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쿠보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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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쿠보 레이는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로, 1942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순수 미술과 문학을 전공하고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69년 자신의 회사 꼼 데 가르송을 설립했다. 꼼 데 가르송은 반(反) 패션, 해체주의적인 의류를 특징으로 하며, 1980년대 파리 패션 위크 데뷔 이후 '검은 충격'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옷, 액세서리뿐만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매장 인테리어 등 사업 전반에 참여하며, 꼼 데 가르송 외에도 다양한 하위 라인과 협업을 진행했다. 2017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그녀의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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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쿠보 레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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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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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와쿠보 레이 |
본명 | 가와쿠보 레이 (川久保 玲) |
출생일 | 1942년 10월 11일 |
출생지 | 일본 도쿄 |
학력 | 게이오기주쿠 대학 철학과 졸업 |
직업 | 패션 디자이너 |
소속 | ㈜꼼데가르송 대표이사 사장 |
배우자 | 아드리안 조페 |
경력 | |
주요 업적 | "꼼 데 가르송" 운영 |
수상 | |
수상 내역 | 마이니치 패션 대상 (1983년) 프랑스 예술 문화 훈장 슈발리에 (1992년) 예술선장 (2001년) 아사히상 (2003년) 프랑스 국가 공로 훈장 (2004년)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상 (2012년) 이삼 노구치상 (2019년) 문화공로자 (2023년) |
관련 링크 | |
웹사이트 | 꼼 데 가르송 공식 웹사이트 |
2. 초기 생애와 교육
가와쿠보 레이는 1942년 10월 11일 도쿄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행정가였으며, 어머니는 영어 교사였다.[3][31][32] 주디스 써먼의 뉴요커 기사에 따르면, 그녀의 아버지는 서양 문화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개방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3] 가와쿠보는 세 자녀 중 장녀였다.[3]
그녀는 게이오기주쿠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정식으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지는 않았다.[33][34]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3][35] 대학 졸업 후 섬유 회사 근무와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 활동을 거쳐 패션계에 입문하게 된다.[4]
2. 1. 게이오기주쿠 대학 졸업
가와쿠보 레이는 유치사부터 게이오기주쿠에서 교육을 받았다.[33][34] 그녀의 아버지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명문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행정가였으며[3], 어머니는 영어 교사였다.[31][32] 가와쿠보는 게이오기주쿠 중등부와 게이오기주쿠 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60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3][33][34] 그녀는 정식으로 패션 디자인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대학에서 철학과 내 미학 및 미술사학을 전공하며 아시아 및 서양 예술을 공부했다.[3][35]과정 | 학교 | 비고 |
---|---|---|
유치원 | 게이오기주쿠 유치사 | [33][34] |
중학교 | 게이오기주쿠 중등부 | [33][34] |
고등학교 | 게이오기주쿠 여자고등학교 | [33][34] |
대학교 |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 철학과 (미학, 미술사학 전공) | 1960년 입학, 1964년 졸업[3][35] |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 졸업 후 아사히카세이 선전부에서 근무하다 퇴사하고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했다.[36] 스타일리스트 시절 촬영에 필요한 옷을 직접 제작하게 된 것을 계기로 1969년 자신의 브랜드 꼼 데 가르송을 설립하며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5][31] 1975년 도쿄 컬렉션에 데뷔하고 아오야마에 첫 매장을 열었으며, 1978년에는 남성복 라인을 추가했다.[5]
1964년 대학 졸업 후, 가와쿠보는 섬유 회사인 아사히카세이의 광고 부서에 입사하여 3년간 근무했다.[36] 퇴사 후 1967년부터는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4]
3. 경력
1981년 파리 컬렉션에 진출하여 기존 서양 패션과는 다른 해체주의적이고 논섹슈얼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1982년 발표한 검은색 위주의 구멍 뚫린 니트 등은 '검은 충격'이라 불리며 파장을 일으켰고[37], 그의 디자인은 '반(反) 패션'으로 평가받았다. 이 시기 검은색, 무채색, 비대칭, 미완성된 듯한 디테일은 가와쿠보 디자인의 상징이 되었다.[4][8] 1980년대 초반 이미 꼼 데 가르송은 일본 내 150개 매장과 연 매출 3000만달러를 기록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3]
가와쿠보는 단순히 옷을 디자인하는 것을 넘어 그래픽 디자인, 광고, 매장 인테리어 등 브랜드의 모든 시각적 요소에 직접 관여하며 총체적인 비전을 구현한다.[9] 또한, 1990년대 초에는 자신의 영감을 담은 비주얼 중심의 잡지 '식스'(Six)를 발행하기도 했다.[10]
그녀는 후배 디자이너 준야 와타나베[14][15], 타오 쿠리하라[16][17] 등의 성장을 지원했으며, H&M[19], 나이키, 루이 비통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했다.[18] 2004년에는 런던에 편집매장 도버 스트리트 마켓을 열어 자신의 브랜드 외에 신진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이후 세계 주요 도시로 확장되었다.[22]
