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 천황 즉위기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진무 천황 즉위기원은 일본에서 진무 천황이 즉위한 해를 기원으로 삼는 기년법이다. 헤이안 시대부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메이지 시대에 공식적으로 제정되어 황기 연호로 사용되었다. 1872년 태양력 채택 이후에는 서기와 병용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사적 용도로 널리 사용되었다.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현재에도 윤년 판정 등 일부 법률과 신토 의례에서 사용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쇼와 시대의 교육 (일본 제국) - 황민화 교육
황민화 교육은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시행한 교육 정책이자 문화 말살 정책으로, 한국인의 민족 의식을 약화시키고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한국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이다. - 쇼와 시대의 문화 (일본 제국) - 쇼와 모던
쇼와 모던은 쇼와 시대 초, 다이쇼 데모크라시 영향으로 서구 문물이 유입되어 소비 문화가 발전하면서 나타난 일본의 문화적 경향으로, 1930년대 군국주의 부상으로 억압받았다. - 쇼와 시대의 문화 (일본 제국) - 에로그로넌센스
에로그로넌센스는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서 유행한 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한 문화를 포괄하는 용어이며, 대공황과 2.26 사건 이후 쇠퇴하고 검열과 탄압 속에서도 언더그라운드 문화로 이어졌다.
진무 천황 즉위기원 | |
---|---|
개요 | |
명칭 | 기원 |
다른 이름 | 일본 황기, 신무 천황 즉위 기원 |
로마자 표기 | kōki |
일본어 표기 | 皇紀 (こうき) |
한자 표기 | 神武天皇即位紀元 |
한국어 표기 | 진무 천황 즉위 기원 |
설명 | 일본에서 기원전 660년을 원년으로 하는 기년법 |
계산법 | 서력 기원 + 660년 |
예시 | 2024년은 황기 2684년 |
역사 | |
기원 | 일본서기에서 진무 천황 즉위년을 기원전 660년으로 소급하여 정함 |
제안 | 1872년 스가 와사부로가 제안 |
공식 채택 | 1873년 메이지 정부가 공식 채택 |
사용 기간 | 1873년 ~ 1945년 |
폐지 | 태평양 전쟁 패전 후 폐지 |
존속 이유 | 천황 중심의 국가관 확립 및 국민 통합 도모 |
사용 | |
용도 | 주로 일본 제국 시기에 연호와 함께 사용 |
예시 | 군사 관련 문서 국가주의적 선전물 신사 건립 연도 표기 |
현대 | |
현대의 사용 |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음 |
예외 | 극우 성향의 단체나 개인들이 간혹 사용 |
2. 역사
헤이안 시대 초기인 811년(고닌 2년)에 성립된 『력운기』에서 진무 천황 즉위기원에 유사한 표현이 처음 나타난다.[16][17] 『력운기』에는 진무 천황 즉위부터 고닌 2년(811년)까지 1471년으로 계산하고 있다.[18]
남북조 시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1339년(엔겐 4년/랴쿠오 2년) 저술한 『신황정통기』에서 진무 원년 이후의 햇수를 언급하였다.[19]
에도 시대 유학자 모리 나오카타는 1698년(겐로쿠 11년)에 집필한 『24론』에서 진무 천황 즉위부터 겐로쿠 11년(1698년)까지 2358년임을 언급했다.[20][21]
미토학자 후지타 토코는 1840년(덴포 11년)이 『일본 서기』가 기록한 진무 천황 즉위의 해로부터 정확히 2500년째에 해당한다 하여 한시를 지었고,[22][23] 1847년(고카 4년)에는 진무 천황 즉위 원년이 역사의 기원의 시작임을 선양했다.[21]
막부 말기 쓰와노 번의 국학자 오오쿠니 다카마사는 1855년(안세이 2년)에 저술한 『본학거요』에서 진무 천황의 즉위를 원년으로 하는 "중흥 기원"을 제창했다.[24] 당시 진무 천황 즉위로부터의 연수를 헤아리는 기년법(기원)은 존황 사상과 결부되어 있었다.[25]
게이오 3년 12월 9일(1868년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신정부가 수립되면서 "진무 창업의 시작"으로 회귀할 것을 표방했으며, 이는 오오쿠니 타카마사의 문인인 타마마츠 미사오의 "중흥기원" 제창에 영향을 받았다.[17] 메이지 2년(1869년) 4월, 형법관 권판사 츠다 마미치는 집의원에 연호 폐지 및 기원 채택을 건의하며, 일본 고유의 기원으로 진무 천황 즉위를 제안했다.[25]
메이지 5년 11월 15일 (1872년12월 15일), 태음력 폐지 및 태양력 시행 부칙 조서(태정관 포고 제337호)[26][27] 공포 후, 태정관 포고 제342호[28]를 통해 진무 천황 즉위 기원 제정과 제전 실시를 통지했다. 이 포고는 진무 천황 즉위 기원 제정과 제전 실시를 알리는 내용이었다.[32]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문서에 따르면, 메이지 5년 11월 19일 (1872년 12월 19일) 외무성은 각국 공사 및 영사에게 태양력 개정 통지 문서에서 "진무 천황 즉위 기원 2533년 메이지 6년"이라고 표기했다.[33]
1872년 일본이 그레고리력을 채택한 직후 메이지 헌법 시대(1890–1947)에 황기(皇紀) 연호가 사용되었으며, 19세기 말 국학 학자들에 의해 그 사용이 장려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정부는 연호와 황기의 병용을 전제로, 국서(国書)·조약·증서로부터 사적인 용도에 이르기까지의 사용례를 상세하게 규정했다. 가장 정식적인 문서에는 황기와 연호를 병기하고, 약식 또는 사적인 문서에는 연호의 단독 사용, 혹은 월일만을 기재하는 것을 허용했다.[25]
쇼와 시대에 들어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까지, 일본 육해군(구 일본군)이 사용한 병기의 제식 명칭에는 주로 황기의 마지막 숫자를 사용한 연식이 사용되었다. 일본 제국 육군(1927년 이후)과 일본 제국 해군(1929년 이후)은 식별을 위해 코키/皇紀일본어 체계를 사용했다.
