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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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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주마는 머리가 크고 목이 굵은 중소형 품종의 한국 재래마이다. 제주도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사육되었으며,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 시대에 군마 공급을 위해 대규모로 사육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 진상되었고, 일제강점기, 4.3 사건을 거치며 개체 수가 감소했다. 현재는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경마와 승마에 활용된다. 제주마는 다양한 모색을 가지며, 혈통 등록과 외모 심사를 통해 관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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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마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제주마
제주마
국가대한민국
별칭없음
품종 정보
원산지제주도
다른 이름제주마
기타
지정 번호347
지정일1986년 2월 8일
문화재 지정 종류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위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봉개동, 용강동

2. 역사

제주마는 흔히 '제주도 조랑말'이라고 불리며, 키가 작아 과실나무 밑을 지날 수 있다는 뜻의 '과하마(果下馬)' 또는 '토마(土馬)'라고도 한다. 제주도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생종 말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현재와 가까운 품종의 제주마를 기르게 된 것은 13세기 몽골로부터 지금의 제주마 품종이 유입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고려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으로 고려 조정은 몽골을 배제하고 제주의 지배권과 말 사육을 장악하고자 했다. 한편으로 에 맞서기 위해 중국 남쪽에서 일어난 에 접근하는 정책을 펼친 고려에 명은 원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마 공급을 위해 제주의 말을 조공품으로 요구하였다. 이에 목호들은 고려 관리를 살해하고 원 본국에 관리를 파견해줄 것을 청하는 등 고려 조정에 계속해 맞섰고, 공민왕 23년(1374년) "세조 황제(쿠빌라이 칸)가 풀어 기르신 말을 적국에 내줄 수는 없다"며 봉기를 일으킨다(목호의 난). 이 봉기는 최영에 의해 대대적으로 진압되었고, 제주는 고려에 귀속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이성계위화도 회군 당시 타고 있었던 응상백(凝霜白)이 제주마였다고 하며, 말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다. 세종 11년(1429년)에는 고득종의 건의로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목마장이 조성되었고, 해안 지역 촌락 및 농경지와의 경계를 위해 돌담(하잣(Doldam|돌담영어)[4])을 쌓았다. 성종 24년(1493년) 이전에 완성된 하잣을 기준으로 10개의 구역으로 나눈 10소장이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 제주목마장은 의정부, 병조, 사복시의 지휘 감독 아래 운영되었으며, 제주마는 왕이 타는 어승마를 비롯해 군마, 종마, 역마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한양 조정에는 해마다 200필, 진상마 60필을 바쳤고, 제주목사 등 관리에게도 바치도록 규정되어 3년 주기로 말을 징발했다.

숙종 28년(1702년) 이형상이 제작한 《탐라순력도》에는 관 소유 말 9,372필, 소 703필, 제주 인구 43,515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관 소유만 기록한 것으로 민간 소유 말을 포함하면 제주마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운송 수단 발달과 농기계 보급으로 제주마 이용 가치는 감소했다. 특히 1948년 4.3사건 당시 '소개령'과 함께 주인을 잃고 버려지거나 "산폭도의 양식이 될 수 있다"는 명목으로 토벌대에 의해 살처분되어 제주마 수는 대폭 감소했다. 1984년 당시 순종 제주마는 1천 마리가 조금 못 되었다.

1986년 2월, 대한민국 정부는 혈통이 확인된 순종 제주마 64마리를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해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기 시작했다.[1] 천연기념물 지정 직전 제주마 사육두수는 1,347필이었다.

