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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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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퀸크티우스 가문 출신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군사 호민관으로 복무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기원전 198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아오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퀴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를 격파하여 그리스의 해방을 선언했다. 이후 감찰관을 역임하고 한니발을 추적하는 등 활동을 펼쳤으며, 기원전 174년경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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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의 금 [[스타테르]] 주화 (기원전 197/196년 또는 191년경), [[영국 박물관]] 소장.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의 금 스타테르 주화 (기원전 197/196년 또는 191년경), 영국 박물관 소장.
이름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로마자 표기Titus Quinctius Flamininus
출생기원전 229년경
사망기원전 174년
국적로마
직업정치가, 군인
경력
트리부누스 밀리툼기원전 208년
프로프라이토르기원전 205년 - 204년
공공 토지 분배 10인 위원기원전 201년
베누시아 정착 3인 위원기원전 200년
콰이스토르기원전 199년?
집정관기원전 198년
전직 집정관기원전 197년 - 194년
레가투스기원전 192년, 191년, 183년
감찰관기원전 189년
라케다이몬 (스파르타) 사절단 청취 위원기원전 183년
군사 경력
참전 전투키노스케팔라이 전투 (기원전 197년)
주요 전쟁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나비스 전쟁
수상개선식 (기원전 194년)

2. 가문 배경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파트리키(전통 귀족) 가문인 퀸크티우스 씨족 출신이었다. 퀸크티우스 씨족은 로마 공화국 초기에 전설적인 영웅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를 배출하며 명성을 떨쳤으나, 기원전 4세기 중반 이후로는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어 로마의 주요 가문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주류에 속하게 되었다. 플라미니누스의 증조부인 케소 퀸크티우스 클라우두스가 기원전 271년 집정관을 지낸 것이, 기원전 209년 이전까지 퀸크티우스 가문 사람이 고위 정무관(큐룰 직책)에 오른 마지막 기록이었다.[2]

그의 할아버지 루키우스 퀸크티우스는 기원전 3세기 중후반에 유피테르 신의 대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를 역임했다. 플라미니누스 가문의 코그노멘(별칭)인 '플라미니누스'는 바로 이 사제직(플라멘)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후일 플라미니누스의 증손자는 자신이 발행한 데나리우스 은화에 플라멘의 모자인 아펙스를 가문의 상징으로 새겨 넣기도 했다. 플라미니누스의 아버지 역시 이름이 티투스였다고 전해지나, 그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버지 티투스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기원전 228년경 태어난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본인이고, 차남은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이다.

기원전 3세기 말, 퀸크티우스 가문은 다시 정치적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보였다. 플라미니누스의 삼촌인 케소는 기원전 217년 콘코르디아 신전을 건설했으며,[3][4] 동생 루키우스는 기원전 213년 어린 나이에 아우구르(조점관)가 되었다.[5] 또한 먼 친척인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는 기원전 208년에 집정관을 지냈다.

퀸크티우스 가문은 로마 공화국의 유력 가문 중 하나인 파비우스 씨족과 오랜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퀸크티우스 가문에서 사용된 드문 프라에노멘(개인 이름)인 케소는 파비우스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전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플라미니누스 자신도 파비우스 가문 여성과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플라미니누스를 따라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퀸투스 파비우스 부테오가 플라미니누스 아내의 조카라고 기록했다. 부테오 가문은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가 기원전 216년부터 210년까지 원로원 의장(프린켑스 세나투스)을 지내면서 당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유명한 쿤크타토르가 원로원 의장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퀸크티우스 씨족의 코그노멘 중 일부가 특정한 머리 모양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플라미니누스라는 코그노멘은 앞서 언급된 것처럼 기원전 3세기경 플라멘 디알리스였던 조상에게서 유래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플라미니누스 가문과 또 다른 퀸크티우스 씨족 분파인 크리스피누스 가문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때는 플라멘 디알리스였던 조상의 두 아들에게서 두 가문이 갈라져 나왔고, 따라서 기원전 208년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플라미니누스의 사촌뻘이라는 견해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100년 이상 전에 이미 분가했으며 크리스피누스는 먼 친척 관계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기원전 192년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일반적으로 티투스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형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요약하자면, 퀸크티우스 가문은 기원전 271년 집정관을 배출한 기록이 있고, 유력 가문인 파비우스 씨족과의 연줄, 플라미니누스의 동생이 젊은 나이에 아우구르가 된 점 등을 고려할 때, 비록 로마 정치의 중심에서는 다소 밀려나 있었지만 파트리키로서의 명맥과 일정 수준의 사회적 지위는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초기 경력

