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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후겐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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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독일의 정치인이자 기업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국가인민당(DNVP)을 이끌며 보수 우익 세력을 대표했다. 그는 언론 재벌로 성장하여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널리 알렸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하며 아돌프 히틀러와 협력하여 권력을 잡는 데 기여했다. 히틀러 내각에서 경제 및 농업 장관을 역임했지만, 곧 나치와 결별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이후 탈나치화 과정에서 동조자로 판결받고 195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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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후겐베르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알프레트 에른스트 크리스티안 알렉산더 후겐베르크
출생1865년 6월 19일
출생지하노버, 하노버 왕국
사망1951년 3월 12일
사망지퀴켄브루흐, 서독
배우자게르트루트 아디케스 (1900년–1951년)
학력괴팅겐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당시 독일 제국)
1933년의 후겐베르크
1933년의 후겐베르크
경력
직업기업인, 정치인
활동 기간1917년–1945년
정치 경력
소속 정당독일 국가인민당 (1918년–1933년)
독일 조국당 (1917년–1918년)
무소속 (1933년–1951년)
독일 국가인민당 의장재임 기간: 1928년 10월 21일 – 1933년 6월 27일
전임: 쿠노 폰 베스타르프
후임: 정당 해산
바이마르 공화국 국회의원재임 기간: 1919년 – 1945년
선거구: 베스트팔렌 북부
바이마르 국민의회 의원재임 기간: 1919년 2월 6일 – 1920년 5월 21일
정부 경력
직책국가 경제 장관
국가 식량농업 장관
국가 경제 장관재임 기간: 1933년 1월 30일 – 1933년 6월 29일
총리: 아돌프 히틀러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전임: 헤르만 바름볼트
후임: 쿠르트 슈미트
국가 식량농업 장관재임 기간: 1933년 1월 30일 – 1933년 6월 29일
총리: 아돌프 히틀러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전임: 마그누스 폰 브라운
후임: 리하르트 발터 다레
기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서명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서명

2. 초기 생애 및 정치 철학

1865년 6월 19일 하노버에서 태어났다.[32] 아버지 카를 후겐베르크는 프로이센 왕국의 국회의원이었다.[33]

게팅겐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33] 1891년 초국가주의 단체 범게르만 연합(Alldeutscher Verband)을 공동 설립했고,[33][32] 1900년에는 사촌인 게르트루트 아디케스와 결혼했다.[33] 처음에는 관료가 되어 프로이센 관료로 일했다.[33]

1891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북서 독일의 내부 식민지화"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평생 그의 정치적 사상을 이끌 세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는 강력한 반(反)폴란드주의자였으며, 적극적인 독일화 정책을 선호했다. 상류 중산층 출신으로 처음에는 융커de (토지 귀족)에 반감을 가졌지만, 이후 융커와 산업가 간의 동맹, 즉 "독일의 봉건적-산업적 통제"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2. 1. 정치 철학

후겐베르크는 1891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북서 독일의 내부 식민지화"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서 그는 평생 그의 정치적 사상을 이끌어갈 세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33]

  • 독일 농민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주의 경제 정책의 필요성.
  • 국가가 농민을 지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독일 농민은 기업가로서 활동하도록 장려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당의 매력에 대항하는 방파제 역할을 할 성공적인 농민/소상공인 계급을 창출해야 한다.
  • 독일 농민의 성공을 위해서는 제국주의 정책이 필요했는데, 사회 다윈주의적 근거를 들어 독일이 다른 국가를 식민지화하면 "독일 민족의 힘과 중요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후겐베르크는 독일의 번영이 강력한 제국을 갖는 것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며, 다가오는 20세기에는 독일이 세계 패권을 위해 영국, 미국, 러시아라는 세 강대국과 싸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899년, 후겐베르크는 "폴란드 인구의 소멸"을 요구했다.[33] 그는 강력한 반(反)폴란드주의자였으며, 보다 적극적인 독일화 정책을 선호하며 "부적절한" 폴란드 정책으로 프로이센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포젠 지방에서 프로이센 정착 위원회가 폴란드인으로부터 토지를 매입하여 그곳에 민족 독일인을 정착시키는 계획에 참여했다.

후겐베르크는 상류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처음에는 융커de (토지 귀족)에 반감을 가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융커와 산업가 간의 동맹을 믿으며 "독일의 봉건적-산업적 통제"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신념과 함께, 후겐베르크는 제국주의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를 유지했다.

3. 기업인으로서의 경력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하노버에서 태어나 괴팅겐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스트라스부르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891년 "북서 독일의 내부 식민지화"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 논문에서 그는 독일 농민의 성공을 위한 국가주의 경제 정책, 농민의 기업가적 활동 장려, 독일 번영을 위한 제국주의 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후겐베르크는 극우 민족주의 단체인 범독일 연맹과 범게르만 연맹(Alldeutscher Verbandde)을 공동 창설했다. 1894년부터 1899년까지 포젠에서 프로이센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프로이센 정착 위원회에 참여하여 폴란드인으로부터 토지를 매입하고 독일인을 정착시키는 계획을 추진했으며, "폴란드 인구의 소멸"을 요구하는 등 강력한 반폴란드주의자였다.

1903년 프로이센 재무부 공무원으로 들어갔다가, 1907년 실업계에 진출하여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광업 은행 지배인을 역임했다.[33] 1909년 크루프에 중역으로 초빙되어 1918년까지 재무·경리 이사회 의장을 역임했다.[33][32]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에는 크루프의 자금을 배경으로 조국당의 활동을 지원하는 후겐베르크 콘체른을 창설했다.[33][34] 베를린 최대의 신문을 발행하는 샤를(Scherl), 14개의 지방 신문을 발행하는 페라 페어라크(Vera verlag) 등 유력 저널리즘을 산하에 두고 미디어를 지배했으며,[32][35] 1927년에는 영화 회사 UFA 사장이 되었다.[33][36] 크루프 이사 사임 후에도 탄광 연맹이나 광산 협회에서 위원장을 맡아 중공업계에 영향력을 계속 미쳤다.[34]

3. 1. 크루프 철강 회장 시절

1909년 후겐베르크는 크루프 철강의 감독위원회 회장으로 임명되어 크루프 AG의 CEO인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보렌 운트 할바흐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당시 크루프 AG는 유럽 최대의 기업이자 세계 최대의 기업 중 하나였으며, 후겐베르크는 1908년 8%에서 1913년 14%로 연간 배당금을 인상시키는 데 성공하여 독일 사업계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크루프 AG 재직 기간 동안 후겐베르크는 노동조합과의 갈등으로 "융통성 없음", "고집", "독선"으로 유명했다.[10] 그는 사회민주당(SPD) 및 중앙당과 연합한 노조를 승인하지 않고, 경영진을 대표하는 "노란색" 노조를 후원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고, 더 높은 임금과 크루프 AG의 소규모 주식을 제공하는 Werksgemeinschaftde(경제 공동체한국어)를 선호했다.

1912년, 빌헬름 2세는 후겐베르크에게 적색 독수리 훈장을 직접 수여하며, 독일에는 그와 같은 사업가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후겐베르크의 산업 스파이 행위를 폭로한 코른발저 사건이 있었다. 크루프 AG는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고, 크루프 AG에 대한 공격은 사회주의-평화주의 SPD에 의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크루프 AG의 몇몇 하급 직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후겐베르크와 이사회는 기소되지 않았다.

