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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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레시는 '국경 지대'를 의미하는 폴란드어로, 역사적으로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동부 지역을 지칭한다. 폴란드 동부 정착지는 1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8세기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크레시는 동부 국경을 확립하기 위한 분쟁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과 소련에 점령되어 많은 폴란드인이 강제 이주되거나 학살되었다. 현재 크레시 지역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로 분할되었으며, 폴란드 문화와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폴란드인들이 이 지역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폴란드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행사와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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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시 | |
|---|---|
| 지도 | |
| 역사적 지역 | |
| 명칭 | 크레시 브스호드니에 |
| 기간 | 1919–1939; 1945 |
| 면적 |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합병된 폴란드 영토 |
| 오늘날의 일부 |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
| 개요 | |
| 다른 이름 | 오크라이니 |
| 설명 | 과거 폴란드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
| 역사 | |
| 배경 | 제2차 폴란드 공화국의 동쪽 지역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합병 1945년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에서 연합군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 획득이 확정됨 대부분의 독일 영토가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으로 폴란드에 양도 |
| 영향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형성됨 폴란드의 영토 변화에 중요한 역할 |
| 관련 정보 | |
| 관련 위키 프로젝트 | 폴란드의 영토 변화 |
| 참고 자료 | 폴란드 국립기억연구소 교육 프로젝트 "20세기 폴란드 동부 국경지대" |
| 언어 표기 | : 폴란드어 : 폴란드어 : 러시아어 (오크라이니) |
2. 어원
폴란드인의 동부 정착은 폴란드 국가가 형성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018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키예프 루스를 침공하여(1018년 키예프 원정) 키예프를 점령하고 체르벤 도시들을 폴란드 영토로 편입시켰다. 1340년 붉은 루테니아가 폴란드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폴란드인의 방어적인 정착이 강화되었고 가톨릭교 도입이 가속화되었다.
폴란드어 단어 kresypol(크레시)는 '가장자리'를 의미하는 krespol의 복수형으로, "국경 지대"를 뜻한다. 언어학자 즈비그니에프 고와브(Zbigniew Gołąb)에 따르면, 이 단어는 중세 독일어 Kreis에서 유래했으며, 당시 이 독일어 단어는 Kreislinie, Umkreis, Landeskreisdeu("국경선, 경계선 또는 한정된 영토")를 의미했다.[7] 반면, 사무엘 린데(Samuel Linde)는 그의 『폴란드어 사전(Dictionary of the Polish Language)』에서 다른 어원을 제시하는데, 그에 따르면 kresypol는 폴란드와 크림 칸국 사이의 국경선, 특히 드니프로 강 하류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kresypol라는 용어가 문학 작품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시인 빈첸티 폴의 시 "모호르트(Mohort)"(1854)와 "우리 땅의 노래(Pieśń o ziemi naszej)"에서였다. 폴은 크레시가 드네스트르 강과 드니프로 강 사이, 타타르인 국경 지대에 인접한 선이라고 설명했다.[8] 한편, 크레시 지역의 유대인 정착과 관련하여 '페일(pale)'이라는 개념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이는 고대 영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폴란드어로는 '팔(pal)'이며, 말뚝을 뜻하는 라틴어 paluslat에서 파생되었다. 이 경우 '페일'은 울타리나 경계로 둘러싸인 지역을 의미하도록 확장된 개념이다.[9]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이 용어의 의미는 확장되어, 리비우(Lwów)–빌뉴스(Wilno) 선 동쪽에 위치한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동부 지역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제2폴란드 공화국 시기(1918년~1939년)에는 Kresypol가 가상의 커존 라인 동쪽에 있는, 역사적으로 폴란드인이 정착했던 땅과 거의 동일시되었다. 현재 이 용어는 현대 폴란드 국경 밖에 있는 제2폴란드 공화국의 모든 동부 지역뿐만 아니라, 1772년 이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였으며 여전히 폴란드 공동체가 존재하는 더 동쪽의 지역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된다.[10]
3. 역사
1569년 루블린 연합 이후, 더 많은 폴란드 정착민들이 광대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동부 국경 지대, 즉 크레시(Kresy)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주민 대부분은 마조비아와 소폴란드 지방 출신이었다. 이들은 리투아니아인과 루테니아인과 같은 초기 거주민들이 살던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 정착하며 점차 동쪽으로 이동했다. 또한, 크레시의 토착 상류층은 폴란드의 종교, 문화, 언어를 받아들이며 동화되었고 폴란드화가 진행되었다.
3. 1. 폴란드 분할
1772년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연방의 첫 번째 폴란드 분할이 시작된 해이다. 1795년까지 연방의 동쪽 절반 전체가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의해 분할 합병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 합병을 통한 러시아 제국의 서쪽 확장은 제국 내 유대인 인구를 상당히 증가시켰다. 옛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영토에 있던 크레시 지역과 상당 부분 겹치는 정착지 허용 구역(Pale of Settlement)에는 5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거주했으며, 이는 당시 전 세계 유대인 인구의 40%를 차지하는 가장 큰 공동체였다.
폴란드의 관점에서 이 지역은 "빼앗긴 땅"으로 불리게 되었다. 강제적인 인구 정책 변화로 인해 폴란드인이 이 지역에서 소수 민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빼앗긴 땅"은 빌뉴스 대학교, 얀 카지미에르시 대학교, 크제미에니에츠 리세움 등 많은 폴란드 문화 중심지와 교육 기관이 자리 잡고 있어 폴란드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았다. 많은 지역 주민과 지식인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민족 봉기(11월 봉기, 1월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러시아 당국은 박해를 강화했다.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고 시베리아로 강제 추방했으며, 폴란드인과 그들의 전통 문화 및 제도에 대한 체계적인 러시아화 시도를 강행했다.
러시아의 관점에서 "정착지 허용 구역"은 현재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몰도바 전체와 우크라이나 대부분, 동부 라트비아, 동부 폴란드, 서부 러시아의 일부를 포함하며, 대체로 크레시 거대지역 및 당시 러시아의 서부 국경과 일치한다. 이 구역은 동쪽의 경계선(pale)에서부터 서쪽으로 러시아와 프로이센 왕국(후에 독일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경까지 확장되었다. 또한 유럽 러시아 영토의 약 20%를 차지했으며, 대부분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코사크 헤트만국, 오스만 제국(그리고 크림 칸국)의 역사적 영토에 해당한다.