귀족 가문인 퀸크티아 씨족의 일원으로, 루시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의 형제이다.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동안 천부장으로 복무했으며, 기원전 205년에는 타렌툼에서 프라이토르(법무관)에 준하는 권한으로 활동했다. 이후 기원전 203년 로마에서 조영관을 지냈고, 기원전 199년에는 콰이스토르(재무관)가 되었다.

집정관이 되기 위한 법적 연령(보통 30세)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198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당시 호민관이었던 마르쿠스 풀비오스와 마누우스 쿠리우스는 그가 콰이스토르 경력밖에 없다는 이유로 집정관 후보 자격에 공공연히 반대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러한 반대를 무시하고 그를 섹스투스 아엘리우스 파에투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집정관이 된 플라미니누스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지휘권을 넘겨받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대신하게 되었다.[41] 그는 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를 일부 요새를 제외한 그리스 대부분 지역에서 몰아냈으며, 아오우스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집정관 임기가 끝나갈 무렵, 마케도니아 왕과 평화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3. 1. 군사 호민관 (기원전 208년)

플라미니누스의 초기 경력은 쿠르수스 호노룸의 여러 단계를 건너뛰는 등 다소 특이한 면이 있었다.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라는 격동기에 많은 인물들이 예외적인 경력을 쌓았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그의 공식적인 경력은 기원전 208년 군사 호민관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비교적 하급 군사 직책이었다.[6] 당시 그는 약 20세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이었기에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 경력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플라미니누스는 다섯 번이나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휘하에서 복무했다.[7] 마르켈루스는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같은 해(기원전 208년) 크로토네 인근에서 카르타고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3. 2. 타렌툼의 프로프라에토르 (기원전 205년-202년)

플라미니누스는 기원전 205년에 프로프라에토르(전직 법무관)의 권한으로 타렌툼에 부임했다. 그가 부임하기 전 타렌툼을 관리하던 인물은 그의 삼촌으로 추정되는 퀸크티우스 클라우두스 플라미니누스(혹은 퀸투스 클라우디우스 플라멘)였는데[8], 그는 로마 수비대를 지휘하는 프로프라에토르였다. 로마는 이전에 한니발에게 넘어갔던 전력이 있는 그리스 도시 타렌툼을 강력한 군사 거점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삼촌이 기원전 205년 타렌툼에서 사망하자, 이미 그곳에 파견되어 있던 플라미니누스가 그의 임페리움(지휘권)을 승계한 것으로 보인다.[8][9][10] 25세가 되기 전에 프로프라에토르 직책을 맡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성취였으나, 제2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숙련된 지휘관들이 대부분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상황으로 설명될 수 있다.[8]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라미니누스의 임기는 기원전 204년에 연장되었으며, 이후 기록은 명확하지 않으나 기원전 202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타렌툼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8][9][10]

플라미니누스는 타렌툼에 머무는 동안 현지 그리스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11],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에 익숙해지는 기회를 가졌다.[11]

3. 3. 위원회 활동 (기원전 201년-200년)

