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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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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회는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함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아버지 종요의 영향으로 학문을 익혔다. 그는 사마씨 정권 하에서 관료로 활동하며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고, 촉나라 정벌에서 촉한을 멸망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후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여 강유와 함께 사망했다. 종회는 지략과 문재가 뛰어났으나, 지나친 야심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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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회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종회
한자 표기鍾會
로마자 표기Jong Hoe
사계(士季)
생애
출생황초(黃初) 6년 (225년)
출생지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 장사현(長社縣)
사망경원(景元) 5년 정월 18일 (264년 3월 3일)
사망지익주(益州) 촉군(蜀郡) 성도현(成都縣)
관직
최종 관직사도(司徒)
주요 경력진서장군(鎮西將軍)
사례교위(司隷校尉)
봉작현후(縣侯)
가족 관계
아버지종요(鍾繇)
어머니장창포(張昌蒲)
형제종육(鍾毓) (이복형), 종소(鍾邵) (이복형)
친척순욱(荀彧) (조카)
자녀종이(鍾毅) (조카, 양자)
기타 정보
소속조위(曹魏)
주군조방(曹芳) → 조모(曹髦) → 조환(曹奐)

2. 초기 생애 및 경력

종회는 종요의 아들로서 열심히 학문을 익혀 명성을 얻었다. 촉한에 항복했던 하후패강유에게 종회가 나중에 정권을 잡을 경우 촉한 두 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3] 조모에 의해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학문에 능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조모와 학문을 논의하기도 했다.[4]

255년, 관구검이 사마씨에 대항하여 봉기하자 사마사는 병이 심해 직접 토벌에 나서는 것을 망설였다. 이때 종회는 부하와 함께 사마사가 직접 나설 것을 권고하였다. 사마사가 죽고 사마소가 대장군이 되자, 종회는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임명되어 사마소와 함께 다닐 때가 많았다. 이 때문에 종회는 교만해져 부하의 충고를 받기도 했다.

257년, 제갈탄사마소에 반발해 봉기하자, 종회는 사마소를 따라 전면전에 나섰다. 오나라에서 제갈탄을 도우러 온 전역에게, 위나라에 항복했던 전역의 조카 전휘와 전의(全儀)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 오나라에서 전역을 죽이려 한다고 전하자 전역은 위나라에 항복했다. 이는 사마소가 종회의 제안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제갈탄의 봉기 진압 후 사마소는 종회를 더욱 아꼈으며 사례교위(司隸校尉)로 승진시켰다. 주위 사람들은 종회를 유방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다.

262년, 종회는 죽림칠현 중 하나인 혜강을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 그해 사마소가 촉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우자, 종회는 사마소의 의견에 찬동했고 촉나라 정벌이 확정된 후 진서장군(鎭西將軍)이 되었다.

2. 1. 출생과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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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회는 위 황실 조정에서 태부를 지낸 종요의 차남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통찰력과 지혜로 명성이 자자했다.[3] 그의 어머니 장창보는 아들에게 매우 엄격했으며 그의 초기 교육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회는 주역을 공부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집에서 ''도론''(道論중국어)이라는 제목의 20권짜리 책이 발견되었다. 종회가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도교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법가 또는 명가 철학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의 명성은 그와 나이가 비슷한 철학자 왕필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5]

2. 2. 어린 시절과 교육

종회는 위 황실 조정에서 태부를 지낸 종요의 차남으로, 어릴 때부터 통찰력과 지혜로 명성이 높았다.[3] 그의 어머니 장창보는 아들에게 매우 엄격했으며 초기 교육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제는 사람의 눈동자를 보고 성격을 알 수 있다고 썼는데, 종회가 4살 때 아버지가 그를 장제에게 데려가자 장제는 종회가 매우 특출하다고 말했다. 종회는 성인이 될 무렵 이미 근면하고 박학하며 다양한 종류의 예술에 정통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의 어머니 장창보는 종회에게 4살 때 효경을 가르쳤고, 이후 논어, 시경, 상서, 춘추좌씨전, 등 다양한 서적을 가르치고 암송하게 했다. 15살이 되자 태학에 입학시켜 스스로 배우도록 권했다. 종회는 밤낮으로 공부하여 20세 무렵에는 왕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명성을 얻었다.

종회는 ''주역''을 공부했으며, 사후 그의 집에서 ''도론'' (道論중국어)이라는 20권짜리 책이 발견되었다. 종회가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은 도교가 아닌 법가 또는 명가 철학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5]

2. 3. 위나라 조정에서의 초기 경력

종회는 종요의 아들로서 열심히 학문을 익혀 명성을 얻었다. 촉한에 항복했던 하후패강유에게 종회가 나중에 정권을 잡을 경우 촉한 두 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3] 종회는 관직에 나아간 후 조모에 의해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학문에 능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조모와 학문을 논의하기도 했다.[4]

255년, 종회는 중서시랑(中書侍郞)의 자리에 있었다. 관구검이 사마씨에 대항하여 봉기하자 사마사는 병이 심해 직접 토벌에 나서는 것을 망설였다. 이때 종회는 부하와 함께 사마사가 직접 나서서 진압할 것을 권고하였다.

