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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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환은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는 258년 상도향공에 봉해졌고, 260년 조모가 사마소에게 살해된 후 사마소에 의해 옹립되어 황위에 올랐다. 조환은 사마소의 꼭두각시였으며, 263년 촉한이 멸망하고 265년 사마소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사마염에게 선양을 강요당하여 서진이 건국되면서 진류왕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조환은 서진 치하에서 황족의 예우를 받으며 생을 마쳤고, 사후 원황제의 시호를 받았다. 조환 사후에도 그의 자손들은 진류왕의 지위를 계승하며 위나라의 혈통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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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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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원황제 조환 |
원어 이름 | 魏元帝 |
가문 | 조씨 |
아버지 | 조우, 연공 |
어머니 | 장씨 부인 |
배우자 | 변황후 |
출생 | 246년 |
사망 | 302년 |
시호 | 원황제 |
휘 | 조황 → 조환 |
자 | 경명 |
재위 정보 | |
작위 | 안차현 상도향공 (256년 – 260년 6월 27일) |
왕조 | 조위 |
군주 | 황제 |
재위 기간 | 260년 6월 27일 – 266년 2월 4일 |
연호 | 경원 (260년–264년), 함희 (264년–266년) |
전임 | 조모 |
후임 | 사마염 |
섭정 | 사마소, 사마염 |
진류왕 | 266년 2월 4일 – 302년 |
기타 정보 | |
참고 | 초명은 황(璜) 또는 박(璞)이었으나, 즉위 후 환(奐)으로 개명함. |
2. 생애
258년 '''상도향공'''(常道鄕公)에 봉해졌고 260년에 조모가 살해되자 사마소에게 옹립되면서 제위에 오르고 조환으로 개명한다.[19]
263년에 사마소가 등애와 종회에게 남쪽의 촉한 정벌을 명했고 그해에 촉한을 멸망케 했다.[19]
이듬해인 264년에 사마소가 서천을 정벌한 공으로 진왕(晉王)에 올라 제위를 찬탈하려는 준비를 마쳤으나 265년에 죽었다.[19] 그후 사마소의 맏아들인 사마염이 진왕의 지위를 이어받은 뒤 조환을 협박해 제위를 선양하게 했다.[19] 사마염은 이에 반대하는 황문시랑 장절을 죽이고 마침내 즉위하여 서진을 세우고 조환을 진류왕(陳留王)으로 강등했다.[19]
이후 서진 치하에서의 조환의 생활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사마염은, 과거 위 세조 조비가 후한 헌제를 쫓아내고도 말년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처럼, 조환에게 황족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했고 조환의 조상을 대상으로 위 황실 제사도 허가했으며, 조환이 스스로 진 황제의 신하로 생각하지 않게끔 했다.[19]
조환은 서진 혜제 때인 302년에 업성에서 죽고 사후 1년 지난 303년 황제의 시호를 추서받았다.[19]
조환은 연왕 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감로 2년 (257년), 상도향공에 봉해졌다.
선대 황제 조모가 사마소의 전횡에 분개하여 감로 5년 (260년) 5월, 사마소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살해당했다 (감로의 변). 같은 해 6월, 조환이 후계로 즉위했으나 실제로는 사마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경원 원년 (260년), 사마소를 상국, 진공으로 삼았다. 생부인 조우가 "신"이라고 칭하며 상소를 올리자 조환은 즉시 조칙을 내려 선례를 조사한 후 특별 대우를 인정했다. 경원 3년 (262년), 조조의 묘정에 공신 1명을 제사지냈다.
경원 4년 (263년) 8월, 등애·종회 등이 촉한을 공격해 같은 해 11월 멸망시켰다 (촉한의 멸망).
함희 원년 (264년) 3월, 사마소를 진왕으로 삼았다.
함희 2년 (265년) 8월, 사마소가 사망하고 사마염이 뒤를 이었다. 같은 해 12월, 조환은 사마염에게 선양하고 위나라는 5대 45년 만에 멸망하고 서진으로 바뀌었다.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부는 퇴위한 조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도 위나라의 신하라고 말했다. 퇴위 후에는 진류왕에 봉해져 업으로 이주했다.
