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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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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책거리는 책과 문방구를 중심으로 그린 그림으로, 책가도 또는 문방도라고도 불린다. 18세기 조선 시대에 정조의 장려로 양반 계급에서 유행했으며, 2차원에 3차원을 투영하는 일루저니즘 기법이 사용되었다. 19세기에는 서민층으로 확산되어 민화의 영역에서 다산, 장수, 출세 등을 기원하는 그림으로 변화했다. 청나라와의 문화 교류를 통해 서양의 선 원근법과 다보격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20세기에는 제작이 중단되었으나 최근 민화 연구를 통해 현대적 의의가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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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거리
책거리
책거리 그림
책거리 그림
정보
유형정물화
스타일한국화
다른 이름책가도 (冊架圖)
상세 정보
설명책, 문방구, 기타 물건들을 그린 그림
시대조선
관련 문화한국

2. 명칭

책거리는 책가도(冊架圖)라고도 불리며, 책과 문방구를 중심으로 그린 그림은 문방도(文房圖)라고도 불렸다.[3][4]

3. 역사

조선은 17세기 혼란을 겪은 후 18세기에 새로운 예술 형태가 발흥하는 등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한다.[15] 정조는 학구적인 성격으로 책거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고, 양반 계급은 이 새로운 유형의 회화를 수용하며 함께 향유했다.[16][17] 초기 책거리의 표현 기법은 2차원에 3차원을 투영하는 일루저니즘과 유사했다.[15]

19세기 책거리는 민화로 확산되어 서민들이 즐기며 다산, 장수, 출세 등 행복을 추구하고 표현주의적이고 추상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다. 책 무더기만을 주제로 하는 경우는 줄어들었다.[16] 궁정에서 책거리는 의례에 사용되었지만, 민화로 그려진 책거리는 순수한 장식용이었다.[17]

3. 1. 초기 책거리 (18세기)

조선은 17세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18세기에 새로운 예술 형태가 등장하는 등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했다.[15] 특히 학문을 중시했던 정조는 책거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고, 양반 계급은 이 새로운 유형의 회화를 수용하며 함께 향유했다.[16][17] 초기 책거리는 2차원에 3차원을 투영하는 일루저니즘 기법을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15]

15세기 대항해 시대 유럽에는 세계 각지의 다양한 지식이 유입되었다. 르네상스의 발흥은 고대 문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15세기 중기부터 왕족, 귀족, 지식인들은 수집품을 전시하는 "경이의 방"을 만들었다. 선 원근법 발명으로 서양 회화는 이전에는 없던 사실성을 획득했고, 자신의 컬렉션을 과시하기 위한 트롱프뢰유(속임수 그림) 문화가 발전했다.[8]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프레데리크 3세는 자신의 컬렉션을 트롱프뢰유로 그리게 하여 경이의 방에 전시했다. 이는 국왕의 소장품을 그린 회화이자, 해양 강국 왕이자 학자·수집가인 프레데리크 3세의 성격을 과시하는 역할도 했다.[8]

다보각경도(청대)


중국에서는 청나라 때부터 "경이의 방" 문화가 활발해졌다.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물품 수집 문화가 있었고, 16세기경부터 관련 저작이 많이 편찬되었지만, 유럽처럼 전시 선반을 만들고 과시하는 문화는 없었다.[8] 그러나 청 왕궁에서는 "다보각"이라 불리는 고미술품 전시용 대형 진열대가 만들어졌다.[9][10] 다보각이 없는 방에는 다보각을 그린 다보각경도가 장식되었다. 1998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다보각경도가 소개되어 책거리와의 유사성이 지적되었다.[10] 동시대 중국 회화에도 다보각경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있다. 예를 들어, 울주 진무묘에는 1779년(건륭 44년, 정조 3년)경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비슷한 벽화가 있다. 이러한 그림들은 책거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8]