- 일본 제국 육군의 92식 중대 병기는 1932년에 설계가 완료되었고, 일본 초대 천황 즉위 이후 2592년이었기 때문에 "92"라고 불렸다(코키/皇紀일본어 2592년).
- 100식 중폭격기, 100식 사령부 정찰기, 100식 수송기 등은 황기 2600년 제식 채용의 경우에 영(0)이 아닌 백(100)을 사용한다.
- 1식 전투기(통칭 '''하야부사''')처럼, 황기 2601년(서기 1941년·쇼와 16년) 이후에는 황기 마지막 한 자릿수만 사용하고 있다.
- 총포, 전차 등의 경우에도 명명 규칙의 기본은 동일("97식 중전차", "1식 기동 47mm 속사포" 등)하다.
대일본제국 해군의 경우, 정식 명칭에 있어서 황기의 사용은 육군보다 다소 늦었다.
- 89식 비행정, 89식 함상 공격기에서부터 사용되었다. 다만, 실제로는 두 기종 모두 황기 2592년(서기 1932년·쇼와 7년)에 정식 채용되었다.
- 황기 2602년(서기 1942년·쇼와 17년)의 2식 수상 전투기, 2식 육상 정찰기 등을 마지막으로 항공기의 연식 명칭을 중단하고 시덴, 아야구모, 텐잔 등, 기종별로 그룹화된 한자 숙어의 정식 명칭이 되었다.
연합군에 의해 "제로"라고 구어적으로 불린 미쓰비시 A6M(해군 0식 함상 전투기)은 1940년에 실전에 배치되었다(코키/皇紀일본어 2600년). 1940년 하계 올림픽과 도쿄 엑스포는 1940년(코키/皇紀일본어 2600년)의 기념 행사로 계획되었지만, 중일 전쟁으로 인해 국제 경기는 개최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초등학교의 역사 수업을 중단했다. 1946년 (쇼와 21년) 10월 12일에 수업이 재개되었지만, 새로운 교과서 『나라의 발자취』에서는 황기의 표기가 폐지되고 서기 표기로 변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일본에서 황기 사용을 금지하고 서력 기원 사용을 권장했다.[74][75] 메이지 헌법 시대(1890–1947)에 널리 사용되었던 황기는 국학 학자들에 의해 장려되기도 했다.
