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덴제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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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덴제섬은 독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포어포메른-뤼겐군에 속하는 섬으로, 뤼겐섬 서쪽에 위치하며 서포메라니아 석호 지역 국립공원 내에 있다. 섬은 지형에 따라 도른부쉬, 뒤넨하이데, 겔렌으로 나뉘며, 클로스터, 비테, 노이엔도르프, 그리벤 등의 정착촌이 있다. 히덴제섬은 지질학적으로 젊은 지형으로, 빙하기에 형성되었으며, 발트해 연안 기후의 영향을 받아 일조량이 많다. 20세기 초부터 예술가들의 섬으로 알려져 많은 예술가들이 거쳐갔으며, 현재도 다양한 문화 시설과 관광 명소가 있다. 섬 내에서는 자가용 운전이 금지되어 있으며, 자전거, 마차, 전기 버스, 선박 등을 이용해 이동한다. 관광이 주요 경제 활동이며, 자연성을 추구하여 관광 부문은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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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덴제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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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 이름 | 히덴제 |
| 독일어 이름 | Hiddensee |
| IPA(독일어) | /ˈhɪdn̩zeː/ |
| 행정 구역 | |
| 국가 | 독일 |
| 주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
| 군 | 포어포메른-뤼겐군 |
| 관리 | 베스트-뤼겐 |
| 지리 | |
| 면적 | 19.02km² |
| 해발 고도 | 0-72m |
| 행정 | |
| 우편 번호 | 18565 |
| 지역 번호 | 038300 |
| 차량 번호판 | RÜG |
| 지방 자치체 코드 | 13 0 73 040 |
| 웹사이트 | 웹사이트 |
| 기타 정보 | |
| 특징 | 조용하고 아이들에게 친화적인 자동차 없는 섬 |
2. 지리

히덴제섬은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포어포메른-뤼겐군에 속하며, 서포메라니아 석호 지역 국립공원에서 가장 큰 섬이다.[2] 뤼겐섬 서쪽에 위치하며, 북쪽의 도른부쉬 구릉 지역, 중앙의 사구 및 황무지 지형(뒤넨하이데), 남쪽의 평평한 겔렌 지역으로 나뉜다. 동쪽은 샤프로더 보덴과 비터 보덴, 남쪽은 겔렌스트롬(슈트랄준트로 가는 해운 채널), 서쪽과 북쪽은 발트해로 둘러싸여 있다.[2]
2. 1. 지형
히덴제섬은 길이가 약 16.8km이고, 가장 좁은 곳은 폭이 약 250m, 가장 넓은 곳은 약 3.7km이다.[2] 서포메라니아 석호 지역 국립공원에서 가장 큰 섬이며, 뤼겐섬 서쪽에 위치한다. 섬은 북부의 구릉 지역인 '도른부쉬'(최고 지점은 바켄베르크)와 중앙의 사구 및 황무지 지형(뒤넨하이데), 그리고 평평하고 높이가 몇 미터에 불과한 남부 지역인 '겔렌'으로 나뉜다. 북동쪽에는 약 3km 길이의 '알터 베신'과 '노이어 베신' 두 사취가 있다. 섬의 동쪽은 '샤프로더 보덴'과 '비터 보덴', 남쪽은 겔렌스트롬, 서쪽과 북쪽은 발트해로 둘러싸여 있다.[2]
히덴제섬은 약 12,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 동안 형성된 젊은 지형이다. 빙하기는 젊은 퇴적 지형을 남겼고, 내륙 빙하가 녹으면서 기반암이 융기하고 함몰부가 물로 채워져 안킬루스 호가 되었다. 그 결과, '도른부쉬'와 같은 능선만 섬으로 남았다. 약 5,000년 전, 해수면이 현재 수준에 도달했고, 해안 침식으로 섬들이 현재의 형태로 바뀌었다. 도른부쉬 북쪽에서 쓸려나간 모래는 남쪽 끝과 샤프로더 보덴 동쪽에 쌓여 ''겔렌'' 남쪽 끝에 ''알터 베신''과 ''노이에 베신''이라는 두 개의 사취를 형성했다. ''알터 베신''은 약 300~400년 전에, ''노이에 베신''은 1900년에 나타났으며, 현재 세 번째 ''베신''이 나타나고 있다. 남쪽 끝은 풍성사구로 샤프로더 보덴으로 확장되고 있다.[7]
'도른부쉬'의 절벽 가장자리는 연간 약 30cm씩 후퇴하며, 2000년에는 60000m3의 퇴적토가 붕괴되기도 했다.[6]
북쪽의 고지대에서 남쪽의 저지대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은 산, 협곡 및 지형이 존재한다(괄호 안의 고도는 해발 고도):[8]
2. 2. 정착촌
히덴제섬에는 다음과 같은 정착촌이 있다.- 클로스터
- 비테
- 노이엔도르프
- 그리벤



그리벤(Grieben)은 히덴제섬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가장 작은 마을이다. 지명은 슬라브어로 버섯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3] 13세기에 독일 수도사들이 도착하기 전 슬라브족 시대에 섬에 존재했던 두 정착촌 중 하나였다. 14세기에는 8채의 오두막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이후로 주택 수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4] 자체 항구는 없다.
클로스터(Kloster)는 13세기 말에 설립된 히덴제섬의 마을 주변에 세워졌다.[5] 19세기 말에는 교회, 영주 저택, 사택, 학교, 그리고 두 채의 노동자 주택만 있었으나, 그 이후 점차 현재의 규모로 성장했다. 많은 예술가, 작가, 과학자들이 이 마을이나 그 외곽에 정착했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거주지로 알려졌으며, 섬 묘지에 그의 묘가 있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하우스, 섬 교회,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발터 펠젠슈타인, 그레트 팔루카의 묘지가 있는 섬 묘지가 있어 히덴제의 문화 중심지이다. 이곳은 해발 고도(Hochland) 가장 높은 지점인 도른부쉬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의 분교인 히덴제 생물학 연구소와 히덴제 조류 관측소가 있으며, 이 두 곳은 모두 1930년에 설립된 히덴제 생물학 연구소에서 파생되었다.
