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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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된 중국의 군현으로, 예맥의 땅에 위치했다. 초기에는 현재의 함경남도 일대에 위치했으나, 토착민의 저항과 고구려의 성장으로 인해 여러 차례 위치를 옮겨 다녔다. 기원전 75년에는 랴오닝성 푸순시 일대로 이동했고, 이후 요동군 내부로 편입되기도 했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319년에 정복되었으며, 5세기 초에 멸망하여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현도군은 고구려와 잦은 충돌을 겪었으며, 고구려 건국과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논쟁과 관련하여, 북한 학계와 일부 한국 학계에서는 현도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주류 학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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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위만조선 멸망 후 설치한 한나라의 군현으로, 주변 소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현도군 | |
---|---|
개요 | |
이름 | 현도군 (玄菟郡) |
로마자 표기 | Hyeondo-gun |
한자 표기 | 玄菟郡 |
한국어 표기 | 현도군 |
역사 | |
설치 | 기원전 107년 (전한 무제 시기) |
초기 위치 | 요동군 동쪽 |
이동 | 기원전 82년, 고구려 북쪽으로 이동 |
재이동 | 서기 12년, 요동군으로 복귀 |
폐지 | 3세기 초, 위나라 시기 |
지리 | |
위치 변화 | 초기 요동군 동쪽, 이후 고구려 북쪽, 최종 요동군 |
행정 구역 | |
주요 현 | 고구려현 서개마현 상은대현 요양현 |
문화적 영향 | |
관련 유적 | 적석총, 고분군 등 |
기타 | |
관련 인물 | 고구려 건국 세력과 연관 |
2. 역사
기원전 75년 현도군은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일대로 치소를 옮기고 3개 현을 관할하였는데, 치소는 고구려현(高句麗縣)이었다. 유주자사부에 속했다.[21]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에 총 3현을 다스렸으며, 원시 2년(2년)의 인구는 45,006호, 221,845명이었다.[22][21]
1세기 무렵부터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현도군을 압박했고, 현도군은 다시 무순(撫順) 방면으로 옮겨졌다. 이때 요동군에 속한 4개 현을 편입하여 일시적으로 군세를 확장하기도 했다. 이후 공손씨의 지배 하에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는 한편 서진(西晉) 말기의 혼란 속에서 선비족 모용부의 지배를 받으면서 현도군은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사마의의 요동 정벌 이후 조위의 현도군에는 고구려, 고현(高顯), 요양(遼陽), 왕평(望平)의 4개 현만 남았다. 결국 5세기 초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현도군은 멸망하고 요동군과 함께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3]
2. 1. 설치 이전
현도군은 본래 예맥의 땅으로 기원전 128년에 창해군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20] 예맥의 군장인 남려(南閭)가 28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는데, 한나라는 그 지역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군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기원전 126년에 철폐되었다.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자 임둔군의 소속 현들이 현도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토착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현도군은 기원전 75년에 서북쪽으로 옮겨가면서 현도군의 본래 소속 현들과 옛 임둔군 소속 현들 대부분이 폐지되었다.2. 2. 제1현도군 (기원전 107년 ~ 기원전 82년)
기원전 128년 예맥의 군장 남려(南閭)가 28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면서 창해군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20]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자 임둔군의 소속 현들이 현도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토착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은 서북쪽으로 옮겨갔고, 이 과정에서 현도군 본래 소속 현들과 옛 임둔군 소속 현들 대부분이 폐지되었다.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일대로 치소를 옮긴 현도군은 3개 현을 관할하였는데, 치소는 고구려현(高句麗縣)이었다.유주자사부에 속했다.[21]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에 총 3현을 다스렸으며, 원시 2년(2년)의 인구는 45,006호, 221,845명이었다.[22][21][2]
현명 | 한자 | 대략적 위치 | 비고 | 신 현명 | 한자 |
---|---|---|---|---|---|
고구려현 | 高句驪縣 |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 서 |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와 남서로 요대(遼大)에 이르러 대료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어 북서로 새외로 지나간다. | 하구려현 | 下句驪縣 |
상은태현 | 上殷台縣 | 퉁화시 | 하은현 | 下殷縣 | |
서개마현 | 西蓋馬縣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강도 고풍군 고풍읍·위원군 삼각리 | 이수(夷水)가 동으로 새외로 들어간다. | 현도정현 | 玄菟亭縣 |