오늘날 일본에서 황기는 일부 사법적 맥락에서 사용된다. 윤년의 위치를 결정하는 법률은 황기 연도를 기반으로 하며, 그레고리력과 사실상 동일한 공식을 사용한다. 궁내청에서 간행하는 『능묘 요람』에서는 역대 천황·황족의 붕어·훙거 및 식년제를 거행하는 해를 황기로 표기하고 있다.[62][63][64][65],[66][67][68][69] 또한 신토의 맥락에서도 사용된다. 니콘의 초기 카메라 제품 번호는 황기 2606년(1946년)에 출고된 것을 기념하여 "609"로 시작한다.[71] 메이지 야스다 생명 보험은 1970년경 컴퓨터 시스템 구축 당시 황기 2600년 (서기 1940년)을 "00년"으로 사용하여 2000년 문제를 우회하기도 했다.[72][73]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1945년)은 황기 2605년을 사용했다.[74][75] 일본 점령기의 영향으로, 독립 선언문 날짜는 황기 2605년의 아래 두 자리인 "05년"으로 기재되었다.[74][75] 1998년 이마이 케이 게이단렌 회장과 회담에서[76], 유수프 하비비 대통령은 독립 선언문의 "05년"이 일본 황기 2605년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77]
2. 1. 제정 이전
진무 천황 즉위기원에 유사한 표현은 헤이안 시대 초기인 811년(고닌 2년)에 성립된 『력운기』에서 처음 나타난다.[16][17] 『력운기』에는 진무 천황 즉위부터 고닌 2년(811년)까지 1471년으로 계산하고 있다.[18]남북조 시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1339년(엔겐 4년/랴쿠오 2년) 저술한 『신황정통기』에서 진무 원년 이후의 햇수를 언급하였다.[19]
에도 시대 유학자 모리 나오카타는 1698년(겐로쿠 11년)에 집필한 『24론』에서 진무 천황 즉위부터 겐로쿠 11년(1698년)까지 2358년임을 언급했다.[20][21]
미토학자 후지타 토코는 1840년(덴포 11년)이 『일본 서기』가 기록한 진무 천황 즉위의 해로부터 정확히 2500년째에 해당한다 하여 한시를 지었고,[22][23] 1847년(고카 4년)에는 진무 천황 즉위 원년이 역사의 기원의 시작임을 선양했다.[21]
막부 말기 쓰와노 번의 국학자 오오쿠니 다카마사는 1855년(안세이 2년)에 저술한 『본학거요』에서 진무 천황의 즉위를 원년으로 하는 "중흥 기원"을 제창했다.[24] 당시 진무 천황 즉위로부터의 연수를 헤아리는 기년법(기원)은 존황 사상과 결부되어 있었다.[25]
2. 2. 황기 제정
게이오 3년 12월 9일(1868년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신정부가 수립되면서 "진무 창업의 시작"으로 회귀할 것을 표방했으며, 이는 오오쿠니 타카마사의 문인인 타마마츠 미사오의 "중흥기원" 제창에 영향을 받았다.[17] 메이지 2년(1869년) 4월, 형법관 권판사 츠다 마미치는 집의원에 연호 폐지 및 기원 채택을 건의하며, 일본 고유의 기원으로 진무 천황 즉위를 제안했다.[25]메이지 5년 11월 15일 (1872년12월 15일), 태음력 폐지 및 태양력 시행 부칙 조서(태정관 포고 제337호)[26][27] 공포 후, 태정관 포고 제342호[28]를 통해 진무 천황 즉위 기원 제정과 제전 실시를 통지했다. 이 포고는 진무 천황 즉위 기원 제정과 제전 실시를 알리는 내용이었다.[32]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문서에 따르면, 메이지 5년 11월 19일 (1872년 12월 19일) 외무성은 각국 공사 및 영사에게 태양력 개정 통지 문서에서 "진무 천황 즉위 기원 2533년 메이지 6년"이라고 표기했다.[33]
2. 3. 제정 이후
1872년 일본이 그레고리력을 채택한 직후 메이지 헌법 시대(1890–1947)에 황기(皇紀) 연호가 사용되었으며, 19세기 말 국학 학자들에 의해 그 사용이 장려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정부는 연호와 황기의 병용을 전제로, 국서(国書)·조약·증서로부터 사적인 용도에 이르기까지의 사용례를 상세하게 규정했다. 가장 정식적인 문서에는 황기와 연호를 병기하고, 약식 또는 사적인 문서에는 연호의 단독 사용, 혹은 월일만을 기재하는 것을 허용했다.[25]쇼와 시대에 들어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까지, 일본 육해군(구 일본군)이 사용한 병기의 제식 명칭에는 주로 황기의 마지막 숫자를 사용한 연식이 사용되었다. 일본 제국 육군(1927년 이후)과 일본 제국 해군(1929년 이후)은 식별을 위해 코키/皇紀일본어 체계를 사용했다.
- 일본 제국 육군의 92식 중대 병기는 1932년에 설계가 완료되었고, 일본 초대 천황 즉위 이후 2592년이었기 때문에 "92"라고 불렸다(코키/皇紀일본어 2592년).
- 100식 중폭격기, 100식 사령부 정찰기, 100식 수송기 등은 황기 2600년 제식 채용의 경우에 영(0)이 아닌 백(100)을 사용한다.
- 1식 전투기(통칭 '''하야부사''')처럼, 황기 2601년(서기 1941년·쇼와 16년) 이후에는 황기 마지막 한 자릿수만 사용하고 있다.
- 총포, 전차 등의 경우에도 명명 규칙의 기본은 동일("97식 중전차", "1식 기동 47mm 속사포" 등)하다.
대일본제국 해군의 경우, 정식 명칭에 있어서 황기의 사용은 육군보다 다소 늦었다.
- 89식 비행정, 89식 함상 공격기에서부터 사용되었다. 다만, 실제로는 두 기종 모두 황기 2592년(서기 1932년·쇼와 7년)에 정식 채용되었다.