4.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후겐베르크는 전쟁을 열렬히 환영하며 병합주의적 입장을 취했다.[11] 그는 당시 재상이었던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를 자신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여겨 1914년부터 1917년까지 그를 배신자라고 공격했다.[11] 1915년에는 루르의 연합 상공 회의소를 대표하여 빌헬름 2세에게 베트만 홀베크를 해임하고, 황제가 그럴 의향이 없다면 군대가 베트만 홀베크를 폐위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전보를 발표하기도 했다.[11]

후겐베르크는 병합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를 모으고 베트만 홀베크를 실각시키기 위해 미디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6년에는 자신의 제국주의적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더 많은 매체를 만들기 위해 신문과 출판사를 사들이기 시작했다.[11] 그는 국가로부터 은밀한 지원을 받아 미디어 제국을 건설했는데, 국가는 울슈타인 형제와 루돌프 모세가 소유한 자유주의 신문을 불신했고, 그들 모두 유대인이었기에, "애국적인" 사업가들이 후겐베르크에게 신문을 사기 위한 자금을 대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11] 후겐베르크에게 돈을 대출해 준 가장 중요한 동맹국은 크루프 가문의 여러 구성원들이었다.[11]

1916년 7월 쉐를 신문 체인을 인수한 후, 후겐베르크는 첫 이사회에서 쉐를 법인을 병합주의와 범게르만주의 전쟁 목표를 옹호하기 위해 샀을 뿐이며, 그의 팽창주의적 견해에 반대하는 편집자들은 해고되기 전에 즉시 사임해야 한다고 발표했다.[11] 쉐를 법인을 사들이면서 베를린 신문 Der Tag|데어 타크de (그날)를 인수했는데, 이 신문은 그의 미디어 제국의 대표 신문이 되었다.[11] Der Tag|데어 타크de는 교육받은 중산층 사람들이 주로 읽는 "품질" 신문이었으며, 또 다른 쉐를 신문인 Berliner Lokal-Anzeiger|베를리너 로칼-안차이거de는 하위 중산층 독자를 대상으로 했고 더 수익성이 높았다.[11]

후겐베르크는 1918년까지 크루프에 머물렀고, 이후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대공황 동안 수십 개의 지역 신문을 사들일 수 있었다.[11]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독일의 패배는 후겐베르크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이를 1918년 11월 혁명, 즉 승리를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을 때 등 뒤의 칼에 의한 패배라고 비난했다.[11] 그는 독일이 패배에서 회복될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반역자"들을 제거하면 다음 세계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11]

4. 1. 병합주의적 신념

1914년, 후겐베르크는 하인리히 클라스와 함께 병합주의 플랫폼을 설정하고 산업가들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11]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당시 재상이었던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와 갈등을 빚었다. 후겐베르크를 비롯한 병합주의자들은 베트만 홀베크를 자신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1914년부터 1917년까지 그를 배신자라고 공격했다.[11]

1915년, 후겐베르크는 루르의 연합 상공 회의소를 대표하여 클라스에게 보낸 전보를 발표했다. 이 전보에서 그는 빌헬름 2세에게 베트만 홀베크를 해임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 황제가 이를 거부한다면 군대가 베트만 홀베크를 폐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 후 병합주의 강령을 달성하지 못하면 군주제를 종식시킬 우익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11]

4. 2. 미디어 제국 구축의 시작

후겐베르크는 1916년 후겐베르크 콘체른을 창설했다.[33] 이는 크루프의 자금을 배경으로 한 출판 콘체른으로, 조국당의 활동을 지원했다.[34] 그는 1909년부터 크루프에서 은행 업무 및 철강 관계를 담당하는 중역으로 일했으며, 1918년까지 재무·경리 이사회 의장을 역임했다.[32]

후겐베르크는 범게르만주의와 합병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하면서 미디어 제국 건설에 관심을 가졌다. 1918년까지 크루프에 머물렀고, 이후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으며, 대공황 동안 수십 개의 지역 신문을 사들일 수 있었다.[11] 베를린 최대의 신문을 발행하는 셜(Scherl)과 14개의 지방 신문을 발행하는 페라 페어라크(Vera verlag) 등 유력 저널리즘을 산하에 두면서 미디어를 지배했다.[32][35] 이 신문들은 그의 출판사 셜 하우스의 기반이 되었으며, 우파(Universum Film AG, UFA), 알라-안자이거 AG, 베라 출판, 텔레그래프 연합에 대한 지배적 지분을 추가한 후, 독일 미디어에 거의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독일 중산층 사이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반대 여론을 조장했다.[11]

5. 전후 환멸

후겐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국민 자유당에 관여한 여러 범게르만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12] 전쟁 중 그의 견해는 급격히 우익으로 기울었다. 그는 조국당으로 전향하여 주요 구성원이 되었고, 영토 확장과 반유대주의를 두 가지 주요 정치적 문제로 강조했다.[13] 1919년 후겐베르크는 조국당의 대다수를 따라 독일 국가 인민당(DNVP)에 합류했으며,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을 작성한 바이마르 국민 의회에서 이 당을 대표했다. 그는 1920년 새 의회 선거에서 Reichstag|라이히스타크de에 선출되었다.[14]

후겐베르크는 자신의 관심사를 바이마르 공화국의 "병들고 미친 기후에 대한 치료법"을 찾는 것으로 정의했는데, 그에게 그것은 "권력과 권력의 사용"이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빌헬름 2세의 영향을 받은 후겐베르크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광범위한 국가적 반대를 만들고 강한 분열 경향을 보였던 DNVP를 결집하기 위해 ''집결 정치''를 믿었다.

DNVP를 유지할 수 있는 긍정적인 목표를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원했던 종류의 국가적 단결을 창출할 수 없었던 후겐베르크는 증오를 통해 단결을 제공할 "적"을 찾음으로써 자신의 Sammelpolitik|집결 정치de를 부정적인 용어로 정의하게 되었다. 그의 Reichstag|라이히스타크de 첫 연설에서 후겐베르크는 재무 장관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를 1918년 휴전에 서명한 "반역자"라고 불렀으며, 그의 재무 장관 정책이 Reich|라이히de를 "국제 경제적 노예 상태"로 묶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집결을 만들기 위해 후겐베르크는 당시 Katastrophenpolitik|카타스트로펜폴리티크de(대재앙 정치)라고 알려진 것을 지지했는데, 상황이 악화될수록 바이마르 공화국은 더 빨리 끝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6. 민족주의 지도자

후겐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국민자유당에 관여했던 그는 전쟁을 거치며 우익으로 기울었고, 조국당에서 활동하며 영토 확장과 반유대주의를 주장했다.[13]

1919년 독일 국가인민당(DNVP)에 합류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정에 참여하고 1920년 의회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14] 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등의 영향을 받아 '집결 정치'를 통해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반대 세력을 결집하려 했다. 그러나 긍정적 목표를 찾지 못하고, 증오를 이용해 '적'을 설정하는 방식으로 집결 정치를 활용했다.[14] 그는 상황이 악화될수록 공화국이 빨리 붕괴될 것이라는 '대재앙 정치'를 지지했다.[14]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병든 기후'로 규정하고, '권력'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14]

그는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재무장관을 휴전에 서명한 '반역자'로 비난하며, 그의 정책이 독일을 '국제 경제적 노예 상태'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14]

