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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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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지 천황은 1852년 고메이 천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867년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일본의 제122대 천황이 되었다. 그는 에도 막부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대정봉환과 왕정복고를 거쳐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다. 메이지 천황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1889년에는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를 확립했으며, 군주로서 군 통수권을 행사하며 제국주의적 확장을 주도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일본을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대한제국 병합과 같은 제국주의적 정책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메이지 시대는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1912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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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메이지 천황
우치다 쿠이치가 촬영한 초상화, 1873년
재위 기간1867년 1월 30일 – 1912년 7월 30일
즉위식1867년 2월 13일
무쓰히토 (睦仁)
칭호사치노미야 (祐宮)
추호메이지 천황 (明治天皇)
생몰1852년 11월 3일 ~ 1912년 7월 30일
출생지교토 교엔 국립정원, 교토, 야마시로국, 도쿠가와 막부
사망지메이지 궁전, 도쿄도, 도쿄부, 일본
묻힌 곳후시미 모모야마 능, 교토, 교토부, 일본
매장일1912년 9월 13일
가문일본 황실
종교신토
메이지 천황 서명
통치
쇼군도쿠가와 요시노부 (1866년–1868년)
다이죠다이진산조 사네토미 (1871년–1885년)
총재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보상산조 사네토미, 이와쿠라 도모미
좌대신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우대신산조 사네토미
태정대신산조 사네토미
내각총리대신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오쿠마 시게노부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가족 관계
아버지고메이 천황
어머니나카야마 요시코
배우자이치조 마사코 (1869년 1월 11일 결혼)
자녀요시히토, 다이쇼 천황
마사코, 다케다노미야 여왕
후사코, 기타시라카와 여왕
노부코, 아사카 여왕
도시코, 히가시쿠니 여왕
시대
연호게이오: 1865년 5월 1일 – 1868년 10월 23일
메이지: 1868년 10월 23일 – 1912년 7월 30일
기타
훈작대훈위

2. 생애

도쿠가와 막부는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세워졌다.[3] 쇼군은 막부를 통해 일본을 통치했고, 약 180명의 다이묘들은 쇼군 아래에서 자율적인 영지인 을 다스렸다.[4] 쇼군은 다이묘의 결혼을 승인하고 토지를 빼앗을 수 있는 등 여러 방법으로 다이묘를 통제했다.[4]

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 직에서 물러났고, 그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함께 귀족들을 위한 행동 강령을 발표했다. 이 강령에 따라 천황은 학문과 예술에 전념해야 했다.[5] 막부 시대 천황들은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시와 서예에 시간을 할애하며 이 강령을 따랐다.[6] 천황들은 일본과 중국 역사, 지리의 기초만 배웠고, 쇼군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천황의 동의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1]

천황은 퇴위하거나 궁궐에 불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교토 고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7] 메이지 천황의 선임자 중 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만이 40세 이상 살았을 정도로, 퇴위할 만큼 오래 산 천황은 드물었다.[8] 황실은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는데, 메이지 천황의 형제자매 5명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고, 그의 자녀 15명 중 5명만이 성인이 되었다.[1]

17세기 초, 막부는 쇄국령을 통해 일본과 서방 간의 무역을 중단시키고 기독교 선교사의 입국을 금지했다. 중국과의 무역 외에는 네덜란드만이 나가사키의 데지마 섬을 거점으로 일본과의 무역을 계속했다.[9] 그러나 19세기 초, 유럽과 미국의 선박이 일본 주변 해역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10]

무쓰히토 친왕은 1852년 11월 3일 외조부 소유지 북쪽 끝의 작은 집에서 태어났다. 당시 출산은 오염의 근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황태자는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대신 황족들은 임신한 여성의 아버지 집 근처, 종종 임시적인 건물에서 태어났다. 나카야마 요시코고메이 천황의 후궁이었고, 나카야마 타다야스의 딸이었다.[11] 어린 친왕은 '사치노미야'라는 칭호를 받았다.[12]

어린 친왕은 일본에 큰 변화가 일어나던 시대에 태어났다. 1853년 7월, 매튜 페리 제독과 그의 미국 해군 함대(흑선)가 에도 항구로 들어오면서 변화는 극적으로 나타났다.[13] 페리는 일본을 국제 무역에 개방하려 했고, 그의 함대가 장착한 현대식 대포를 과시했다.[1] 최소 250년 만에 쇼군 정권은 페리의 도착으로 인한 위기 때문에 천황 조정과 상의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14] 고메이 천황의 관리들은 미국과의 무역에 동의해야 한다고 느꼈고, 페리가 돌아왔을 때 취할 조치에 대해 사전에 통보해 줄 것을 요청했다.[15] 일본 정부는 자국 군대가 미국 군대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불평등 조약"에 굴복했다. "불평등 조약"은 관세 권한을 포기하고 자국 법원에서 외국인을 재판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17] 그러나 쇼군 정권이 조정과 상의하려는 의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1858년, 미일 화친 통상 조약 소식이 전해졌을 때, 시간이 부족하여 상의할 수 없었다는 내용의 서한이 함께 왔다.[18] 고메이 천황은 격분하여 양위를 위협했지만, 이 행위조차 쇼군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19]

메이지 천황의 어린 시절은 후대의 기록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으며, 전기 작가 도널드 킨은 종종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어떤 기록에서는 무쓰히토를 건강하고 강하며, 스모에 재능이 있다고 묘사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허약하고 종종 병을 앓았다고 말한다. 일부 전기 작가는 그가 처음 총소리를 들었을 때 기절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사람은 이 이야기를 부인한다.[20] 1860년 8월 16일, 사치노미야는 혈통 친왕이자 왕위 계승자로 선포되었고, 아버지의 배필에 의해 공식적으로 입양되었다. 그해 11월 11일, 황태자로 선포되었고, 무쓰히토라는 성인 이름을 받았다.[21] 친왕은 일곱 살에 교육을 시작했지만,[22] 무관심한 학생이었고, 나중에는 글쓰기 연습에 더 열중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시를 썼다.[23]

1858년(안세이 5년), 에도 막부미국 총영사 타운센트 해리스와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고, 그 조약이 천황의 칙허를 받지 못한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조약에 반대했던 고메이 천황은 막부가 독단적으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조약을 맺으려 하자 격분하여, 1858년 8월 7일 막부에 강한 항의와 조약 철회를 요구하는 어취의서를 내리도록 명령했다. 간파쿠 구조 나오타다는 막부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온건한 내용으로 수정하길 원했고, 사다이진 고노에 다다히로는 사쓰마, 조슈 등 유력 번에 비밀 칙명을 전달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천황이 이를 승인했다. 미토번 등에 내려진 이 칙명을 보오의 밀칙이라 한다. 칙명 강하를 명예롭게 받아들인 번들(특히 미토 번)은 이후 조약에 반대하며 천황을 중심으로 외적을 물리칠 것을 요구하는 존황양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를 우려한 막부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는 1858년 9월 존황양이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안세이 대옥을 일으켰다.[87] 이에 분노한 전 미토 번사, 전 사쓰마 번사들은 1860년 3월 3일, 이이를 사쿠라다몬 외의 변으로 암살했고, 이후 막부의 위신은 약화되었다. 막부는 권위 회복을 위해 공무 합체를 목적으로 가즈노미야 친자내친왕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결혼시키려 했다. 천황은 막부의 정략과 가즈노미야의 약혼 상태를 이유로 난색을 표했지만, 이와쿠라 도모미의 건의를 받아들여 가즈노미야의 신적강하를 조건으로 양이 실행과 10년 내 조약 철폐를 막부에 약속하게 하여, 1860년 8월에 시집보냈다.[88]

1862년 12월 25일, 무쓰히토 친왕은 고메이 천황을 따라 처음으로 삼종신기 중 야타노카가미를 봉안하는 내시소를 참배했다. 이는 궁중 신사에 정식으로 참여한 것이다.

분큐 이후, 서양과의 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이 발생하자 각지에서 존황양이 운동이 격화되었다. 막부는 양이 실행을 약속하고도 계속 미루면서 조정과 여러 번, 지사들로부터 공격받았다. 미토, 사쓰마, 조슈 번의 주도권 다툼도 격화되었고, 유력 번들이 조정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조정 내에서도 존황양이파가 세력을 확대하여 조정을 움직일 정도가 되었다. 천황은 공무합체파와 존황양이파 모두에게 옹립되어 정치적 지위와 권위가 더욱 높아졌다.

나카야마 다다요시는 공무합체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비판 대상이 되었고, 1863년 2월 1일 친왕 어간언 지위를 산조 사네토미와 교체하고 근신 처분을 받는 등, 정치 변동이 무쓰히토 친왕에게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

이후 조정은 존황양이파 주도로 막부에 양이 정책과 실행 기한을 보고하도록 압박했다. 막부는 다음 해 상경하여 양이 정책을 보고하겠다고 약속했고,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후 230년 만에 쇼군이 상경하게 되었다. 1863년 3월 7일, 상경한 쇼군 이에모치는 조정으로부터 양이 실행 기일을 재촉받고 5월 10일로 답변했다. 3월 19일, 천황은 무쓰히토 친왕을 동석시켜 처음으로 이에모치를 만나게 했다.

1863년 6월 19일, 로주 오가사와라 나가미치가 나마무기 사건 관련 협상 보고를 명목으로 막부 병력 1,000여 명을 이끌고 교토에 입성하려 하자, 쇼군 이에모치가 요도에 머물게 했다. 교토에서는 오가사와라가 무력으로 조정에 개국을 강요하거나, 거부하면 도시에 불을 지르고 공가를 체포하여 교토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교토는 소란에 휩싸였고, 조정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무쓰히토 친왕의 측근 인원을 늘리고, 궁내 관리 3명을 교대로 밤새 근무하게 했다.

7월 19일, 간파쿠 다카쓰카사 스케히로는 천황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하는 것에 대해 각 번주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돗토리 번주 이케다 요시노리는 천황과 공경들이 군사에 대해 먼저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이에 천황은 교토 수호직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에게 병사 훈련을 겐슌몬 밖에서 시행할 것을 명했다. 7월 30일, 천황은 무쓰히토 친왕과 함께 훈련을 견학했다. 천황이 군사 행사를 보는 것은 에도 막부 설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89] 8월 5일에도 천황과 무쓰히토 친왕은 아이즈, 도토리, 도쿠시마, 요네자와, 오카야마 5개 번의 병력 훈련을 견학했다.

고메이 천황은 막부와의 협력을 통해 막부가 양이를 실행하도록 하는 노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일부 공가들은 천황의 뜻을 넘어 강경하게 양이를 추진하려 했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1863년 4월, 고메이 천황은 이와시미즈 하치만구로 양이 기원을 위한 행차를 단행했다.[90] 존황양이 강경파는 이 행차에서 천황이 쇼군에게 양이 실행을 상징하는 절도(節刀)를 수여하고 막부에 양이 실행을 강요하려 했지만, 쇼군이 병을 이유로 불참하여 실패했다.[90] 무쓰히토 친왕은 고메이 천황의 행차를 배웅하고 귀환 시에도 맞이하며 천황에게 축하주와 음식을 헌상했다.

