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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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장엽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동 출신으로, 주체사상 개발에 기여하고 북한 고위직을 역임하다가 1997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평양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 유학 중 중퇴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뒤 모스크바대학교에서 유학했다.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주체사상 체계화에 기여했다. 1997년 중국 베이징에서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며 북한 체제를 비판했다. 2010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암살 시도와 관련된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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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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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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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황장엽 |
로마자 표기 | Hwang Jang-yeop |
출생일 | 1923년 2월 17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동군 |
사망일 | 2010년 10월 10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사망 원인 | 심장마비 |
국적 | 대한민국 |
직책 | |
직책 |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 |
임기 시작 | 1972년 12월 28일 |
임기 종료 | 1983년 4월 7일 |
전임자 | 최용건 |
후임자 | 양형섭 |
국가 주석 | 김일성 |
총리 | 김일 박성철 리종옥 |
소속 정당 | |
정당 | 조선로동당 (1946년–1997년) |
기타 정당 | 무소속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박승옥 (사별) |
자녀 | 2남 3녀 (장녀 황선희, 막내아들 황경모) |
학력 | |
학력 | 소련 모스크바 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
기타 | |
경력 | 조선로동당 대표최고전임위원 조선사회과학자협회 회장 겸 위원장 대한민국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상임고문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대한민국 전주대학교 석좌교수 |
친인척 | 박길(장인) 박철(처숙부) 김구일녀(처숙모) 김정일(사돈) 최현(사돈) 리수용(사돈) 황기봉(12촌 형) 황태순(13촌 조카) |
부모 | 황원택(부) |
2. 생애
1923년 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강동에서 태어났다.[60] 1949년 소련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1965년 총장이 되었다. 1970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이후 당 국제 담당 서기 및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등 요직을 역임하며 김일성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학자로서 여러 외국에 연구 서클을 설립하여 주체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된 후, 김일성은 백두산을 방문하여 백두밀영과 정일봉을 명명하며 김정일의 출생지를 신격화하기 시작했다.[23] 황장엽은 이때 "김일성도 속물이다"라고 느꼈다고 회고했다.[23]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과의 갈등으로 당 내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1997년 일본 방문 직후, 베이징에서 김덕홍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51] 망명 이유로 조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에 대한 변혁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34]
2010년 10월 10일 서울 논현동의 국정원 안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 1. 출생 및 교육
황장엽은 1923년 2월 17일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아버지 황원택의 아들로 태어났다.[60] 어린 시절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잠시 지내기도 했으며, 주로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평남강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평양고등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36년 평양고등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학 및 편입하여 1941년에 졸업하였다. 아버지 황원택은 본부인을 여의고 재혼한 부인에게서 황장엽과 동생 황봉엽 두 형제를 두었다. 황장엽의 아버지 황원택은 일찍 사망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942년, 황장엽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주오 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하였으나, 1944년 2월 일제의 패전 징후로 인해 강제 소환되어 졸업하지 못했다. 주오 대학을 중퇴한 후, 약 1년 6개월 동안 강원도 삼척 탄광에서 징용 생활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 후 서울을 거쳐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다.[50]
1947년, 만 24세의 나이로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여 1951년 정치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모스크바 대학교 대학원에서 법철학 석사(1952년) 및 철학박사(1954년) 학위를 취득하였다.[2] 1955년 귀국 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65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기여하였고, 김정일의 개인 강사를 맡기도 했다.
황장엽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중앙대학교 법학부에서 수학한 경험 덕분이었다. 그는 북한에 거주할 때부터 여러 차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 일본어로 응하기도 했다.
