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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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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간 지진은 869년 5월 26일 무쓰국(현재의 도호쿠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일본삼대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진으로 인한 지진광 현상과 쓰나미가 발생하여 약 1,000명이 익사했으며, 다가성 등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지진의 규모는 M8.3에서 M9.0 사이로 추정되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유사한 점이 많아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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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 지진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조간 지진
현지 날짜869년 7월 9일 (조간 11년 5월 26일)
위치미야기현, 일본
지진 정보
진앙산리쿠 해역(무쓰국 동쪽 해역)
깊이알 수 없음
규모 종류모멘트 규모
규모8.6–9.0
지진 종류해구형 지진
단층 유형역단층
쓰나미 정보
쓰나미 발생 여부발생
쓰나미 높이최대 약 10m
피해 정보
사망자약 1,000명

2. 문헌 상의 기록

엔기 원년(901년)에 편찬된 일본삼대실록에는 조간 지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일본삼대실록은 조간 11년 5월 26일(율리우스력 869년 7월 9일)의 대지진 및 이후 피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위 기록에서 '성'은 다가성으로 추정된다. 지진으로 인한 압사자 수는 기록되지 않았고, 쓰나미로 인한 익사자가 대부분이었다. 다가조시 교육위원회의 시카와하시 유적 발굴 조사에서는 남북대로가 탁류로 훼손된 흔적은 발견되었으나, 해수생물 관련 규조는 확인되지 않아 쓰나미 피해 여부는 불명확하다.[110][111][112] "비추는 빛이 낮처럼 비추고"(流光如晝隱映) 부분은 지진광 현상을 언급한 일본 최초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내륙 수십백리까지"(去海數十百里)는 원본에 "내륙 수천백리"(去海數千百里)로 기록되었으나, 당시 단위(1=6, 약 650m)로 계산하면 너무 멀어 '수십백리'(약 30-65km)가 맞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125] "연해로부터 수십백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가설도 있다.[133]

2. 1. 원문 기록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일본어)은 엔기 원년(901년)에 편찬된 역사서로, 조간 지진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일본삼대실록에 기록된 조간 11년 5월 26일(율리우스력 869년 7월 9일)의 대지진 및 이후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위 기록에서 "陸奧國"의 "城"은 다가성으로 추정된다. 지진으로 인한 압사자 수는 기록되지 않았고, 쓰나미로 인한 익사자가 대부분이었다. "流光如晝隱映" 부분은 지진광 현상을 언급한 일본 최초의 기록으로 추정된다.[110][111][112]

"내륙 수십백리까지"(去海數十百里)라는 문장은 원본에서 "내륙 수천백리"(去海數千百里)였으나, 당시 단위인 1=6(약 650 m)로 계산해도 너무 길어 '수십백리'(약 30-65 km)가 맞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많다.[125] 또한 "연해로부터 수십백리"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가설도 있다.[133] "原野道路 惣爲滄溟"의 "도로"는 당시 다카조로 통하는 관도인 동산도나 하마 거리의 옛 관도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9][20]

2. 2. 조정의 대응

일본 조정의 지진 대응은 지진 발생 약 3개월 후인 869년 10월 15일(조간 11년 9월 7일)에야 이루어졌다. 일본삼대실록에는 기노 하루에다를 무쓰국 지진사로 발령했다는 기록이 있다.[125]

九月・・・七日辛酉・・・以從五位上-行左衛門權佐-兼因幡權介-紀朝臣-春枝,爲陸奧國地震使。判官一人、主典一人。|9월... 7일 신유일... 종5위상 행좌위문권좌 겸 임번권개인 기노 하루에다를 무쓰국 지진사로 임명했다. 또 판관 1명, 주전 1명을 같이 임명하였다.일본어

지진 발생 4개월 후인 869년 11월 20일(조간 11년 10월 13일) 기사에는 세이와 천황무쓰국 국경을 피해지역으로 지정하는 조서를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정은 백성을 가리지 않고 구호하며 죽은 자들은 모두 매장하라고 명했다. 또한 이재민에게는 노역과 조세 의무를 면제하였다.[125]

같은 해 12월 8일에는 무쓰국의 정5위상 훈9등 간다미네 노카미에게 종4위하를 수여하였다.(같은 기사가 12월 25일에 있음) 역사학자인 요시다 도고는 일본삼대실록 원본에서 정6위상에서 정4위하로 여러 단계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부성이 갑작스러운 재해를 맞은 나이에 3계를 뛰어넘은 것은 바로 그의 재앙이 산신의 분노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증거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125]