존황양이 운동은 조정의 권한 확대와 막부의 권위 쇠퇴를 배경으로 절정에 달했다. 조슈번은 1863년 5월 10일,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던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하며 양이를 실행했다(시모노세키 전쟁). 이로 인해 존황양이파가 주도하던 조정 내에서 조슈번의 평가는 더욱 높아졌고, 조슈번주 모리 가에게 정이대장군을 임명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1863년 8월 13일, 조정은 존황양이파의 주도로 고메이 천황이 진무 천황릉과 가스가 신사에 양이 기원을 위해 야마토로 행차하고, 이어 양이 친정을 위한 군의를 열 것이라고 공표했다. 이는 천황이 군사 지휘권을 쥐고 양이 전쟁을 수행할 가능성을 시사했다.[91] 다음 날, 무쓰히토 친왕의 숙부 나카야마 다다미쓰는 천주조를 조직해 야마토에서 천황 행차의 선봉군으로 막부를 상대로 거병했다(덴추조의 변).[91]

1863년 8월 18일, 고메이 천황나카가와노미야 다카히로 친왕아이즈번사쓰마번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산조 사네토미 등 존황양이파 공경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이들과 연계된 조슈번 역시 교토에서 추방했다(8월 18일의 정변). 고메이 천황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 제후들을 초청해 노고를 치하했으며, 무쓰히토 친왕도 정치 행사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정변의 결과 나카야마 다다야스가 조정에 복귀했고, 무쓰히토 친왕은 기쁨을 표했다. 그러나 공무합체파의 복권으로 다다야스는 다시 실각했고, 친왕을 만나려 했으나 천황의 명으로 만남이 불허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1837년-1913년)


1864년 6월, 8월 18일 정변으로 실각한 산조 사네토미 등 존황양이파 공가들과 조슈번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 조슈번은 2천 명 이상의 병력을 교토 근교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조슈번 군 추토령을 받은 후, 7월 18일 금문의 변이 발발했다. 조슈번 군은 패배하여 교토에서 퇴각했다. 이 전투 도중, 천황 일행이 다른 곳으로 피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반대로 무쓰히토 친왕은 오쓰네고텐과 연결된 오미마에서 잠들었다.

7월 20일 밤, 요시노부는 가스야 요시아키와 도쓰카와고시들이 궁에 침입해 천황을 납치하려 한다는 정보를 보고했다. 이에 천황과 무쓰히토 친왕을 깨워 시신덴으로 이동하도록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여관들이 울기 시작했고, 무쓰히토 친왕도 놀라 정신을 잃었다. 수행하던 이들이 물을 마시게 한 후에야 친왕은 겨우 진정되었다고 한다.

1866년 7월, 금문의 변 당시 조슈번을 지지했던 나카야마 다다야스 등 조슈번 지지 공가와 황족들이 조정 출석이 금지되고 외부인과의 면회도 금지되었다. 무쓰히토 친왕은 다시 외조부와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무쓰히토 친왕의 12세 생일에도 다다야스는 출석 금지 조치로 인해 매년 헌상하던 신선한 생선을 바칠 수 없었다.

1864년, 막부는 여러 번에 걸쳐 제1차 조슈 정벌을 지시했고, 조슈번은 항복했다. 그러나 정벌 이후 조슈번 내부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를 중심으로 한 정의파(도막파)가 반격에 성공해, 막부에 순응하던 속론파를 몰아내고 다시 도막 노선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1865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조슈 재정벌을 상주하였고, 천황은 이를 재가하였다. 그러나 사쓰마번조슈번 사이에 사쓰조 동맹이 맺어진 상황에서, 사쓰마번과 여러 번은 출병을 거부했다. 막부군은 사기가 저하된 채 조슈번 군대에 패배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막부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같은 해 12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제15대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14세가 된 무쓰히토 친왕도 쇼군에게 칼을 하사하며 관련을 맺었다. 황태자 책봉 이후, 무쓰히토 친왕은 황위 계승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긴박한 정치 상황 속에서도 고메이 천황은 친왕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쓰히토 친왕이 양이 사상을 강하게 가지게 되자, 천황은 이를 우려해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에게 편지를 보내 대책을 논의했다.

1867년 12월, 천황이 병에 걸렸고, 천연두로 진단받았다. 무쓰히토 친왕은 매일 병상을 지켰다. 나카야마 다다야스는 이전에 친왕에게 천연두 백신접종받게 했다는 사실을 알려 천황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천황은 12월 25일 병세가 악화되었고, 그날 밤 무쓰히토 친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붕어하였다.

아버지를 잃은 무쓰히토 친왕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12월 29일 천황의 붕어가 공식 발표되었고, 대상이 선포되었다. 30일, 천황의 유해가 내장(內槨)으로 옮겨질 때, 무쓰히토 친왕은 마지막 작별 인사를 올렸다.

세이토쿠 기념 회화관 벽화 『즉위』(가와사키 고토라 그림, 이케다 노리마사 후작 봉납). 무쓰히토 친왕이 즉위하여 신임 천황으로서 니조 나리유키(오른쪽 앞)를 셋쇼로 임명하는 장면. 이때 세이료덴에는 고메이 천황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임시 세이료덴으로 고고쇼에서 황위 계승 의식이 거행되었다.


1867년 2월 13일(게이오 3년 1월 9일), 14세로 즉위하여 122대 천황을 계승했다. 원복 전의 즉위였기 때문에 입태자례를 거치지 않고 황위를 계승했다. 고카쿠 천황의 동형 즉위의 선례를 따라 머리 모양은 미즈라,[92] 의상은 히키노우시, 아타치, 히토에, 하리하카마, 요코메센으로 장식한 동형 즉위식을 거행했다.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과 마찬가지로 나카누마 료조를 초대 시강으로 임명했다.

즉위 후, 어린 나이에 즉위한 천황은 외조부 나카야마 다다야스와의 재회를 희망하며, 1월 15일 즉시 대사를 선포하여 금문의 변 당시 조슈번을 지지하다가 폐문 칩거 명령을 받았던 다다야스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등의 참조를 허용했다. 1월 19일에는 제2차 조슈 정벌 해산을 명하는 칙령을 막부에 내렸다. 막부 역시 더 이상의 정벌이 승산이 없음을 인정하고, 1월 24일 정벌에 동원된 각 번의 병력을 철수시키고 본국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막부 연합군의 참패와 조슈번의 승리는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동시에 천황의 권위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2월 13일, 다다야스가 궁중에 다시 나와 역대 천황의 중요한 책무인 유직고실에 대한 학습을 천황에게 건의했다. 이후 다다야스는 천황의 요청에 따라 궁중 예법 강의를 위해 자주 궁중을 방문했으며, 6월 1일에는 국서(國書) 강의를 맡기도 했다. 국모 나카야마 요시코는 삭발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3월 13일 나이시노스케로 임명되어 내전(內殿) 업무를 맡아 천황을 계속 보필했다.

2월 16일에는 사망한 아버지에게 고메이(孝明)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고메이 천황의 붕어로 인해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교토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아이즈번주), 교토소사대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구와나번주)를 중심으로 한 "이치카이소 정권"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들은 1864년 무렵부터 고메이 천황의 보호 아래 공무합체파로서 교토를 중심으로 막부 및 조정 정치를 주도해 왔으나, 천황 붕어로 인해 가장 강력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천황은 선황만큼 친막부적이지 않았으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외조부 나카야마 다다야스는 반막부 성향이 뚜렷했다. 그러나 요시노부와 이치카이소 정권측은 섭정 니조 나리유키,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 친막부파 황족들과 의논하며, 의주(議奏), 무가전주(武家伝奏) 등을 압박함으로써 계속해서 조정 정치를 주도하려 했다.

1867년 5월 23일, 조의가 열려 요시노부와 사다아키 등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요시노부는 제2차 조슈 정벌 패배의 영향을 최대한 은폐하고자, 조슈 번에 대한 관대한 처분과 외세와의 조약에 따라 효고 항구를 개항한다는 조서를 동시에 승인해 줄 것을 천황에게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전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는 전 우와지마번다테 무네나리, 시마즈 히사미츠, 전 도사번주 야마우치 도요시게 등과의 협의를 토대로, 먼저 조슈번에 대한 처분을 결정한 뒤, 논란이 많은 효고 개항 문제는 후일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요시나가의 의견은 다수의 조신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실권을 장악한 요시노부가 끝내 의견을 관철시켜, 조슈 번의 관대한 처분과 효고 개항은 동시에 결정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고토 쇼지로, 사쓰마번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6월 22일 회담을 열고, 두 번이 왕정복고를 위해 협력할 것을 맹약했다. 이미 1년 반 전 고마쓰 다테와키의 저택에서 사쓰마번조슈번 사이에 사쓰초 동맹이 체결되어 있었고, 사쓰마번은 막부 타도를 위한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메이지 시대는 일본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이 연표로 정리할 수 있다.

연도사건
1852년 11월 3일메이지 천황(무쓰히토 사치노미야) 출생
1853년매튜 C. 페리 제독의 흑선 함대 일본 도착[80], 도쿠가와 이에요시 쇼군 사망, 도쿠가와 이에사다 쇼군 임명
1854년 ~ 1855년쇼군 정권과 미국 간 조약 체결
1850년대 후반 ~ 1860년대"존왕양이" 운동 본격화
1858년쇼군 정권, 네덜란드, 러시아 제국, 영국과 조약 체결, 도쿠가와 이에사다 쇼군 사망, 도쿠가와 이에모치 쇼군 임명
1860년 3월다이로 이이 나오스케, 사쿠라다몬 사건으로 암살
1860년 11월 11일사치노미야, 황태자로 선포, 무쓰히토로 개명
1862년나마무기 사건 발생
1864년 ~ 1865년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함대의 시모노세키 포격, 쇼군 정권과 조슈번 간 전투
1866년도쿠가와 이에모치 쇼군 사망, 도쿠가와 요시노부 쇼군 임명
1867년 1월 31일고메이 천황 사망, 무쓰히토 즉위
1868년 1월 4일메이지 유신 선포, 도쿠가와 막부 통치 종식
1868년 9월 12일천황 즉위식 거행
1868년 10월 23일일본 연호 메이지로 변경
1868년 11월 6일수도 교토부에서 에도로 이전, 도쿄로 개명
1872년 11월 5일러시아 대공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천황 접견
1860년대 후반 ~ 1881년일본 내 반란과 암살 빈번
1869년 1월 11일이치조 하루코(쇼켄 황후)와 결혼
1869년 9월 4일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드 천황 접견
1871년폐번치현 선포
1873년에도성 화재, 아카사카 궁으로 거처 이동, 첫 아이 출생 직후 사망
1877년세이난 전쟁 발발
1878년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1879년 8월 31일요시히토 친왕(다이쇼 천황) 출생
1881년칼라카우아 하와이 국왕 국빈 방문
1889년메이지 헌법 공포, 이토 히로부미 초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취임
1894년청일 전쟁 발발, 일본 승리로 지역 강국 부상
1901년 4월 29일히로히토 친왕(쇼와 천황) 출생
1904년 ~ 1905년러일 전쟁 발발, 일본 승리로 열강 지위 획득
1910년한일 병합 조약 체결, 대한제국 병합 (~1945)
1912년 7월 30일천황 사망(59세)[66]



타이완 일일 신보 메이지 천황 붕어 보도, 메이지 45년 7월 30일.