후겐베르크는 언론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퍼뜨렸다. 1920년 타블로이드 신문 Berliner Illustrierte Nachtausgabede를 창간하고, 1921년 Telegraphen-Unionde(TU)을 설립하여 독일 언론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신문들은 '등 뒤의 칼침'과 같은 주장을 펼치며 바이마르 공화국을 비판했다.[13]

후겐베르크는 사회진화론적 관점을 가졌으며, '적자생존'을 '발전의 생명 원리'로 여겼다. 이러한 입장은 DNVP 내 좌파 지도자들과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41] 1922년에는 에밀 키르도르프와 함께 정치적으로 효과적이지만 상업적으로는 수익성이 없는 단체를 지원하는 투자 펀드를 만들기도 했다.[19]

6. 1. 독일 국가인민당 (DNVP)

후겐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국민자유당에 관여한 여러 범게르만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12] 전쟁 중 그의 견해는 우익으로 기울었고, 조국당의 주요 구성원이 되어 영토 확장과 반유대주의를 주요 정치 문제로 강조했다.[13] 1919년, 후겐베르크는 조국당 대다수와 함께 독일 국가인민당(DNVP)에 합류했다.[14] 그는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을 작성한 바이마르 국민 의회에서 DNVP를 대표했고, 1920년 새 의회 선거에서 Reichstag|국회de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4]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의 로고


후겐베르크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빌헬름 2세의 영향을 받아 ''집결 정치''를 믿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광범위한 국가적 반대를 만들고, 분열 경향을 보였던 DNVP를 결집하고자 했다.[14] 그러나 긍정적인 목표를 찾을 수 없었고, 국가적 단결을 창출하지 못하자, 증오를 통해 단결을 제공할 "적"을 찾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집결 정치de를 정의했다.[14]

후겐베르크는 당시 Katastrophenpolitikde(대재앙 정치)를 지지했다. 상황이 악화될수록 바이마르 공화국이 더 빨리 끝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14] 그는 자신의 관심사를 바이마르 공화국의 "병들고 미친 기후에 대한 치료법"을 찾는 것으로 정의했는데, 그에게 그것은 "권력과 권력의 사용"이었다.[14]

6. 2. 미디어 제국의 성장

1920년, 후겐베르크는 대중적인 타블로이드 신문인 Berliner Illustrierte Nachtausgabede를 창간했는데, 이는 그의 가장 수익성 있는 신문이 되었으며, 1929년에는 일일 발행 부수가 216,000부에 달했다.[15] 1921년에는 Dammert Verlag GmbHde, Deutscher Handelsdienstde, Westdeutscher Handelsdienstde를 인수 및 합병하여 Telegraphen-Unionde(TU)을 설립했다.[14] Telegraphen-Unionde(TU)은 영국의 로이터, 미국의 Associated Press와 유사하게 독일 언론에 뉴스를 제공했다. 전 세계 30개 사무실에 약 250명의 기자를 고용하여 전국 및 국제 뉴스를 독일의 소규모 신문에 제공했는데, 이 신문들은 전국 및 국제 특파원을 고용할 여유가 없었다.[14]

절정에 달했을 때, 독일의 약 1,600개의 신문이 Telegraphen-Unionde을 구독했으며, 이는 자유주의적이고 유대인 출신 언론인 테오도어 볼프가 소유한 텔레그래프 국과 효과적인 경쟁자가 되었다.[14] 후겐베르크는 볼프가 소유한 텔레그래프 국에 대한 독일 보수주의자들의 "자유주의적 편향" 불만 제기 이후 텔레그래프 국과 경쟁하기 위해 TU를 설립했다.[14] Telegraphen-Unionde은 "비당파적"으로 묘사되었지만, 국내 및 해외 뉴스 보도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하는 우익 정당에 매우 우호적인 경향을 보였다.[14] 후겐베르크의 신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등 뒤의 칼침"으로 태어났으며, 그 지도자들은 "11월의 범죄자"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강조했다.[13] 그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항상 "전문가"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당파적 정치인"으로 묘사되어, "등 뒤의 칼침"에 대한 믿음이 객관적인 진실이며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제를 주관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13] 이를 위해 후겐베르크의 신문들은 독일의 모든 문제를 1918년의 패배 탓으로 돌리는 한편, 1918년에 전쟁이 승리로 끝났다면 제국이 유토피아가 되었을 것이라는 반사실적 그림을 그렸다.

베를린과 같은 도시에서 후겐베르크 신문은 울슈타인 가문과 모세 가문이 소유한 자유주의 신문과 경쟁해야 했으며, 후겐베르크의 미디어 제국은 후겐베르크가 소유한 신문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주요 뉴스 소스였던 독일의 소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38] 후겐베르크가 신문을 소유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지역 신문들은 해당 지역 밖의 뉴스를 위해 후겐베르크 소유의 Telegraphen-Unionde에 의존했다. 독일의 농촌 지역과 소도시에 있는 약 600개의 신문은 TU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전국 및 국제 뉴스로 독점적으로 재인쇄했다.[39]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독일에는 약 3,000개의 신문이 있었는데, 그중 14개만 후겐베르크가 소유했다.[13] 약 1,600개의 신문, 주로 농촌 지역과 소도시에 있는 신문들이 후겐베르크가 영향력을 행사했던 전국 및 국제 뉴스에 TU를 사용했다.[14]

6. 3. 배상금 반대

후겐베르크는 1919년 독일 국가 인민당(DNVP)에 합류하여 바이마르 국민 의회에서 당을 대표했으며, 1920년 새 의회 선거에서 Reichstag|국회의원de으로 선출되었다.[14]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광범위한 국가적 반대를 만들고, 강한 분열 경향을 보였던 DNVP를 결집하기 위해 ''집결 정치''를 믿었다.[14]

DNVP를 유지할 긍정적인 목표를 찾지 못하고, 그가 원했던 국가적 단결을 창출할 수 없었던 후겐베르크는 증오를 통해 단결을 제공할 "적"을 찾음으로써 자신의 집결 정치de를 부정적인 용어로 정의했다.[14] 그는 Reichstag|국회de 첫 연설에서 재무 장관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를 1918년 휴전에 서명한 "반역자"라고 불렀으며, 그의 재무 장관 정책이 Reich|독일de를 "국제 경제적 노예 상태"로 묶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14]

6. 4. 하인리히 클라스와의 쿠데타 논의

후겐베르크는 판게르만 연맹의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인 하인리히 클라스와 함께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의 팽창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6] 1914년 9월, 후겐베르크와 클라스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독일이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를 병합하고, 영국의 해상 권력을 종식시키며, 러시아를 "표트르 대제 시대에 존재했던 국경"으로 축소해야 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공동 작성했다.[6] 또한, 독일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모든 영국, 프랑스, 벨기에 식민지를 병합하고, 독일 제국이 지배하는 "경제 연합"을 만들 계획이었다.[6] 더 나아가, 후겐베르크-클라스 각서는 동유럽에서 식민지 정책을 요구했는데, 독일은 러시아 제국에서 병합된 토지에 수천 명의 독일 농부를 정착시킬 예정이었다.[6]

7. DNVP 당수

1923년 1월, 독일이 프랑스에 대한 배상금 지불을 거부하자 프랑스는 루르 점령을 단행했고, 이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Katastrophenpolitikde 지지자였던 후겐베르크는 인플레이션을 바이마르 공화국 종말의 시작으로 보았고, 경제적 재앙이 "제3제국"으로 이어질 furor teutonicusde를 깨울 것이라고 주장했다.[4] 그는 독일에게 필요한 것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대중을 이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고 말했다.[4]