가와쿠보의 혁신적인 디자인과 독창적인 브랜드 운영 방식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마이니치 패션 대상, 프랑스 예술 문화 훈장 및 국가 공로 훈장, 미국 CFDA 국제상, 이소무 노구치상 등을 수상했으며[41][49][44], 2017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현존하는 디자이너로서는 이례적으로 대규모 회고전 'Art of the In-Between'이 열리기도 했다.[1] 그녀의 작업은 마틴 마르지엘라, 앤 드뮐미스터, 헬무트 랭 등 후대의 많은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주었으며[12], 동시대 디자이너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11]
3. 1. 꼼 데 가르송 설립과 초기 활동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던 가와쿠보 레이는 광고 촬영 등에 필요한 옷을 직접 제작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되었다.[36] 1969년, 그녀는 도쿄에서 자신의 회사인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çons)을 설립하고 여성복 제조 및 판매를 시작했다.[5] 브랜드명 '꼼 데 가르송'은 프랑스어로 직역하면 "소년처럼"이지만, 실제로는 "소년이 가진 모험심"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1973년에는 주식회사 꼼 데 가르송을 설립했다.
1975년, 도쿄 컬렉션에 처음 참가했으며, 도쿄 아오야마에 첫 부티크를 열었다.[5] 1978년에는 남성복 라인인 "꼼 데 가르송 옴므"(COMME des GARÇONS HOMME)를 추가했다. 1980년까지 꼼 데 가르송은 일본 전역에 150개의 프랜차이즈 매장을 운영하고 80명의 직원을 고용하며 연간 매출 3000만달러를 기록할 정도로 성장했다.[3]
1981년, 가와쿠보는 파리 컬렉션에 처음 참가하며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같은 해 "로브 드 샹브르 꼼 데 가르송"(robe de chambre Comme des Garçons)과 "트리코 꼼 데 가르송"(tricot COMME des GARÇONS) 라인을 런칭했다. 당시 그의 디자인은 몸의 선을 강조하는 서양 패션과는 대조적으로, 직선적이고 논섹슈얼하며 반 패션적인 특징을 보였다. 첫 파리 컬렉션은 '헝겊 조각 같다', '히로시마 시크' 등의 비판과 조롱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아방가르드함으로 파리 패션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37][8]
1982년에는 파리에 "Comme des Garçons S.A.S" 법인을 설립하고 부티크를 열었다.[6] 이 해 파리 컬렉션에서 발표한 검은색과 구멍 뚫린 니트(Hole Sweater)는 '검은 충격'이라 불리며 세계 패션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디자인은 전 세계 패션 저널리스트들 사이에서 '서양 옷에 대한 모독'이라는 비판과 '새로운 여성상', '새로운 아름다움의 제안'이라는 찬사로 극명한 여론 분열을 야기했으며, 일부 언론은 이를 '스위스 치즈 스웨터'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 스타일은 일본 내에서도 '까마귀족', '보로 룩'으로 불리며 유행했다. 1980년대 가와쿠보의 디자인은 주로 검은색, 짙은 회색, 흰색을 사용했으며, 올이 풀리거나 미완성된 가장자리, 구멍, 비대칭적인 실루엣이 특징이었다.[4][8]
같은 해 가와쿠보는 자신의 초기 디자인 방향에 대해 "3년 전,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불만을 느꼈습니다. 저는 더 방향성이 있고, 더 강력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패션에서는 1920년대나 1930년대에 해왔던 것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민속적인 것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전에 해본 적이 없는,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것들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밝히며 기존의 틀을 깨려는 의지를 보였다.[7]
가와쿠보는 의류 디자인뿐만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광고, 매장 인테리어 등 사업의 모든 측면에 깊이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모든 요소가 하나의 통일된 비전 아래 연결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도쿄 아오야마 매장의 파란색 점무늬 유리 외관은 건축가 그룹 퓨처 시스템즈(Future Systems) 및 인테리어 디자이너 타카오 가와사키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대표적인 예이다.[9]
3. 2. 파리 컬렉션 진출과 '검은 충격'
1978년 남성복 라인을 추가한 지 3년 후인 1981년, 가와쿠보는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 패션 위크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매 시즌 컬렉션을 선보이기 시작했다.[6][37] 그의 초기 파리 컬렉션은 몸의 곡선을 강조하며 여성성을 드러내는 기존 서양 디자인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주었다. 직선적이고 논섹슈얼한 실루엣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옷들은 당시 패션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디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헝겊 조각 같다'거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원자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도시 이미지에 빗대어 '히로시마 시크'라고 부르며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7][37]
이러한 반응 속에서도 가와쿠보는 자신의 디자인 방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82년 무렵 인터뷰를 통해 "3년 전부터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불만을 느꼈습니다. 더 방향성이 있고, 더 강력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패션에서는 1920년대나 1930년대의 영향, 민속적인 것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전에 해본 적이 없는,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것들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밝히며 기존의 틀을 깨려는 의지를 드러냈다.[7]
1982년 파리 컬렉션에서 가와쿠보는 패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컬렉션을 발표했다. 검은색을 주조로 하고, 마치 좀벌레가 파먹은 듯 구멍이 숭숭 뚫린 스웨터 등을 선보인 이 컬렉션은 패션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고, 이는 '검은 충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37] 이 컬렉션은 단순히 옷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기존의 미적 기준과 완벽함에 대한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아방가르드적인 시도였다.