- 황기 2602년(서기 1942년·쇼와 17년)의 2식 수상 전투기, 2식 육상 정찰기 등을 마지막으로 항공기의 연식 명칭을 중단하고 시덴, 아야구모, 텐잔 등, 기종별로 그룹화된 한자 숙어의 정식 명칭이 되었다.
연합군에 의해 "제로"라고 구어적으로 불린 미쓰비시 A6M(해군 0식 함상 전투기)은 1940년에 실전에 배치되었다(코키/皇紀일본어 2600년). 1940년 하계 올림픽과 도쿄 엑스포는 1940년(코키/皇紀일본어 2600년)의 기념 행사로 계획되었지만, 중일 전쟁으로 인해 국제 경기는 개최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초등학교의 역사 수업을 중단했다. 1946년 (쇼와 21년) 10월 12일에 수업이 재개되었지만, 새로운 교과서 『나라의 발자취』에서는 황기의 표기가 폐지되고 서기 표기로 변경되었다.
2. 4. 전후 황기의 변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일본에서 황기 사용을 금지하고 서력 기원 사용을 권장했다.[74][75] 메이지 헌법 시대(1890–1947)에 널리 사용되었던 황기는 국학 학자들에 의해 장려되기도 했다.오늘날 일본에서 황기는 일부 사법적 맥락에서 사용된다. 윤년의 위치를 결정하는 법률은 황기 연도를 기반으로 하며, 그레고리력과 사실상 동일한 공식을 사용한다. 궁내청에서 간행하는 『능묘 요람』에서는 역대 천황·황족의 붕어·훙거 및 식년제를 거행하는 해를 황기로 표기하고 있다.[62][63][64][65],[66][67][68][69] 또한 신토의 맥락에서도 사용된다. 니콘의 초기 카메라 제품 번호는 황기 2606년(1946년)에 출고된 것을 기념하여 "609"로 시작한다.[71] 메이지 야스다 생명 보험은 1970년경 컴퓨터 시스템 구축 당시 황기 2600년 (서기 1940년)을 "00년"으로 사용하여 2000년 문제를 우회하기도 했다.[72][73]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1945년)은 황기 2605년을 사용했다.[74][75] 일본 점령기의 영향으로, 독립 선언문 날짜는 황기 2605년의 아래 두 자리인 "05년"으로 기재되었다.[74][75] 1998년 이마이 케이 게이단렌 회장과 회담에서[76], 유수프 하비비 대통령은 독립 선언문의 "05년"이 일본 황기 2605년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77]
3. 진무 천황 즉위 기원
『일본서기』 신무 천황 원년 정월 초하루 조항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신유년 봄 정월 경진 초하루. 천황이 가시하라 궁에서 제위에 오르시니, 이 해를 천황 원년으로 한다.」
(훈독: 가노토토리/辛酉年일본어하루무츠키/春正月일본어가노에타츠/庚辰일본어 츠이타치/朔일본어。스메라미코토/天皇일본어、카시하라노미야/橿原宮일본어에서 아마츠히츠기시로시메/即位일본어하다。코토시/此年일본어를 스메라미코토하지메노토시/天皇元年일본어으로 하다.)
여기서 "신유년"은 서력 기원전 660년에 해당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는 신무 천황 탄생부터 신무 천황의 동정 시작까지는 신무 천황의 연령으로 45년, 신무 천황의 동정 7년은 간지로, 다이카, 하쿠치, 슈초 연호를 사용한 시대를 제외하고는 당시 천황 즉위로부터의 연수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천황 붕어 연도와 역대 천황 원년[34]을 간지로 나타내고 있다.[35] 『일본서기』의 이러한 기술을 통해 역대 천황 즉위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무 천황 즉위년을 특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신무 천황 즉위년을 계산하면 서력 기원전 660년이 된다.
일본 국외 역사서인 『송사』 일본국전 (『송사』 권491 열전 제250 외국7 일본국[36])에는 「彦瀲第四子號神武天皇 自築紫宮入居大和州橿原宮 即位元年甲寅 當周僖王時也zh-tw」라고 하여, 신무 천황 즉위년을 주 희왕 시대[37]의 갑인(기원전 667년)으로 기록하고 있다.[38][39] 반면, 미요시 기요유키는 혁명 감문에서 신무 천황 즉위를 신유년으로 하여[40] 희왕 3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41]
메이지 유신 이후, 신무 천황 즉위가 기원으로 정해지고, 『일본서기』의 기술에 근거하여 기원과 연호와의 대응 관계가 규정되어 공문서 등에 사용되었다. 또한 신무 천황이 즉위했다고 여겨지는 "신유년 봄 정월 경진 초하루"는 그레고리력 기원전 660년 2월 11일에 비정되었다.[42] 이를 근거로 정부는 "연중 제삿날 축일 휴가일을 정함" (메이지 6년 태정관 포고 제334호)[43]에서 2월 11일을 기원절로 정했다(''자세한 내용은 「기원절」 참조'').