팔왕의 난이 한창이던 태안 원년 (302년) 57세로 사망했다. 혜제로부터 원황제로 시호되었다.
2. 1. 즉위 전
258년 '''상도향공'''(常道鄕公)에 봉해졌다.[5] 260년 조모가 살해되자 사마소에게 옹립되면서 제위에 오르고 조환으로 개명한다. 조환(曹奐)의 본명은 조황(曹璜)이었다. 그의 아버지 조우는 연왕(燕王)이었으며, 조비의 아버지인 조조의 아들이었다.[19]2. 2. 재위 기간 (260년 ~ 265년)
258년 '''상도향공'''(常道鄕公)에 봉해졌고 260년에 조모가 살해되자 사마소에게 옹립되면서 제위에 오르고 조환으로 개명한다.[19]263년에 사마소가 등애와 종회에게 남쪽의 촉한 정벌을 명했고 그해에 촉한을 멸망케 했다.[19]
이듬해인 264년에 사마소가 서천을 정벌한 공으로 진왕(晉王)에 올라 제위를 찬탈하려는 준비를 마쳤으나 265년에 죽었다.[19] 그후 사마소의 맏아들인 사마염이 진왕의 지위를 이어받은 뒤 조환을 협박해 제위를 선양하게 했다.[19] 사마염은 이에 반대하는 황문시랑 장절을 죽이고 마침내 즉위하여 서진을 세우고 조환을 진류왕(陳留王)으로 강등했다.[19]
이후 서진 치하에서의 조환의 생활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사마염은, 과거 위 세조 조비가 후한 헌제를 쫓아내고도 말년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처럼, 조환에게 황족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했고 조환의 조상을 대상으로 위 황실 제사도 허가했으며, 조환이 스스로 진 황제의 신하로 생각하지 않게끔 했다.[19]
조환은 서진 혜제 때인 302년에 업성에서 죽고 사후 1년 지난 303년 황제의 시호를 추서받았다.[19]
2. 2. 1. 촉한 정벌과 멸망 (263년)
조환이 황제가 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황"과 같은 발음의 단어(예: 황/黃zh-hant 및 황/皇중국어)와 명칭 회피를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조환"으로 변경되었다. 조환의 재위 기간 동안, 사마씨가 국가 권력을 장악했고, 조는 명목상의 국가 원수이자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263년 11월 28일, 조환은 그의 아내 변씨를 황후로 옹립했다.[6]조환의 재위 초 몇 년 동안, 경쟁 국가인 촉한의 군대가 촉 장군 강유의 지휘 아래 끊임없이 공격해 왔다. 강유의 공격은 대체로 쉽게 격퇴되었지만, 사마소는 결국 촉에 대한 반격을 명령하여 종회와 등애가 지휘하는 18만 명의 침략군을 투입했다. 263년 말, 촉나라 황제였던 유선은 등애에게 항복했고, 촉한은 멸망했다. 촉한이 멸망한 후, 등애는 종회에 의해 반역죄로 몰려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264년 초, 종회는 강유와 함께 촉을 부활시키고 그에게 반대할 수 있는 모든 위나라 장군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장군들은 반란에 대항하여 종회와 강유를 죽였다. 촉의 이전 영토 (현재의 쓰촨, 충칭, 윈난, 남부 산시, 동남부 간쑤)는 위나라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2. 2. 2. 사마소의 권력 강화
조환이 황제가 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황"과 같은 발음의 단어(명칭 회피)를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조환"으로 변경되었다.黃zh-hant 및 皇중국어 조환의 재위 기간 동안, 사마씨가 국가 권력을 장악했고, 조환은 명목상의 국가 원수이자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263년 11월 28일, 조환은 그의 아내 변씨를 황후로 옹립했다.[6]조환의 재위 초 몇 년 동안, 경쟁 국가인 촉한의 군대가 촉 장군 강유의 지휘 아래 끊임없이 공격해 왔다. 강유의 공격은 대체로 쉽게 격퇴되었지만, 사마소는 결국 촉에 대한 반격을 명령하여 종회와 등애가 지휘하는 18만 명의 침략군을 투입했다. 263년 말, 촉나라 황제였던 유선은 등애에게 항복했고, 촉한은 멸망했다. 