2. 2. 북한에서의 활동
1949년 소련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60] 귀국 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65년에는 동 대학 총장에 취임했다. 1970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 이후, 1972년부터 1982년까지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역임했다. 1980년에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장, 1984년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86년에는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앙위원장, 1987년에는 조선사회과학자협회장 및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장 등 여러 요직을 겸임했다. 1970년대에는 주체사상을 체계화하고, 이를 제3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해외에 주체사상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1950년대 후반, 황장엽은 김일성이 "주체는 조선의 혁명을 의미한다"고 말한 1955년 연설문, 「[독단과 형식주의를 없애고 사상 사업에서 주체를 세울 데 대하여]」를 발견했다. 당시 김일성은 자신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황장엽은 "주체사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을 개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1940년대와 1950년대 초 김일성의 연설에 있던 찬양가를 모두 삭제하고, 김일성이 창립부터 조선로동당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였던 것처럼 보이도록 조선 공산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을 감독했다.[3]
1972년 황장엽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되었으며, 이 자리를 11년 동안 유지했다.[4] 그러나 1983년 최고인민회의에서 제거되었고 그의 지위는 악화되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김정일의 스승이었지만, 김정일은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만 그에게 말을 걸었는데, 특히 중국의 자본주의 개혁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 질책했다.[12] 김정일의 고문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황장엽은 "내가 무언가를 제안하면 처음에는 듣는 척을 하지만, 결국에는 결코 듣지 않는다."라고 말했다.[5]
황장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되자, 김일성은 조선 민족의 성산으로 알려진 백두산을 방문하여 경치 좋은 곳을 함부로 가리키며 "거기가 아들의 태어난 백두밀영 터다"라고 말하고, 뒤쪽 산을 "정일봉"으로 명명했다고 한다.[23] 이로써 김정일의 출생지는 백두산이 되었고 신격화가 시작되었다.[23] 이때 황장엽은 "김일성도 속물이다"라고 느꼈다고 한다.[23]
학자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여러 외국에 연구 서클을 설립하여 주체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봉건주의에서 공산주의에 이르는 북한의 발전 단계에서 황장엽의 생각은 김일성과 달랐다. 황장엽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회 발전론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이념의 과도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과도기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김일성으로부터 “자본·일화견 양 이념자”로 여겨졌다. 이에 대해 김정일은 “황장엽은 주체사상 체계화에 필요한 인재”라며 아버지에게 중재하여 무사히 넘어갔다. 그러나 이후 황장엽은 여러 인터뷰에서 김정일보다 김일성을 더 높이 평가하며, 김일성은 중국식 개혁개방에 긍정적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덩샤오핑과의 갈등으로 중국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김정일은 자기 보신을 우선시하여 경제를 침체시켰다고 증언했으며,[24] 이는 다른 기록 자료에서도 뒷받침된다.[25][26]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잘 알려지지 않은 지인이 황장엽에게 30년 동안 개혁 개방을 같이 하자며 "너희 그러다가 진짜 망한다.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김정일을 중국에 보내 달라!"고 했고, 이에 황장엽은 김정일에게 중국에서 오라고 하는데 한번 가보라고 제안했다가 "그 나쁜 XX들! 무엇 때문에 중국에 가겠소?"라며 욕하던 김정일에 의해 결국 당 내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51]
2. 3. 대한민국 망명
1997년 주체사상에 관한 강연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직후, 베이징에서 김덕홍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하였다.[51] 그의 수기에는 망명 이유를 조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체제에 의분(義憤)을 느껴 그 변혁을 도모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34]하지만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자신이 담당하던 당 국제사업의 실패가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52] 망명 후에는, 각종 강연을 통해 김정일 정권의 타도를 주장하였으나 이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집권 시절에 진행된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그의 주장은 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0년간 정부에 의해 활동제한조치를 당해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다가,[53]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 해제되었다.[54] 이후 사망할 때까지 미국의 보수인사들과 함께 김정일 정권 타도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상황을 폭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황장엽이 1997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직후 당 간부들을 상대로 한 비밀연설에서 황장엽을 “개만도 못하다”고 격렬하게 매도했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2010년 4월 4일에 보도했다.
자신이 기초를 다진 주체사상이 북조선에서 김일성·김정일 숭배를 위한 봉건사상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무한할 수 있다"는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생명관을 김 부자가 ‘수령 절대주의’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공개 강연이 되고만, 지난달 30일 자유북한방송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에서 "개인은 죽어도 집단은 영생합니다"라고 강조하는 등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 정치철학을 중시했다.