870년 1월 19일(조간 11년 12월 14일)에는 세이와 천황이 이세 신궁에 사신을 보내 봉폐하고 신전에 고문을 봉헌했다. 고문에는 869년 6월 15일부터 있었던 신라 해적하카타 침공, 7월 14일 있었던 히고국의 지진과 풍수해, 5월 26일 있었던 무쓰국의 거대한 지진재해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국내의 평안을 바란다는 내용이 씌여 있었다. 늦어도 이듬해인 조간 12년 9월까지는 무쓰국의 수리를 담당하는 "무쓰국 수리부"가 수립되었다.[113][114][115]

교토 헤이안쿄에서는 역병으로 죽은 자의 원령을 물리치기 위한 고료카이라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 의식은 현대의 기온마쓰리의 기원이 되었다.[116]

2. 3. 기타 재해와의 연관성

9세기 경 일본에서는 여러 차례 큰 지진과 화산 분화가 일어났으며, 이러한 내용은 일본삼대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조간 지진과 지구물리학적 관련성은 명확하지 않으나, 지진 전후로 여러 화산이 분화하였다. 지진 발생 5년 전인 864년에는 후지산에서 아오키가하라 수해에서 용암류를 분출한 조간 대분화가 일어났다. 지진 발생 2년 후인 871년에는 조카이산이 분화했다는 기록이 있다.[117] 지진 9년 후인 878년에는 간토 지방에서 사가미-무사시 지진이 발생했는데, 이는 유발지진의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는 반박도 있다.[118] 915년에는 도와다 화산의 대분화로 인한 화산재가 도호쿠 지방 전역에 영향을 미쳤고, 미야기현 북부에서는 화산재에 묻힌 논터가 발굴되기도 했다.[119] 이는 조간 지진의 쓰나미와 함께 도호쿠 지방에 크고 심각한 사회 변동을 일으켰다. 한반도에서도 946년경 백두산이 분화하였다.[120]

서일본에서도 지진 발생 전 해인 868년 하리마노쿠니 지진이 일어났고, 887년에는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으로 추정되는 닌나 지진이 일어났다. 이들 지진과 조간 지진의 관련성은 명확하지 않으나, 이 시기 일본 지역의 지각에 큰 변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21]

이마무라 아키쓰네는 684년경부터 887년경은 지진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 중 하나로 보았으며,[122] 반대로 하야카와 유키오는 9세기 경 지진 기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방에서 일어난 지진이 교토에 보고되는 체제가 정비된 가운데 육국사 편집에 의한 인위적인 효과까지 더해져 나타난 착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123]

9세기 일본에서 발생한 주요 지진 및 화산 활동은 다음과 같다.

날짜사건비고
850년 11월 23일데와 지진M7
863년 7월 6일엣츄・에치고 지진
864년 7월후지산의 조간 대분화2년간 지속
864년 11월아소산 분화
867년 3월쓰루미다케 (오이타현) 분화
867년 6월아소산 분화
868년 7월 30일하리마・야마시로 지진M7, 야마자키 단층 추정
869년 1월셋쓰 지진7월 30일의 여진 지속
869년 7월 13일조간 지진
869년 8월 29일히고 태풍 고조 피해쓰나미 가능성
871년 5월초카이산 분화
874년 3월 25일, 885년 7월, 8월가이몬다케 대분화
878년 10월 28일사가미・무사시 지진M7.4
880년 11월 19일이즈모 지진M7
887년 8월 26일닌나 지진난카이 해구 거대 지진?, M8.0 - 8.5
915년도와다 화산 분화화산재(To-a) 도호쿠 지방 전역 확산
940년한반도백두산 분화[100]


3. 지진 연구

조간 지진은 일본삼대실록에 기록된 지진으로, 이전부터 문헌 연구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도호쿠 지방의 개발에 따른 지반 조사와 일본 해구의 지진학적 연구가 발전하면서 관련 연구 기록도 늘어나고 있다. 산리쿠 해역 지진의 지진 재해 기록이 적고 조간 시기 기록 자체가 희귀하며,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까지 일어나면서 연구의 중요성이 커졌다.[124]