조선의 고관 조종현(1731년 - 1800년)은 1750년부터 1766년경에 집필한 『제소병』에서 조선에 이러한 그림이 도입된 초기 기록을 남겼다.[8][11] 조종현은 베이징 시장에서 문사가 다보각을 배경으로 차를 마시는 서양화인 서가도(書架圖)를 입수하여 병풍으로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이 그림은 인물을 포함한 것이므로 책거리와 구별되지만, 이 사료는 책거리와 유사한 그림이 조선 문인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8][11]

3. 1. 1. 정조와 책거리

조선에서 책거리를 처음 그리게 한 인물은 일반적으로 정조로 알려져 있다. 1784년(정조 8년) 정조는 어용 화원을 뽑는 시험에서 "책가"라는 과목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책거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10] 1788년(정조 12년)에는 정조가 요구한 책가도가 아닌 다른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화원 두 명이 유형에 처해지기도 했다.[10]

오재순1791년(정조 15년) 『일득록』에서 정조가 신하들에게 옥좌 뒤에 붙인 책가도를 보여주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을 기록했다. 정조는 책을 읽지 않더라도 서재에 들어가 책을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옛말을 언급하며,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경사자집, 특히 장자를 그렸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후세의 병든 글을 즐기는 세태를 바로잡기 위해 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밝혔다.[8] 정조가 그리게 한 책가도는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유교적 관점에서 사치품을 배격했던 정조의 성향을 고려할 때, 서적만을 그린 간소한 그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8][10]

원래 조선에서 옥좌 뒤에는 일월오봉도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조가 책가도라는 새로운 그림 양식을 옥좌 뒤에 장식한 것은 유학자로서의 이미지를 확립하고, 문치주의에서의 권위를 강조하려는 의도였다는 해석이 있다.[6]

당시 조선은 붕당 정치의 시대였기 때문에, 권력자는 유학에 정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정조는 스스로를 "군사"라 칭하며 신하들을 논파할 정도의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정조에게 독서는 왕권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수단이었으며, 이러한 책에 대한 집착이 책가도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11]

1791년의 기록에는 책가도의 사실성에 신하들이 놀랐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당시 명암법이나 원근법 같은 서양 회화 기법이 도입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규상(1727년 - 1799년)의 『일몽고』에 따르면, 책가도는 조선의 도화서가 "서양의 사면 척량 화법을 모방하기 시작"하여 그린 그림이며, "당대의 귀인으로서 이 그림을 (장식하는 것으로 벽에) 붙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10]

3. 2. 후기 책거리 (19세기~20세기 초)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책거리는 민화의 영역으로 확산되어 서민층의 삶 속에 스며들었다. 양반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책거리는 이제 다산, 장수, 출세 등 행복을 기원하는 그림으로 변화했다. 궁정에서는 의례용으로 사용되었고, 가정에서는 장식용 병풍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전 시기 책거리의 특징이었던 책장의 틀은 점차 사라지고, 다양한 소재들이 표현주의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중인 계층은 조공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종이, , , 벼루 외에도 시계, 안경과 같은 다양한 해외 문물을 들여와 책거리에 반영했다. 이는 당시 조선의 새로운 소비 문화를 보여준다.[8]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는 문방도(책거리)의 명인 이윤민과 그의 아들 이형록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형록의 작품은 당시 조선 회화로서는 드물게 이름이 기재된 작례가 몇 점 남아 있어, 책거리 화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향견문록』에서 이들의 그림은 "책가도"가 아닌 "문방도"로 불리는데, 이는 책거리의 모티프가 서적 중심에서 문인의 생활을 채색하는 다양한 문물을 그리는 것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10]

20세기에 들어 책거리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지만,[13] 조선민화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현대성과 특수성이 재평가되고 있다.[7][13]

이응록, 1860-74

3. 2. 1. 민화로서의 책거리

조선은 17세기 혼란 이후 18세기에 문화적 전성기를 겪으며 새로운 예술 형태가 발흥했다.[15] 19세기가 되면서 책거리는 민화의 영역으로 확산되어 서민들이 즐기게 되었고, 다산, 장수, 출세 등 행복을 추구하며 표현주의적이고 추상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다. 책 무더기만을 주제로 하는 경우는 줄어들었다.[16] 궁정에서 책거리는 의례에 사용되었지만, 가정에서 민화로 그려진 책거리는 순수한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17]