또한 황장엽은 1997년 망명 직후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상식화되어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묵살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해,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음을 밝혔다.[55][56][57] 1985년 당시 소련측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지난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북한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소련도 85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북한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밝혔다.[58][59]
1997년 2월, 경왕프라자호텔에서 열린 주체사상국제연구소의 국제 세미나 일본 실행위원회가 주최한 강연 “21세기와 인간의 지위에 관한 국제 세미나”[27] 참석차 방일 후 귀국길인 2월 12일, 베이징에서 비서 김덕홍(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과 함께 한국 대사관에 가서 탈북을 신청하였다.[28][29][30] 4월 20일 한국에 입국하였다.[32][33]
탈북 이유에 대해, 황장엽은 수기에서 조국의 체제에 의분을 느껴 그 변혁을 꾀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34] 그러나 황장엽은 공산당 체제보다 한 단계 진일보한 독재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비를 수행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국내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자기 보신을 위해 탈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중국 거주 조선족 여성과의 간통 관계로 인해 입장이 악화되어 탈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 탈북 동기의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황장엽의 탈북 전후로 북한 당국은 공식 선전에서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빈도를 줄이고 “적기 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관찰되었다.[35] 이로 미루어 북한 당국이 “주체사상”(자주자립노선)을 철회해야 할 필요성에 몰리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적기 사상”이라는 용어는 곧 사라졌다.
황장엽과 같은 고위 관료가 탈북했다는 것은 김정일 체제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인상을 해외 관찰자들에게 주었다. 일본에서는 현대코리아연구소 관계자를 중심으로 일부에서 정권 붕괴 직전이라는 추측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탈북을 계기로 김정일은 황장엽의 친족 3000명을 일제히 체포하여 강제수용소에 수감하였다.[36]
망명 후 황장엽은 서울을 기반으로 작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김정일 정권 타도를 목표로 활동했다.
2004년 2월에는 서울에 있는 그의 지지자 사무실에 빨간 페인트로 훼손된 황장엽의 사진과 협박 편지가 함께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망명부터 사망까지 황장엽은 서울 자택 주소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항상 국가정보원 직원과 경찰관의 경호를 받으며 활동했기 때문에 습격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대신 지지자들이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2006년 12월 21일에는 황장엽이 회장으로 있던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에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라는 내용의 협박 편지와 빨간 물감이 묻은 황장엽 사진, 도끼 등이 들어있는 소포가 배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8년 9월 27일에는 한국대학교총학생회연합 출신의 좌익 성향 학생 운동가가 이 사건의 범인으로 경찰에 검거되었고,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사무실 압수수색에서도 협박과 관련된 문서가 발견되었다.[37]
2007년 4월 경찰의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사무실 압수수색에서는 황장엽에 대한 “북한과 관련 없도록”, “처단과 응징” 등이 적힌 협박 메모가 발견되었다.
2. 4. 사망
2010년 10월 10일 논현동의 국정원 안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1] 장례식은 양녀인 김숙향 등이 주관하였으며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시신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소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3. 암살 시도 및 위협
황장엽은 1997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이후, 김정일 정권으로부터 지속적인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마이니치 신문의 2010년 4월 4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은 황장엽의 망명 직후 당 간부들을 상대로 한 비밀연설에서 그를 "개만도 못하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52]
사건 발생일 | 사건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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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 서울에 있는 황장엽 지지자 사무실에 빨간 페인트로 훼손된 황장엽의 사진과 협박 편지가 발견됨. |
2006년 12월 21일 |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에 황장엽을 협박하는 내용의 소포가 배달됨. 소포에는 배신자는 대가를 치른다는 협박문과 함께 붉은색 그림도구가 칠해진 황장엽의 사진, 도끼 등이 들어 있었음. 이 사건의 범인은 2008년 9월 27일 경찰에 체포됨.[61] |
2007년 4월 | 경찰의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사무실 압수수색에서 황장엽에 대한 “북한과 관련 없도록”, “처단과 응징” 등이 적힌 협박 메모가 발견됨. |
2010년 4월 20일 | 황장엽 암살 지령을 받고 남파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첩 2명이 검거됨.[64] 이들은 김명호, 동명관으로, 김영철 정찰총국장으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은 것으로 밝혀짐. 이들은 탈북자로 위장하여 대한민국에 잠입했으나, 탈북자 심사 과정에서 발각되어 체포됨. 이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으며,[64] 2010년 7월 1일 10년형이 확정됨.[66] |
2015년 5월 17일 | 한국 검찰은 2009년부터 2010년까지 북한이 황장엽 암살 계획을 세웠다고 발표함. 북한은 필로폰 거래를 하던 한국인을 이용하여 암살을 시도하려 했으나, 황장엽이 2010년 10월 10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65] 계획은 무산됨.[48] |
황장엽은 망명 이후 대한민국에서 작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며 북한 정권을 비판했고, 데일리NK에 기고하며 망명과 관련된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13][14][15] 그는 사망할 때까지 국가정보원과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4. 논란과 비판