독일 인민당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수상직을 수락하고 소극적 저항을 끝낸 것은 후겐베르크에게 배신으로 여겨졌다.[4] 슈트레제만은 Vernunftrepublikanerde ("이성적 공화주의자")가 되었고, 그의 정책은 경제적, 정치적 안정을 목표로 했기에 후겐베르크의 증오 대상이 되었다.[4]

1923년 11월, 나치당의 맥주홀 폭동은 후겐베르크 소유 신문에서 처음으로 상당한 보도를 받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특별히 인기 있는 연설가"로 칭찬받았지만, 폭동은 "흩어지지 말고 뭉쳐라! 찢어지지 말고 묶어라!"라는 이유로 규탄받았다.[4]

1924년 5월 독일 연방 선거에서 DNVP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도스 안 통과를 위해 DNVP의 표가 필요했고, 이는 당을 둘로 쪼갰다. 산업가들은 도스 안을 지지했지만, Katastrophenpolitikde에 집착하는 파벌은 도스 안 거부를 지지했다. 후겐베르크는 도스 안 거부 파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4] 1924년 8월 27일 투표에서 DNVP 국회의원 49명이 도스 안을 찬성했고 48명이 반대했다. 후겐베르크는 투표에 불참했다.[4]

DNVP가 한스 루터 정부를 지지하기로 한 후, 후겐베르크는 1925년 2월–3월에 일련의 에세이를 썼다.[4]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후겐베르크의 신문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4] 후겐베르크의 주요 두려움은 쿠노 폰 베스타르프 지도하의 DNVP가 영국 보수당처럼 다양한 이해 집단을 결합하는 "큰 텐트" 보수 정당이 되는 것이었다.[4]

후겐베르크는 당의 운명을 되살리고 바이마르 헌법을 전복하여 권위주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급진적 민족주의를 이용하고자 했다.[4] 1931년, 새로운 DNVP 선언문은 호엔촐레른 왕조 복원, 베르사유 조약 변경, 징병제, 독일 제국 재소유, 독일 외 독일어 사용 인구와의 긴밀한 관계 구축, 국회(Reichstag) 역할 축소, 베니토 무솔리니의 국가 조합주의를 연상시키는 전문가 회의 설립, 독일 공공 생활에서 유대인 대표성 감소 등을 요구했다.[4]

후겐베르크는 당내 민주주의를 없애고 DNVP 내에 지도자 원리de(Führerprinzip)를 도입하려 했으며, 이로 인해 일부 당원들은 1929년 말 보수 국민당(KVP)을 창당했다.[4] 1930년 6월에는 더 많은 당원들이 탈당했다.[4]

산업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후겐베르크의 지도력 하에서 산업계 지지층은 점차 DNVP를 떠났다. 이는 후겐베르크가 너무 융통성이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으며, 곧 당은 국회에서 농업계 이익을 대변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14] 후겐베르크의 브뤼닝 내각 불참은 산업가들을 분노하게 했고, 1931년까지 DNVP의 최대 기부자는 후겐베르크 자신이 되었다.[15]

후겐베르크는 우익 "국가" 영화 제작을 위해 독일과 유럽 최대 영화 제작사인 UFA 스튜디오를 인수했지만, 이념보다 이윤에 더 관심이 있었다.[15] 1930년부터 1933년까지, "국가" 영화는 제한적으로 제작되었으며, 상수시의 플루트 콘서트de (1930), 요르크de (1931), 비밀 정보국의 임무de (1931), 모르겐로트de (1933)만이 흥행에 성공했다.[15] 반유대주의에도 불구하고, 후겐베르크는 UFA에서 일하는 많은 유대인들을 해고하지 않았다. 경쟁 스튜디오에 인재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15]

7. 1. 베스타프 축출

쿠노 폰 베스타르프, 후겐베르크 이전의 국가인민당(DNVP) 당 의장


1928년 선거에서 국가인민당(DNVP)은 큰 손실을 보았고, 이는 같은 해 10월 21일 후겐베르크가 단독 의장으로 임명되는 결과로 이어졌다.[14] 후겐베르크는 이전 지도자인 쿠노 그라프 폰 베스타르프 아래에서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방향으로 당을 이끌었다.

1928년 선거 이후, 국가인민당 국회의원 발터 람바흐는 Politische Wochenschriftde라는 저널에 기고하여, 국가인민당의 저조한 성적이 군주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람바흐는 대다수의 독일 국민이 망명한 황제의 복귀를 원하지 않으며, 당이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공화국을 받아들인 대중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람바흐는 자신의 기사를 국가인민당이 평범한 독일인들의 우려를 다루는 Volkskonservatismusde (민중 보수주의)가 필요하며, 군주제 부활은 그중 하나가 아니라고 쓰면서 끝맺었다.

후겐베르크는 당의 강령 변화를 용납할 수 없는 국가인민당 군주주의 순수주의자들의 지도자였으며, 람바흐의 기사에 대해 비난하는 것에만 동의한 베스타르프를 끌어내리기 위해 국가인민당에 람바흐를 제명할 것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28년 7월, 후겐베르크의 선동으로 국가인민당 포츠담 지부는 자체적으로 람바흐를 제명하여, 베스타르프에게 기정사실을 제시했고, 이는 람바흐 사건에 대해 당의 지역 구성원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보여주었다. 후겐베르크는 이 승리를 기념하여 기고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국가인민당이 "엄밀한 의미의 의회 정당이 아니라, 의견 공동체이지 이해관계 공동체가 아니다"라는 것이었으며, 이는 그의 견해로는 람바흐의 기사가 가장 비참하고 최근의 사례일 뿐인 핵심 원칙에서 국가인민당을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후겐베르크는 국가인민당이 가치를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지도하고 이끄는 이념적인 정당만이 독일 국민의 영혼과 경제를 구할 수 있다!"

후겐베르크는 람바흐를 베스타르프에 대한 공격의 대리인으로 삼아, 국가인민당이 군주주의자와 공화주의자와 같이 가치가 다른 사람들의 breide ("뒤범벅")가 될 수 없으며, 당의 가치를 지키는 데 헌신하는 "강한" 지도자만이 이끌 수 있으며, 그는 분명히 자신을 의미하는 권위주의적인 스타일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 람바흐는 제명에 항소하여 국가인민당으로 복귀했는데, 그는 여전히 군주주의자이며 그의 기사는 단지 논쟁을 촉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람바흐 사건은 국가인민당의 당원들을 베스타르프에게서 후겐베르크로 결집시켰으며, 후겐베르크는 국가인민당이 그해 말에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당 대회를 소집할 것이며, 람바흐 사건이 천우신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람바흐 사건을 자신의 구호로 삼아, 후겐베르크는 당원들 사이에서 공격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으며, 범게르만 동맹이 국가인민당의 많은 지역 지부를 장악했다는 사실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1928년 10월 20일 당 대회가 시작되었을 때, 베스타르프는 가장 최근 선거에서 국가인민당의 저조한 성적에 대해 사과해야 했고, 당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대표자들에게 직접 호소하면서, 시작부터 방어적인 입장에 놓였고, 이는 그를 약한 지도자로 보이게 했다. 반대로, 매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했지만, 후겐베르크는 당의 운명을 회복할 확실한 계획을 가진 사람으로 자신을 내세울 수 있었다. 범게르만 동맹 회원들이 당 대회에서 과도하게 대표되었다는 사실은 1928년 10월 21일 국가인민당의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된 후겐베르크에게 더욱 유리하게 작용했다. 베스타르프에 대한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후겐베르크는 사업가로서의 자신의 성공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너무 부유해서 대기업으로부터 독립적이며 자신의 노선을 따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후겐베르크는 자신이 너무 부유해서 대기업으로부터 더 이상 기부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사비로 국가인민당에 전적으로 자금을 지원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후겐베르크는 언론의 힘을 빌려 1928년 가을 베스터프 집행부를 사임하게 만들었다.[37] 1928년 10월 20일 당 대회에서 국가인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38][39]

