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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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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동도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과거 고구려 시대부터 교동현, 교동부로 불리며 역사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간척 사업이 시작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왕족의 유배지로 이용되었으며, 갑오개혁 이후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되어 강화도와 연결되었으며, 현재는 관광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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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ko
로마자 표기Gyodongdo
한글교동도
한자喬桐島
히라가나きょうとうとう
가타카나キョドンド
면적46.89㎢
최고점화개산(華蓋山)
높이260m
민족한민족
인구3,188명
위치
위치황해
국가대한민국
광역시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2. 역사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시대에 고목근현(高木根縣) 또는 달을참(達乙斬)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4] 고구려어 '달을참'은 '높은 나무 뿌리'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고목근(高木根) 또는 고림(高林)으로 표기되었다.[5][6]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喬桐縣)으로 개칭되었는데, '교(喬)' 역시 큰 나무를 뜻한다.[7]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당시 인구가 562명이며, 바다에 있어 기후가 고르지 못하고 척박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산물로는 민어, 숭어 등의 어류와 대합조개를 기록하고 있다.[6] 교동도는 개성, 한양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 시대에는 감무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통어영을 두어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의 수군을 관할하게 하였다.[8] 서울 인근에 있으면서 바다로 둘러싸여 다른 곳과 떨어져 있는 위치 때문에 종종 왕족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연산군, 광해군이 여기서 유배되었고, 연산군은 여기서 죽었다.[9] 그 외에도 임해군, 능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영선군(고종의 조카 이준용), 화완옹주 등이 여기에 유배되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교동도는 교동부(喬桐府)로 있었다.[14] 부(府)는 도(道) 아래에 설치된 행정기관으로 현(縣)에 비해 수령의 관직, 배속된 인원에서 우대를 받는 지역이었다.[10] 교동부는 통어영이 있어 삼도수군통어사가 부사를 겸임하였다.[11] 조선시대 현의 수령인 현감은 일반적으로 종6품이었지만,[12] 삼도수군통어사는 경기도 관찰사와 같은 종2품 이었다.[11] 정조 1년(1777년) 큰 도둑이 태어난 고을이라는 이유로 현으로 강등한 적이 있지만[13] 전략적 요충지인 점을 감안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부로 승격하였다.

고종 32년(1895년)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이십삼부로 개편하면서 강화와 합군하여 인천부 관할로 두었으나, 이듬해 7월 다시 분할되어 경기도에 속하게 하면서 군수를 두었다.[14]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송가면을 송남면으로 개칭하고 4개 면 13개 리로 구획되었다가, 1914년 강화군과 합군되었고, 교동은 화개면과 수정면의 2개 면이 되었다. 1934년 이후 두 면을 다시 합면하여 지금의 교동면이 되었다.[14]

한국전쟁 당시 3만여 명의 삼팔선 이북 주민들이 배를 타고 피난하였고, 현재도 1백여 명이 대룡시장 인근에 살고 있다.[15] 전쟁 이후 휴전선과 닿아있는 접경지로서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이 되었고 해병대 제2사단이 경계를 관할하고 있다.[16]

1995년 교동도가 속한 강화군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면서 교동도 역시 인천광역시 소속이 되었다. 편입 당시에도 인천과 경기 간의 논란이 있었으며, 1999년에는 경기도가 반환을 요구한 일도 있다. 이후로도 간간히 일부에서 인근의 김포시와 함께 행정구역 개편에 대한 요구가 나오고 있다.[17] 2014년 7월 1일에 교동대교가 개통되어 강화 버스 18번과 자동차로 교동도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18]