황장엽은 자신이 기초를 다진 주체사상이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 숭배를 위한 봉건사상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다.[51] 그는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무한할 수 있다"는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생명관을 김 부자가 '수령 절대주의'로 왜곡했다고 지적하며, <자유북한방송>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에서 "개인은 죽어도 집단은 영생합니다"라고 강조하는 등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 정치철학을 중시했다.[51]
김정일은 황장엽이 1997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직후 당 간부들을 상대로 한 비밀연설에서 황장엽을 “개만도 못하다”고 격렬하게 매도했다고 마이니치 신문이 2010년 4월 4일에 보도했다. 황장엽은 1997년 망명 직후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상식이며, 1985년 소련 측이 핵 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묵살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이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렸다.[55][56][57]
망명 이후 황장엽은 서울을 기반으로 작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김정일 정권 타도를 목표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협박을 받았다. 2004년 2월에는 서울에 있는 그의 지지자 사무실에 빨간 페인트로 훼손된 황장엽의 사진과 협박 편지가 함께 발견되었고, 2006년 12월 21일에는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에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라는 내용의 협박 편지와 빨간 물감이 묻은 황장엽 사진, 도끼 등이 들어있는 소포가 배달되었다. 2008년 9월 27일에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출신의 좌익 성향 학생 운동가가 이 사건의 범인으로 경찰에 검거되었고,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사무실 압수수색에서도 협박과 관련된 문서가 발견되었다.[37]
2009년, 탈북 지원 활동을 하던 아드리안 홍과 서울에서 만나 김정일 정권을 대체할 북한 망명 정부 수립에 대한 협력을 요청받았지만, 한반도의 정당한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뿐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38][39] 2010년 4월 20일, 한국 경찰 당국은 황장엽 암살을 목적으로 잠입한 북한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소속 스파이 2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4. 1. 현충원 안장 논란
2010년 10월 10일 논현동의 국정원 안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황장엽은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67]하지만 황장엽은 훈장을 받거나 한국 전쟁 등의 업적이 없어 현충원 안장 자격이 없었다.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업적을 인정하여 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황장엽에게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하여 안장 자격을 부여했다. 그러나 훈장을 먼저 받은 후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이 아니라, 현충원 안장을 위해 훈장을 추서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67]
또한 주체사상을 창시하여 독재 정권의 기틀을 마련하고 북한 인권 악화를 초래한 장본인이, 단지 남한으로 넘어와 김정일을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현충원에 안장될 수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민주당 등 야당 측에서는 현충원 안장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민주당 정세균 의원은 "이 분은 주체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고 오늘날 북한 현실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남한에 와서 주체사상을 부정한 바가 없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68]
보수 성향 인물 중 지만원은 "황장엽이 김정일과 관계가 악화되자 남한을 피신처로 이용한 사람이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황장엽은 귀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망명자 신분을 고집해 왔던 사람이다"라며 황장엽의 현충원 안장에 반대했다.[69]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장은 추서되었고 2010년 10월 14일 황장엽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70] 황장엽의 영결식 위원장은 김영삼이 맡았다.[71] 영결식과 장례식장에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비롯한 정, 관계 인사들이 참석했으나,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의 관계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72]
4. 2.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
황장엽은 자신이 기초를 다진 주체사상이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 숭배를 위한 봉건사상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다.[51] 그는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무한할 수 있다"는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생명관을 김 부자가 '수령 절대주의'로 왜곡했다고 지적했다.[51] 그는 자신의 마지막 공개 강연이 된 <자유북한방송>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에서 "개인은 죽어도 집단은 영생합니다"라고 강조하며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 정치철학을 중시했다.[51]황장엽은 1997년 망명 직후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상식이며, 1985년 소련 측이 핵 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묵살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이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렸다.[55][56][57]
1950년대 후반, 황장엽은 김일성이 "주체는 조선의 혁명을 의미한다"고 말한 1955년 연설문, 「독단과 형식주의를 없애고 사상 사업에서 주체를 세울 데 대하여」를 발견했다.[3] 당시 김일성은 자신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황장엽은 "주체사상"을 개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3] 이 과정에서 그는 1940년대와 1950년대 초 김일성의 연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찬양가를 모두 삭제했다.[3] 또한, 김일성이 창립부터 지배 정당인 조선로동당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였던 것처럼 보이도록 조선 공산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을 감독했다.[3]