기원전 201년, 플라미니누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던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10인 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35] 이 위원회는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프라에토르 우르바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펜누스가 임명했으며, 사무니움과 아풀리아의 아게르 푸블리쿠스 (공유지)를 측량하고 분배하는 임무를 맡았다.[35] 플라미니누스가 위원으로 선출된 데에는 과거 타렌툼에서 지휘했던 경험 덕분에 이 지역 사정에 밝았던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12][13] 이 위원회에는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같은 전직 집정관들과 그 해의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아엘리우스 파에투스 등 유력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 해인 기원전 200년에도 10인 위원회 활동은 계속되었는데,[14] 플라미니누스는 이에 더해 베누시아에 정착할 사람들을 모집하는 3인 위원회의 위원으로도 임명되었다.[14][15] 이는 로마 역사상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개의 위원회 위원을 맡은 유일한 사례로 기록된다.[16] 플루타르코스는 플라미니누스가 이들 식민 도시들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정치적 경력에 도움을 받으려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4. 집정관 및 그리스에서의 지휘 (기원전 198년-194년)

기원전 198년, 섹스투스 아엘리우스 파에투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된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의 지지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지휘권을 맡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대신하게 되었다.[41] 그의 동생 루키우스는 레가투스(부관)로 함대를 지휘했다. 플라미니누스는 에페이로스에서 아오우스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아이톨리아 동맹아카이아 동맹을 로마 편으로 끌어들였다. 겨울 동안 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와 니카이아에서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기원전 197년, 프로콘술로서 지휘권을 유지한 플라미니누스는 테살리아의 퀴노스케팔라이에서 필리포스 5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필리포스 5세는 그리스 도시들을 포기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전쟁이 끝난 후 기원전 196년, 플라미니누스는 코린토스의 이스토미아 경기에서 그리스 도시들의 자유와 자치를 선언하여 그리스인들로부터 '해방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기원전 194년 로마로 귀환하기 전까지 그리스의 전후 처리와 질서 재편을 감독했다.

4. 1. 집정관 선출 (기원전 199년)

기원전 199년에 플라미니누스는 30세도 되지 않은 나이로 집정관에 출마했다. 당시에는 아직 ''쿠르수스 호노룸''(명예로운 경력)이 공식적으로 정립되지 않았지만, 그의 출마는 관례를 깨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는 기원전 205년에 31세의 나이로 집정관에 선출된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보다도 어렸다.[17] 스키피오는 인상적인 군사적 업적과 명망 높은 가문의 지원을 받았지만, 플라미니누스는 비교적 덜 알려진 가문 출신이었고 한니발 전쟁 중 특별히 내세울 만한 공적도 없었다.

최소한 두 명의 호민관, 마르쿠스 풀비우스(Marcus Fulvius)와 마니우스 쿠리우스(Manius Curius)는 플라미니누스가 너무 어리고, 콰이스토르(재무관) 직책만 거쳤을 뿐 안찰관이나 법무관 직을 맡은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집정관 출마 자격을 문제 삼으며 공개적으로 반대했다.[17][18] 그러나 원로원은 이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해 플라미니누스가 선거에 나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이례적인 상황 때문에 현대 역사가들은 플라미니누스가 당시 강력한 정치 세력의 지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초기 인명 연구 학자인 프리드리히 뮌처와 하워드 헤이즈 스컬라드는 그가 파비우스 가문이 이끄는 정치 파벌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파비우스 부테오와 쿤크타토르 사후 파비우스 가문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결국 플라미니누스는 평민 출신의 섹스투스 엘리우스 파에투스 카투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는데, '후임 집정관'(consul posteriorla)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켄투리아회에서 엘리우스를 먼저 선출하고 그 다음으로 플라미니누스를 선출했음을 의미한다.[19][20] 플루타르코스는 플라미니누스가 이전에 토지 분배 위원회 활동을 통해 정착민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이들이 그에게 표를 던져 당선될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21] 함께 선출된 엘리우스 역시 특별한 군사적 업적은 없었으나, 전년도 아이딜 직을 수행하며 아프리카에서 많은 곡물을 수입하여 인기를 얻은 덕분에 선출될 수 있었다.[22][23]