2. 1. 고대 ~ 조선 초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시대에 고목근현(高木根縣) 또는 달을참(達乙斬)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4] 고구려어 '달을참'은 '높은 나무 뿌리'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고목근(高木根) 또는 고림(高林)으로 표기되었다.[5][6]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喬桐縣)으로 개칭되었는데, '교(喬)' 역시 큰 나무를 뜻한다.[7]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당시 인구가 562명이며, 바다에 있어 기후가 고르지 못하고 척박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산물로는 민어, 숭어 등의 어류와 대합조개를 기록하고 있다.[6] 교동도는 개성, 한양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 시대에는 감무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통어영을 두어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의 수군을 관할하게 하였다.[8] 서울 인근에 있으면서 바다로 둘러싸여 다른 곳과 떨어져 있는 위치 때문에 종종 왕족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연산군, 광해군이 여기서 유배되었고, 연산군은 여기서 죽었다.[9] 그 외에도 임해군, 능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영선군(고종의 조카 이준용), 화완옹주 등이 여기에 유배되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교동도는 교동부(喬桐府)로 있었다.[14] 부(府)는 도(道) 아래에 설치된 행정기관으로 현(縣)에 비해 수령의 관직, 배속된 인원에서 우대를 받는 지역이었다.[10] 교동부는 통어영이 있어 삼도수군통어사가 부사를 겸임하였다.[11] 조선시대 현의 수령인 현감은 일반적으로 종6품이었지만,[12] 삼도수군통어사는 경기도 관찰사와 같은 종2품 이었다.[11] 정조 1년(1777년) 큰 도둑이 태어난 고을이라는 이유로 현으로 강등한 적이 있지만[13] 전략적 요충지인 점을 감안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부로 승격하였다.

2. 2. 조선 시대

교동도는 개성, 한양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 시대에는 감무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통어영이 설치되어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의 수군을 관할하였다.[8]

서울과 가깝고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왕족의 유배지로 자주 사용되었다. 연산군, 광해군, 임해군, 능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영선군(고종의 조카 이준용), 화완옹주 등이 이곳에 유배되었으며, 연산군은 교동도에서 생을 마감했다.[9]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교동부는 도(道) 아래 행정기관인 부(府)로 유지되었다.[14] 교동부는 삼도수군통어사가 부사를 겸임했으며, 이는 현감(종6품)보다 높은 종2품이었다.[11][12] 정조 1년(1777년) 큰 도둑이 태어난 고을이라는 이유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나,[13]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을 고려하여 곧 부로 복귀되었다.

2. 3. 일제강점기 ~ 현재

고종 32년(1895년)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이십삼부로 개편하면서 강화와 합군하여 인천부 관할로 두었으나, 이듬해 7월 다시 분할되어 경기도에 속하게 하면서 군수를 두었다.[14]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송가면을 송남면으로 개칭하고 4개 면 13개 리로 구획되었다가, 1914년 강화군과 합군되었고, 교동은 화개면과 수정면의 2개 면이 되었다. 1934년 이후 두 면을 다시 합면하여 지금의 교동면이 되었다.[14]

한국전쟁 당시 3만여 명의 삼팔선 이북 주민들이 배를 타고 피난하였고, 현재도 1백여 명이 대룡시장 인근에 살고 있다.[15] 전쟁 이후 휴전선과 닿아있는 접경지로서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이 되었고 해병대 제2사단이 경계를 관할하고 있다.[16]

1995년 교동도가 속한 강화군이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면서 교동도 역시 인천광역시 소속이 되었다. 편입 당시에도 인천과 경기 간의 논란이 있었으며, 1999년에는 경기도가 반환을 요구한 일도 있다. 이후로도 간간히 일부에서 인근의 김포시와 함께 행정구역 개편에 대한 요구가 나오고 있다.[17] 2014년 7월 1일에 교동대교가 개통되어 강화 버스 18번과 자동차로 교동도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18]

3. 간척

교동도는 본래 세 개의 주요 섬과 여러 부속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였다.[19] 고려 시대 원나라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가 임시 수도가 되면서 강화도와 주변 섬들의 간척이 시작되었다.[19]

고려 시대부터 시작된 교동도의 간척은 조선 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현재와 비슷한 해안선 형태가 갖춰졌다.[19] 1917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이 측량한 교동도의 면적은 44.326 Km²였으며, 1975년까지 공식적인 면적으로 사용되었다.[19] 그러나 이 면적에는 간석지인 갯벌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후 일제강점기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대규모 간척이 이루어져 갯벌 대부분이 농지로 전환되었다.[19] 일제는 간석지를 논으로 만들 경우 비용의 절반을 지원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장기 저금리 대출을 지원하였다.[19] 당시 조성된 대규모 농장인 산기농장은 이러한 산미증식계획의 대표적 결과물이었다.[19]