정착지 허용 구역에 포함된 지역은 1654년부터 1815년 사이에 러시아 제국이 일련의 군사적 정복과 외교적 책략을 통해 확보한 곳이다. 이 지역에는 많은 로마 가톨릭, 동방 가톨릭 교회 신자와 유대인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정착지 허용 구역을 만든 법령은 표면적으로 종교적 성격을 띠었다. 즉, 국교인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면 거주 및 이동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 설립 및 유지의 동기가 주로 경제적 및 민족주의적 성격이었다고 주장한다.[11]
3. 2.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 폴란드 공화국

러시아 제국은 1864년 봉기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지주들을 축출하면서 크레시 지역을 농촌 오지로 방치했다. 농노 해방 이후 농업, 임업, 양조업 등 기존 경제 활동은 위축되었다. 특히 남부 크레시(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양 덕분에 "유럽의 빵 바구니"로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에는 경제적 쇠퇴가 심각해져 무역과 식량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특히 유대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서유럽과 미국으로 향하는 대규모 이민이 발생했다. 또한 러시아 통치 하에서는 의무 교육이 시행되지 않아, 폴란드 독립 당시 크레시 지역의 읽기 능력 수준은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12][13][14] 수십 년간의 방치와 투자 부족으로 인해 크레시 지역은 전간기 폴란드의 서부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낙후된 상태였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폴란드는 독립 국가를 재건하고 새로운 국경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크레시 지역을 둘러싸고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폴란드는 동부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등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들을 통해 폴란드는 과거 러시아 제국이 점령했던 쿠르존 선 동쪽 지역과 오스트리아(시슬레이타니아) 갈리치아의 일부였던 영토를 확보했다. 크레시는 전간기 폴란드 영토 중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다.[15] 이 지역들은 이후 제2폴란드 공화국의 동부 주(州)들을 형성하게 된다.
전간기 크레시에 포함된 영토는 리비우 주와 비아위스토크 주의 동부 일부, 그리고 노보그루데크 주, 폴레시에 주, 스타니슬라우프 주, 타르노폴 주, 빌뉴스 주, 볼린 주 전체를 아울렀다. 폴란드 정부는 이 지역에서 폴란드인의 민족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인 폴란드화 정책을 추진했다.[15] 그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가 오사드니크( Osadnik|오사드니크pol, 군사 정착민)를 이주시키는 것이었다.[15] 이들 군사 정착민 정책은 크레시에서 폴란드 정부가 추진한 정책 중 가장 민감한 사안 중 하나였으며, 현지 비폴란드계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16] 독일 역사가 베르나르트 키아리(Bernhard Chiari)는 크레시를 "폴란드의 빈민가"라고 묘사했으며, 야드 바솀(Yad Vashem)의 역사가 레오니드 라인(Leonid Rein)은 "유럽 전체의 빈민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평가했다.[17] 이러한 상황은 크레시 남동부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의 잦은 충돌로 이어졌고, 결국 동갈리치아 우크라이나인 평정과 같은 사건을 야기했다.
한편, 제2폴란드 공화국의 동쪽 국경 너머, 특히 민스크, 지토미르, 베르디치프 등 소비에트 연방 지역에도 다수의 폴란드인 공동체가 존재했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 소비에트 당국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 두 개의 폴란드 국립 지구를 설립하기도 했으나, NKVD의 폴란드 작전 기간 동안 이 지역의 폴란드인 대다수가 학살당했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소비에트 연방의 폴란드인 참조).
3. 3.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결과로, 1939년 9월 17일 크레시 지역은 소비에트 연방에 병합되었고(소비에트의 폴란드 침공 참조), 이곳에 거주하던 상당수의 폴란드계 주민들은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을 포함한 소비에트 연방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했다.[18] 1939년 9월 29일 체결된 독일-소련 국경 및 우호 조약에 따라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 사이의 새로운 국경이 재설정되었다. 서우크라이나와 서벨라루스 인민회의 선거 이후, 이 지역에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즉시 각각의 공화국을 소비에트 연방에 합류시킬 의도를 발표했다(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병합된 폴란드 영토 참조).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크레시의 남동부는 대독일(Greater Germany)의 총독부(General Government)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오스트란트(Ostland)와 우크라이나(Ukraine)라는 라익스코미사리아트(Reichskommissariat)에 통합되었다.
1943년에서 1944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반란군(Ukrainian Insurgent Army, UPA) 부대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도움을 받아 크레시 남동부에 살고 있던 폴란드인들을 대량 학살했다(볼히니아와 동갈리치아의 폴란드인 학살 참조).
1944년 1월, 소비에트군은 이전의 폴란드-소비에트 국경에 도달했고, 1944년 7월 말까지 1939년 9월 소련이 점령했던 영토 전체를 다시 장악했다.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새로운 소련-폴란드 국경이 설정되었는데, 이는 1939년 9월 소련의 영토 획득 대부분(비야위스토크와 프셰미실 주변 일부 지역 제외)을 사실상 승인한 것이며, 런던 망명 폴란드 정부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포츠담 회담은 친소련 성향의 폴란드 국민 해방 위원회(Polish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를 실질적으로 인정함으로써 크레시에서 폴란드인들의 강제 추방을 사실상 용인했다(1944년-1946년 폴란드 인구 이동 참조).