관구검의 봉기가 진압된 후 사마사가 죽자, 그의 아우 사마소가 대장군이 되었다. 종회는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임명되었는데, 사마소는 종회를 거느리고 다닐 때가 많았다. 이 때문에 종회가 교만해져 이를 경계하는 부하의 충고를 받았다.

257년, 제갈탄사마소의 야심에 반발해 봉기하자, 종회는 사마소를 따라 제갈탄과의 전면전에 나섰다. 이때 에서 제갈탄을 도우러 온 전역에게, 위나라에 항복했던 전역의 조카 전휘와 전의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 오나라에서 전역을 죽이려 한다고 전했다. 전역은 위나라에 항복했는데, 이는 사마소가 종회의 제안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제갈탄의 봉기가 진압된 후 사마소는 종회를 더욱 아꼈으며 사례교위(司隸校尉)로 승진시켰다. 주위 사람들은 종회를 유방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다.

종회는 죽림칠현 중 하나인 혜강을 찾아갔는데, 혜강이 종회를 거만한 태도로 대하자 앙심을 품었다. 262년, 종회는 혜강관구검을 도우려 했다고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44] 그해 사마소가 촉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우자 조정 신하들은 대부분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나, 종회는 사마소의 의견에 찬동했다. 촉나라 정벌이 확정된 후 종회는 진서장군(鎭西將軍)이 되었다.

3. 사마씨 정권과의 관계 및 수춘 반란에서의 역할

종회는 종요의 아들로 학문에 힘써 명성을 얻었다. 촉한에 항복했던 하후패강유에게 종회가 정권을 잡으면 두 나라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관직에 오른 후 조모에게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고, 조모와 함께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255년 중서시랑(中書侍郞) 시절, 관구검이 사마씨에 대항하여 봉기하자 사마사가 직접 토벌에 나설 것을 권고했다. 사마사 사후 사마소가 대장군이 되자, 종회는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임명되어 사마소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257년 제갈탄사마소에 반발하여 봉기하자, 종회는 사마소를 따라 전면전에 참여했다. 오나라에서 제갈탄을 지원하러 온 전역에게 거짓 편지를 보내 위나라에 항복하게 만드는 계책을 성공시켜, 사마소의 신임을 더욱 얻었다. 주위 사람들은 종회를 유방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기도 했다.

종회는 죽림칠현 중 한 명인 혜강을 찾아갔으나, 혜강의 거만한 태도에 앙심을 품고 262년에 그를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 같은 해 사마소가 촉나라 정벌 계획을 세울 때, 대부분의 조정 신하들이 반대했으나 종회는 적극 찬동하여 진서장군(鎭西將軍)에 임명되었다.

3. 1. 사마사와의 만남

사마사는 유송에게 조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는데, 유송이 초고를 작성해 오자 사마사는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쓰도록 명했다. 유송은 머리를 쥐어짜도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우울해했다. 종회는 유송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그를 돕겠다고 자청하여 조서에서 다섯 단어를 수정했다. 유송은 종회의 수정을 보고 기뻐하며 수정된 초고를 사마사에게 제출했다. 사마사는 그것을 읽고 "네가 고친 게 아니지? 누가 고쳤는가?"라고 물었다. 유송은 "종회입니다. 공께 그를 추천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공께서 물으셨으니, 더 이상 그를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마사는 "그는 더 큰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를 부르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유송이 종회에게 사마사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리자, 종회는 사마사의 능력에 대해 물었고, 유송은 "그는 학식이 깊고 현명하며 다재다능하다."라고 대답했다. 종회는 약 열흘 동안 집에 머물면서 어떤 방문객도 만나지 않고 사마사에게 할 말을 신중하게 생각했다. 사마사를 만난 날, 그는 아침 일찍 사마사의 저택에 들어가 자정 무렵에야 나왔다. 종회가 떠난 후, 사마사는 "그는 정말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군주를 도울 수 있다."라고 말했다.[6]

배송지는 ''Shiyu''의 기록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유송이 종회를 사마사에게 굳이 추천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사마사가 적어도 종회에 대해 이미 들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첫째, 종회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둘째,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미 유명했다. 셋째, 그는 관례를 치른 후 곧 위나라 정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배송지는 또한 단지 몇 단어를 수정한 것만 보고 그 사람이 더 큰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7]

3. 2. 수춘 2차 반란(관구검·문흠의 난)

255년 사마사관구검문흠이 수춘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중서시랑(中書侍郞)이었던 종회를 보좌관으로 대동하고 직접 나섰다. 이때 종회는 부하와 함께 사마사가 직접 나서서 진압할 것을 권고하였다.[1] 사마소는 별도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지원했다. 반란 진압 후 사마사는 허창에서 사망했고, 사마소가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위나라 황제 조모는 사마소에게 허창에 머무르도록 명하고, 부가에게 군대를 이끌고 황도 낙양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종회는 부가와 공모하여 사마소에게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대를 낙양 인근의 뤄수이(雒水) 남쪽 주둔지로 이끌도록 종용했다. 그 결과 사마소는 새로운 섭정이 되었고, 형처럼 위나라 정부를 통제하게 되었다.[1]

3. 3. 수춘 3차 반란(제갈탄의 난)