메이지 천황은 1912년(메이지 45년) 7월 30일 오전 0시 43분에 붕어했다.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요독증을 일으켜 보산 61세(만 59세)로 붕어했다. 황태자 가자인 친왕이 황위 계승하여 (다이쇼 천황) 제123대 천황으로 즉위했다.

메이지 천황은 1912년(메이지 45년) 7월 11일 도쿄 제국 대학 졸업식에 참석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라고 한다. 20일 아오야마 타네미치와 미우라 킨노스케가 진찰하여 요독증으로 진단했다. 궁내성은 천황이 요독증으로 위독하다고 발표했다. 28일에 경련이 시작되어 처음으로 캄퍼, 생리식염수 주사가 시작되었다. 궁중 관습에 따라 메이지 천황은 자신의 침실이 아닌 거실이었던 상의 어소(常の御座所)가 임시 병실이 되었다. 간호부도 훈5등 이상이어야 했기 때문에, 오위(五位) 이상의 여관이 간호했다.[126].

7월 21일 이후, 민중이 궁성 앞에 모여 평유(平癒)를 기원했다. 도쿄시는 천황에게 소음이 들리지 않도록 전차를 서행시키고, 궤도에 헝겊 조각을 깔았다.

궁내성은 붕어 시각을 7월 30일 오전 0시 43분으로 공표했지만, 당시 궁내 서기관이었던 쿠리하라 히로타에 따르면, 실제 붕어 시각은 전날인 7월 29일 22시 43분이다. 이는 등극령(登極令) 규정상 황태자가자인 친왕이 새 황제가 되는 선조 의식을 붕어 당일에 거행해야 하지만, 그날이 끝나기까지 1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붕어 시각을 2시간 늦춰 다음 날 오전 0시 43분으로 정했다.[127].

메이지 천황의 붕어에 즈음하여 곁에 있던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히이 이츠코는 이 기간의 상황을 일기에 상세히 기록했다. 이츠코의 일기에 따르면, 29일 오후 10시 30분경, 황후, 황태자, 동비, 각 내친왕이 병상을 에워싸고, 시의 등이 치료를 하고 있었다. 메이지 천황은 점차 호흡이 약해지고, 목에 가래가 낀 듯 기침을 했지만 시계가

2. 1. 탄생과 유년 시절



가에이 5년 9월 22일 (1852년 11월 3일) 오후 1시경, 교토 이시야쿠시의 나카야마 저택 산실에서 고메이 천황의 둘째 황자로 태어났다. 생모는 당시 곤다이나곤이었던 공가 나카야마 타다야스의 딸로 곤텐지였던 나카야마 요시코이다.[11]

아버지 나카야마 타다야스는 손자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고, 딸 요시코가 임신했을 때부터 출산 준비를 했다. 당시 산실 건설에는 총 100냥이 필요했지만, 연 수입 200석의 공가였던 나카야마 가문에게는 과중한 부담이었기 때문에,[103] 조정에서 타다야스 명의로 100냥, 고모할머니 나카야마 세이시 명의로 50냥, 총 150냥을 대출받아 그 자금으로 6첩, 10첩 2칸의 산실을 건설했다.[104]

요시코는 임신 5개월 후의 저대를 친정인 나카야마 저택에서 치렀고, 9개월째의 정식 저대는 8월 27일 (10월 10일)에 궁중에서 거행했다.[105] 저대 후, 요시코는 나카야마 저택에 신설된 산실에 들어가 출산을 준비했다. 텐야쿠료 의사 3명과 산파 1명이 불려왔고,[36] 오후 1시경에 요시코가 무사히 황자를 출산했다.

고메이 천황은 그 보고를 츠네고텐 북쪽 정원의 국화 꽃을 감상하며 한 잔 기울이고 있을 때였는데, 매우 기뻐하며 술잔을 거듭했다고 한다.[36] 천황에게는 이미 황녀와 황자가 있었지만, 당시 영아 사망률은 극히 높았고, 황녀는 3세에, 황자는 탄생 당일에 생모와 함께 사망했다.[106]

탄생 직후 포의와 함께 청의에 싸이는 의식을 받았다. 이어서 제대를 자르고 상처를 소작하는 의식이 거행된 후, 가모의 물로 산탕에 들어갔다. 제대는 음양두 토미카도 하루오의 점괘 결과에 따라 로쿠토 요시다 신사에 매장되었다.[107]

9월 29일에 칠야의 예가 거행되었고, 아버지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祐宮|사치노미야일본어라는 어린 시절 이름을 받았다. 이것은 메이지 천황의 증조부인 119대 천황 고카쿠 천황과 같은 어린 시절 이름이며, 『주역』의 '자천우지, 길무불리'( '하늘의 도움을 받아 길하고 만사에 유리')에서 유래한다.[108][109] 고카쿠 천황에도 막부에 강경한 자세로 조정의 부흥에 매진했고, 양위 후에도 조정의 정무 처리와 의사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천황·조정의 권위를 높인 천황이었다.[84] 고메이 천황에게는 이상적인 천황 중 한 명이었다.[110]

단, 사치노미야의 황위 계승은 이 시점에서는 확정된 것이 아니었다. 사치노미야를 낳은 나카야마 요시코의 친정 나카야마 가문은 우린가였고, 천황의 정실이 될 수 있는 고셋케의 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111] 이미 고메이 천황에게는 정실 쿠조 아사코가 있었고, 아사코는 뇨고에서 준고, 황후로 승격하게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아사코에게 황자가 태어나 성장한다면, 사치노미야가 장래 즉위할 가능성은 낮아지는 상황이었다.[112] 또한,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 등 3명의 친왕은 모두 황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였다.[113] 따라서, 아사코에게 황자가 태어나지 않아도, 사치노미야가 친왕이 되기 전에, 고메이 천황이 붕어하는 경우 등에는, 3명의 친왕 중 한 명이 황위 계승할 가능성도 있었다.[114] 이와 같은 사정이 있었지만, 고메이 천황은, 코카쿠 천황의 어린 시절 이름을 줄 정도로, 유일한 황자인 사치노미야에게 기대를 품고 있었다.[115]

생후 30일째인 10월 22일, 사치노미야는 처음으로 고메이 천황을 만났다.[40] 이때, 천황은 사치노미야에게 인형을 주었고, 사치노미야는 생모 나카야마 요시코의 국(방)을 궁중에서의 거처로 하기로 했다.[116] 단, 당시에는 황자는 생모의 친정에서 잠시 길러진 후 어소로 돌아가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사치노미야는 4세까지 나카야마 저택에서 길러졌고, 때때로 어소에 참내하는 생활을 했다.[117][118]

사치노미야는 안세이 3년 9월 29일에 고쇼로 옮겨가기 전 4세까지를 나카야마 저택에서 보냈다. 외조부 나카야마 타다야스가 아버지 노릇을 했고, 어머니 요시코는 텐지로 궁중에 있었기 때문에 외할머니 나카야마 아이코[119]나 타다야스의 어머니인 나카야마 츠나코[120]가 어머니 노릇을 했다. 나카야마 가문에는 새로 우물을 파서 '사치이'라고 이름 붙였다.

타다야스가 사치노미야에게 처음으로 준 장난감은 나무 검, 죽도, 목마였다. 사치노미야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목마였다. 네 다리 밑에 상자 수레가 달려있고 높이가 약 0.43m~약 0.46m인 목마였으며, 사치노미야는 이것을 타고 "하이하이" 소리를 내며 시녀나 타다야스가 끌고 다녔다. 목마가 부서졌을 때는 시녀도 타다야스도 말이 되었다.[121]

젖은 유모가 먹였다. 처음에는 구조 가문의 가신의 아내가 유모가 되었지만, 도중 학자 키무라 누이덴노스케의 아내 라이로 바뀌었다. 유모에게도 자신의 아기가 있었고, 아기를 데리고 나카야마 저택에 들어왔다. 이 아기들과 사치노미야는 어릴 적 친구가 되었지만, 자주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122][123] 유모와 그 아기 외에도, 나카야마 저택에는, 나카야마 타다미츠와 같은 파격적인 인물이나, 유학자 다나카 카와치노스케와 같은 열혈한도 있었다. 이러한 나카야마 가문에서 양육된 것은 사치노미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24]

사치노미야는 1세 생일까지 비교적 순조롭게 자랐지만, 1세가 되면서 몇 차례 10일 이상 병에 걸렸고, 2세 때는 수두에 걸렸으며, 3세 때에도 고열을 냈다.[125] 이처럼, 때때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당시 의약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아의 병이 오래 지속되는 것은 당연했고,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는 유아들이 많았던 당시, 회복한 사치노미야의 몸이 특별히 약했던 것은 아니었다.[126]

3세 반이 되자, 호불호의 감정을 분명히 나타내게 되었다. 안세이 3년(1856년) 3월 25일 참내 때는 가마 타는 것을 싫어하여 유모가 안고 참내했다. 또 군중의 눈과 의식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카야마 저택에서 고쇼의 북쪽 사쿠헤이몬에 가까운 아나몬까지 도로를 횡단하여 막을 치고, 일반 통행을 막고 참내했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방법이 사용되었다.[127]

9월 22일, 사치노미야는 4세 생일을 맞이하여, 예년과 같이 천황으로부터 축하 물품을 받았다. 그 다음 날, 타다요시에게 사치노미야를 궁중으로 돌려보내라는 천황의 명이 전해졌다. 이렇게 9월 29일, 사치노미야는 나카야마 저택에서 고쇼로 옮겨갔다. 사치노미야는 나카야마 가문의 사람들과 저택에 애착을 가졌다. 궁중에서 살게 된 후에도, 나카야마 저택의 살구를 매년 받았다.[128] 또한, 메이지 천황은 평생 과일 중 살구를 매우 좋아했다.[129]

2. 2. 궁중 생활과 교육

안세이 3년(1856년) 9월 29일, 사치노미야(당시 메이지 천황)은 4세가 될 때까지 생모의 친가인 나카야마 저택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 나카야마 다다야스가 사실상 아버지 역할을 맡았고, 생모인 요시코(慶子)는 나이시노스케(典侍)로서 궁중에 머물렀기 때문에, 외조모 나카야마 아이코와 다다야스의 모친인 나카야마 쓰나코(中山綱子)가 사치노미야를 돌보았다.

사치노미야는 구조 가신 아내의 젖을 먹고 자랐으나, 이후 학자 기무라 호우덴노스케의 아내 라이로 교체되었다. 유모는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나카야마 저택에 들어왔고, 이 아이들은 사치노미야의 어린 시절 친구가 되었다.