크레시의 대부분 폴란드 주민들은 소련에 의해 독일의 이전 동부 지역(독일 인구가 새로이 비워진 지역)으로 서쪽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지역은 중세 시대 폴란드인들의 정착을 근거로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회복된 영토(Recovered Territories)"로 명명되었다. 남부 크레시(현재 우크라이나) 출신 폴란드인들은 주로 실레시아(Silesia)에 정착하도록 강요받았고, 북부(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 출신 폴란드인들은 포메라니아(Pomerania)와 마주리아(Masuria)로 이주했다. 리비우(Lwów) 주민들은 브로츠와프(Wrocław)뿐만 아니라 글리비체(Gliwice)와 비톰(Bytom)에도 정착했다. 이 도시들은 전쟁 중에 파괴되지 않았고, 새로운 폴란드 동부 국경에 비교적 가까워서 동쪽으로의 갑작스러운 귀환 가능성에 대비할 수 있었다.[19]
종종 크레시의 마을 전체가 단일 철도 수송으로 서쪽의 새로운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예를 들어, 호이누프(Chojnów) 근처의 비와와(Biała) 마을은 여전히 상비와와(Upper Biała)와 하비와와(Lower Biała)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하비와와에는 우스트리키 돌네(Ustrzyki Dolne) 근처 비에슈차디(Bieszczady) 마을 폴라나(Polana)(이 지역은 1951년까지 소련에 속해 있었다: 1951년 폴란드-소련 영토 교환 참조)에 살던 사람들이 정착했고, 부차치(Buczacz) 근처 피시코프체(Pyszkowce) 마을 주민들은 상비와와로 이주했다. 매년 9월, 비와와에서는 "크레소비아나(Kresowiana)"라는 연례 축제가 열린다.[20] 슈체친(Szczecin)과 폴란드 서포메라니아(Polish West Pomerania)에서는 전후 초기 폴란드 정착민 3분의 1이 크레시 출신이거나 시비라크(Sybirak)들이었다.[21] 1948년 오폴레(Opole) 인구의 47.5%, 바보루프(Baborów)의 44.7%, 볼친(Wołczyn)의 47.5%, 그룹치체(Głubczyce)의 42.1%, 레빈 브제스키(Lewin Brzeski)의 40.1%, 브제그(Brzeg)의 32.6%가 동부 국경 지방 출신이었다. 2011년 오폴레 주(Opole Voivodeship) 인구의 25%가 크레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22] 야시엔(Jasień) 마을은 1945년 말과 1946년 초 테르노필(Ternopil) 지역 출신 사람들이 정착했다.[23] 보르시우프(Borschiv) 출신 폴란드인들은 트르치친스코-즈드루이(Trzcińsko-Zdrój)와 호이나(Chojna)로 이주했다.[24] 브스호바(Wschowa)와 그 군 지역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8,000명 이상이 이곳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크레시의 아슈먄느(Ashmyany), 이바노-프랑키우스크(Stanislawow), 로브노(Równe), 리비우(Lwów), 브로디(Brody), 지아틀라바 지구(Dzyatlava District), 테르노필(Ternopil) 등 다양한 지역 출신이었다.[25]
전체적으로 1944년부터 1946년 사이에 크레시에서 100만 명 이상의 폴란드인들이 회복된 영토로 이주했는데, 이 중 15만 명은 빌뉴스(Wilno) 지역, 22만 6,300명은 폴레시아(Polesia), 13만 3,900명은 볼히니아(Volhynia), 5,000명은 북부 부코비나(Bukovina), 61만 8,200명은 동갈리치아(Eastern Galicia) 출신이었다.[26] 첫 번째 폴란드인 본국 송환(1944년-1946년)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수송을 기다리며 기차역에서 몇 주, 심지어 몇 달 동안 보내야 했고, 그 기간 동안 현지인, 소련 군인 또는 소련 철도 노동자들에게 소지품을 강탈당했다. 화차 부족으로 리투아니아에서는 어느 시점부터 "한 개의 가방 정책"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폴란드인들이 모든 소지품을 남겨두고 떠나야 함을 의미했다. 그들은 화물열차 또는 개방형 화차를 이용해 여행했고, 여정은 길고 위험했으며, 군이나 경찰의 보호가 없었다.[19]
1955년부터 1959년까지 크레시에서 두 번째 대규모 폴란드인 본국 송환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45년에서 1960년 사이에 200만 명이 넘는 폴란드인들이 크레시를 떠났다. 1960년 이후에도 약 100만~200만 명의 폴란드인들이 크레시(특히 리투아니아 SSR과 벨라루스 SSR 지역)에 남았다. 오늘날에도 폴란드인들은 그로드노와 빌뉴스 지역의 많은 지역에서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최근 인구 조사에서 폴란드인 수는 다음과 같다: 리투아니아 2021년 기준 18만 3,000명, 벨라루스 2019년 기준 28만 8,000명, 우크라이나 2001년 기준 14만 4,000명.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수치는 폴란드에서 강하게 논쟁의 여지가 있다.
전후 초기, 동부 국경 지방을 소련에 양도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전반적으로 배신자로 여겨졌고, 폴란드 노동자당(Polish Workers' Party) 제1서기인 블라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도 이를 완전히 인식하고 있었다. 동부에서 회복된 영토로 이주한 사람들은 서로 리비우(Lwów)와 다른 동부 지역으로의 귀환, 그리고 제3차 세계 대전에서 서방 연합군이 소련을 물리칠 경우 실레시아(Silesia)로의 독일 귀환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후 시대의 속담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원자폭탄 하나만 있으면 우리는 다시 리비우(Lwów)로 돌아갈 것이다. 작지만 강력한 두 번째 폭탄이 있으면 빌뉴스(Wilno)로 돌아갈 것이다." ("Jedna bomba atomowa i wrócimy znów do Lwowa. Druga mała, ale silna i wrócimy znów do Wilna")[27][28] 전 독일 지역에 정착한 폴란드인들은 1970년대까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다(바르샤바의 무릎 꿇음(Kniefall von Warschau) 참조). 동부 정착민들은 하부 실레시아(Lower Silesia)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고, 그 결과 독일인들이 버리고 간 기계, 가정집, 농장을 돌보지 않았다. 1945년 루보미에르츠(Lubomierz)는 양호한 상태였지만, 그 후 몇 년 동안 포돌리아(Podolia) 코르트키우프(Chortkiv) 지역 출신 폴란드 정착민들이 이곳을 망가뜨려 폐허로 만들었다. 독일인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1959년 독일 자료에서는 하부 실레시아가 폴란드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적었다. 야기엘로니안 대학교(Jagiellonian University)의 사회학자인 지츠와프 마흐(Zdzisław Mach)는 폴란드인들이 서쪽으로 재정착하도록 강요받았을 때, 그들은 신성시 여기던 땅을 떠나 적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고 설명한다. 게다가 공산당 당국은 처음에는 정착민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이 지역의 미래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회복된 영토에 투자하지 않았다. 마흐(Mach)의 말처럼, 서폴란드 사람들은 수년 동안 동쪽으로 돌아갈 경우를 대비해 모든 소지품을 싸놓고 "여행 가방에 의지해" 살았다.[29]
4. 인구 구성
크레시(Kresy) 지역의 인구는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벨라루스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30] 전간기 공식 폴란드 통계에 따르면, 폴란드어 사용자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언어 집단을 형성했으며, 도시에서는 인구 규모 면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이었다. 다른 소수 민족으로는 리투아니아인과 카라이인(북부), 유대인(지역 전역의 도시와 마을에 산재), 체코인과 독일인(볼히니아와 동갈리시아), 아르메니아인과 헝가리인(리비우), 그리고 러시아인과 타타르인이 있었다.[30]
1931년 폴란드 인구 조사에 따르면, 1931년 각 보이보디십(voivodeship)의 모국어 비율은 다음과 같다.[31]
- 빌뉴 보이보디십(Wilno Voivodeship): 폴란드어 60%, 벨라루스어 23%, 이디시어 8%, 러시아어 3%, 기타(리투아니아어 포함) 8%
- 노보그루데크 보이보디십(Nowogródek Voivodeship): 폴란드어 53%, 벨라루스어 39%, 이디시어 7%, 러시아어 1%
- 폴레시에 보이보디십(Polesie Voivodeship): "기타" 또는 투테이시(Tutejszy)( 폴레시아어 및 기타 방언) 63%, 폴란드어 14%, 이디시어 10%, 벨라루스어 6%, 우크라이나어 5%
- 볼린 보이보디십(Wołyń Voivodeship): 우크라이나어 68%, 폴란드어 17%, 이디시어 10%, 독일어 2%, 러시아어 1%, 기타 2%
- 리비우 보이보디십(Lwów Voivodeship): 폴란드어 58%, 우크라이나어 34%, 이디시어 8%
- 타르누프 보이보디십(Tarnopol Voivodeship): 폴란드어 50%, 우크라이나어 45%, 이디시어 5%
- 스타니슬라우프 보이보디십(Stanisławów Voivodeship): 우크라이나어 69%, 폴란드어 23%, 이디시어 7%, 독일어 1%
구 동부 폴란드 지역의 폴란드인 외에도 소련과 발트 국가에도 대규모 폴란드인 공동체가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쿠르존 선(Curzon Line) 동쪽의 폴란드 인구는 구 동부 폴란드와 1939년 이전 소련의 수치를 합산하여 추정할 수 있다.