9세기 경 일본에서는 여러 차례 큰 지진과 화산 분화가 일어났으며, 이는 일본삼대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조간 지진과의 지구물리학적 관련성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지진 전후로 여러 화산이 분화하였다. 조간 6년(864년)에는 후지산 아오키가하라에서 대규모 용암류를 내뿜는 조간 대분화가 일어났고, 지진 발생 2년 후인 조간 13년(871년)에는 조카이산이 분화했다.[117] 지진 9년 후인 간교 2년(878년)에는 간토 지방에서 규모 M7.4의 사가미-무사시 지진이 발생했으며, 이 지진이 조간 지진의 유발지진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지진 발생 지역 간 거리가 멀다는 반박도 있다.[118] 915년에는 도와다 화산 대분화로 발생한 화산재(To-a)가 도호쿠 지방 전역에 영향을 미쳤고,[119] 조간 지진 쓰나미와 함께 도호쿠 지방에 크고 심각한 사회변동을 일으켰다. 한반도에서도 946년경 백두산이 분화하였다.[120]

서일본에서도 지진 발생 전 해인 조간 10년(868년) 야마자키 단층에서 하리마노쿠니 지진이 일어났고, 닌나 3년(887년)에는 난카이 해곡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닌나 지진(M8.0-8.5)이 일어났다. 닌나 지진과 조간 지진 간 관련성은 명확하지 않으나, 이 시기 일본 지역 지각에 큰 변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21]

이마무라 아키쓰네는 684년경부터 887년경은 지진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 중 하나로 보았고,[122] 하야카와 유키오는 9세기 경 지진 기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방에서 일어난 지진이 교토에 보고되는 체제가 정비된 가운데 육국사 편집에 의한 인위적인 효과까지 더해져 나타난 착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123]

혼슈 북부 지역은 오호츠크 미소판(일부에서 북아메리카 판 내 미소판으로 제안)과 섭입하는 태평양 판의 수렴 경계 위에 위치한다.[5] 이 경계는 판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파열이나 상부 또는 섭입하는 판 내 변형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역사적 지진과 관련이 있으며, 이 중 다수는 1896년 산리쿠 지진처럼 파괴적인 쓰나미를 유발했다.[5]

3. 1. 문헌 연구

엔기 원년(901년)에 편찬된 일본삼대실록(일본기략, 유취국사 171)에는 조간 지진에 관한 여러 기록이 있다. 일본삼대실록에 기록된 조간 11년 5월 26일 대지진 및 이후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위 기록에 나오는 무쓰국의 '성'은 다가성으로 추정된다. 지진으로 인한 압사자 수는 기록되지 않았고, 쓰나미로 인한 익사자가 대부분이었다. 다가조시 교육위원회의 시카와하시 유적(市川橋遺跡) 발굴 조사에서는 남북대로가 탁류로 훼손된 흔적은 발견되었으나, 규조 분석에서 해수생물 관련 규조가 확인되지 않아 조간 지진의 쓰나미 피해로 훼손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110][111][112] "비추는 빛이 낮처럼 비추고"(流光如晝隱映)라는 표현은 지진에 따른 굉관이상현상 중 하나인 지진광을 언급한 일본 역사상 최초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내륙 수십백리까지"(去海數十百里)라는 문장은 원문에서는 "내륙 수천백리"(去海數千百里)였으나, 당시 단위인 1=6(약 650m)로 계산해도 너무 길다. "거해"는 해안에서 침수된 성곽까지의 거리를 의미하나, 당시 다가성에서 해안마을인 미나토하마까지는 50정(약 5.5km)도 되지 않기 때문에 '수십백리'(약 30-65km)가 맞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많다.[125] "연해로부터 수십백리"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가설도 있다.[133]

일본 미야기현 다가조시에 있는 스에노마쓰야마


메이지 시대 요시다 도고는 일본삼대실록의 "성곽"이 무쓰국 국부와 다가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며, 광범위한 지역이 쓰나미로 침수되었고 진원지는 태평양 해역에 있다고 주장했다. 백인일수에 나오는 기요하라노 모토스케의 "契りきな かたみに袖を しぼりつつ 末の松山 波越さじとは"(고슈이와카집 수록, 번역: 약속했었죠. 눈물을 흘리면서 스에노마쓰야마가 결코 파도를 뒤집어쓰지 않도록 둘의 사랑 또한 변치 않을 거라고. 그런데도)의 스에노마쓰야마는 미야기현 다가조시 야하타의 구릉 지역으로, 쓰나미가 스에노마쓰야마를 넘을 듯 말 듯 밀려든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125][126]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당시에도 스에노마쓰야마 기슭까지 쓰나미가 밀려왔으나, 이 구릉 너머로는 침수되지 않았다.[127][128] 스에노마쓰야마의 노송 두 그루는 "냄비 달린 소나무"(鍋かけの松)라고도 불리는데, 조간 지진 당시 쓰나미로 소나무에 냄비가 걸렸다는 지역 설화 때문이다.[129]