두 집정관은 담당할 속주(프로빈키아)를 배정하는 과정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해 제비뽑기를 통해 결정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에 맞서 진행 중이던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지휘권을 인수하는 것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플라미니누스에게 유리하도록 제비뽑기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지만[24], 명확한 증거는 없으며 단순히 운이 좋았을 가능성도 있다. 조작된 제비뽑기의 명확한 사례는 훨씬 후대에 나타난다.[24] 제비뽑기 결과, 플라미니누스는 마케도니아를 담당하게 되어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지휘권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로부터 넘겨받게 되었다.[41] 그의 동생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레가투스(부관)로서 그리스 해역의 함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그리스 문화에 정통한 그에게 의도적으로 마케도니아 담당이 주어졌다고 보기도 하지만, 부족한 경력과 출마 반대 등을 고려하면 단순히 운이 좋았거나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4. 2. 기원전 198년의 군사 작전

기원전 198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섹스투스 아엘리우스 파에투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법적으로 요구되는 나이보다 젊었고 콰이스토르 직을 막 마쳤기에, 마르쿠스 풀비오스와 마누우스 쿠리우스 두 호민관이 그의 입후보에 반대했으나,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집정관이 된 플라미니누스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대신하게 되었다.[41] 당시 전쟁은 3년째에 접어들었으나, 이전 지휘관들은 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를 상대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플라미니누스가 마케도니아 전선을 맡게 된 것에 대해, 그의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당시 큰 실적이 없었고 집정관 입후보조차 반대에 부딪혔던 점을 고려하면, 개인적인 야심과 운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플라미니누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휘하의 베테랑 병사들 중에서 정예병을 선발하여 에페이로스로 건너가, 아오우스 강(현재 아오스 강) 협곡에서 필리포스 5세의 군대와 대치하던 로마 군단과 합류했다. 한 달 이상 마케도니아군의 견고한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어려움을 겪자, 에페이로스의 중재로 필리포스 5세와 협상을 시도했다. 플라미니누스는 테살리아의 해방을 요구했으나, 150년간 마케도니아의 지배 하에 있던 테살리아의 포기를 필리포스 5세가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시켈리아의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전 그리스의 해방"을 지시했다고 하나, 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플라미니누스가 군단 내 회의(콘실리움)를 통해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협상 결렬 후 정면 공격이 실패하자, 플라미니누스는 에페이로스 유력자의 도움으로 얻은 현지 길 안내인을 통해 마케도니아 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아오스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승리를 계기로 아이톨리아 동맹이 로마 측에 가담했다. 플라미니누스는 필리포스 5세를 직접 추격하는 대신, 기존에 마케도니아 측이었던 에페이로스와의 관계를 다지고 테살리아로 진군했다. 그는 몇몇 도시를 함락시켰으나, 약탈을 금지한 정책 때문에 보급에 어려움을 겪으며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보급 문제로 인해 갈바가 구상했던 마케도니아 본토 직접 침공 계획(후의 에그나티아 가도 루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이동했지만, 여전히 보급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테살리아가 마케도니아군에게 약탈당하고 아타마니아와 아이톨리아를 통한 보급도 원활하지 않자, 플라미니누스는 테르모필레를 거쳐 남하했다. 포키스의 안티키라를 점령하여 해군 기지 및 보급 항구로 삼고 월동 준비에 들어갔다.[26] 이때 아카이아 동맹의 지도부가 친로마 성향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플라미니누스는 코린토스를 공격 중이던 동생 루키우스를 로도스, 페르가몬 사절단과 함께 아카이아 동맹 회의에 파견했고, 근소한 차이로 아카이아 동맹의 로마측 합류가 결정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플라미니누스의 관대한 태도가 그리스 도시들의 지지를 얻었다고 평가했지만, 리비우스는 로마 군대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플라미니누스는 테살리아의 요새들을 공격할 때 가혹한 모습을 보였으며, 아카이아 동맹 역시 이전 로마 지휘관 갈바의 약탈 행위 등으로 인해 로마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플라미니누스 역시 초기에는 미움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아카이아 동맹의 합류 결정 과정에서 듀메, 메갈로폴리스, 아르고스 등 일부 도시가 동맹을 탈퇴하기도 했다. 아카이아 동맹은 본래 친마케도니아 성향이었기에, 로마의 요구를 거절했을 경우의 보복을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크다. 플라미니누스는 아카이아 동맹이 코린토스 공략에 협력해주기를 기대했으나, 코린토스 함락에는 실패했다.