2000년 7월 '제주마 등록관리 규정'을 제정했고,[1] 2002년 4월부터 제주도 차원에서 제주마 기초등록 업무를 시작했다.[1]

2. 1. 선사 시대 ~ 고려 시대

색상별 조랑말


제주도 대정읍 상모리와 안덕면 사계리 해안의 사람과 척추동물 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464호) 등에서 구석기 말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제주에서 말을 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곽지리 조개무덤과 월령리 한들굴 등에서 출토된 말 이빨도 발견되었다. 문종 27년(1073년)에는 탐라국에서 말을 예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2]

원종 14년(1273년) 삼별초를 평정하고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세워 제주를 장악한 남송일본을 공략하기 위한 군마 공급 거점으로 삼았다. 충렬왕 2년(1276년), 탐라총관부 다루가치 탑자적이 몽골 궁정의 말 160마리를 제주 동쪽 수산평(水山坪, 지금의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풀어 길렀다. 흔히 이때부터 제주에서 본격적인 말 사육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듬해(1277년) 제주의 목마장을 관리하기 위해 수산평과 한경면 고산리에 각각 동·서 아막(阿幕)이 설치되었고, 말과 함께 말을 기르는 전문가들이 제주에 들어왔으며 이들은 훗날 목호(牧胡)라 불리게 되었다.[3]

이들은 제주에서 말을 기르고, 고려 본토를 통해 말을 원에 보내는 임무를 맡았다. 목호들에 의해 말 기르는 기술과 함께 몽골어 말 사육 용어도 전래되었으며, '고라', '구렁', '부루', '적다'라는 제주어 용어도 당시 몽골 어휘에서 유래된 것이다. 제주마 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고려 말~조선 초에 걸쳐 2만 마리가 방목되던 때로 알려져 있다.

2. 2. 몽골 지배 시기

고려 원종 14년(1273년) 삼별초를 평정하고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세워 제주를 장악한 (元)은 남송일본을 공략하기 위한 군마 공급 거점으로 삼았다. 충렬왕 2년(1276년) 탐라총관부 다루가치 탑자적(塔刺赤)이 몽골 궁정의 말 160마리를 제주 동쪽 수산평(水山坪, 지금의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풀어 길렀는데, 흔히 이때부터 제주에서 본격적인 말 사육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듬해(1277년) 제주의 목마장을 관리하기 위해 수산평과 한경면 고산리에 각각 동 · 서 아막(阿幕)이 설치되고, 말과 함께 말을 기르는 전문가들이 제주에 들어왔으며 이들은 훗날 목호(牧胡)라 불리게 되었다.[3]

목호의 임무는 제주에서 말을 기르고, 고려 본토를 통해 말을 원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들에 의해 말 기르는 기술과 함께 몽골어 말 사육 용어도 전래되었으며, '고라', '구렁', '부루', '적다'라는 제주어 용어도 당시 몽골 어휘에서 유래된 것이다. 제주마의 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고려 말 - 조선 초에 걸쳐 2만 마리가 방목되던 때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으로 고려 조정은 몽골을 배제하고 제주의 지배권과 말 사육을 장악하고자 했다. 한편으로 원에 맞서기 위해 중국 남쪽에서 일어난 (明)에 접근하는 정책을 펼친 고려에 명은 원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마 공급을 위해 제주의 말을 조공품으로 요구하였다. 이에 목호들은 고려 관리를 살해하고 원 본국에 관리를 파견해줄 것을 청하는 등 고려 조정에 계속해 맞섰고, 공민왕 23년(1374년) "세조 황제(쿠빌라이 칸)가 풀어 기르신 말을 적국에 내줄 수는 없다"며 봉기를 일으킨다(목호의 난). 이 봉기는 최영에 의해 대대적으로 진압되었고, 제주는 고려에 귀속되었다.

2. 3. 조선 시대 ~ 일제강점기

고려 원종(元宗) 14년(1273년) 삼별초를 평정하고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세워 제주를 장악한 (元)은 남송일본을 공략하기 위한 군마 공급 거점으로 삼았다. 충렬왕 2년(1276년) 탐라총관부 다루가치 탑자적(塔刺赤)이 몽골 궁정의 말 160마리를 제주 동쪽 수산평(水山坪, 지금의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풀어 길렀는데, 이때부터 제주에서 본격적인 말 사육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듬해(1277년) 제주의 목마장을 관리하기 위해 수산평과 한경면 고산리에 각각 동 · 서 아막(阿幕)이 설치되고, 말과 함께 말을 기르는 전문가들이 제주에 들어왔으며 이들은 훗날 목호(牧胡)라 불리게 되었다.[3]