촉한이 멸망한 후, 등애는 종회에 의해 반역죄로 몰려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264년 초, 종회는 강유와 함께 촉을 부활시키고 그에게 반대할 수 있는 모든 위나라 장군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장군들은 반란에 대항하여 종회와 강유를 죽였다. 촉의 이전 영토 (현재의 쓰촨, 충칭, 윈난, 남부 산시, 동남부 간쑤)는 위나라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2. 3. 퇴위와 서진 건국 (265년)
258년 '''상도향공'''(常道鄕公)에 봉해졌고 260년에 조모가 살해되자 사마소에게 옹립되면서 제위에 오르고 조환으로 개명했다.[19] 263년에 사마소가 등애와 종회에게 남쪽의 촉한 정벌을 명했고 그해에 촉한을 멸망케 했다.[19]이듬해인 264년에 사마소가 서천을 정벌한 공으로 진왕(晉王)에 올라 제위를 찬탈하려는 준비를 마쳤으나 265년에 죽었다.[19] 그후 사마소의 맏아들인 사마염이 진왕의 지위를 이어받은 뒤 조환을 협박해 제위를 선양하게 했다.[19] 사마염은 이에 반대하는 황문시랑 장절을 죽이고 마침내 즉위하여 서진을 세우고 조환을 진류왕(陳留王)으로 강등했다.[19]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부는 퇴위한 조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도 위나라의 신하라고 말했다.[11] 퇴위 후에는 진류왕에 봉해져[19] 업으로 이주했다.
2. 4. 퇴위 이후
258년 상도향공(常道鄕公)에 봉해졌고 260년 조모가 살해되자 사마소에게 옹립되면서 제위에 오르고 조환으로 개명한다.[19] 263년 사마소가 등애와 종회에게 남쪽의 촉한 정벌을 명했고 그해에 촉한을 멸망케 했다.이듬해인 264년 사마소가 서천을 정벌한 공으로 진왕(晉王)에 올라 제위를 찬탈하려는 준비를 마쳤으나 265년에 죽었다.[19] 그 후 사마소의 맏아들인 사마염이 진왕의 지위를 이어받은 뒤 조환을 협박해 제위를 선양하게 했다. 사마염은 이에 반대하는 황문시랑 장절을 죽이고 마침내 즉위하여 서진을 세우고 조환을 진류왕(陳留王)으로 강등했다.[19]
사마염은, 과거 위 세조 조비가 후한 헌제를 쫓아내고도 말년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처럼, 조환에게 황족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했고 조환의 조상을 대상으로 위 황실 제사도 허가했으며, 조환이 스스로 진 황제의 신하로 생각하지 않게끔 했다.[19]
조환은 서진 혜제 때인 302년에 업성에서 죽고 사후 1년 지난 303년 황제의 시호를 추서받았다.[19] 조환의 후임 진류왕이 누구인지는 즉시 알려지지 않았지만, 326년 11월 또는 12월에 조조의 증손자 조매에게 진류왕의 칭호가 주어졌고,[7] 그는 358년 12월 1일 사망할 때까지 이 칭호를 유지했다.[8] 그의 아들 조회가 뒤를 이었으며, 그의 칭호는 363년 11월 24일에 확정되었다.[9] 진류왕의 칭호는 남제의 창시 황제 소도성의 재위 기간인 479년 9월 25일에 폐지될 때까지 조씨 가문 내에서 유지되었다.[10] 마지막 진류왕은 조찬(曹粲)이었다.
3.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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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
서력 (西曆) | 260년 | 261년 | 262년 | 263년 | 264년 | 265년 |
간지 (干支) | 경진(庚辰) | 신사(辛巳) | 임오(壬午) | 계미(戒未) | 갑신(甲申) | 을유(乙酉) |
연호 (年號) | 경원(景元)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함희(咸熙) 원년 | 2년 |
조환이 사용한 연호는 경원(景元)과 함희(咸熙)이다. 경원은 260년부터 264년까지, 함희는 264년부터 266년까지 사용되었다.