비테(Vitte)는 1513년 문서에 처음 언급되었다.[4] 이름은 저지 독일어에서 유래되었으며 청어 어부의 정착지를 의미한다. 좁은 섬의 중앙에 위치하여 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빠르게 발전했다. 비테에는 교구 회관과 의회 행정부가 있다. 또한 뤼겐섬의 샤프로데에서 배달 및 폐기물 처리 차량을 운송하는 화물 페리가 정박하는 부두가 있다. 화물은 전기 트랙터로 끌어 음식 시장과 섬의 레스토랑으로 분배되는 트레일러로 옮겨진다. 때로는 작은 화물이 말과 마차로 배달되기도 한다. 비테와 노이엔도르프 사이의 히덴제 황무지 풍경도 비테의 일부이다. 비테에는 섬에서 가장 오래된 생존 가옥인 마녀의 집(Hexenhaus|헥센하우스de), 아돌프 라이히바인의 옛 별장이 있다. 또한 마지막 천막 영화관과 인형극 극장(Seebühne Hiddensee|제뷔네 히덴제|italic=unsetde)이 있다.[15]
노이엔도르프(Neuendorf)는 히덴제섬의 최남단 정착지이다. 노이엔도르프 주민들은 섬의 나머지 지역에서 남부인(Die Süder|디 쥐더de)으로 알려져 있다. 비테에서 단 6km 떨어져 있지만, 주민들은 다른 방언을 사용한다. 넓은 지역은 마치 집들이 끈처럼 배열된 넓은 목초지와 같다. 어떤 곳에는 길이 없어서 잔디밭을 걸어서만 갈 수 있는 주소도 있다. 자체 항구를 가지고 있다.
원래 독립적인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더 오래된 마을인 ''플로그샤겐''은 13세기에 존재했으며, 1700년에 ''글람벡''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형성한 실제 노이엔도르프가 있다. 이 정착지의 유적은 오늘날에도 노이엔도르프 교구의 북동쪽에서 여전히 알아볼 수 있다.
노이엔도르프 남쪽에는 겔렌이라고 불리는 중요한 조류 보호 구역이 있는데, 이는 서포메라니아 석호 지역 국립공원의 보존 구역 I에 속하며 따라서 일반인에게는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3. 지질
히덴제 섬은 지질학적으로 매우 젊은 지형이며, 약 12,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 동안 형성되었다. 빙하기는 이곳에 젊은 퇴적 지형을 남겼다. 내륙 빙하가 녹으면서 기반암이 융기하고 함몰부가 물로 채워져 안킬루스 호가 발트해의 전신이 되었다. 그 결과, '도른부쉬'와 같은 돌출된 능선만 섬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발트 해 남부 해안의 전체적인 형태는 약 7,000년에서 2,500년 전 리토리아 해진 동안 형성되었다. 약 5,000년 전, 해수면이 현재 수준에 도달했고, 도른부쉬와 두 개의 오래된 섬 코어가 섬이 되었다. 4,500년 전에는 북해에서 유입되는 염수류가 급격히 감소했다. 그 이후 발트 해는 서서히 덜 짜게 되었다. 해안 침식(토지 박리, 표류 및 퇴적)의 결과로 섬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재의 형태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이전의 세 섬 코어는 점차 부착되어 하나로 합쳐졌다. 이 과정은 여전히 도른부쉬 북쪽에서 모래를 휩쓸어 갔다. 2000년에는 토터 켈(Toter Kerl) 지역의 히덴제 북쪽 끝에서 60000m3의 퇴적토가 두 번 붕괴되어 바다로 떨어졌다. 평균적으로 '도른부쉬'의 절벽 가장자리는 연간 약 30cm씩 후퇴한다. 2004년 3월 중순에는 또 다른 10000m3가 바다로 붕괴되었다. 지질학적으로 볼 때 히덴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역이다.[6] 북쪽 끝에서 쓸려 내려간 육괴는 다시 남쪽 끝과 샤프로더 보덴의 동쪽에서 쓸려 올라온다. 이로 인해 ''겔렌'' 남쪽 끝에 두 개의 지질학적으로 최근에 형성된 사취가 생겼다. 바로 ''알터 베신''과 ''노이에 베신''이다. ''알터 베신''은 약 300~400년 전에 나타나 19세기 중반에는 이미 3km 이상 길어졌다. 그 이후로는 거의 성장하지 않았다. 반면에, 1900년에 나타난 ''노이에 베신''은 연간 30m에서 60m씩 성장하여 이미 3km 길이다. 한편, 세 번째 ''베신''이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남쪽 끝도 소위 풍성사구로 샤프로더 보덴으로 확장되고 있다.[7]
4. 기후

히덴제 섬은 거시 기후학적으로 발트해 연안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해양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자주 교차한다. (쾨펜: ''Cfb''; 트레와르타: ''Dobk'').[9] 특징적으로 바람이 자주 불고, 쌀쌀하며, 변덕스럽고, 햇빛이 긴 기간 동안 비춘다. 연평균 일조 시간은 1,850시간이다. 결과적으로 히덴제 섬은 독일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 중 하나이다. 한 가지 특별한 특징은 이른바 과도기적 풍순환으로, 약하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바람 조건에서 발생하며, 이는 바다와 육지의 온도 차이로 인해 발생한다. 이것은 늦은 아침에 바닷바람을 발생시키고 오후나 저녁에 약해진다.[7]
섬의 연평균 기온은 8°C이다. 클로스터의 평균 풍속은 7m/s이다. 인근 뤼겐 섬과 비교하여 히덴제 섬의 연평균 강수량은 540mm로 현저히 적다.
2008년, 히덴제-도른부시는 기상 서비스 메테오미디어에 따르면 2,168시간의 일조 시간으로 독일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이었다.[10] 데이터는 메테오미디어 자체 기상 관측소에서 수집되었다.
