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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메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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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투메드부는 몽골의 부족으로, 몽골진, 몽골진 투메트, 투메트 몽골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13세기 초 칭기스 칸 시대에 투마트족은 칭기스 칸에게 정복되었으며, 이후 북원 시대에는 카치운의 후예인 도란 타이시가 이끄는 도론 투멘이 투메드부의 전신이 되었다. 다얀 칸 시대에는 우익 투메트 투멘으로 재편되었고, 알탄 칸은 명나라와 강화 조약을 맺고 순의왕의 칭호를 받았다. 이후 센게 두렌 칸, 남타이 세첸 칸 시대를 거쳐 린단 칸 시대에 몽골 재통일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청나라 시대에는 좌우익으로 나뉘어 청에 귀순하였고, 깃발과 작위가 존재했으며,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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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메드부
개요
집단 명칭튀메드
언어서부 튀메드: 서부 튀메드-오르도스 방언 (일부 진어 사용자)
동부 튀메드: 하르친 방언 (몽골어의 튀메드 하위 방언)
종교티베트 불교, 샤머니즘
관련 민족몽골족, 내몽골인
지리적 분포
국가중국, 몽골
지역내몽골
역사
관련 사건동부 튀메드 우익기의 크리스티 경매 (1907년)

2. 명칭

투메드부는 몽골진, 몽골진 투메트, 투메트 몽골진 등의 별칭으로도 불린다. 특히 '몽골진'(mongγolǰin|몽골진mn, "몽골과 닮았다"는 뜻)이라는 별칭이 붙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투메트 내 몽골진 집단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이라거나, 반대로 몽골진 내 투메트 집단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바오인데르리겐은 '투메트'(Tümed|투메드mn)라는 명칭이 '드론 투멘'(dörben tümen|되르벤 투멘mn, 네 개의 투멘)의 뒷부분 '투멘'이 복수형(-d)으로 남아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11]

3. 역사

투메드부는 몽골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부족 중 하나이다. 초기에는 13세기 칭기스 칸 시대에 바이칼호 동쪽의 투마트족으로 존재했으며, 이후 몽골 제국에 편입되었다.[12][13] 북원 시대에는 칭기스 칸의 동생 카치운의 후예인 도란 타이시가 이끌던 도론 투멘이 그 전신이며, 15세기 후반 만두울 칸에게 정복되었다.[14][15][16]

다얀 칸이 몽골을 재편성하면서 투메드부는 우익 3투멘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다란 테리그 전투 이후 다얀 칸의 아들 바르스 볼라트가 통치하게 되었다.[17][18] 다얀 칸 사후 바르스 볼라트가 잠시 칸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정통 후계자인 보디 알라크 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19][20]

16세기 중반, 바르스 볼라트의 아들 알탄 칸이 투메드부를 이끌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명나라와 강화를 맺고 "순의왕(順義王)" 칭호를 받았으며, 티베트 불교를 적극 수용하여 겔룩파의 소남 갸초에게 다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부여하는 등 몽골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21][22] 알탄 칸 사후 센게 두렌 칸과 남타이 세첸 칸 시대에도 티베트 불교와의 긴밀한 관계는 이어졌다.[23][24]

17세기 초, 차하르부의 린단 칸이 몽골 재통일을 시도하며 투메드부를 복속시켰으나, 만주에서 흥기한 후금(청나라)의 압박 속에 린단 칸은 실패했다.[25] 이후 투메드부는 후금(청)에 귀순하여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청나라의 통치 체제에 편입되었고, 청나라의 여러 군사 활동에 동원되었다. 일부 영역은 건륭 연간에 개간되어 조양현이 설치되었으며, 19세기 말에는 금단도 봉기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3. 1. 칭기스 칸 시대