7. 2. 민족주의와 지도자 원리

후겐베르크는 급진적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바이마르 헌법을 무너뜨리고 권위주의적인 정부를 세우려 했다.[4] 그는 당내 민주주의를 폐지하고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de)를 도입하려 했으며, 이 때문에 1929년 말 일부 당원들이 보수 국민당(KVP)을 창당하게 되었다.[4]

1930년 6월,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에 대한 후겐베르크의 극단적인 반대로 더 많은 당원들이 탈당했다.[4] 산업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도력 아래에서 산업계 지지층은 점차 DNVP를 떠났다. 이는 후겐베르크가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으며, 곧 당은 국회에서 농업계 이익을 대변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14] 후겐베르크의 브뤼닝 내각 불참은 산업가들의 큰 반발을 샀고, 그들은 후겐베르크의 지도력 하에서 DNVP가 영구적인 야당 신세라고 불만을 제기했다. 그 결과 1931년까지 DNVP의 최대 기부자는 후겐베르크 자신이 되었으며, 이는 그의 당내 통제력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15]

8. 양극화 정치

후겐베르크는 독일 정치를 우익 "국민" 블록과 좌익 블록으로 양극화하여 중간 정당들의 지지를 약화시키려는 전략을 추구했다. 이 전략은 1929년 영 플랜 국민투표를 통해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돌프 히틀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19][55] 히틀러는 후겐베르크를 통해 정치 주류에 진입했지만, 영 플랜이 국회를 통과하자마자 관계를 끊었다.[19] 히틀러는 후겐베르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도, 대기업과의 관계는 유지하여 DNVP를 버리고 나치당으로 향하는 재벌들의 움직임을 이끌었다.[20]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 후겐베르크를 내각에 참여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1930년 1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후겐베르크에게 "반의회적이고 반마르크스주의적"인 새로운 대통령 정부 구성을 제안하며 각료 참여를 요청했지만, 후겐베르크는 배상금 지불에 반대하며 거절했다.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는 후겐베르크의 지지를 얻기 위해 농민 지원 확대와 세금 인상을 결합한 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DNVP 내부에서는 이 법안에 대한 의견이 분열되었고, 후겐베르크는 당내 통제력을 잃었다. 결국 법안은 대통령령으로 제정되었지만, 후겐베르크는 DNVP 의원들에게 법안 취소 투표를 명령했고, 이는 당내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1930년 선거에서 후겐베르크는 연설자로서의 단점을 드러내며 대중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의 언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격에 집중했지만, 나치당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선거 결과, DNVP는 의석수가 크게 감소한 반면, 나치당은 크게 약진했다.

1930년 11월, 브뤼닝은 다시 후겐베르크에게 정부 참여를 요청했지만, 후겐베르크는 "붕괴"를 기다리겠다며 거절했다. 1931년 2월, 후겐베르크는 브뤼닝 정부에 항의하며 나치당과 함께 국회를 떠났지만, 이는 두 당 사이의 느슨한 연합인 국민 야당으로 이어졌다.[22]

대공황으로 인해 후겐베르크 신문의 수익이 감소하면서, 그는 DNVP의 재정적 자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는 반유대주의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인 논조에도 불구하고, 독일 유대인 은행가의 도움을 받아 대출을 받기도 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후겐베르크를 싫어했지만, 그의 이웃인 엘라르트 폰 올덴부르크-야누샤우를 통해 후겐베르크와 만남을 가졌다. 후겐베르크는 힌덴부르크에게 자신만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힌덴부르크는 그의 오만함에 분노했다.

후겐베르크의 언론은 나치당을 칭찬하면서도, DNVP가 연합 파트너로서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효과가 없었다. DNVP 당원들은 나치당 당원들과 달리 회비 납부 의무가 없다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했고, 후겐베르크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당의 예산은 삭감되었다. 그의 농업 관세 지지와 복지 국가 대체 요구는 도시민들의 반감을 샀다.

8. 1. 영 계획 반대와 나치당과의 협력

후겐베르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55] 그는 독일 정치를 자신이 이끌 우익 "국민" 블록과 사회민주당, 공산당으로 구성된 좌익 블록으로 나누는 분열 정치를 추구했다.[55] 이러한 분열 전략의 일환으로, 쟁점을 자극적으로 제시하여 중도 정당들의 지지를 약화시키려 했다.[55]

1929년 봄, 후겐베르크는 영 계획에 대한 반대를 분열 정치의 핵심 쟁점으로 삼았다.[56] 그는 바이마르 헌법 조항을 이용하여 영 계획에 대한 국민 투표를 추진했다.[56] 후겐베르크는 영 계획이 독일을 "재정적 노예" 상태로 만들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56]

후겐베르크는 프란츠 젤트, 하인리히 클라스, 테오도어 듀스터베르크, 프리츠 티센 등과 함께 "독일 국민 청원 위원회"를 설립하여 영 계획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16] 그는 자신의 미디어 제국을 활용하여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후겐베르크는 DNVP와 엘리트 동맹만으로는 국민 투표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노동 계급의 지지를 받는 민족주의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기로 결정했다.[17] 후겐베르크의 지원으로 나치당은 재정적 지원과 언론의 호의적인 보도를 얻게 되었다.[17] 요제프 괴벨스는 처음에는 이 동맹에 반대했지만, 후겐베르크가 나치당에게 선전 활동과 미디어 접근을 허용하자 마음을 바꾸었다.[18]

영 계획에 반대하는 국민 투표 캠페인 메달. "독일 국민의 자유 투쟁"이라고 적혀 있다.


국민 투표에 제출될 "독일 국민의 노예화 방지법"(일명 "자유법")의 4항은 영 계획 찬성자와 배상금 지급 공무원을 투옥하는 내용으로, 히틀러의 제안으로 삽입되었다. 이 조항은 DNVP 내부의 분열을 일으켰고, 많은 산업가들은 중립을 선언했다. 1929년 11월 30일, "자유법"이 국회에 상정되었을 때, 여러 DNVP 의원들이 반대하거나 기권했다. 국민 투표 결과, "자유법"은 통과에 필요한 표를 얻지 못했다.