히덴제 기상 관측소는 다음과 같은 극한값을 기록했다.[11]
| 구분 | 값 | 시기 |
|---|---|---|
| 최고 기온 | 35°C | 2010년 7월 10일 |
| 최저 기온 | -20.5°C | 1940년 2월 17일 |
| 최대 연강수량 | 894.1mm | 1960년 |
| 최소 연강수량 | 370.9mm | 1971년 |
| 최장 연간 일조 시간 | 1952.2시간 | 1975년 |
| 최단 연간 일조 시간 | 1478.3시간 | 1978년 |
5. 역사
"히덴제"라는 이름은 사크소 그라마티쿠스가 쓴 ''산문 에다''와 ''데인인의 사적''에 처음 등장하며, "헤딘의 섬"을 의미한다. 전설에 따르면 노르웨이 왕 헤딘이 이곳에서 여자나 금을 얻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 덴마크 통치 시기에는 ''헤딘스-외''(Hedins-Oe, "헤딘의 섬")라는 이름이 널리 쓰였다. 19세기 말 독일 지도에도 ''히덴쇠''(Hiddensjö)로 표기되었고, 1929년 독일 휴가 안내서에는 ''히덴쇠''(Hiddensöe)로 나올 정도였다. 따라서 ''히덴제''(Hiddensee)라는 완전한 독일어화는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졌다.[2]
히덴제섬은 여러 차례 폭풍 해일 피해를 입었다. 1304년 만성절 홍수로 뤼겐섬과 분리되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1864년과 1865년에는 세 번이나 폭풍 해일로 침수되었고, 1872년 발트해 홍수 때는 플로그샤겐 인근 지역이 다시 침수되었다. 현재도 섬이 남북으로 분리될 위험이 있어 해안 방어 조치를 통해 이를 예방하고 있다.[9]
5. 1. 선사 시대 ~ 중세
섬의 첫 정착은 중석기 시대와 후석기 시대에 이루어졌다. 서기 6세기에 게르만족이 남부 발트해 지역을 떠난 후, 슬라브족 계열의 라니족이 섬을 점령했다. 히덴제 보물과 섬의 이름은 이 지역이 9세기에서 10세기 무렵 바이킹의 세력권에 있었음을 보여준다.[16]1168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1세가 뤼겐의 아르코나 곶에 있는 요새 야로마르스부르크를 정복하면서 라니족은 패배하고 기독교화되어 덴마크의 봉건적 종속 하에 놓였다. 히덴제는 이렇게 덴마크의 주권을 받게 되었다. 1296년 4월 13일, 뤼겐의 공작 비츠라프 2세는 히덴제 섬을 노이엔캄프 수도원에 기증했다. 그곳에는 항해사의 수호성인인 성 니콜라스의 이름을 딴 니콜라이캄프라는 이름의 시토회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이 수도원은 존속 기간 내내 클로스터 히덴제라고 불렸다.[16]
2008년 가을, 중세 고고학 펠릭스 비어만의 지휘 아래 고고학자들이 옛 시토회 수도원 부지에서 10개의 매장지를 발굴했다. 9개의 무덤은 수도원 교회 북쪽에서, 1개는 수도원 서쪽 날개 동쪽의 회랑에서 발견되었다. 베티나 융클라우스는 7명의 남성과 2명의 여성 성인, 그리고 1명의 어린 소녀의 유골을 인류학적으로 조사했다. 20세에서 30세 사이의 남성 1명에게서 오른쪽 이마뼈에 치유된 베인 상처가 발견되었다. 50~60세 남성과 14~15세 소녀의 합장묘가 있었는데, 남자는 오른손으로 소녀의 왼팔을 잡고 있었다. 질병 부담은 현저하게 낮았으며, 치주 질환이 가장 흔하게 발견되었다. 충치는 단 하나의 치아 세트에서만 발견되었는데, 이는 중세 인구에게는 드문 현상이었다.[17][18]
수도원 건설과 동시에, 1302년부터 1306년까지 섬 남쪽의 겔렌에 겔렌키르헤, 루체라는 작은 등대, 그리고 최초의 항구가 건설되었다. 이 구조물들의 기초는 오늘날 발트해의 겔렌 서쪽에 위치해 있다.
1332년, 오늘날의 클로스터 지구, 수도원 벽 밖에서 섬의 농부와 어부를 위한 교회 봉헌식인 섬 교회의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세례반이 겔렌키르헤에서 새 교회로 옮겨지면서, 그 이후로 거기에서 목회적 의무가 수행되었다. 1781년경에 지어진 배럴 볼트에는 1922년 베를린 화가 니콜라우스 니에메이어가 장미 장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종교 개혁 과정에서 1536년 수도원이 해산되었다. 30년 전쟁 (1618년~1648년) 동안, 1628년 발렌슈타인의 명령에 따라 군인들이 도른부쉬의 혼합된 참나무 숲을 불태웠고, 이로 인해 덴마크는 목재를 얻을 기회를 잃었다. 21세기에도, 당시의 재층은 등대 근처 길가에서 잔디밭 아래 몇 cm 아래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1648년부터 1815년까지 히덴제는 서부 포메라니아 전체와 마찬가지로 스웨덴의 통치를 받았다.

