타군, 토마다군, 쿠메군, 마시마군을 분리하여 미마사카국을 설치했다.
와도(和銅) 6년(713년) 4월 3일, 비젠슈(備前守)·백제왕남전(百済王南典)과 비젠카이(備前介)·가모노 켄신(上毛野堅身)이 함께 상신하여 북부 6군인 에이다군(英田郡), 카츠타군(勝田郡), 토마다군(苫田郡), 쿠메군(久米郡), 마시마군(真嶋郡), 오바타군(大庭郡)을 떼어 미사키국(美作国)이 설치되었다.[1]
3. 연혁
비젠은 평지가 많고 적당한 크기의 강이 많아 치수와 수운에 적합하여 고대부터 농업에 적합했다.[1] 고분시대부터 철 생산지였으며, 세토 내해를 따라 염전이 있었고, 키나이 지역, 시코쿠, 큐슈로의 해상 운송에도 편리했다.[1]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율령'' 분류 체계에 따라 "상국"으로 분류되었다.[1]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에 이 국에는 많은 ''쇼엔'' 영지가 발전했고, 오사후네파와 이치몬지파의 일본도 생산과 비젠 요 도자기로 유명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하리마국을 근거지로 한 아카마쓰 씨가 ''슈고''가 되었다. 아카마쓰 씨의 세력이 약해지자 야마나 씨의 세력이 커졌고, 비젠은 두 씨족과 그 대리인들 사이의 전장이 되었다. 센고쿠 시대에 ''슈고다이''인 우라카미 씨는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패했다. 그러나 아마고 씨가 쇠퇴하자 우키타 나오이에가 미마사카국과 비추국, 비젠국 일부를 정복하여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오카야마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의 후계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몰락했고, 오카야마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주어졌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후계자 없이 죽자, 오카야마 성과 비젠국 전체는 이케다 데루마사의 차남인 이케다 다다쓰구에게 주어졌다. 이케다 씨는 메이지 유신까지 비젠국 전체를 계속 다스렸다.
메이지 정부 시대인 1871년 8월 29일, 비젠국은 세토 내해의 섬을 제외하고 오카야마현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 섬들은 가가와현과 에히메현으로 이관되었다. 1963년에는 비젠국의 작은 지역이 현지 주민들의 요청으로 효고현 아코시로 이관되었다.
메이지 초기의 『구고구령취조장』에 따르면, 이 국은 총 680개 마을에 총 ''고쿠다카'' 423,379 ''고쿠''였다.
3. 1. 고대
기비국은 7세기 후반 율령 행정 개혁으로 비젠국(備前), 비추국(備中), 빙고국(備後) 세 국으로 나뉘었다. "비젠"이라는 이름은 기비에서 첫 번째 한자를 따왔고, 두 번째 한자는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지리적 위치를 나타낸다.[1] 당시 비젠국은 나중에 미마사카국이 되는 지역과 쓰라시마(도라고, 고지마군), 쇼도시마, 나오시마 제도 북부를 포함했다.[1] 와도 6년(713년) 4월 3일, 비젠의 북쪽 6개 군인 에이다군, 가쓰타군, 토마다군, 쿠메군, 마시마군을 분리하여 미마사카국을 설치했다.
비젠은 평지가 많고 적당한 크기의 강이 많아 치수와 수운에 적합하여 고대부터 농업에 적합했다.[1] 고분시대부터 철 생산지였으며, 세토 내해를 따라 염전이 있었고, 키나이 지역, 시코쿠, 큐슈로의 해상 운송에도 편리했다.[1]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율령'' 분류 체계에 따라 "상국"으로 분류되었다.[1]
비젠 국부의 위치는 불확실하다. ''와명류취장''에 따르면 미노군에 있었다고 한다.[1] 그러나 현재 오카야마시 나카구 고쿠후이치 지역의 조토군에서 발견된 유적은 오카야마현 지정 사적으로 공식 지정되었는데,[1] 이 지정은 유적의 지명을 기반으로 한 것이어서 나라 시대의 것인지 아닌지 불확실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1]
비젠 국분사의 위치는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으며, 오카야마현 아카이와시에 있다.[1] 비젠 국부의 추정 위치에서 북동쪽으로 약 6.5km 떨어져 있다.[1] 본당 건물의 기초가 발견되었고, 이 유적은 국가 사적이다.[1] 비젠 국분니지(国分寺二寺)로 추정되는 유적은 절터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져 있으나,[1] 대규모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가 사적 지정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1]
이 국의 ''일궁''은 오카야마시 기타구에 있는 기비쓰히코 신사이다.[1]
평성경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735년(天平 7년)부터 747년(天平 19년) 사이)에는 “備前国児嶋郡가모향・가모나오키미 아사마로 조염 삼두”, “備前国児嶋郡賀茂郷・산케무라에쓰공 조염 일두”라고 기록되어 있다.
3. 2. 중세
기비국이 7세기 후반에 비젠국(備前国), 비추국(備中国), 비고국(備後国)으로 분할되어 성립되었다. 『와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키비노미치노쿠치(きびのみちのくち)"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분할 후에는 기비도(吉備道)에 속한 한 국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의 비젠국은 후의 미사키국의 영역과, 렌토(코지마군 도라향(児嶋郡都羅郷)), 쇼도시마(小豆島), 나오시마 제도(直島諸島) 북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와도(和銅) 6년(713년) 4월 3일, 비젠슈(備前守)·백제왕남전(百済王南典)과 비젠카이(備前介)·가모노 켄신(上毛野堅身)이 함께 상신하여, 북부의 6군인 에이다군(英田郡), 카츠타군(勝田郡), 토마다군(苫田郡), 쿠메군(久米郡), 마시마군(真嶋郡), 오바타군(大庭郡)을 떼어 미사키국(美作国)이 설치되었다.
