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브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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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브룩은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으로, 사라왁 왕국의 라자이자 백인 라자라는 칭호로 불린 인물이다. 그는 영국령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군으로 복무하며 동남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38년 로열리스트호를 구입하여 싱가포르로 출항했다. 이후 브루나이 술탄의 명을 받아 해적 토벌에 나섰고, 1841년 사라왁의 라자로 임명되어 사라왁 왕국을 건국했다. 그는 원주민 학살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186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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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브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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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제임스 브룩 |
원어 이름 | Sir James Brooke |
작위 | 사라왁 라자 |
재위 | 1842년 8월 18일 ~ 1868년 6월 11일 |
대관식 | 1842년 8월 18일 |
종교 | 기독교(잉글랜드 국교회) |
출생일 | 1803년 4월 29일 |
출생지 | 영국령 인도 후글리 반델 |
사망일 | 1868년 6월 11일 |
사망지 | 영국 데번주 버레이터 |
매장지 | 세인트 레너드 교회, 십스토르, 다트무어 |
아버지 | 토머스 브룩 |
어머니 | 애나 마리아 브룩 |
전임자 | 술탄 텡아 (사라왁 술탄), 펭기란 인데라 마호타 모하맛 살레 (사라왁 총독) |
후임자 | 찰스 브룩 |
왕가 | 브룩 왕조 |
직업 | |
직업 | 군인, 상인, 독립적인 신사, 총독 |
군 경력 | |
소속 | 벵골 육군, 영국 동인도 회사 |
복무 기간 | 1819년 ~ 1830년 |
계급 | 중위 |
부대 | 제6 원주민 보병 연대 |
전투 |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1824–1825) |
관직 | |
직위 | 라부안 총독 |
재임 시작 | 1848년 |
재임 종료 | 1853년 |
군주 | 빅토리아 여왕 |
부총독 | 윌리엄 네이피어 (1848–1850), 존 스콧 (1850–1856) |
전임자 | 신설 |
후임자 | 조지 워렌 에드워즈 |
외교 | |
직위 | 보르네오 술탄 및 독립 추장 주재 총영사 |
재임 시작 | 1847년 |
재임 종료 | 1853년 |
후임자 | 스펜서 세인트 존 |
훈장 |
2. 생애
영국령 인도 출신으로 잉글랜드에서 교육을 받았다. 1819년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벵골군에 입대하여[40]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에 참전했으나, 1825년 전투 중 입은 심각한 부상으로 영국으로 돌아와 요양 후 군을 떠났다.[4][41] 이 시기 동남아시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35년 부친의 유산을 상속받아 1838년 스쿠너 로열리스트(Royalist)호를 구입, 싱가포르로 향했다.[40] 그는 브루나이 술탄의 요청으로 사라왁의 원주민 반란 진압을 도왔고,[42] 그 공로로 1841년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로부터 사라왁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되어 초대 라자(Rajah)가 되었다. 이로써 사라왁 왕국이 시작되었고 그는 첫 백인 라자(White Rajah)로 불렸다. 그는 해적 소탕에 힘쓰며 통치 기반을 다졌고, 1846년에는 브루나이로부터 사실상 독립했다.[40]
1847년 영국으로 일시 귀국하여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고 바스 훈장 2등급(KCB)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15][46] 보르네오 주재 영국 공사 겸 라부안 총독으로 임명되었다.[43][44] 1848년 왕립지리학회는 그의 보르네오 탐험 공로를 인정해 금메달을 수여했다.[45]
1852년 생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를 만나 그의 말레이 제도 탐험을 지원했고, 이는 월리스의 자연선택에 기반한 진화론 연구에 기여했다.