포키스와 로크리스에서 겨울을 보내던 중, 옵투스 시를 마케도니아군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그곳에서 필리포스 5세의 사절을 만나 니카이아에서 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회담에는 플라미니누스와 그리스 동맹 대표들이 참석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을 불신한 필리포스 5세는 배 위에서 회담에 임했으며, 로마 측은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 마케도니아군의 그리스 완전 철수
  • 로마군 포로 및 탈영병 반환
  •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결과(포에니케 조약)로 획득한 일리리아 영토 할양
  •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서 빼앗은 도시들의 반환


다음 날, 필리포스 5세는 플라미니누스와의 개별 회담을 요청하여 로마의 요구는 수용할 의사가 있으나 그리스 동맹국들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그리스 대표들이 반발하자, 필리포스 5세는 로마에서 논의를 이어갈 것을 제안했고, 플라미니누스는 이를 수락했다. 군사 활동이 어려운 겨울철이었기에 2개월간의 휴전이 선포되었고, 플라미니누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사절단과 함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기원전 195년 법무관), 퀸투스 파비우스 부테오(기원전 196년 법무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등을 로마로 파견했다. 필리포스 5세는 로마의 환심을 사기 위해 포키스와 로크리스에서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원로원은 그리스로부터의 완전 철수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이 해의 군사적, 외교적 활동을 통해 로마는 그리스 국가들을 대표하여 협상하는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기원전 198년의 성과에 대해, 플라미니누스의 군사적, 외교적 수완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있지만, 그의 주된 목표는 군사적 승리였으며 외교적 성공은 상황에 따른 결과일 뿐 이전 지휘관 갈바의 방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4. 3. 퀴노스케팔라이 전투 (기원전 197년)

기원전 197년, 원로원은 후임자를 파견할 때까지 임페리움을 유지하는 프로콘술(전 집정관) 자격으로 플라미니누스가 전쟁을 계속하도록 결정했다. 그의 동생 루키우스 외에 갈바와 타풀루스가 레가투스(부관)로 임명되었다.[41][25]

플라미니누스는 테살리아의 퀴노스케팔라이에서 필리포스 5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과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다. 폴리비오스는 플라미니누스가 전투 전에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하며 사기를 북돋았다고 기록했다.

「저 마케도니아 군대는 술피키우스 휘하에서 에피루스에서 여러분의 공격을 받고 도망쳐 돌아간 자들이 아니오. 그들과 싸우는 데 주저할 이유가 있는가,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가, 오히려 자신감이 솟아날 것이오. 우리 병사들이여, 서로 격려하며 전진하고 힘을 다하시오! 이것이 신들의 뜻이라면, 이 싸움도 지금까지와 같은 결과가 있을 것이오.」 (폴리비오스, 『역사』 18.23.3-6)


전투 결과, 로마의 군단은 팔랑크스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로마의 레기온이 그리스의 팔랑크스보다 우수함을 증명했다.[25]

패배한 필리포스 5세는 로마에 항복했고,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25]

  • 그가 정복했던 모든 그리스 도시들을 포기한다.
  • 로마에 배상금으로 1,000 탈렌트를 지불한다.
  • 마케도니아 왕국은 그리스일리리아 사이의 완충 국가 역할을 하도록 유지된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완전한 해체를 원했던 로마의 그리스 동맹, 특히 아카이아 동맹은 필리포스 5세의 왕국이 존속하게 된 것에 불만을 표했다.[25]

4. 4. 그리스 해방 선언 (기원전 196년)

티투스의 모습이 새겨진 금화


장-피에르 생-투르의 그림, '이스토미아 경기에서 그리스의 해방을 선언하는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1780년)


기원전 196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코린토스에서 열린 이스토미아 경기에 참석하여 마케도니아로부터 그리스의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선언은 그리스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그리스 도시들은 플라미니누스를 해방자로 여기며 그를 기리는 축제를 열었고, 일부 도시에서는 그에게 왕과 같은 예우를 표하며 그의 옆모습을 새긴 주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4. 5. 로마-스파르타 전쟁 (기원전 1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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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외교 (기원전 192년-191년)