사치노미야는 대체로 건강하게 성장했지만, 어린 시절 몇 차례 병을 앓았다. 1세 생일 이후 여러 차례 열흘 이상 앓는 병에 걸렸으며, 2세 때는 수두를, 3세 때는 고열을 경험했다. 3세 반이 되면서 감정 표현이 뚜렷해졌다. 안세이 3년(1856년) 3월 25일, 사치노미야는 궁으로 들어가는 가마에 타는 것을 거부하여 유모가 안고 들어가야 했다.

4세 생일인 9월 22일, 사치노미야는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축하 선물을 받았다. 그 다음 날, 천황은 사치노미야를 궁중으로 복귀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 29일, 사치노미야는 나카야마 저택에서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이토쿠기념회화관 벽화 『고후카소기(御深曽木)』(화가 기타노 츠네토미, 코노이케 가문 봉납 작품). 좌대신 이치조 타다카가 사치노미야의 관자놀이 머리(鬢髪)를 정리하고 있다.


사치노미야는 교토 고쇼로 거처를 옮긴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약 두 달간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보였다.

고메이 천황은 황자가 고쇼에 거주한 지 약 반년이 지난 안세이 4년(1857년) 봄경부터, 가능한 한 많은 궁중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무렵 5세의 사치노미야는 안세이 4년(1857년) 11월에 처음으로 와카를 지었다.

고메이 천황은 사치노미야가 자신을 찾아올 때마다 와카 5수를 짓도록 하였고, 이를 완성할 때마다 과자를 상으로 주었다.

안세이 6년(1859년) 3월 30일,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사치노미야의 서예 스승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 27일, 명경박사인 후시하라 노부아키가 사치노미야의 독서 스승으로 임명되었다. 사치노미야는 만 7세에 이르지 않은 어린 나이에 사서오경의 소독(素讀)을 시작하였다.

세이토쿠기념회화관 벽화 『립친왕선하(立親王宣下)』(화가 하시모토 에이호, 미쓰비시 합자회사 봉납 작품). 내대신 니조 나리유키가 '무쓰히토(睦仁)'라는 이름이 적힌 서류를 전달하고 있다.


당시 사치노미야는 또래 귀족 아이들과 함께 나무 칼로 찬바라 놀이를 하거나, 여자 관리들에게 물총을 쏘는 등 활발하고 장난기 가득한 아이였다. 성격은 승부욕이 강하고 성급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누구든 주먹으로 때리곤 했다.

만엔 원년 윤3월 16일(1860년 5월 6일), 사치노미야는 고쇼의 고산켄(御三間)에서 아이의 머리카락 끝을 잘라 가지런히 다듬고 머리가 길게 자라길 기원하는 의식인 후카소기(深曽木) 의식을 치렀다.

만엔 원년 7월 10일(1860년 8월 26일), 사치노미야는 준후(准后)인 구조 아사코의 친자로서 조군(儲君, 후계자)으로 정해졌다. 9월 28일(1860년 11월 10일), 친왕 선하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이 자리에서 "睦仁(무쓰히토)"라는 이름이 공개되었다.

8세가 되어도 무쓰히토 친왕의 장난기는 여전했다. 생모 나카야마 요시코는 무쓰히토 친왕을 벌로 고쇼(御所) 내의 서고(御文庫)에 가두기도 했다. 사이온지 긴모치분큐 원년(1861년) 무렵부터 고쇼에 출사해 무쓰히토 친왕의 시종으로서 섬기기 시작했으며,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깊은 교분을 맺었다.

친왕 선하 이후, 교육은 더욱 진전을 보였다. 만엔 원년(1860년) 11월 12일, 8세의 무쓰히토 친왕은 《대학》의 소독을 마치고, 17일부터 《중용》의 학습에 들어갔다. 분큐 원년(1861년) 3월, 《논어》를 군주의 덕을 함양하고 계발하기 위한 교재로 강독하였다.

분큐 2년(1862년) 5월 27일, 정식 황자 교육이 시작되었다. 교육의 주된 책임은 외조부인 나카야마 다다야스가 맡았다.

서예 교육은 계속해서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담당했으며, 생모 나카야마 요시코가 이를 보조했다. 분큐 원년(1861년) 2월 20일, 히로하시 다네야스가 서예를 가르치게 되었으나, 무쓰히토 친왕은 서예를 좋아하지 않아 진전이 더뎠다.

와카 교육은 고메이 천황이 무쓰히토 친왕의 와카를 직접 첨삭하면서 지도했다.[147] 겐지 원년(1864년) 정월, 레이젠 다메마사가 천황에게 무쓰히토 친왕에게 와카를 지도하고 싶다고 제안했으나, 천황은 이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2. 3. 막부 말기의 혼란과 정치적 격변

고메이 천황에도 막부가 타운센드 해리스와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이어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유사한 조약을 맺으려 하자 이에 크게 분노했다.[147] 1858년, 막부가 천황의 칙허 없이 조약을 체결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조약 철회를 요구했다. 안세이 5개국 조약 체결에 반대한 고메이 천황은 막부에 강력히 항의하는 '어취의서'를 하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관백 구조 히사타다는 막부와의 관계를 고려해 온건한 내용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좌대신 고노에 다다히로가 사쓰마번, 조슈번 등 유력 번들에게 비밀리에 칙명을 전달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천황은 이를 승인했다. 무오밀칙이라 불리는 이 칙명은 여러 번들에게 전달되었고, 특히 미토번은 이를 계기로 존왕양이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148]

막부 대로 이이 나오스케는 이러한 움직임에 위협을 느껴 1858년 9월,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존왕양이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148] 이에 분노한 미토 번사와 사쓰마 번사들은 1860년 3월 3일, 사쿠라다문 밖의 변을 일으켜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했다. 이 사건으로 막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막부는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자 공무합체 정책의 일환으로 고메이 천황의 이복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과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정략결혼을 추진했다.[147] 천황은 가즈노미야가 이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과 약혼한 상태였고, 막부의 정략을 간파하여 난색을 표했다.[149] 그러나 이와쿠라 도모미의 건의를 받아들여 가즈노미야의 신적강하를 조건으로 막부에 10년 내 조약 철폐와 양이 실행을 약속하게 했다.[149]

1862년, 서양과의 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이 발생하자 각지에서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었다. 막부는 양이 실행을 약속하고도 계속 미루면서 조정과 여러 번, 지사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미토번, 사쓰마번, 조슈번 간의 주도권 다툼도 격화되었고, 유력 번들이 조정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조정 내부에서도 존왕양이파가 세력을 확대하여 조정을 움직일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황은 공무합체파와 존왕양이파 모두에게 옹립되어 정치적 지위와 권위가 더욱 높아졌다.

나카야마 다다야스 역시 공무합체파였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863년 2월, 산조 사네토미가 오키모이리 지위를 이어받고 다다야스는 근신 처분을 받는 등, 당시의 정치적 변동은 무쓰히토 친왕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863년, 조정은 존왕양이파의 주도로 막부에 양이 정책과 실행 기한을 보고하도록 압박했다. 막부는 다음 해 교토로 상경해 양이 정책을 보고하겠다고 약속했고,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후 230년 만에 쇼군이 상경하게 되었다. 3월, 상경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조정으로부터 양이 실행 기일을 재촉받았고, 실행할 의사 없이 5월 10일로 답변했다. 같은 달, 무쓰히토 친왕은 고메이 천황을 따라 처음으로 이에모치를 만났다.

같은 해 6월, 노중 오가사와라 나가유키나마무기 사건 관련 협상 보고를 명목으로 막부 병력 1,000여 명을 이끌고 교토에 입성하려 하자, 쇼군 이에모치가 이를 저지했다. 교토에서는 오가사와라가 무력으로 조정에 개국을 강요하거나, 거부하면 도성에 불을 지르고 공경을 구속하여 교토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때문에 교토는 큰 소란에 휩싸였고, 조정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무쓰히토 친왕의 측근 인원을 늘리고, 궁내 관리 3명을 교대로 밤새 근무하게 했다.

7월, 관백 다카쓰카사 스케히로는 천황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하는 것에 대해 각 번주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돗토리번 번주 이케다 요시노리는 천황과 공경들이 군사에 대해 먼저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이에 천황은 교토수호직 아이즈번마쓰다이라 가타모리에게 병사 훈련을 건춘문 밖에서 시행할 것을 명했다. 7월 30일, 천황은 무쓰히토 친왕, 준후, 여관, 공경, 여러 번주들과 함께 훈련을 참관했다. 이는 에도 막부 설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150] 8월 5일에도 천황과 무쓰히토 친왕은 아이즈, 도토리, 도쿠시마번, 요네자와번, 오카야마번 5개 번의 병력 훈련을 참관했다.

고메이 천황은 막부와의 협력을 통해 막부가 양이를 실행하도록 하는 노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일부 공가들은 천황의 뜻을 넘어 강경하게 양이를 추진하려 했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1863년 4월, 고메이 천황은 이와시미즈 하치만구로 양이 기원을 위한 행차를 단행했다.[151] 존황양이 강경파는 이 행차에서 천황이 쇼군에게 양이 실행을 상징하는 절도(節刀)를 수여하고 막부에 양이 실행을 강요하려 했지만, 쇼군이 병을 이유로 불참하여 실패했다.[151] 무쓰히토 친왕은 준후와 함께 고메이 천황의 행차를 배웅하고, 귀환 시에도 맞이하며 천황에게 축하주와 음식을 헌상했다.

존황양이 운동은 조정의 권한 확대와 막부의 권위 쇠퇴를 배경으로 절정에 달했다. 조슈번은 5월 10일,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던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하며 양이를 실행했다(시모노세키 전쟁). 이로 인해 존황양이파가 주도하던 조정 내에서 조슈번의 평가는 더욱 높아졌고, 조슈번주 모리 가문이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8월 13일, 조정은 존황양이파의 주도로 고메이 천황이 진무 천황릉과 가스가 신사에 양이 기원을 위해 야마토로 행차하고, 이어 양이 친정을 위한 군의를 열 것이라고 공표했다. 이는 천황이 군사 지휘권을 쥐고 양이 전쟁을 수행할 가능성을 시사했다.[152] 다음 날, 무쓰히토 친왕의 숙부 나카야마 다다미쓰는 천주조를 조직해 야마토에서 천황 행차의 선봉군으로 막부를 상대로 거병했다(천주조의 변).[152]

그러나 같은 해 8월 18일, 고메이 천황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아이즈번사쓰마번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산조 사네토미 등 존황양이파 공경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이들과 연계된 조슈번 역시 교토에서 추방했다(8월 18일 정변). 정변 후 고메이 천황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 제후들을 초청해 노고를 치하했으며, 무쓰히토 친왕도 정치 행사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정변의 결과 나카야마 다다야스가 조정에 복귀했고, 무쓰히토 친왕은 기쁨을 표했다. 그러나 공무합체파의 복권으로 다다야스는 다시 실각했고, 친왕을 만나려 했으나 천황의 명으로 만남이 불허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1837년 ~ 1913년)]] 이듬해 6월, 8월 18일 정변으로 실각한 산조 사네토미 등 존황양이파 공가들과 조슈번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 조슈번은 2천 명 이상의 병력을 교토 근교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조슈번 군 추토령을 받은 후, 7월 18일 금문의 변이 발발했다. 조슈번 군은 패배하여 교토에서 퇴각했다. 이 전투 도중, 천황 일행이 다른 곳으로 피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반대로 무쓰히토 친왕은 오쓰네고텐과 연결된 오미마에서 잠들었다.

