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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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 왕국을 통치했던 군주를 의미한다. 757년 이후 메르시아의 오파가 '잉글랜드 왕' 칭호를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10세기 위조된 헌장에 근거한다. 웨섹스 왕조의 에그버트 이후 잉글랜드 전역에 군주권이 행사되었고, 알프레드 대왕은 데인족의 침입을 막아내고 잉글랜드 남부를 통합하여 '앵글로색슨인의 왕' 칭호를 사용했다. 1066년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었고, 1707년 연합법으로 잉글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대체되었다. 잉글랜드 국왕의 왕호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그레이트브리튼 국왕'이 공식 왕호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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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부터 1953년까지 이집트 왕국을 통치한 군주는 푸아드 1세, 파루크 1세, 푸아드 2세이며, 이들의 통치 기간은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이루어졌고, 파루크 1세의 부패와 사치, 1952년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 푸아드 2세는 짧은 기간 동안 명목상의 왕으로 남았다.
2.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829년 에그버트가 잉글랜드를 통일한 후, 1066년 노르만 정복 이전까지 앵글로색슨 왕조가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이 시기 잉글랜드는 웨섹스 왕조와 덴마크 왕조가 번갈아 왕위를 차지하며 복잡한 왕위 계승 분쟁을 겪었다.
- 웨섹스 왕조 (829-1013): 에그버트를 시작으로 알프레드 대왕, 에드워드 1세 등 웨섹스 가문이 왕위를 계승했다. 에텔스탠은 927년 잉글랜드 전체를 통일하고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 덴마크 왕조 (1013-1014, 1016-1042): 1013년 덴마크의 스베인이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에텔레드 2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곧 사망했다. 이후 크누트 대왕이 아산둔 전투에서 에드먼드 2세를 격파하고 잉글랜드 전체를 통치했다. 크누트 대왕은 '북해 제국'을 건설하고 잉글랜드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
- 웨섹스 왕조 복위 (1014-1016, 1042-1066): 스베인 1세 사후 에텔레드 2세가 잠시 복위했다. 크누트 대왕 사후에는 하롤드 1세와 하르데크누트가 차례로 왕위를 이었으나, 하르데크누트가 사망하면서 덴마크 왕조의 잉글랜드 지배는 막을 내리고 에드워드 참회왕이 즉위하며 웨섹스 왕조가 복위되었다.
- 고드윈 가문 (1066): 에드워드 참회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해럴드 2세가 귀족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침공,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전사시키고 잉글랜드를 정복했다.
- 분쟁 (1066):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위텐은 에드가 에셀링을 왕으로 선출했으나, 이미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장악하여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고 윌리엄에게 항복했다.
2. 1. 웨섹스 왕조 (886–1013)
2. 2. 분쟁 (924)
에드워드 1세 사후, 그의 아들 앨프워드( Ælfweard영어)가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식을 치르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6] 12세기 왕 목록에는 그의 재위 기간을 4주로 기록하고 있지만,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한 사본에는 아버지 사후 16일 만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앨프워드의 통치 기간과 정통성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한다.[7] 앨프워드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경우 왕국 전체를 통치했는지, 웨섹스만 통치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에드워드가 죽었을 때 앨프워드는 웨섹스에서, 에텔스탠은 머시아에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7]
2. 3. 웨섹스 왕조 (924–1013)
에드워드의 아들 에텔스탠은 924년부터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여 939년까지 통치했다.[12] 그는 927년에 잉글랜드 전체를 통일하고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에드워드 1세와 그의 이복형제 에텔스탠 사이인 924년에 앨프워드가 국왕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으나, 즉위식은 치르지 않았다. 12세기 왕 목록에는 그의 재위 기간을 4주로 기록하고 있지만,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한 사본에는 아버지 사후 16일 만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 그러나 그가 통치했다는 사실은 모든 역사가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또한 앨프워드가 국왕으로 선포되었을 경우 왕국 전체를 통치했는지, 웨섹스만 통치했는지 불분명하다. 모호한 증거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에드워드가 죽었을 때 앨프워드가 웨섹스에서, 에텔스탠이 머시아에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7]
2. 4. 덴마크 왕조 (1013–1014)
1013년, 덴마크의 스베인이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에텔레드 2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스베인 1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에텔레드 2세가 잠시 복위했다.[124]2. 5. 웨섹스 왕조 (복위, 1014–1016)
스베인 1세 사후 에텔레드 2세는 망명에서 귀국하여 1014년 2월 3일 다시 왕위에 올랐다.[119] 에텔레드 2세의 아들은 잉글랜드 왕관을 빼앗으려는 덴마크인들과 대립하는 런던 시민들과[121] 위텐(賢人会議)[121]에서 선출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1016년 10월 18일, 아산둔 전투(Battle of Assandun)의 결과 에드먼드 2세는 크누트 대왕이 웨섹스를 제외한 잉글랜드 전역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했다.[123] 11월 30일 에드먼드 2세가 사망하자 크누트 대왕은 잉글랜드 전토를 통치하는 유일한 왕이 되었다.