히틀러는 후겐베르크를 통해 정치 주류에 진입한 후, 영 플랜이 국회를 통과하자 후겐베르크와의 관계를 끊었다.[19] 후겐베르크의 분열 전략은 히틀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55] 히틀러는 후겐베르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도, 대기업과의 관계는 유지했다.[20]

8. 2. 리더십 실패

1928년 10월 20일 당 대회에서 쿠노 폰 베스터프를 대신하여 독일 국가인민당 당수로 선출된 후겐베르크는[38][39] 당의 노선을 급격하게 전환시켰다. 그는 정부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의회주의 옹호"라며 강하게 비판했다.[34]

1929년 영 안에 반대하며 프란츠 젤트, 하인리히 클라스, 테오도어 듀스터베르크, 프리츠 티센 등과 함께 "독일 국민 청원 위원회"를 설립했다.[16] 이 위원회에는 나치당도 참여하여 반(反) 영 안 투쟁을 벌였다.[40][41][42] 후겐베르크는 히틀러를 이용하여 대중적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히틀러는 영 안이 통과되자 후겐베르크와의 관계를 끊었다.[19]

1930년 9월 14일의 선거에서 독일 국가인민당은 73석에서 41석으로 참패한 반면, 나치당은 12석에서 107석으로 약진했다.[46] 이는 후겐베르크의 강경 노선에 대한 실업계와 농촌의 반발로, 나치당 지지로 돌아선 결과였다.[47][48] 그럼에도 후겐베르크는 정부 협력 요청에 대해 배상 파기를 요구하며 거부했다.[49]

1931년 하르츠부르크 전선을 결성하여 "국민 반대파" 재통일을 시도했으나, 히틀러는 처음부터 이를 좋게 보지 않았고,[50][51] 결국 나치는 독자 노선으로 돌아갔다.[52]

9. 하르츠부르크 전선



1928년 선거에서 국가인민당(DNVP)이 큰 손실을 입은 후,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당 의장으로 임명되었다.[14] 그는 쿠노 그라프 폰 베스타르프 전임 의장보다 훨씬 급진적인 방향으로 당을 이끌었다. 후겐베르크는 영 계획에 격렬히 반대하며, 프란츠 젤트, 하인리히 클라스, 테오도어 듀스터베르크, 프리츠 티센과 같은 인물들과 함께 "독일 국민 청원 위원회"를 설립했다.[16]

후겐베르크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과의 협력을 통해 우익 세력 통합을 시도했다. 그는 나치당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나치당은 후겐베르크의 재정적 지원과 언론의 호의적인 보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며 후겐베르크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17]

후겐베르크와 히틀러는 1931년 10월 21일 바트 하르츠부르크에서 광범위한 우익 집회를 열어 하르츠부르크 전선을 결성했다.[50][51] 그러나 두 지도자는 곧 충돌했고, 후겐베르크가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으면서 그 간극은 더욱 벌어졌다.[24]

9. 1. DNVP-나치당 협력

1931년 10월, 후겐베르크는 철모단, 나치스와 함께 하르츠부르크 전선을 결성하여 정부에 대항하는 "국민 반대파"의 재통일을 꾀했다.[50][51] 이는 국가인민당의 세력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강했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처음부터 이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50][51] 그 때문에 곧 나치는 하르츠부르크 전선에서 이탈하여 독자 노선으로 돌아갔다.[52]

1931년 봄과 여름에 독일 은행 시스템이 붕괴된 것을 후겐베르크는 민족주의적 Sammlungde(결집)을 만들 기회로 보았다.[23] 1931년 7월 9일, 후겐베르크는 히틀러와 함께 바이마르 "체제" 전복을 위해 협력할 것을 보장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23] 후겐베르크는 DNVP-NSDAP 연립 정부가 통치하는 landde(주)인 브라운슈바이크의 바트 하르츠부르크에서 자신의 전선을 창설하여 우파의 단결을 상징화하려 했다.[23] 히틀러는 이 계획에 신중을 기했고, 후겐베르크는 사적으로 히틀러의 "과대망상, 통제 불능, 경솔함, 판단력 부족"을 불평했다.[23]

1931년 바트 하르츠부르크에서 에이텔 프리드리히 왕자와 함께 있는 후겐베르크


바트 하르츠부르크에서 열릴 공동 집회 전에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후겐베르크는 1931년 9월 슈테틴에서 DNVP의 당 대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나치 집회를 본떠서 만들었다.[23] 프로이센의 오스카 왕자, 루드비히 폰 슈뢰더 제독,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원수, 프리츠 티센과 같은 인물들이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후겐베르크가 군국주의적 군주주의자이며 그의 경제 정책이 대기업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23]

9. 2. DNVP 몰락과 나치당 부상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후겐베르크는 아돌프 히틀러 지지를 거부했다.[24] 히틀러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것을 우려한 후겐베르크는 테오도어 뒤스터베르크에게 융커 후보로 출마하도록 설득했다.[53],, 뒤스터베르크는 유대인 혈통에 대한 나치당의 의혹 제기로 인해 1차 투표에서 탈락했고, 히틀러는 대통령직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24] 뒤스터베르크가 히틀러의 30.1%와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49.6%에 비해 6.8%의 득표율만을 얻었기 때문에 그는 대통령 선거 2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제2차 대통령 선거에서는 힌덴부르크 지지든 히틀러 지지든 상관없이 당원의 자유 투표에 맡겼다.[54]

1932년 4월 프로이센 주 의회 선거에서 후겐베르크는 NSDAP(나치당)-DNVP(독일 국가인민당) 연정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다.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DNVP 유권자들은 대거 나치당으로 옮겨갔고, DNVP는 1928년의 마지막 프로이센 선거에 비해 득표율이 56%나 감소했다. 반대로 나치당은 프로이센 주의회에서 8석에서 162석으로 의석 수를 늘렸다. 프로이센 선거는 나치당이 DNVP를 대신하여 우익의 주요 정당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프란츠 폰 파펜은 극도로 인기가 없는 총리였고, 1932년 7월 독일 연방 선거에서 DNVP는 역사상 최악의 결과를 기록하며 득표율 5.9%만을 얻어 Reichstagde에서 36석만을 얻었다. 반대로 NSDAP(나치당)는 자유 선거에서 역사상 최고의 결과를 얻어 득표율 37%와 Reichstagde에서 230석을 얻었다.

후겐베르크의 당은 1932년 11월 독일 연방 선거에서 나치당을 희생시키면서 지지세가 성장했다. 후겐베르크는 다시 한 번 파펜의 대통령 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10. 히틀러의 권력 장악

1923년 1월, 독일이 프랑스에 대한 배상금 지불을 거부하자 프랑스는 루르 점령을 명령했고, 이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Katastrophenpolitikde 지지자였던 후겐베르크는 인플레이션을 바이마르 공화국 종말의 시작으로 환영하며, 경제적 재앙이 "제3제국"으로 이어질 furor teutonicusde를 깨울 것이라고 주장했다.[21] 그는 독일에게 필요한 것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대중을 이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고 말했다.[22] 1923년 위기 동안,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은 후겐베르크가 수상직을 추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23] 독일 인민당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수상직을 수락하고 1923년 9월 소극적 저항을 끝낸 결정은 후겐베르크에게 배신으로 여겨졌다.[23]

1923년 11월, 나치당이 맥주홀 폭동을 일으키자, 후겐베르크 신문에서 처음으로 상당한 보도를 받았다.[22] 아돌프 히틀러와 다른 나치 지도자들은 선의를 가졌지만 잘못된 길을 가는 애국자로 묘사되었다. 후겐베르크 소유 신문의 사설에서 히틀러는 "특별히 인기 있는 연설가"로 칭찬받았지만, 폭동은 규탄받았다.[23]

1924년 도스 안을 통해 배상금 지급이 감소하자, 미국 은행가들은 국영 철도인 ''도이체 라이히스반''을 차관에 대한 담보로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24] 1924년 5월 독일 연방 선거에서 DNVP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헌법을 개정하려면 DNVP 국회의원들의 표가 필요했고, 이는 당을 둘로 쪼갰다.[24] 후겐베르크는 도스 안 거부를 원하는 파벌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독일 국민의 3분의 2는 ... 몇 푼의 은화와 맞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고 썼다.[25] 1924년 8월 27일 투표에서 DNVP 국회의원 49명이 도스 안을 찬성했고 48명이 반대했다. 후겐베르크는 투표에 불참했다.