다음 표는 1931년 인구 조사에 따른 전간기 남동부 폴란드(오늘날 서부 우크라이나)의 군(county)별 언어(모국어) 및 종교 구조를 보여준다.
{| class="wikitable"
|+ 1931년 남동부 폴란드의 언어 및 종교 구조[38][39][40][41][42]
! 군(County) !! 인구 !! 폴란드어 !! % !! 이디시어 & 히브리어 !! % !! 우크라이나어 & 루테니아어 !! % !! 기타 언어 !! % !! 로마 가톨릭 !! % !! 유대교 !! % !! 우니아트 & 정교회 !! % !! 기타 종교 !! %
|-
| 두브노(Dubno) || 226709 || 33987 || 15.0% || 17430 || 7.7% || 158173 || 69.8% || 17119 || 7.6% || 27638 || 12.2% || 18227 || 8.0% || 173512 || 76.5% || 7332 || 3.2%
|-
| 호로키우(Horokhiv) || 122045 || 21100 || 17.3% || 9993 || 8.2% || 84224 || 69.0% || 6728 || 5.5% || 17675 || 14.5% || 10112 || 8.3% || 87333 || 71.6% || 6925 || 5.7%
|-
| 코스토필(Kostopil) || 159602 || 34951 || 21.9% || 10481 || 6.6% || 105346 || 66.0% || 8824 || 5.5% || 34450 || 21.6% || 10786 || 6.8% || 103912 || 65.1% || 10454 || 6.6%
|-
| 코벨(Kovel) || 255095 || 36720 || 14.4% || 26476 || 10.4% || 185240 || 72.6% || 6659 || 2.6% || 35191 || 13.8% || 26719 || 10.5% || 187717 || 73.6% || 5468 || 2.1%
|-
| 크레메네츠(Kremenets) || 243032 || 25758 || 10.6% || 18679 || 7.7% || 196000 || 80.6% || 2595 || 1.1% || 25082 || 10.3% || 18751 || 7.7% || 195233 || 80.3% || 3966 || 1.6%
|-
| 류봄리(Liuboml) || 85507 || 12150 || 14.2% || 6818 || 8.0% || 65906 || 77.1% || 633 || 0.7% || 10998 || 12.9% || 6861 || 8.0% || 65685 || 76.8% || 1963 || 2.3%
|-
| 루츠크(Lutsk) || 290805 || 56446 || 19.4% || 34142 || 11.7% || 172038 || 59.2% || 28179 || 9.7% || 55802 || 19.2% || 34354 || 11.8% || 177377 || 61.0% || 23272 || 8.0%
|-
| 리우네(Rivne) || 252787 || 36990 || 14.6% || 37484 || 14.8% || 160484 || 63.5% || 17829 || 7.1% || 36444 || 14.4% || 37713 || 14.9% || 166970 || 66.1% || 11660 || 4.6%
|-
| 사르니(Sarny) || 181284 || 30426 || 16.8% || 16019 || 8.8% || 129637 || 71.5% || 5202 || 2.9% || 28192 || 15.6% || 16088 || 8.9% || 132691 || 73.2% || 4313 || 2.4%
|-
| 볼린주 블라디미르(Volodymyr) || 150374 || 40286 || 26.8% || 17236 || 11.5% || 88174 || 58.6% || 4678 || 3.1% || 38483 || 25.6% || 17331 || 11.5% || 89641 || 59.6% || 4919 || 3.3%
|-
| 즈돌부니우(Zdolbuniv) || 118334 || 17826 || 15.1% || 10787 || 9.1% || 81650 || 69.0% || 8071 || 6.8% || 17901 || 15.1% || 10850 || 9.2% || 86948 || 73.5% || 2635 || 2.2%
|-
| 보르시초프(Borshchiv) || 103277 || 46153 || 44.7% || 4302 || 4.2% || 52612 || 50.9% || 210 || 0.2% || 28432 || 27.5% || 9353 || 9.1% || 65344 || 63.3% || 148 || 0.1%
|-
| 브로디(Brody) || 91248 || 32843 || 36.0% || 7640 || 8.4% || 50490 || 55.3% || 275 || 0.3% || 22521 || 24.7% || 10360 || 11.4% || 58009 || 63.6% || 358 || 0.4%
|-
| 베레자니(Berezhany) || 103824 || 48168 || 46.4% || 3716 || 3.6% || 51757 || 49.9% || 183 || 0.2% || 41962 || 40.4% || 7151 || 6.9% || 54611 || 52.6% || 100 || 0.1%
|-
| 부차치(Buchach) || 139062 || 60523 || 43.5% || 8059 || 5.8% || 70336 || 50.6% || 144 || 0.1% || 51311 || 36.9% || 10568 || 7.6% || 77023 || 55.4% || 160 || 0.1%
|-
| 호르트키우(Chortkiv) || 84008 || 36486 || 43.4% || 6474 || 7.7% || 40866 || 48.6% || 182 || 0.2% || 33080 || 39.4% || 7845 || 9.3% || 42828 || 51.0% || 255 || 0.3%
|-
| 카미안카-부즈카(Kamianka-Buzka) || 82111 || 41693 || 50.8% || 4737 || 5.8% || 35178 || 42.8% || 503 || 0.6% || 29828 || 36.3% || 6700 || 8.2% || 45113 || 54.9% || 470 || 0.6%
|-
| 코피친치(Kopychyntsi) || 88614 || 38158 || 43.1% || 5164 || 5.8% || 45196 || 51.0% || 96 || 0.1% || 31202 || 35.2% || 7291 || 8.2% || 50007 || 56.4% || 114 || 0.1%