그러나 브룩의 통치, 특히 해적 소탕 과정에서의 무력 사용은 영국 내에서 '원주민 학살'이라는 비판을 받았다.[47] 1854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조사위원회는 그의 혐의를 기각했지만[17] 평판은 손상되었다. 이후 1851년 중국인 반란, 1856년 라부안 총독직 사임 등을 겪었다.[40]
건강 악화로 1858년 영국으로 돌아와 은퇴했으나 사라왁 문제에 계속 관여했다. 1866년 발작으로 쓰러진 후 조카 찰스 브룩을 후계자로 지명했고, 1868년 데번주 뷰레이터(Burrator)에서 사망하여 쉽스토어 교회 묘지에 묻혔다. 그는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48]
2. 1. 초기 생애
영국령 인도의 후글리 지방(Hooghly district) 반델(Bandel)에서 태어났으나, 베나레스 교외 세크롤에서 세례를 받았다.[4] 아버지는 영국령 인도 바렐리 항소법원의 영국인 판사 토마스 브룩(Thomas Brooke)이었고, 어머니 안나 마리아(Anna Maria)는 스코틀랜드 귀족인 제9대 블랜타이어 경 윌리엄 스튜어트(William Stuart)와 그의 정부 해리엇 티즈데일(Harriet Teasdale) 사이의 딸이었다.브룩은 12세까지 인도에서 지내다가 잉글랜드로 보내져 노리치 스쿨에서 잠시 교육을 받았으나, 학교를 떠났다. 이후 배스에서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았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12세에 영국 본토 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15세에 기숙사를 탈출하여 퇴학당했다고도 한다.
1819년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벵골 군에 소위로 입대하였다.[40]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에 참전하여 아삼 지역에서 싸웠으며,[4] 일부 기록에서는 그의 무훈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근무 태도가 불성실했다고 전한다. 중위까지 승진했다는 기록도 있다.
1825년 전쟁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영국으로 후송되어 요양했다.[4] 부상 부위에 대해서는 폐 또는 생식기 총상 등 여러 설이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불분명하다.[41] 이 기간 동안 동남아시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1830년 마드라스로 돌아왔으나 군 부대에 복귀하기에는 너무 늦어 결국 군을 사임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왔던 배인 ''캐슬 헌틀리''(Castle Huntly영어)호를 타고 중국을 거쳐 영국으로 돌아갔다.
183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유산을 상속받았고, 이 재산으로 1838년 스쿠너인 로열리스트호(Royalist영어)를 구입하여 싱가포르로 항해했다.[40]
2. 2. 군 복무와 동남아시아 진출
영국령 인도 후글리 지방(Hooghly district) 반델(Bandel)에서 태어났지만, 베나레스 교외 세크롤에서 세례를 받았다.[4] 그의 아버지 토마스 브룩은 영국령 인도 바렐리 항소법원의 영국인 판사였고,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허트퍼드셔 출신으로 스코틀랜드 귀족 윌리엄 스튜어트 9대 블랜타이어 경의 딸이었다. 브룩은 12세까지 인도에서 지내다가 잉글랜드로 보내져 노리치 스쿨에서 잠시 교육을 받았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떠났으며, 이후 배스에서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았다.1819년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벵골군에 소위로 입대하여 군 복무를 시작했다.[40] 1825년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중 아삼 지방 전투에 참전했으나, 전투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영국으로 후송되어 요양하게 되었다. 이 부상에 대해서는 폐 또는 생식기에 총상을 입었다는 설과, 동성애 성향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41] 요양 기간 동안 동남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무역에 잠시 손을 대기도 했다. 1830년 마드라스로 돌아왔지만, 부상으로 인한 공백 기간이 길어져 부대에 복귀하지 못하고 군을 사임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왔던 배인 ''캐슬 헌틀리''호를 타고 중국을 경유하여 귀국했다.
1835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이 재산으로 1838년 142톤급 스쿠너인 로열리스트(Royalist)호를 구입하여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항해를 시작, 싱가포르로 출항했다.[40] 싱가포르 도착 후, 당시 사라왁 지역을 다스리던 브루나이 왕족(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의 숙부 무다 하심)에게 우호 사절이 되어 달라는 영국 정부의 요청을 수락했다. 1839년 사라왁의 쿠칭에 도착하여 환영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무다 하심으로부터 원주민 반란 진압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브룩은 이 요청을 거절했으나, 1840년 다시 사라왁을 방문했을 때 반란 진압을 돕기로 수락했다. 그는 대립하는 부족들을 서로 경쟁시키는 전술을 사용하여[42]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이 공로가 인정되어 1841년 브룩은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사라왁의 라자(Rajah)로 임명받게 된다.