"고사지와 쇼조"(小佐治と猩々ヶ池) 전승도 있다. 1907년 후나야마 만넨의 염성승보에 처음 기록되었는데, 다가성 하치만 선술집 딸 고사지가 쇼조(바다에서 나타나는 빨간 머리의 이형 생물)와 통하게 되었고, 쇼조는 마을 사람들에게 죽임당할 것을 깨닫고 고사지에게 시체를 연못에 버려달라며, 6일 후 큰 쓰나미가 오니 마쓰야마로 도망가라고 한다. 쇼조는 살해당하고, 하치만 지역 우에센켄/시모센켄 마을 전체가 쓰나미에 휩쓸리고 고사지만 살아남는다는 내용이다.[130][131]

이마무라 아키쓰네는 조간 지진과 게이초 산리쿠 해역 지진이 도호쿠 지방 태평양 연안에 큰 쓰나미를 일으켰으며, 메이지 산리쿠 해역 지진보다 규모가 크고 일본의 지진활동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132] 산리쿠 연안은 쓰나미가 잦음에도 게이초 시대까지 약 1,200년간 조간 지진 기록만 남아있어, 쓰나미 규모와 피해가 컸을 것이라고 추정했다.[133]

1995년 이누마 유요시는 미야기현 나토리시 신사의 전승(조간 연간 역병 유행으로 서민들이 고통받았다는 내용)이 조간 지진 쓰나미와 관련 있다고 보고, 비슷한 규모의 쓰나미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34]

조간 지진 쓰나미 전승은 25건(미야기현 게센누마시~이바라키현 다이요촌(현 호코타시)) 확인된다. 미야기현-이바라키현 해역 일본 해구 지역 남북 230km, 동서 50km 단층 모델을 가정하면 M8.5로 추정된다.[135] 산리쿠 지역에 쓰나미 전승이 적은 이유는 쓰나미 상습 지대에서는 전승이 생기기 어렵고, 에조 시기 전승이 후대 주민에게 제대로 전해졌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며, 전승이 없다고 산리쿠 지방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136] 스니오가와 하구 다가조시 구 하치만촌, 구 이치카와촌, 구 난도미야촌, 리후정, 구 가세촌 등 스니오가와 중부 지역에서도 대형 쓰나미 관련 전승이 존재한다.[137]

10월 13일 조칙의 "무쓰국경 지진 극심, 쓰나미 발생"에서 '무쓰국경'은 "무쓰국 경계 안"을 의미하며, 무쓰국 내 광범위한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음을 뜻한다.[138] 12월 14일 이세신궁 고문에는 "무쓰국에 이상 지진으로 큰 참화. 다른 쿠니도 참화"라고 적혀, 피해가 무쓰국 외 히타치국 등에도 미쳤음을 알 수 있다.[139][140]

1986년 이후 미노우라 고지의 센다이평야 옛 쓰나미 퇴적층 연구 결과, 문헌 속 조간 지진 쓰나미 외 3번의 쓰나미 퇴적층이 발견되어 선사 시대 지진 흔적으로 추정된다.[141] 1990년 도호쿠 전력 오나가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관련 고고학 소견 및 쓰나미 퇴적물 조사 결과, 조간 지진 흔적 높이는 2.5-3m, 침수 지역은 해안선 3km 이내로 결론내려졌다.[142][143]

2000년대 시추 조사로 센다이평야 쓰나미 흔적 연구가 발전했다.[144] 2005년 일본 문부과학성 위탁 "미야기현 해역 지진 중점조사관측단" 시추 조사, 이와테현 오쓰치만 조사(해저 35m 시추, 6000년간 쓰나미 퇴적층 22겹 발견)에서 Ts10 지층(두께 2m)이 조간 지진 당시 쓰나미 지층으로 추정되었다.[145][146]

센다이평야 연안부에서 1000년 전 쓰나미가 내륙 깊숙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었고, 조간 시기 외 다른 시기 쓰나미 흔적도 발견되었다. 도호쿠 대학 연구 결과, 센다이평야에 과거 3000년간 최대 3번 쓰나미(간격 800~1100년)가 덮쳤고, 9m 쓰나미가 7~8분 간격으로 반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조사에서는 이와테현~후쿠시마현/이바라키현 해역 진원, M8.6 연동형지진으로 추정되었다.[147] 2008년 조사에서는 리쿠젠타카타평야에서 쓰나미 퇴적물이 관측되지 않아, 진원역 북쪽 끝을 리쿠젠타카타시 아래로 추정한다.[148]

