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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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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도시우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은 379년부터 457년까지 테오도시우스 1세, 아르카디우스, 테오도시우스 2세, 마르키아누스 황제 시기를 포함한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니케아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고, 서로마와 동로마를 모두 통치한 마지막 황제였다. 아르카디우스는 무능한 통치자로, 실권은 루피누스와 유트로피우스 등에게 돌아갔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건설하고, 사산 제국과 전쟁을 벌였으며,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옹립했다.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훈족 제국 몰락 이후 훈족의 옛 속국 부족들을 동로마 영토 내에 정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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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로마 제국
현지 명칭
일반 명칭비잔티움
국기 종류키 로
(비잔티움의 상징) 참고
상징 종류솔리두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의 이미지 (비잔티움의 상징) 참고
테오도시우스 1세 통치 시작 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 (서로마 제국은 주황색으로 표시)
테오도시우스 1세 통치 시작 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 (서로마 제국은 주황색으로 표시)
수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용어중세 그리스어, 라틴어
정부 형태군주제
역사
시작 사건테오도시우스 1세의 즉위
시작 날짜379년 1월 19일
종료 사건마르키아누스의 사망
종료 날짜457년 1월
정치
황제테오도시우스 1세 (379–395)
아르카디우스 (395–408)
테오도시우스 2세 (408–450)
마르키아누스 (450–457)

2. 테오도시우스 1세 (379년 ~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방 아우구스투스인 그라티아누스로부터 동로마 속주에 대한 통치를 부여받았다. 이는 그가 378년 전임자 발렌스로부터 제국 전체를 물려받았고, 양쪽을 모두 통치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라티아누스는 383년까지 서로마 제국을 계속 통치했다. 그라티아누스와 그의 후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한 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392년부터 395년까지 동부서부 로마 제국 양쪽을 모두 통치한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또한 니케아 기독교를 사실상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성문화한 일련의 칙령(테살로니카 칙령 참조)을 내린 것으로 기억된다.[1][2] 테오도시우스 1세로마의 베스타 여신의 제도를 해산하고, 고대 올림픽의 이교도 의식을 금지했으며,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과 같은 고대 헬레니즘 사원들의 파괴를 처벌하거나 막지 않았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로마 제국은 그의 두 아들 사이에서 다시 분할되었다. 형인 아르카디우스는 동방과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상속받았고, 호노리우스서방을 상속받았다. 제국은 다시는 재통합되지 않았지만, 제논을 시작으로 동로마 황제들은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의 사망 이후 명목상 통일된 칭호를 주장했다.

2. 1. 통일 로마 제국 황제 (392년 ~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방 아우구스투스인 그라티아누스로부터 동로마 속주에 대한 통치를 부여받았다. 이는 그가 378년 전임자 발렌스로부터 제국 전체를 물려받았고, 양쪽을 모두 통치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라티아누스는 383년까지 서로마 제국을 계속 통치했다. 그라티아누스와 그의 후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한 후, 테오도시우스는 392년부터 395년까지 동부서부 로마 제국 양쪽을 모두 통치한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또한 니케아 기독교를 사실상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성문화한 일련의 칙령(테살로니카 칙령 참조)을 내린 것으로 기억된다.[1][2] 테오도시우스는 로마의 베스타 여신의 제도를 해산하고, 고대 올림픽의 이교도 의식을 금지했으며,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과 같은 고대 헬레니즘 사원들의 파괴를 처벌하거나 막지 않았다.

395년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하면서 로마 제국은 그의 두 아들 사이에서 다시 분할되었다. 형인 아르카디우스는 동방과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상속받았고, 호노리우스서방을 상속받았다. 제국은 다시는 재통합되지 않았지만, 제논을 시작으로 동로마 황제들은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의 사망 이후 명목상 통일된 칭호를 주장했다.

3. 아르카디우스 (395년 ~ 408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5년에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 제국을 물려받았다. 아르카디우스는 무능한 통치자로, 정치 및 군사 문제보다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그 결과, 실권은 루피누스에게 돌아갔는데, 그는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배후 실력자인 반달족 출신 ''군사령관''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 루피누스는 395년에 스틸리코에 의해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아르카디우스는 환관 출신의 집정관 유트로피우스, 고트족 출신 장군 가이나스, 그의 아내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 프라이펙투스 안테미우스 등에게 휘둘렸다. 408년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한 후, 테오도시우스 2세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4. 테오도시우스 2세 (408년 ~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Flavius Theodosius, 408년 ~ 450년)는 아르카디우스의 아들로, 7세의 어린 나이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3] 초기에는 프라이펙투스 프라에토리오 안테미우스가 섭정을 맡아 통치했으며, 이 시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완공되었다.

414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누나 풀케리아가 ''아우구스타''로 선포되고 섭정이 되었다. 416년에 섭정은 끝났으나, 풀케리아는 계속해서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풀케리아의 영향으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20년대 초 사산 제국과 로마-사산 전쟁 (421-422)을 벌였으나, 훈족의 위협으로 인해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3] 이후 동로마 제국은 훈족에게 공물을 바쳐 평화를 유지하는 정책을 취했다.