비젠국은 평지가 많고, 치수(治水)나 수운(水運)에 적합한 크기의 강이 많았기 때문에 고대부터 농업에 적합했다. 고분시대(古墳時代)부터 철 생산지였고, 염전(鹽田) 만들기도 오래되었다. 더욱이 세토내해(瀬戸内海)에 면한 해상 교통의 편리함 덕분에 경제적으로 풍부하였다. 면적은 크지 않지만, 율령제(律令制)에서는 상국(上国)으로 지정되었다.
비젠국의 산요도(山陽道) 역가(駅家)는 사카나가(坂長), 카마(珈磨), 타카즈키(高月), 츠타카(津高)의 4역이다(『연희식(延喜式)』 병부(兵部)).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부터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는 장원이 많이 설치되었다. 헤이안 시대부터 뛰어난 도공(刀工)이 모여, 나가후네파(長船派), 이치몬지파(一文字派) 등 여러 유파가 단련한 도는 비젠모노(備前物)라고 불리며 중시되었다. 비젠야키(備前焼)도 헤이안 시대부터 시작되어 후대까지 전국에 유통되었다. 당시 비젠의 중심이 된 마을은 후쿠오카(福岡)였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는 하리마국(播磨国)을 본거지로 하는 아카마츠씨(赤松氏)를 수호(守護)로 모시게 되었다. 아카마츠씨(赤松氏)의 힘이 약해지자, 야마나씨(山名氏)의 세력이 뻗어 양자 간의 싸움 속에서 점차 국인(国人)층이 성장했다. 전국 시대에는 수호대(守護代)인 우라카미씨(浦上氏)가 주가(主家)인 아카마츠씨의 세력을 몰아내고 비젠국을 지배하려고 하지만, 산인(山陰)에서 대대명(大大名)이 되어 있던 니코 하루히사(尼子晴久)가 미사키(美作)에서 남하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비젠 서부에 힘을 가진 마츠다씨(松田氏)가 니코파(尼子方)에 붙는 등 고전하고 있다. 그러나 니코씨가 쇠퇴하면 전국 시대 말기에는 우라카미씨의 가신(家臣)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가 주가를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마침내 우라카미씨를 몰아내고 비젠국에 미사키국과 비추국(備中国)의 일부를 더한 전국 다이묘(戦国大名)이 되었다. 이후 나오이에가 거성(居城)으로 한 오카야마가 비젠국의 중심이 되었다.
3. 3. 근세
기비국이 7세기 후반에 비젠국(備前国), 비추국(備中国), 비고국(備後国)으로 분할되어 성립되었다. 『와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키비노미치노쿠치(きびのみちのくち)"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분할 후에는 기비도(吉備道)에 속한 한 국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의 비젠국은 후의 미사키국의 영역과, 렌토(코지마군 도라향(児嶋郡都羅郷)), 쇼도시마(小豆島), 나오시마 제도(直島諸島) 북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와도(和銅) 6년(713년) 4월 3일, 비젠슈(備前守)·백제왕남전(百済王南典)과 비젠카이(備前介)·가모노 켄신(上毛野堅身)이 함께 상신하여, 북부의 6군인 에이다군(英田郡), 카츠타군(勝田郡), 토마다군(苫田郡), 쿠메군(久米郡), 마시마군(真嶋郡), 오바타군(大庭郡)을 떼어 미사키국(美作国)이 설치되었다.
비젠국은 평지가 많고 치수와 수운에 적합한 크기의 강이 많아 고대부터 농업에 적합했다. 고분시대(古墳時代)부터 철 생산지였고, 세토내해(瀬戸内海) 연안에는 염전도 있었다. 해상 교통도 편리하여 경제적으로 풍부했고, 면적은 크지 않지만 율령제에서는 상국(上国)으로 분류되었다.
비젠국의 산요도(山陽道) 역가(駅家)는 사카나가(坂長), 카마(珈磨), 타카즈키(高月), 츠타카(津高)의 4곳이다(『연희식(延喜式)』 병부(兵部)).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부터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는 장원이 많이 설치되었다. 헤이안 시대부터 뛰어난 도공(刀工)들이 모여 나가후네파(長船派), 이치몬지파(一文字派) 등 여러 유파가 단련한 도는 비젠모노(備前物)라고 불리며 중시되었다. 비젠야키(備前焼)도 헤이안 시대부터 시작되어 후대까지 전국에 유통되었다. 당시 비젠의 중심이 된 마을은 후쿠오카(福岡)였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는 하리마국(播磨国)을 본거지로 하는 아카마츠씨(赤松氏)가 수호(守護)를 맡았다. 아카마츠씨(赤松氏)의 세력이 약해지자 야마나씨(山名氏)의 세력이 커졌고, 두 가문의 싸움 속에서 점차 국인(国人)층이 성장했다. 전국 시대에는 수호대(守護代)인 우라카미씨(浦上氏)가 주가(主家)인 아카마츠씨의 세력을 몰아내고 비젠국을 지배하려고 했지만, 산인(山陰) 지방의 니코 하루히사(尼子晴久)가 미사키에서 남하하고 비젠 서부의 마츠다씨(松田氏)가 니코 편에 붙는 등 고전했다. 그러나 니코씨가 쇠퇴하면서 전국 시대 말기에는 우라카미씨의 가신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가 주가를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우라카미씨를 몰아내고, 비젠국, 미사키국, 비추국(備中国) 일부를 포함한 지역을 다스리는 전국 다이묘(戦国大名)가 되었다. 이후 나오이에가 거성(居城)으로 삼은 오카야마가 비젠국의 중심이 되었다.