목호의 임무는 제주에서 말을 기르고, 고려 본토를 통해 말을 원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들에 의해 말 기르는 기술과 함께 몽골어 말 사육 용어도 전래되었으며, '고라', '구렁', '부루', '적다'라는 제주어 용어도 당시 몽골 어휘에서 유래된 것이다. 제주마 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고려 말 - 조선 초에 걸쳐 2만 마리가 방목되던 때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으로 고려 조정은 몽골을 배제하고 제주의 지배권과 말 사육을 장악하고자 했다. 한편으로 원에 맞서기 위해 중국 남쪽에서 일어난 (明)에 접근하는 정책을 펼친 고려에 명은 원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마 공급을 위해 제주의 말을 조공품으로 요구하였다. 이에 목호들은 고려 관리를 살해하고 원 본국에 관리를 파견해줄 것을 청하는 등 고려 조정에 계속해 맞섰고, 공민왕 23년(1374년) "세조 황제(쿠빌라이 칸)가 풀어 기르신 말을 적국에 내줄 수는 없다"며 봉기를 일으킨다(목호의 난). 이 봉기는 최영에 의해 대대적으로 진압되었고, 제주는 고려에 귀속되었다.

조선 왕조의 개창자이자 고려 말의 무장으로서 활약했던 이성계에게는 팔준마라 불리는 여덟 마리의 명마가 있었는데, 이 중 위화도 회군 당시 타고 있었던 응상백(凝霜白)이 제주마였다고 한다. 말고기 먹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세종 11년(1429년) 제주 출신의 관인 고득종(高得宗)의 건의에 따라 한라산(漢拏山) 중산간 지역에 조성되었는데, 이때 해안 지역의 촌락과 농경지와의 경계를 위해 돌로 하잣(Doldam|돌담영어)[4]이라는 돌담을 쌓았다. 성종 24년(1493년) 이전에 완성된 하잣을 기준으로 10개의 구역으로 나눈 10소장이 설치됐다.

조선 시대 제주목마장은 의정부, 병조사복시(司僕寺)의 지휘 감독 아래 전라도감찰사, 제주목사, 감목관(제주 판관 · 정의현감 · 대정현감 겸임), 마감, 군두, 군부, 목자 등 순서의 계급으로 배치돼 운영되었다. 제주마는 왕이 타는 어승마를 비롯해 군마, 종마, 역마, 파발마, 태마, 만마, 복마 등 다양하게 활용되었으며, 한양의 조정에 해마다 200필과 진상마 60필을 바쳤을 뿐 아니라 제주목사 등 관리에게도 바치도록 규정되어, 3년 주기로 말을 차출했다.

숙종 28년(1702년) 목사 이형상(李衡祥)에 의해 제작된 《탐라순력도》에는 관 소유의 말이 9,372필, 소 703필, 제주의 인구수가 43,515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관 소유만을 기록한 것으로 민간 소유의 말을 포함할 경우 제주마의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운송수단의 발달 및 농기계 보급으로 제주마의 이용 가치는 감소했다. 특히 1948년 4.3사건 당시 제주 해안선 5km 바깥(주로 한라산 중산간 지대의 마을)에 내려진 '소개령'과 함께 주인을 잃고 버려져 산야를 돌아다니다 아사하거나, "산폭도의 양식이 될 수 있다"는 명목으로 토벌대에 의해 살처분되어 제주마의 수는 대폭 감소한다.

2. 4. 해방 이후 ~ 현재

1948년 4.3사건 당시 제주 해안선 5km 바깥(주로 한라산 중산간 지대의 마을)에 내려진 '소개령'과 함께 주인을 잃고 버려진 말들이 산야를 돌아다니다 굶어 죽거나, "산폭도의 양식이 될 수 있다"는 명목으로 토벌대에 의해 살처분되어 제주마의 수는 대폭 감소했다.[1] 1984년 당시 순종 제주마는 1천 마리가 조금 못 되었다.