257년 제갈탄사마소의 야심에 반발해 수춘에서 봉기하자, 종회는 사마소를 따라 제갈탄과의 전면전에 나섰다.[10] 이때 오나라에서 제갈탄을 도우러 온 전역에게 위나라에 항복했던 전역의 조카 전휘와 전의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 오나라에서 전역을 죽이려 한다고 전하자 전역은 위나라에 항복했다. 이것은 사마소가 종회의 제안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11] 제갈탄의 봉기가 진압된 후 사마소는 더욱 종회를 아꼈으며,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한 고조 휘하에서 활약한 책사인 장량에 비유하였다.[11]

3. 4. 혜강과의 갈등

죽림칠현 중 한 명인 혜강은 종회가 찾아갔을 때 거만한 태도로 대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종회는 262년 혜강이 관구검을 도우려 했다고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44] 혜강이 "무슨 말을 들으러 왔고, 무엇을 보러 가는가?"라고 묻자, 종회는 "들을 것이 있어서 왔고, 본 것이 있어서 간다"라고 대답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 일로 혜강은 종회뿐만 아니라 등용을 거절한 사마소에게도 원한을 샀다. 훗날 혜강은 여순·여안 형제의 재판에서 여안을 옹호하는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종회가 사마소에게 그들을 제거하도록 권했기 때문에 혜강과 여안은 처형되었다.[44]

4. 촉한 정벌

263년, 사마소촉한을 멸망시키기 위해 대규모 침공을 계획했고, 종회는 이 계획에 적극 참여했다. 종회는 10만 명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촉한을 공격했으며, 등애제갈서는 각각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유를 견제했다.

종회는 야곡(斜谷)과 낙곡(駱谷)으로 진입하며 허저의 아들 허의가 길을 제대로 닦지 못하자 처형하여 군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 촉군은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으로 후퇴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고, 종회는 양안관구(陽安關口)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58][59]

강유는 검각(劍閣)에서 종회에게 저항했으나, 등애가 별동대를 이끌고 성도로 진격하여 유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결국 강유는 종회에게 항복했고, 촉한은 멸망했다.

종회는 강유를 후하게 대접하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촉한 정벌의 공로로 종회는 사도에 임명되고 식읍 1만 호를 하사받았으며, 그의 두 아들도 후작에 봉해졌다.[48]

4. 1. 촉한 정벌 계획

263년 종회는 10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촉한을 공격했다. 강유는 한중의 방어 체계를 바꿔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을 거점으로 삼고 각 관문을 지키게 하여, 적군을 깊숙이 끌어들인 후 퇴각할 때 공격하는 전략을 짰다.[58] 등애제갈서는 각각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강유를 공격했고, 종회는 그 틈에 한중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종회는 군대를 나누어 야곡(斜谷)과 낙곡(駱谷)으로 진입했는데, 이 과정에서 길을 닦던 허의(許儀)가 실수를 하자 그를 처형했다. 허의는 허저의 아들이었으나 용서받지 못했으므로 전군은 모두 두려워했다.[58][59]

촉군은 병력을 한성과 낙성으로 물려 각각 왕함(王含)과 장빈이 5천 명씩 지켰다. 종회는 낙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양안관구(陽安關口)를 공격하게 한 장서가 불만을 품고 호열에게 투항하여, 위군이 부첨을 죽이고 양안관구를 함락시켰다.[58][59] 종회는 제갈량의 묘에 제사지내고 양안관구로 진격하는 한편 순개에게 한성을, 이보(李輔)에게 낙성을 1만 명씩으로 포위하게 했다.

제갈서가 강유에게 속아 강유는 제갈서를 따돌리고 음평에 다다른 후 양안관구가 함락되었음을 알고 장익, 요화와 함께 검각(劍閣)으로 옮겨갔다. 등애는 음평에서 강유(江油)를 공격해 면죽, 성도를 노리려 했으나 제갈서는 강유를 공격하라는 본래의 명령을 지키려고 종회에게 합류했다. 종회는 검각으로 가던 중 병사들을 손에 넣을 목적으로 제갈서가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았다고 모함하였다. 결국 제갈서는 벼슬에서 쫓겨나 죄인이 되었고, 종회는 제갈서가 지휘하던 3만 군사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검각을 공격했으나 강유가 결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군량이 부족해 퇴각까지 의논하고 있었다.[58] 그러나 등애가 험준한 곳을 거쳐 성도로 진군하여 유선의 항복을 받았기 때문에, 강유는 종회를 찾아와 항복했다.

4. 2. 촉한 침공

263년 종회는 10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촉나라를 공격했다. 강유는 한중의 방어 체계를 바꿔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을 거점으로 삼고 각 관문을 지키게 했다. 이는 적군을 깊숙이 끌어들인 후 요새를 돌파하지 못한 적군이 퇴각할 때 공격하여 전멸시키는 전략이었다.[58]

등애제갈서는 각각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강유를 공격했고, 종회는 그 틈에 한중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종회는 군대를 나누어 야곡(斜谷)과 낙곡(駱谷)으로 진입했는데, 길을 닦던 허저의 아들 허의(許儀)가 실수를 하자 그를 처형하여 군의 기강을 세웠다.[58]

촉군은 한성과 낙성으로 물러나 방어했다. 낙성은 왕함(王含)이, 한성은 호군 장빈이 5천 명씩 지켰다. 종회는 낙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양안관구(陽安關口)를 공격하여 부첨을 죽이고 함락시켰다.[58][59] 종회는 제갈량의 묘에 제사지내고, 순개에게 한성을, 전장군 이보(李輔)에게 낙성을 1만 명씩으로 포위하게 했다.

