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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데 에라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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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타리나 데 에라우소는 1585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난 인물로, 수녀원 탈출 후 남장을 하고 군인으로 활동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다양한 모험을 겪었다. 그녀는 아라우코 전쟁에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유럽으로 돌아와 교황에게 남장을 허락받기도 했다. 에라우소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백하고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유명해졌으며, 그녀의 삶은 소설,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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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데 에라우소
기본 정보
씨명카탈리나 데 에라우소
다른 이름수녀 중위
원어 이름Catalina de Erauso
출생1592년
사망1650년
카탈리나 데 에라우소
군사 경력
소속(미확인)
최종 계급(미확인)

2. 생애

바스크 지방의 도시 산세바스티안에서 병사의 딸로 태어난 카탈리나는 어린 시절 수녀원에 보내졌다. 그러나 정식 수녀 서원을 앞둔 15세 때, 채찍질 수행을 견디지 못하고 수녀원을 탈출하여[6][8] 남장을 하고 '프란시스코 데 로욜라'(Francisco de Loyolaes)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스페인 각지를 떠돌았다.[6]

이후 신대륙으로 건너가 '알론소 디아스 라미레스 데 구스만'(Alonso Díaz Ramírez de Guzmánes)이라는 이름으로 병사로 등록하여 아라우코 전쟁 등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형제를 만나기도 했으나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 전투 중 입은 치명상으로 인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성별을 고백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였다.[17] 여성임이 밝혀지자 잠시 수녀원에 머물기도 했으나 1624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그의 이야기가 알려지며 큰 명성을 얻었고, 로마에서는 교황 우르바노 8세를 알현하여 남장을 계속하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전해진다. 1645년, 카탈리나는 '안토니오 데 에라우소'(Antonio de Erausoes)라는 이름으로 누에바 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로 가는 함대에 합류하여 다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멕시코시티베라크루스 사이를 오가는 짐꾼 사업을 하며 말년을 보내다 1650년 사망했다.

2. 1. 유년 시절과 수녀원 생활

에라우소는 1592년 2월 10일[4][5][6] (일부 자료에서는 1585년으로 추정[3][18]) 스페인 바스크 지방 기푸스코아의 산 세바스티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미겔 데 에라우소와 마리아 페레스 데 아르세 갈라라가로,[2] 모두 산 세바스티안 출신이었다.[6] 아버지 미겔은 펠리페 3세 국왕 휘하의 군사령관이자 대위였으며,[6] 에라우소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오빠들로부터 군사 기술을 익혔다.[3]

1589년경, 4세의 나이로 도미니코회 소속 산 세바스티안 엘 안티구오 수녀원에 보내졌다.[7] 이곳은 에라우소의 어머니의 사촌인 우르술라 데 우리자 에 사라스티가 원장으로 있는 곳이었다.[6] 수녀원에서 에라우소는 강하고 다부지며 성미가 급한 성격으로 자랐다.[6][8] 종교적인 소명이 부족했고 수녀원 생활에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에 서원을 거부하고 감방에 갇히기도 했으며, 카탈리나 데 알리리라는 미망인 수련 수녀와 끊임없이 다투었다.[6]

15세 되던 해, 나이 많은 수녀에게 구타를 당한 것을 계기로 탈출을 결심했다.[6][8] 1600년 3월 18일, 성 요셉 축일 전날 밤, 우연히 수녀원 열쇠를 발견한 에라우소는 다른 수녀들이 아침 기도회에 참석한 틈을 타 수녀원을 빠져나왔다.[6] 4세 때 수녀원에 들어간 이후 바깥세상을 경험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에라우소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일주일간 소년의 옷을 만들며[6] "프란시스코 데 로욜라(Francisco de Loyola)"라는 가명을 사용했고,[6] 큰길을 피해 비토리아로 향했다.[6] 남장을 한 덕분에 소년으로 행세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6]