2011년 3월 11일, 산리쿠 해역 중심, 이와테현~이바라키 해역 광범위 진원, M9.0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발생. 조간 지진처럼 광범위 진원, 거대 쓰나미, 800~1100년 간격 등을 토대로 동일본대지진과 조간 지진 관계가 깊다는 주장이 있다.[149]

2011년 8월, 쓰나미 퇴적물 연대 비교 결과, 과거 3500년간 일본 연안 최소 7회 큰 쓰나미 발생, 쿠릴해구~일본해구 부근 4개 진원역 연동 M9급 지진 발생, 조간 지진도 이에 속한다고 발표했다.[150][151]

가와스미 히로시(1951)는 조간 지진 상수 MK7.5, M8.6 추정.[152] 우사미 다쓰오(1975)는 1933년 쇼와 산리쿠 지진보다 크지만 1960년 발디비아 지진 Ms8.5 기준으로 M8.3-8.4 추정, 2003년 M8.3±1⁄4로 수정.[153][154]

일본 산업기술총합연구소는 센다이평야 쓰나미 퇴적물 바탕 M8.4 추정(미야기현~후쿠시마현 해역 200km 단층 모델 가정).[155] 산리쿠 해안 쓰나미 퇴적물 발견으로 추정 진원역 확대,[156]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당시 쓰나미 퇴적물 발견 범위보다 내륙까지 쓰나미 도달, 판 미끄러짐, 해구 축선 부근 단층 파괴 가능성으로 M8.4 초과, 2011년 동일본대지진 규모와 비슷할 것이라는 추정치도 있다.[149][157]

지형, 지질학적 판 왜곡 속도, 조수 데이터 침강량 종합 판단 시 M9급 지진 반복 발생 주장,[158] 고케쓰 가즈키(2011)는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판 경계 왜곡에너지 분석, 1000년 주기 에너지 방출은 과도, 440년 주기 M9급 지진 발생, 조간 지진도 포함 주장.[159] M8.4 추정 역사지진 조간 지진, Mw9.0 가능성, 호에이 지진과 함께 Mw9.0급 초거대지진으로 꼽힌다.[160]

1990년 도호쿠 전력 오나가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당시 아베 히사시 고고학 연구결과 종합 쓰나미 퇴적물 높이, 침수 영역 연구 존재, 유적 쓰나미 관련 퇴적물 조사 검토 미실시.[142]

1999~2000년 다가조시 이치카와바시 제26, 27회 조사, 구 스나오시강 물길 인근 남북대로 침식 흔적 퇴적물(SX1779) 발견, 규조 분석 결과 바다 생물 미발견, 바닷물 영향 증거 없음. 도호쿠 대학 규조 분석 결과 동일, "쓰나미 퇴적물 아님" 결론.[161][162][163][164][165]

다가조성 아래 쓰나미 도달 여부 관련, 일본삼대실록 서술 두고 야나기사와 가즈아키라[166], 도키노 히로히코[167] 논쟁.[168] 토층 아래 퇴적물 구조, 규조 분석 결과 다가조성 아래 대부분 지역 쓰나미 퇴적층 덮임 설 우세.[169]

3. 2. 쓰나미 퇴적물 조사 및 진원지 추정

일본삼대실록에 따르면, 조간 11년 5월 26일(서기 869년 7월 9일) 무쓰국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해명과 함께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 "내륙 수백 리"가 물에 잠기고 천여 명이 익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내륙 수십백리"라는 표현은 과장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약 30-65k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25]

1986년 이후 센다이 평야에서 실시된 쓰나미 퇴적층 연구 결과, 조간 지진 외에도 최소 3번의 쓰나미 흔적이 발견되었다.[141] 도호쿠 전력 오나가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따라 1990년에 실시된 조사에서는 쓰나미의 최대 소상 지점을 후지타 신덴 부근으로 결론내렸고, 쓰나미 흔적 높이는 2.5-3m, 침수 지역은 해안선으로부터 3km 안쪽 범위로 추정했다.[143]

2000년대 이후 시추 조사 등을 통해 센다이 평야의 쓰나미 흔적 연구가 발전했다.[144] 2005년 이와테현 오쓰치만 조사에서는 과거 6000년간의 해저 퇴적층에서 22겹의 쓰나미 퇴적층이 발견되었고, 그중 Ts10 지층이 조간 지진 당시의 쓰나미 지층으로 추정되었다.[146]