이후 책거리는 문인의 손을 떠나 서민의 생활을 채색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책거리의 모티프는 문인이 선호하는 것에서 길상화에 그려지는 것(예: 다산을 의미하는 수박, 화조·어해·모란 등)이나 조선 서민에게 친숙한 것으로 바뀌었다. 더 많은 모티프를 조화롭게 표현하기 위해 이전의 책거리에서 특징적이었던 책가의 틀은 그려지지 않게 되었다.[6] 19세기에는 책거리가 공방에서 대량 생산되는 형태로 변화하여, 특정 템플릿을 바탕으로 고객의 요구에 맞춰 모티프가 그려졌다.[8] 서민들은 책거리를 통해 부귀영화와 장수를 기원하고, 자신들의 소망을 그림에 투영했다.

4. 영향

정조 통치기에 조선은 청나라와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자명종, 시계, 안경과 같은 서양 물품이 책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책장은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다보격(多寶格) 양식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서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정조는 청나라와의 문화 교류를 장려하여 중국 및 유럽 문화 상품의 유입을 늘렸다.

양반은 유교적 도덕관념 때문에 상업을 꺼렸지만, 중인은 조공 무역에 참여하여 부를 얻고, 조선 국내에 다양한 문물을 들여왔다. 책거리에는 당시 조선의 새로운 소비 문화가 반영되어, 서적과 종이···벼루 외에도 청동기, 자기, 화훼, 돌, 과일, 시계, 안경, 부채와 같은 해외 수입품이 그려졌다.

정조 통치기에 청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서양 회화 기법도 책거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서양의 선 원근법과 명암법이 도입되어 그림 속 사물들이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규상 (1727년 - 1799년)의 『일몽고』에 따르면, 책가도는 조선 도화서가 "서양의 사면 척량 화법을 모방하기 시작"하여 그린 그림이며, "당대의 귀인으로서 이 그림을 (장식하는 것으로 벽에) 붙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4. 1. 청나라와의 문화 교류

정조 통치기에 조선은 청나라와 문화 교류가 활발해졌고, 이 과정에서 책거리에는 자명종, 시계, 안경과 같은 서양 물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16][20] 책장은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다보격(多寶格) 양식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서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16][20] 정조는 청나라와의 문화 교류를 장려하여 중국 및 유럽 문화 상품의 유입을 늘렸다.[2]

양반은 유교적 도덕관념 때문에 상업을 꺼렸지만, 기술 관료였던 중인은 조공 무역에 참여하여 부를 얻고, 조선 국내에 다양한 문물을 들여왔다. 책거리에는 당시 조선의 새로운 소비 문화가 반영되어, 서적과 종이···벼루 외에도 청동기, 자기, 화훼, 돌, 과일, 시계, 안경, 부채와 같은 해외 수입품이 그려졌다.[8]

4. 1. 1. 다보격과 경이의 방

정조 통치기에 조선은 청나라와 문화 교류가 활발해졌고, 이 과정에서 책거리에 자명종, 시계, 안경과 같은 서양 물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16][20] 책장은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다보격(多寶格) 양식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서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16][20] 다보격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가져온 유럽의 진귀품 캐비닛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5]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에서는 세계 각지의 물품에 대한 지식이 유입되고,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고대 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왕족, 귀족, 지식인들은 수집품을 전시하는 "경이의 방"을 만들었다.[8]

청나라에서는 한대부터 물품 수집 문화가 있었고, 16세기경부터 관련 저작이 많이 나왔지만, 유럽처럼 전시 선반을 만들어 과시하는 문화는 없었다.[8] 그러나 청 왕궁에서는 "다보각"이라 불리는 골동품 전시용 대형 진열장이 만들어졌다.[9][10] 다보각이 없는 방에는 다보각을 그린 다보각경도가 장식되기도 했다. 1998년에는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다보각경도가 소개되어 책거리와의 유사성이 지적되었다.[10] 울주 진무묘에는 1779년(건륭 44년, 정조 3년)경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비슷한 벽화가 있는데, 이는 책거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8]