'검은 충격'은 전 세계 패션계에서 극명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인 오트 쿠튀르의 관점에서 그의 옷을 '서양 의복에 대한 모독'이라고 혹평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여성의 삶의 방식을 대변한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제안했다'며 그의 혁신성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했다. 당시 영향력 있는 패션 저널리스트였던 수지 멘키스(Suzy Menkes)는 이 구멍 뚫린 스웨터에 '스위스 치즈 스웨터'(Swiss cheese sweaters)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37]
1980년대 가와쿠보의 디자인은 주로 검은색, 짙은 회색, 흰색을 사용했으며[4], 소재를 몸에 느슨하게 걸치거나, 올이 풀린 듯한 미완성된 가장자리, 의도적으로 만든 구멍, 비대칭적인 형태 등을 특징으로 삼았다.[8] 이러한 파격적인 스타일 때문에 일본 언론에서는 검은색 옷을 즐겨 입는 가와쿠보와 그의 추종자들을 '까마귀족'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4], 그의 스타일은 '보로(넝마) 룩'으로 불리며 하나의 패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37]
가와쿠보는 1982년 파리에 첫 부티크를 열며[6] 국제 무대에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의 혁신적인 디자인은 후대의 디자이너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알렉산더 맥퀸은 훗날 가와쿠보에 대해 "그녀처럼 매 시즌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 왜 우리가 패션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게 된다. 바로 그녀와 같은 사람들 때문이다."라고 존경심을 표했으며[11], 빅토르 & 롤프 역시 1980년대에 처음 꼼 데 가르송을 접했을 때 느꼈던 "엄청난 창의력의 분출"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11]
3. 3. 1990년대 이후 활동
가와쿠보는 옷과 액세서리 디자인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래픽 디자인, 광고, 매장 인테리어 등 사업의 모든 영역에 깊이 관여한다. 이는 모든 요소가 하나의 비전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는 가와쿠보의 신념을 반영한다.[9] 예를 들어, 도쿄 아오야마에 위치한 매장은 파란색 점으로 장식된 독특한 경사 유리 외관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건축가 그룹 퓨처 시스템즈(Future Systems) 및 인테리어 디자이너 타카오 가와사키와의 협업으로 탄생했다.[9]
1990년대 초, 가와쿠보는 자신의 영감을 주는 이미지와 사진 중심으로 구성된 격년 간행물 '식스'(Six, '육감'을 의미)를 발행했다.[10] 1992년에는 프랑스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훈했으며[31], 영국 출신의 아드리안 조페(Adrian Joffe)와 결혼했다. 같은 해, 그의 제자인 준야 와타나베가 자신의 이름을 건 라인 "꼼 데 가르송 준야 와타나베"(Comme des Garçons Junya Watanabe)를 런칭하며 가와쿠보의 지원 아래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했다.[14][15] 1993년에는 아드리안 조페와 함께 향수 라인인 꼼 데 가르송 파르팡(Comme des Garçons Parfums)을 출시했다.[11] 1996년에는 고급 예술 간행물 비전 에어(Visionaire)의 객원 편집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1997년 파리 컬렉션에서는 '보디 미츠 드레스, 드레스 미츠 보디'(Body Meets Dress, Dress Meets Body)라는 주제 아래 몸에 부자연스러운 혹이 달린 형태의 의상을 선보였다.[38] 이는 몸과 옷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며 해체주의적인 접근을 보여준 것으로, 패션계에 다시 한번 큰 반향을 일으키며 가와쿠보의 전위적인 디자이너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39] 같은 해 영국 왕립 예술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31]
가와쿠보는 언론 노출을 꺼리고 은둔적인 성향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신의 혁신적인 창작물이 스스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선호한다. 하지만 2002년 이전까지는 꼼 데 가르송의 광고 및 마케팅 캠페인에서 성소수자 관련 내용이나 문화적 주제를 다루는 것을 꾸준히 지지해왔다.[11] 2001년에는 '꼼 데 가르송 준야 와타나베 맨'(Comme des Garçons Junya Watanabe MAN) 라인이 런칭되었고, 일본 문부과학성으로부터 예술선장상을 수상했다.[31] 2002년에는 NHK에서 그의 작업 세계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세계는 그녀의 무엇을 평가했는가 ~패션 디자이너 가와쿠보 레이의 도전~"이 방영되었으며[31], '플레이 꼼 데 가르송'(PLAY Comme des Garçons) 라인이 시작되었다.[31] 이 방송에서 알렉산더 맥퀸은 "가와쿠보의 컬렉션은 때로 대중에게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지만, 매 시즌 자신에게 도전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패션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게 한다"고 평가했으며[11], 빅토르 & 롤프는 "어린 시절 꼼 데 가르송을 처음 접했을 때 받은 강렬한 인상이 패션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의 일부가 되었다"고 덧붙였다.[11]