제갈서는 강유에게 속아 강유는 제갈서를 따돌리고 음평에 다다른 후 양안관구를 구원하려 했으나, 이미 함락된 후였다. 강유는 장익, 요화와 함께 검각(劍閣)으로 옮겨갔다. 등애는 음평에서 강유(江油)를 공격해 면죽·성도를 노리려 했으나, 제갈서는 강유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지키려 종회에게 합류했다. 종회는 제갈서를 모함하여 벼슬에서 쫓아내고, 그의 군사 3만을 흡수했다.

종회는 검각을 공격했으나 강유의 저항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군량 문제로 퇴각까지 의논했다.[58] 그러나 등애가 성도로 진군하여 유선의 항복을 받아내자, 강유는 종회에게 항복했다. 종회는 강유를 후대했으며, 두예에게 하후현제갈탄강유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종회는 사도에 임명되고 식읍 1만 호를 받았으며, 두 아들은 정후로 봉해졌다.

263년 5월, 등애·제갈서·종회에게 촉한 정벌을 명하는 조칙이 내려졌고[45], 8월에 군대가 출발했다[46]. 종회는 허의를 선발대로 하여 도로를 정비하게 했으나, 뒤따라온 종회가 다리를 건너자 구멍이 생기고 말의 다리가 빠졌다. 허의는 허저의 아들이었지만 종회는 처형하여 장병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검각에서 강유와 대치하던 중, 11월 등애가 산길을 통과하여 성도에 육박하자 유선이 항복했다. 촉한이 항복하자 강유 등도 종회에게 항복했다. 12월, 종회는 조칙에 따라 사도·현후에 임명되고, 1만 호를 받았다[48]

4. 3. 검각 대치와 등애의 별동대

263년 종회는 10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촉나라를 공격했다. 강유가 한중의 방어 체계를 바꿔 놓았기 때문에, 정서장군 등애와 옹주자사 제갈서가 각각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강유를 공격했고, 종회가 그 틈에 한중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58] 종회는 군대를 나누어 야곡(斜谷)과 낙곡(駱谷)으로 진입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문장 허의(許儀)가 먼저 길을 닦았으나 자신이 뒤따르다 다리가 꺼져 말이 빠지자 허의를 벴다. 허의는 허저의 아들이었으나 용서받지 못했으므로 전군은 모두 두려워했다.[58] 촉군은 싸움을 피하고 병력을 한성과 낙성으로 물려들였는데, 낙성은 감군 왕함(王含)이, 한성은 호군 장빈이 5천 명씩으로 지켰다. 종회는 낙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일부 병력으로 양안관구(陽安關口)를 공격하게 하니 양안관구 장수 중 장서가 불만을 품다 성을 나와서는 종회의 선봉 중 호군 호열에게 투항해, 위군이 부첨을 죽이고 양안관구를 함락하는 일이 벌어졌다.[58][59] 종회는 제갈량의 묘에 제사지내고 양안관구로 진격하는 한편 호군 순개에게 한성을, 전장군 이보(李輔)에게 낙성을 1만 명씩으로 포위하게 했다.

한편 제갈서는 강유에게 속아, 강유는 제갈서를 따돌리고 음평에 다다른 후 양안관구를 구원하려다가 그곳이 함락되었음을 알고 장익, 요화와 함께 검각(劍閣)으로 옮겨갔다. 등애는 음평에서 강유(江油)를 공격해 면죽·성도를 노리려고 했으나 제갈서는 강유를 공격하라는 본래의 명령을 지키려고 종회에게 합류했다. 종회는 검각으로 가던 중 병사들을 손에 넣을 목적으로 제갈서가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았다고 모함하였다. 결국 제갈서는 벼슬에서 쫓겨나 죄인이 되었고, 종회는 제갈서가 지휘하던 3만 군사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나아가 검각을 공격했으나 강유가 결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더구나 원정으로 인해 군량이 도달하기가 어려워저 퇴각까지도 의논하고 있었다.[58] 그러나 등애가 험준한 곳을 거쳐 성도로 진군하여 유선의 항복을 받았기 때문에, 강유는 종회를 찾아와 항복했다.

4. 4. 강유의 항복과 촉한 멸망

263년 종회는 10여만 군사를 거느리고 촉한을 공격했다. 강유는 한중의 방어 체계를 바꿔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을 거점으로 삼고, 각 관문을 지키게 하여 적군을 깊숙이 끌어들인 후 퇴각할 때 공격하는 전략을 짰다.[58] 등애제갈서는 각각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강유를 공격했고, 종회는 그 틈에 한중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종회는 군대를 나누어 야곡(斜谷)과 낙곡(駱谷)으로 진입했는데, 이 과정에서 허저의 아들 허의가 길을 닦다가 다리가 꺼져 말이 빠지자 처형당했다.[59]

촉군은 병력을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으로 물렸는데, 낙성(樂城)은 왕함(王含)이, 한성(漢城)은 장빈이 5천 명씩 지켰다. 종회는 낙성(樂城)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양안관구(陽安關口)를 공격하여 장서의 투항으로 부첨을 죽이고 양안관구(陽安關口)를 함락했다.[58] 종회는 제갈량의 묘에 제사지내고 양안관구(陽安關口)로 진격하는 한편, 순개에게 한성(漢城)을, 이보(李輔)에게 낙성(樂城)을 1만 명씩으로 포위하게 했다.