|-
| 피드하이치(Pidhaitsi) || 95663 || 46710 || 48.8% || 3464 || 3.6% || 45031 || 47.1% || 458 || 0.5% || 38003 || 39.7% || 4786 || 5.0% || 52634 || 55.0% || 240 || 0.3%
|-
| 페레미실리아니(Peremyshliany) || 89908 || 52269 || 58.1% || 4445 || 4.9% || 32777 || 36.5% || 417 || 0.5% || 38475 || 42.8% || 6860 || 7.6% || 44002 || 48.9% || 571 || 0.6%
|-
| 라데히우(Radekhiv) || 69313 || 25427 || 36.7% || 3277 || 4.7% || 39970 || 57.7% || 639 || 0.9% || 17945 || 25.9% || 6934 || 10.0% || 42928 || 61.9% || 1506 || 2.2%
|-
| 스칼라트(Skalat) || 89215 || 60091 || 67.4% || 3654 || 4.1% || 25369 || 28.4% || 101 || 0.1% || 45631 || 51.1% || 8486 || 9.5% || 34798 || 39.0% || 300 || 0.3%
|-
| 테르노필(Ternopil) || 142220 || 93874 || 66.0% || 5836 || 4.1% || 42374 || 29.8% || 136 || 0.1% || 63286 || 44.5% || 17684 || 12.4% || 60979 || 42.9% || 271 || 0.2%
|-
| 테레보블리아(Terebovlia) || 84321 || 50178 || 59.5% || 3173 || 3.8% || 30868 || 36.6% || 102 || 0.1% || 38979 || 46.2% || 4845 || 5.7% || 40452 || 48.0% || 45 || 0.1%
|-
| 잘리시치키(Zalishchyky) || 72021 || 27549 || 38.3% || 3261 || 4.5% || 41147 || 57.1% || 64 || 0.1% || 17917 || 24.9% || 5965 || 8.3% || 48069 || 66.7% || 70 || 0.1%
|-
| 즈바라시(Zbarazh) || 65579 || 32740 || 49.9% || 3142 || 4.8% || 29609 || 45.2% || 88 || 0.1% || 24855 || 37.9% || 3997 || 6.1% || 36468 || 55.6% || 259 || 0.4%
|-
| 즈보리우(Zboriv) || 81413 || 39624 || 48.7% || 2522 || 3.1% || 39174 || 48.1% || 93 || 0.1% || 26239 || 32.2% || 5056 || 6.2% || 49925 || 61.3% || 193 || 0.2%
|-
| 리비우주 졸로치우(Zolochiv) || 118609 || 56628 || 47.7% || 6066 || 5.1% || 55381 || 46.7% || 534 || 0.5% || 36937 || 31.1% || 10236 || 8.6% || 70663 || 59.6% || 773 || 0.7%
|-
| 돌리나(Dolyna) || 118373 || 21158 || 17.9% || 9031 || 7.6% || 83880 || 70.9% || 4304 || 3.6% || 15630 || 13.2% || 10471 || 8.8% || 89811 || 75.9% || 2461 || 2.1%
|-
| 호로덴카(Horodenka) || 92894 || 27751 || 29.9% || 5031 || 5.4% || 59957 || 64.5% || 155 || 0.2% || 15519 || 16.7% || 7480 || 8.1% || 69789 || 75.1% || 106 || 0.1%
|-
| 우크라이나 칼루시(Kalush) || 102252 || 18637 || 18.2% || 5109 || 5.0% || 77506 || 75.8% || 1000 || 1.0% || 14418 || 14.1% || 6249 || 6.1% || 80750 || 79.0% || 835 || 0.8%
|-
| 콜롬이야(Kolomyia) || 176000 || 52006 || 29.5% || 11191 || 6.4% || 110533 || 62.8% || 2270 || 1.3% || 31925 || 18.1% || 20887 || 11.9% || 121376 || 69.0% || 1812 || 1.0%
|-
| 코시우(Kosiv) || 93952 || 6718 || 7.2% || 6730 || 7.2% || 79838 || 85.0% || 666 || 0.7% || 4976 || 5.3% || 7826 || 8.3% || 80903 || 86.1% || 247 || 0.3%
|-
| 나드비르나(Nadvírna) || 140702 || 16907 || 12.0% || 11020 || 7.8% || 112128 || 79.7% || 647 || 0.5% || 15214 || 10.8% || 11663 || 8.3% || 113116 || 80.4% || 709 || 0.5%
|-
| 로하틴(Rohatyn) || 127252 || 36152 || 28.4% || 6111 || 4.8% || 84875 || 66.7% || 114 || 0.1% || 27108 || 21.3% || 9466 || 7.4% || 90456 || 71.1% || 222 || 0.2%
|-
| 이바노-프랑키우스크(Stanyslaviv) || 198359 || 49032 || 24.7% || 26996 || 13.6% || 120214 || 60.6% || 2117 || 1.1% || 42519 || 21.4% || 29525 || 14.9% || 123959 || 62.5% || 2356 || 1.2%
|-
| 스트리이(Stryi) || 152631 || 25186 || 16.5% || 15413 || 10.1% || 106183 || 69.6% || 5849 || 3.8% || 23404 || 15.3% || 17115 || 11.2% || 108159 || 70.9% || 3953 || 2.6%
|-
| 스니아틴(Sniatyn) || 78025 || 17206 || 22.1% || 4341 || 5.6% || 56007 || 71.8% || 471 || 0.6% || 8659 || 11.1% || 7073 || 9.1% || 61797 || 79.2% || 496 || 0.