13세기 초, 바이칼호 동쪽에는 코리, 코아라슈(투라스), 부랴트, 투마트의 네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르구트족으로 통칭되기도 했는데, '바르구트'라는 명칭은 셀렝게강 건너편에 위치한 그들의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지역은 타타르 부족들이 사는 동북쪽 경계 지대에 해당하여 "바르구진 토쿰"(바르구진 강의 경계라는 의미)이라고도 불렸다. 북쪽으로는 플라가친, 케렘친, 숲의 울리안기트 부족들이 이웃하고 있었다.[12]

키르기스족과 인접해 있던 투마트족은 호전적인 성향을 지닌 부족이었다. 1217년, 투마트족의 수장 타이토르 소칼은 몽골의 칭기스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동맹 관계를 파기하려 시도했다. 이에 칭기스칸은 보로울 노얀에게 투마트족을 정벌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 전투 과정에서 보로울 노얀이 전사하자, 칭기스칸은 그의 아들들에게 큰 보상을 내렸다. 투마트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칭기스칸은 이웃한 키르기스족에게도 출병을 요청했으나, 키르기스족이 이를 거부하자 아들 조치에게 명하여 키르기스족 역시 정복하게 했다.[13]

3. 2. 북원 시대

투메드부의 전신은 칭기스 칸의 동생 카치운의 후예인 도란 타이시가 이끌던 도론 투멘이다. 본래 넌 강 유역에서 유목하던 카치운 왕가는 에센 칸의 몽골 통일 이후 혼란기에 남쪽으로 이주했다. 도론 투멘에는 아무르 수계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웨지/오제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몽골진"(몽골과 비슷한 자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465년[14], 도란 타이시는 할라친부의 보라이 타이시와 손잡고 마르코르기스 우케크트 칸을 시해했으며, 오이라트의 오슈 테무르와 협력하여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1475년[15] 만두울 칸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만두울 칸은 "우케크트 칸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며 군대를 일으켜 도란 타이시를 죽이고 도론 투멘을 정복했다. 이 과정에서 만두울 칸은 도란 타이시의 측근이었던 투르겐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정복한 투메드를 그에게 맡겼다. 또한, 만두울 칸은 투르겐의 아들 호세이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고 "타브난"이라는 칭호를 주어, 투메드를 다스리는 투르겐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16].

3. 3. 다얀 칸 시대

다얀 칸에 의해 몽골이 재편성되면서, 투멘(만호대)이라고 불리는 6개의 대부족이 좌익과 우익으로 각각 3개씩 나뉘어 배치되었다. 이 중 우익에 속한 투메드 투멘은 몽골진이라고도 불렸으며, 칭기즈 칸 시대 이전부터 음산 산맥 일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의 옹구트 왕국의 후예로 여겨진다.[17]

처음에 다얀 칸의 셋째 아들인 바르스 볼라트 사인 아라크는 우익의 투메드부에 사위로 들어가 군 빌리크와 알탄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그의 형인 우르스 볼라트 진왕(지논)이 우익 영세부의 이브라힘(이바라이) 태사(타이시) 등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바르스 볼라트는 처자를 데리고 아버지 다얀 칸에게 피신했다. 1509년 가을 무렵, 다란 테리그 전투에서 다얀 칸은 좌익 연합군을 이끌고 우익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를 통해 다얀 칸은 아들 우르스 볼라트 진왕의 원수를 갚고 내란을 진압했다. 사건의 주모자였던 이브라힘 태사는 하미 지역에서 투메드부의 바얀마라트 다르한에게 살해되었다. 이 전투 이후, 다얀 칸은 바르스 볼라트 사인 아라크를 우익 삼투멘의 진왕으로 임명했다.[18]

3. 4. 다얀 칸 사후

1524년 다얀 칸이 사망하자, 그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보디 알라크 칸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바르스 보라트 사인 알라크 진왕이 우익 3투멘을 기반으로 스스로 칸위에 올랐다. 그러나 보디 알라크는 좌익 3투멘을 이끌고 바르스 보라트 사인 알라크 진왕에게 퇴위를 요구하여 결국 칸위에 올랐다.[19]

칸위에서 물러난 바르스 보라트 사인 알라크 진왕은 우익의 대부분을 자신의 영지로 삼았고, 그의 동생인 알르스 보라트 메르겐 황태자(홍타이지)는 7투메트를 영유하게 되었다.[20]

3. 5. 알탄 칸 시대

바르스 볼라트 사인 아라크 진왕이 1531년에 사망하자, 장남 귐 빌리크 메르겐 진왕이 오르도스부 투멘을 영유했고, 차남 알탄이 12투메트부를 영유했다.