제갈서에게 속은 강유는 음평에 다다른 후 양안관구(陽安關口)가 함락되었음을 알고 장익, 요화와 함께 검각(劍閣)으로 옮겨갔다. 등애는 음평에서 강유(江油)를 공격해 면죽·성도를 노리려 했으나, 제갈서는 종회에게 합류했다. 종회는 검각(劍閣)으로 가던 중 제갈서를 모함하여 벼슬에서 쫓겨나게 하고, 제갈서가 지휘하던 3만 군사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종회는 검각(劍閣)을 공격했으나 강유의 저항으로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군량 문제로 퇴각까지 의논했다.[58] 그러나 등애성도(成都)로 진군하여 유선의 항복을 받았기 때문에, 강유는 종회에게 항복했다. 종회는 강유를 후대했으며, 두예에게 하후현제갈탄강유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종회는 사도에 임명되고 식읍 1만 호를 받았으며, 두 아들은 정후로 봉해지고 각각 1천 호를 받았다.

5. 반 사마소 봉기(종회의 난)

종회는 사마소에게 대항할 마음을 품고 있었고, 강유촉한 부흥을 위해 종회를 부추겨 둘은 매우 가까워졌다. 등애익주 통치와 오나라 정벌 방안을 담은 글을 사마소에게 올렸으나, 사마소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종회는 위관과 함께 등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하고, 등애의 글씨를 모방하여 오만불손한 내용으로 글을 바꿔 사마소에게 보냈다. 이로 인해 사마소등애를 의심하게 되었다.[24]

264년 1월, 사마소의 명령에 따라 종회는 위관을 보내 등애 부자를 잡아들였다. 유일하게 꺼리던 등애가 제거되자, 종회는 본격적으로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기로 하고 강유를 선봉으로 삼아 낙양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마소는 종회 역시 의심하여 조환과 함께 장안에 주둔했다. 종회는 자신의 야심이 간파당했음을 알았으나, 최소한 익주에서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263년 말에 죽은 곽태후사마소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주장하며 부하 관리들을 가두었다. 강유는 위나라 장수들을 모두 죽이라고 건의했으나, 종회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27]

호열이 아들 호연에게 편지를 보내 종회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알리자, 호연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호열의 부하들을 이끌고 종회를 공격했다. 결국 종회는 강유와 함께 싸우다 호열의 군사들에게 화살에 맞아 죽고, 반(反) 사마소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다.[30]

이후 종회의 부하였던 향웅이 종회를 장사지냈다.

5. 1. 등애 모함

참고: 등애#등애 체포에 종회가 한 역할

종회는 오래전부터 위나라에 반역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등애가 독단적인 행동을 하자, 종회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필체를 모방하는 데 능숙하여, 등애가 위나라 황실에 보낸 보고서를 가로챈 후 거만하고 요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내용을 수정했다. 또한 사마소가 등애에게 보낸 편지를 파괴했다.[24]

263년 겨울에서 264년 사이, 위 조정은 종회의 촉한 정복에 대한 공헌을 칭찬하는 조서를 내렸다. 종회는 사도로 임명되었고, 그의 후작령 내 과세 대상 가구 수는 10,000호로 증가했다. 그의 두 양아들은 각각 읍 후작 작위와 1,000호의 과세 대상 가구를 받았다.[23]

촉한이 항복한 후, 등애는 사마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기세로 오나라까지 병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종회는 이를 이용하여 두 사람의 편지를 위조해 서로의 의심을 부추긴 다음, 등애에게 모반 혐의가 있다고 고발했다. 그는 등애를 체포하게 하고 그 군세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25]

위나라 정부는 종회의 계략에 속아 등애를 체포하여 낙양으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사마소는 등애가 순순히 따르지 않을까 걱정하여 종회와 위관에게 등애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종회와 그의 군대가 뒤따르는 가운데, 위관은 성도에 있는 등애의 진영으로 가서 사마소의 권한 서신을 보여주며 등애의 병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등애는 체포되어 죄수 호송 수레에 갇혔다.[25]

5. 2. 반란 계획과 실패

참고: 등애#등애 체포에 종회가 한 역할

종회는 오래전부터 위나라에 반역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등애가 독단적인 행동을 하자, 종회는 은밀히 조정에 등애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필체를 모방하는 데 능숙하여, 등애가 위나라 황실에 보낸 보고서를 가로챈 후 거만하고 요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수정했다. 동시에 그는 사마소가 등애에게 보낸 편지를 파괴했다.[24] 위나라 정부는 종회의 계략에 속아 등애를 체포하여 낙양으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종회와 위관성도에 있는 등애의 진영으로 가서 등애의 병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고, 등애는 체포되어 죄수 호송 수레에 갇혔다.[25]

종회는 등애를 경계하고 있었기에, 등애가 체포된 후 옛 촉 영토의 위나라 군대를 지휘했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었다는 생각에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위나라에 반역하기로 결심하고 다음과 같은 전략을 세웠다.