나오이에의 사후, 뒤를 이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패배하면서 우키타씨의 영토는 없어졌다(히데이에의 사촌 우키타 아키이에(宇喜多詮家)가 이와미국(石見国) 쓰와노(津和野) 3만 석을 받았다). 히데이에의 뒤를 이어 오카야마성(岡山城)에 들어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막부는 비젠국을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의 차남 타다쓰구에게 주었다. 이후 오카야마에는 이케다 본가가 들어가 오카야마번(岡山藩)은 막말까지 비젠국 일원과 주변 지역(시기에 따라 변동)을 영토로 하였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비젠에서는 면화(綿花) 재배가 확산되었다.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코지마와 본토(本土) 사이의 간척 사업은 에도 시대에 더욱 진행되어 코지마와 본토가 육지로 이어졌다.
막부 조사에 의한 인구는 분세이(文政) 5년(1822년) 31만 8,203명이었다. 메이지 정부의 메이지 5년(1872년) 조사에 의한 인구는 33만 1,878명이었다.
중세 이후, 쇼즈군(小豆郡)과 나오시마 제도(直島諸島) 북부는 사누키국(讃岐国) 수호(守護)→텐료(天領)→비젠국 쿠라시키 다이칸쇼(倉敷代官所)→쓰야마번(津山藩)→다카마쓰번(高松藩)으로 정치적 지배자가 바뀌면서 비젠인지 사누키인지 령제국(令制国)으로서의 소속이 애매해졌다. 호에이(宝永) 5년(1708년) 이후 사실상 사누키국으로 취급되었고, 이러한 상태가 300년 이상 계속되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1871년 8월 29일(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다카마쓰번 구역에 가가와현(香川県)의 전신인 다카마쓰현(高松県)이 설치되면서, 쇼즈군과 나오시마 제도는 정식으로 가가와현 소속이 되었다.
후쿠우라(福浦)는 현지 주민의 요청으로 1963년(쇼와(昭和) 38년) 효고현(兵庫県) 아카호시(赤穂市)에 편입되었다. (비젠후카가와 역(備前福河駅) 항목 참조)3. 4. 근대
기비국이 7세기 후반에 비젠국(備前), 비추국(備中), 빙고국(備後)으로 분할되면서 성립되었다. 『와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키비노미치노쿠치(きびのみちのくち)"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분할 후에는 기비도(吉備道)에 속한 국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비젠국은 후의 미마사카국 영역과 렌토(고지마군 도라향(児嶋郡都羅郷)), 쇼도시마(小豆島), 나오시마 제도(直島諸島) 북부를 포함했다.
와도(和銅) 6년(713년) 4월 3일, 비젠슈(備前守)·백제왕남전(百済王南典)과 비젠카이(備前介)·가모노 켄신(上毛野堅身)이 상신하여 북부 6개 군인 에이다군(英田郡), 카츠타군(勝田郡), 토마다군(苫田郡), 쿠메군(久米郡), 마시마군(真嶋郡), 오바타군(大庭郡)을 분리하여 미마사카국(美作国)을 설치했다.
비젠국은 평지가 많고 치수와 수운에 적합한 크기의 강이 많아 고대부터 농업에 적합했다. 고분시대(古墳時代)부터 철 생산지였고, 세토 내해를 따라 염전이 발달했으며, 키나이 지역, 시코쿠, 큐슈로의 해상 운송도 편리했다. 경제적으로 번영하여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율령'' 분류 체계에 따라 "상국"으로 분류되었다.
비젠 국부의 위치는 불확실하다. ''와명류취장''에 따르면 미노군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 오카야마시 나카구 고쿠후이치 지역의 조토군에서 발견된 유적은 오카야마현 지정 사적(県指定史跡)으로 지정되었다. 이 지정은 유적의 지명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나라 시대의 것인지 불확실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
비젠 국분사의 위치는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으며, 오카야마현 아카이와시에 있다. 비젠 국부의 추정 위치에서 북동쪽으로 약 6.5km 떨어져 있다. 본당 건물의 기초가 발견되었고, 이 유적은 국가 사적이다. 비젠 국분니지(国分寺二寺)로 추정되는 유적은 절터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져 있다. 대규모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가 사적 지정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이 국의 ''일궁''은 오카야마시 기타구에 있는 기비쓰히코 신사이다.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에 이 국에는 많은 ''쇼엔'' 영지가 발전했고, 이 시대에 이 국은 특히 오사후네파와 이치몬지파의 일본도 생산으로 유명해졌다. 비젠 요 도자기도 이 시대에 발전했지만, 수 세기 동안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하리마국을 근거지로 한 아카마쓰 씨가 ''슈고''가 되었다. 아카마쓰 씨의 세력이 약해지자 야마나 씨의 세력이 커졌고, 비젠은 두 씨족과 그 대리인들 사이의 전장이 되었다. 센고쿠 시대에 ''슈고다이''인 우라카미 씨는 아카마쓰 씨의 세력을 빼앗아 비젠국을 다스리려 했지만, 산인 지방의 강력한 봉건 영주인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패했다. 그러나 아마고 씨가 쇠퇴하자 우라카미 씨의 가신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가 우라카미 씨의 잔당을 몰아내고 미마사카국과 비추국, 비젠국 일부를 정복하여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오카야마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의 후계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몰락했고, 오카야마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주어졌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후계자 없이 죽자, 오카야마 성과 비젠국 전체는 이케다 데루마사의 차남인 이케다 다다쓰구에게 주어졌다. 이케다 씨는 메이지 유신까지 비젠국 전체를 계속 다스렸다.