1754년부터 1780년까지, 요아힘 울리히 기제는 섬의 소유주였으며, 그가 설립한 '스트랄준더 파이엔첸마누팍투어'를 위해 점토를 채취하기 시작했다.[19]
5. 2. 근세 ~ 현대
1800년부터 1836년까지 이 섬은 빌헬름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폰 바게비츠 대위와 랄로에게 속해 있었다. 그는 세금을 늘리고, 히덴제 섬 사람들을 강제 노동 시켰으며, 아이들을 위한 학교 설립을 막았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1806년에 농노제를 폐지했음에도 히덴제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1815년부터 히덴제와 포어폼메른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프로이센에 속해 있었으며, 뤼겐 지역에 할당되었다. 1836년, 슈트랄준트의 성령 수도원이 섬을 획득했고, 1837년과 1840년에 각각 플로크샤겐과 클로스터에 섬 최초의 학교가 세워졌다. 1854년과 1864년 사이에는 히덴제에서도 토지 관계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1861년까지 히덴제는 수십 년 동안 나무가 거의 없었다. 13세기에 존재했던 히덴제의 빽빽한 참나무는 17세기 초까지 장작, 집, 선박 건조를 위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1628년 화전이 숲을 파괴했다는 전설은 에일하르트 루빈의 1602년 뤼겐 지도에 히덴제에 나무가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1861년에 처음으로 소나무가 심어졌고, 1900년경에는 여러 지역에 소나무가 심어졌다.
1864년과 1872년, 이 섬은 심각한 폭풍 해일의 피해를 입었다. 첫 번째 홍수 동안 히덴제는 두 부분으로 갈라졌으며, 6년 후 광범위한 재건 조치를 통해서만 복구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폭풍 해일 이후, 10세기 바이킹 작품인 히덴제 보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복제품은 히덴제 지역 역사 박물관에서 볼 수 있으며,[20] 원본은 슈트랄준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874년, 히덴제 지역은 독일 제국에서 형성되었다. 1875년, 화가 구스타프 쇤레버는 히덴제를 "발견"했다. 1888년 클로스터에 도른부쉬의 등대, 항구, 해상 구조대가 완공되었다. 1887년 클로스터에 방파제가 건설되었고, 1905년과 1907년 비테와 노이엔도르프에 증기선 착륙 다리가 건설되었다. 1892년부터 증기선이 처음으로 슈트랄준트와 클로스터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했다. 1905년부터 의료 협회가 설립되면서 히덴제 최초의 의사가 면허를 받았다.
클로스터에 있는 5개의 대형 호텔이 거의 동시에 건설되면서 관광객 수가 급증했고, 클로스터는 섬의 주요 관광 리조트가 되었다.
히덴제 자연 보호 협회가 설립되면서, 페어린젤은 1910년에 자연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고, 겔렌과 겐세베르더는 1922년에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지정되었다. 도른부쉬, 슈베덴하거 우퍼와 알트베신은 1937년에 자연 보호 구역 지위를 받았다.
1916년부터 1921년까지, 사진작가 엘프리데 라이헬트가 여러 번 이 섬을 방문했다. 1922년에서 1925년 사이에 막스 타우트는 매년 히덴제에 집을 지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22년에 지어진 비테의 ''카루셀''로, 무성 영화 배우 아스타 닐센이 1928년에 거주지로 구입했다.
1927년에는 섬에서 자동차의 사용을 금지하는 경찰 규정이 발표되었다. 같은 해 섬은 전력망에 연결되었고, 3년 후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의 에리히 라이크가 설립한 생물학 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이는 조류 관측소와 함께 1936년에 히덴제 생물학 연구소가 되었다.

1937년에 훅케 앞의 큰 석재 제방과 석재 돌망태 작업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건설 작업이 중단되었고, 400미터만 완공되었다.
1937년에서 1939년 사이에 섬의 세 지역 사회가 합쳐져 히덴제 자치 단체를 형성했다. 1939년 이전까지, 파울 뷔스텐베르크 가문은 239ha의 ''슈타트구테 클로스터 히덴제''의 임차인이었다.[21] 그는 나중에 알브레히트 폰 하겐이 계승했다.[23]
1930년대 말,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방공을 위해 엔도른에 벙커와 대공포 무기가 건설되었고, 자재 수송을 위한 슈베덴하겐에 부두가 건설되었다. 벙커는 1945년 소련군에 의해 폭파되었고, 부두는 1960년대에 VEB Erdöl-Erdgas Grimmen에 의해 실험적인 유정 굴착을 위해 개발되었다. 부두는 그 후 1974년부터 섬 공급을 위한 푸셔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2010년에 철거되었다.
5.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5월 4일에서 5일 사이에 소련군이 섬을 점령했다. 같은 해와 이듬해, 히덴제 영지는 토지 개혁의 일환으로 18개의 새로운 농장으로 분할되었다.[24]1946년 7월 28일,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이 클로스터 (히덴제섬)의 묘지에 묻혔다. 기념비는 정확히 5년 후인 1951년 7월 28일에 공개되었다.[24]
1952년, 뤼겐의 제호프와 섬 사이의 두 번째 페리 운행이 중단되었다.[24]
1958년과 1959년 사이, ''VEB 차량 및 사냥 무기 공장 "Ernst Thälmann"''은 뒤넨하이에에 직원들을 위한 휴양 마을을 건설했다. 바로 옆에, ''건설 및 조립 콤비나트 산업 및 항만 건설 슈트랄준트''는 1980/81년에 직원들을 위한 또 다른 휴양 마을을 건설했다.[24]
1952년부터 1955년까지 히덴제는 행정적으로 베르겐 구에 속했다. 1953년, ''장미 작전'' 동안, 일부 호텔 운영자는 서방으로 도망쳤고, 다른 사람들은 체포되었다. 이 작전 이후, 섬의 모든 호텔은 몰수되어 FDGB에 넘겨졌다. 1950년대에 지역 역사 박물관과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하우스가 문을 열었고, LPG 도른부쉬가 설립되었다.[24]

1962년, 클로스터와 비테 사이에 제방 공사가 시작되었다. 보덴 해안을 따라 초원과 목초지에 제방을 쌓으면서 히덴제의 가장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비테에서는 보덴 해역이 이전에는 ''비젠베크'', ''노르데르엔데'' 및 ''춤 제글러하펜'' 거리까지 닿았다. 오늘날 비테 항구의 많은 부분과 오늘날의 스포츠 경기장, 헬리포트 및 요트 항구 란게 오르트가 인공적으로 씻겨 올라오거나 배수되었다. 또한 클로스터에서도 보덴의 일부가 배수되었는데, 이는 제방 공사 전에는 항구에서 ''회에 포스트베크'' 뒤까지 뻗어 있었다.[24]