2. 3. 제2현도군 (기원전 82년 ~ 기원전 75년)
기원전 82년,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면서 임둔군에 속해있던 현들이 현도군으로 편입되었다.[20] 그러나 토착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기원전 75년 현도군은 서북쪽으로 이동하였고, 이 과정에서 본래 현도군 소속 현들과 옛 임둔군 소속 현들 대부분이 폐지되었다.[20] 이때, 옥저의 요새에서 고구려현으로 군의 치소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는 예맥족의 침입 때문이었다.[1] 그 결과, 이전의 현들 중 일부는 폐지되거나 재할당되었으며, 이 중 일곱 개의 현은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영동칠현" (嶺東七縣)이라고 불렀다.[1]이후 현도군은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일대로 치소를 옮기고 3개 현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치소는 고구려현이었다.[20] 유주자사부에 속했으며,[21]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45,006호, 221,845명이 있었다.[22][21]
아래는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총 3현이다.[22][21]
현명 | 한자 | 대략적 위치 | 비고 | 신 현명 | 한자 |
---|---|---|---|---|---|
고구려현 | 高句驪縣 |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 서 |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와 남서로 요대(遼大)에 이르러 대료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어 북서로 새외로 지나간다. | 하구려현 | 下句驪縣 |
상은태현 | 上殷台縣 | 퉁화시 | 하은현 | 下殷縣 | |
서개마현 | 西蓋馬縣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강도 고풍군 고풍읍·위원군 삼각리 | 이수(夷水)가 동으로 새외로 들어간다. | 현도정현 | 玄菟亭縣 |
기원전 75년(원봉 6년), 미개하고 인구가 적은 북부 및 동부의 구릉·산악 지대는 통치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직접 지배를 포기하고 책봉 체제 하의 간접 지배로 전환하는 방침이 정해졌다. 이에 따라 현도군은 서쪽으로 축소 이전되었고, 군치는 랴오닝성 푸순 시 내 동부, 신빈 만족 자치현 영릉 진 노성촌(옛 흥경) 부근으로 옮겨졌다. 원래의 장소에는 고구려후(후의 고구려 왕국의 전신)가 책봉되었다.
2. 4. 제3현도군 (기원전 75년 ~ 5세기 초)
기원전 128년 예맥의 군장인 남려(南閭)가 28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여 창해군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20] 하지만 거리가 멀어 군을 유지하기 어려워 얼마 지나지 않아 철폐되었다.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자 임둔군의 소속 현들이 현도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토착민들의 저항으로 기원전 75년 현도군은 서북쪽으로 옮겨가면서 본래 소속 현들과 옛 임둔군 소속 현들 대부분이 폐지되었다.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일대로 치소를 옮긴 현도군은 3개 현을 관할하였는데, 치소는 고구려현이었다.유주자사부에 속했다.[21]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 현도군에는 총 3개의 현이 있었고,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45,006호, 221,845명이 있었다.[22][21][2]
현명 | 한자 | 대략적 위치 | 비고 | 신나라 현명 | 한자 |
---|---|---|---|---|---|
고구려현 | 高句驪縣 |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 서 |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와 남서로 요대(遼大)에 이르러 대료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어 북서로 새외로 지나간다. | 하구려현 | 下句驪縣 |
상은태현 | 上殷台縣 | 퉁화시 | 하은현 | 下殷縣 | |
서개마현 | 西蓋馬縣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강도 고풍군 고풍읍·위원군 삼각리 | 이수(夷水)가 동으로 새외로 들어간다. | 현도정현 | 玄菟亭縣 |
기원전 128년 예맥의 군장 남려(南閭)가 28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여 창해군이 설치되었으나, 유지 문제로 곧 철폐되었다.[20]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20] 기원전 82년 임둔군이 현도군에 병합되었다. 기원전 75년, 현도군은 옥저에서 고구려현으로 치소를 옮겼는데, 이는 예맥족의 침입 때문이었다.[1] 그 결과, 이전의 현들 중 일부는 폐지되거나 재할당되었으며, 이 중 일곱 개의 현은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영동칠현" (嶺東七縣)이라고 불렀다.[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와 일부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한나라가 한반도 일부를 병합한 것을 부인해 왔다. 이러한 수정주의 이론의 지지자들은 한사군이 실제로는 한반도 밖에 존재했으며, 대신 요동군에 위치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현도군은 선양에 있었다고 한다.[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일부 학계에서는 한나라가 한반도 일부를 병합했다는 주장을 부인한다. 이들은 한사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으며, 요동군에 속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현도군은 선양에 위치했다.
