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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사니아스 (스파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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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우사니아스 (스파르타)는 스파르타의 왕으로,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아들이자 아게시폴리스 1세의 아버지이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마지막을 이끌었으며, 아테네를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아테네 민주파를 옹호하고 스파르타와 대립하는 행보를 보였으며, 코린토스 전쟁 중 할리아르토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아 테게아로 망명했다. 망명 중에는 스파르타 헌법에 대한 팸플릿을 저술했으며, 아들보다 오래 산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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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사니아스 (스파르타)
기본 정보
왕국스파르타
왕조아기아드 왕조
그리스어 이름Παυσανίας
로마자 표기Pausanias
통치
왕위스파르타 왕
재위 기간기원전 445년 – 기원전 426년
기원전 408년 – 기원전 395년
이전 통치자플레이스토아낙스
다음 통치자아게시폴리스 1세
공동 통치자아기스 2세
공동 통치자 유형공동 통치
개인 정보
출생알 수 없음
사망기원전 380년 이후
자녀아게시폴리스 1세
클레옴브로투스 1세
아버지플레이스토아낙스

2. 생애

파우사니아스는 선왕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아들이자 후대의 왕 아게시폴리스 1세의 아버지이다. 아버지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전쟁 중 실수로 재판을 받고 추방되자, 어린 파우사니아스는 삼촌 클레오메네스의 후견 아래 명목상 왕위에 올랐다.[38] 기원전 428년 아버지가 스파르타로 돌아와 다시 왕위를 계승하면서 파우사니아스는 왕자 신분이 되었고, 기원전 409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마지막 단계를 이끌었다. 기원전 405년에는 공동 왕이었던 아기스 2세와 함께 아테네를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39] 전쟁 후 아테네에 들어선 친스파르타적인 30인 참주 정권에 맞서 트라시불로스를 비롯한 민주파가 저항하자, 기원전 403년 파우사니아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티카로 파견되었다. 그는 민주파와 싸우기도 했으나, 결국 30인 참주 정권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아테네 내부의 갈등을 중재했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으로는 당시 스파르타 내 경쟁자였던 리산드로스에 대한 견제[40] 또는 아테네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동정심[40] 등이 거론된다. 그의 중재는 아테네 민주정 복원의 계기가 되었지만, 이 일로 스파르타에서 고발당하기도 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41]

기원전 394년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자, 파우사니아스는 리산드로스와 함께 각각 군대를 이끌고 보이오티아를 침공했다.[42] 그러나 파우사니아스 군대의 도착이 늦어지면서 먼저 도착한 리산드로스가 할리아르토스 전투에서 전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뒤늦게 도착한 파우사니아스는 테바이 군대와의 교전을 피하고 휴전 조약을 맺은 뒤 전사자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철수했다.[43]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지원군 파견 지연으로 리산드로스를 죽게 한 책임, 전투 회피, 과거 아테네 민주파에 대한 온건적인 태도 등을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형이 집행되기 전 테게아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44]

2. 1. 초기 생애 (기원전 445년경 ~ 427년)

파우사니아스는 스파르타의 아기아스 왕조 출신 왕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아들이자, 후대의 왕 아게시폴리스 1세의 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는 스파르타 내 다른 왕조인 에우리폰티드 왕조와의 갈등 시기에 왕위에 있었다. 기원전 445년, 플레이스토아낙스는 고전 아테네와의 첫 군사 원정 이후 페리클레스로부터 뇌물을 받고 관대한 평화 조약을 제안했다는 혐의를 받아 스파르타에서 추방당했다.[1][2] 파우사니아스는 이 무렵, 혹은 아버지가 추방된 직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3]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아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이자 스파르타의 에포르들에 의해 아테나 신전에서 굶어 죽임을 당한 파우사니아스 섭정의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이는 당시 스파르타 정부에 대한 반항심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4] 아버지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추방되자 어린 파우사니아스는 명목상 왕위에 올랐으며, 그의 섭정은 삼촌인 클레오메네스 (파우사니아스 섭정의 둘째 아들)가 맡았다.[5][6] 이 시기 스파르타는 에우리폰티드 왕조의 아르키다모스 2세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그는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스파르타 복귀를 막았다. 파우사니아스는 나이가 어려 이에 반대할 힘이 없었다.[7]

기원전 427년, 아르키다모스 2세가 사망하자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스파르타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았고, 파우사니아스는 왕자 신분이 되었다.[7]

2. 2. 첫 번째 통치 (기원전 445년 ~ 427년)