바이세 플로테 슈트랄준트는 협동 해운 회사를 인수했고, 어부들은 노이엔도르프의 FPG'n ''데 쥐더''와 비테의 슈반테비트를 설립했다.[24]
1967년 4월 10일, 히덴제섬 북부에서 지진 조사의 결과로 ''E 뤼겐 2/67'' 탐사정을 시작으로 석유 탐사가 시작되었다. 이 4,602m 깊이의 시추공과 1968년 12월까지 이어진 ''E 히덴제 3/67'', ''4/68 및 5/68'' 시추공에서는 채굴 가능한 석유 매장량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미 준비되었던 5번째 시추공은 취소되었고, 모든 시추공은 1971년 여름에 폐쇄되었다.[25] 그때까지 생산된 원유는 클로스터 근처의 임시 항구에서 유조선을 통해 소련으로 보내져 검사와 처리를 받았다.[24]
1971년까지, NVA의 ''5. 테크니셰 베오바흐퉁스콤파니 도른부쉬'' 부지는 줌 클라우스너 펜션과 도른부쉬 등대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중 울타리 뒤에는 개 사육장이 있었고, 그 사이에는 탄약 벙커와 다른 건물들이 있었다. 이 시설은 1993년에 해체되었고 벙커는 흙으로 덮였다. 그 이후, 클로스터에서 클라우스너 직전에서 갈라지는 판 도로인 이전 접근 도로는 "무(nothingness)"로 향하는 오른쪽으로 이어진다.[24]
1972/73년, 마을 간의 연결 도로는 콘크리트 슬래브로 포장되었는데, 건축 자재 부족으로 인해 수년 동안 존재했던 비테와 클로스터 사이의 약 500m 간격은 예외였으며, 오늘날에도 유일하게 아스팔트 포장된 도로 구간으로 남아 있다. 1974년, 모든 지역 외곽의 생활 폐기물 매립지는 덮였고, ''스반티베르게스'' 근처에 중앙 폐기물 매립지가 건설되었다. 이는 1990년대 초에 소진되었다. 1993년부터 모든 쓰레기는 비테 항구에서 수집되어 뤼겐으로 운송된다.[24]
1989년 5월 7일, 히덴제에서 열린 동독 지방 선거에서 투표의 4.7%가 정부에 반대했다. 히덴제는 종종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하거나 여름에 인명 구조원으로 일했던 반체제 인사와 탈락자들을 위한 틈새 시장으로 여겨졌다. 작은 섬에서 그들은 통제하기 쉬웠고, 때로는 공개적인 슈타지 감시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건과 회의는 용인되었다. 히덴제에는 지적인 분위기가 만연했고, 요 하버트, 크리스틴 하버트, 귄터 쿠네르트, 쿠르트 뵈베, 해리 쿠퍼, 잉게 켈러, 귄터 피셔, 아르민 뮐러-슈탈, 크리스토프 하인, 로베르트 롬페 또는 펑크 밴드 필링 B의 멤버와 같은 예술가, 작가, 배우, 음악가 및 과학자들이 그곳으로 은둔했다.[26]
발트해를 건너 탈출을 시도하다가, 대부분 접이식 카약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거나 외부 간섭 없이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도 히덴제 해변에서 계속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1962년 2월에 사망한 18세의 프리드리히 클라인과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웃파델, 1987년 8월에 사망한 21세의 우베 리히터가 있다. 그러나 히덴제는 또한 1986년 11월 30세의 카르스텐 클룬더와 22세의 디르크 데커트가 단 하루 만에 서핑보드를 이용하여 동독에서 탈출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이자 유일한 사건의 출발지였다. 매일 이른 아침, 그들은 수제 서핑보드와 돛을 이용하여 70km 떨어진 덴마크의 뫼N섬으로 4시간 만에 겔렌에서 항해했다.[27]
재통일 이후, 비테에 화물 페리를 위한 새로운 부두가 완공되었다. 그 후 일부 선원들은 클로스터의 푸시 보트의 오래된 콘크리트 부두를 항해 항구로 사용했다. 2010년대부터 클로스터에서 가장 큰 항구 개조 프로젝트를 통해 위생 시설을 갖춘 요트 항구가 조성되었다.[24]
1992년, 베를린의 중앙 전자 물리학 연구소의 슈베덴하겐 시험장과 예나의 중앙 미생물학 및 실험 치료 연구소의 페리 섬 시험장의 연구 시설이 폐쇄되었다.[24]
히덴제섬은 또한 1992년 연방 연구부와 자동차 산업에 의해 시작된 대규모 전기 자동차 테스트의 장소이기도 했다. 테스트 과정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비테 항구 건물 지붕에 대규모 태양광 발전 시스템이 설치되었다.[24]
2010년 5월, 비테의 텐트 영화관은 46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임시 장소에서의 과도기를 거쳐 2012년 비테 항구에 새로운 텐트 영화관이 문을 열었고, 요르크 메어발트가 2020년까지 감독을 맡았다.[28]
2010년과 2014년 사이에 일부 도로가 재포장 또는 포장되었으며, 지방 도로는 50% 이상 확장되었다 (비테-노이엔도르프 2010년 및 클로스터-비테 2014년). 비테에는 응급 환자와 재난 상황을 위해 2012년에 헬리콥터 착륙장이 가동되었다.[24]
2019년 10월, 전기 구동 방식의 새로운 섬 버스가 운행을 시작했다. 이전 모델은 디젤로 운행되었으며, 2015년 9월 경찰이 전기차로 전환한 이후에도 섬에서 몇 안 되는 내연기관 차량 중 하나였다.[24]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2020년에는 한동안 섬이 관광객에게 폐쇄되었다.[24]
2021년 초, 히덴제섬 자치단체가 비테 항구를 확장하고자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계획에는 135석 규모의 요트 항구, 다목적 홀, 5590제곱미터 규모의 태양광 발전 시스템, 12미터 높이의 타워에 있는 해수 담수화 플랜트, 두 개의 부두, 유람선을 위한 페리 부두 확장 및 기타 여러 건물이 포함되어 있다. 시민 단체가 확장 계획에 반대하여 결성되었다.[29]
6. 문화


휘덴제는 서포메라니아 석호 지역 국립공원에서 가장 큰 섬이며, 오래된 문화 경관과 원래의 사구 목초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12] 휘덴제 북동부(알터 및 노이에르 베신)와 남부(겔렌)에 있는 대규모의 새로운 육지는 벌레, 조개류 등 수많은 무척추 동물의 서식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무척추동물은 다시 많은 철새의 먹이가 된다. 예를 들어, 이 섬 주변 지역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두루미의 휴식 지역 중 하나이다. 섬의 남쪽 끝은 '노이에르 베신'과 마찬가지로 국립공원의 보존 구역 I으로 분류되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섬에는 노이엔도르프와 비테 사이에 있는 Naturschutzgebiet Dünenheide auf der Insel Hiddensee|휘덴제 섬의 사구 초원 자연 보호 구역de과 북부에 있는 Naturschutzgebiet Dornbusch und Schwedenhagener Ufer|도른부쉬 및 스웨덴하거 해안 자연 보호 구역de 등 두 개의 자연 보호 구역이 있다.