7월 20일 밤, 요시노부는 가스야 요시아키와 도쓰카와고시들이 궁에 침입해 천황을 납치하려 한다는 정보를 보고했다. 이에 천황과 무쓰히토 친왕을 깨워 시신덴으로 이동하도록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여관들이 울기 시작했고, 무쓰히토 친왕도 놀라 정신을 잃었다. 수행하던 이들이 물을 마시게 한 후에야 친왕은 겨우 진정되었다고 한다.

1866년 7월, 금문의 변 당시 조슈번을 지지했던 나카야마 다다야스 등 조슈번 지지 공가와 황족들이 조정 출석이 금지되고 외부인과의 면회도 금지되었다. 무쓰히토 친왕은 다시 외조부와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무쓰히토 친왕의 12세 생일에도 다다야스는 출석 금지 조치로 인해 매년 헌상하던 신선한 생선을 바칠 수 없었다.

1864년, 막부는 여러 번에 걸쳐 제1차 조슈 정벌을 지시했고, 조슈번은 항복했다. 그러나 정벌 이후 조슈번 내부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를 중심으로 한 정의파(도막파)가 반격에 성공해, 막부에 순응하던 속론파를 몰아내고 다시 도막 노선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1865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조슈 재정벌을 상주하였고, 천황은 이를 재가하였다. 그러나 사쓰마번조슈번 사이에 사쓰조 동맹이 맺어진 상황에서, 사쓰마번과 여러 번은 출병을 거부했다. 막부군은 사기가 저하된 채 조슈번 군대에 패배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막부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같은 해 12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제15대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14세가 된 무쓰히토 친왕도 쇼군에게 칼을 하사하며 관련을 맺었다. 황태자 책봉 이후, 무쓰히토 친왕은 황위 계승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긴박한 정치 상황 속에서도 고메이 천황은 친왕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쓰히토 친왕이 양이 사상을 강하게 가지게 되자, 천황은 이를 우려해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에게 편지를 보내 대책을 논의했다.

1867년 12월, 천황이 병에 걸렸고, 천연두로 진단받았다. 무쓰히토 친왕은 매일 병상을 지켰다. 나카야마 다다야스는 이전에 친왕에게 천연두 백신접종받게 했다는 사실을 알려 천황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천황은 12월 25일 병세가 악화되었고, 그날 밤 무쓰히토 친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붕어하였다.

아버지를 잃은 무쓰히토 친왕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12월 29일 천황의 붕어가 공식 발표되었고, 대상이 선포되었다. 30일, 천황의 유해가 내장(內槨)으로 옮겨질 때, 무쓰히토 친왕은 마지막 작별 인사를 올렸다.

2. 4. 황위 계승과 왕정복고

도쿠가와 막부는 17세기 초에 세워졌다.[3] 그 통치하에, 쇼군이 일본을 통치했다. 약 180명의 영주들, 즉 다이묘라고 불리는 이들은 쇼군 아래에서 자율적인 영지를 다스렸으며, 때때로 쇼군은 다이묘에게 선물을 요구했지만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쇼군은 다른 방법으로도 다이묘를 통제했는데, 쇼군만이 다이묘의 결혼을 승인할 수 있었고, 쇼군은 다이묘에게서 그의 토지를 빼앗을 수 있었다.[4]

1605년까지 공식적으로 직위에서 물러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최초의 도쿠가와 쇼군이었다. 퇴임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1605년에 귀족들을 위한 행동 강령을 발표했는데, 그 강령에 따라 천황은 학문과 예술에 전념해야 했다.[5] 막부 시대의 천황들은 공자의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시와 서예에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이 강령을 엄격히 준수했던 것으로 보인다.[6] 천황들은 일본과 중국 역사, 지리의 기초만 배웠다.[1] 쇼군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천황의 동의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1]

천황은 퇴위하거나 궁궐에 불이 났을 경우 사찰로 피신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교토 고쇼라고 불리는 궁궐 단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7] 퇴위할 만큼 오래 산 천황은 거의 없었다. 메이지 천황의 5명의 선임자 중 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만이 40세 이상을 살았다.[8] 황실은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천황의 5명의 형제자매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으며, 그의 15명의 자녀 중 5명만이 성인이 되었다.[1]

17세기 초에 통제권을 잡은 직후, 막부 관료(일반적으로 바쿠후라고 알려짐)는 쇄국령에 따라 일본과의 거의 모든 서방 무역을 중단하고 기독교 선교사의 입국을 금지했다. 상당한 중국과의 무역 외에, 네덜란드만이 일본과의 무역을 계속하여 나가사키의 데지마 섬에 거점을 유지했다.[9] 그러나 19세기 초에 유럽과 미국의 선박이 일본 주변 해역에 점점 더 자주 나타났다.[10]

무쓰히토 친왕은 1852년 11월 3일, 그의 외조부의 소유지 북쪽 끝에 있는 작은 집에서 태어났다. 당시 출산은 문화적으로 오염의 근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황태자는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대신 황족들은 임신한 여성의 아버지 집 근처에 있는, 종종 임시적인 건물에서 태어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무쓰히토 친왕의 어머니 나카야마 요시코는 아버지 고메이 천황의 후궁(権の典侍|gon no tenji일본어)이었으며, 나카야마 타다야스의 딸이었다.[11] 어린 친왕은 '사치노미야', 즉 사치 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2]

어린 친왕은 일본에 큰 변화가 일어나던 시대에 태어났다. 1853년 7월, 매튜 페리 제독과 그의 미국 해군 함대(일본인들이 "흑선"이라고 불렀다)가 에도 (1868년부터 도쿄로 알려짐) 항구로 들어오면서 이러한 변화가 극적으로 상징되었다.[13] 페리는 일본을 국제 무역에 개방하려 했고, 그의 해군 함대가 장착한 현대식 대포를 과시했다.[1] 최소 250년 만에, 쇼군 정권은 페리의 도착으로 인한 위기 때문에 매우 이례적으로 천황 조정과 상의하는 조치를 취했다.[14] 고메이 천황의 관리들은 미국과의 무역에 동의해야 한다고 느꼈으며, 페리가 돌아왔을 때 취할 조치에 대해 사전에 통보해 줄 것을 요청했다.[15] 일본 정부는 자국의 군대가 미국 군대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소위 "불평등 조약"에 굴복했다.[16] "불평등 조약"은 관세 권한을 포기하고 자국 법원에서 외국인을 재판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17] 쇼군 정권이 조정과 상의하려는 의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1858년, 시간이 부족하여 상의할 수 없었다는 내용의 서한과 함께 미일 화친 통상 조약 소식이 전해졌다.[18] 고메이 천황은 격분하여 양위를 위협했지만, 이 행위조차 쇼군의 동의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19]

천황의 어린 시절은 후대의 기록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전기 작가 도널드 킨은 종종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한 시대의 사람은 무쓰히토를 건강하고 강하며, 다소 불량하고, 스모에 매우 재능이 있다고 묘사했다. 다른 사람은 친왕이 허약하고 종종 병을 앓았다고 말했다. 일부 전기 작가는 그가 처음 총소리를 들었을 때 기절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이 이야기를 부인한다.[20] 1860년 8월 16일, 사치노미야는 혈통 친왕이자 왕위 계승자로 선포되었고, 그의 아버지의 배필에 의해 공식적으로 입양되었다. 그해 11월 11일, 그는 황태자로 선포되었고, 성인 이름인 무쓰히토를 받았다.[21] 친왕은 일곱 살에 교육을 시작했다.[22] 그는 무관심한 학생이었고, 나중에는 글쓰기 연습에 더 열중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시를 썼다.[23]

1858년(안세이 5년) 6월, 에도 막부미국 총영사 타운센트 해리스와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고, 그 조약이 천황의 칙허를 받지 못한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조약에 반대했던 고메이 천황은 막부가 독단적으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것과 더불어 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조약을 맺을 방침이라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으며, 8월 7일에 막부에 강한 항의와 조약 철회를 요구하는 어취의서를 막부에 하도록 엄명했다. 하지만, 관백 구조 나오타다는 막부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문면을 온건한 것으로 변경하길 원했고, 결국 좌대신 고노에 타다히로가 사쓰마, 조슈 양 번을 시작으로 유력 제 번에 내밀한 칙명을 전달하는 해결책을 제시했고, 천황은 이를 용인했다. 고노에 가에서 오와리·사쓰마· 번으로, 타카츠카사 가에서 가가·조슈·아와번으로 칙명의 사본이 전달되었다. 후에 미토번에도 칙명이 내려졌는데, 이를 보오의 밀칙이라 한다. 칙명 강하를 명예로운 일이라고 받아들인 제 번(특히 미토 번)은 이후 조약에 반대하며 천황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외적을 물리칠 것을 요구하는 존황양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를 우려한 막부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는 9월에 존황양이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는데, 이를 안세이 대옥이라 한다.[87]이에 분노한 전 미토 번사, 전 사쓰마 번사들은 만엔 원년(1860년) 3월 3일, 이이를 사쿠라다몬 외의 변으로 암살했고, 이후 막부의 위신은 약화되었다. 막부는 권위 회복을 위해 공무 합체를 목적으로, 고메이 천황의 이복 여동생 가즈노미야 친자내친왕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결혼시키려 했다. 천황은 이것이 막부의 노골적인 정략임을, 그리고 가즈노미야가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과 약혼한 상태였기에 난색을 표했지만, 시종 이와쿠라 토모미의 헌책을 받아들여, 가즈노미야 강가를 조건으로, 양이를 실행하고 10년 이내에 조약을 철폐할 것을 막부에 약속하게 하여, 만엔 원년(1860년) 8월에 시집보냈다.[88]

분큐 2년(1862년) 12월 25일, 무쓰히토 친왕은 준후와 함께, 고메이 천황을 따라, 처음으로 삼종신기 중 하나인 야타노카가미를 봉안하는 내시소를 참배했다. 내시소는 자신전 동쪽에 있는 춘흥전이 사용되었다. 이는 궁중의 신사에 정식으로 참여한 것이다.