[1]
문서
"《漢書·地理志》:“玄菟郡......, 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1세기 무렵부터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현도군을 압박했고, 현도군은 다시 무순(撫順) 방면으로 이치되었다. 이때 요동군에 속한 4개 현을 편입하여 일시적으로 군세를 확장하기도 했다. 이후 공손씨의 지배 하에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는 한편 서진(西晉) 말기의 혼란 속에서 선비족 모용부의 지배를 받으면서 현도군은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사마의의 요동 정벌 이후 조위의 현도군에는 고구려, 고현(高顯), 요양(遼陽), 왕평(望平)의 4개 현만 남았다. 결국 5세기 초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현도군은 멸망하고 요동군과 함께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3]
3. 태수
4. 고구려와의 관계
이러한 변화로 고구려현, 상은대 (上殷台), 서개마 (西蓋馬) 세 개의 현만이 현도군에 남게 되었다.[1] ''한서''에는 서기 2년 당시 현도군에 45,006호, 221,845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
1세기 무렵부터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현도군을 압박했고, 현도군은 다시 무순(撫順) 방면으로 이치되었다. 이후 공손씨의 지배를 받으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고, 서진(西晉) 말기의 혼란 속에서 선비족 모용부의 지배를 받으면서 현도군은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조위 사마의가 238년 사마의의 요동 정벌에서 공손연을 정벌했을 때, 서쪽으로 후퇴한 새로운 현도군에는 고구려, 고현 (高顯), 요양 (遼陽), 왕평 (望平)의 네 개의 현만 남았다. 현도군은 319년에 고구려에 의해 정복되었다.[3]
후한 말, 요동태수 공손씨가 독립하자, 인접한 옛 현도군 서단부에서 고구려를 몰아냈다. 그 후, 조위는 고구려에 관구검을 파견하여 환도성을 파괴했다. 동진 시대에 옛 현도와 현도·요동 두 군은 후연과 고구려 사이에서 쟁탈이 반복되었지만, 404년 최종적으로 요동군은 고구려 영유가 되었다. 이 전후로 현도군도 고구려에 넘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5세기 초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현도군은 멸망하고 요동군과 함께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
고구려 5부족의 전신이 현도군 5현의 현후였다면, 32년 (건무 8년)에 왕으로 책봉된 단계에서 5부족 연합체로서 왕국이 성립했다고도 볼 수 있다. 고구려 왕도 "환도성"은 현도성이 와전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제2 현도군 기간에 해당하므로, 중국 측에서 고구려후라고 불린 세력이 대략 그 무렵에 건국된 것은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수 문제 치세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수와 고구려의 관계가 긴장되었을 때, 배구는 수 문제에게 "고려(한반도)는 본래 고죽국이며, 주대에는 기자를 봉했습니다. 한대에는 3군(낙랑, 현도, 임둔 내지 대방)으로 나뉘었고, 진조도 요동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하가 아니며 외역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한반도 영유의 필요성을 설파했다.[16]
고구려 국가 발전은 현도군에 대한 복속 저항 과정이 큰 의의를 가지며, 한인들이 고구려 왕권에 흡수되어 고구려 발전에 기여했다.[17]
5. 이설
이러한 가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으며, 대한민국 내 아마추어 역사 애호가들의 지지를 받지만, 미국, 중국 및 일본 학계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1]
6. 현대의 논쟁
이 가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대한민국 내 일부 역사 애호가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미국, 중국, 일본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참조
[2]
문서
"玄菟郡......, 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s:zh:漢書/卷028下|Wikisource: the Book of Han, volume 28-2]]"
[3]
서적
A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Kegan Paul International
2012-02-09
[4]
간행물
Constructing "Korean" Origins: A Critical Review of Archaeology, Historiography, and Racial Myth in Korean State Formation Theories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5]
서적
North Korea: A Country Study
https://books.google[...]
Nova Science Publishers
[6]
서적
Korea: Current Issues and Historical Background
Nova Science Publishers
[7]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Land of the Morning Calm" to States in Conflict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8]
서적
Sourcebook of Korean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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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人物
大修館書店
[9]
서적
中国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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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古代の日本〈第3〉九州
"[[角川書店]]"
1970-01-01
[9]
서적
古代の日本 9 研究資料
"[[角川書店]]"
1971-10
[10]
문서
人口28万人は1戸5人と概算すると約5万〜6万戸となり、後世(三世紀)の高句麗3万戸東濊2万戸沃沮5千戸の合計に近い。
[11]
문서
『史記』及び『漢書』武帝紀による。『漢書』食貨志では「蒼」の字を「滄」としているが一般的にはこちらは誤字と考えられている。
[12]
서적
考古紀行 騎馬民族の道はるか―高句麗古墳がいま語るもの
"[[NHK出版|日本放送出版協会]]"
1994-03-01
[13]
서적
高句麗の歴史と遺跡
"[[中央公論新社|中央公論社]]"
1995-04-01
[14]
문서
高句驪県城は以後玄菟郡の郡治となったので一名「玄菟城」ともいった。
[15]
문서
少数意見ではあるが玄菟郡の郡治は夫租県ではなく最初から高句驪県にあったという異説を唱える学者([[李丙燾]])もいる。
[16]
서적
帝国としての中国
"[[東洋経済新報社]]"
2013-07-26
[17]
뉴스
韓国・日本の歴史教科書の古代史記述
http://www.jkcf.or.j[...]
"[[日韓歴史共同研究]]"
2010-03
[18]
뉴스
“중 교과서 ‘고조선=야만, 삼국=신라·백제·가야’”
https://www.hani.co.[...]
2007-03-20
[19]
서적
한서, 권7, 소제기
https://zh.m.wikisou[...]
[20]
웹사이트
현도군-브리태니커 백과사전
http://100.nate.com/[...]
[21]
서적
汉书地理志汇释
安徽教育出版社
2006-06
[22]
문서
반고: 《한서》 권28 지리지 제8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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