# 강유가 선봉 부대를 이끌고 사곡(斜谷)을 나와 장안을 공격한다. 종회는 주력 부대를 이끌고 뒤따르며 지원한다.

# 장안을 점령한 후, 군대는 보병과 기병으로 나뉜다. 보병은 위수와 황하를 따라 낙양 근처의 맹진(孟津)으로 항해하고, 기병은 육로로 낙양으로 향한다. 종회는 이 여정에 5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 보병과 기병은 낙양 외곽에서 만나 함께 도시를 공격한다.[26]

종회는 사마소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가충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사곡으로 들어가 낙성에 주둔하도록 명령했고, 자신은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장안에 주둔할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종회는 편지를 읽고 충격을 받아 측근들에게 "폐하께서 나에게 등애를 체포하라고 명하셨을 때, 나 혼자서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분께서 군대를 이곳으로 이끌고 오셨으니, 틀림없이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속하게 행동해야 한다. 성공하면 천하가 우리 것이고, 실패하면 유비처럼 촉한으로 물러나면 된다."라고 말했다.[27]

1957년 "삼국지연의 ''연환화''"에 묘사된 종회.


종회는 264년 2월 29일 성도에 도착했다. 다음날 그는 곽태후를 위한 추도식을 거행한다는 명목으로 고위 장교와 전 촉나라 장교들을 옛 촉나라 황궁으로 소집했다. 추도식 동안 그는 칙서를 보여주며 곽태후가 죽기 전에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칙서에서 곽태후는 위나라에 충성하는 모든 이들이 사마소를 상대로 봉기하여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라고 했으며, 사실 종회가 위조한 것이었다. 종회는 장교들의 의견을 묻고, 태후의 유언을 수행하는 것에 동의하면 서명하도록 한 다음, 측근들에게 각 군부대의 지휘권을 인수하도록 지시했다. 그 후 그는 모든 장교들을 각자의 사무실에 감금하고 문을 닫게 했으며, 성문을 폐쇄하고 철저히 경비하도록 명령했다.[28]

종회 휘하의 장교인 丘建|구건중국어호열(胡烈)의 부하였다. 종회는 구건을 총애하여 자신의 부대로 전출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구건은 홀로 방에 감금된 호열을 동정하여 종회에게 감금된 장교들이 개인적인 필요를 돌봐줄 하인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종회는 동의했다. 호열은 하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들들에게 편지를 써서, 구건으로부터 종회가 자신의 부대가 아닌 장교들을 함정에 빠뜨려 죽일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 소문은 감금된 모든 장교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퍼졌다. 종회의 부하들은 그 소문에 대한 소식을 듣고, 상관에게 이상의 계급을 가진 모든 장교들을 처형할 것을 제안했다. 종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29]

264년 3월 3일 정오 무렵, 호열의 아들과 부하들은 북을 치기 시작했고,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 후 그들은 지휘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무질서하게 성문으로 돌진했다. 그 무렵, 강유는 종회로부터 갑옷과 무기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고함 소리를 듣고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잠시 후, 많은 병사들이 성문 근처에 몰려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종회는 놀라서 강유에게 물었다. "저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강유는 "죽여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종회는 부하들에게 아직 사무실에 감금되어 있는 장교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일부 장교들은 가구 조각으로 문을 막았다. 종회의 부하들은 문을 들이받았지만 열 수 없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사다리를 타고 성문에 올라가고 건물에 불을 지르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혼란이 발생하고 화살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감금된 장교들은 갇혀 있던 곳에서 탈출하여 부하들과 재결합하여 종회와 강유를 공격했다. 종회와 강유는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과 싸워 다섯 여섯 명 정도를 죽였지만, 결국 압도당하여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종회는 죽을 당시 동아시아식 나이로 40세였다. 반란으로 수백 명의 생명이 희생되었다.[30]

5. 3. 종회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



종회는 사람의 글씨체를 흉내 내는 데 능숙했다. 등애사마소에게 올린 글을 가로채 오만불손한 내용으로 고쳐 보냈고, 사마소등애에게 보내는 답장도 자신이 만들어 보냈다. 이로 인해 사마소등애를 의심하게 되었다.[20]

촉한이 항복한 후, 등애는 사마소의 경고에도 반발하여 이 기세로 오나라까지 병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종회는 이를 기회로 삼아 두 사람의 편지를 위조하여 서로의 의심을 부추긴 다음, 등애에게 모반의 혐의가 있다고 고발했다. 그는 등애를 체포하고 그 군세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30]

종회가 촉한 토벌에 파견될 때, 소제는 사마소에게 "종회는 홀몸이니 (제도상, 도시에 묶어두는) 인질도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간언했다. 이에 사마소는 "정촉(征蜀)은 쉬운데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종회만이 나와 같은 의견이다. 촉을 멸망시킨 후, 중원의 장수들은 귀향을 원하고, 촉의 유신들은 공포를 느낄 것이다. 종회에게 다른 마음이 있어도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며, 그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31]

종회가 등애를 고발하자, 사마소는 종회의 역심을 간파한 뒤 "내가 장안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했고, 그의 예측대로 종회의 난은 진압되었다.[32]

종회의 유해는 향웅에게 거두어져 매장되었다. 사마소는 "과거 왕경이 죽었을 때, 나는 귀경이 동시에서 곡하는 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종회가 자신의 의지로 반역을 저질렀는데, 어째서 귀경은 장례를 치렀는가. 이런 것을 허용한다면 법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향웅을 꾸짖었다. 향웅은 "선왕은 썩은 뼈에까지 인애를 베푸셨습니다. 먼저 공과 죄를 알고 매장할 수 있습니까. 지금, 주벌이 이미 종회에게 가해졌고, 법은 완수되었습니다. 저는 그의 유해를 수습하고 매장을 행하여 도의를 관철했습니다. 전하는 썩은 뼈를 미워하여 들에 버리려 하시는데, 장래에 인자현인들에게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사마소는 이 대답을 듣고 기분이 좋아져 향웅과 한담을 계속했다.[30]

6. 저술

종회는 어머니 장씨의 전을 지었으며,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종회전에 인용한 것이 남아 있다.