2. 3. 사라왁 통치
1838년 보르네오로 항해하여 8월 쿠칭에 도착한 제임스 브룩은 그 지역이 브루나이 술탄에 대한 반란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라왁에서 술탄의 삼촌인 팽기란 무다 하심을 만나 반란 진압을 도왔고, 이는 브루나이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의 호의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40]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1840년, 무력이 약했던 하심 왕자의 원주민 반란 진압 요청을 수락하여 대립하는 부족들을 서로 경쟁시키는 방식으로[42] 반란을 진압했다.
술탄은 그의 도움에 대한 대가로 1841년 브룩에게 사라왁의 총독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브룩의 해적 소탕 활동에 불만을 품은 일부 브루나이 귀족들이 무다 하심과 그의 추종자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브룩은 영국 청나라 함대의 지원을 받아 브루나이를 장악하고 술탄을 복위시켰다.
1842년 술탄은 사라왁의 완전한 주권을 브룩에게 양도했다. 브룩은 1841년 9월 24일에 사라왁 라자 칭호를 받았으나, 공식적인 선포는 1842년 8월 18일에 이루어졌다. 이로써 브룩은 사라왁의 초대 백인 라자가 되었다. 그의 사촌인 아서 치체스터 크룩섕크(Arthur Chichester Crookshank, 1825~1891)는 1843년 3월 1일 그의 밑에서 판사로 임명되었다.

라자로서 브룩은 행정 개혁을 단행하고 법전을 제정하며 사라왁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 나갔다.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주요 문제였던 해적 행위를 진압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다야크족을 포함한 원주민들을 평정하고, 인두 사냥(headhunting)과 해적 행위를 금지시켰다. 또한 많은 다야크족을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켰으며, "다야크족만이 다야크족을 죽일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16]
1846년에는 해적 지원을 문제 삼아 브루나이 왕국의 수도를 공격하여 술탄국에 의한 해적 지원을 중단시키고, 사실상 브루나이로부터 독립적인 사라왁 왕국을 세웠다.[40] 1847년 잠시 영국으로 돌아가 런던의 시민권을 받았고,[13] 보르네오 주재 영국 총영사로 임명되었으며,[14] 바스 훈장 2등급(KCB)을 받아 기사 작위를 받았다.[15] 같은 해 빅토리아 여왕과 면담하기도 했다. 1848년에는 왕립지리학회로부터 보르네오 탐험의 공로를 인정받아 금메달(창립자 메달)을 수상했다.[45]

그러나 그의 통치 방식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1851년, 해적 소탕 작전 과정에서 원주민들에게 과도한 무력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제기되었고,[47] 이는 1854년 해협 식민지의 싱가포르에서 조사위원회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위원회는 브룩의 혐의를 기각했지만,[17] 그의 이미지는 손상되었다.
1853년 영국을 떠나기 전, 브룩은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에게 편지를 보내 사라왁 방문을 권유했다.[18] 월리스는 1854년 싱가포르에 도착했는데, 이때 브룩은 싱가포르 조사위원회 출석을 준비하고 있었다.[19] 월리스의 이후 말레이 제도 탐험은 자연선택에 기반한 진화론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브룩의 통치 기간 동안 내부적인 도전도 있었다. 1857년에는 류산방(Liu Shan Bang)이 이끄는 중국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또한 샤리프 마사호르(Sharif Masahor)와 렌탑(Rentap) 같은 사라왁 내부의 저항 세력과도 충돌했지만, 이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20][21]
계속되는 분쟁과 천연두 감염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브룩은 1856년 라부안 총독직을 사임했다.[40] 1858년 영국으로 돌아가 은퇴 생활을 시작했으나, 사라왁의 상황을 계속 주시하며 두 차례 정도 돌아오기도 했다. 1866년 발작으로 쓰러진 후 조카(누이의 아들)인 찰스 브룩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1868년 사망했다.