도호쿠 대학 연구에 따르면, 센다이 평야에는 과거 3000년간 최대 3번의 쓰나미가 덮쳤으며, 그 간격은 800년에서 1100년 사이였다. 2007년 조사에서는 이와테현 해역(산리쿠 해역)에서 후쿠시마현 해역 또는 이바라키현 해역까지 진원역인 규모 M8.6의 연동형 지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147] 2008년 조사에서는 리쿠젠타카타시 아래를 진원역의 북쪽 끝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48]

2011년 8월 쓰나미 퇴적물 연대 비교 조사 결과, 과거 3500년간 일본 연안에 최소 7회의 큰 쓰나미가 몰아쳤으며, 이는 쿠릴 해구에서 일본 해구 부근까지 4개의 진원역 중 하나 또는 복수가 연동하여 발생한 M9급 지진 때문이라고 발표되었다.[150][151]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은 조간 지진과 발생 간격 및 진원역의 특징이 유사하여 관련성이 제기되고 있다.[149]

지진의 규모는 표면파 규모 8.6으로 추정되었으나,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과 관련된 쓰나미 퇴적물 분석 결과, 869년 지진의 규모가 최대 9.0에 달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8]

3. 3. 추정 규모

가와스미 히로시(1951)는 조간 지진의 규모를 MK7.5로 가정하여 M8.6 정도로 추정하였다.[152] 우사미 다쓰오(1975)는 1933년 쇼와 산리쿠 지진보다는 크지만 1960년 발디비아 지진의 표면파 규모 Ms8.5보다는 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M8.3-8.4로 추정하였다.[153] 그러나 당시에는 모멘트 규모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2003년 우사미 다쓰오는 M8.3±1⁄4로 추정치를 수정하였다.[154]

일본 산업기술총합연구소는 센다이 평야에서 발견된 쓰나미 퇴적물을 바탕으로 약 M8.4의 규모를 추정했지만,[155] 이는 미야기현 해역에서 후쿠시마현 해역 사이의 길이 200km 단층 모델을 가정한 결과였다.

이후 산리쿠 해안 지역 전역에서 쓰나미 퇴적물이 발견되면서 추정 진원역의 범위가 더 넓어졌고,[156]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당시에는 쓰나미 퇴적물이 발견된 범위보다 더 내륙 안쪽까지 쓰나미가 들이닥쳤다. 판 사이의 미끄러짐이 커서 해구 축선 부근까지 단층 파괴 영역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규모를 추정할 때 기존의 M8.4를 넘어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규모와도 거의 비슷할 것이라는 추정치도 있다.[149][157]

지형으로 추정되는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역의 융기량과 지질학적으로 관측되는 판의 왜곡 속도 및 조수 데이터를 통한 침강량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M9급 거대지진이 반복해서 발생해야 수치가 맞는다는 주장도 있다.[158] 고케쓰 가즈키(2011)는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의 판 경계에 쌓였던 왜곡에너지를 분석하여 1000년에 한 번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은 지나치게 에너지가 축적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440년에 M9급 규모 지진이 한 번 발생한다고 추정하며 조간 지진도 그런 지진 중 하나라고 말했다.[159] 기존에 M8.4 정도로 추정되었던 역사지진인 조간 지진이 모멘트 규모로는 Mw9.0 정도로 될 수 있으며, 호에이 지진과 함께 Mw9.0 급으로 추정되는 초거대지진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160]

쓰나미 모델링을 통해 얻은 표면파 규모 척도로는 8.6으로 추정되었다. 200km 길이, 85km 너비에 변위가 2m인 진원지는 관측된 범람 분포 및 정도와 일치한다. 2011년 지진과 관련된 쓰나미 퇴적물 분석 결과, 이전 사건에서 모래 퇴적 범위가 침수 정도를 과소평가했음을 시사한다. 진흙 퇴적물은 모래층보다 1.5배 더 멀리 뻗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센다이 평야의 지형과 경작 방식이 869년 이후 크게 변하지 않았으므로, 2011년과 869년 쓰나미의 진원이 비슷한 규모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869년 지진의 규모가 심각하게 과소평가되었음을 시사한다.[8] 따라서 이 지진의 규모는 최대 9.0에 달했을 수 있다.