2003년에는 아사히 신문사가 수여하는 아사히상을 받았고[31], 200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국가 공로 훈장을 받았다.[31] 같은 해, 가와쿠보는 영국 런던의 도버 스트리트에 편집매장인 도버 스트리트 마켓(Dover Street Market)을 열었다. 이 매장은 단순히 꼼 데 가르송의 제품뿐만 아니라 가와쿠보가 선별한 다양한 브랜드와 신진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함께 선보이는 공간으로, 이후 도쿄, 베이징, 싱가포르,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세계 주요 도시로 확장되었다.[22] 도버 스트리트 마켓은 특히 시각적인 상품 연출과 잠재력 있는 신예 발굴에 중점을 두는데, 러시아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를 세계적으로 처음 소개한 곳이기도 하며, 현재 그의 브랜드 마케팅, 생산,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22]
2005년에는 타오 쿠리하라(Tao Kurihara)가 디자인하는 '타오 꼼 데 가르송'(tao Comme des Garçons) 라인과[16][17], 스피도(Speedo)와의 협업 라인 '스피도 꼼 데 가르송', 그리고 '아이 꼼 데 가르송 준야 와타나베 맨'(eYe Comme des Garçons Junya Watanabe MAN)이 연이어 런칭되었다.[31] 2006년에는 주얼리 라인 '꼼 데 가르송 펄'(Comme des Garçons Pearl)을 선보였으며[31], 영국 수영복 브랜드 스피도와의 제휴를 통해 고성능 수영복 '레이저 레이서'의 올림픽 공식 디자인을 담당하기도 했다.[31] 같은 해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는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탐구하며, 맞춤 남성복 요소와 꽃무늬 드레스 같은 여성적 요소를 결합하여 성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디자인을 선보였다.[13]
이후에도 '포켓 꼼 데 가르송'(2007), '간류'(GANRYU, 2007), '블랙 꼼 데 가르송'(BLACK Comme des Garçons, 2008), '더 비틀즈 꼼 데 가르송'(The Beatles Comme des Garçons, 2009) 등 다양한 하위 라인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31] 2008년에는 글로벌 패스트 패션 브랜드 H&M과 협업하여 남성복, 여성복, 아동복, 향수로 구성된 게스트 디자이너 컬렉션을 선보여 큰 화제를 모았다.[19][20][21] 또한 프레드 페리, 리바이스, 컨버스 올스타, 나이키, 몽클레르, 라코스테, 루이 비통, 슈프림 등 수많은 브랜드와 꾸준히 협업하며 영향력을 넓혀왔다.[18]
2012년, 가와쿠보는 '패션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CFDA) 패션 어워드에서 국제상을 수상했다.[31] 같은 해 도쿄 긴자에 '도버 스트리트 마켓 긴자 꼼 데 가르송'을 개점했다.[31] 2013년에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와 협업하여 스카프 컬렉션인 '꼼 데 카레'(Comme des Carrés)를 발표했다.[31]
2017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는 현존하는 디자이너로서는 이례적으로 가와쿠보의 작업을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 'Rei Kawakubo/Comme des Garçons: Art of the In-Between'이 개최되었다.[1] 큐레이터 앤드류 볼튼은 가와쿠보가 전시 디자인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밝혔으며[24], 전시는 '부재/존재', '패션/반(反)패션' 등 9가지 이원적 개념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탐구했다.[7] 약 150벌의 의상이 전시된 이 행사는 큰 주목을 받았으며[25], 언론은 그의 작품이 지닌 독창성과 영향력을 높이 평가했다.[26] ''Business of Fashion''은 2017년 당시 꼼 데 가르송 그룹의 연간 매출이 2.8억달러 이상이라고 보도했다.[23]
가와쿠보의 디자인은 벨기에의 마틴 마르지엘라와 앤 드뮐미스터, 오스트리아의 헬무트 랭 등 후대의 많은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었다.[12] 그의 초기 지지자였던 장 폴 고티에는 가와쿠보를 "극도의 용기와 시적인 정신을 지닌 여성"으로 묘사했으며[11], 도나 캐런은 "조용하고 내성적이지만 그의 옷은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평가했다.[11] ''Women's Wear Daily''는 그를 패션 아이콘으로 칭했지만, 정작 가와쿠보 자신은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아이콘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12]