4. 가계
조환은 조우와 장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조조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조우, 어머니는 장씨 부인이다. 할아버지는 조조이며, 증조 할아버지는 조송이다. 어머니 쪽으로는 장로가 외할아버지이고, 외증조부는 장형이다. 배우자는 황후 변씨이다.
정렬 = 가운데 |
---|
1 = 조환(曹奐, 246–302) |
2 = 조우(曹宇, ?–278) |
3 = 장씨 부인 |
4 = 조조 (曹操, 155–220) |
5 = 환씨 부인 |
6 = 장로(張魯, ?–216) |
8 = 조송 (曹嵩, ?–193) |
9 = 정씨 부인 |
12 = 장형(張衡, ?–177) |
13 = 여씨 부인 |
5. 조씨 가문의 계승
조환 사후에도 자손들은 위나라 멸망 후 200년 이상 동진 및 남조 송의 책봉을 받은 제후왕으로서 진류왕을 상속했다.[12][13][14][15][16][17][18]
조환의 아들 이름은 불분명하지만, 조환이 사망한 2년 후인 영흥 원년(304년) 서진의 성도왕 사마영에게 구석을 하사했을 때, 진류왕(이름 미상)이 사마영에게 초선, 문위, 갈의를 보냈다는 기록이 《진서》 「혜제기」에 있다. 태녕 3년(325년), 조조의 현손인 조마가 동진에 의해 진류왕에 봉해졌다. 승평 2년(358년)에 사망했고, 흥녕 원년(363년)에 아들 조회가 뒤를 이었다. 조회는 태원 3년(378년)에 사망했고[12], 태원 8년(383년)에 아들 조령탄이 뒤를 이었다[13]. 조령탄은 의희 4년(408년)에 사망했다[14].
원희 2년(420년), 유유가 동진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남조 송을 건국했는데, 유유에게 선양을 권하는 상소에 진류왕 조건사가 이름을 올렸다[15]. 조건사는 같은 해 사망했고[16], 동생 조건수가 뒤를 이었다. 조건수는 대명 6년(462년)에 사망했고[15], 아들 조선이 뒤를 이었다. 조선은 원휘 원년(473년)에 사망했다[17].승명 3년(479년), 소도성이 남조 송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남제가 되었는데, 소도성에게 선양을 권하는 상소에 진류왕 조찬이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8월, 조찬은 왕위에서 쫓겨났다[18].
6. 평가
참조
[1]
문서
jia'yin day of the 6th month of the year of Cao Mao's death
Sanguozhi
[2]
문서
Vol.04 of Sanguozhi recorded that Cao Huan was 20 (by East Asian reckoning) when he moved to Ye city as his final residence on 6 Feb 266
[3]
문서
According to the Wei Shi Pu (魏世谱) by Sun Sheng, Cao Huan was 58 (by East Asian reckoning) when he died in the first year of the Tai'an era during the reign of Emperor Hui of Jin.
Sanguozhi
[4]
문서
(太安元年崩,谥曰元皇帝。)
Sanguozhi
[5]
문서
(高贵乡公卒,公卿议迎立公)
Sanguozhi
[6]
문서
According to Cao Huan's biography in Sanguozhi, Lady Bian became empress on the guimao day of the 10th month of the 4th year of the Jingyuan era of Cao Huan's reign.
Sanguozhi
[7]
웹사이트
晋书 : 帝纪第七 显宗成帝 康帝 - Chinese Text Project
https://ctext.org/wi[...]
2022-05-29
[8]
문서
yichou day of the 10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Sheng'ping era
Book of Jin
[9]
웹사이트
晋书 : 帝纪第八 孝宗穆帝 哀帝 废帝海西公 - Chinese Text Project
https://ctext.org/wi[...]
2022-05-29
[10]
문서
guisi day of the 8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Jian'yuan era
Nan Shi
[11]
문서
詔祀故軍祭酒郭嘉於太祖廟庭
三国志 巻四 魏書 三少帝紀 陳留王紀
[12]
문서
晋書
晋書
[13]
문서
晋書
晋書
[14]
문서
晋書
晋書
[15]
문서
宋書
宋書
[16]
문서
宋書
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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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宋書
宋書
[18]
문서
南史
南史
[19]
문서
삼소제기(三少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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