분큐 이후, 구미 열강과의 무역 개시로 인한 마이너스적인 경제적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면서, 각 번과 각지에서 존황양이론이 격화되었고, 가까운 장래에 천황의 뜻을 받들어 양이를 행할 것을 공약해 놓고, 언제까지고 실행하지 않는 막부는 조정, 제 번, 지사로부터 다양한 수단으로 공격받게 되었다. 이와 함께 미토, 사쓰마, 조슈 세 번에 의한 존왕양이를 둘러싼 격렬한 주도권 다툼도 영향을 미쳐, 유력 제 번의 조정 정치에의 개입이 본격화되었다. 조정 내부에서도 존황양이파가 힘을 키워 조정을 움직일 정도의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투쟁에서 천황은 공무 합체파와 존황양이파 어느 쪽 세력에게서도 옹립되었고, 천황의 정치적 지위,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외조부인 나카야마 타다요시도 당시 공무 합체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 대상이 되었고, 분큐 3년(1863년) 2월 1일에는 친왕 어간언의 지위를 존양 강경파인 산조 사네토미와 교체하고, 사츠에 (근신)를 명받는 등, 정치 변동이 무쓰히토 친왕에게도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후, 조정은 존양파 주도로 막부에 대해 양이책과 양이 실행 기한을 보고하도록 촉구했고, 막부는 다음 해에 상락하여 양이책을 보고할 것을 언명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후 230년 만의 쇼군 상락이 결정되었다. 분큐 3년(1863년) 3월 7일, 상락한 쇼군 이에모치는 조정으로부터 양이 실행 기일을 재촉받고, 그 의사도 없었으면서 5월 10일이라고 답변했다. 3월 19일, 천황이 쇼군 이에모치에게 배알을 허락했을 때, 천황은 무쓰히토 친왕을 동석시켰고, 무쓰히토 친왕은 처음으로 이에모치를 인견했다.

같은 분큐 3년(1863년) 6월 19일, 로주 오가사와라 나가미치가 나마무기 사건에 대한 영국과의 교섭을 조정에 보고한다는 명목으로 막병 천여 명을 이끌고 교토에 들어가려 했고, 쇼군 이에모치가 요도에 머물게 했다. 교토에서는 오가사와라 나가미치가 무력으로 조정에 개국을 강요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도시에 불을 지르고, 공가를 체포하여 교토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으며, 막부가 천황을 히코네로 데려가려 한다는 등의 소문이 퍼졌다. 그 때문에 교토의 정세는 소란스러워졌고, 조정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무쓰히토 친왕의 측근 인원을 늘리고, 가사 등 중 3명을 여러 밤에 걸쳐 교대로 시중들게 했다. 긴박감은 11세가 된 무쓰히토 친왕에게도 피부로 느껴지게 되었다.

같은 해 7월 19일, 관백 타카츠카사 스케히로가 양이를 위해 천황 스스로 군을 이끌고 친정을 행하는 것에 대해 재경 각 번주에게 자문한 결과, 돗토리 번주 이케다 요시노리는, 천황이나 공가가 군대에 대해 먼저 알 필요가 있으므로, 재경의 제 번주에게 명하여 장병을 훈련시키고, 이를 천황, 공가가 견학하며, 군사에 익숙해진 뒤, 친정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봉답했다. 그래서, 천황은 교토 수호직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에게 명하여 장병의 훈련을 금리 어소의 켄슌몬 밖에서 행하게 했다. 훈련일인 7월 30일은 우천이었지만, 켄슌몬 북쪽 구멍 문에 있는 어람소에서, 천황은 무쓰히토 친왕과 준후, 여관, 공가, 제 번주 등을 이끌고 이를 견학했다. 천황이 군사 행사를 보는 것은 에도 막부 성립 이후 없었던 일이었다[89]。천황과 무쓰히토 친왕 등은 8월 5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아이즈, 돗토리, 도쿠시마·요네자와·오카야마 다섯 번의 훈련을 견학했다. 요네자와 번병은 서양식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 대포와 총의 소리, 연기로 아이와 여자들은 놀라 기절했지만, 무쓰히토 친왕은 태연히 견학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메이 천황은 막부와 연계하여, 현실적인 형태로 막부에 양이를 실시시키려는 노선을 그 후에도 계속 취했다. 그러나 공가 중에는 천황의 뜻을 넘어, 강경한 형태로 양이를 행하려는 자도 나왔다. 그 압력으로, 분큐 3년 4월 11일(1863년 5월 28일)부터 다음날에 걸쳐, 고메이 천황은 이와시미즈 하치만구에 양이 기원의 행차를 했다. 존황양이 강경파는 이 행차 중에서 천황이 쇼군에게 양이 실행의 절도를 수여하고, 막부에 양이의 결행을 강요할 계획이었지만, 쇼군이 병을 이유로 참가하지 않아, 실패로 끝났다[90]。무쓰히토 친왕은 아버지의 이와시미즈 행차를 준후와 함께 금리 어소의 도키몬 어견립소에서 배웅했고, 다음날 12일의 귀환에 즈음해서도, 마찬가지로 맞이하고, 축하의 술과 안주를 한 상 차려, 천황에게 헌상했다.

존황양이 운동은 조권의 신장과 막권의 쇠퇴를 배경으로 그 해에 최고조에 달했다. 조슈번은 분큐 3년 5월 10일, 즉 양이 결행일로 된 날에,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 중인 외국 선박에 대해 포격을 가했다(시모노세키 전쟁). 그 때문에 존황양이파가 주도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조슈번 평가가 한층 상승했고, 조슈번주 모리 가에게 정이대장군을 명하는 칙명이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8월 13일, 조정은 존황양이파 주도로, 고메이 천황이 진무 천황릉과 가스가 신사에 양이를 기원하기 위해 야마토로 행차하고, 이어서 양이 친정의 군의를 행한다고 포고했다. 드디어 천황이 군사 지휘권을 쥐고 양이 전쟁을 수행할 가능성도 나왔다. 야마토 행차 포고가 나온 다음 날인 8월 14일, 무쓰히토 친왕의 숙부이자, 궁중에서 무쓰히토 친왕의 학문과 놀이 상대를 맡았던 나카야마 타다미츠도 천주조를 조직하고, 8월 17일, 야마토에서, 천황 행차의 선봉 군으로서 막부에 대해 거병했다(덴추조의 변)[91]

분큐 3년(1863년) 8월 18일, 고메이 천황과 나카가와노미야 타카히로 친왕은, 아이즈, 사쓰마 번과 함께 정변을 감행하여, 산조 사네토미 등 존황양이파의 공가를 궁중에서 배제하고, 그들과 연계하고 있던 조슈번을 교토에서 추방했다(8월 18일의 정변)。20일과 26일, 고메이 천황은 고미소에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등 제후를 초대하여 노고를 치하했지만, 양일 모두 무쓰히토 친왕은 중단의 방에 착석했다. 정치의 장에 등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후의 등장은 없다. 고메이 천황은 강경한 양이론의 방출이라는 결단을 무쓰히토 친왕에 대해 의식적으로 나타냈다고 생각된다. 정변의 결과, 나카야마 타다요시도 의주격으로 복귀했고, 무쓰히토 친왕은 도미 등 증정하며 기뻐하고 있다. 9월 27일에는 타다요시, 아이 부부가 참내. 친왕 선하 이후, 무쓰히토 친왕을 전혀 만나지 못했던 아이는 재회의 감격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공무 합체파의 복권에 의해 나카야마 타다요시가 실각하고, 12월에 타다요시가 무쓰히토 친왕을 만나려 했을 때에는, 참전을 삼가라는 천황의 명이 있다는 이유로, 만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다음 해 6월이 되자 '8월 18일의 정변'으로 실각한 산조 사네토미 등 존황양이파 공가, 그리고 그들과 연계하고 있다고 여겨져 9개의 문 중 하나인 사카이마치 어문 경비를 중단당한 조슈번이 만회를 꾀하여, 6월 말까지 2천 명 이상의 병력을 교토 근교에 결집시켰다. 그들의 요구는 산조 등 존황양이파 공가와 조슈번 처분을 철회하는 것이었지만, 금리 어수위 총독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조슈번 군 추토령을 받자 7월 18일에 금문의 변(게이문 어문의 변)이 시작되었고, 조슈번 군은 처음에는 우세를 점했지만, 사쓰마번 군 내습에 의해 패퇴하여, 같은 날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 중에 천황 등은 다른 곳으로 피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요시노부 등이 반대했기 때문에, 머물게 되었고, 무쓰히토 친왕도 밤에는 어상어전으로 연결된 어삼간으로 옮겨 취침했다.

다음 20일 밤에는, 요시노부가 참내하여, 금리 부의 카스야 요시아키와 토츠카와 향사 등이 금리 어소 안으로 잠입하여 천황을 데리고 나가려 한다는 정보가 있다며, 천황과 무쓰히토 친왕을 깨워 내정에서 더 먼 자신전으로 옮길 것을 주청했다. 그 때, 여관들 중에는 큰 소리를 지르며 우는 자도 있었고, 무쓰히토 친왕도 놀라 자신전 안에서 정신을 잃고, 시중드는 자가 물을 먹이자,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는 일화가 있지만, 이것은 니나가와 아라타 및 오야 소이치가 처음으로 주장한 설이다. 메이지 천황을 '대포의 폭음으로 기절하는 소심하고 마음이 작은 성질이라고 이해된다'고 논평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아스카이 마사미치는 '나카야마 타다요시 일기'의 잘못된 읽기에서 나온 것을 지적하고 있으며, 소년 무쓰히토가 기절한 것은 게이문 어문의 변의 대포 소리가 아니라(게이문 어문의 변은 전날이다), 한밤중에 깨어나, 갑자기 울부짖는 여자들 속에서 자신전으로 옮겨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여관들이 외치고 있던 것은 하녀가 주인에게 동행했을 때, 실수로 먹물 항아리를 떨어뜨리고, 그 소리가 총성으로 오인되어, 냄새도 강렬했기 때문에 소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스카이는 지적하고 있다. 아스카이의 '나카야마 타다요시 일기'로부터의 기술 설명은 '메이지 천황기'의 내용과 일치한다.

7월 27일에는 금문의 변 때 조슈번을 지지했던 타다요시가, 전 관백의 타카츠카사 스케히로,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친왕 등 다른 조슈번 지지 공가, 황족과 함께 참조를 정지당했고, 다른 사람과의 면회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무쓰히토 친왕은 다시 조부와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겐지 원년(1864년) 9월 22일, 무쓰히토 친왕이 12세 생일을 맞이했을 때도 타다요시는 참조 정지라서 예년의 신선한 생선을 헌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타다요시의 아내, 아이가 세 종류의 '기요'를 헌상하고 있다.

겐지 원년, 막부는 제 번에 명하여 제1차 조슈 정벌을 실시했고, 그 해 항복한 조슈번의 가로들이 할복당하고, 대신 속론파(막부 굴종파)가 동 번의 실권을 잡았지만, 그 후 타카스기 신사쿠 등 정의파(도막파)의 고요잔지 거병을 거쳐, 속론파는 실각, 타카스기 등 정의파가 번정을 장악했기 때문에 다시 도막 노선을 강화했다. 다음 게이오 원년이 되자 쇼군 이에모치가 조슈 재정을 천황에게 주청했고, 그 해 9월 21일에 칙허를 얻어, 다음 게이오 2년(1866년) 6월 7일부터 재정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그 해 1월, 사쓰초 동맹의 밀약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사쓰마번은 출병을 거부, 그 외에도 출병을 거부하는 번이 많았고, 막부군의 사기는 낮았으며, 오시마구, 게이슈구, 셋슈구, 코라구의 사경에서 조슈번 군에 반격당하여 참패, 7월 20일에 이에모치는 오사카성에서 병사했다. 막부의 권위는 현저하게 쇠퇴했다.