파우사니아스는 아기아스 왕조 출신인 아버지 플레이스토아낙스가 기원전 445년 고전 아테네와의 첫 군사 원정 이후 망명하면서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했다.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로부터 뇌물을 받고 관대한 평화 조약을 제안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스파르타를 떠나야 했다.[1][2] 파우사니아스는 아버지가 망명한 직후 또는 그 즈음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3] 그의 이름은 할아버지이자 과거 스파르타의 섭정이었던 파우사니아스 섭정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반역 혐의로 에포르들에 의해 신전에서 굶어 죽임을 당했는데,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아들에게 이 이름을 지어준 것은 스파르타 정부에 대한 반항심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4]

아버지 플레이스토아낙스가 망명하자 어린 파우사니아스는 명목상의 왕이 되었고, 실제 통치는 그의 삼촌인 클레오메네스 (파우사니아스 섭정의 둘째 아들)가 섭정으로서 대행했다.[5][6][38] 이 시기 스파르타의 실권은 다른 왕가인 에우리폰티드 왕조의 아르키다모스 2세가 장악하고 있었다. 아르키다모스 2세는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스파르타로 돌아오는 것을 막았으며, 아직 어린 파우사니아스는 이에 맞설 힘이 없었다.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아르키다모스 2세가 사망한 후인 기원전 427년에야 스파르타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고, 이때 파우사니아스는 왕자의 지위로 돌아갔다.[7] (일부 기록에는 플레이스토아낙스의 복귀 시점을 기원전 428년으로 언급하기도 한다.[38])

2. 3. 두 번째 통치 (기원전 409년 ~ 395년)

기원전 409년 아버지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사망하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38]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마지막 국면을 이끌었으며, 기원전 405년에는 공동 왕인 아기스 2세와 함께 아테네를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45][39]

전쟁 후 아테네에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는 30인 참주 과두정이 들어섰으나, 곧 트라쉬불로스가 이끄는 민주파의 저항에 부딪혔다. 기원전 403년 파우사니아스는 이 상황에 개입하여 결과적으로 아테네의 민주정 복원을 도왔는데[21], 이는 당시 스파르타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리산드로스와의 경쟁 관계[46][40][24] 또는 리산드로스의 공격적인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반감[25]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결정은 리산드로스가 구축한 친스파르타 과두정 체제를 뒤집는 것이었으며[22], 이 일로 파우사니아스는 스파르타에서 고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47][41]

디오도로스 시쿨루스에 따르면, 파우사니아스는 기원전 401년 엘리스 원정을 지휘했다고도 전해지나[34], 다른 주요 자료인 크세노폰은 이 원정을 아기스 2세가 지휘했다고 기록하여 논란이 있다.

기원전 395년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자 보이오티아로 출정했으나[42], 할리아르토스 전투에서 군대 도착이 늦어져 리산드로스가 전사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전투 없이 후퇴하면서 비난에 직면했다.[48][43] 결국 군대 지연으로 리산드로스를 죽게 하고 전투 없이 후퇴했다는 점, 그리고 과거 아테네 민주파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 등이 문제가 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형 집행 전 테게아로 망명하여 그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49][44]

2. 3. 1. 아테네 민주정 복원 개입 (기원전 403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후 아테네에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는 30인 참주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곧 트라쉬불로스 장군을 중심으로 한 민주파 세력이 이에 반기를 들고 봉기했다.

기원전 403년, 스파르타는 아테네 민주파를 진압하기 위해 파우사니아스 왕에게 군대를 주어 아티카로 파견했다. 파우사니아스는 처음에는 민주파와 교전을 벌였으나, 이후 태도를 바꾸어 30인 참주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아테네 내부의 당파 싸움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파우사니아스의 행동 배경에 대해 역사가 크세노폰은 당시 스파르타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리산드로스 장군에 대한 파우사니아스의 경쟁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46][40] 반면, 여행가 파우사니아스는 그가 아테네 시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40]

파우사니아스의 중재 덕분에 아테네의 민주파는 위기를 넘기고 다시 힘을 얻어 민주정을 복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우사니아스의 이러한 독단적인 결정과 아테네 민주파에 대한 온건적인 태도는 스파르타 내부에서 큰 반발을 샀다. 그는 스파르타로 돌아온 후 고소당했지만, 재판 결과 무죄 판결을 받았다.[47][41] 이 사건은 파우사니아스와 리산드로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3. 2. 코린토스 전쟁과 할리아르토스 전투 (기원전 395년)