메이지 정부 시대인 1871년 8월 29일, 비젠국은 세토 내해의 섬을 제외하고 오카야마현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 섬들은 가가와현과 에히메현으로 이관되었다. 1963년에는 비젠국의 작은 지역이 현지 주민들의 요청으로 효고현 아코시로 이관되었다.
메이지 초기의 『구고구령취조장』에 따르면, 이 국은 총 680개 마을에 총 ''고쿠다카'' 423,379 ''고쿠''였다.
4. 영역
비젠국은 7세기 후반 율령 행정 개혁으로 기비국에서 분리되어 비젠국(備前), 비추국(備中), 빙고국(備後)으로 나뉘었다.[5] "비젠"이라는 이름은 기비에서 첫 번째 한자를 따왔고, 두 번째 한자는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지리적 위치를 나타낸다.[5] 당시 비젠국은 나중에 미마사카국이 되는 지역과 쓰라시마(도라고, 고지마군), 쇼도시마, 나오시마 제도의 북부를 포함했다.[5] 713년 에이타, 가쓰타, 토마타, 쿠메, 마시마 등 비젠의 북쪽 6개 군이 분리되어 미마사카국이 되었다.[5]
비젠은 평평한 땅이 많고 크기가 적당한 강이 많아 치수와 수운에 적합하여 고대부터 농업에 적합했다.[5] 고분 시대부터 철 생산지였으며, 세토 내해를 따라 염전이 있었고, 키나이 지역, 시코쿠, 큐슈로의 해상 운송에도 편리했다.[5]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율령'' 분류 체계에 따라 "상국"으로 분류되었다.[5]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에 이 국에는 많은 쇼엔 영지가 발전했고, 이 시대에 이 국은 특히 오사후네파와 이치몬지파의 일본도 생산으로 유명해졌다.[5] 비젠 요 도자기도 이 시대에 발전했지만, 수 세기 동안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5]
무로마치 시대에 하리마국을 근거지로 한 아카마쓰 씨가 슈고가 되었다.[5] 아카마쓰 씨의 세력이 약해지자 야마나 씨의 세력이 커졌고, 비젠은 두 씨족과 그 대리인들 사이의 전장이 되었다.[5] 센고쿠 시대에 슈고다이인 우라카미 씨는 아카마쓰 씨의 세력을 빼앗아 비젠국을 다스리려 했지만, 산인 지방의 강력한 봉건 영주인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패했다.[5] 그러나 아마고 씨가 쇠퇴하자 우라카미 씨의 가신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가 우라카미 씨의 잔당을 몰아내고 미마사카국과 비추국, 비젠국 일부를 정복하여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5] 그는 오카야마를 거점으로 삼았다.[5] 그의 후계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몰락했고, 오카야마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주어졌다.[5]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후계자 없이 죽자, 오카야마 성과 비젠국 전체는 이케다 데루마사의 차남인 이케다 다다쓰구에게 주어졌다.[5] 이케다 씨는 메이지 유신까지 비젠국 전체를 계속 다스렸다.[5]
메이지 정부 시대인 1871년 8월 29일, 비젠국은 세토 내해의 섬을 제외하고 오카야마현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 섬들은 가가와현과 에히메현으로 이관되었다.[5] 1963년에는 비젠국의 작은 지역이 현지 주민들의 요청으로 효고현 아코시로 이관되었다.[5]
메이지 유신 직전 비젠국의 영역은 오카야마현 타마노시, 비젠시, 세토우치시, 아카이와시, 와키군 전역과 오카야마시 대부분( 기타구 중 아사히가와 동쪽 및 겐부정 오타 북쪽, 아사히가와 서쪽 중 대략 노쇼, 가와이리, 히가시하나지리, 니시하나지리, 히라노, 노부토미 남서쪽[5] 및 마세이, 카미타카다, 카미야마, 이시즈마, 스기야, 히지카, 아시모리, 시모아시모리, 타카마쓰이이나리, 히라야마, 타테다, 가모 남서쪽[6], 미나미구 다이후쿠・코신덴・이모토・미노시마・야마다・이모토자키[7] 제외), 쿠라시키시 일부(미즈시마후쿠자키마치, 미즈시마히가시치도리마치, 미즈시마히가시토키와마치, 미즈시마히가시사카에마치, 미즈시마히가시야요이마치, 미즈시마히가시쥬토마치, 미즈시마아이오이마치, 후쿠다마치우라다, 우라다, 쿠로이시, 츠부우라, 아리조, 후지도마치아마기, 후지도마치후지도 남동쪽), 쿠메군 미사키마치 일부(에요미), 카가군 기비추오마치 일부(오하라, 와다, 토미나가, 가모이치바, 타카야, 히라오카, 카미카모, 히로메 동쪽), 효고현 아카호시 일부(후쿠우라)에 해당한다.[5]
메이지 초기의 ''구고구령취조장''에 따르면, 비젠국은 총 680개 마을에 총 고쿠다카 423,379 고쿠였다.[5]
5. 국내 시설