DNVP가 한스 루터 정부를 지지하기로 동의한 후, 후겐베르크는 1925년 2월–3월에 일련의 에세이를 썼다.[28]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후겐베르크 신문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대통령으로 지지했다.[20]

히틀러는 후겐베르크를 이용하여 정치 주류로 진입했고, 영 플랜이 국회에서 통과되자마자 히틀러는 후겐베르크와의 관계를 끊었다.[19] 히틀러는 후겐베르크를 캠페인 실패의 책임자로 비난했지만, 대기업과의 관계는 유지했다.[20] 1930년 1월 6일, 후겐베르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면담에 소환되었고, 힌덴부르크는 "반의회적이고 반마르크스주의적" 새로운 대통령 정부를 구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힌덴부르크는 후겐베르크가 새 정부의 각료가 되기를 원했지만, 후겐베르크는 배상금을 지불하는 정부의 각료가 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하인리히 브뤼닝의 새 대통령 정부를 후겐베르크가 지지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농민에 대한 정부 지원을 늘리는 법안이 제출되었다. 1930년 4월 12일 법안의 1차 심의에서 DNVP는 분열되었고, 후겐베르크가 자신의 Reichstagde 대표단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히틀러가 그를 조롱하게 만들었다. 1930년 선거 캠페인 동안 후겐베르크는 연설자로서 어색하고, 오만하고, 따분하게 보였다. 선거는 DNVP가 Reichstagde에서 73석에서 41석으로 감소하는 것으로 끝났고, 나치는 1928년에 얻은 12석에서 107석으로 증가했다.

1930년 11월 26일, 브뤼닝은 후겐베르크에게 정부 참여를 요청했지만, Katastrophenpolitikde을 따르던 후겐베르크는 거부했다. 1931년 2월 10일 후겐베르크는 브뤼닝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DNVP와 함께 국회를 완전히 떠나는 나치당에 합류했다.[22]

대공황으로 후겐베르크 신문의 수익이 감소하자, 1931년에 후겐베르크는 DNVP가 재정적으로 자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후겐베르크를 싫어했지만, 그의 이웃인 엘라르트 폰 올덴부르크-야누샤우는 DNVP 당원이었다. 올덴부르크-야누샤우를 통해 후겐베르크는 힌덴부르크를 만날 수 있었지만, 후겐베르크의 오만한 자만심은 힌덴부르크를 격분시켰다.

후겐베르크 미디어 제국의 주력 신문인 Der Tagde는 나치의 "희생 의지"와 "싸움의 용기"를 칭찬했지만, 나치당이 단독으로 통치할 수 없으며 DNVP가 연합 파트너로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31년, 후겐베르크는 DNVP의 예산을 31% 삭감해야 했다.

10. 1. 파펜, 히틀러와의 협상

1933년 1월 초, 쿠르트 폰 슐라이허 총리는 후겐베르크를 포함한 확대 연립 정부를 구상했으나, 후겐베르크는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반감으로 아담 슈테거발트와의 협력을 거부하여 협상이 중단되었다.[25] 이후 후겐베르크는 나치당과의 협력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1933년 1월 11일 리페 주 선거에서 독일 국가인민당(DNVP)이 부진한 결과를 얻자, 권력 획득에 대한 절박함이 커진 후겐베르크는 히틀러와의 협상을 재개했다.[25]

1933년 1월 17일, 후겐베르크와 히틀러의 만남에서 히틀러는 총리직을 요구하며 슐라이허 내각 참여를 거부했다. 후겐베르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25] 프란츠 폰 파펜의 중재로 히틀러를 총리로 하는 내각 구성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힌덴부르크는 후겐베르크에게 경제부 및 농업부 장관직을 제안했다.[25] 후겐베르크는 히틀러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둘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 제안을 수락하고, 슈탈헬름 지도자 테오도르 뒤스터베르크에게 "우리가 히틀러를 가두겠다"라고 말했다.[55]

1933년 1월 27일, 후겐베르크는 히틀러와 다시 만나 파펜이 히틀러를 총리로, 자신을 부총리로 하는 내각을 지지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겐베르크는 "경제 독재자"가 될 기회와 파펜의 확신에 따라 히틀러 내각 참여를 결정했다.[25]

10. 2. 히틀러 내각 각료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내각이 성립되면서 후겐베르크는 경제·농업 장관으로 입각했다.[56] 히틀러는 나치당의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기 위해 총선거를 원했지만, 후겐베르크는 정권 내 나치당의 영향력 확대와 자신의 당의 영향력 감소를 우려하여 총선거에 반대했다. 대통령 관저에서 임명식이 열리기 전, 후겐베르크는 총선거 반대 의사를 전달하며 히틀러와 갈등을 빚었으나, 힌덴부르크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그 자리에서 대립은 일시적으로 보류되었다.[57]

나치당은 제1당이었지만, 연립 여당인 국가인민당과 합해도 국회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힌덴부르크는 중앙당을 연정에 포함시키려 했기에 내각은 먼저 중앙당과 연립 교섭을 진행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보수파 각료들에 의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총선거를 원했고, 후겐베르크 역시 가톨릭을 혐오하여 중앙당을 여당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내각과 중앙당의 연립 교섭은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고, 2월 1일에 결렬되었다. 히틀러는 다시 총선거를 요구했지만, 후겐베르크는 여전히 총선거에 반대하며, 공산당을 금지하고 그 의석을 박탈함으로써 나치당과 국가인민당만으로 과반수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히틀러의 강행으로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국가인민당은 철모단과 함께 '흑백적'이라는 선거 연합을 결성하여 선거에 임했다. 1933년 3월 5일 투표 결과, 나치당은 44%의 득표율을 얻은 반면, '흑백적'은 8%의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쳤다. 이 시점에서는 나치당과 국가인민당을 합쳐 과반수를 확보했지만, 3월 9일 공산당 의석이 재선거 없이 소멸되면서 총 의석수가 감소하여 나치당이 단독 과반수를 얻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국가인민당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는 입지를 잃고 급격히 정권 내 영향력을 상실했다. 1933년 3월 23일 전권 위임법(정식 명칭: '국민과 국가의 위기를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 가결되자, 나치당에게 국가인민당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연립 파트너가 되었다.

후겐베르크는 히틀러 내각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Reichstagde 선거는 없을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선서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히틀러가 새로운 선거를 소집할 계획임을 알게 되었고, 이는 히틀러와의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오토 마이스너는 대통령 집무실에 나타나 힌덴부르크가 30분을 더 기다려야 했으며, 선서식을 취소하겠다고 위협했다고 전했다. 파펜은 분쟁을 중재하며 새로운 선거 문제는 새 정부가 선서한 후에 고려될 것이라고 말했다. 후겐베르크는 처음에 히틀러가 즉시 새로운 선거를 소집하려는 계획에 반대했는데, 이는 그러한 투표가 자신의 당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토 마이스너로부터 그 계획이 힌덴부르크의 지지를 받았다는 정보와 파펜으로부터 슐라이허가 군사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은 후, 후겐베르크는 히틀러의 뜻에 따랐다.