1986년 2월, 대한민국 정부는 혈통이 확인된 순종 제주마 64마리를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해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기 시작했다.[1] 천연기념물 지정 직전 제주마 사육두수는 1,347필이었다.

2000년 7월에는 '제주마 등록관리 규정'을 제정했고,[1] 2002년 4월부터 제주도 차원에서 제주마에 대한 기초등록 업무를 시작했다.[1]

3. 품종 특징

흔히 '제주도 조랑말'이라고 하며, 키가 작아서 과실나무 밑을 지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의 ‘과하마’ 또는 ‘토마(土馬)’라고도 한다.[1] 제주도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생종 말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현재와 가까운 품종의 제주마를 기르게 된 것은 13세기의 일로, 몽골로부터 지금의 제주마 품종이 유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마는 제주의 농경문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한때 그 수가 2만여 마리에 달했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운송수단의 발달 및 농기계 보급 등으로 인해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마의 혈통 및 품종 보존을 위하여 제주마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제주마는 머리가 크고 목이 굵은 중소형 품종으로, 성격은 온순하고 체질이 건강하여 병에 대한 저항력과 생존력이 강하다. 몸통은 덩치가 크고, 땅에서 어깨까지의 높이나 엉덩이까지의 높이에 비해 몸통이 비교적 길다. 털색은 밤색이 가장 많고 적갈색, 회색, 흑색 등의 순서이다. 전체적으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으며 몸길이가 긴 독특한 체형이다. 뛰어난 지구력과 인내심 때문에 전통적으로 농업용과 짐 운반용 말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경주와 승마에 활용된다. 발굽이 단단하고 두꺼워서 편자 없이도 잘 달린다.

2011년 제주도청 집계에 따르면, 제주도 내 농가 1,157곳에서 기르는 총 22,223마리의 말 가운데 혼혈종 한라마[1] 16,692마리와 수입산 서러브레드 4,179마리를 제외한 나머지 제주마는 모두 1,392마리였으며, 그 가운데 혈통이 등록된 순종은 200마리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수말의 키는 121.8cm이며, 암말은 보통 113.2cm이다. 암수 모두 전형적인 몸길이는 122.3cm이며, 평균 체중은 230kg이다.

풀을 뜯는 제주마

3. 1. 다양한 모색

제주마는 다양한 모색을 나타내며, 각 부위의 특징과 함께 품종의 이름을 결정한다. 모색은 또한 각 품종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1]

  • 가라마(Garama, 검은색): 전체 모색이 검은색이다.
  • 적다마(Jeokdama, 밤색): 전체 모색이 옅은 갈색 또는 구릿빛이다.
  • 월라마(Wallama, 얼룩무늬): 기본 모색은 흰색이며 검은색 또는 짙은 갈색 반점이 있다.
  • 유마(Yuma, 짙은 갈색): 전체 모색은 밤색 또는 갈색이며, 갈기, 꼬리, 다리 아랫부분의 색깔은 검은색이다.
  • 총마(Chongma, 회색): 전체 모색은 흰색이지만, 짙은 갈색, 밤색, 검은색이 섞여 있을 수 있다.
  • 공골마(Gonggolma, 붉은 갈색): 모색은 밤색이며, 갈기와 꼬리는 크림색이다.
  • 고라마(Gorama, 황갈색 또는 둔한 색): 전체 모색은 옅은 갈색이며, 갈기에서 꼬리까지 이어지는 검은색 등줄기가 있고 다리 아랫부분은 검은색이다.
  • 부루마(Buruma, 로안): 모색은 짙은 갈색, 밤색, 검은색과 흰색이 섞여 있다. 총마보다 흰색 털이 적고, 특히 다리에는 흰 반점 없이 기본 모색이 나타난다.
  • 거흘마(Geoheulma, 반점): 눈 주변, 아랫배, 다리의 색깔이 전체 모색보다 밝거나 흰색이다.
  • 자흘마(Jaheulma, 얼룩): 몸 전체에 다양한 크기의 주근깨가 흩어져 있다.