비테에는 ''휘덴제 및 보덴란트 자연 보호 협회(Naturschutzgesellschaft Hiddensee und Boddenlandschaftde)''가 운영하는 국립공원 하우스가 있으며, 상설 동식물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1936년에는 섬에 휘덴제 조류 관측소(Vogelwarte Hiddenseede)가 설립되었다.[13]
6. 1. 예술가들의 섬
히덴제섬은 20세기 초부터 예술가들의 섬이라는 명성을 누렸다. 여러 예술가들이 여름철을 그곳에서 보내며 자신의 작품에 그들의 인상을 담아냈다.
1904년부터 화가 엘리자베스 뷔쉘(Elisabeth Büchsel)은 노이엔도르프(Neuendorf)에서 여름을 보냈다. 같은 해 오스카 크루제(Oskar Kruse)는 클로스터에 자신의 리에첸부르크(Lietzenburg)를 지었는데, 이곳은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이후 그의 처제이자 인형 제작자인 케테 크루제(Käthe Kruse)도 그곳에 살았다. 헨니 레만(Henni Lehmann)의 여름 별장인 비테(Vitte)의 블라우에 셰네(Blaue Scheune)에서 1922년부터 1933년까지 ''히덴제 예술가 연합(Hiddensoer Künstlerinnenbund)''이 모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히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다른 예술가로는 빌리 예켈(Willy Jaeckel)과 요아힘 링겔나츠(Joachim Ringelnatz)가 있다.

GDR 시대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히덴제에 정기적으로 머물며 일상생활과 풍경을 그림, 판화, 책으로 묘사했는데, 작가 한스 치불카(Hanns Cibulka)가 그 예이다. 무용가이자 무용 강사인 그레트 팔루카(Gret Palucca)는 1948년부터 매년 여름 히덴제에서 보냈으며, GDR로부터 비테에 토지를 받아 1961년에 집을 지었지만 2009년 투자자에 의해 철거되었다. 팔루카와 발터 펠젠슈타인(Walter Felsenstein)은 클로스터의 섬 묘지에 묻혔다. 펠젠슈타인은 리에첸부르크 맞은편에 집을 짓고 여름을 보냈다.[39]
펠젠슈타인의 이웃이자 화가인 빌리 베르거(Willi Berger) (1922–2018)는 1955년부터 히덴제에 살았다. 그의 작품 목록에는 4200점 이상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부분 히덴제 또는 히덴제의 사람들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는 엘리자베스 뷔쉘의 그림을 복원했고, 1955년부터 1979년까지는 히덴제 조류 관측소의 조류학자이자 보존 전문가로 일했다. 클로스터의 힐베크(Hügelweg)에 있는 그의 집이자 작업실인 ''슈발벤네스트(Schwalbennest)''에서 2019년 10월 기념 전시회가 열렸다. 이것이 영구 전시회가 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39]
1987년부터 화가 토르스텐 슐뤼터(Torsten Schlüter)는 클로스터의 슐리커센 하우스(Schliekerschen Haus) 등 섬의 여러 장소에서 ''히덴제 섬 여름 전시회(Hiddenseer Sommerausstellungen im Garten)''를 개최한다. 현재 그는 호텔 도른부슈(Dornbusch)의 아이린 하젠베르크(Irene Hasenberg)의 옛 공예품 가게와 클로스터의 가파른 해안 위 그의 집(생물학자 길)에 있는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곳을 ''안나 훅(Anna Hucke)''이라고 이름 짓고 여름에는 정원에서 전시회도 연다.[40]
전통적으로 많은 조각 예술은 히덴제의 유목(driftwood)과 기타 죽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스키어케(Schierke)의 음악가이자 예술가인 한스 메너(Hanns Mehner) (1927–2005)가 이 작업을 했다. 그는 당시 클로스터의 장모 집에서 여름을 보냈다. 메너의 올빼미, 토템 기둥(totem pole), 얼굴 조각은 클로스터의 앞뜰을 장식했다(일부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41]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요. 하보르트(Jo. Harbort)는 이 전통을 이어갔다. 그의 나무 조각은 비테(Vitte)와 노이엔도르프(Neuendorf)의 놀이터, 클로스터와 노이엔도르프의 항구, 클로스터의 교회, 그리고 ''인젤블릭(Inselblick)'' 등에 배치되어 있다. 그는 여관 주인 ''춤 클라우스너(Zum Klausner)''와 함께 2005년 여관에 조각 공원을 열었는데, 이는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Dresden Academy of Fine Arts)의 극장 조각 수업 학생들이 만들었으며 매년 해당 수업의 새로운 작품으로 확장된다.[42]
비테 항구에는 텐트 영화관이 있고, 비테에는 인형극 Seebühne가 있으며, 클로스터에는 갤러리 ''암 제글러하펜(Am Seglerhafen)'' (비테), ''암 토르보겐(Am Torbogen)'', ''갤러리 암 힐(Galerie am Hügel)'', ''헤딘스 외(Hedins Oe)''가 있다.