2. 2. 스페인에서의 방랑

수녀 서원을 앞둔 15세에[6] 수녀원을 탈출한 카탈리나는 남장을 하고 '프란시스코 데 로욜라(Francisco de Loyola)'[13]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도망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녀는 4살 때 수녀원에 들어간 이후 바깥세상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비토리아에서는 어머니의 사촌과 결혼한 의사이자 교수 프란시스코 데 세랄타를 만났으나, 그는 카탈리나를 알아보지 못했다.[10][11] 카탈리나는 그와 3개월간 머물며 라틴어를 배웠지만, 학대를 당하자 돈을 훔쳐 그곳을 떠났다.[6][10][11] 이후 마부와 함께 바야돌리드로 향했다.[6] 당시 펠리페 3세 국왕의 궁정이 레르마 공작의 영향 아래 바야돌리드에 있었다.[12] 카탈리나는 국왕의 비서인 후안 데 이디아케스의 시종으로 7개월간 일했다.[14] 어느 날 카탈리나의 아버지가 이디아케스를 찾아와 사라진 자식(카탈리나를 '안토니오'로 언급하며[14])의 행방을 물으며 외모와 수녀원 탈출 경위를 설명했지만, 바로 옆에 있던 자신의 딸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14]

이후 카탈리나는 빌바오로 가기로 결정했다.[15] 빌바오에 도착했지만 잠잘 곳이나 후원자를 찾지 못했고, 동네 소년들과의 돌싸움 끝에 한 명을 다치게 하여 체포되어 한 달간 감옥에 갇혔다.[15][16] 석방 후 에스테야로 가서 도시의 유력자인 알론소 데 아레야노의 시종으로 2년간 일하며 좋은 대우를 받았다.

1602년1603년 사이, 카탈리나는 고향인 산세바스티안으로 잠시 돌아와 남장을 한 채 친척들을 만나고 옛 수녀원에서 미사에 참석하기도 했으나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고모를 알아보지 못한 채 시중을 들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얼마 후 파사이아로 이동하여 미겔 데 베로이즈 선장을 만났고, 그를 따라 세비야로 갔으나 이틀 만에 떠났다. 나중에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로 가서 어머니의 사촌인 에스테반 에기뇨 선장의 갤리온선에서 선실 승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603년 성주간 월요일, 카탈리나는 당시 많은 바스크인들처럼 서인도 제도에서의 모험을 꿈꾸며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17][18] 이 시기 동안 그녀는 짧은 머리에 남성적인 옷차림을 하고 프란시스코 데 로욜라와 같은 가명을 사용하며 남성으로 행세했다.

2. 3. 신대륙에서의 활약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도착한 카탈리나는 Alonso Díaz Ramírez de Guzmán|알론소 디아스 라미레스 데 구스만es이라는 가명을 쓰며 병사로 등록했다. 그녀는 여러 대장의 지휘 아래 아라우코 전쟁에 참전했는데, 그중에는 그녀의 친형제도 있었으나 카탈리나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신대륙에서의 첫 기착지는 현재 베네수엘라의 푼타 데 아라야였으며, 이곳에서 네덜란드 해적 함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카르타헤나와 노브레 데 디오스를 거쳐 파나마로 향했다. 파나마로 가기 전, 카탈리나는 자신의 삼촌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500페소를 훔친 뒤 도주했다. 파나마에서 3개월을 보낸 후, 상인 후안 데 우르키사(Juan de Urquiza) 밑에서 일하게 되어 페루의 파이타로 이동했다. 도중 만타(현재 에콰도르) 근처에서 배가 난파되었으나, 주인과 함께 헤엄쳐 살아남았다.

파이타를 거쳐 사냐로 간 카탈리나는 주인 우르키사로부터 집, 의복, 돈, 세 명의 흑인 노예를 제공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극장에서 시비가 붙은 젊은이와 싸우다 그의 얼굴을 베어 투옥되었다. 주인과 주교의 도움으로, 피해자의 숙모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풀려날 기회를 얻었지만 이를 거부했다. 이후 트루히요로 가서 주인의 가게를 맡았다. 하지만 얼굴에 상처를 입었던 남자가 친구들과 함께 다시 찾아와 결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상대의 친구 한 명이 사망했다. 다시 투옥되었으나 주인의 도움으로 풀려난 뒤, 추천서와 돈을 받아 페루 부왕령의 수도인 리마로 향했다.

리마에서는 부유한 상인 디에고 데 솔라르테 밑에서 9개월간 가게를 관리했으나, 주인의 처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다 발각되어 해고되었다. 일자리를 잃은 카탈리나는 칠레 정복을 위한 군대에 곤살로 로드리게스 대위의 지휘 아래 입대했고, 1600명의 병사와 함께 리마에서 콘셉시온으로 이동했다.