같은 모색을 가진 말이라도 색상의 톤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흰 반점의 위치에 따라서도 다른 이름이 붙는다.[1]

  • 간전이(Ganjeoni): 이마에서 코까지 흰 줄이 뻗어 있다.
  • 골리매(Gollimae): 눈 주변에 안경과 같은 원이 있다.
  • 광간전이(Gwangganjeoni) 또는 왕간전이(Wangganjeoni): 이마에서 코까지 넓은 흰 줄이 뻗어 있다.
  • 면백이(Myeonbaegi): 얼굴이 흰색이다.
  • 면조기(Myeonjogi): 복사뼈에 털이 없다.
  • 목하니(Mokhani): 목 주변에 흰 반점이 있다.
  • 사퉁이(Satoongi): 눈 하나가 사시이다.
  • 이옹이(Iongi): 꼬리가 굽어 항문이 노출되어 있다.
  • 접수기(Jeopsoogi): 어깨가 낮고 등이 높다.
  • 족발이(Jokbari): 다리 하나가 다른 다리보다 약간 짧아 절뚝거린다.
  • 피마리(Pimari): 코에 흰 반점이 있다.
  • 활등이(Hwaldeungi): 등이 깊이 패여 있다.


3. 2. 번식

제주마는 장일 번식 동물에 속하며, 제주특별자치도에서 3월부터 8월까지 교배가 이루어진다. 수말은 대략 3~4세에 번식 적령기에 도달하며, 3세 암말은 봄에 최고의 번식 상태가 된다. 공식적인 번식 기간은 25년이다.[1] 발정 주기는 20~24일(평균 22일)이며, 발정은 보통 4~11일(평균 7일) 지속된다. 출산 후 7~10일(평균 8일) 이내에 암말은 다시 발정을 겪으며, 22일마다 반복된다.[1]

제주마 (어미와 망아지)

4. 보존 관리

제주마는 '제주도 조랑말'이라고도 불리며, 키가 작아 과실나무 밑을 지날 수 있다는 뜻의 '과하마(果下馬)' 또는 '토마(土馬)'라고도 불린다. 제주마는 13세기 몽골로부터 유입된 품종으로 알려져 있으며, 농경문화에 크게 기여했다. 한때 2만여 마리에 달했지만, 운송수단 발달과 농기계 보급으로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마의 혈통 및 품종 보존을 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제주마는 키가 암컷 117cm, 수컷 115cm 정도로 작고, 온순하며 건강한 체질을 가지고 있다. 털색은 밤색이 가장 많고 적갈색, 회색, 흑색 등이 있다.

2011년 조사에 따르면, 제주도 내 말 22,223마리 중 제주마는 1,392마리였으며, 그중 순종은 200마리였다. 제주마는 혈통등록마와 기초등록마로 나뉘어 관리된다. 혈통등록마는 부모 모두 혈통등록된 말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고, 기초등록마는 혈통은 알 수 없지만 외모와 유전자가 제주마인 개체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은 이 기준에 따라 174마리를 제주마로 선정하여 등록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의 규정에 따르면, 천연기념물 제주마는 5가지 외모 심사 기준(엉덩이 경사, 궁둥이 돌출 여부, 머리 크기, 눈 모양, 목 굵기, 털 윤택, 인상)과 17가지 유전인자를 확인하는 DNA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기초등록이 이루어지면 전자칩을 말의 목 근육에 심어 출생정보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도 곽지리 조개무덤과 월령리 한들굴에서 발굴된 말 이빨을 통해, 석기 시대 말기 또는 청동기 시대 초부터 제주도에 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73년(고려 문종 27년) 고려 시대 역사 기록에는 제주에서 임금에게 훌륭한 말을 진상했다는 내용이 있다. 1276년 몽골에서 수입한 말 160마리를 수용하기 위해 탐라 목장을 국영 목장으로 건설하면서 국가 차원에서 제주마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1374년까지 1세기 이상 몽골 말을 계속 수입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대 시대에 제주는 중앙 정부의 요청에 따라 말을 제공했으며, 약 2만 마리의 말을 사육했다. 1960년대부터 교통 수단 발달로 말 활용도가 감소했고, 1970년대 후반에는 한국마사회가 경주마 생산을 위해 다른 품종을 도입하면서 토종 제주마 개체수 감소에 영향을 주었다.