『일본서기』의 기술을 그대로 믿고 진무 천황의 즉위를 서력 기원전 660년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에도 시대부터 비판이 있었다. 예를 들어, 후지 사다모토는 『충구발』[44]에서 진무 천황 원년 신유년은 주의 혜왕 17년(서력 기원전 660년)의 600년 후가 아니면 삼한과의 연대기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45]
『고대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초기 천황의 재위 연수가 비정상적으로 길고, 나이 또한 비현실적으로 장수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은 진무 천황의 즉위를 서력 기원전 660년으로 볼 수 없는 근거 중 하나이다.
고고학적으로 서력 기원전 660년은 전통적인 토기 양식 등에 따른 편년으로는 조몬 시대 말기, 2003년 이후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연구 그룹 등이 제시하고 있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른 편년으로는 야요이 시대 전기에 해당한다.[46] 야요이 시대 전기에는 아직 고분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테라사와 카오루는 히미코의 즉위를 3세기 초로 보고 "열도에서의 권력 중심지의 이동이라는 의미에서, 신생 왜국의 왕도는 결과적으로 이토국에서 동천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동천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제한적이나마 이해를 표했지만, 연대는 대폭 수정했다.[47][48]
진무 천황의 즉위 연도는 신유년으로 여겨지지만, 중국에서 간지 기년법이 확립된 것은 태초력이 채택된 기원전 104년 경이다. 그 이전에는 목성의 거울상인 태세의 천구에서의 위치에 기반한 태세 기년법이 사용되었으며, 11.862년인 목성의 공전 주기로부터 약 86년에 하나씩 어긋나는 "초신"이 행해졌다. 이러한 중국에서의 간지 기년법의 성립 역사를 고려하면, 기원전 660년 상당의 시대를 간지 기년법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오파츠라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 편찬 시 기원전 660년이 진무 천황 즉위 년도로 설정된 이유에 대해 여러 설이 제기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신유혁명설을 채택했을 가능성이다.[49][50]
나카 미치요는 스이코 천황 9년 (601년)이 고대사의 큰 변혁기였으므로, 여기서 1260년(21원)을 거슬러 올라간 신유년을 즉위 기년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51] 1260년은 참위가 사상에서 60년을 "1원", 21원을 1첩(ほう)으로 하여, 1첩마다 천명이 크게 바뀐다는 개념에 따른 것이다.[51]
아리사카 타카미치는 스이코 천황 9년이 평온한 해였다고 보고, 덴무 천황 10년 (681년)에 "제기 및 상고의 여러 일을 기록하고 정하라"는 조칙이 내려진 것을 기준으로, 당시 최신 역법이었던 의봉력의 주수(총법) 1340년을 거슬러 올라간 해를 기원으로 정했다고 주장했다.[52]
오가와 기요히코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서기의 삭일 간지(干支) 기술은 의봉력(일본에 처음 전해졌을 것으로 보이는 더 오래된 원가력이 아니다)과 잘 일치한다고 한다. 메톤 주기는 기원전 433년에 아테네의 수학자 메톤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일본서기에 기원전 660년에 태음태양력이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면, 더 원시적인 태음태양력이 아니면 시대가 맞지 않는다. 시부카와 하루미는 일본서기 력고에서 앞뒤를 맞추려 했지만, 우치다 마사오는 일본서기 력일 원전에서 "가공의 역법을 창조하고, 잦은 개력을 상상하지 않고서는, 윤자 탈락의 앞뒤를 맞출 수 없다. 의봉력(평삭)이 사용되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3. 1. 서기 기원전 660년으로 하는 근거
『일본서기』 신무 천황 원년 정월 초하루 조항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인용|「신유년 봄 정월 경진 초하루. 천황이 가시하라 궁에서 제위에 오르시니, 이 해를 천황 원년으로 한다.」
(훈독: 。、에서 하다。를 으로 하다.)
|『일본서기』 권 제3 신일본이와레히코 천황}}
여기서 "신유년"은 서력 기원전 660년에 해당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는 신무 천황 탄생부터 신무 천황의 동정 시작까지는 신무 천황의 연령으로 45년, 신무 천황의 동정 7년은 간지로, 다이카, 하쿠치, 주초 연호를 사용한 시대를 제외하고는 당시 천황 즉위로부터의 연수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천황 붕어 연도와 역대 천황 원년[34]을 간지로 나타내고 있다.[35] 『일본서기』의 이러한 기술을 통해 역대 천황 즉위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무 천황 즉위년을 특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신무 천황 즉위년을 계산하면 서력 기원전 660년이 된다.