센다이 평원의 홀로세 연대기에서 세 개의 쓰나미 퇴적층이 확인되었으며, 모두 지난 3,000년 이내에 형성되어 대규모 쓰나미 유발 지진의 재발 간격이 800~1,100년임을 시사한다. 2001년에는 1,100년 이상이 경과했기 때문에 대규모 쓰나미가 센다이 평원을 강타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졌다. 869년 쓰나미 이전에 확인된 다른 두 개의 대규모 쓰나미는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500년 사이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다른 하나는 서기 1년경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10] 2007년에는 규모 8.1~8.3의 지진이 향후 30년 이내에 발생할 확률이 99%로 추정되었다.[11]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은 869년 지진과 정확히 동일한 지역에서 발생하여 이전의 예측을 충족시켰으며, 센다이 지역에 대규모 침수를 유발했다.

3. 4. 고고학적 조사

엔기 원년(901년)에 성립된 사서인 『일본삼대실록』에는 조간 지진에 관한 기술이 기록되어 있다. 조간 11년 5월 26일(율리우스력 869년 7월 9일)의 대지진 발생과 그 후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위 사료에 있는 "陸奧國"의 "城"은 다가조로 추정된다. 지진으로 인한 압사자 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쓰나미에 의한 익사자가 인명 피해의 중심이었다. "流光如晝隱映" 부분은 지진에 따른 거시적 이상 현상의 일종인 발광 현상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기록으로 여겨진다.[110][111][112] "去海數十百里"는 원본에서는 "去海數千百里"이지만, 당시 1=6 (약 650미터)로 계산해도 엄청난 길이이며, "去海"는 해안에서 쓰나미로 침수된 성곽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며, 다가조에서 미나토하마까지는 50 정도(약 5.5킬로미터)에도 미치지 않기 때문에, "數十百里"(30 - 65킬로미터 정도)가 타당하다고 한다.[125] 또한, "數十百里"라고 해도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하며, 이것은 "沿海數十百里"로 읽어야 한다는 설도 있다.[133]

1986년 이후 미노우라 고지가 센다이평야의 옛날 쓰나미 퇴적층 연구를 시작했는데, 문헌에 남은 조간 지진의 쓰나미 외에도 총 3번의 쓰나미 퇴적층이 있어 미지의 선사 시대 지진의 흔적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141] 1990년 도호쿠 전력오나가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따라 고고학적 소견과 쓰나미 퇴적물 조사를 대조하여 만든 조간지진의 흔적 높이 연구에서는[142] "쓰나미의 최대 소상지점은 후지타 신덴 부근이라고 결론"내려 "조간 11년의 지진에서 쓰나미 흔적 높이는 하천과 떨어진 보통 평야에선 2.5-3 m 정도이며 침수지역은 해안선으로부터 3 km 안쪽 범위"라고 결론내렸다.[143]

2000년대가 되면서 시추 조사 등을 통한 센다이평야의 쓰나미 흔적 연구가 발전하게 된다.[144] 2005년부터 5년동안 일본 문부과학성의 위탁을 받은 "미야기현 해역 지진의 중점조사관측단"이 시추 조사를 진행하였다.[145] 2005년 이와테현 오쓰치만의 조사에서는 만 안쪽 조용한 영역인 만 안쪽 깊은 중심쪽 수심 10 m에서 해수면 아래 35 m를 시추하였으며 과거 6000년간의 해저 퇴적층에서 총 22겹의 쓰나미 퇴적층을 발견하였다. 이 퇴적층 중 쓰나미에 휘말린 합판 2조각과 보존상태가 좋은 개체 20점을 가속기 질량 분광 분석법(AMS)를 이용하여 C14를 연대측정하고 OxCal3.10로 연대고정, 해양 리저버 효과는 400년으로 가정하고 연대를 측정하였다. 그 결과 층 두께 약 2 m의 Ts10 지층이 조간지진 당시의 쓰나미 지층으로 추정되었다.[146]

센다이평야 연안부는 역사 문헌에서 조간지진을 기술한 것처럼 1000년 전 쓰나미가 내륙 깊숙히까지 들어왔다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연구가 진행되면서 비슷한 종류의 쓰나미 흔적에서 조간 시기 쓰나미 이외에도 다른 시기의 쓰나미 흔적이 몇 차례 남았다는 것도 발견되었다. 도호쿠 대학 대학원 공학연구과 부속 재해제어연구센터의 연구에서 퇴적물 연대조사를 통해 센다이평야에 과거 3000년간 최대 3번 쓰나미가 덮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쓰나미의 각 간격은 800년에서 1100년 사이였다. 추정 단층 모델에서는 9m 정도의 쓰나미가 7-8분 간격으로 수 차례 반복해 덮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10월 쓰나미 퇴적물 조사에서는 이와테현 해역(산리쿠 해역)에서 후쿠시마현 해역 또는 이바라키현 해역까지 진원역이며 규모 M8.6에 달하는 거대한 연동형지진이었던 것이라고 추정되었다.[147] 한편 2008년 조사에서는 리쿠젠타카타평야에서 쓰나미 퇴적물이 관측되지 않아 추정 진원역의 북쪽 끝을 리쿠젠타카타시 아래로 잡고 있기도 하다.[148]