아탈로스 왕조의 에우메네스 2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의 침략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자, 로마는 이에 응하여 기원전 192년 티투스를 다시 동방으로 파견했다. 티투스는 안티오코스 3세에게 그리스에 더 이상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동방의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며 스스로 '대왕'이라 칭하던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인인 티투스가 왜 그리스를 대표하여 경고하는지 의아해했다고 전해진다. 협상 끝에 로마가 그리스 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면 셀레우코스 제국도 손을 떼겠다고 약속했지만, 안티오코스 3세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로마와 셀레우코스 제국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기원전 191년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티투스는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6. 이후 경력

집정관 임기 이후에도 플라미니누스의 경력은 계속되었다. 기원전 189년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감찰관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38][39] 이후 기원전 183년에는 카르타고에서 망명한 한니발을 잡기 위해 비티니아로 파견되었으나, 한니발이 자결하면서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다. 그의 말년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으며, 기원전 174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1. 감찰관 (기원전 189년)

기원전 189년에는 감찰관에 취임했다. 이 해의 감찰관 선거는 경쟁이 치열했는데, 직전 전쟁에서 승리하여 재정이 풍부했던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으나, 노부스 호모(신참자)라는 이유로 낙선했다. 대신 티투스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함께 감찰관으로 당선되었다[38]。 감찰관으로서 고위 정무관직 경험이 없는 네 명의 원로원 의원을 제명했다. 또한 카페나 문에서 마르스 신전까지 도로를 포장하는 등 인프라 정비 사업을 시행했다. 캄파니아 주민들의 켄수스(국세 조사)는 로마에서 실시하도록 결정했다[39]

6. 2. 비티니아 외교 (기원전 183년)

기원전 183년에 카르타고에서 망명한 한니발을 잡기 위해 비티니아로 갔지만, 한니발은 자결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기원전 174년경에 사망했다.

7. 사망

기원전 183년에 카르타고에서 망명한 한니발을 잡기 위해 비티니아로 파견되었으나, 한니발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 이후의 구체적인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기원전 174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8. 평가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Titus Quinctius Flamininus: Philhellenism and Realpolitik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incinnati
[2] 간행물 Flamininus
[3] 간행물 xxii
[4] 간행물 Flamininus
[5] 간행물 xxv
[6] 간행물 vol. I
[7] 간행물 Flamininus
[8] 간행물 xxix
[9] 간행물 Family and Early Career
[10] 간행물 Flamininus
[11] 간행물 Flamininus
[12] 간행물 xxxi
[13] 간행물 vol. I
[14] 간행물 xxxi
[15] 간행물 vol. I
[16] 간행물 Flamininus
[17] 간행물 xxxii
[18] 간행물 Flamininus
[19] 간행물 xxxiii
[20] 간행물 vol. I
[21] 간행물 Flamininus
[22] 간행물 xxxi
[23] 간행물 Flamininus
[24] 간행물 Flamininus
[25] 서적 The Greek Slogan of Freedom and Early Roman Politics in Greec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1-03-24
[26] 간행물 Polybius XVIII
[27] 간행물 Flamininus
[28] 서적 Rome and the Mediterranean: Books XXXI–XLV of the History of Rome from its Foundation https://archive.org/[...] Penguin Classics
[29] 서적 Titus Quinctius Flamininus https://archive.org/[...] Vandenhoeck & Ruprecht
[30] 간행물 Ab urbe condita
[31] 간행물 Flamininus
[32] 간행물 Ab urbe condita
[33] 간행물 Flamininus
[34] 간행물 41
[35] 간행물 ローマ建国史
[36] 서적 ローマ建国史
[37] 서적 対比列伝
[38] 서적 ローマ建国史
[39] 서적 ローマ建国史
[40] 서적 Titus Quinctius Flamininus: Philhellenism and Realpolitik https://books.google[...] 신시내티 대학교
[41] 서적 Ab urbe condita https://en.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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