2019년에는 패션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이소무 노구치상을 수상하며 예술계에서도 그의 업적을 인정받았다.[31]
3. 4. 2000년대 이후 활동
2001년, 예술선장 문부과학대신상을 받았다.[39] 2002년 이전까지 가와쿠보는 의류 및 액세서리를 홍보하는 광고 및 마케팅 캠페인에 사용되는 사진에서 LGBT 관련 내용 및 문화적 주제의 사용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11] 같은 해 NHK는 가와쿠보 레이의 도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세계는 그녀의 무엇을 평가했는가 ~패션 디자이너 가와쿠보 레이의 도전~"을 방영했으며,[11] 하트 로고로 유명한 "플레이 꼼데가르송"(PLAY COMME des GARÇONS) 라인을 선보였다.
2003년에는 아사히상을 받았으며, NHK에서 그녀의 작품에 관한 인터뷰 프로그램이 전국적으로 방송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녀의 독창성과 패션 및 디자인에 대한 기여는 다른 주요 디자이너들에게도 인정받았다.[11] 알렉산더 맥퀸은 "가와쿠보가 컬렉션을 디자인할 때,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터무니없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처럼 매 시즌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 왜 우리가 패션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녀와 같은 사람들 때문입니다."라고 평했으며,[11] 빅토르 & 롤프는 "저희가 ''꼼 데 가르송''을 처음 알게 된 것은 80년대였습니다... 레이 가와쿠보는 이 엄청난 창의력의 분출의 일부였기 때문에,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그녀는 패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방식의 일부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11] 장 폴 고티에는 가와쿠보를 "극도의 용기를 가진 여성", "특별한 강점을 지닌 사람", "시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고,[11] 도나 캐런은 "레이 가와쿠보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여성 디자이너로서 저에게 매우 흥미로운 디자이너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녀는 매우 조용하고 내성적이지만, 그녀의 옷은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라고 언급했다.[11]
2004년에는 프랑스 국가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영국 런던 도버 스트리트에 편집매장 형태의 도버 스트리트 마켓(DOVER STREET MARKET COMME des GARÇONS, DSM)을 처음 열었다. DSM은 가와쿠보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백화점 버전으로, 시각적인 마케팅과 신진 디자이너 발굴에 중점을 둔다. 이후 도쿄, 베이징, 싱가포르,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세계 주요 도시에 지점을 확장했다.[22] DSM은 러시아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의 첫 국제 판매처였으며, 그의 마케팅, 생산, 운영을 지원하기도 했다.[22]
2000년대 들어서도 새로운 라인 출시는 계속되었다. 2005년에는 타오 쿠리하라가 디자인하는 "타오 꼼데가르송"(tao COMME des GARÇONS)과 "스피드 꼼데가르송", "아이 꼼데가르송 준야 와타나베 맨"(eYe COMME des GARÇONS JUNYA WATANABE MAN)을 선보였고, 2006년에는 주얼리 라인인 "꼼데가르송 펄"을 선보였다. 2007년에는 액세서리 중심의 "포켓 꼼데가르송"과 후미토 간류가 디자인하는 "간류"(GANRYU)를, 2008년에는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대의 "블랙 꼼데가르송"(BLACK COMME des GARÇONS)을 선보였다. 2009년에는 비틀즈의 애플 로고를 활용한 "더 비틀즈 꼼데가르송"(The Beatles COMME des GARCONS)을 선보였다.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도 활발히 진행했다. 2006년부터 영국 스피도와 제휴하여 고속 수영복 '레이저 레이서'의 올림픽 공식 디자인을 맡았으며,[39] 2008년에는 H&M의 "게스트 디자이너"로 참여하여 남성복, 여성복, 아동복, 향수로 구성된 컬렉션을 출시해 큰 화제를 모았다.[19][20][21] 이외에도 프레드 페리, 리바이스, 컨버스 올스타, 나이키, 몽클레르, 라코스테, 루이 비통, 슈프림 등 수많은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했다.[18] 2013년에는 에르메스와 협업하여 스카프 컬렉션 "꼼 데 카레"(Comme des Carrés)를 발표했다.