12월 5일에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5대 쇼군으로 임명되었다. 14세의 무쓰히토 친왕도 아버지에게서 배워 요시노부에게 사자를 보내 칼 한 자루를 하사했다. 무쓰히토 친왕은 게이오 원년 11월 11일(1866년 1월 27일)에 황태자가 된 후 살 예정인 꽃 어전에 일시적으로 옮기는 등, 황위 계승자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쇼군 선하에도 관련을 갖게 되었다.

학습 면에서는, 무쓰히토 친왕은 게이오 원년 6월에 '논어'의 소독을 12세에 종료했다. 그 6월부터 '맹자'의 소독을 시작하여, 다음 게이오 2년(1866년) 5월에는 새로운 독서 시후로서 참의 아노 긴마코토가 붙여졌고, 같은 해 7월 2일에 종료했다. 불과 1년 만에 마친 것으로, 고메이 천황은 무쓰히토 친왕의 면학을 칭찬하고, 사범 후시하라 노리타다의 교육을 격찬했다. 사서의 소독을 마친 후, 천황은 7월 1일부터 '모시'(시경)의 소독으로 나아갔다. 정세가 긴박해지는 중에도, 천황은 무쓰히토 친왕에 대한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큰 틀의 지시를 행하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 무쓰히토 친왕은 황자 교육을 담당하는 여관의 영향을 받아 양이 사상을 강화했고, 천황은 여관의 영향을 우려하는 칙서를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메이지 이후 구니노미야)에게 보냈다.

게이오 2년 12월 11일(1867년 1월 16일)부터 천황은 병이 나서, 이윽고 발진이 나타났고, 15일에 시의로부터 천연두로 진단받았다. 무쓰히토 친왕은 붉은 윤자, 붉은 주름 옷을 입고 매일 병상에서 천황을 간호했다. 천황은 무쓰히토 친왕에게 천연두가 감염되지 않도록, 완쾌될 때까지 자신의 가까이에 오지 말라고 명했지만, 외조부 타다요시는 무쓰히토 친왕을 맡고 있는 동안, 란학 의사 오무라 야스스케에게 부탁하여 무쓰히토 친왕에게 종두를 받게 했다. 그 사실을 천황에게 이야기하자, 천황은 안심했다. 12월 25일(1867년 1월 30일) 정오에 천황의 병세 악화 소식을 들은 무쓰히토 친왕은, 천황에게 달려갔지만, 곧 소강 상태가 된 것처럼 보여 일단 퇴출했지만, 오후 11시경, 다시 천황의 병세가 악화, 무쓰히토 친왕이 달려간 직후 오후 11시 15분에 붕어했다. 아버지를 잃은 무쓰히토 친왕의 슬픔은 깊었고, 밤에도 잠을 잘 수 없었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29일에 천황 붕어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고, 대상이 발령되었다. 30일에 선제의 유해는 내조로 옮겨졌고, 무쓰히토 친왕은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게이오 3년 1월 9일(1867년 2월 13일), 14세로 즉위하여 122대 천황을 계승했다. 원복 전의 즉위였기 때문에 입태자례를 거치지 않고 황위를 계승했다. 고카쿠 천황의 동형 즉위의 선례를 따라 머리 모양은 미즈라,[92] 의상은 히키노우시, 아타치, 히토에, 하리하카마, 요코메센으로 장식한 동형 즉위식을 거행했다.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과 마찬가지로 나카누마 료조를 초대 시강으로 임명했다.

즉위 후, 어린 나이에 즉위한 천황은 오랜만에 외조부 나카야마 다다야스와의 재회를 희망하며, 1월 15일 즉시 대사를 선포하여 금문의 변 당시 조슈번을 지지하다가 폐문 칩거 명령을 받았던 다다야스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등의 참조를 허용했다. 또한 1월 19일에는 제2차 조슈 정벌 해산을 명하는 칙령을 막부에 내렸다. 막부 역시 더 이상의 정벌이 승산이 없음을 인정하고, 1월 24일 정벌에 동원된 각 번의 병력을 철수시키고 본국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막부 연합군의 참패와 조슈번의 승리는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동시에 천황의 권위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2월 13일, 다다야스가 궁중에 다시 나와 역대 천황의 중요한 책무인 유직고실에 대한 학습을 천황에게 건의했다. 이후 다다야스는 천황의 요청에 따라 궁중 예법 강의를 위해 자주 궁중을 방문했으며, 6월 1일에는 국서(國書) 강의를 맡기도 했다. 국모 나카야마 요시코는 삭발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3월 13일 나이시노스케로 임명되어 내전(內殿) 업무를 맡아 천황을 계속 보필했다.

2월 16일에는 사망한 아버지에게 고메이(孝明)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고메이 천황의 붕어로 인해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교토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아이즈번주), 교토소사대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구와나번주)를 중심으로 한 "이치카이소 정권"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들은 겐지 원년(1864년) 무렵부터 고메이 천황의 보호 아래 공무합체파로서 교토를 중심으로 막부 및 조정 정치를 주도해 왔으나, 천황 붕어로 인해 가장 강력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천황은 선황만큼 친막부적이지 않았으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외조부 나카야마 다다야스는 반막부 성향이 뚜렷했다. 그러나 요시노부와 이치카이소 정권측은 섭정 니조 나리유키,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 친막부파 황족들과 의논하며, 의주(議奏), 무가전주(武家伝奏) 등을 압박함으로써 계속해서 조정 정치를 주도하려 했다.

1867년 5월 23일, 조의가 열려 요시노부와 사다아키 등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요시노부는 제2차 조슈 정벌 패배의 영향을 최대한 은폐하고자, 조슈 번에 대한 관대한 처분과 외세와의 조약에 따라 효고 항구를 개항한다는 조서를 동시에 승인해 줄 것을 천황에게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전 후쿠이번주 마츠다이라 요시나가는 전 우와지마번다테 무네나리, 시마즈 히사미츠, 전 도사번주 야마우치 도요시게 등과의 협의를 토대로, 먼저 조슈번에 대한 처분을 결정한 뒤, 논란이 많은 효고 개항 문제는 후일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요시나가의 의견은 다수의 조신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실권을 장악한 요시노부가 끝내 의견을 관철시켜, 조슈 번의 관대한 처분과 효고 개항은 동시에 결정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고토 쇼지로, 사쓰마번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6월 22일 회담을 열고, 두 번이 왕정복고를 위해 협력할 것을 맹약했다. 이미 1년 반 전

3. 메이지 시대와 일본의 근대화

안세이 5개국 조약 체결 이후, 고메이 천황을 중심으로 존왕양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87] 막부는 공무합체 정책을 통해 권위 회복을 시도했지만, 분큐 연간 이후 존왕양이론이 격화되면서 조정, 여러 번, 지사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88] 이러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천황은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었고, 정치적 지위와 권위가 더욱 높아졌다.[89]

1863년 조슈번이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는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하면서 존황양이 운동은 절정에 달했다.[90] 그러나 8월 18일 정변으로 존황양이파 공경들이 조정에서 추방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91] 이후 금문의 변 등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막부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1867년 고메이 천황천연두로 붕어하고, 메이지 천황이 즉위했다.[92] 대정봉환 이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새 시대가 개막되었다. 1868년 9월부터 일세일원(一世一元)을 결정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했다. 1869년에는 에도도쿄로 고치고 도쿄로 천도하여 도쿠가와 막부의 소유였던 도쿄 성(구 에도 성)을 궁성으로 정하고, 판적봉환을 허락했다. 1871년에는 폐번치현을 단행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1870년에는 신도를 국교로 정하고, 제정일치를 선포하는 조서를 발표하고 신도의 국교화와 천황의 '신격화'를 추진해 나갔다.

영국미국 등의 서구 사절단의 화려한 외모에 매료된 메이지 천황은 신문물 개방의 뜻을 펼쳤다. 이때 막부 세력이 독단적으로 개항을 추진하여 반막부세력의 반발을 샀으나, 그는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는 관주도(官主導)의 개발, 자본력 육성과 정치력, 군사력 강화에 치중하였다.

3. 1. 정치 체제 정비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은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면서 정치 체제 정비에 힘썼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다.[52] 이는 각 번(藩)을 폐지하고 현(県)을 설치하여, 번주가 다스리던 지역을 천황 직할로 바꾼 중요한 개혁이었다.[52]

1889년(메이지 2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대일본제국 헌법을 마련하게 했다.[54] 이 헌법은 흠정헌법(欽定憲法)의 성격을 가지며, 천황이 국가 통치의 정치적 대권과 일본 제국육군·해군 군 통수권을 가진다는 내용을 명시했다.[54] 이로써 일본은 입헌군주국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890년(메이지 23년)에는 교육칙어를 내려, 천황제 국가를 지탱하는 신민(臣民) 양성을 도모했다.[60] 교육칙어에서는 천황이 국민 도덕의 중심임을 밝힘으로써, 천황제 국가를 유지하는 2대 이념을 확립했다.

이러한 정치 체제 정비는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폐번치현으로 중앙집권화가 강화되었고,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으로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다. 교육칙어는 국민들에게 천황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며, 일본 사회의 결속력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1882년(메이지 15년)에는 군대를 천황의 군대로 규정한 군인칙유를 발표하여 군비 증강에 힘썼다.[59]

3. 2. 군사력 강화와 제국주의 확장

메이지 천황은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여 일본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이끌었다.[154]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여 정치력과 군사력 강화에 집중하였다. 1873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정한론 논쟁이 벌어졌으나, 칙서를 내려 사이고의 조선 파견을 중지시키고, 이후 국내 개혁에 힘을 기울여 근대화를 추진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메이지 천황은 대본영에서 직접 전쟁을 지휘했다.[154] 영일 동맹을 체결하여 군사적, 경제적 성장을 도모하였으며,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1905년 대한제국과 을사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다.[154]

1904년에는 러일 전쟁이 발발, 메이지 천황은 다시 한번 대본영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1910년 한일병합을 통해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만주로 진출하는 등 일본을 제국주의적 식민 국가로 팽창시켰다.[154] 1911년에는 불평등 조약 개정을 통해 일본을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154] 동학 농민 운동 진압,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의 승리는 천황에 대한 국민적 숭배와 존경심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3. 3. 대한제국 병합과 식민지 지배

메이지 천황은 1905년 대한제국과 을사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다.[154] 1910년 8월에는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만주로 진출하는 등 일본을 제국주의적 식민 국가로 팽창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154]

4. 성격과 평가

메이지 천황은 근대 격변기의 천황으로,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즉위하여 대정봉환, 왕정복고, 메이지 유신 등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147]

그의 성격은 검소함을 중시하고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황실의 위엄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평소에는 장난기 넘치는 성격으로 황후와 여관들을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153] 어린 시절부터의 장난기는 도쿄에서 살게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152] 1880년대에는 촛불을 끄는 장난을 즐겼고,[152][153] 식후에는 소리 없는 악기로 흥을 돋우거나,[153] 눈이 오면 소년들과 함께 눈으로 후지산을 만들기도 했다.[152]

