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암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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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종 암약설은 고종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고종이 암군(暗君)이거나 유약한 군주였다는 주장을 일컫는 말이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하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왜곡된 측면이 강조되었다. 고종 암약설은 위안 스카이의 폐위 주장에서 시작되어,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 의해 강화되었다. 일제는 고종의 업적을 축소하고,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을 폄훼하며 고종 암약설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고종이 추진한 근대화 정책, 외교적 노력, 자주적인 외교 정책 등을 근거로 고종 암약설을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종 암약설은 고종이 무능했다는 이론으로, 일본 제국이 식민지 근대화론의 근거로 이용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에 대한 1차 사료나 논리적 근거는 부족하며, 교과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적은 고종 암약설과 비슷한 논조로 서술하고 있다.
고종 암약설은 고종이 무능했다는 이론으로, 일본 제국이 조선이 쇄국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외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결국 국권을 빼앗겼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는 일본 침략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의 일반론으로 널리 퍼져 식민지 근대화론의 근거로 이용되었다.[5][6]
2. 고종에 대한 평가
기쿠치 겐조(菊池謙讓)는 《근대조선사》에서 고종을 암군이 아닌 명군으로 묘사하며, 열강에 포위되어 외교에 힘쓰다 국세를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로 평가했다. 그는 고종의 평양 이궁 조영을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에 대비한 시책으로 해석하고, 고종 시기의 근대적 기구 설치와 서양 문물 수용을 고종의 업적으로 보았다.
최근에는 일본이 고종을 안중근 의거의 배후로 지목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고종 암약설을 부정하는 또 다른 근거가 되고 있다.[8]
2. 1. 당대의 평가
당대에는 고종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위안 스카이, 윤치호, 황현 등은 고종을 암군 또는 무능한 군주로 비판했다.[8] 이준용, 박영효 등은 고종을 축출하려는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다.[8] 반면, 《독립신문》 등에서는 고종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심을 보여주는 기록이 나타나기도 한다.[8] 특히 1896년 6월 20일자 《독립신문》에서는 백성들이 국왕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며, 독립문 건립이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8]
2. 2. 외국인의 평가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고종이 주변 사건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반면 데넷 타일러는 고종을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로 평가하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1] 알렌은 고종에 대하여 "한국 백성들이 불쌍하다. 내 일찍이 구만 리를 돌아다녔지만 상하 4000년에 한국 황제 같은 이는 처음 보는 인종이다."라고 평가 하였다.
해링턴은 알렌의 일기 중 부정적인 내용만을 근거로 고종을 유약하다고 평가했으나, 이는 편향된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스워터트는 알렌의 다른 기록과 데니(O. Denny)[2], 헐버트 등의 평가를 근거로 해링턴의 주장을 비판하며, 고종이 주권 수호 의지가 강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고종을 온화하고 성실하지만 유약한 군주로 평가했다.[4] 《코리언 레퍼지터리》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는 고종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고 자세한 평가를 담고 있다.[3]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위안 스카이는 고종을 ‘혼군(昏君)’이라 칭하며 폐위를 주장했다.[5]
2. 3. 현대의 평가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는 고종이 주변 사건들에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처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데넷 타일러(Dennett Tyler)는 1905년 을사조약 무효화 운동 당시 미국의 잘못보다는 고종의 잘못이 크다고 주장했다.[1]
해링턴(Harrington)은 알렌(Horace Newton Allen)의 1903년 일기를 근거로 고종을 “유약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스워터트는 데니(O. Denny)의 긍정적 평가와 헐버트(Homer Hulbert)의 반론을 들어 해링턴의 주장을 비판했다.[2]
1896년 코리언 레퍼지터리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는 고종에 대한 외국인의 평가 중 가장 자세하고 호의적인 내용이다.[3]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고종을 “온화한 성품”의 군주로 묘사했지만, “강인한 성격이 있었다면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4]
1883년 조선에 온 위안 스카이는 고종을 ‘혼군(昏君)’이라 칭하며 폐위를 주장했다.[5] 비숍의 평가는 일본에서 고종이 '''암울'''하고 '''유약'''한 군주였다는 “고종 암약설”의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3. 고종 암군설의 기원과 심화
위안 스카이, 윤치호, 황현 등은 고종에 대해 비판적인 기록을 남겼으며, 이준용이나 박영효는 고종을 축출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1차 사료나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며, 교과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적은 여전히 고종 암약설과 비슷한 논조로 서술하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발행된 한국사 전문서나 교과서도 고종의 역할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고종 시대를 서술할 때 고종에 대한 서술이 극히 미미하거나 무능한 군주로 오해하게끔 표현되었다.