우익 몽골의 귐 빌리크 메르겐 진왕과 알탄 형제는 매년 오이라트, 모굴리스탄, 칭하이의 유목민을 정벌하고 명나라를 침략하여 약탈을 반복했다. 1571년, 알탄은 융경제와 강화 조약을 맺고 "순의왕(順義王)" 칭호를 받았다. 1542년에 귐 빌리크 메르겐 진왕이 사망하자, 좌익 차하르부의 보디 아라크 칸은 알탄을 우익의 새로운 지도자로 인정하고 '토셰트 세첸 칸' 칭호를 수여하여 몽골에서 두 번째 칸으로 삼았다. 1578년, 알탄 칸은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고승 소남 갸초에게 "다라이 라마" 칭호를 수여했다.[21]

1582년, 알탄 칸이 사망하자 센게 두렌 테무르 황태자가 뒤를 이어 칸이 되었다.[22]

3. 6. 센게 두렌 칸 시대

1582년, 센게 두렌 칸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3세를 초청하여, 오르도스의 호토크타이 세첸 홍타이지와 함께 달라이 라마 3세로부터 가르침과 관정을 받았다. 1585년, 센게 두렌 칸과 쥰겐 하톤 등은 12 투메트의 크고 작은 노얀들을 이끌고 달라이 라마 3세를 맞이하여 하다이에서 회견했다. 같은 해, 센게 두렌 칸이 65세로 사망했으며, 이듬해인 1586년 장남 남타이 세첸 홍타이지가 칸의 자리에 올랐다.[23]

3. 7. 남타이 세첸 칸 시대

남타이 세첸 칸은 생전에 수많은 바라밀을 헌납하거나, 4대 달라이 라마와 회견을 하거나, 『간주르』의 몽골어 번역 등 티베트 불교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24]

3. 8. 투메트 칸 가문의 종말

1603년에 즉위한 차하르부의 린단 칸은 분열된 몽골을 다시 통일하고자 하였고, 이전까지 대등했던 다른 몽골 부족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만주에서는 여진족의 후금이 세력을 키워 할하부와 호르친부 등을 복속시키며 차하르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1628년, 린단 칸은 하라친부, 투메드부, 오르도스부를 굴복시킨 뒤 서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칭하이로 향하던 중 간쑤성 우웨이의 초원에서 병으로 사망했다.[25]

3. 9. 청나라 시대의 투메트 좌우익

후에 투메드부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함께 목축하며 살았다. 좌익은 칭기스 칸의 사준사구 중 한 명인 제르메(제라마)의 13대 후손인 샹바(선바)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하라친부와 가까운 관계였다. 우익은 칭기스 칸의 후예인 보르지긴 씨로, 칭기스 칸의 19대 후손인 엠부추후얼(악목포초흘)과 그의 아들 구무(고목)를 중심으로 귀화성의 투메트부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후금천총 3년(1629년), 좌익의 샹바와 우익의 엠부추후얼은 각기 부족을 이끌고 후금에 귀순했다. 천총 8년(1634년) 6월, 투메트부는 후금의 정벌에 참여했다. 7월에는 독석구를 통해 명나라 국경을 넘어 보안주에서 본대와 합류했으며, 이후 우네게(무눌격)의 지휘 아래 차하르부의 변경 지역을 공격했다. 이듬해인 1635년, 홍타이지는 투메트부를 좌령(스문)으로 편성하고 자사크 세 곳을 설치하여 각각 샹바, 겐게르(갱격이, 샹바의 일족), 엠부추후얼에게 맡겼다.