종회의 저술인 《사본론》(재성사본론)은 위진시대의 논쟁 주제인 재(才)와 성(性)에 대한 네 가지 주장을 기록한 것이다. 부하는 재와 성이 같음[재성동(才性同)]을, 이풍은 재와 성이 다름[재성이(才性異)]을, 종회는 재와 성이 합함[재성합(才性合)]을, 왕광은 재와 성이 유리됨[재성이(才性離)]을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정치적 위치에 충실한 것으로, 조조를 따르던 이풍과 왕광은 조조의 구현령·유재시거를 계승해 재와 성의 관계를 부정했고, 사마의를 따르던 부하와 종회는 재와 성을 연관시켰다. 《사본론》에 관한 일화로, 종회는 혜강에게 이 책을 보여주려 했으나, 감히 보여주지 못하고 문 밖에 멀리 던져두고 달아났다고 한다.[60]

종회는 어린 나이부터 학문에 뛰어나 『주역』의 호체를 부정하는 논문이나, 재능과 본성의 동일성에 관한 논문(재성사본론[49])을 지었다. 『주역』 관련 논문에 대해서는 순의가 비판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50], 재능과 본성에 관한 논문에 대해서는 부구가 재능과 본성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논했으며, 종회가 그 논의를 정리하여 기술했다[51]고도 한다. 종회가 죽은 후 그의 집에서 종회가 쓴 것으로 보이는 『도론』 20편이 발견되었는데, 내용은 도교가 아닌 형명가[52]의 설이었다.

7. 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종요위나라 태부, 정치가, 서예가
어머니장창포종요의 첩, 아들 교육에 큰 영향력을 행사[3]
이복 형종유263년 겨울 사망
조카종준종유의 아들, 사마소에 의해 사면 및 관직 복귀
조카종옹종유의 아들, 종회의 반란에 가담하여 처형됨
양자종의종유의 아들, 종회의 양자가 되어 처형됨[33]
조카종찬종유의 아들, 사마소에 의해 사면 및 관직 복귀


8. 평가

종회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종회를 "지식이 풍부하고 수리 계산에 능숙하다"라고 칭찬하면서도, 왕릉, 관구검, 제갈탄과 함께 "지나치게 야심이 많고 도덕적으로 삐뚤어진 생각을 갖고 주변의 숨겨진 위험을 인식하지 못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가문이 멸망했다"라고 비판했다.[36]

하후패사마의가 무엇을 가장 잘하는지 묻는 촉한 관료들에게 "가문의 지위를 위나라에서 굳건히 하는 것"이라고 답했고, 위나라 수도에서 누가 인재인지 묻자 "종회라는 자가 있습니다. 만약 그가 위나라 정부를 맡는다면 동오와 촉은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37]

강유하후패에게 "지금 사마의가 위나라 정부를 장악했는데, 여전히 촉과 오에 대한 군사 작전을 계획하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하후패는 "그는 위나라 정부에 대한 가문의 통제를 강화하는 데 집중하고 외부 문제에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종회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젊지만, 미래에 반드시 오와 촉에게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하후패의 예언은 15년 후 위나라의 촉 정복에서 종회가 핵심 인물 중 하나가 되면서 현실이 되었다.[38]

배송지습착치가 《한진춘추》에 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세설신어》의 내용을 추가했다.[39]

8. 1. 긍정적 평가

종회는 어릴 때부터 통찰력과 지혜로 명성이 높았다.[3] 성인이 되어서는 근면하고 박학하며 다양한 종류의 예술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역을 공부했으며, 그의 명성은 철학자 왕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5]

배송지가 ''Shiyu''의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긴 했으나,[7] ''Shiyu''는 종회가 위나라 섭정 사마사의 주목을 받게 된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종회는 유송이 작성한 조서의 다섯 단어를 수정하여 사마사의 인정을 받았다. 사마사는 종회를 "군주를 도울 수 있는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6]

8. 2. 부정적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종회를 "지식이 풍부하고 수리 계산에 능숙하다"라고 칭찬하면서도, 왕릉, 관구검, 제갈탄과 함께 "지나치게 야심이 많고 도덕적으로 삐뚤어진 생각을 갖고 주변의 숨겨진 위험을 인식하지 못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가문이 멸망했다"라고 비판했다.[36]

종회의 야심을 간파한 일화는 많다. 친구 부가는 "그대는 야심이 그릇보다 크니, 공업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51] 신헌영은 조카 양호에게 "종회는 일에 임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니, 언제까지나 남을 섬기는 자는 아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53] 왕원희는 남편 사마소에게 "종회는 이익을 보고 의를 잊으며, 일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총애가 지나치면 반드시 배반할 것이니, 대권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라고 경고했다.[54] 배개는 "종사계와 대면하면, 무기고에 늘어선 창과 극을 보는 것 같다"고 평했다.[55]

삼국지연의》에서 모종강은 종회의 반역 계획에 대해 "비밀이 지켜지지 않았고, 게다가 신속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일이 잘 풀렸더라도, 제장들을 죽인 후에 강유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니, 어느 쪽이든 종회는 죽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8. 3. 종합적 평가

종회는 뛰어난 지략과 재능으로 어린 시절부터 명성을 얻었으며, 위나라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철학,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 능통했으며,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집에서는 ''도론''道論중국어이라는 책이 발견되었는데, 이 책은 도교가 아닌 법가 또는 명가 철학을 다룬 것으로 추정된다.