423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사망하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지지하여 425년 서로마 황제로 옹립하였다. 또한 동서 로마 제국 간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를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약혼시켰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450년 낙마 사고로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풀케리아의 남편인 마르키아누스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4. 1. 풀케리아의 섭정 (414년 ~ 416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젊은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3] 408년 아버지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한 후 7세의 나이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프라이펙투스 프라에토리오 안테미우스가 섭정 역할을 했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완공되었다.[3]

테오도시우스의 누나 풀케리아는 ''아우구스타''로 선포되었고 414년에 섭정이 되었다. 416년에 섭정은 끝났지만, 풀케리아는 정부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4. 2. 사산 제국과의 전쟁 (421년 ~ 422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408년 아버지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한 후 7세의 나이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3] 프라이펙투스 프라에토리오 안테미우스는 섭정 역할을 했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완공되었다.

테오도시우스의 누나 풀케리아는 ''아우구스타''로 선포되었고 414년에 섭정이 되었다.[3] 416년에 테오도시우스가 직접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지만, 풀케리아는 정부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풀케리아의 영향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테오도시우스는 420년대 초 기독교 박해를 구실로 사산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421년~422년) 그러나 훈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해오면서 교착 상태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3] 훈족과의 전쟁은 보통 훈족의 약탈 이후 동로마 제국이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여 훈족이 로마와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4. 3. 서로마 제국과의 관계

테오도시우스 2세는 "젊은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3] 408년 아버지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한 후 7세의 나이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프라이펙투스 프라에토리오 안테미우스는 계속해서 섭정 역할을 했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완공되었다.

테오도시우스의 누나 풀케리아는 ''아우구스타''로 선포되었고 414년에 섭정이 되었다. 416년에 섭정이 끝나고 테오도시우스가 직접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지만, 풀케리아는 정부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다.[3] 풀케리아의 영향으로 테오도시우스는 로마-사산 전쟁 (421-422)에서 사산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3] 그러나 훈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해오면서 교착 상태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훈족과의 전쟁은 보통 훈족의 약탈 이후 동로마 제국이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여 훈족이 로마와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423년 서방의 호노리우스가 사망하자 테오도시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지지했고 결국 425년 서방 황제로 옹립했다. 동서 간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테오도시우스의 딸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는 발렌티니아누스와 약혼했다.

테오도시우스는 450년 낙마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의 누이 풀케리아의 남편인 마르키아누스가 동로마 제국의 황위를 계승했다.

5. 마르키아누스 (450년 ~ 457년)

마르키아누스(Flavius Marcianus, 450년 - 457년)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취한 많은 조치들, 특히 훈족과의 조약 및 종교 문제와 관련하여 되돌리려 했다. 마르키아누스 치하에서 동로마 제국의 아틸라에 대한 모든 조공 지급이 중단되었고, 아틸라는 이탈리아를 침공하는 데 바빴다. 마르키아누스는 다뉴브강을 건너 훈족의 본거지로 선제 원정을 시작하여 그들에게 상당한 승리를 거두었다. 마르키아누스의 행동은 이탈리아의 기근과 결합되어 아틸라가 헝가리 대평원으로 후퇴하도록 강요했고, 그곳에서 453년에 사망했다. 아틸라가 죽은 후,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의 제국이 몰락하는 틈을 타서 훈족의 옛 속국 부족들을 동로마 영토 내에 ''포에데라티''로 정착시켰다.

그는 레오 1세에게 계승되었고, 그는 레오 왕조의 첫 번째 황제였다.

5. 1. 훈족과의 전쟁

마르키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취한 많은 조치들, 특히 훈족과의 조약 및 종교 문제와 관련하여 되돌리려 했다. 마르키아누스 치하에서 동로마 제국의 아틸라에 대한 모든 조공 지급이 중단되었고, 아틸라는 이탈리아를 침공하는 데 바빴다. 마르키아누스는 다뉴브강을 건너 훈족의 본거지로 선제 원정을 시작하여 그들에게 상당한 승리를 거두었다. 마르키아누스의 행동은 이탈리아의 기근과 결합되어 아틸라가 헝가리 대평원으로 후퇴하도록 강요했고, 그곳에서 453년에 사망했다. 아틸라가 죽은 후,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의 제국이 몰락하는 틈을 타서 훈족의 옛 속국 부족들을 동로마 영토 내에 ''포에데라티''로 정착시켰다.

그는 레오 1세에게 계승되었고, 그는 레오 왕조의 첫 번째 황제였다.

5. 2. 훈족 제국 붕괴 이후

마르키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취한 많은 조치들, 특히 훈족과의 조약 및 종교 문제와 관련하여 되돌리려 했다. 마르키아누스 치하에서 동로마 제국의 아틸라에 대한 모든 조공 지급이 중단되었고, 아틸라는 이탈리아를 침공하는 데 바빴다. 마르키아누스는 다뉴브강을 건너 훈족의 본거지로 선제 원정을 시작하여 그들에게 상당한 승리를 거두었다. 마르키아누스의 행동은 이탈리아의 기근과 결합되어 아틸라가 헝가리 대평원으로 후퇴하도록 강요했고, 그곳에서 453년에 사망했다. 아틸라가 죽은 후,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의 제국이 몰락하는 틈을 타서 훈족의 옛 속국 부족들을 동로마 영토 내에 ''포에데라티''로 정착시켰다.

그는 레오 1세에게 계승되었고, 그는 레오 왕조의 첫 번째 황제였다.

참조

[1] 문서 Cf. decree, infra
[2] 문서 Edict of Thessalonica
[3] 서적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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