황장엽은 일본 뉴스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본래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의 실정에 맞춰 조선 민족이 주체적으로 혁명 운동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김일성 등의 개인숭배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5. 저술 활동
황장엽은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후 20권의 책을 출판했다.[20]
출판 연도 | 제목 | 출판사 |
---|---|---|
1999 | 역사의 진실을 보았다 | 한울 |
1999 | 김정일에게 선전포고: 황장엽 회고록 | 문예춘추(文藝春秋) |
2001 | 어둠에 편승한 햇빛은 어둠을 이길 수 없다 | 월간조선 |
2001 | 김정일에게 선전포고: 황장엽 회고록 | 분춘문고(文春文庫) |
2002 | 세계 민주화와 인류 최후의 전쟁 | 시대정신 |
2002 | 개인의 생명보다 소중한 국가의 생명 | 시대정신 |
2003 | 인간 중심 철학에 대한 몇 가지 문제 | 시대정신 |
2003 | 북한 붕괴 시나리오 | 가와데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 |
2005 | 민주 정치 철학 | 시대정신 |
2006 | 북한의 진실과 허위 | 시대정신 |
2006 | 변증법적 전략 전술론 | 시대정신 |
2006 | 황장엽 회고록 | 시대정신 |
2007 | 청소년을 위한 철학 | 시대정신 |
2008 | 인간 중심 철학 원리 | 시대정신 |
2008 | 북한 민주화와 민주 전략 | 시대정신 |
2008 | 김정일을 고발하다: 황장엽이 말하는 조선반도의 실상 | 산케이신문출판(産経新聞出版) |
2009 | 변증법과 변증법적 전략 전술 | 시대정신 |
2009 |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 시대정신 |
2010 | 논리학 | 시대정신 |
2010 | 인간 중심 철학 - 세계관 | 시대정신 |
2010 | 인간 중심 철학 - 역사관 | 시대정신 |
2010 | 인간 중심 철학 - 인생관 | 시대정신 |
6. 학력
7.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버지 | 황원택 | 1887년 ~ 1941년 | 일찍 사망하여 알려진 바 없음 |
배우자 | 박승옥 | 1922년 ~ 1999년 | |
장녀 | 황선희 | 1945년 ~ 사망 | |
차녀 | 황노선 | 1947년 ~ 사망 | |
3녀 | 황선옥 | 1949년 ~ 사망 | |
아들 | 황경모 | 1952년 ~ 1999년 | |
남동생 | 황봉엽 | 1928년 ~ 사망 | |
수양딸 | 김숙향 | ||
사실혼(동거) 관계 | 한국인 부인 | ||
아들 | 불명 | 한국인 부인에게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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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別寄稿》禍転じて福となす?柔軟化する北朝鮮黄書記亡命後の金正日体制 / 吉田 康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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話題の交差点 黄書記、亡命――北朝鮮ミステリー / 松石正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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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集 拉致と亡命 データ 黄長燁書記の書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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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レーダー 〔北〕 赤旗思想VS主体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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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イドリアン・ホン氏が亡命政府を提案、金正男氏・黄長ヨプ氏は拒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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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長燁元労働党秘書の家族3人が脱北…第3国に滞留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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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살해' 지령 남파간첩 구속...정찰총국 소속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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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암살조' 2명 징역 10년형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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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황장엽, 훈장 추서·현충원 안장 자격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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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사망을 보는 與 vs 野, 보수 vs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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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대한민국 1등급 국민훈장 추서…대전 현충원 안장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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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황장엽씨 영결식… 현충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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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201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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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민노당 등 황장엽 영결식 불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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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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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을 현충원에 모시는 얼빠진 나라
http://www.news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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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황장엽 현충원 안장, 보수진영도 입장 갈려 - 故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 현충원에 안장키로
http://www.newscham.[...]
민중언론 -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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