1980년대 중반, 제주마는 약 1,200마리까지 감소했다. 1986년, 정부는 멸종을 방지하고 품종을 보존하기 위해 천연기념물 제347호 '제주 제주마'로 지정했다. 현재 150마리 이상의 토종 제주마가 보호 구역 내에서 사육되고 있다. 2000년, 정부는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을 제주마 등록 및 사육 지정 기관으로 지정하고, 제주마 등록 및 관리 규정을 제정했다. 신생 망아지에게는 식별을 위해 전자 칩을 삽입하고, 국제동물유전학회에서 권장하는 부자 감별 검사를 통해 혈통을 확인한 후 공인 인증서를 발급한다. 제주마에 대한 혈통 관련 정보는 제주마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을 통해 제공된다.[1]

4. 1. 보존 관리 문제점

제주마는 유전자가 일치하더라도 외모와 발육 상태가 표준 외형과 다르면 제주마로 인정받지 못한다. 2005년에는 유전자 분석을 통과한 암말 1필이 발육 상태와 외모 때문에 제주마 기초등록이 거부된 사례가 있었다. 마주는 이에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17개 유전자만을 선별 분석한 점과 표준 발육 성적 불량, 외모심사 부적합 등을 이유로 축산진흥원의 손을 들어주었다.[5]

2020년부터 제주 경마장에 제주마만 경주마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제주마 논쟁이 심화되었다. 2007년 기준으로 제주도 내 말 사육 규모는 18,634마리였지만, 이 중 제주마로 등록된 말은 5%에 불과했다. 제주경주마생산자협회는 축산진흥원의 제주마 순종 판정 유전자 검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등록된 기초등록마 174마리에 대한 전면 재조사와 제주마 진상규명 위원회 구성을 요구했다.[6] 2008년에는 제주마 사육농가들이 제주도청을 방문하여 제주도의 제주마 혈통등록 및 마필정책에 항의하는 사건도 있었다.[7]

제주마의 외모 기준에 대한 객관성과 공정성 문제도 제기되었다. 2008년 제주도 감사위원회의 특별감사 결과, 외모 심사에서 객관적 기준 대신 심사위원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거나, 혈통 등록마에 대해 소홀한 기준을 적용하는 등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비지정 유전자를 가진 말이 제주마로 등록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8] 이에 축산진흥원은 외모 심사 기준을 구체화하고, 혈통등록마의 발육 상황 확인 후 기준 체형을 크게 벗어나면 등록을 취소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했다.[9]

참조

[1] 문서 한라마는 제주마와 서러브레드종 사이의 교배종으로, 제주산마라고도 한다.
[2] 서적 고려사
[3]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4] 문서 잣은 제주어로 '성(城)'이라는 뜻이다. 흔히 '잣' 또는 '잣성'이라고 부른다.
[5] 뉴스 제주마(馬) DNA 혈통보다 '외모'가 더 중요 http://www.jejusori.[...] 제주의소리 2006-12-27
[6] 뉴스 천연기념물 제주마 진위 규명하라 http://www.mediajeju[...] 미디어제주 2007-11-09
[7] 뉴스 말 사육농가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나" http://www.mediajeju[...] 미디어제주 2008-05-23
[8] 뉴스 제주마 등록제도 곳곳에 ‘구멍’ http://www.seogwipo.[...] 서귀포신문 2008-06-24
[9] 웹인용 〈한겨레〉 2008.6.25 보도 "제주마 외모심사 점수제 부활키로"(기자 허호준) http://www.hani.co.k[...] 2013-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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