일본 국외 역사서인 『송사』 일본국전 (『송사』 권491 열전 제250 외국7 일본국[36])에는 「」라고 하여, 신무 천황 즉위년을 주 희왕 시대[37]의 갑인(기원전 667년)으로 기록하고 있다.[38][39] 반면, 미요시노 기요유키는 혁명 감문에서 신무 천황 즉위를 신유년으로 하여[40] 희왕 3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41]
메이지 유신 이후, 신무 천황 즉위가 기원으로 정해지고, 『일본서기』의 기술에 근거하여 기원과 연호와의 대응 관계가 규정되어 공문서 등에 사용되었다. 또한 신무 천황이 즉위했다고 여겨지는 "신유년 봄 정월 경진 초하루"는 그레고리력 기원전 660년 2월 11일에 비정되었다.[42] 이를 근거로 정부는 "연중 제삿날 축일 휴가일을 정함" (메이지 6년 태정관 포고 제334호)[43]에서 2월 11일을 기원절로 정했다(''자세한 내용은 「기원절」 참조'').
3. 2. 연대의 타당성 문제
『일본서기』의 기술을 그대로 믿고 진무 천황의 즉위를 서력 기원전 660년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에도 시대부터 비판이 있었다. 예를 들어, 후지 사다모토는 『충구발』[44]에서 진무 천황 원년 신유년은 주의 혜왕 17년(서력 기원전 660년)의 600년 후가 아니면 삼한과의 연대기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45]『고대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초기 천황의 재위 연수가 비정상적으로 길고, 나이 또한 비현실적으로 장수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은 진무 천황의 즉위를 서력 기원전 660년으로 볼 수 없는 근거 중 하나이다.
고고학적으로 서력 기원전 660년은 전통적인 토기 양식 등에 따른 편년으로는 조몬 시대 말기, 2003년 이후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연구 그룹 등이 제시하고 있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른 편년으로는 야요이 시대 전기에 해당한다.[46] 야요이 시대 전기에는 아직 고분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테라사와 카오루는 히미코의 즉위를 3세기 초로 보고 "열도에서의 권력 중심지의 이동이라는 의미에서, 신생 왜국의 왕도는 결과적으로 이토국에서 동천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동천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제한적이나마 이해를 표했지만, 연대는 대폭 수정했다.[47][48]
진무 천황의 즉위 연도는 신유년으로 여겨지지만, 중국에서 간지 기년법이 확립된 것은 태초력이 채택된 기원전 104년 경이다. 그 이전에는 목성의 거울상인 태세의 천구에서의 위치에 기반한 태세 기년법이 사용되었으며, 11.862년인 목성의 공전 주기로부터 약 86년에 하나씩 어긋나는 "초신"이 행해졌다. 이러한 중국에서의 간지 기년법의 성립 역사를 고려하면, 기원전 660년 상당의 시대를 간지 기년법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오파츠라고 할 수 있다.
3. 3. 신유혁명설
『일본서기』 편찬 시 기원전 660년이 진무 천황 즉위 년도로 설정된 이유에 대해 여러 설이 제기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신유혁명설을 채택했을 가능성이다.[49][50](''자세한 내용은 신유#신유의 해 참조'').나카 미치요는 스이코 천황 9년 (601년)이 고대사의 큰 변혁기였으므로, 여기서 1260년(21원)을 거슬러 올라간 신유년을 즉위 기년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51] 1260년은 참위가 사상에서 60년을 "1원", 21원을 1첩(ほう)으로 하여, 1첩마다 천명이 크게 바뀐다는 개념에 따른 것이다.[51]
아리사카 타카미치는 스이코 천황 9년이 평온한 해였다고 보고, 덴무 천황 10년 (681년)에 "제기 및 상고의 여러 일을 기록하고 정하라"는 조칙이 내려진 것을 기준으로, 당시 최신 역법이었던 의봉력의 주수(총법) 1340년을 거슬러 올라간 해를 기원으로 정했다고 주장했다.[52]
오가와 기요히코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서기의 삭일 간지(干支) 기술은 의봉력(일본에 처음 전해졌을 것으로 보이는 더 오래된 원가력이 아니다)과 잘 일치한다고 한다. 메톤 주기는 기원전 433년에 아테네의 수학자 메톤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일본서기에 기원전 660년에 태음태양력이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면, 더 원시적인 태음태양력이 아니면 시대가 맞지 않는다. 시부카와 하루미는 일본서기 력고에서 앞뒤를 맞추려 했지만, 우치다 마사오는 일본서기 력일 원전에서 "가공의 역법을 창조하고, 잦은 개력을 상상하지 않고서는, 윤자 탈락의 앞뒤를 맞출 수 없다. 의봉력(평삭)이 사용되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4. 현행 법령에서의 황기
메이지 시대에 제정된 법령 중 현재까지 유효한 법령에는 황기 표기가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57]「윤년에 관한 건」(메이지 31년 칙령 제90호)이 그 예시이다.[55] 이 칙령은 윤년 판정에 황기(진무 천황 즉위 기원)를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55][56]
진무 천황 즉위 기원 연수(황기 연수)를 4로 나누어, 나누어 떨어지는 해를 윤년으로 한다. 단, 황기 연수에서 660을 빼면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로, 또한 100으로 나눈 몫이 4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해는 평년으로 한다.