2. 6. 덴마크 왕조 (복위, 1016–1042)
Knútrda 크누트 대왕(1016년–1035년)은 아산둔 전투(1016년 10월 18일)에서 에드먼드 2세를 무찌르고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123] 에드먼드 2세가 사망하면서 크누트는 잉글랜드 전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크누트 대왕은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를 아우르는 '북해 제국'을 건설하고 잉글랜드의 안정과 번영을 이끌었다.[124][125]
크누트 대왕의 사후, 왕위는 아들 하롤드 1세와 하르데크누트에게 차례로 계승되었다.
2. 7. 웨섹스 왕조 (복위, 1042–1066)
하르다크누트가 사망하면서 덴마크 왕조의 잉글랜드 지배는 막을 내렸다. 에드워드 참회왕이 즉위하면서 웨섹스 왕조가 복위되었다. 에드워드 참회왕은 신앙심이 깊었으나,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29]
2. 8. 고드윈 가문 (1066)
에드워드 참회왕 사후, 잉글랜드 귀족들은 해럴드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29] 그러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침공해 왔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전사시키고 잉글랜드를 정복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왕이 전사한 후, 위텐은 에드가 에셀링을 왕으로 선출했지만, 그때는 이미 노르만인들이 영국을 장악하고 있었고 에드가는 결코 통치하지 못했다. 그는 정복왕 윌리엄에게 항복했다.
2. 9. 분쟁 (1066)
Harold Godwinson영어 해럴드 2세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전사한 후, 위텐은 에드가 에셀링을 왕으로 선출했다.[30] 그러나 이미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드가는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정복왕 윌리엄에게 항복했다.[31]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하롤드 고드윈손이 사망한 후, 앵글로색슨 위테나게모트는 에드워드 망명자의 아들이자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의 손자인 에드가 애설링을 왕으로 선출했지만, 에드가 애설링은 저항을 하지 못하고 왕관을 쓰지 못했다.[32] 윌리엄은 1066년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로 즉위했으며, 오늘날 윌리엄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 윌리엄 1세는 수도를 윈체스터에서 런던으로 이전하였다.
헨리 1세는 적장자인 아들 윌리엄 아델린이 1120년 화이트십호 난파 사건으로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왕조가 단절되었다. 헨리 1세는 장녀 마틸다를 상속자로 지명했지만, 헨리가 죽자 그의 조카 스티븐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무정부 시대라고 불리는 약 20년간의 내전에 돌입했다.[35]
플랜태저넷 왕가는 앙주 백작 제프리 플랜태지넷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헨리 2세 이후의 잉글랜드 국왕들에게 소급 적용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을 "앙주 왕가"라고 부르기도 한다.[43]
3. 노르만 왕조 (1066–1135)
윌리엄 1세의 아들 윌리엄 2세[33]와 헨리 1세[34]가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다. 헨리 1세는 딸 마틸다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그의 사후 조카 스티븐[35]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내전(무정부 시대)이 발발했다.
4. 블루아 왕조 (1135–1154)
마틸다는 아버지 헨리 1세에 의해 왕위 계승 추정 상속인으로 선포되었으나, 헨리 1세 사후 사촌 스티븐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무정부 시대 동안 마틸다는 1141년 몇 달간 잉글랜드를 통치했지만,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다.[36]
스티븐의 아들 외스타스 4세는 1152년 공동 국왕으로 임명되었으나, 교황과 교회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153년 사망했다.[37]
5. 플랜태저넷 왕조 (1154–1485)
루이 8세는 제1차 바런 전쟁이 끝난 1216년 5월부터 1217년 9월까지 잠시나마 잉글랜드 영토의 3분의 2를 장악하고 잉글랜드의 루이 왕으로 선포되기도 하였으나, 1217년 9월 램버스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 왕위 주장을 포기하였다.[43] "루이 왕"은 잉글랜드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국왕들 중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중 하나이다.[44]
플랜태저넷 가문은 잉글랜드의 왕실 문장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왕국을 장악하거나 요구하는 자 또는 그 후계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랭커스터 왕조는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 랭커스터 공 존 오브 곤트의 후손이다.
요크 가는 에드워드 3세의 다섯째 아들 요크 공작랭커스터의 에드먼드의 후손이다.
1470년 헨리 6세가 잠시 복위하였다.