2. 4. 원주민 학살 논란과 조사
브룩이 사라왁에서 통치를 강화하며 다야크족 등 원주민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논란이 발생했다. 특히 1847년 원주민과의 해전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47] 영국 본국에서는 브룩이 해적 퇴치 작전을 명분으로 원주민에게 과도한 무력을 사용했다는 비판과 함께 원주민 학살 혐의가 제기되었다.[17][47]이러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1854년, 영국 정부는 싱가포르에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브룩의 행적을 조사했다.[17] 당시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가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브룩은 "그의 논란이 많은 반해적 활동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특별 위원회에 증언을 하려고 마지못해 준비하고" 있었다.[19] 위원회는 조사 끝에 브룩의 혐의를 기각하며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17]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평판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40]
2. 5.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와의 만남
1852년 생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를 만났다. 브룩은 8년에 걸친 말레이 제도 항해에 월리스를 동참시켰다. 월리스는 이때 말레이 제도에서 식생 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진화론의 기본 원리인 자연선택설을 세우게 되었다.브룩은 1853년 4월 영국을 떠나면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에게 편지를 보내 "월리스가 사라왁에 오면 매우 기쁠 것"이라고 전했다.[18] 이 초대는 월리스가 다음 탐험지로 말레이 제도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 탐험은 8년 동안 이어졌고, 월리스를 당대 최고의 빅토리아 시대 지식인이자 자연주의자로 만들었다. 월리스가 1854년 9월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라자 브룩은 자신의 해적 퇴치 활동에 대한 논란으로 싱가포르에서 설립된 특별 위원회에 증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19][17]
2. 6. 말년과 사망
그러나 영국 본국에서는 브룩의 통치 방식과 원주민 학살 의혹[47] 등으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심문회에 출석해야 했고, 1854년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의 평판은 크게 손상되었다. 1851년에는 중국인 반란이 일어났으며, 1856년에는 라부안 총독직을 사임했다.[40]이러한 사건들과 천연두 발병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브룩은 1858년 영국으로 돌아와 데번의 다트무어에 정착하여 은퇴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사라왁 문제에 계속 관여하며 두 차례 더 방문하기도 했다.
자녀가 없었던 브룩은 1861년 조카 존 브룩 존슨 브룩(John Brooke Johnson Brooke)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2년 후, 브룩은 존을 반역 혐의로 폐위시키고 사라왁에서 추방했으며, 존의 동생인 찰스 브룩(Charles Anthoni Johnson Brooke)을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했다.
말년에 세 차례의 뇌졸중을 겪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던 브룩은 1866년 다시 발작으로 쓰러진 후,[40] 1868년 6월 11일 데번주 뷰레이터(Burrator)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쉽스토어에 있는 세인트 레오나드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3. 개인사
제임스 브룩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매우 좋아하여 사라왁에서 동료들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곤 했다.[22]
그는 이전 영국 모험가들의 성공과 영국 동인도 회사의 활동에 영향을 받았다. 사라왁에서의 그의 행동은 영국 제국의 확장과 그 통치의 이점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해적과 노예제에 맞서 싸우고 지역 주민들을 도우며 자신의 부를 축적하여 이러한 활동을 더욱 추진하고자 했다. 브룩과 그의 후계자들의 능력은 어려운 시기에 사라왁에 리더십과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명성과 악명을 함께 얻게 했다. 브루나이 술탄에 의해 라자로 임명되고 이후 영국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은 그의 노력이 사라왁과 영국 사회 모두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브룩의 사생활, 특히 그의 성 정체성이나 결혼 여부, 자녀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와 논란이 존재하며, 이는 하위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3. 1. 성 정체성 논란
제임스 브룩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과 해석이 존재한다.