1617년부터 1619년까지는 추키사카에서 포토시의 광산 지대까지 라마 몰이꾼으로 일하다가 다시 군인으로 징집되었다.[20] 1619년, 부대와 함께 칠레로 진군하여 마푸체족의 땅을 약탈하고 많은 원주민을 학살하는 등 정복자로서의 잔혹한 면모를 보였다. 칠레에서는 총독의 비서로 일하던 형 미겔 데 에라우소를 만났지만, 형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21] 칠레에서 3년간 머물렀으며, 여자 문제로 형과 다툼이 생겨 인디언들의 땅인 파이카비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서 카탈리나는 아라우코 전쟁에 참전하여 마푸체족을 상대로 싸웠고, 뛰어난 무술 실력과 용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17]

발디비아 전투에서의 공로로 중위로 진급했고, 이어진 푸렌 전투에서는 전사한 대위를 대신해 지휘권을 잡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원주민에 대한 잔혹 행위가 문제가 되어 더 이상의 진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좌절한 카탈리나는 방화, 살인, 약탈 등 무법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콘셉시온에서는 도시의 수석 감사관을 암살하고 6개월간 교회에 피신해 있었다. 석방된 후에는 결투 끝에 자신의 형 미겔을 살해했고, 이로 인해 다시 8개월간 투옥되었다.

에라우소의 스페인령 남아메리카 여행


이후 안데스 산맥을 넘어 라플라타 총독부(현재의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험난한 여정 끝에 죽음 직전에 이르렀으나 한 마을 주민에게 구조되어 투쿠만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자신을 돌봐준 원주민 과부의 딸과 사제의 조카, 두 여성과 결혼을 약속했으나 결국 도망쳤다.

포토시로 이동하여 하사가 되었고, 다시 인디언들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춘코스에서 대량 학살에 가담했다. 라플라타(구 추키사카)에서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성별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석방 후에는 밀수업에 종사하다가 다시 교회로 피신해야 했다. 피스코밤바에서는 싸움 끝에 한 남자를 살해하여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다른 사형수의 증언 덕분에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질투심 많은 남편과의 결투 때문에 5개월간 교회 성역에 머물렀다. 라 파스로 이주한 뒤 또 다른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자, 고해성사를 하는 척하며 축성된 성체를 훔쳐 쿠스코로 도망쳤다.[22]

어느 시점엔가 전투 중 한 남자를 살해하다가 치명상을 입고 죽음을 앞두게 되자, 자신의 성별이 여성임을 고백했다. 그러나 4개월 후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고, 여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과망가로 이주했다. 논란을 피하기 위해 지역 주교에게 자신의 성별을 다시 고백했고, 주교의 권유로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바다 건너 스페인까지 퍼져나갔다. 1620년에는 리마대주교가 그녀를 소환하여 직접 만나기도 했다. 1624년, 다시 한번 전투에 참여한 후 스페인으로 귀환했다.

2. 4. 유럽 귀환과 교황 알현

1623년 에라우소는 페루 우아망가에서 분쟁에 휘말려 체포되었다.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아구스틴 데 카르바할 주교에게 자비를 구하며 자신이 본래 수녀원에 있던 여성이었음을 고백했다. 여러 부인들이 에라우소가 여성이고 처녀임을 확인하는 심사를 거친 후, 주교는 그를 보호하기로 결정하고 스페인으로 보냈다.[23]

1624년 스페인으로 돌아온 에라우소는 1625년부터 1626년 사이에 스페인 왕실에 신대륙에서의 군 복무 공로에 대한 재정적 보상을 청원했다. 그는 ''relación de méritos y servicios''라는 문서를 제출했는데,[23] 여기에는 전쟁 기간에 대한 보상뿐만 아니라 로마로 여행하는 동안 잃어버린 돈에 대한 보상 요구도 포함되었다. 이 문서에는 에라우소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이 담겨 있었지만, 많은 증언이 서로 내용이 맞지 않았다. 증인들은 대부분 에라우소를 남자로 활동할 때 사용했던 여러 이름 중 하나인 '알론소 디아스 데 구스만'으로는 알았지만, '카탈리나 데 에라우소'라는 본명이나 그의 전체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23]