1471년, 에드워드 4세가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
5. 1. 앙주 제국 (1154–1216)
스티븐 왕은 1153년 11월 월링포드 조약을 통해 마틸다와 합의하여 헨리를 상속자로 인정했다. 마틸다와 제프리 5세로부터 이어진 왕가는 앙주 가문 또는 플랜태지넷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앙주 왕가는 12세기와 13세기에 앙주 제국을 통치했다. 존 왕이 대륙 영토 대부분을 상실할 때까지 잉글랜드는 그들의 주요 본거지였다. 헨리 2세의 직계 장자 계승자들은 대륙 영토 대부분을 상실한 후 플랜태지넷 가문으로 불린다. 장미 전쟁 중에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으로 알려진 방계 가문도 이 계보에 포함된다.
앙주 왕가는 잉글랜드 왕실 문장을 만들었으며, 이 문장은 그들이 소유하거나 주장한 다른 왕국을 보여주었다. ''Dieu et mon droit''는 리처드 1세가 1198년 지소르 전투에서 프랑스의 필리프 2세의 군대를 물리쳤을 때 처음으로 전투 구호로 사용되었다.[39][38] 에드워드 3세가 채택한 이후로 잉글랜드 군주의 모토로 사용되어 왔다.[39]
{| class="wikitable"
|-
! 문장 !! 이름 !! 초상화 !! 출생 !! 혼인 !! 사망 !! 주장
|-
|
'''헨리 짧은 망토'''
1154년 12월 19일[40]–1189년 7월 6일
| 
| 1133년 3월 5일
르망
앙주의 제프리 5세와 마틸다 황후의 아들
| 엘레오노르 아키텐
보르도 대성당
1152년 5월 18일
자녀 8명
| 1189년 7월 6일
시농
56세
| 헨리 1세의 손자
월링포드 조약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의 증손자
|-
| colspan=6 | 헨리 2세는 아들 '''젊은 왕 헨리''' (1155–1183)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지만, 젊은 헨리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스스로 통치하지 않았으므로 왕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
| rowspan=2 |
'''사자왕 리처드'''
1189년 9월 3일[41]–1199년 4월 6일
| 
| 1157년 9월 8일
보몽 궁전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아키텐의 아들
| 나바라의 베렌가리아
리마솔
1191년 5월 12일
자녀 없음
| 1199년 4월 6일
샤뤼
석궁 발사체에 맞아 41세 사망
| 헨리 2세의 아들
장자 상속
|-
| || '''존'''[42]
'''존 랭클랜드'''
1199년 5월 27일[42]–1216년 10월 19일
| 
| 1166년 12월 24일
보몽 궁전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아키텐의 아들
|
| 1216년 10월 19일
뉴어크온트렌트
49세
| 헨리 2세의 아들
지명
혈연의 근접성
|}
프랑스의 루이 8세(루이 왕세자)는 제1차 바런 전쟁이 끝난 1216년 5월부터 1217년 9월까지 잠시 잉글랜드의 3분의 2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1217년 9월 램베스 조약에 서명하면서 루이는 1만 마르크를 받고 자신이 합법적인 잉글랜드 국왕이 아니었음을 인정했다.[43]
5. 2. 앙주 왕조 (1216-1399)
존 왕 사후, 그의 아들 헨리 3세가 즉위했다.[46] 헨리 3세의 치세 동안 귀족들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1264년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귀족 반란이 일어나 잉글랜드 최초의 의회가 소집되기도 했다. 헨리 3세의 아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를 정복하고, 스코틀랜드를 복속시키려 시도하는 등 잉글랜드의 영토 확장에 힘썼다.[47]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2세는 무능한 통치로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폐위당하고 살해되었다.[48] 그의 아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백년전쟁을 일으켰다.[50] 백년전쟁 초기에는 잉글랜드가 우세했으나, 장기화되면서 국력 소모가 심화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리처드 2세는 전제적인 통치로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폐위당했다.[51]헨리 3세 시대 이후, 플랜태저넷 가문이 대륙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그들은 본격적으로 영국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은 플랜태저넷 가문의 방계이다.
5. 3. 랭커스터 왕조 (1399–1461, 1470–1471)
에드워드 3세의 세 번째 아들인 존 오브 곤트에서 유래한 가문이다. 헨리 4세는 리처드 2세로부터 권력을 빼앗았고, 왕위 계승 순위에서 에드워드 3세의 두 번째 아들인 라이오넬의 후손인 에드먼드 모티머를 밀어냈다.[52]
장미 전쟁(1455년–1485년)에서 왕위는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 사이를 오갔다. 1470년, 헨리 6세가 잠시 복위했다.
5. 4. 요크 왕조 (1461–1470, 1471–1485)
루앙1464년 5월 1일
10명의 자녀
웨스트민스터 궁전
40세
윈저 성
1445년 4월 22일
1명의 자녀
런던 타워
49세
(Edward IV)
루앙
1464년 5월 1일
10명의 자녀
웨스트민스터 궁전
40세
(Edward V)
웨스트민스터
런던
약 12세
(Richard III)
파더링게이 성
1472년 6월 12일
1명의 자녀
보스워스 평원
32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