비젠국은 평평한 땅이 많고 크기가 적당한 강이 많아 치수와 수운에 적합하여 고대부터 농업에 적합했다. 고분 시대부터 철 생산지였으며, 세토 내해를 따라 염전이 있었고, 기나이, 시코쿠, 규슈로의 해상 운송에도 편리했다.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율령'' 분류 체계에 따라 "상국"으로 분류되었다.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에는 많은 쇼엔 영지가 발전했고, 오사후네파와 이치몬지파의 일본도 생산으로 유명해졌다. 비젠 요 도자기도 이 시대에 발전했지만, 수 세기 동안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무로마치 시대에 하리마국을 근거지로 한 아카마쓰 씨가 슈고가 되었다. 아카마쓰 씨의 세력이 약해지자 야마나 씨의 세력이 커졌고, 비젠은 두 씨족과 그 대리인들 사이의 전장이 되었다. 센고쿠 시대에 슈고다이인 우라카미 씨는 아카마쓰 씨의 세력을 빼앗아 비젠국을 다스리려 했지만, 산인 지방의 아마고 씨에게 패했다. 아마고 씨가 쇠퇴하자 우라카미 씨의 가신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가 우라카미 씨의 잔당을 몰아내고 미마사카국과 비추국, 비젠국 일부를 정복하여 다이묘가 되었다. 오카야마를 거점으로 삼았던 그의 후계자 우키타 히데이에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몰락했고, 오카야마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주어졌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후계자 없이 죽자, 오카야마 성과 비젠국 전체는 이케다 데루마사의 차남인 이케다 다다쓰구에게 주어졌다. 이케다 씨는 메이지 유신까지 비젠국 전체를 다스렸다.
메이지 정부 시대인 1871년 8월 29일, 비젠국은 세토 내해의 섬을 제외하고 오카야마현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 섬들은 가가와현과 에히메현으로 이관되었다. 1963년에는 비젠국의 작은 지역이 현지 주민들의 요청으로 효고현 아코시로 이관되었다.
메이지 초기의 旧高旧領取調帳|큐다카 큐료 토리시라베쵸일본어에 따르면, 비젠국은 총 680개 마을에 총 고쿠다카 423,379 고쿠였다.
5. 1. 국부(国府)
비젠 국부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와명류취장에 따르면 미노군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오카야마시 나카구 고쿠후이치 지역의 조토군에서 발견된 유적은 오카야마현 지정 사적(県指定史跡)으로 공식 지정되었다.[8] 이 지정은 유적의 지명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나라 시대의 것인지 아닌지 불확실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
중추적인 국청의 위치에 대해서는 확실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한 가지 설은 고쿠후이치바(国府市場)·이마이에(今在家) 경계의 고쿠쵸궁(国長宮) 부근으로 추정하며,[8] 그곳은 "비젠 국청터"로서 오카야마현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이 "고쿠쵸(国長)"는 중세 시대에 시작된 지명으로 보이기 때문에, 최근에는 약간 동쪽의 고쿠후이치바(国府市場) 중앙부의 안정된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다는 설이 유력하다.[8]
5. 2. 국분사(国分寺) · 국분니사(国分尼寺)
비젠 국분사는 오카야마현 아카이와시에 있으며, 비젠 국부 추정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6.5km 떨어져 있다. 본당 건물의 기초가 발견되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8] 비젠 국분니사 터는 절터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져 있으나, 대규모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가 사적 지정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8]
- 비젠 국분사 터 (아카이와시 마야): 국가지정 사적. 비젠 국후 추정지에서 북동쪽 약 6.5km에 위치한다. 사찰 영역은 동서 175m, 남북 190m이며, 금당, 탑, 강당, 중문, 승방 등 주요 가람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사찰 영역 서쪽에 있는 금광산원수원선교사가 불법을 계승한다.
- 비젠 국분니사 터 (아카이와시 마야): 사적 지정 없음. 승사 터 남쪽 300m에 있는것으로 추정된다. 추정 사찰 영역은 135m 사방이다. 본격적인 조사는 실시되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5. 3. 신사(神社)
비젠국의 '''일궁'''은 오카야마시 기타구에 있는 기비쓰히코 신사이다.[8]엔기시키신명장에는 대사 1좌 1사, 소사 25좌 20사의 총 26좌 21사가 기록되어 있다('비젠국의 식내사 목록' 참조). 대사 1사는 읍구군 안인신사(비정사: 안인신사(오카야마시 동구 서대사))이다.
'''총사·일궁 이하'''[8]
- 총사: 비젠국 총사궁(오카야마시 나카구 기온)
- 일궁: 기비쓰히코 신사(오카야마시 북구 이치노미야)
- 이궁: 안인신사(오카야마시 동구 서대사) - 일설에는 이궁(근거 사료 없음).