브룩은 사라왁의 왕자 바드루딘과의 관계에 대해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깊었다"고 기록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를 동성애자 또는 양성애자로 보기도 한다.[23][24] 또한 1848년에는 7대 엘긴 백작의 손자인 16세의 찰스 T. C. 그랜트와 관계를 맺었는데, 그랜트 역시 브룩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23][24] 다만 이 관계가 순수한 우정이었는지, 다른 성격의 관계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사라왁의 영주였던 바데르딘에게 반했던 감정을 일기에 상세히 기록했다는 주장도 있으며, 바데르딘은 이후 중국인 반란으로 사망했다.[48]
브룩의 전기 작가 중 한 명인 나이젤 벌리는 브룩이 데번주 버래터에서 보낸 말년에 토트네스의 남성 매춘에 육체적으로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의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25] 반면, 다른 학자들은 브룩이 단순히 다른 남성들과의 교제를 선호하는 "동성애적 사회성"을 가졌을 뿐이며,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26] 제1차 버마 전쟁 중 입은 부상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는데, 생식기에 총상을 입었다는 설과 함께 이것이 그의 동성애 성향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일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 진위는 불명확하다.[41]

브룩은 공식적으로 결혼하지 않았지만, 1858년 가족에게 아들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 아들은 루벤 조지 워커라는 이름으로 프랜시스 워커의 브라이턴 가정에서 자랐으며, 1836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858년경에는 브룩과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1871년 노팅엄셔주 플럼트리 교구 인구 조사에는 "조지 브룩"이라는 이름과 함께 출생지가 "사라왁, 보르네오"로 기록되었다. 조지 브룩은 1862년 마사 엘리자베스 모브레이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1874년 호주로 가던 중 SS ''브리티시 어드미럴''호 침몰 사고로 사망했다.[27][28][29]
한편, 1913년부터 1915년까지 브루나이와 라부안의 임시 거주민이었던 프랜시스 윌리엄 더글러스는 1915년 외무부에 보낸 편지에서, 펭기란 아낙 하시마로부터 브룩이 브루나이 술탄의 손녀인 펭기란 파티마와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보고했다. 더글러스는 또한 1866년에 라자 브룩의 딸을 만났다는 오길비 박사의 증언도 기록했는데, 그녀는 결혼한 상태였고 "분명히 외국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고 묘사되었다.[30]
3. 2. 사생아 논란
브룩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1858년에 그의 가족에게 아들이 있음을 인정했다. 아들의 어머니 신원과 출생 날짜는 명확하지 않다. 이 아들은 프랜시스 워커의 브라이턴 가정에서 루벤 조지 워커로 자랐으며 (1841년과 1851년 인구 조사 기록에 따르면 1836년경 출생으로 추정된다). 1858년까지 그는 브룩과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1871년에는 노팅엄셔주 플럼트리 교구 인구 조사에 "조지 브룩"이라는 이름, 나이 "40세", 출생지 "사라왁, 보르네오"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1862년 7월 10일 마사 엘리자베스 모브레이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 3명만이 유아기를 넘겼다. 장남의 이름은 제임스였다. 조지는 SS ''브리티시 어드미럴''호 침몰 사고[27][28]로 1874년 5월 23일 호주로 여행 중 사망했다. 이를 기리는 기념물이 플럼트리 교회 묘지에 있으며, 여기에는 출생일이 183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29]한편, 1913년 11월부터 1915년 1월까지 브루나이와 라부안의 임시 거주민이었던 프랜시스 윌리엄 더글러스(1874-1953)는 1915년 7월 19일 외무부에 보낸 편지에서 다른 주장을 제기했다. 그는 펭기란 아낙 하시마로부터 브룩이 펭기란 파티마와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펭기란 파티마는 펭기란 아낙 압둘 카디르의 딸이자 브루나이의 21대 술탄 무함마드 칸줄 알람의 손녀였다. 더글러스는 또한 오길비 박사를 만났는데, 오길비 박사는 1866년에 라자 브룩의 딸을 만났다고 말했으며, 그녀는 결혼했지만 "분명히 외국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고 덧붙였다.[30]
3. 3. 결혼설
제임스 브룩은 공식적으로 결혼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와 논란이 있다.