기원전 395년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자[42], 스파르타리산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가 각각 군대를 이끌고 보이오티아의 할리아르토스에서 합류하여 테베를 중심으로 한 동맹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 전쟁은 아테네, 테베, 코린토스, 아르고스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스파르타에 대항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군대의 도착이 며칠 지연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파우사니아스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할리아르토스에 도착한 리산드로스는 독자적으로 도시 공격을 감행했다. 이어진 할리아르토스 전투에서 리산드로스는 군대를 성벽에 너무 가까이 접근시켰다가 테베 군의 반격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파우사니아스의 군대는 리산드로스가 패배한 직후에 도착했다. 파우사니아스는 처음에는 보이오티아 군대와 교전하려 했으나, 트라쉬불로스가 이끄는 아테네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양쪽에서 협공당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그는 테바이휴전 조약을 맺고, 리산드로스를 포함한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스파르타로 철수했다.[43][48]

이 결정으로 파우사니아스는 스파르타에서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지원군으로 늦게 도착하여 리산드로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 전투를 회피하고 적과 휴전한 점, 그리고 과거 기원전 403년 아테네 민주파를 도왔던 전력까지 문제 삼아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49][44] 하지만 파우사니아스는 형이 집행되기 전에 테게아로 망명했고, 그의 어린 아들 아게시폴리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 4. 재판과 망명 (기원전 395년 이후)

코린토스 전쟁 중이던 기원전 394년, 파우사니아스는 리산드로스와 함께 각각 군대를 이끌고 보이오티아를 침공했다.[42] 그러나 파우사니아스 부대의 도착이 늦어지면서, 먼저 도착한 리산드로스는 할리아르토스 전투에서 테바이 군에게 패배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뒤늦게 도착한 파우사니아스는 처음에는 보이오티아 군과 교전하려 했으나, 트라시불로스가 이끄는 아테네 군대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협공당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그는 테바이와 휴전 조약을 맺고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스파르타로 돌아갔다.[43][48]

스파르타로 돌아온 파우사니아스는 여러 이유로 고발당했다. 지원군을 제때 보내지 않아 리산드로스를 죽게 만들었다는 점, 전투를 회피하고 철수했다는 점, 그리고 과거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의 민주파에게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던 점 등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아르카디아의 테게아로 망명했다.[49][44] 할리아르토스에서의 그의 부실한 지휘 때문에 스파르타인들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왕위는 그의 어린 아들 아게시폴리스 1세에게 넘어갔다.

파우사니아스는 테게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망명 중에 그는 리쿠르고스와 스파르타 헌법에 관한 글, λόγος|로고스grc를 저술했다. 당시 스파르타 왕이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저술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스트라보의 '지리학'에 일부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35] 파우사니아스는 이 글에서 스파르타의 에포로스 제도를 비판하며 폐지를 주장하고, 전설적인 입법가 리쿠르고스가 설계했다고 여겨지는 본래의 스파르타 헌법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학자들은 파우사니아스가 에포로스 제도가 리쿠르고스가 아닌 테오폼포스 왕에 의해 창설되었다고 주장했다고 보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정치학'에서 에포로스가 기원전 8세기 테오폼포스 왕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기록한 것과 연결된다.[35]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파우사니아스의 '로고스'의 영향 때문일 수 있다.[35] 따라서 파우사니아스는 스파르타에서 리쿠르고스를 이상화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기원전 3세기 혁명적인 왕 아기스 4세클레오메네스 3세가 자신들의 개혁을 리쿠르고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35]

파우사니아스는 기원전 380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7] 그는 아들인 아게시폴리스 1세보다 오래 살았는데, 이는 파우사니아스가 델포이에 아들의 기념비를 세웠다는 비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36] 그는 아게시폴리스 1세 외에도 클레옴브로투스 1세라는 아들을 두었다.

3. 평가

파우사니아스의 정치적 행보는 당시 스파르타 내부의 권력 투쟁과 대외 정책의 변화를 반영한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 문제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친스파르타적인 과두정, 30인 참주 정권을 세웠다.[45][39] 그러나 기원전 403년, 트라시불로스를 중심으로 한 아테네 민주파 세력이 봉기하자 스파르타는 파우사니아스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려 했다. 파우사니아스는 아테네 민주파와 교전했으나, 일방적으로 30인 참주를 지지하기보다는 양측의 중재를 시도하며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 대해 크세노폰은 파우사니아스가 정적인 리산드로스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하고[46], 파우사니아스는 그가 아테네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40] 그의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아테네 민주정의 부활에 기여했으며, 스파르타의 전통적인 과두정 지지 정책과는 상반되는 이례적인 조치였다. 이 일로 파우사니아스는 스파르타에서 고발당했지만,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41][47] 이는 파우사니아스가 아테네 민주 세력과의 공존을 모색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며, 스파르타 내 강경파와의 입장 차이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코린토스 전쟁 중 그의 군사적 판단은 비판에 직면했다. 기원전 394년, 파우사니아스는 리산드로스와 함께 보이오티아를 침공하는 작전에 참여했으나[42], 그의 군대가 약속된 시간에 할리아르토스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 지연으로 인해 리산드로스의 군대는 고립되었고, 결국 할리아르토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리산드로스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43][48] 뒤늦게 도착한 파우사니아스는 테바이 군대와 교전하는 대신, 아테네 군대의 접근을 우려하여 휴전 조약을 맺고 전사자들의 시신만 수습하여 철수했다.[43][48] 이 사건은 파우사니아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안겼다. 지원군 파견 지연으로 리산드로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 적극적인 전투 회피, 그리고 과거 아테네 민주파에 보였던 온건한 태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형이 집행되기 전 테게아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44][49] 할리아르토스에서의 소극적인 대응은 군사적 판단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스파르타 내 정적들에게는 그를 제거할 좋은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4. 유산