종회는 사마사, 사마소 형제를 보좌하며 수춘에서의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그의 뛰어난 계책은 동오의 지원을 받던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당대 최고의 책사였던 장량에 비견되기도 했다.[11]

그러나 종회는 지나치게 야심이 크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종회를 "지식이 풍부하고 수리 계산에 능숙하다"라고 칭찬하면서도, 그의 지나친 야망과 도덕성 부족을 비판했다.[36]

촉한의 장수 강유하후패에게 "종회라는 자가 있는데, 그 자가 조정의 정사를 맡게 된다면, 동오와 촉한에게 우환이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37] 하후패의 예언은 15년 후에 현실이 되었는데, 위나라의 촉 정복에서 종회가 핵심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38]

종회의 친구 부가는 "그대는 야심이 그릇보다 크니, 공업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51] 신헌영은 조카 양호에게 "종회는 일에 임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니, 언제까지나 남을 섬기는 자는 아닐 것입니다"[53]라고 말했으며, 왕원희는 남편 사마소에게 "종회는 이익을 보고 의를 잊으며, 일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총애가 지나치면 반드시 배반할 것이니, 대권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54]라고 경고했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28
[2] 서적 Sanguozhi vol. 28
[3] 서적 Sanguozhi vol. 28
[4] 서적 Sanguozhi vol. 28
[5] 서적 Sanguozhi vol. 28
[6] 서적 Sanguozhi vol. 28
[7] 서적 Sanguozhi vol. 28
[8] 서적 Zizhi Tongjian vol. 76
[9] 서적 Sanguozhi vol. 28
[10] 서적 Sanguozhi vol. 28
[11] 서적 Sanguozhi vol. 28
[12] 서적 Sanguozhi vol. 28
[13] 서적 Sanguozhi vol. 28
[14] 서적 Sanguozhi vol. 28
[15] 서적 Sanguozhi vol. 28
[16] 서적 Sanguozhi vol. 28
[17] 서적 Sanguozhi vol. 28
[18] 서적 Sanguozhi vol. 28
[19] 서적 Sanguozhi vol. 28
[20] 서적 Sanguozhi vol. 28
[21] 서적 Sanguozhi vol. 28
[22] 서적 Sanguozhi vol. 28
[23] 서적 Sanguozhi vol. 28
[24] 서적 Sanguozhi vol. 28
[25] 서적 Sanguozhi vol. 28
[26] 서적 Sanguozhi vol. 28
[27] 서적 Sanguozhi vol. 28
[28] 서적 Sanguozhi vol. 28
[29] 서적 Sanguozhi vol. 28
[30] 서적 Sanguozhi vol. 28
[31] 서적 Sanguozhi vol. 28
[32] 서적 Sanguozhi vol. 28
[33] 서적 Sanguozhi vol. 28
[34] 서적 Sanguozhi vol. 28
[35] 서적 Sanguozhi vol. 28
[36] 서적 Sanguozhi
[37]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38]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39] 서적 Pei Songzhi's annotation in Sanguozhi
[40] 서적 三国志 魏書 高貴郷公紀注『魏氏春秋』
[41] 서적 高貴郷公紀注『晋諸公賛』
[42] 서적 三国志 呉書
[43] 서적 萬斯同『魏方鎮年表』
[44] 서적 三国志 魏書 王粲伝注『魏氏春秋』
[45] 서적 三国志 魏書 陳留王紀
[46] 서적 晋書
[47] 서적 三国志 蜀書 姜維伝
[48] 문서 이 時、「子2人を亭侯に取り立てる」とも鍾会伝にあるが、後述の通り、鍾会は独り身とも言われる。養育していた兄の子を指すか。
[49] 간행물 曹魏における「才性四本論」の展開 https://hdl.handle.n[...] 2018
[50] 서적 三国志 魏書 荀彧伝注『晋陽秋』
[51] 서적 三国志 魏書 傅嘏伝
[52] 문서 ここで言う「刑名家」は、「論理学者」ではなく、「人材品評家」のような意味。「[[人物志]]」「[[名家 (諸子百家)#人物・書物]]」も参照。
[53] 서적 三国志 魏書 辛毗伝注『世語』
[54] 서적 晋書 文明王皇后紀
[55] 서적 世説新語 https://zh.wikisourc[...]
[56] 문서 元になった話は『世説新語』にある。225年生まれの鍾会は、曹丕の崩御時には2歳であり、この話は史実ではない。
[57] 문서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58] 서적 삼국지
[59] 서적 한진춘추
[60] 서적 세설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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