2011년 3월 11일에는 산리쿠 해역을 중심 진원으로 이와테현 해역에서 이바라키 해역까지 광범위한 범위가 진원역인 규모 M9.0의 초거대지진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발생했다. 조간 지진과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진원역을 가지고 있고 내륙까지 피해를 입히는 거대하고 광역적인 쓰나미가 발생했으며 나아가 조간지진과의 간격이 800년에서 1100년 사이로 비슷한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추측을 토대로 동일본대지진과 조간지진 사이 관계가 깊다는 주장도 있다.[149]

2011년 8월 쓰나미 퇴적물의 연대 비교 조사로 과거 3500년간 일본 연안에 최소 7회의 큰 쓰나미가 몰아쳤으며 이 쓰나미를 일으킨 것은 쿠릴해구에서 일본해구 부근까찌 4개의 진원역 중 하나 또는 복수의 진원역이 서로 연동하여 발생한 M9급의 지진이라고 발표하였다. 조간지진 또한 이런 종류의 지진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150][151] 1990년 도호쿠 전력이 작성한 오나가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당시 아베 히사시의 고고학적 연구결과 등을 종합한 쓰나미 퇴적물 높이, 침수 영역 연구가 존재하지만 유적의 쓰나미와 관련된 퇴적물 조사 검토는 이뤄지지 않았다.[142]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이뤄진 다가조시 이치카와바시에서 열린 제26, 27회 조사에서는[161] 구 스나오시강 물길 인근에 있는 남북대로가 침식된 흔적인 특정 퇴적물(SX1779)가 발견되어 규조 분석을 실시했다.[162][163][164] 그 결과 바다 생물도 발견되지 않았고 바닷물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을 순 없었다. 도호쿠 대학에서도 규조 분석을 실시했으나 마찬가지로 바다 생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이 퇴적물이 쓰나미로 바다에서 직접적으로 휩쓸려 온 퇴적물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165]

그 후 다가조성 아래까지 쓰나미가 닿았다는 일본삼대실록의 서술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168] 토층 아래 퇴적물 구조 분석과 규조 분석에서는 다가조성 아래 거의 대부분 지역이 쓰나미 퇴적층으로 덮여 있다는 설이 우세하다.[169]

4. 역사적 영향

조간 지진은 9세기 일본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진 발생 3개월 후인 869년 10월 15일(율리우스력)에야 일본삼대실록에 기노 하루에다를 무쓰국 지진사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125] 지진 발생 4개월 후인 869년 11월 20일(율리우스력)에는 세이와 천황무쓰국 국경을 피해지역으로 지정하고 백성 구호, 사망자 매장, 이재민 조세 및 노역 면제를 명하는 조서를 내렸다.[125]

같은 해 12월 8일에는 무쓰국의 간다미네 노카미에게 종4위하를 수여하였는데, 이는 산신의 분노로 인한 재앙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125] 12월 14일(율리우스력 870년 1월 19일)에는 세이와 천황이세 신궁에 사신을 보내 신라 해적의 침공, 히고국 지진과 풍수해, 무쓰국 지진 등 재해를 언급하며 국가의 평안을 기원했다.[113][114][115] 헤이안쿄에서는 역병으로 인한 원령을 달래기 위한 고료카이 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는 현대 기온마쓰리의 기원이 되었다.[116]

864년 후지산 분화, 869년 조간 지진과 쓰나미, 역병 유행 등은 자연과 사회를 성찰하게 하여 궁정 정치와 문화를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170] 도호쿠 지방에서는 조간 지진과 쓰나미 이후 915년 도와다 화산 분화로 미야기현 북부, 이와테현, 아키타현의 논밭이 화산재에 묻혀 복구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권력 공백이 발생하고, 피해 지역이 사유지화되거나 에조(蝦夷)들이 침투하면서 복구가 더욱 어려워졌다.[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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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뉴스 災害が政治整え 宮廷文化生む 日本経済新聞 201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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