4. 2. 서양 회화 기법의 영향

정조 통치기에 청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책거리에도 서양 회화 기법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서양의 선 원근법과 명암법이 도입되어 그림 속 사물들이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15] 이규상 (1727년 - 1799년)의 『일몽고』에 따르면, 책가도는 조선 도화서가 "서양의 사면 척량 화법을 모방하기 시작"하여 그린 그림이며, "당대의 귀인으로서 이 그림을 (장식하는 것으로 벽에) 붙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10]

5. 특징

책거리는 책, 종이···벼루 등 문방구뿐만 아니라 청동기, 자기, 화훼, 돌, 과일, 시계, 안경, 부채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여 부귀영화, 장수, 다산 등 길상적인 의미를 담았다.[8] 초기에는 책가의 틀 안에 여러 물건을 배치하는 방식이었으나, 점차 책가의 틀이 사라지고 다양한 소재들이 자유롭게 배치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6]

19세기에는 공방에서 책거리가 대량 생산되면서, 특정 템플릿을 바탕으로 고객의 요구에 맞춰 소재가 그려지는 방식으로 변화했다.[8] 서민들은 책거리를 통해 부귀영화, 장수, 다산 등 자신들의 소망과 염원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표현주의적이고 추상적인 표현 기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책거리는 한국 회화 전통에서는 드물게 정물화라는 장르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조선민화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정적인 수묵화로 대표되는 한국 전통 회화와 비교했을 때 이질적이고 민중적이라는 이유로 낮게 평가받았던 책거리의 현대성과 특수성이 재평가받게 되었다.[7][13]

6. 갤러리

참조

[1] 웹사이트 Korean Chaekgeori Paintings https://www.metmuseu[...]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7-11-30
[2] 웹사이트 책거리 https://folkency.nfm[...]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2024-06-02
[3] 웹사이트 People of Joseon paint their desire for learning http://www.korea.net[...] Korean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2017-11-30
[4] 웹사이트 문방도 http://folkency.nfm.[...]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2017-11-30
[5] 웹사이트 Art Historian Brings Little-Known Korean Art to America https://news.dartmou[...] Dartmouth College 2016-10-25
[6] 논문 朝鮮王朝時代の絵画「チェッコリ」についての一考察
[7] 논문 朝鮮時代宮廷チェッコリ絵と民画チェッコリ絵の造形的比較 https://www.jstage.j[...] 2023
[8] 논문 Still Life in Motion https://hdl.handle.n[...] 2021
[9] 웹사이트 多宝格の収・納・蔵 https://theme.npm.ed[...] 2022-03-25
[10] 논문 朝鮮時代後期の冊架図の成立と正祖の絵画観(その一)
[11] 논문 朝鮮時代後期の冊架図の成立と正祖の絵画観(その二)
[12] 논문 영조대 후반 책가도(冊架圖) 수용의 세 가지 풍경
[13] 논문 朝鮮後期民画チェッコリ絵に関する韓国の研究動向 https://www.jstage.j[...] 2020
[14] 웹인용 책거리 https://folkency.nfm[...]
[15] 웹인용 Korean Chaekgeori Paintings https://www.metmuseu[...]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7-11-30
[16] 웹인용 책거리 http://folkency.nfm.[...]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2017-11-30
[17] 웹인용 People of Joseon paint their desire for learning http://www.korea.net[...] Korean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2017-11-30
[18] 웹인용 문방도 http://folkency.nfm.[...]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2017-11-30
[19] 웹인용 책가도 https://terms.naver.[...] 국립중앙박물관 2021-06-17
[20] 웹인용 Art Historian Brings Little-Known Korean Art to America https://news.dartmou[...] Dartmouth College 2017-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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