숭덕 2년(1637년), 겐게르가 죄를 지어 자사크 직위가 박탈되자 샹바가 그의 무리를 흡수했다. 이로써 투메트부는 샹바가 이끄는 좌익과 엠부추후얼이 이끄는 우익으로 나뉘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숭덕 6년(1641년), 투메트부는 금주 포위전에 참전하여 명나라 총독 홍승주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숭덕 8년(1643년)에는 봉명장군 아바타이(다라요여배륵)를 따라 명나라 정벌에 참여했다.

순치 원년(1644년), 산해관 전투에 참전하여 이자성의 군대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순치 3년(1646년)에는 수니트부의 반란 지도자 탄지스(등기사)를 토벌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강희 원년(1662년), 할하부의 타이치(태길) 바르부빈투(발이부빙도)가 청나라에 귀순하자, 강희제는 그를 투메트부에 소속시켜 함께 유목하도록 조치했다. 강희 13년(1674년), 경정충 등 역번(逆藩) 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강희제는 투메트부의 타브난(탑포낭) 샨다(선달)를 하라친부의 타브난 호지겔(곽제격이)과 함께 조정으로 파견하여 작전에 참여시켰다.

옹정 3년(1725년), 타브난 샤진다라이(사진달뢰)는 청나라 군대를 따라 준가르 방어전에 참여했다. 옹정 7년(1729년)에는 그 공으로 진국공(토셰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옹정 9년(1731년), 대장군 푸얼단이 준가르 군대에게 패배했을 때 샤진다라이가 진영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작위가 박탈되었다. 이후 투메트부는 참찬내대신 마란타이(마란태)의 지휘 아래 준가르 군대를 격파하고 전공을 세워 이전의 불명예를 씻었다.

건륭 41년(1776년), 청나라 조정은 투메트부의 일부 영역을 개간하여 조양현을 설치했다.

광서 17년(1891년), 아오한부에서 금단도(金丹道)의 봉기가 일어나자 투메트부 지역 역시 혼란을 겪었다.

4. 깃발과 작위

투메드부에는 좌익과 우익, 2개의 기가 있었다. 좌익은 하이타하산에 주둔했으며 좌령 80개를 관할했다. 우익은 바얀화슈에 주둔하며 저소토(탁삭도) 맹에 속했고, 좌령 90개를 관할하여 여러 기 중에서도 그 수가 특히 많았다.

작위는 다음 3개가 있었다.

작위명 (원어 표기)설명개수
자사크 도로 다르한 베일러 (扎薩克多羅達爾漢貝勒중국어)진국공(토셰군)에서 승격1개
부할하 베일러 (喀爾喀貝勒중국어)1개
자사크 고산 베이세 (扎薩克固山貝子중국어)1개


5. 구성 부족

12 투메드


  • 7 투메드(doluγud tümed|土悶mon)
  • 위구르진(uyiγurǰin|畏吾児mon)
  • 우싱 (üγüsin|兀甚mon)
  • 바야우트 (bayaγud|叭要mon)
  • 우루우트 (uruγud|兀魯mon)
  • 콩기라트 (qonggirad|甕吉剌mon)

6. 역대 수장

투메드부의 수장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해왔다. 초기 도론 투멘 시기에는 칭기스 칸의 동생 카치운의 후예인 도란 타이시가 이끌었으나, 1475년 만두울 칸에게 정복당한 이후에는 만두울 칸이 임명한 투르겐과 그의 아들 호사이가 통치했다. 이후 다얀 칸의 시대에는 그의 아들 바르스 볼라트가 우익 3투멘의 진왕으로서 투메드부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사후 차남인 알탄 칸이 투메드부를 직접 통솔하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칸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알탄 칸 이후 그의 후손들이 칸의 지위를 계승했다.

주요 역대 수장은 다음과 같다.