2006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는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탐구하며, 맞춤 남성복 요소와 코르셋, 꽃무늬 원단 등 여성스러운 요소를 융합하여 여성성과 남성성의 결합을 보여주었다.[13]
2012년에는 패션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미국 CFDA(Council of Fashion Designers of America) 패션 어워드에서 국제상을 받았으며,[39] 같은 해 도쿄 긴자에 "도버 스트리트 마켓 긴자 꼼데가르송"을 열었다.
201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브 생 로랑 이후 두 번째로 생존 디자이너인 가와쿠보 레이를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 "Rei Kawakubo/Comme des Garçons: Art of the In-Between"을 5월부터 9월까지 개최했다.[1] 전시 큐레이터 앤드류 볼튼은 가와쿠보의 막대한 영향력을 강조하며 그녀가 전시 디자인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밝혔다.[24] 전시회는 '부재/존재', '패션/반(反)패션' 등 9가지 이원적 개념을 통해 1980년대 초부터 당시까지의 꼼 데 가르송 여성복 약 150점을 선보였다.[7][25][26] 같은 해 ''Business of Fashion''은 꼼 데 가르송과 그 계열사의 연간 총매출이 2.8억달러 이상이라고 보도했다.[23]
2019년에는 패션 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이소무 노구치상을 받았다.
가와쿠보는 준야 와타나베[14][15]와 타오 쿠리하라[16][17] 같은 후배 디자이너들이 꼼 데 가르송 산하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레이블을 성공적으로 선보이고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녀 자신은 언론 노출을 꺼리며 은둔하는 편이지만,[12] 그녀의 혁신적인 디자인과 독창적인 경영 방식은 패션계를 넘어 문화계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5. 주요 수상 경력
연도 | 상 이름 | 비고 |
---|---|---|
1983년 | 마이니치 패션 대상 | [41] |
1988년 | 마이니치 패션 대상 | [41] |
1991년 | 뵈브 클리코 비즈니스 우먼 오브 더 이어 | [42] |
1993년 | 프랑스 예술 문화 훈장 슈발리에 | |
1997년 | 영국 왕립 예술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
2001년 | 예술 선장 (문부과학대신상) | |
2003년 | 아사히상 | 아사히 신문사 [43] |
2004년 | 프랑스 국가 공로 훈장 오피시에 | |
2012년 | 미국 CFDA 패션 어워드 (국제상) | [49] |
2019년 | 이삼 노구치상 | [44] |
2023년 | 문화 공로자 | [45] |
3. 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전시 (2017)
2017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Rei Kawakubo/Comme des Garcons Art of the In-Between'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이 전시회는 2017년 5월부터 9월까지 열렸으며, 미술관 큐레이터인 앤드루 볼턴에 의해 기획되었다. 전시 기간 동안 꼼 데 가르송의 작품 아카이브, 관련 리포트, 독점 인터뷰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가와쿠보 레이와 그의 브랜드를 다각적으로 조명했다.바네사 프리드먼과의 인터뷰에서 가와쿠보의 남편인 아드리안 조페는 이 전시회가 당시 74세였던 가와쿠보가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마지막 전시회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조페는 뉴욕 전시 종료 후 다른 장소로 순회 전시될 가능성은 열어두었으나, 가와쿠보가 새로운 주제나 개념으로 또 다른 전시회를 직접 기획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밝혔다.[28]
4. 디자인 철학과 영향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인 가와쿠보 레이는 전통적인 의복의 형태에 도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영예를 얻은 두 번째 생존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그의 디자인은 인체와 의복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고, 젠더와 신체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미의식을 제시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27]
4. 1. 신체와 의복의 관계 탐구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인 가와쿠보 레이는 전통적인 의복의 형태에 도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가와쿠보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영예를 얻은 두 번째 생존 디자이너이다. 특히 이 꼼 데 가르송 전시회는 그녀가 디자이너로서 영감을 받아온 주요 테마들을 조명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테마들은 그녀의 창의력에 영감을 줄 것이다.[27] 인체의 맥락에서 신체는 근본적으로 재고된다. 그녀는 유기적인 형태와 돌출부를 의복에 창조하여 새로운 미의식을 제시하며, 표준 사이즈를 벗어난 의상을 만들어낸다. 그녀가 형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전시회의 예로 "Body Meets Dress, Dress Meets Body"로 알려진 1997년 봄/여름 컬렉션이 있다. 이 전시회를 통해 가와쿠보는 옷을 통한 신체 변형을 목표로 삼아, 신체의 성감대를 강조하지 않는 비정형적인 드레스와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그녀는 젠더와 신체를 둘러싼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며,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파격적인 형태를 창조한다.[27] 이러한 테마를 보여주는 그녀의 최근 컬렉션 중 하나는 그녀가 "실루엣의 미래"라고 부른 2017년 가을/겨울 컬렉션이다. 가와쿠보는 여성 디자이너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여성성이 자신의 작품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파격적인 형태를 창조함으로써 그녀는 남성의 맥락에서도 젠더 고정관념을 완전히 무시하려고 노력한다.