이는 서기 연수로 윤년을 판정하는 방법과 동일하다. 이 칙령은 1947년의 법률을 거쳐 현재도 법령으로서 효력을 가진다.[57] 서기는 법제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 기년법으로는 진무 천황 즉위 기원이 현재도 법제상 및 역법상 유일하며,[58] 윤년 판정에도 사용되고 있다.[58]
5. 기념 행사
1940년 하계 올림픽과 도쿄 엑스포는 기원 2600년 기념 행사로 계획되었지만, 중일 전쟁으로 인해 국제 경기는 개최되지 못했다.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은 식별을 위해 황기 체계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무렵의 많은 일본 이름은 황기를 사용했다.
6. 기타
1940년 하계 올림픽과 도쿄 엑스포는 황기 2600년(1940년)의 기념 행사로 계획되었지만, 중일 전쟁으로 인해 국제 경기는 개최되지 못했다.[60] 일본 제국 육군(1927년 이후)과 일본 제국 해군(1929년 이후)은 식별을 위해 황기 체계를 사용했다.[60] 예를 들어, 92식 중대 병기는 황기 2592년(1932년)에 설계가 완료되어 "92"라고 불렸고, 97식 유럽 문자 인쇄기는 황기 2597년(1937년)에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해당 이름이 붙여졌다.[60] 미쓰비시 A6M("제로")는 황기 2600년(1940년)에 실전에 배치되었다.[60]
궁내청은 역대 천황·황족의 능묘에 관해 정리한 서적인 『능묘 요람』을 1956년, 1974년, 1993년, 2012년에 간행했는데, 모든 판에서 역대 천황·황족의 붕어·훙거의 해와 식년(식년제를 거행하는 해)을 황기로 표기했다.[61][62][63][64][65][66][67][68][69] 2012년에 간행된 최신판에서는 식년이 황기 2721년(서기 2061년)까지 기재되어 있다.[70]
니콘이 전후 처음으로 제조한 "니콘(니콘 I형)" 카메라의 제품 번호는 황기 2606년(1946년) 9월에 출고된 것을 기념하여 앞자리를 "6"으로 시작했다.[71]
야스다 생명 보험은 1970년경 컴퓨터를 이용한 개인 정보 관리 시스템 구축 당시, 서기 1900년을 "00년"으로 처리하면 1899년 이전 정보 처리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인지하고, 황기 2600년(1940년)을 "00년"으로 사용하는 팩 10진수를 채택하여 2000년 문제의 영향을 회피했다.[72][73]
참조
[1]
서적
Kigen
https://books.google[...]
Japan Encyclopedia
2005
[2]
서적
The Making of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null
1922
[2]
서적
New Japan, the Land of the Rising Sun
https://books.google[...]
null
1873
[3]
서적
Things Japanese
https://books.google[...]
null
1905
[3]
서적
Our Neighbors: the Japanese
https://books.google[...]
null
1913
[4]
웹사이트
神武天皇即位紀元二千五百三十三年明治六年太陽暦
https://archive.toda[...]
1872
[5]
서적
The People's Emperor: Democracy and the Japanese Monarchy, 1945–1995
https://books.google[...]
null
2001
[6]
간행물
Report of the Organizing Committee on its Work for the XIIth Olympic Games of 1940 in Tokyo until its Relinquishment
http://www.la84found[...]
1940
[7]
서적
Japanese cruisers of the Pacific War
https://books.google[...]
1997
[8]
문서
Kigen
Kokushi Daijiten, vol. 4 (Yoshikawa Kôbunkan, 1983)
[9]
웹사이트
Imperial Edict No. 90, May 11, 1898
https://hourei.ndl.g[...]
National Diet Library
2024-03-12
[10]
웹사이트
紀元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11]
문서
東方年表
[12]
문서
太陽暦. 明治6年(1873年)
国立国会図書館のデジタル化資料
[13]
웹사이트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収蔵資料一覧
http://www.jacar.go.[...]
国立公文書館・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4]
웹사이트
法制執務コラム集「うるう年をめぐる法令」
https://houseikyoku.[...]
議院法制局
[15]
웹사이트
The World Factbook
https://www.cia.gov/[...]
CIA
2019
[16]
문서
弘仁歴運記
[17]
논문
元始祭』並びに『紀元節祭』創始の思想的源流と二祭処遇の変遷について
2009
[18]
논문
公卿補任の成立
1955
[19]
서적
神皇正統記 増鏡
岩波書店
1983
[20]
서적
二十四論
https://dl.ndl.go.jp[...]