구분이름 (원어/한자 표기)재위 기간비고
도론 투멘 수장도란 타이시? ~ 1475년[15]카치운의 후예, 만두울 칸에게 피살
투메드부 수장 (만두울 칸 시기)투르겐 (탈라간)1475년 이후[16]만두울 칸이 임명
투메드부 수장 (만두울 칸 시기)호사이 (화시)?투르겐의 아들, 만두울 칸의 사위[16]
우익 진왕바르스 볼라트 사인 아라크? ~ 1531년다얀 칸의 셋째 아들, 우익 3투멘 진왕[18]
1대 투메트 칸알탄 (俺答)1531년? ~ 1582년[22]바르스 볼라트의 차남, 12투메트부 통솔, 순의왕, 토셰트 세첸 칸 칭호[21]
2대 투메트 칸센게 두렌 테무르 칸 (황태길)1582년 ~ 1586년[23]알탄 칸의 장자[22]
3대 투메트 칸남타이 세첸 칸 (추르게 칸)1586년 ~ 1607년[23]센게 두렌 테무르 칸의 장자
4대 투메트 칸보쇼크트 칸 (卜失兎)1607년 ~ 1628년남타이 세첸 칸의 손자


6. 1. 7 투메트 (도론 투메드)

투메드부의 전신은 칭기스 칸의 동생 카치운의 후예인 도란 타이시가 이끌던 도론 투멘이다. 본래 카치운 왕가는 대대로 넌 강 유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으나, 에센 칸의 몽골 통일 이후 그가 사망하면서 발생한 혼란 속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도론 투멘에는 아무르 수계에 거주하던 퉁구스계 민족(웨지/오제트)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을 가리켜 "몽골진"(몽골과 비슷한 자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도란 타이시는 1465년[14] 할라친부의 보라이 타이시와 손을 잡고 마르코르기스 우케크트 칸을 시해하였으며, 오이라트의 오슈 테무르와 협력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1475년[15], 만두울 칸이 칸의 자리에 오르자 "우케크트 칸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출진하여 도란 타이시를 살해하고 도론 투멘을 정복했다. 이 과정에서 만두울 칸은 도란 타이시의 측근 부하였던 투르겐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으며, 정복한 투메드는 투르겐에게 맡겨졌다. 또한 만두울 칸은 투르겐의 아들 호세이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고 "타브난"이라는 칭호를 내려주며, 투메드를 통치하게 된 투르겐 가문과의 관계를 강화했다[16].

6. 2. 몽골진

투메드부는 몽골진, 몽골진 투메트, 투메트 몽골진 등으로도 불린다. 투메트에 '몽골진'(몽골과 닮았다는 의미)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에 대해서는 투메트 내 몽골진 집단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이라거나, 반대로 몽골진 내 투메트 집단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바오인데르리겐은 투메트라는 명칭이 드론 투멘(다라토만)의 후반부가 복수형으로 남은 것이라고 주장한다.[11]

다얀 칸이 몽골을 재편성하면서 투멘(만호대)이라 불리는 6개의 대부족을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배치했다. 이 중 우익에 속한 투메트 투멘은 몽골진이라고도 불렸으며, 그 기원은 칭기즈 칸 시대 이전부터 음산 산맥 일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었던 옹구트 왕국의 후예로 여겨진다.[17]

처음에는 다얀 칸의 셋째 아들인 바르스 볼라트 사인 아라크가 우익 투메트부에 사위로 들어가 군 빌리크와 알탄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그의 형인 우르스 볼라트 진왕이 우익 영세부의 이브라힘 태사 등에게 살해당하자, 바르스 볼라트는 처자를 데리고 아버지 다얀 칸에게 피신했다. 1509년 가을, 다란 테리그 전투에서 다얀 칸은 좌익 연합군을 이끌고 우익 연합군을 격파하여 아들의 원수를 갚고 내란을 진압했다. 주모자인 이브라힘 태사는 하미에서 투메트부의 바얀마라트 다르한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 전투 후 다얀 칸은 바르스 볼라트 사인 아라크를 우익 삼투멘의 진왕으로 임명했다.[18] 1531년 바르스 볼라트 사인 아라크 진왕이 사망하자, 장남 군 빌리크가 진왕 자리를 이어받아 오르도스부 투멘을 다스렸고, 차남 알탄은 12투메트부를 통솔하게 되었다.