5. 크레시와 폴란드 문화
크레시(Kresy)는 폴란드의 역사와 문화, 특히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담 미츠키에비치와 같은 많은 저명한 폴란드 작가와 예술가들이 이 지역 출신이며, 크레시를 배경으로 하거나 영감을 받은 수많은 문학 및 예술 작품이 탄생했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크레시 관련 주제가 정치적인 이유로 억압받기도 했으나, 체제 전환 이후 다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재조명되면서 폴란드 문화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53]
5. 1. 폴란드 문화의 요람



폴란드 문학과 음악계의 저명한 인물 중 상당수가 크레시(Kresy)에서 태어났다. 예를 들어, 미콜라위 레이, 아담 미츠키에비치, 율리우스 스워바츠키, 카롤 시마노프스키, 체스와프 미워시 등이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동부 국경지대"는 폴란드 문학 정전(Literary canon)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미츠키에비치의 대표작 판 타데우시는 "오 리투아니아여, 나의 조국이여, 당신은 건강과 같도다..."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한다. 크레시를 배경으로 한 다른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나드 니엠놈, 모래시계 표지판 아래의 요양원, 불과 칼과 함께, 대초원의 불 등이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폴란드 시대에는 크레시 관련 주제가 엄격히 통제되었다. 교회 건축, 시골집, 저택 등 폴란드의 수백 년에 걸친 동부 유산과 볼린 폴란드인 학살과 같은 민감한 역사적 사건을 포함한 모든 크레시 관련 주제는 소비에트 연방의 선전 목적으로 출판이 금지되었다. 이는 해당 지역들이 소련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공식 문서에서는 동부 국경지대 출신 인물들을 소련 출신으로 기록했으며, 당시 크레시를 주제로 한 책이나 영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53]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예외는 있었는데, 실베스터 헨친스키 감독의 코미디 3부작 (1967년의 "사미 스보이", 1974년의 "니에 마 모츠니흐(Nie ma mocnych)", 1977년의 "코하이 알보 르주치(Kochaj albo rzuć)")은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의 국경선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실레시아로 이주한 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89년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후, 옛 크레시는 역사적 논쟁과 함께 폴란드 문화의 주요 주제로 다시 부상했다. 전쟁 전 시대의 원본 사진을 포함한 수많은 책과 앨범이 동부 국경지대에 대해 출판되었다.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로만 아프타나지의 "폴란드의 옛 동부 국경지대의 저택 역사(Dzieje rezydencji na dawnych kresach Rzeczypospolitej)" (1991–1997): 총 11권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저서는 과거 폴란드령 크레시와 인플란티(Inflanty) 지역에 있는 수많은 저택과 대저택의 문화 유산을 상세히 기록하고 설명한다.
- "헨리크 포드뎱스키의 사진으로 본 크레시(Kresy w fotografiach Henryka Poddębskiego)" (2010): 크레시 출신 인물인 안나 세니우크, 크제시미르 뎨브스키, 마체이 프와지인스키의 서문이 포함되어 있다.[54]
- "크레시의 세계(Świat Kresów)": 수많은 사진, 엽서, 지도를 담고 있다.[55]
- 안제이 바이다와 다니엘 올브리츠키와 함께 하는 "감상적인 여정. 크레시를 가로지르는 여행(Sentimental Journey. A Trip Across the Kresy)"[56]
- "크레시 백과사전(The Encyclopedia of Kresy)": 3600개의 항목을 포함하며, 크레시 출신의 또 다른 유명 인물인 스타니스와프 렘의 서문이 실려 있다.[57]
동부 국경지대에 대한 기사는 폴란드 신문과 잡지에도 자주 실린다. 브로츠와프의 "가제타 비보르차" 지방 사무소는 2010년 말 "크레시 가족 앨범(Kresy Family Album)" 연재를 시작하여, 동쪽에서 이주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소개했다. 2011년 상반기에는 일간지 "르제치포스폴리타"가 "동부 국경지대의 책(Księga kresów wschodnich)"이라는 연재를 게재했으며,[58] 2012년 7월호 우와잠 제 히스토리아 잡지는 동부 국경지대와 폴란드 역사 및 문화에서의 중요성을 특집으로 다루었다.[59]
6. 현대의 크레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인들에게 크레시(Kresy)로 알려진 영토는 현재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국가들 사이에 분할되어 있다. 이 지역에는 여전히 상당수의 폴란드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가장 큰 소수 민족(리투아니아의 폴란드인)이며, 벨라루스에서는 러시아인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소수 민족(벨라루스의 폴란드인)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공식적으로 14만 4130명이지만, 일부 폴란드 단체는 동화된 인구를 포함하여 실제로는 200만 명에 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60] (우크라이나의 폴란드인) 또한 라트비아에도 약 5만 명의 폴란드계 소수 민족이 있다(라트비아의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 우크라이나보다 폴란드인이 더 많이 거주하는 것은 1944년-1946년 폴란드 인구 이동[61]과 볼리니아와 동갈리치아의 폴란드인 학살의 영향이 크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폴란드인들은 이주 기회를 얻고자 했다.[19] 1945년부터 1960년 사이에 200만 명이 넘는 폴란드인들이 크레시를 떠났지만, 1960년 이후에도 약 100만~200만 명의 폴란드인들이 크레시(특히 리투아니아 SSR과 벨라루스 SSR 지역)에 남았다. 오늘날에도 폴란드인들은 그로드노와 빌뉴스 지역의 많은 곳에서 주민의 다수를 차지한다.