스페인 귀환 후, 카탈리나는 로마와 이탈리아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이 시기 그의 이야기는 널리 퍼져 상당한 명성을 얻었으며, 교황 우르바노 8세를 알현하여 남장을 계속하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에라우소가 실제로 교황을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출한 공로 및 봉사 보고서가 1625년 또는 1626년에 인디아스 총괄 문서 보관소와 마드리드의 왕립 역사 아카데미에 제출된 기록은, 그가 당시 로마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23]

1626년 로마에서 에라우소를 직접 만났던 페드로 데 발레는 편지를 통해 그의 외모를 묘사했다. 발레에 따르면 에라우소는 키가 크고 근육질 체격이었으며 가슴은 아이처럼 작았다. 또한 꽤 늙어 보였고, 여성보다는 환관처럼 보였다고 기록했다. 그는 여성적인 옷차림 대신 검을 차고 스페인 남성처럼 옷을 입어 영락없는 병사의 모습이었다고 덧붙였다.

1630년에는 프란시스코 파체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장인)가 에라우소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 그림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2. 5. 누에바 에스파냐에서의 죽음

1645년, 카탈리나는 페드로 데 우르수아가 지휘하는 함대를 타고 누에바 에스파냐로 향하며 다시 스페인을 떠났다. 이때 그녀는 '안토니오 데 에라우소(Antonio de Erauso)'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누에바 에스파냐에 정착한 후, 그녀는 멕시코시티베라크루스 사이를 오가는 짐꾼 사업을 시작하며 말년을 보냈다.

1650년, 카탈리나는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망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초기 기록에는 '수에트라크스트라'에서 사망했다고 언급되지만, 현지에서는 그녀가 배에서 짐을 옮기다 사망했다거나 오리사바 고지대에서 홀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가장 유력한 설은 코탁슬라 마을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유해가 안치된 장소 역시 불분명하다. 역사가 호아킨 아로니즈는 그녀의 유해가 오리사바에 있는 산 후안 데 디오스 교회(과거 후아니노 형제들의 무염시태 성모 왕립 병원 교회)에 안치되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후안 데 팔라폭스 주교가 유해를 자신의 교구인 푸에블라로 옮기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추측도 제기된다. 반면, 다른 역사가들은 그녀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코탁슬라 마을에 유해가 그대로 안치되어 있다고 본다.[24] 그러나 카탈리나 데 에라우소의 정확한 사망 날짜와 장소를 입증할 수 있는 공식적인 문서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25]

3. 외모

프란체스코 크레센지오가 그린 카타리나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지만, 1630년 프란시스코 파체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장인)가 그린 초상화는 현존한다.

1626년 페드로 데 발레는 로마의 마리오 시파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본 카타리나의 용모에 대해 적었다. 그에 따르면, 그녀는 키가 크고 근육질의 몸매를 가졌으며 가슴은 아이처럼 작았다. 카타리나는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꽤 늙어 보였고, 여성이라기보다는 환관처럼 보였다고 한다. 또한 여성스러운 궁정인 같은 옷차림 대신, 칼을 차고 스페인 남성처럼 옷을 입어 병사다운 모습이었다고 묘사했다.

4. 젠더 정체성 논란

현대 학자들은 에라우소의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에라우소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남성에게 끌렸다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여성과의 수많은 관계는 상세히 기술했다. 예를 들어 리마 상인의 처제와의 만남, 애인을 두고 자신의 형제와 다툰 일, 신대륙에서 여성과 약혼했던 여러 사례 등이 있다.[31] 하지만 이러한 약혼은 에라우소가 상황을 이용해 선물과 지참금을 챙겨 떠나면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30] 에라우소는 또한 한 여주인이 "다리 사이를 만지는" 것에 놀랐다고 언급했으며, 자신의 성별을 모르는 미래의 약혼녀로부터 선물을 받기 위해 남자로 '변장'한 것을 두 번 이용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31]

셰리 벨라스코(Sherry Velasco)와 같은 학자들은 에라우소의 성별과 성 정체성에 대해 글을 썼다.[32] 벨라스코와 다른 학자들은 에라우소를 트랜스젠더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33][34] 벨라스코는 또한 에라우소를 레즈비언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에라우소의 회고록이 처음 출판된 이후 수년에 걸쳐 다양한 이성애 관계를 지어내고 에라우소의 여성과의 관계와 행동을 축소함으로써 에라우소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지우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말한다.[30][32] 이는 주로 19세기에 이야기의 버전이 전해지고 출판된 경우에 발생했다. 벨라스코에 따르면, 20세기에는 에라우소에 대한 "재-레즈비언화"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젊은 여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1940년대에 이성애적 팜므 파탈 서사가 있었고, 1980년대에는 에라우소가 "연인이 죽는 우울한 레즈비언"으로, 그리고 "주인공이 그녀의 성적 욕망의 대상과 동행하는 낙관적인 이미지로 끝나는 서사를 가진 관음증적인 레즈비언"으로 나타났다.[32]