후겐베르크는 Reichde와 프로이센 경제 및 농업부 장관을 겸임하며 "경제 독재자"가 되려는 계획을 자랑했고, 새로운 정부에서 지배적인 장관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그는 범게르만 동맹의 경제 전문가인 파울 방을 경제부 차관(두 번째 인물)으로 임명했다. 방은 "자급자족적인 사상과 인종적 광신"으로 유명했으며, 경제보다는 반유대주의 법에 더 관심을 갖는 것으로 밝혀졌다.

후겐베르크는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자였기 때문에 독재자가 되려는 히틀러의 야망을 막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1933년 2월 2일,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에게 새로운 선거를 위해 Reichstagde을 해산할 것을 요청했고, 그 요청은 승인되었다. 후겐베르크는 모든 신문에 게재된 사설에서 새 정부가 "무신론, 자유주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세력에 맞서 "기독교 보수적인 삶의 방식"을 수호하고 "프로이센 전통"에 따라 운영되는 "순수한 국가"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립 파트너를 지나치게 공격할 수는 없었지만, 후겐베르크는 나치가 "사경제의 원칙을 모호하게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지자들이 국가인민당에 투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3년 2월 28일,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마리누스 판 데르 뤼베가 정치적 항의의 표시로 Reichstagde에 불을 지르기로 결정하면서 발생한 방화 사건이 일어났을 때, 후겐베르크는 히틀러의 주장에 동의하여 그 화재가 공산주의 음모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Reichstagde 화재 직후 연설에서 후겐베르크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가혹한 조치"의 필요성과 "볼셰비즘이 번성할 수 있는 온상 제거"에 대해 언급하며 "이 엄숙한 시대에는 더 이상 어떤 타협도, 어떤 비겁함도 있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내각의 다른 국가인민당 구성원들과 함께 그는 1933년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에 찬성 투표를 하여 사실상 시민의 자유를 소멸시켰다.

후겐베르크는 다른 국가인민당 국회의원들과 함께 수권법에 찬성 투표했는데, 그는 수권법의 발효가 "현재 정부"를 지칭한다고 정당화했으며, 이는 히틀러가 자신을 내각에서 해임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11. 정계 퇴출

1926년 1월, 후겐베르크는 절친한 친구인 하인리히 클라스가 주도한 쿠데타 계획에 연루되었다. 이 계획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독일 국회에서 총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인물을 임명하게 하여 불신임 투표를 유도하고, 힌덴부르크가 국회를 해산하고 사임하게 하는 것이었다. 클라스는 후겐베르크를 새 정부의 재무 장관으로 임명할 계획이었다.[31] 그러나 프로이센 경찰이 이 계획을 적발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후겐베르크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언론 대변인 루드비히 베른하르트는 후겐베르크를 독일 언론을 "이질적인" 유대인 가문으로부터 보호한 애국자로 칭송했다. 1927년에는 유럽 최대 영화 스튜디오인 UFA를 인수하여 더욱 주목을 받았다. 후겐베르크는 UFA 인수를 정치적 움직임으로 제시하며, "공화주의자, 유대인, 국제주의자"가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후겐베르크는 DNVP가 여러 연합에 참여하는 동안 당 지도부와 갈등을 빚었다. 그는 당의 원칙을 배신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당 지도자인 쿠노 폰 베스타르프의 접근 방식에 대한 주요 비판자였다. 1927년, 셰를 출판사는 후겐베르크의 에세이를 출판하여 베스타르프의 정책을 공격하고 DNVP 지도자로서의 그의 역량에 도전했다.

1933년 히틀러 내각에서 경제부 장관과 농업부 장관을 겸임했지만, 1933년 수권법 통과 이후 나치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33년 12월에는 후겐베르크 소유의 뉴스 통신사인 텔레그래프 연합이 선전부에 의해 사실상 인수되어 새로운 독일 뉴스 사무소로 합병되었다.[27] 후겐베르크는 1945년까지 비당파 대표로 공식 지정된 22명의 소위 "객원" 의원 중 한 명으로 국회에 남았다.

11. 1. 나치와의 결별

1933년 선거에서 후겐베르크의 DNVP는 52석을 얻었지만, 1933년 수권법 통과로 당의 영향력은 사라졌다.[27] 후겐베르크는 새 정부에서 경제부 장관과 농업부 장관을 겸임했지만, 다른 보수적인 장관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자급자족 경제에 대한 후겐베르크의 계획은 실행 불가능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장관으로서 후겐베르크는 농업 부문을 활성화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지만, 버터와 마가린 가격 급등으로 인해 농업계 밖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또한, DNVP는 법의 지배를 중시했지만, 나치는 불법적인 행동을 통해 DNVP에게 이미 벌어진 일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었다.

1933년 6월, 런던 세계 경제 회의에서 후겐베르크는 독일의 식민지 확장이 대공황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여 외교적 파문을 일으켰다.[28] 그는 독일이 "공간이 없는 민족"이므로 아프리카의 옛 식민지를 반환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와 소련 정부는 이에 항의했고, 독일 외무장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후겐베르크의 발언이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후겐베르크는 내각에서 더욱 고립되었고, 결국 사임 압력을 받게 되었다. 1933년 6월 29일, 후겐베르크는 경제부 장관과 농업부 장관직에서 사임했으며, 쿠르트 슈미트와 리하르트 발터 다레가 각각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DNVP는 나치와의 "우호 협정"에 따라 1933년 6월 27일에 해산되었고, 후겐베르크는 당원들에게 나치당에 가입할 것을 촉구했다.[30] 후겐베르크는 DNF(1933년 5월부터 DNVP의 공식 명칭) 해산 협정에 서명했고, 히틀러는 DNF 당원인 공무원들을 인정하고 투옥된 당원들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후겐베르크는 1933년 11월 선거에서 나치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그의 미디어 제국은 점차 나치에 의해 인수되었다. 1933년 12월, 후겐베르크 소유의 텔레그래프 연합은 선전부에 인수되어 독일 뉴스 사무소로 합병되었다. 1943년에는 에어 페르라크가 그의 셔를 하우스를 매입했다.[14]

12. 말년

후겐베르크는 초기에 텔레그래프 연합을 잃었지만, 1943년 에어 페르라크가 그의 셔를 하우스를 매입할 때까지 대부분의 미디어 관련 사업을 유지했다. 그러나 후겐베르크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며, 협력의 대가로 라인란트-베스트팔렌 산업의 상당한 지분 포트폴리오를 협상했다.[14] 1935년까지 후겐베르크는 셔를 신문과 UFA만 소유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연간 50만 독일 제국 마르크(Reichsmarks)의 수입을 올렸다. 셔를 하우스의 강제 매각 협상은 발터 펑크 제국 경제부 장관이 주도했으며, 그는 후겐베르크에게 셔를 신문을 팔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가 요구하는 모든 가격을 지불할 것이라고 했다. 1944년 매각 직후, 영국 폭격으로 셔를 신문이 발행되던 신문 공장이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후겐베르크는 리페의 로브라켄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서 살았다. 1946년 9월 28일 영국 군사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의 남은 자산은 동결되었다. 후겐베르크는 처음에는 전쟁 후 구금되었지만, 1949년 데트몰트탈나치화 법원은 그를 나치라기보다는 "동조자"로 판결하여, 재산과 사업 이권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14] 그는 1951년 3월 12일 데트몰트 근처 엑스터탈의 퀴켄브루흐에서 사망했다.

13. 후겐베르크 소유 또는 부분 소유 신문

1928년 베를린 셰를하우스


셰를 출판사 발행 신문



후겐베르크 소유 또는 부분 소유 신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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