사적인 자리에서는 평생 교토 사투리를 사용했다.[146][153] 전 시종 히노니시 스케히로에 따르면, 메이지 천황은 교토를 매우 좋아하여, 에이쇼 황태후가 서거한 후 교토 능에 참배했을 때 여러 이유를 대며 도쿄로 돌아가는 것을 늦추기도 했다.[146] 음식 취향도 교토 사랑을 반영하여, 은어, 잉어, 붕장어, 와카사 만의 도미와 가자미, 메추라기, 고사리, 민들레, 두릅 등을 좋아했다.[146]

메이지 천황은 학문에 있어서는 1880년대 중반까지 열심히 서적을 읽었으며,[153][152]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나 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등의 전기를 읽고, 삼국지나 군담물(전투를 주제로 한 에도 시대의 통속 소설)을 좋아했다.[152] 특히 군담물은 큰 소리로 읽었다고 한다.[152]

황자 요시히토 친왕(후의 다이쇼 천황)을 항상 걱정하며 그의 성장을 기뻐했지만,[147][152] 애정 표현은 서툴렀다.[152] 요시히토 친왕이 병약하여 군인에 의한 엄격한 교육이 악영향을 미치자,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에게 교육을 맡겨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교육 방침을 인정했다.[153][152]

술을 좋아하여, 일본 술, 와인, 샴페인, 베르무트 등을 즐겼다.[152]

문화적으로는 와카를 좋아하여 많은 어제를 남겼고, 게마리도 좋아하여 보존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를 좋아하여 직접 요이를 읊기도 했으며,[153] 에이쇼 황태후를 위해 아오야마 어소에 노 무대를 만들기도 했다.[130] 프록 코트를 입고 공무를 보았고,[153][154] 레코드와 오르골을 즐겼다.[153]

메이지 천황은 쇼무 천황이 육식 금지를 선포한 이후 황실에서 금기시된 소고기와 우유 섭취를 권장하여 새로운 식생활을 보여주었고, 산발 탈도령 발표 후 단발을 하여 국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청일 전쟁 당시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난로도 없이 집무를 계속하는 등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청년기에는 모토다 나가자네와 사사키 다카유키의 영향을 받아 서양 문물에 회의적이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결점을 "서양 취향"이라 평하기도 했다. 유교를 기본으로 하는 교육을 지지했고, 서양식 교육론자 임명에 불쾌감을 느껴 공무를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의 노력으로 입헌 국가 건설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황후 이하 부인의 양장을 허가하는 등 변화를 보였다.[131]

도검 애호가로 알려져 명검을 수집하고 시험 삼아 베는 것을 좋아했다. 이토 히로부미내각총리대신 사표를 제출했을 때 "짐은 사표를 낼 수 없다"고 말하며 황제의 책임을 강조했다.

사진의사를 싫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에두아르도 키요소네의 초상화는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아 몰래 제작된 것이다. 건강에 자신하여 의사 진찰을 거부하다 병이 악화되기도 했다.

만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짐이 죽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라며 약한 소리를 하거나, 추밀원 회의 중 잠들어 버리는 등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위를 걱정시켰다.[132]

러일 전쟁 영웅 노기 마레스케 부부가 순사하여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빈곤층을 위한 의료 정책으로 제생회 창설에 기여했다.

우표와 화폐에 초상 도안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세르비아에서 발행된 기념 우표에 밀란 1세와 함께 젊은 시절 초상이 그려졌다.[133]

일부 이슬람교도들은 러일 전쟁 승리 후 메이지 천황을 칼리프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134] 이란에서는 입헌파 학자들이 메이지 천황에게 전보를 쳐 이슬람 사회 보호와 지원을 요구하기도 했다.[134]

메이지 대제[135]나 메이지 성제[136]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어제(御製, 천황이 직접 지은 와카):


  •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고 외국에 뒤지지 않는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도 좋겠네"
  • "사방의 바다, 모두 형제라고 생각하는 세상에 어찌 파도가 일어 소란스러운가" - 러일 전쟁 직전 전쟁 회피와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어제로, 쇼와 천황태평양 전쟁 회피를 바라며 인용하여 유명해졌다.
  • "시키시마(일본)의 야마토(일본) 마음의 숭고함은, 일이 있을 때야말로 나타났도다"
  • "우리 나라는 신의 후손이니, 신을 섬기는 옛날의 손짓, 잊지 말아다오"
  •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사람의 마음의 진실이로다"

5. 가족 관계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는 고메이 천황이며, 어머니는 후궁 나카야마 요시코이다.

1867년 이치조 하루코와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후궁 야나기와라 나루코가 요시히토(嘉仁, 다이쇼 천황) 황자를 낳았고, 후궁 소노 사치코마사코, 후사코, 노부코, 도시코 등 2남 6녀를 낳았으며, 그 밖에 요절한 황자녀를 포함하여 총 5남 10녀를 두었다.

메이지 천황의 4명의 손자들은 모두 그의 서자이자 넷째 아들인 다이쇼 천황이 낳은 아들들이다. 장손은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친왕(裕仁, 쇼와 천황), 작은 손자는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秩父宮雍仁), 셋째 손자는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高松宮宣仁), 막내 손자는 그가 사망한 후인 1915년에 출생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三笠宮崇仁)이다.



메이지 천황 즉위 직후, 황실 관리들은 이치조 하루코를 그에게 신붓감으로 소개했다. 미래의 황후는 황실 관리의 딸이었으며, 신랑보다 3살 연상이었고, 겐푸쿠(성인식) 이후에 결혼해야 했다. 두 사람은 1869년 1월 11일에 결혼했다.[68] 사후 쇼켄 황태후로 알려진 그녀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고고''(문자 그대로 황제의 아내, 황후로 번역)라는 칭호를 받은 황실의 배우자였다. 비록 그녀가 공적인 역할을 한 최초의 일본 황후였지만, 자녀는 없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은 5명의 공식 시녀에게서 15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자녀 중, 나루코 부인(1855–1943), 야나기와라 미쓰나루의 딸, 그리고 사치코 부인(1867–1947), 백작 소노 모토사치의 장녀에게서 태어난 4명의 공주와 아들 1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그림위키이름탄생사망아버지자녀
황후이치조 마사코|一条美子일본어
(쇼켄 황태후)
1849년 5월 9일1914년 4월 9일이치조 타다카없음



그림이름출생사망아버지자녀
Hamuro Mitsuko|葉室光子일본어1853년 2월 3일1873년 9월 22일권대납언: 하무로 나가마사첫째 황자: 와카미츠테루히코노 미코토
Hashimoto Natsuko|橋本夏子일본어1856년 3월 19일1873년 11월 14일소납언: 히가시보조 나츠나가
대납언: 하시모토 사네아키라
(외조부이자 양아버지)
첫째 공주: 와카타카요리히메노 미코토
Yanagiwara Naruko|柳原愛子일본어1859년 6월 26일1943년 10월 16일권중납언: 야나기하라 미츠나루둘째 공주: 우메노미야 시게코 황녀
둘째 황자: 타케노미야 유키히토 황자
셋째 황자: 하루노미야 요시히토 황자 (후에 다이쇼 천황)
Chigusa Kotoko|千種任子일본어1855년 7월 19일1944년 2월 1일좌근위권소장: 치구사 아리토셋째 공주: 시게노미야 아키코 황녀
넷째 공주: 마스노미야 후미코 황녀
Sono Sachiko|園祥子일본어1867년 12월 23일1947년 7월 7일우근위권중장: 소노 모토사치다섯째 공주: 히사노미야 시즈코 황녀
넷째 황자: 아키노미야 미치히토 황자
여섯째 공주: 츠네노미야 마사코 황녀
일곱째 공주: 카네노미야 후사코 황녀
여덟째 공주: 후미노미야 노부코 황녀
다섯째 황자: 미츠노미야 테루히토 황자
아홉째 공주: 야스노미야 토시코 황녀
열째 공주: 사다노미야 토키코 황녀



이하 메이지 천황의 황자녀 중 성인으로 성장한 5명(1남 4녀).

어휘신분읽기생년월일사망년월일관계생모비고
--하루노미야 요시히토 친왕하루노미야 요시히토1879년 8월 31일1926년 12월 26일(만 47세 사망)제3황자
(제5자)
--
야나기하라 사키코
구조 후지코와 결혼
다이쇼 천황제123대 천황
1912년 7월 30일:
부친인 메이지 천황의 붕어에 따라 즉위.
자녀:4남(4명)。
--쓰네노미야 마사코 내친왕쓰네노미야 마사코1888년 9월 30일1940년 3월 8일(만 51세 사망)제6황녀
(제10자)
--
소노 사치코
다케다노미야 쓰네히사 왕와 결혼
다케다노미야 마사코 내친왕
자녀:1남 1녀(2명)。
--주노미야 후사코 내친왕가네노미야 후사코1890년 1월 28일1974년 8월 11일(만 84세 사망)제7황녀
(제11자)
--
소노 사치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와 결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후사코 여왕
자녀:1남 3녀(4명)。
--후미노미야 노부코 내친왕후미노미야 노부코1891년 8월 7일1933년 11월 3일(만 42세 사망)제8황녀
(제12자)
--
소노 사치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와 결혼
아사카노미야 노부코 여왕
자녀:2남 2녀(4명)。
--야스노미야 도시코 내친왕야스노미야 도시코1896년 5월 11일1978년 3월 5일(만 81세 사망)제9황녀
(제14자)
--
소노 사치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와 결혼
나루히코 왕비 도시코 내친왕
자녀:4남(4명)。


6. 관련 문화 콘텐츠

메이지 천황을 소재로 한 문화 콘텐츠는 다음과 같다.

분야제목연도제작메이지 천황 역비고
소설천황의 세기오오부츠 지로
소설메이지 천황야마오카 소하치(고단샤, 이후 동・야마오카 소하치 역사 문고 전 6권)
소설메이지 천황스기모리 히데(주오코론샤, 이후 가쿠요쇼보 인물 문고 전 2권)
영화메이지 천황과 노일 전쟁1957년신토호아라시 칸주로
영화천황·황후와 청일 전쟁1958년신토호아라시 칸주로
영화메이지 대제와 노기 장군1959년신토호아라시 칸주로
영화메이지 대제 어일대기1964년다이조아라시 칸주로(상기 영화의 재편집판)
영화일본해 해전1969년도호마츠모토 코시로
영화203 고지1980년도에이미후네 도시로[81] 러일 전쟁 중 뤼순 공방전을 다루었으며, 나카다이 타츠야 (노기 마레스케 장군 역)와 탄바 테츠로 (고다마 겐타로 장군 역)도 출연.
영화라스트 사무라이2003년워너 브라더스나카무라 시치노스케메이지 천황은 고문들의 통제 하에 있는 약하고 경험이 부족한 지도자로 묘사되지만,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톰 크루즈가 연기한 네이선 올그렌 대위에게 영감을 받아 결단력을 보여줌.
드라마메이지 천황 제1부1966년요미우리 TV17대 이치무라 우자에몬 (청년 시절은 이시쿠라 히데히코)[145]
드라마메이지 천황 제2부1967년요미우리 TV13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드라마203 고지 사랑은 죽습니까1981년TBS6대 마츠모토 하쿠오
드라마주상공화2003년CCTV (중국)야노 코지
드라마언덕 위의 구름2009년NHK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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