이 외에도, 이시카미 후토다마 신사(아카이와시 이시카미)도 「전국 일궁회」에 가맹하여 일궁을 주장한다. 삼궁 이하는 없다.[8]
6. 지역
비젠국은 기비국을 셋으로 나눈 지역 중 하나로,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713년에는 북쪽 6개 군이 분리되어 미마사카국이 되었다.
비젠은 평평한 땅과 적당한 크기의 강이 많아 농업에 적합했고, 세토 내해를 통한 해상 운송에도 편리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율령 체계에 따라 "상국"으로 분류되었다.
비젠 국분사는 오카야마현 아카이와시에 있으며, 본당 건물의 기초가 발견되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궁은 오카야마시 기타구의 기비쓰히코 신사이다.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에는 많은 쇼엔 영지가 발전했고, 오사후네파와 이치몬지파의 일본도 생산으로 유명해졌다. 비젠 요 도자기도 이 시대에 발전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카마쓰 씨와 야마나 씨가 비젠을 두고 다투었고, 센고쿠 시대에는 우키타 나오이에가 비젠국을 지배하고 오카야마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의 후계자 우키타 히데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했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거쳐 이케다 다다쓰구가 비젠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케다 씨는 메이지 유신까지 비젠국을 다스렸다.
1871년, 비젠국은 오카야마현의 일부가 되었고, 일부 섬들은 가가와현과 에히메현으로 이관되었다. 1963년에는 비젠국의 일부가 효고현 아코시로 이관되었다.
비젠 국청은 『일본명칭록』과 『십개소』에서는 미노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가미지군 가미지향, 즉 오카야마시 중구 고쿠후이치바(国府市場) 부근으로 추정된다.[8]
정확한 국청 위치는 확실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불분명하다. 고쿠후이치바(国府市場)·이마이에(今在家) 경계의 고쿠쵸궁(国長宮) 부근이라는 설이 있어, 오카야마현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8] 그러나 "고쿠쵸(国長)"는 중세 지명으로 보이므로, 최근에는 고쿠후이치바(国府市場) 중앙부의 안정된 약간 높은 지대라는 설이 유력하다.[8]
6. 1. 군(郡)
6. 2. 에도 시대의 번(藩)
에도 시대에 비젠국은 오카야마번이 다스렸다. 오카야마번은 처음에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51만 고쿠로 다스렸으나,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이케다 데루마사의 차남인 이케다 다다쓰구에게 주어졌다. 이케다 씨는 메이지 유신까지 비젠국 전체를 계속 다스렸다. 이케다 가는 28만 석에서 시작하여 38만 석, 최종적으로는 31.5만 석으로 영지를 다스렸다.고지마번은 이케다 가가 2만 석으로 다스렸으나, 이후 하리마국 야마자키번으로 옮겨졌다.
메이지 초기의 旧高旧領取調帳일본어에 따르면, 비젠국은 총 680개 마을에 총 고쿠다카 423,379 고쿠였다.
7. 인물
비젠국은 고대부터 다양한 인물들이 활약한 지역이다.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니고 다카히사(尼子高久): 남북조 시대의 무장으로, 이후 이즈모국(出雲国)의 센고쿠 다이묘가 되는 니고 씨(尼子氏)의 시조이다.
- 이세 모리사다(伊勢盛定): 무로마치 시대의 무장으로, 이세 씨(伊勢氏) 일족인 비젠국(備中国) 이세 씨 출신이다. 호조 소운(北条早雲)의 아버지이다.
- 아마리 도라야스(甘利虎泰): 다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 중 한 명이다.
- 오쿠마 아사히데(大熊朝秀):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에치고국(越後国) 우에스기 씨(上杉氏)와 가이국(甲斐国) 다케다 씨(武田氏)의 중신이었다.
-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 오미국(近江国)의 센고쿠 다이묘이다.
- 이케다 시게마사(池田重政): 오카야마번 9대 번주
- 이케다 아키마사(池田斉政): 오카야마번 10대 번주
각 군별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아카사카군(赤坂郡): 엔도 씨, 우가키 씨
- 오쿠군(邑久郡): 우키타 씨
- 미노군(御野郡): 마쓰다 씨, 가네미쓰 씨, 세쇼 씨
- 쓰다카군(津高郡): 이가 씨
- 와케군(和気郡): 노바라 씨, 오타하라 씨, 히가사 씨, 아카시 씨
- 고지마군(児島郡): 아쿠라 씨
7. 1. 국사(国司)
일본명칭록과 십개소에 따르면 비젠 국청(国司)은 미노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미지군 가미지향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며, 오카야마시 중구 고쿠후이치바(国府市場) 부근으로 추정된다.[8]국청의 중심 위치는 확실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불분명하다. 한 가지 설은 고쿠후이치바(国府市場)·이마이에(今在家) 경계의 고쿠쵸궁(国長宮) 부근으로 추정되며,[8] 이곳은 "비젠 국청터"로서 오카야마현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하지만 "고쿠쵸(国長)"는 중세 시대에 시작된 지명으로 보이기 때문에, 최근에는 약간 동쪽의 고쿠후이치바(国府市場) 중앙부의 안정된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8]
다음은 비젠 국사를 역임한 인물 목록이다.