한편, 매튜 골드마크(Matthew Goldmark)는 에라우소의 공로 및 봉사 기록 문서를 조사하는 접근 방식을 취하며, 특히 문서의 'hábitos'(습관) 섹션을 에라우소의 성적 지향과 정체성에 주목하여 분석한다. 이 섹션은 에라우소를 알고 그의 태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증인이나 다른 사람들의 진술을 제공하며, 성별뿐만 아니라 계급과 직업의 교차점을 보여준다.[23]

에라우소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했든 간에, 연구자들은 에라우소의 모험담 이면에 있는 이유에 대해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는 에라우소가 변장을 유지하고 동료 스페인 군인들과 어울리기 위해 여성에게 끌리는 척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에라우소가 실제로 레즈비언이었으며, 교회의 감시를 피하고 여성에게 계속해서 끌리기 위해 옷을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에라우소가 실제로 남성으로 정체성을 인식했다는 세 번째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학파에 속한 사람들은 에라우소가 제시한 증거를 통해 에라우소가 단지 성 정체성을 표현했으며 트랜스젠더였다고 결론짓는다.[30][35]

5. 평가

카탈리나 데 에라우소는 자신의 자서전을 직접 쓰거나 구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서전은 원고 형태로 남아 있다가 1829년 파리에서 호아킨 마리아 페레르의 요청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이후 1838년 바르셀로나에서 두 번째, 1894년 파리에서 스페인 예술가 다니엘 비에르주의 삽화와 함께 세 번째로 출판되었다. 에라우소의 이야기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토마스 드 퀸시가 이상화하여 붙인 영어 제목 ''기수 수녀''를 포함한 다양한 판본으로 제작되었다.[26]

이 자서전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일부는 연대기적 부정확성과 모순을 근거로 위작으로 보기도 한다.[27][28] 그러나 에라우소의 세례 증명서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존재하여, 이 인물의 역사적 실존 가능성은 높게 평가된다.[29]

에라우소의 특별한 삶과 아메리카에서 돌아온 후 히스패닉 세계에서 얻은 명성은 당시 바로크 시대의 취향과 연관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바로크 시대에는 주변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다.[37] 그녀의 자서전은 18세기 말 칸디도 마리아 트리게로스의 친구에 의해 필사되었고, 이 사본 중 하나가 학자 후안 바우티스타 무뇨스를 거쳐 1784년 왕립 역사 아카데미에 보관되었다. 19세기 초 정치인 펠리페 바우사가 이를 재발견하여 호아킨 마리아 페레르를 설득, 1829년 파리에서 ''La historia de la Monja Alférez, escrita por ella misma'' ("스스로 쓴 여군 수녀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면서 에라우소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다시 활발해졌다.[17][36]

에라우소의 이야기는 후대 작가, 극작가, 영화 제작자,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후안 페레즈 데 몬탈반은 이미 1625년에 ''코메디아 파모사 데 라 몬하 알페레즈''라는 희곡을 발표했으며, 19세기에는 토마스 드 퀸시가 에라우소를 운명의 희생자이자 모험을 겪는 낭만적인 인물로 묘사했다.[37] 에두아르도 블라스코의 소설 ''수도원에서 야영지로, 또는 여군 수녀'' 역시 19세기에 나왔다. 20세기에는 멕시코의 에밀리오 고메스 무리엘 감독이 연출한 영화 ''라 몬하 알페레즈''(1947) 등을 통해 대중에게 더 알려졌다. 최근에는 포스트구조주의 비평가들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젠더 개념의 유동성과 상대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에라우소의 삶에 주목하고 있다. 2019년에는 텍스트 분석을 통해 저자 미상이었던 17세기 연극 ''라 몬하 알페레즈''가 실제로는 후안 루이스 데 알라르콘의 작품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38]

에라우소는 남장을 한 채 교황 우르바노 8세에게 알현을 허락받을 정도로 당대에 큰 명성을 얻었다. 그녀의 외모에 대한 동시대 기록도 남아있다. 프란체스코 크레센지오가 그린 초상화는 사라졌지만, 1630년 프란시스코 파체코가 그린 초상화는 현존한다. 페드로 데 발레는 1626년 편지에서 에라우소가 키가 크고 근육질이며 가슴이 작고, 여자라기보다는 환관처럼 보였다고 묘사했다. 그는 에라우소가 칼을 차고 스페인 남성 군인의 모습이었다고 기록했다.