브룩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는 사라왁의 왕자 바드루딘에 대해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깊었다"고 적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를 동성애자 또는 양성애자로 보기도 한다.[23][24] 1848년에는 7대 엘긴 백작의 손자인 16세의 찰스 T.C. 그랜트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졌으나, 이 관계의 본질이 우정 이상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23][24] 인류학자 나이젤 벌리는 브룩이 데번주 버래터에서 말년을 보낼 때 토트네스의 성매매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지만[25], 이 주장의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브룩이 단순히 남성들과의 교제를 선호하는 "동성애적 사회성"을 가졌을 뿐이며, 동성애자였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26]
브룩에게는 숨겨진 아들이 있었다. 1858년, 그는 가족에게 아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이 아들은 프랜시스 워커의 브라이턴 가정에서 루벤 조지 워커라는 이름으로 자랐으며, 1836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858년까지 그는 자신이 브룩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고, 1871년 노팅엄셔주 플럼트리 교구 인구 조사에는 "조지 브룩"이라는 이름과 함께 나이 "40세", 출생지 "사라왁, 보르네오"로 기록되어 있다. 조지 브룩은 1862년 7월 10일 마사 엘리자베스 모브레이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 3명만이 유아기를 넘겼다. 장남의 이름은 제임스였다. 조지는 1874년 5월 23일, 호주로 가던 중 SS ''브리티시 어드미럴''호 침몰 사고로 사망했다.[27][28] 그의 출생일을 1834년으로 기록한 기념비가 플럼트리 교회 묘지에 세워져 있다.[29]
한편, 브룩이 브루나이의 여성과 결혼했다는 설도 있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브루나이와 라부안의 임시 거주민이었던 프랜시스 윌리엄 더글러스는 1915년 7월 19일 외무부에 보낸 편지에서, 펭기란 아낙 하시마로부터 브룩이 펭기란 파티마와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보고했다. 펭기란 파티마는 펭기란 아낙 압둘 카디르의 딸이자 브루나이 제21대 술탄 무함마드 칸줄 알람의 손녀였다. 더글러스는 또한 1866년에 라자 브룩의 딸을 만났다고 주장한 오길비 박사를 만났다고 언급했는데, 이 딸은 결혼한 상태였으며 "분명히 외국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고 묘사되었다.[30]
4. 유산
제임스 브룩은 사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보르네오와 필리핀의 지명뿐만 아니라 여러 동식물 종에 붙여졌으며, 그의 삶은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4. 1. 브룩의 이름을 딴 것들
보르네오의 식물 중 제임스 브룩의 이름을 딴 종은 다음과 같다.- ''로도덴드론 브루케아눔'' (''Rhododendron brookeanum''): 휴 로와 존 린들리가 명명한 꽃피는 식물이다.[34] 현재는 자바 로도덴드론 (''Rhododendron javanicum'')에 포함된다.
- 라자 브루크의 벌레잡이통풀 (''Nepenthes rajah''): 조셉 달턴 후커가 명명한 벌레잡이통풀이다.
곤충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종들이 있다.
- 라자 브루크의 깃털나비 (''Trogonoptera brookiana''):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가 명명한 나비이다.
- 라자 브루크의 사슴벌레: ''Lucanus brookeanus'' Snellen Van Vollenhoven, 1861 = ''Odontolabis brookeana''.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가 채집했다.[35]
세 종의 파충류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6]
- 브룩의 집 도마뱀붙이 (''Hemidactylus brookii'')
- 브룩의 바다뱀 (''Hydrophis brookii'')
- 브룩의 용골 도마뱀 (''Tropidophorus brookei'')
달팽이 중에서는 다음 종이 있다.