4. 2. 후대 디자이너에 대한 영향
2003년 이후 NHK(일본방송협회)에서 가와쿠보 레이의 작품에 관한 인터뷰 프로그램이 전국적으로 방송되면서, 그의 독창성과 패션 및 디자인에 대한 기여는 다른 주요 디자이너들에게 자주 언급되고 인용되었다.[11] 인터뷰 방송 중 알렉산더 맥퀸은 "가와쿠보가 컬렉션을 디자인할 때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터무니없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처럼 매 시즌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 왜 우리가 패션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게 된다.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11] 같은 방송에서 빅토르 & 롤프는 "우리가 꼼 데 가르송을 처음 알게 된 것은 80년대였다. 우리는 12살이나 13살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패션이라는 것을 막 알아가기 시작했고, 레이 가와쿠보는 이 엄청난 창의력의 분출의 일부였기 때문에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는 패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방식의 일부였다"고 덧붙였다.[11]
가와쿠보의 초기 지지자 중에는 장 폴 고티에와 도나 캐런도 있었다. NHK 특집 방송에서 고티에는 "나는 가와쿠보가 극도의 용기를 가진 여성이라고 믿는다. 그는 특별한 강점을 지닌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시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어린 소녀의 정신을 느낀다. 순수함을 간직하고 약간 낭만적인 어린 소녀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싸우는 여성의 모습도 가지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 말이다"라고 말했다.[11] 일본에서 진행된 같은 인터뷰 방송에서 도나 캐런은 "레이 가와쿠보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여성 디자이너로서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디자이너다. 개인적으로 그는 매우 조용하고 내성적이지만, 그의 옷은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덧붙였다.[11]
''Women's Wear Daily''에 따르면 그는 패션 아이콘이지만, 한 인터뷰에서는 스스로를 아이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12] 그의 디자인은 벨기에 출신의 마틴 마르지엘라와 앤 드뮐미스터, 오스트리아 디자이너 헬무트 랭 등 많은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꼼 데 가르송 컬렉션은 도쿄 아오야마에 있는 꼼 데 가르송 스튜디오에서 디자인되며, 일본, 프랑스, 스페인, 터키에서 제작된다. 2006년 가을/겨울 컬렉션은 "페르소나"라는 개념,[13] 즉 우리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다루었다. 맞춤 남성복과 코르셋, 꽃무늬 드레스 원단 같은 여성스러운 요소를 융합한 "페르소나"는 꼼 데 가르송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결합한 또 다른 컬렉션이었다.