현재 옛 크레시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 폴란드인 협회, 리비우 지방 폴란드 문화 협회, 우크라이나 폴란드 단체 연맹, 벨라루스 폴란드인 연합, 리투아니아 폴란드인 협회 등 많은 폴란드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 단체는 폴란드 스포츠 클럽(포고니 리비우, FK 폴로니아 빌뉴스), 신문(가제타 리보브스카, 쿠리에르 빌렌스키), 라디오 방송국(리비우와 빌뉴스), 극장, 학교, 합창단, 민속 예술단 운영 등을 통해 폴란드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크레시에 거주하는 폴란드인들은 폴란드 정부 지원 단체인 동부 폴란드인 지원 재단과 동부 크레시 폴란드인 지원 협회 등 여러 단체의 도움을 받고 있다. 폴란드인 카드 발급을 통해 지원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폴란드에서는 크레시 거주 폴란드인들을 돕기 위한 자금 모금과 지원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크레시 폴란드 참전용사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폴란드 공동체 협회가 후원하는 "폴란드와 함께하는 여름"(크레시의 폴란드 어린이들을 폴란드로 초청하는 행사)과 같은 연례 행사[62]를 통해 지원 물품이 전달된다. 폴란드어 안내서, 영화, 의약품, 의류 등이 수집되어 크레시로 보내지며, 책은 주로 현지 폴란드 학교에 기증된다. 예를 들어 2010년 12월 브로츠와프 대학교는 "크레시 폴란드 어린이에게 책을 선물하는 폴란드 산타클로스가 되세요"라는 행사를 주최했다.[63]
폴란드의 자금 지원으로 크레시 지역의 폴란드 문화 유산 보존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리비우 수호자 묘지와 같은 폴란드 교회와 묘지가 개보수되고 있으며, 니사에서는 리비우 근처 Łopatyn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64] 올라바 주민들은 리비우 지역 Sasiv의 교회를 개보수하기 위해 자금을 모금했다.[65] 크라쿠프의 '희망의 의사' 단체 소속 의사들은 정기적으로 동부 국경지대를 방문하여 의료 지원을 제공하며, 폴란드 교육부는 구소련 지역에 폴란드 교사를 파견하는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2007년에는 700명 이상의 교사가 파견되었다.[66] 폴란드 TV 브로츠와프의 스튜디오 이스트는 "조상의 무덤을 망각에서 구하라"(Mogiłę pradziada ocal od zapomnienia) 행사를 통해 하부 실레시아 학생들이 서우크라이나를 방문하여 폴란드 묘지를 청소하도록 지원한다. 2011년 7월에는 약 150명의 학생이 리비우, 테르노필, 포돌리아, 포쿠티아 지역의 16개 묘지를 청소했다.[67]
6. 1. 현대 폴란드에서의 크레시

폴란드인들에게 크레시(Kresy)로 알려진 영토는 현재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사이에 분할되어 있으며, 이 지역에는 여전히 상당수의 폴란드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가장 큰 소수 민족(리투아니아의 폴란드인)이며, 벨라루스에서는 러시아인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소수 민족(벨라루스의 폴란드인)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공식적으로 14만 4130명이지만, 일부 폴란드 단체는 동화된 인구를 포함하여 실제로는 200만 명에 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60] (우크라이나의 폴란드인) 또한 라트비아에도 약 5만 명의 폴란드계 소수 민족이 있다(라트비아의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 우크라이나보다 폴란드인이 더 많이 거주하는 것은 1944년-1946년 폴란드 인구 이동[61]과 볼리니아와 동갈리치아의 폴란드인 학살의 결과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폴란드인들은 이주 기회를 얻고자 했다.[19]
현재 옛 크레시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 폴란드인 협회, 리비우 지방 폴란드 문화 협회, 우크라이나 폴란드 단체 연맹, 벨라루스 폴란드인 연합, 리투아니아 폴란드인 협회 등 많은 폴란드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폴란드 스포츠 클럽(포고니 리비우, FK 폴로니아 빌뉴스), 신문(가제타 리보브스카, 쿠리에르 빌렌스키), 라디오 방송국(리비우와 빌뉴스), 극장, 학교, 합창단, 민속 예술단 등 다양한 문화 활동도 이루어지고 있다. 크레시에 거주하는 폴란드인들은 정부 지원 단체인 동부 폴란드인 지원 재단과 동부 크레시 폴란드인 지원 협회 등 여러 단체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폴란드인 카드 발급 등을 통해 지원이 이루어진다. "크레시 폴란드 참전용사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폴란드 공동체 협회가 후원하는 "폴란드와 함께하는 여름"(크레시의 폴란드 어린이들을 폴란드로 초청하는 행사)과 같은 연례 행사[62]를 통해 자금이 모금되고 지원 물품이 전달된다. 폴란드어 안내서, 영화, 의약품, 의류 등이 수집되어 크레시로 보내지며, 책은 주로 현지 폴란드 학교에 기증된다. 예를 들어 2010년 12월 브로츠와프 대학교는 "크레시 폴란드 어린이에게 책을 선물하는 폴란드 산타클로스가 되세요"라는 행사를 주최했다.[63] 폴란드의 자금 지원으로 리비우 수호자 묘지와 같은 폴란드 교회와 묘지가 개보수되고 있다. 니사에서는 리비우 근처 Łopatyn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64] 올라바 주민들은 리비우 지역 Sasiv의 교회를 개보수하기 위해 자금을 모금했다.[65] 크라쿠프의 '희망의 의사' 단체 소속 의사들은 정기적으로 동부 국경지대를 방문하며, 폴란드 교육부는 구소련 지역에 폴란드 교사를 파견하는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2007년에는 700명 이상의 교사가 파견되었다.[66] 폴란드 TV 브로츠와프의 스튜디오 이스트는 "조상의 무덤을 망각에서 구하라"(Mogiłę pradziada ocal od zapomnieniapl) 행사를 통해 하부 실레시아 학생들이 서우크라이나를 방문하여 폴란드 묘지를 청소하도록 지원한다. 2011년 7월에는 약 150명의 학생이 리비우, 테르노필, 포돌리아, 포쿠티아 지역의 16개 묘지를 청소했다.[67]
전쟁과 민족 청소에도 불구하고, 빌뉴스의 브로블레프스키 도서관(현재 리투아니아 과학 아카데미 소속, 16만 권의 책과 3만 권의 필사본 소장)이나 리비우의 오솔리네움(가장 중요한 폴란드 문화 센터 중 하나)과 같은 많은 폴란드 문화 유산이 동부에 남아 있다. 오솔리네움의 경우, 1945년 이후 폴란드로 전체를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소련의 결정으로 일부(약 20만 권)만 브로츠와프로 이전되었다.[6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가 크레시 지역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레시 출신 폴란드인들과 그 후손들은 여전히 이 지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간직하고 있다. 서우크라이나 출신 폴란드인들은 주로 실레시아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브로츠와프와 글리비체는 '리비우와 관련된 도시'(miasta lwowskiepl)로, 슈체친, 그단스크, 올슈틴은 '빌뉴스와 관련된 도시'(miasta wileńskiepl)로 여겨진다.[69] 리비우의 오솔리네움 재단과 소장품은 현재 브로츠와프에 자리 잡고 있다. 리비우 출신 학자들은 옛 독일 브레슬라우 대학교를 기반으로 폴란드 브로츠와프 대학교를, 글리비체에 실레시아 공과대학교를 설립했다. 빌뉴스 출신 학자들은 토룬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대학교를 세웠다.