6. 2. 주요 문화 시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하우스, 섬 교회,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발터 펠젠슈타인, 그레트 팔루카의 묘지가 있는 섬 묘지가 있어 히덴제의 문화 중심지이다.[5] 클로스터에는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의 분교인 히덴제 생물학 연구소와 히덴제 조류 관측소가 있다.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1926년부터 하우스 제도른(Haus Seedorn)에서 여름을 보냈다. 1956년, 이곳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박물관이 되었고, 2012년에 지어진 문학관은 ''히덴제 문학 풍경(Literaturlandschaft Hiddensee)'' 상설 전시회를 갖추고 있다.
히덴제섬의 랜드마크인 히덴제 등대는 1994년부터 방문객에게 개방되었다.[5]
히덴제섬 교회는 1332년 수도원 앞에 지어졌으며, 1781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5] 1922년에 제작된 히덴제 로젠힘멜이라고 불리는 칠해진 통형 천장이 있다.
오스카 크루제가 1904/1905년에 지은 아르 누보 양식의 빌라 리첸부르크는 예술가들을 위한 하숙집으로 사용되었다.
클로스터에 위치한 향토 박물관 히덴제는 섬의 역사에 대한 상설 전시를 제공한다. 건물 자체는 18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해상 구조 기지였다.
막스 타우트가 1925년에 지은 도쿠토란덴하우스는[36]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의 세미나 및 숙박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2019년에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문을 연 알테 슈미데는 예술가 에거트 구스타브스의 삶과 작품을 기리고 있다.[37]

1998년에 문을 연 국립공원 하우스는 서포메라니아 석호 지역 국립공원에 대한 상설 전시가 열리고 있다.
회전목마를 뜻하는 덴마크어에서 유래된 ''카루셀''이라고도 불리는 이 둥근 건물은 1923년 막스 타우트의 설계에 따라 지어졌다. 1928년 무성 영화 배우 아스타 닐센이 이 건물을 사들여 1930년대까지 사용하였다. 2015년 아스타 닐센에 대한 상설 전시가 시작되었다.[38]

블라우에 셰네는 19세기 초의 저지 독일식 목골조 가옥이다. 1970년대부터 귄터 핑크의 갤러리로 사용되었다.
레만 별장은 1907년부터 1937년까지 헨니 레만 가족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재건축 후, 1938년부터 1991년까지 비테의 시청으로 사용되었다. 2000년 6월 5일부터 이 건물은 공식적으로 레만 하우스로 불리며, 행사 및 전시회, 그리고 지역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755년에 어부의 오두막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비테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1915년부터 화가 엘리자베스 뷔트너가 이 집에서 살았고, 1930년부터는 팔라트 가문의 별장이자, 1944년에 살해된 레지스탕스 운동가 아돌프 라이히바인의 별장이었으며, 현재도 그 가족 소유이다.
2006/2007년에 벽돌로 지어진 1885년의 이전 어망 및 장비 창고를 'Lütt Partie'(작은 단위) 어업 박물관으로 개조했다. 2007년부터 섬의 어부들이 어업 장비를 전시하고 설명하며 과거와 현재의 어업 역사와 일상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겔렌/히덴제 등대는 겔렌스트롬 북쪽 입구를 표시하며, 1923년 뤼겐 지역에서 발행한 500만 마르크 비상 은행권에 묘사되었다. 1975년 동독 특별 우표 시리즈 "등대, 항로 및 방파제"에서 10 페니히 우표의 주제로 사용되었다.
7. 교통

1927년부터 법으로 규제되어 섬 전체에서 자가용 운전이 금지되어 있다.[31] 일부 예외가 있으며, 최근에는 전기 구동 방식이 늘고 있다. 여객 수송과 일부 물품 수송에는 마차가 사용된다. 시의 북부와 남부 지역 사이에는 뤼게너 페르조넨나흐페어케어스 GmbH(RPNV)에서 운영하는 전기 정기 버스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운행된다. 그러나 가장 자주 사용되는 교통 수단은 자전거이다.
페달이 달린 전기 자전거/전기 자전거와 달리 히덴제 섬의 전동 스쿠터는 엔진 동력으로 구동되는 모든 차량과 마찬가지로 특별 허가가 필요하며, 발급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 섬은 슈트랄준트에서 (계절별로 제한됨) 그리고 뤼겐의 샤프로데에서 바이스 플로테 "리더라이 히덴제"가 운영하는 여러 척의 선박 연결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 중증 장애인의 무료 수송이 적용된다.[34] 여름철에는 랄스비크, 브리게, 비크 및 칭스트와의 추가 연결편이 있다. 본토와 뤼겐 섬을 연결하는 수상 택시도 있다.
8. 경제
히덴제 주민들은 주로 관광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방문객 대다수는 당일 관광객이다. 히덴제는 연간 약 5만 명의 숙박객[30]과 약 25만 명의 당일 방문객을 맞이한다.
1990년 이전에도 히덴제는 인기 있는 휴양지였다. 1970년대에는 성수기에 매일 최대 4,000명의 휴가객과 3,000명의 당일 여행객이 섬에 있었다.[31] 1980년대 중반까지 당일 방문객 수는 연간 거의 25만 명으로 증가했다. 자연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관광 부문은 거의 더 발전하지 않았고, 그 이후 방문객 수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히덴제에는 3,300개 미만의 객실이 있다.[32]
히덴제 면적의 상당 부분은 농업 목적으로 사용된다.