3. 1. 암군설의 등장
고종 암약설은 처음에 '''고종 암군설'''이라는 이론이었다. 이는 고종이 암우(暗愚)한 군주였다는 이론이며, 뒤에 고종이 유약하다는 평가가 덧붙여져 고종 암약설로 발전한다.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위안 스카이는 고종을 암군이라 부르며 고종의 폐위를 기도하기도 했다.[5] 윤치호는 고종이 어리석은 군주라는 평을 듣고 있다고 보았다. 윤치호는 사람들이 황제를 “너무나 증오해서 그를 망신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하는 것 같다. 그가 왕좌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사람들의 혐오감이나 정의감을 만족시킬 것 같다”고 보았다.[6]
고종이 암우한 군주였다는 비평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사건을 구실로 일본 측이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킬 때 다시 나왔다.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사 경성 지국의 기자였던 나라사키(楢崎桂園)가 그해 12월 출판한 《한국정미정변사》(韓國丁未政變史)(1907.12, 京城, 日韓書房)에서 언급되는 암주(暗主)와 암우(暗愚)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3. 2. 일제 강점기의 고종 왜곡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인이 쓴 한국 근대사 서적에서는 고종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왜곡하고,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을 폄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고종 유약설을 덧붙여 고종 암약설로 왜곡을 심화시켰다.
1940년에 출간된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의 《근대일선관계의 연구》(近代日鮮關係の硏究)는 이러한 역사 왜곡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책에서는 고종이 추진한 진보적 정책을 대원군이나 민씨 척족의 공으로 돌리는 등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7]
일제는 독립문 건립과 같이 고종이 주도한 사업을 독립협회나 개화파의 공으로 왜곡하기도 했다.[7]
4. 고종 암약설 비판
고종 암약설은 일본이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론이라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이 이론은 고종을 무능한 군주로 묘사하고, 조선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식민지 근대화론의 근거로 이용되었다.[8]
당시 위안 스카이, 윤치호, 황현 등은 고종을 비판했지만, 이들의 주장 역시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기쿠치 겐조는 《근대조선사》에서 고종을 암군이 아닌 명군으로 묘사하며, 열강에 포위된 상황에서 외교에 힘쓰다 국세를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로 평가했다. 또한 고종이 안중근 의거의 배후로 지목된 사실은, 고종이 항일 투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음을 보여준다.[8]
고종의 업적과 관련된 대표적인 왜곡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왜곡된 내용 | 실제 내용 |
---|---|---|---|
1868년~1875년 | 국서 거부, 운요호 사건 | 고종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 고종이 개항을 주도했으며, 오히려 일본이 방해했다. |
1886년 | 사노비 세습제 혁파 | (언급 없음) | 고종이 혁파를 천명했다. |
1896년 | 아관파천 | 외세 의존의 망국적 처사 |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과 경복궁, 경운궁을 오가며 국정을 운영했고, 이 기간에 도시 개조가 이루어졌다. |
1896년 | 독립문 건립, 한양 도시 개조 | 개화파 또는 이채연, 맥레비 브라운의 업적 | 고종이 주도했으며, 《독립신문》은 이를 "조선이 문명 진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
1897년 | 대한제국 출범 | 보수회귀 |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으로 평가된다. |
1898년 | 전차(노면전차) 운행 | 고종이 죽은 왕후(명성황후)만을 생각하여 도입 | 고종의 신문물에 대한 넓은 이해와 포용을 보여주는 사례 |
1902년 | 정보기관 제국익문사 설치 | 밀정정치·잡배정치의 폐단 | 근대적 정보기관 설치 |
1903년 | 육군과 해군 창설 준비, 징병제도 실시 예정 조칙 | 민생을 외면하고 황실의 안위만을 챙긴 군주 |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노력, 러일전쟁 와중에 일본이 한성을 침탈하면서 필요성이 입증됨 |
1905년 | 《형법대전》 편찬 | (언급 없음) | 한국 최초의 근대적 형법전, 동아시아 최초로 고문 금지 등 민권 신장 |
4. 1. 암약설에 대한 반대 논거
고종이 추진한 다양한 근대화 정책과 외교적 노력은 암약설과 배치된다는 주장이 있다.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 사건과 운요호 사건에서 고종은 적극적으로 개항을 주도했으며, 강화도 조약을 비롯한 외국과의 조약 체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8] 1886년에는 사노비 세습제 혁파를 천명했다.