7. 2. 수호(守護)
7세기 후반 율령 행정 개혁으로 기비국은 비젠국(備前), 비추국(備中), 빙고국(備後)으로 나뉘었다. "비젠"이라는 이름은 기비에서 첫 글자를 따고, 두 번째 한자는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지리적 위치를 나타낸다.[8] 당시 비젠국은 나중에 미마사카국이 되는 지역과 쓰라시마(도라고, 고지마군), 쇼도시마, 나오시마 제도의 북부를 포함했다. 713년, 비젠 북쪽의 6개 군이 분리되어 미마사카국이 되었다.[8]비젠은 평지가 많고 적당한 크기의 강이 많아 치수와 수운에 적합하여 고대부터 농업에 적합했다.[8] 고분 시대부터 철 생산지였으며, 세토 내해를 따라 염전이 있었고, 키나이 지역, 시코쿠, 큐슈로의 해상 운송에도 편리했다.[8] 경제적으로 번영하여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율령'' 분류 체계에 따라 "상국"으로 분류되었다.[8]
비젠 국부의 위치는 불확실하다. ''와명류취장''에 따르면 미노군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오카야마시 나카구 고쿠후이치 지역의 조토군에서 발견된 유적은 오카야마현 지정 사적으로 공식 지정되었다. 이 지정은 유적의 지명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나라 시대의 것인지 불확실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8]
비젠 국분사의 위치는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으며, 오카야마현 아카이와시에 있다. 비젠 국부의 추정 위치에서 북동쪽으로 약 6.5km 떨어져 있다.[8] 본당 건물의 기초가 발견되었고, 이 유적은 국가 사적이다. 비젠 국분니지(国分寺二寺)로 추정되는 유적은 절터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져 있다.[8] 대규모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가 사적 지정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이 국의 ''일궁''은 오카야마시 기타구에 있는 기비쓰히코 신사이다.
비젠 국청은 『일본명칭록』・『십개소』에서는 미노군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미지군 가미지향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며, 오카야마시중구 고쿠후이치바(国府市場) 부근으로 추정된다.[8]
중추가 되는 국청의 위치에 대해서는 확실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한 설에는 고쿠후이치바(国府市場)·이마이에(今在家) 경계의 고쿠쵸궁(国長宮) 부근으로 추정되며,[8] 그곳은 "비젠 국청터"로서 오카야마현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이 "고쿠쵸(国長)"는 중세에 시작된 지명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최근에는 약간 동쪽의 고쿠후이치바(国府市場) 중앙부의 안정된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다는 설이 유력시된다.[8]
7. 2. 1. 가마쿠라 시대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에 이 국에는 많은 쇼엔 영지가 발전했고, 이 시대에 이 국은 특히 오사후네파와 이치몬지파의 일본도 생산으로 유명해졌다.[8] 비젠 요 도자기도 이 시대에 발전했지만, 수 세기 동안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8]가마쿠라 시대 비젠국의 슈고는 다음과 같다.
- 1184년 ~ ? - 토비 사네타이라
- 겐랴쿠 연중 ~ ? - 사사키 타카쓰나
- 1221년 ~ ? - 가지 노부사네/사사키 노부사네
- 1264년 ~ ? - 나가이 야스시게
- 1331년 ~ 1333년 - 사사키(가지)씨
7. 2. 2. 무로마치 시대
무로마치 시대에 하리마국을 근거지로 한 아카마쓰 씨가 비젠국의 ''슈고''가 되었다. 아카마쓰 씨의 세력이 약해지자 야마나 씨의 세력이 커졌고, 비젠은 두 씨족과 그 대리인들 사이의 전장이 되었다.[8] 센고쿠 시대에 ''슈고다이''인 우라카미 씨는 아카마쓰 씨의 세력을 빼앗아 비젠국을 다스리려 했지만, 산인 지방의 강력한 봉건 영주인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패했다. 그러나 아마고 씨가 쇠퇴하자 우라카미 씨의 가신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가 우라카미 씨의 잔당을 몰아내고 미마사카국과 비추국, 비젠국 일부를 정복하여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오카야마를 거점으로 삼았다.무로마치 시대의 비젠국 슈고는 다음과 같다.
7. 3.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무로마치 시대에 하리마국을 근거지로 한 아카마쓰 씨가 슈고가 되었다. 아카마쓰 씨의 세력이 약해지자 야마나 씨의 세력이 커졌고, 비젠은 두 씨족과 그 대리인들 사이의 전장이 되었다. 센고쿠 시대에 슈고다이인 우라카미 씨는 아카마쓰 씨의 세력을 빼앗아 비젠국을 다스리려 했지만, 산인 지방의 강력한 봉건 영주인 아마고 씨에게 패했다.[8] 그러나 아마고 씨가 쇠퇴하자 우라카미 씨의 가신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가 우라카미 씨의 잔당을 몰아내고 미마사카국과 비추국, 비젠국 일부를 정복하여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오카야마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의 후계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몰락했고, 오카야마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주어졌다.[8]비젠 국의 센고쿠 다이묘와 관련된 주요 가문과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주요 가문
- 우라카미 씨
- 아마고 씨
- 우키타 씨
- 주요 인물
- 우키타 나오이에: 우라카미 씨의 가신이었으나, 우라카미 씨를 몰아내고 비젠 국, 미마사카 국, 비추 국 일부를 정복하여 센고쿠 다이묘가 되었다.
- 우키타 히데이에: 우키타 나오이에의 후계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락했다.