최근 몇 년 동안 히덴제의 인구는 감소했다. 1990년에는 약 1,261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2001년 추정치는 1,173명, 2011년 인구 조사에서는 995명으로 나타났다. 이후 인구 유출은 멈춘 것으로 보이며, 2021년에는 994명의 주민이 있었다. 섬에는 남성보다 여성(52.1%)이 더 많으며, 994명의 주민 중 124명이 18세 미만이다.[14]
9. 행정
히덴제섬의 인구는 최근 몇 년 동안 감소했다. 1990년에는 약 1,261명이 거주했지만, 2001년에는 1,173명, 2011년 인구 조사에서는 995명으로 줄었다. 2021년에는 994명으로 인구 유출이 멈춘 것으로 보인다. 섬에는 남성보다 여성(52.1%)이 더 많으며, 994명의 주민 중 124명이 18세 미만이다.[14]
'''히덴제섬''' ("인젤 히덴제") 자치구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네 개의 하위 구역으로 나뉜다.
- '''그리벤'''은 히덴제섬에서 가장 오래되고, 최북단에 위치하며 가장 작은 마을이다. 섬 고지대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으며, 지명은 슬라브어의 "grib" (버섯을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그리벤은 자체 항구가 없다.
- '''노이엔도르프'''는 히덴제섬의 최남단 정착지이다. 노이엔도르프 주민들은 섬의 나머지 지역에서 남부인(Die Süderde)으로 알려져 있다. 비테에서 6km 떨어져 있지만, 주민들은 다른 방언을 사용한다. 넓은 지역은 마치 집들이 끈처럼 배열된 넓은 목초지와 같다. 어떤 곳에는 길이 없어서 잔디밭을 걸어서만 갈 수 있는 주소도 있다. 노이엔도르프는 자체 항구를 가지고 있다.
노이엔도르프는 원래 ''플로그샤겐''과 ''글람벡''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형성한 실제 노이엔도르프, 두 개의 독립적인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정착지의 유적은 오늘날에도 노이엔도르프 교구의 북동쪽에서 여전히 알아볼 수 있다.
노이엔도르프 남쪽에는 겔렌이라고 불리는 중요한 조류 보호 구역이 있는데, 이는 서포메라니아 석호 지역 국립공원의 보존 구역 I에 속하며 따라서 일반인에게는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10. 기타
히덴제섬은 현지인들에게 "Sötes Länneken", 즉 "작은 달콤한 땅"으로도 불린다.[43]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베를린 보헤미안 문화의 많은 구성원들이 히덴제섬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기 때문에, 이 섬은 발트해 섬들 중 로마니쉐스 카페로도 알려졌다.[43]
1974년, 니나 하겐은 "Hoch stand der Sanddorn am Strand von Hiddensee ..."라는 가사의 히트곡 ''Du hast den Farbfilm vergessen''을 발표했다. 포크 듀오 데 플라트퓌트 또한 "Hiddensee, Land zwischen Luv un Lee"에 대해 노래했다.
타란툴급 코르벳의 독일 해군 소속 미사일 고속정은 1990년부터 1996년 퇴역할 때까지 히덴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현재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Battleship Cove 해군 박물관의 박물관 선박으로, 방문이 가능하다.
독일 해상 구조 협회(DGzRS)는 비테에 구명정이 있는 구조 기지를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다.
히덴제섬에서는 비타민나무가 대량으로 재배된다. 열매는 알코올성 음료(비타민나무 리큐어 및 비타민나무 증류주)와 무알코올 음료(차가운 비타민나무 주스 및 따뜻한 비타민나무 주스), 비타민이 풍부한 요리(비타민나무 케이크 및 아이스크림), 화장품 등으로 가공된다. 또한 현지 특산품으로는 신선하게 잡거나 훈제한 생선이 주를 이룬다. 특별한 요리로는 히덴제 가문의 오랜 전통을 가진 모든 가족과 모든 레스토랑이 자체 레시피를 가지고 있는 히덴제 슈모랄(Hiddenseer Schmoraal)이 있다. 한편, 보덴참치 역시 그 요리의 품질을 입증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녹색 뼈로 인해 더욱 칭찬받는 바늘치는 일부 메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덴제섬의 많은 집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통적인 하우스 마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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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Surfer im Todesstreifen
https://www.spiegel.[...]
2014-10-20
[28]
웹사이트
Hiddenseer Kino-Chef schmeißt hin
https://www.ostsee-z[...]
2020-10-02
[29]
웹사이트
Bürgerinitiative HAFEN VITTE
https://vitte-hafen.[...]
2021-08-12
[30]
웹사이트
Hiddensee: Insel-Kleinod in der Ostsee
http://www.ndr.de/ra[...]
[31]
문서
Auto Straßenverkehr
[32]
웹사이트
Hiddensee: Kein Platz für Hektik
http://www.spiegel.d[...]
2002-08-10
[33]
웹사이트
Website der Schule
http://www.schule-hi[...]
2019-10-17
[34]
웹사이트
Fähren der Reederei Hiddensee
https://www.oepnv-in[...]
2022-10-05
[35]
문서
vgl. Darstellung im Heimatmuseum Hiddensee, letzte Tafel zur Geschichte
[36]
웹사이트
Tag des offenen Denkmals in Kloster auf Hiddensee
https://web.archive.[...]
2019-08-22
[37]
웹사이트
Info über das geplante Gustavs-Museum
https://web.archive.[...]
[38]
뉴스
Saniertes Asta-Nielsen-Haus geht wieder in Betrieb
https://www.nordkirc[...]
2019-06-15
[39]
뉴스
Der alte Mann und seine Insel
https://web.archive.[...]
Ostsee Zeitung
2019-12-30
[40]
웹사이트
Hiddenseer Weltenbummler zurück
https://www.ostsee-z[...]
2019-12-30
[41]
간행물
Der Klang muss eine Heimat haben – Zum Tod von Hanns Mehner
Neue Wernigeröder Zeitung
2005/2
[42]
웹사이트
Studentensymposium am Klausner
https://web.archive.[...]
2019-12-30
[43]
서적
Romanisches Café
Berlin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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