아관파천은 외세 의존이 아닌, 자주적인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복궁과 경운궁을 오가며 지냈고, 이 기간에 도시개조가 이루어졌다. 1896년 독립문 건립과 한양 도시 개조 사업은 고종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독립신문》 1896년 11월 7일 논설에서 "조선이 이제 문명 진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높이 평가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 출범은 보수회귀가 아닌,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으로 평가된다. 고종은 1898년 동아시아 최초로 전차(노면전차)를 도입하는 등 신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1902년에는 정보 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여 정보 수집에 힘썼다.
1903년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육군과 해군 창설을 준비했으며, 이는 러일전쟁 와중에 일본제국군이 중립국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을 침탈한 사실에서 그 필요성이 드러났다. 같은 해 3월 15일에는 징병 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다.
1905년에는 근대적 형법전인 《형법대전》을 편찬하여 반포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일반형법전이며 근대적 형식을 갖춘 형법전으로, 일본의 형법전을 계수하지 않고 이전의 대전회통·대명률과 갑오개혁 이후의 형사법령을 참고하여 제정되었다.
일본에 의해 고종이 안중근 의거의 배후로 지목된 사실은 고종이 적극적으로 항일 투쟁에 관여했음을 시사한다.[8]
4. 2. 일제의 역사 왜곡 사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인이 쓴 한국 근대사 서적들은 고종의 업적을 축소하거나 왜곡했다. 이들은 고종을 무능하고 유약한 군주로 묘사하고,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을 폄훼했다.[7]5. 결론
고종 암약설은 일본 침략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론임에도 한국사의 일반론으로 널리 퍼졌으며, 식민지 근대화론의 근거로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에 대한 1차 사료나 논리적 근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위안 스카이, 윤치호, 황현 등의 비판도 논리적 근거를 밝히고 있지 않다.[8]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 사건, 강화도 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 등 외국과의 조약에서 고종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일본인이 서술한 조선 근대사 전문서에서는 전혀 부각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당대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 고종에 대해 악평을 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은 고종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한 조선 근대사 서적의 논조와 배치된다.
1895년 을미사변에 직접 가담했던 기쿠치 겐조(菊池謙讓)는 《근대조선사》에서 고종이 암군이 아닌 명군이었으며, 열강에 포위되어 외교에 힘쓰다가 국세를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라고 묘사했다. 그는 고종이 평양 이궁 조영을 통해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가 나빠짐에 대비한 정책을 추진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1903년 8월 15일 고종이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 동맹을 요청한 사실을 들어, 고종이 일본의 황성 침탈을 예측했음을 밝혔다.
최근에는 일본이 고종을 안중근 의거의 배후로 지목한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고종 암약설을 부정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가 되고 있다.[8]
참조
[1]
웹인용
한 外人의 탄식 "불쌍한 한국인…저런 왕은 처음 본다"
https://m.pressian.c[...]
2010-05-07
[2]
서적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08-30
[3]
서적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08-30
[4]
서적
한국과 그 이웃나라
살림
[5]
뉴스
위안스카이 ‘골수까지 병든 조선’ 의 최고 권력자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3-25
[6]
서적
윤치호의 협력일기
이숲
2010
[7]
간행물
독립신문
[8]
뉴스
日, 안중근 의거 배후로 고종 지목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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