水戸学大系刊行会 (井田書店内)
[21]
논문
元始祭』並びに『紀元節祭』創始の思想的源流と二祭処遇の変遷について
2009
[22]
서적
新定東湖全集
https://dl.ndl.go.jp[...]
博文館
[23]
웹사이트
こよみの学校 第127回『神武天皇即位紀元の皇紀』
https://www.543life.[...]
暦生活
2023-09-05
[24]
웹사이트
西尾市立図書館蔵岩瀬文庫『本学挙要』
https://kokusho.nijl[...]
[25]
서적
暦ものがたり
角川ソフィア文庫
2012
[26]
웹사이트
太政類典第二編・明治四年~明治十年・第二巻
https://www.digital.[...]
[27]
문서
明治5年11月9日(1872年12月9日)公布。
[28]
문서
明治5年11月15日(1872年12月15日)公布。
[29]
문서
服者
[30]
문서
法令全書. 明治6年(1873年)
国立国会図書館のデジタル化資料
[31]
웹사이트
レファレンス協同データベース
https://crd.ndl.go.j[...]
[32]
논문
元始祭』並びに『紀元節祭』創始の思想的源流と二祭処遇の変遷について
2009
[33]
웹사이트
本邦ニ於テ陰暦ヲ太陽暦ニ改正ノ旨各国公使ヘ通知一件
B120821099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34]
문서
日本書紀
[35]
문서
干支
[36]
wikisource
宋史/卷491#日本國
[37]
문서
史記
[38]
문서
日本書紀
[39]
문서
宋史
[40]
문서
三善清行
[41]
간행물
革命勘文 - 『群書類従』「巻第四百六十一」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42]
문서
日本長暦
[43]
간행물
法令全書.明治6年
https://dl.ndl.go.jp[...]
国立国会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44]
문서
天明元年(1781年)刊
[45]
국립국회도서관의 디지털화 자료
衝口発
[46]
문서
신무 천황
[47]
서적
왕권탄생
강담사
2008-12
[48]
문서
寺沢
[49]
문서
신유
[50]
문서
반신우
[51]
서적
『중공문고 일본의 역사1 신화에서 역사로』
1973
[52]
서적
『역으로 읽는 고대 천황의 수수께끼』
2015
[53]
문서
100으로 나눠 떨어지고 400으로 나눠 떨어지지 않는 해는 평년으로 한다
[54]
웹사이트
어느 해가 윤년이 되나요?
https://www.nao.ac.j[...]
국립천문대
2023-09-05
[55]
문서
메이지 31년(1898년)5월 10일 공포。
[56]
서적
천문대의 전화 당번
지인서관
[57]
웹사이트
윤년에 관한 건
https://hourei.ndl.g[...]
국립국회도서관
2023-09-05
[58]
웹사이트
코요미 학교 제127회 『신무 천황 즉위 기원의 황기』
https://www.543life.[...]
신일본 달력
2018-05-30
[59]
서적
증보신판 현대세태풍속사연표 쇼와 20년 (1945)-헤이세이 20년 (2008)
가와데서방신사
[60]
웹사이트
彙報(陵墓関係分 平成23年度)
https://shoryobu.kun[...]
궁내청
2024-05-16
[61]
웹사이트
릉묘요람
https://ndlsearch.nd[...]
국립국회도서관 서치
2024-05-16
[62]
문서
宮内庁書陵部『陵墓要覧』宮内庁書陵部、1956年、2-103頁
[63]
문서
宮内庁書陵部『陵墓要覧』宮内庁書陵部、1974年、2-103頁
[64]
문서
宮内庁書陵部『陵墓要覧』宮内庁書陵部、1993年、2-103頁
[65]
문서
宮内庁書陵部『陵墓要覧』宮内庁書陵部、2012年、2-103頁
[66]
문서
宮内庁書陵部『陵墓要覧』宮内庁書陵部、1956年、175-183頁
[67]
문서
宮内庁書陵部『陵墓要覧』宮内庁書陵部、1974年、169-177頁
[68]
문서
宮内庁書陵部「付録」『陵墓要覧』宮内庁書陵部、1993年、39-45頁
[69]
문서
宮内庁書陵部「資料編」『陵墓要覧』宮内庁書陵部、2012年、39-63頁
[70]
문서
宮内庁書陵部「資料編」『陵墓要覧』宮内庁書陵部、2012年、63頁
[71]
서적
밝은 암상자
아사히 소노라마
[72]
뉴스
天声人語
아사히 신문
1999-02-22
[73]
블로그
皇紀を採用した安田生命保険の先見の明
http://blogs.itmedia[...]
2014-07-05
[74]
웹사이트
用例.jp 인도네시아 독립선언
http://yourei.jp/%E3[...]
[75]
문서
[76]
뉴스
http://jakartashimbu[...]
じゃかるた新聞
2002-04-05
[77]
뉴스
私の履歴書 第24回 国際親善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2-09-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