파우사니아스의 아들 아게시폴리스 1세가 그의 뒤를 이어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다.[38] 다른 아들로는 클레옴브로투스 1세가 있었다.[37] 파우사니아스는 델포이에 아들 아게시폴리스 1세의 기념비를 세운 비문 내용으로 보아, 아들보다 오래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36] 그는 기원전 380년 이후에 사망했다.[37]

테게아로 망명한 후, 파우사니아스는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자 리쿠르고스와 스파르타 헌법에 관한 λόγος|로고스grc라는 제목의 저술을 남겼다.[35] 당시 스파르타 왕이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동시대의 다른 스파르타인 티브론도 비슷한 주제로 글을 썼다. 파우사니아스의 저술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그 내용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쓰인 스트라보의 ''지리학''에 일부 손상된 형태로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35]

이 저술에서 파우사니아스는 에포로스 제도의 폐지와 리쿠르고스가 설계했다고 여겨지는 본래의 스파르타 헌법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학자들은 파우사니아스가 에포로스 제도가 리쿠르고스에 의해 창설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8세기 왕 테오폼포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고 본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테오폼포스가 에포로스를 창설했다고 기록한 것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35] 파우사니아스의 이러한 주장은 스파르타 내에서 리쿠르고스를 이상화하는 흐름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기원전 3세기 혁명적인 왕 아기스 4세클레오메네스 3세가 자신들의 개혁 정책의 근거로 리쿠르고스를 내세우는 데 영향을 주었다.[35]

참조

[1]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2] 서적 Sparta's First Attic War
[3] 논문 Some Agiad Dates
[4] 논문 Some Agiad Dates
[5] 서적 Prosopographie
[6] 논문 Some Agiad Dates
[7] 논문 What Did the Athenians Demand
[8]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9]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10] 간행물 Sparta as victor
[11] 서적 Fall of Athenian Empire
[12]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13]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14]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15] 서적 Sparta's Bitter Victories
[16] 논문 Spartan justice?
[17] 간행물 The Empire of the Spartans (404–371)
[18] 서적 Sparta's Bitter Victories
[19] 간행물 The Empire of the Spartans (404–371)
[20] 서적 Sparta's Bitter Victories
[21]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22]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23] 서적 Sparta's Bitter Victories
[24] 서적 Sparta's Bitter Victories
[25]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26] 서적 Sparta's Bitter Victories
[27] 서적 Agesilaos
[28] 서적 Sparta's Bitter Victories
[29] 서적 Agesilaos
[30] 서적 Agesilaos
[30] 논문 Spartan justice?
[31] 서적 Agesilaos
[32] 논문 Spartan justice?
[33] 서적 Agesilaos
[34] 간행물 The Empire of the Spartans (404–371)
[35] 서적 Agesilaos
[36] 학술지 The Disposing of Spartan Kings
[37] 서적 Companion to Sparta Somerset: John Wiley & Sons, Incorporated
[38] 문서 トゥキュディデス, III. 26
[39] 문서 クセノポン, II. 2. 4-20
[40] 문서 クセノポン, II. 4. 29-39
[41] 문서 パウサニアス, III. 5. 1-2
[42] 문서 クセノポン, III. 5. 6-7
[43] 문서 パウサニアス, III. 5. 4-5; クセノポン, III. 5. 23-24
[44] 문서 パウサニアス, III. 5. 6; クセノポン, III. 5. 25
[45] 문서 크세노폰, II 2. 4-20
[46] 문서 크세노폰, II 4. 29-39
[47] 문서 파우사니아스, III 5. 1-2
[48] 문서 파우사니아스, III 5. 4-5; 크세노폰, III 5. 23-24
[49] 문서 파우사니아스, III. 5. 6; 크세노폰, III.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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