- ''Bertia (Ryssota) brookei'' (Adams & Reeve, 1848)
1857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그레이 카운티에 있던 원주민 마을 뉴애시(Newash)는 브룩(Brooke)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인접한 타운십은 당시 캐나다 인디언 사무국장(Superintendent of Indian Affairs)이었던 윌리엄 쿠츠 케펠 (비스컨트 버리, 후일 알비마를 백작 7세)에 의해 사라왁으로 명명되었다.[37] 제임스 브룩은 1843년 보르네오 해안에서 해적과 싸우던 중, 비스컨트 버리의 삼촌인 헨리 케펠을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38] 사라왁 북서쪽의 타운십들은 케펠(Keppel)과 알비마를(Albemarle)로 이름 붙여졌다. 2001년, 사라왁과 케펠은 조지안 블러프스(Georgian Bluffs) 타운십의 일부가 되었고, 알비마를은 1999년 사우스 브루스 페닌슐라(South Bruce Peninsula) 타운에 합병되었다. 케펠-사라왁 학교(Keppel-Sarawak School)는 온타리오주 오웬 사운드(Owen Sound)에 위치해 있다.
필리핀 팔라완 섬의 주요 지방 자치체인 브룩스 포인트(Brooke's Point)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브룩스 등대(Brooke's Lighthouse)와 브룩스 항(Brooke's Port)은 브룩스 포인트의 역사적인 랜드마크이며, 제임스 브룩이 건설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항구는 침식과 계속되는 조수의 영향으로 돌 몇 개만 남아있다. 원래 등대탑의 잔해는 여전히 볼 수 있지만, 현재는 새로운 등대가 세워져 있다.
4. 2. 대중문화
브룩의 사라왁에서의 활동을 각색한 이야기로는 C.S. 고드셜크의 『Kalimantaan|Kalimantaaneng』과 니콜라스 몬사랫(Nicholas Monsarrat)의 『The White Rajah|The White Rajaheng』가 있다. 톰 윌리엄스(Tom Williams)가 쓴 또 다른 책 『The White Rajah|The White Rajaheng』는 2010년 JMS Books에서 출판되었다. 브룩은 조지 맥도널드 프레이저(George MacDonald Fraser)의 정교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The Flashman Papers|The Flashman Paperseng』 소설 시리즈 제6권인 『Flashman's Lady|Flashman's Ladyeng』에도 등장한다.제임스 브룩은 에밀리오 살가리(Emilio Salgari)의 산도칸(Sandokan) 시리즈 2권과 3권의 주요 적대자로 등장한다. 1976년 TV 시리즈에서는 아돌포 첼리(Adolfo Celi)가 브룩을 연기했다.
브룩은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의 소설 『짐 경(Lord Jim)』의 주인공 모델이기도 했으며,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 단편 소설 "왕이 되려 했던 사나이(The Man Who Would Be King)"에도 짧게 언급된다.
찰스 킹즐리(Charles Kingsley)는 1855년 소설 『Westward Ho!|Westward Ho!eng』을 브룩에게 헌정했다.
1936년, 에롤 플린(Errol Flynn)은 플린 자신이 각본을 쓴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의 브룩의 삶을 다룬 영화 『The White Rajah|The White Rajaheng』에 출연할 계획이었으나, 촬영이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되지는 않았다.[31]
2016년 9월, 사라왁 주정부의 아방 압둘 라흐만 조하리 아방 오펭(Abang Abdul Rahman Johari Abang Openg)의 지원을 받아 브룩의 삶을 다룬 영화가 사라왁에서 제작될 예정이었다. 롭 앨린(Rob Allyn)이 각본을 쓰고 세르게이 보드로프(Sergei Bodrov)가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으며, 비영리 단체인 브루크 헤리티지 트러스트(Brooke Heritage Trust)가 영화의 기술 자문을 맡았다. 자문 중 한 명은 브룩 가문의 현 계승자인 제이슨 브룩(Jason Brooke)이었다.[32] 마이클 하우스만(Michael Haussman) 감독의 『Edge of the World|Edge of the Worldeng』이라는 제목의 영화는 2021년에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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