준야 와타나베[14][15]와 타오 쿠리하라[16][17]는 꼼 데 가르송 산하에서 자신만의 하위 레이블을 시작하여 호평을 받았다. 두 사람은 여성 캐주얼 니트웨어 라인 "꼼 데 가르송 트리코"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꼼 데 가르송은 수년에 걸쳐 프레드 페리, 리바이스, 컨버스 올스타, 스피도, 나이키, 몽클레르, 라코스테, 커틀러 앤 그로스, 크롬 하츠, 해머토르,[18] S. N. S. 헤르닝, 루이 비통, 슈프림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했다. 특히 H&M과는 2008년 가을 컬렉션을 협업하여 출시했다.[19][20] 가와쿠보는 H&M의 2008년 가을 "게스트 디자이너"로서 남성복, 여성복, 일부 아동복, 그리고 남녀 공용 향수를 디자인했다.[21]
가와쿠보는 꼼 데 가르송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편집매장인 도버 스트리트 마켓을 설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4년 런던 도버 스트리트에서 처음 시작된 이후, 도쿄, 베이징, 싱가포르, 뉴욕, 로스앤젤레스에도 매장을 열었다. 도버 스트리트 마켓은 시각적인 마케팅과 신진 디자이너 발굴에 중점을 두며, 러시아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의 첫 국제 판매처였고 현재 그의 마케팅, 생산,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22] 2017년 4월 ''Business of Fashion'' 기사에 따르면, 꼼 데 가르송과 그 계열사의 연간 매출은 2.8억달러 이상으로 보도되었다.[23]
''보그'' 잡지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2017년 5월 4일부터 9월 4일까지 가와쿠보를 조명하는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1] 2017년 4월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전시회 큐레이터 앤드류 볼튼은 "나는 그의 영향력이 정말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로는 미묘하다. 그를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비전의 순수함이 중요하다... 레이는 전시 디자인에 정말 많이 참여했다"고 말했다.[24] 볼튼은 전시회 제목이 "중간의 예술"이며, 약 150개의 꼼 데 가르송 앙상블을 전시하는 절제된 올 화이트 미로 형식이라고 밝혔다. 전시회와 볼튼이 함께 쓴 책은 (1) 부재/존재; (2) 디자인/비 디자인; (3) 패션/반(反)패션; (4) 모델/복수; (5) 하이/로우; (6) 과거/현재; (7) 자아/타자; (8) 객체/주체; (9) 옷/비 옷이라는 9가지 주제별 개념적 쌍에 집중하는 반복적인 패션 양극성에 기반을 두었다.[7] 2017년 5월 1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매튜 슈나이어는 전시회 개막에 대한 초기 호평에서 "전시회는 총 150벌의 의상으로 압도적이다"라고 언급했다.[25] 2017년 5월 3일 ''The New Republic''에 기고한 조세핀 리빙스턴은 "옷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의 존재는 마치 '우리가 여기 있다, 가장 타협하지 않는 천재의 가장 영향력 있는 형태'와 같은 진술처럼 느껴졌다. 이 전시회는 198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꼼 데 가르송의 가와쿠보가 디자인한 여성복 약 150점을 보여준다"고 평했다.[26]
5. 사생활
1980년대와 1990년대 사이에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 야마모토 요지와 관계를 맺었으나 이후 관계는 끝났다. 이후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çons)과 도버 스트리트 마켓의 CEO인 아드리안 조페(Adrian Joffe)와 결혼했다. 그녀는 도쿄에 거주하지만, 방돔 광장에 있는 회사 본사를 방문하기 위해 종종 파리로 여행하며, 가끔 자신의 패션쇼를 방문하기도 한다.
남편 조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가와쿠보보다 10살 연하이다. 원래 일본어와 티베트어를 전공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가, 패션 디자이너인 여동생의 도쿄 사업을 도운 것을 계기로 패션 업계에 종사하게 되었다. 1987년 파리의 꼼 데 가르송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1991년 잠시 회사를 떠나 클럽 메드로 옮겼으나, 이듬해 가와쿠보의 요청으로 꼼 데 가르송으로 돌아와 1992년 파리 시청에서 가와쿠보와 결혼했다.[24][40]
두 사람은 각자의 생활 리듬을 유지하며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조페는 주로 파리에 거주하고, 가와쿠보는 꼼 데 가르송 플래그십 스토어와 가까운 도쿄의 아오야마 지역에 살고 있다. 가와쿠보는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께 있을 때 조페는 가와쿠보를 위해 통역을 하거나 너무 사적인 질문으로부터 보호하는 등 보호자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24] 조페는 한 인터뷰에서 가와쿠보에 대해 "모두 오해하고 있지만, 그녀는 낡은 나무나 개, 고양이,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는 상냥한 여성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40]
6. 주요 라인
-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çons)
- 트리코 꼼 데 가르송(Tricot Comme des Garçons) (단종)
- 꼼 데 가르송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çons Commes des Garçons)
- 꼼 데 가르송 로브 드 샹브르(Comme des Garçons Robe De Chambre) (단종)
- 꼼 데 가르송 걸(Comme des Garçons Girl)
- 꼼 데 가르송 옴므(Comme des Garçons Homme)
- 꼼 데 가르송 옴므 플러스(Comme des Garçons Homme Plus)
- 꼼 데 가르송 옴므 플러스 에버그린(Comme des Garçons Homme Plus Evergreen) (단종)
- 꼼 데 가르송 옴므 되(Comme des Garçons Homme Deux)
- 꼼 데 가르송 셔츠(Comme des Garçons Shirt)
- 간류(Ganryu) (단종)
- 블랙 꼼 데 가르송(BLACK Commes des Garçons)
- 플레이 꼼 데 가르송(PLAY Comme des Garçons)
- 꼼 데 가르송 향수(Comme des Garçons Parfums)
- 꼼 데 가르송 지갑(Comme des Garçons Wallet)
- 꼼 데 가르송 CDG(Comme des Garçons C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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