폴란드 내에는 크레시와 관련된 수많은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가장 큰 단체인 크레시 주민 세계 대회(Światowy Kongres Kresowianpl)는 비톰에 본부를 두고 폴란드 전역과 해외에 지부를 운영하며, 매년 야스나 고라 수도원에서 세계 대회와 순례를 개최한다.[70]
| 단체명 | 본부 위치 |
|---|---|
| 크제미에니에츠와 크제미에니에츠 지역 애호가 폴란드 협회(Polskie Towarzystwo Miłośników Miasta Krzemieńca i Ziemi Krzemienieckiejpl) | 포즈난 |
| 크레시 협회 "포드카미엔"(Stowarzyszenie Kresowe "Podkamień"pl) | 우우우프 |
| 오드라-니에멘 협회(Stowarzyszenie Odra-Niemenpl) | 브로츠와프 |
| 드로호비치 지역 친구 협회(Stowarzyszenie Przyjaciół Ziemi Drohobyckiejpl) | 레그니차 |
| 동부 국경 지대 오사드니크 가족 협회(Stowarzyszenie Rodzin Osadników Wojskowych i Cywilnych Kresów Wschodnichpl) | 바르샤바 |
| 크레시 문화 친구 협회(Towarzystwo Miłośników Kultury Kresowejpl) | 브로츠와프 |
| 볼린과 폴레시에 애호가 협회(Towarzystwo Miłośników Wołynia i Polesiapl) | 바르샤바 |
| 리비우와 남동부 크레시 애호가 협회(Towarzystwo Miłośników Lwowa i Kresów Południowo-Wschodnichpl) | 브로츠와프, 브제그, 비드고슈치, 비톰, 헬름, 그단스크, 옐레냐구라, 우로드츠크, 크라쿠프, 레슈노, 루블린, 포즈난, 슈체치네크, 스비드빈, 바르샤바, 벵글리니에츠, 자브제 (지부) |
| 그로드노와 빌뉴스 친구 협회(Towarzystwo Przyjaciół Grodna i Wilnapl) | 비아위스토크, 에우크, 그단스크, 기지츠코, 루블린, 우츠, 오스트롤렌카, 스타르가르트슈체친스키, 바르샤바, 벵고제보, 브로츠와프 (지부) |
| 시비라크 협회(Związek Sybirakowpl) | 바르샤바 (폴란드 전역 및 해외 지부) |

매년 마주리의 므롱구보에서는 폴란드 공화국 상원과 문화부 장관 등이 후원하는 크레시 문화 축제(Festiwal Kultury Kresowejpl)가 열린다. 이 축제는 TVP2와 TVP Polonia를 통해 방송되며, 크레시 지역의 다양한 폴란드 민속 예술단과 합창단이 참여한다. 2011년 제17회 축제에는 벨라루스(모지르, 민스크, 이비아네츠, 브레스트), 우크라이나(스타라 후타, 삼비르, 보리스라우, 스트랄히브치), 리투아니아(빌뉴스, 트라카이, 카우나스), 심지어 시베리아 아바칸의 폴란드 민속 단체까지 참가했다.[71]
| 행사명 | 개최지 |
|---|---|
| 크레시 주민의 날(Dzień Kresowiakapl) | 말보르크 근처 라기에브니키 |
| 크레시의 날(Dzień Kresowypl) | 브스호바 |
| 크레시 문화의 날(Dzień Kultury Kresowejpl) | 켄지에르진-코즐레, 비아위스토크, 브제그, 프로호비체 |
| 카지우키(Kaziuko mugėlt) | 그단스크[72], 올슈틴[73], 포즈난[74], 수왈키[75], 바르샤바[76] 등 (빌뉴스 출신 이주민 주도) |
| 크레시 폴로니아 어린이 축제(Kresowy Festiwal Polonijny Młodzieży Szkolnejpl) | 자무시 |
| 레그니차 크레시 문화의 날(Legnickie Dni Kultury Kresowejpl) | 레그니차, 루빈, 야부르, 호이누프 |
| 7월 크레시 축제(Lipcowy Festiwal Kresowypl) | 레이요베츠 |
| 국제 크레시 문화 축제(Międzynarodowy Festiwal Kultury Kresowejpl) | 야로스와프 |
| 동부 국경 지대와 부코비나 출신 폴란드인들의 문화 전시(Prezentacja Kultury Polaków z Kresów Wschodnich i Bukowinypl) | 젤로나구라, 슈프로타바, 노바솔, 코주후프, 자간 |
| 스비드니차 크레시와 리비우 문화의 날(Świdnicki Dzień Kultury Kresowej i Lwowapl) | 스비드니차 |
루바추프에는 크레시 박물관이 있으며, 브로츠와프에는 동부 국경 지대 박물관 건립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다.[77] 크레시의 풍경과 역사를 담은 사진 앨범과 서적이 매년 출판되고, 헬름에서는 크레시 자전거 마라톤이 열린다. 폴란드 라디오 비아위스토크, 카토비체, 제슈프 등 여러 방송국에서 크레시 관련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방송한다. 브로츠와프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희생자 추모 협회가 "국경 위에서"(Na Rubieżypl)라는 잡지를 발간한다. 현대 폴란드에서 크레시 운동가로 잘 알려진 인물로는 타데우시 이사코비츠-잘레스키 신부와 가수 파벨 쿠키즈의 아버지인 타데우시 쿠키즈 박사가 있다. 2007년부터 브로츠와프에서는 매년 동부 국경 지대 유산 훈장을 수여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헨리크 굴비노비츠 명예 대주교가 수상했다.[78] 매년 카틴 오토바이 습격(Motocyklowy Rajd Katyńskipl) 참가자들은 크레시의 폴란드 센터를 방문하여 현지 폴란드인들과 교류하고 지원 물품을 전달한다.[79]
2011년 브제그에서 열린 크레시 문화의 날 행사에서는 크레시 주제의 카바레, 서적 홍보, 음식 시연, 미사, 운동가 및 학자와의 만남, 연극 공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80]
2012년 여론조사 센터(CBOS)의 조사에 따르면, 폴란드 인구의 약 15%(430만~460만 명)가 자신이 크레시에서 태어났거나 부모 또는 조부모가 크레시 출신이라고 응답했다. 이러한 크레시와의 유대감은 특히 폴란드 서부와 북부 지역에서 강하게 나타나, 루부시 주 주민의 51%, 하부 실레시아 주 주민의 47%가 크레시 출신 가족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오폴레 주(30%), 서포메라니아 주(25%), 바르미아-마주리 주(18%) 등에서도 높은 비율을 보였다.[81] 이는 크레시가 현대 폴란드 사회와 정체성 형성에 여전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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