7. 4. 그 외
비젠은 평평한 땅이 많고 크기가 적당한 강이 많아 치수와 수운에 적합하여 고대부터 농업에 적합했다. 고분 시대부터 철 생산지였으며, 세토 내해를 따라 염전이 있었고, 키나이 지역, 시코쿠, 큐슈로의 해상 운송에도 편리했다.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율령'' 분류 체계에 따라 "상국"으로 분류되었다.[8]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에 이 국에는 많은 영지가 발전했고, 이 시대에 이 국은 특히 오사후네파와 이치몬지파의 일본도 생산으로 유명해졌다. 비젠 요 도자기도 이 시대에 발전했지만, 수 세기 동안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무로마치 시대에 하리마국을 근거지로 한 아카마쓰 씨가 슈고가 되었다. 아카마쓰 씨의 세력이 약해지자 야마나 씨의 세력이 커졌고, 비젠은 두 씨족과 그 대리인들 사이의 전장이 되었다. 센고쿠 시대에 슈고다이인 우라카미 씨는 아카마쓰 씨의 세력을 빼앗아 비젠국을 다스리려 했지만, 산인 지방의 강력한 봉건 영주인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패했다. 그러나 아마고 씨가 쇠퇴하자 우라카미 씨의 가신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가 우라카미 씨의 잔당을 몰아내고 미마사카국과 비추국, 비젠국 일부를 정복하여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오카야마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의 후계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몰락했고, 오카야마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주어졌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후계자 없이 죽자, 오카야마 성과 비젠국 전체는 이케다 데루마사의 차남인 이케다 다다쓰구에게 주어졌다. 이케다 씨는 메이지 유신까지 비젠국 전체를 계속 다스렸다.[9]
메이지 정부 시대인 1871년 8월 29일, 비젠국은 세토 내해의 섬을 제외하고 오카야마현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 섬들은 가가와현과 에히메현으로 이관되었다. 1963년에는 비젠국의 작은 지역이 현지 주민들의 요청으로 효고현 아코시로 이관되었다.
메이지 초기의 旧高旧領取調帳|큐다카 큐료 토리시라베-쵸일본어에 따르면, 이 국은 총 680개 마을에 총 고쿠다카 423,379 고쿠였다.
; 아카사카군
- 엔도씨
- 우가키 씨 - 마쓰다씨의 무장.
; 상도군
; 읍구군
- 우키타 씨 - 풍원장. 도이시 성주.
; 미노군
- 마쓰다 씨 - 가나가와 성. 한때 비젠 수호를 맡기도 했던 서부의 유력한 다이묘. 무로마치 막부 봉공중.
- 가네미쓰 씨 - 이시야마 성. 후에 오카야마 성을 거성으로 삼은 것은 원래 이 가네미쓰씨였다.
- 세쇼 씨
; 쓰다카군
- 이가 씨 - 코라쿠라 성.
; 와키군
- 노바라 씨
- 오타하라 씨
- 히가사 씨
- 아카시 씨
; 이와나시군
; 고지마군
- 아쿠라 씨
8. 전투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에 비젠국에는 많은 쇼엔(영지)이 발전했고, 이 시대에 이 국은 특히 오사후네파와 이치몬지파의 일본도 생산으로 유명해졌다. 비젠 요 도자기도 이 시대에 발전했지만, 수 세기 동안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무로마치 시대에 하리마국을 근거지로 한 아카마쓰 씨가 슈고가 되었다. 아카마쓰 씨의 세력이 약해지자 야마나 씨의 세력이 커졌고, 비젠은 두 씨족과 그 대리인들 사이의 전장이 되었다. 센고쿠 시대에 슈고다이인 우라카미 씨는 아카마쓰 씨의 세력을 빼앗아 비젠국을 다스리려 했지만, 산인 지방의 강력한 봉건 영주인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패했다. 그러나 아마고 씨가 쇠퇴하자 우라카미 씨의 가신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가 우라카미 씨의 잔당을 몰아내고 미마사카국과 비추국, 비젠국 일부를 정복하여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오카야마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의 후계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몰락했고, 오카야마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주어졌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후계자 없이 죽자, 오카야마 성과 비젠국 전체는 이케다 데루마사의 차남인 이케다 다다쓰구에게 주어졌다. 이케다 씨는 메이지 유신까지 비젠국 전체를 계속 다스렸다.[1]
비젠국에서 일어난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9. 무술
10. 인술
현재 주어진 원본 소스(비젠류)에는 비젠국의 인술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
11. 특산물
- 비젠야키(備前焼) - 흙에 가까운 색조의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작풍이 특징이다.
- 무시아키야키(虫明焼) - 에도 시대 오카야마번 가로인 이키가(伊木家)에 의해 시작되었다. 비젠야키와 달리 유약을 사용한다.
- 비젠도(備前刀) - 고비젠파(古備前派), 나가후네파(長船派), 후쿠오카이치몬지파(福岡一文字派), 우카이파(鵜飼派) 등 저명한 도공이 많다.
- 음식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Google Books
[2]
서적
Japan Encyclopedia
Google Books
[3]
문서
別称「備州」は備前国・備中国・備後国の総称としての呼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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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だし、設置当初の領域はこれよりも広い
[5]
문서
吉備地域、住居表示実施地区の境界については未詳
[6]
문서
足守地域、高松地域
[7]
문서
妹尾地域
[8]
서적
中世諸国一宮制の基礎的研究
岩田書院
[9]
웹사이트
絵図に見る岡山城
http://www.lib.ok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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