6. 미디어

1625년 후안 페레스 데 몬탈반은 카타리나 데 에라우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Comedia famosa de la monja Alférez|수녀 중위의 유명한 희극es이라는 희곡을 집필했다. 이 작품은 1626년부터 출판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원고는 1794년 판이다. 1838년 판은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2019년 텍스트 분석 결과, 저자가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17세기 연극 ''라 몬하 알페레즈''는 실제로는 후안 루이스 데 알라르콘이 쓴 것으로 밝혀졌다.[38]

에라우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서전을 직접 쓰거나 구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서전 원고는 18세기 말 도밍고 데 우르비루가 소유했던 것을 시인이자 극작가인 칸디도 마리아 트리게로스의 친구가 복제했고, 이 복사본 중 하나가 학자 후안 바우티스타 무뇨스를 거쳐 1784년 왕립 역사 아카데미에 보관되었다. 이후 19세기 초 정치인 펠리페 바우사가 재발견하여 천문학자이자 상인인 호아킨 마리아 페레르에게 출판을 설득했다. 마침내 1829년 파리에서 쥘 디도에 의해 La historia de la Monja Alférez, escrita por ella misma|스스로 쓴 여군 수녀의 이야기es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되었다.[17][36] 자서전은 1838년 바르셀로나에서 두 번째로 출판되었고, 1894년 파리에서는 스페인 예술가 다니엘 비에르주의 삽화와 함께 세 번째로 출판되었다. 이후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토마스 드 퀸시가 붙인 영어 제목 ''기수 수녀''를 포함한 여러 버전으로 제작되었다.[26]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연대기적 부정확성과 모순을 근거로 이 자서전의 진위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27][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우소의 세례 증명서와 다른 사람들의 증언 등 역사적 실존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존재한다.[29]

에라우소의 이야기는 여러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19세기에는 토마스 드 퀸시가 에라우소를 운명의 희생자이자 모험에 빠진 낭만적인 인물로 묘사했으며,[37] 에두아르도 블라스코는 ''수도원에서 야영지로, 또는 여군 수녀''라는 소설을 썼다. 또한 킴 맥니는 에릭 플린트의 역사 대체 소설 시리즈인 "1632 시리즈" 제11권에 수록된 단편 "얼음과 태양의 땅"에서 에라우소를 주인공으로 다루었다.

영화 분야에서는 멕시코의 에밀리오 고메스 무리엘 감독이 에라우소의 생애를 그린 영화 ''라 몬하 알페레즈''(1947)를 제작했으며, 마리아 펠릭스가 남장한 에라우소를 연기했다. 1987년에는 에스페란사 로이 주연의 유사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게임 대항해시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대항해시대2에는 카타리나를 모델로 한 '카탈리나 에란초'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름과 해군 군인이라는 설정 외에는 실제 에라우소와 공통점이 거의 없으며, 게임 속에서는 남장을 하지 않고 복수를 위해 해적이 되는 설정이다. 이후 시리즈인 『대항해시대 V』에서는 '카타리나 데 에라우소'가 '카탈리나 에란초'와는 별개의 인물로 등장한다.

에라우소의 독특한 삶은 작가, 극작가, 영화 제작자, 예술가들에게 꾸준히 영감을 주었으며, 후안 반 데르 하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1630년 초상화도 남아있다. 일부에서는 그녀의 특별한 삶과 바로크 시대의 기이하거나 비정상적인 인물에 대한 취향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도 한다.[37] 현대에 이르러서는 개인의 정체성 구축 과정에서 나타나는 젠더 개념의 유동성과 상대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포스트구조주의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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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간행물 El problemático "feminismo" de La Monja Alférez, de Domingo Miras http://www.ucm.es/in[...] Universidad Complutense de Madrid 2009
[38] 뉴스 Artificial intelligence uncovers lost work by titan of Spain's 'Golden Age' https://www.theguard[...] 202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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