우익의 군 빌리크 메르겐 진왕과 알탄 형제는 세력을 확장하여 매년 오이라트, 모굴리스탄, 칭하이의 유목민을 정벌하고 명나라를 침략하여 약탈을 벌였다. 1571년, 알탄은 명나라 융경제와 강화 조약을 맺고 '순의왕' 칭호를 받았다. 1542년 군 빌리크 메르겐 진왕이 사망하자, 좌익 차하르부의 보디 아라크 칸은 알탄을 우익의 새로운 지도자로 인정하고 토셰트 세첸 칸 칭호를 수여하여 몽골 내에서 두 번째 칸의 지위를 부여했다. 1578년, 알탄 칸은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고승 소남 갸초에게 '다라이 라마' 칭호를 수여하며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다.[21]

1582년 알탄 칸이 사망한 후에는 센게 두렌 테무르 황태자가 칸의 자리를 계승했다.[22]

순서이름 (원어/한자 표기)
1몽케베이
2?
3투르겐 (탈라간)
4호사이 (화시)
5바르스 보라트
6알탄 (아르탄)


6. 3. 투메트 칸

1582년, 센게 두렌 한은 티베트의 다라이 라마 3세를 초청하여, 오르도스의 호토크타이 세첸 홍타이지와 함께 다라이 라마 3세로부터 가르침과 관정을 받았다. 1585년, 센게 두렌 한과 쥰겐 하톤 등은 12 투메트의 노얀들을 이끌고 다라이 라마 3세를 맞이하여 하다이에서 회견했다. 같은 해, 센게 두렌 한이 65세로 사망했으며, 이듬해인 1586년 장남 남타이 세첸 홍타이지가 칸의 자리에 올랐다.[23]

대수이름 (한자 / 별칭)재위 기간비고
1대알탄 칸 (俺答)1551년 ~ 1582년
2대센게 두렌 테무르 칸 (황태길)1582년 ~ 1586년알탄 칸의 장자
3대남타이 세첸 칸 (추르게 칸)1586년 ~ 1607년센게 두렌 한의 장자
4대보쇼크트 칸 (卜失兎)1607년 ~ 1628년남타이 세첸 칸의 손자, 조토(召兎)의 장자


참조

[1] 웹사이트 Eastern Tumed Right Banner https://onlineonly.c[...] 1907
[2] 서적 History of Mongolia, Volume II 2003
[3] 문서 Huhehaote 2000
[4] 문서 Tumote 1987
[5] 서적 Chinese society : change, conflict and resistanc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0
[6] 서적 蒙古源流 刀水書房 2004
[7] 서적 モンゴルの歴史 遊牧民の誕生からモンゴル国まで 刀水書房 2002
[8] 서적 モンゴル帝国史1 平凡社 1989
[9] 서적 알탄・ハーン伝訳注 風間書房 1998
[10] 서적 モンゴル秘史3 チンギス・カン物語 平凡社 1976
[11] 문서 吉田1998,p244 - 245
[12] 문서 佐口 1968,p9-10
[13] 문서 佐口 1968,p134
[14] 문서 '『蒙古源流』では即位翌年の癸酉の年(1453年)と誤っている'
[15] 문서 '『蒙古源流』では癸未の年(1463年)と誤っている'
[16] 문서 Buyandelger1997,177-197頁
[17] 문서 宮脇2002、p149-151
[18] 문서 宮脇2002,p152-153、岡田2004,p227-236
[19] 문서 宮脇2002,p153
[20] 문서 岡田2004,p248
[21] 문서 宮脇2002,p153-155
[22] 문서 吉田1998,p514
[23] 문서 吉田1998,p514-515
[24] 문서 吉田1998,p516-517
[25] 문서 宮脇2002,p174-177
[26] 문서 '『清史稿』 藩部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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