일제강점기까지 조성된 간척지는 천수답으로 가뭄 피해를 입기 쉬웠으나, 1970년대에 관정과 저수지 설치로 관개농업이 가능해졌다.[19] 근대 이전에는 제방 유실 등으로 간척지가 다시 갯벌이 되기도 했다.[19][20] 교동도에는 이와 관련하여 사나운 인심 때문에 간척지가 갯벌이 되는 벌을 받았다는 정주마을 이야기가 전해진다.[20]

4. 위치

교동도는 한강임진강이 합류하여 이루는 조강과 예성강의 하구가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3] 북쪽으로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황해남도를 마주하고 있고, 동쪽에 강화도, 남쪽에 석모도를 바라보고 있다.

5. 문화·관광

교동읍성 남문에 새겨진 글자 "삼도통 문". 삼도통은 삼도통어영을 뜻한다.


교동읍성 남문은 1629년(인조 7년) 경기수영 설치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둘레는 870m였다. 과거에는 동, 남, 북쪽에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문(홍예문)만 남아있다. 2018년에는 홍예문 문을 복원하였다. 교동읍성 북쪽에는 옛 사당인 부근당이 남아있는데, 이곳에는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의 화상으로 추정되는 탱화가 걸려 있다. 주민들은 연산군이 죽음을 맞은 11월 격년으로 이곳에서 제를 올리고 당굿을 벌여 왔다고 한다.

교동향교는 고려 충렬왕 때 안향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공자 초상을 처음 모셨다는 향교이다.[21] 고려 때 목은 이색이 공부했다는 작은 암자인 화개사도 있다.

화개산 자락에는 봉분 형태의 조선시대 한증막 터가 있는데, 조선 후기에 만들어져 1970년대까지 이용되었다. 2008년 마을 정비 사업으로 복원되었으며, 교동도에 남아 있는 세 곳의 한증막 중 하나이다. 연산군이 마지막을 보낸 위리안치 유배지도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위리안치 상황과 소달구지를 타고 유배 온 연산군 모습 등이 재현되어 있으며, 전시관에서는 유배형의 종류와 교동도 유배 역사를 알아볼 수 있다.

옛교동교회는 1933년에 지어진 한옥 건물로, 강화군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교회이다.

대룡시장


대룡시장은 6.25 전쟁 때 황해도에서 온 실향민들이 만든 재래시장으로, 황해도 연백군에 있던 연백시장을 본땄다.

망향대


망향대는 교동도 북서쪽 해안 율두산(밤머리산)에 있으며, 실향민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제를 올리는 곳이다. 교동 제비집은 교동도 여행 정보와 체험을 제공하는 관광안내소이며, 교동 스튜디오는 1960~70년대 교복과 교련복을 입고 흑백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이다. 강화나들길 교동코스는 강화나들길 9번(교동나들새길. 월선포 ~ 화개산)과 10번(교동머르매길. 대룡시장 ~ 머르매)이다.

5. 1. 문화재

화개산 자락에는 봉분 형태의 조선시대 한증막 터가 있는데, 조선 후기에 만들어져 1970년대까지 이용되었다. 2008년 마을 정비 사업으로 복원되었으며, 교동도에 남아 있는 세 곳의 한증막 중 하나이다. 연산군이 마지막을 보낸 위리안치 유배지도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위리안치 상황과 소달구지를 타고 유배 온 연산군 모습 등이 재현되어 있으며, 전시관에서는 유배형의 종류와 교동도 유배 역사를 알아볼 수 있다.

교동읍성 남문은 1629년(인조 7년) 경기수영 설치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둘레는 870m였다. 과거에는 동, 남, 북쪽에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문(홍예문)만 남아있다. 2018년에는 홍예문 문을 복원하였다. 교동읍성 북쪽에는 옛 사당인 부근당이 남아있는데, 이곳에는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의 화상으로 추정되는 탱화가 걸려 있다. 주민들은 연산군이 죽음을 맞은 11월 격년으로 이곳에서 제를 올리고 당굿을 벌여 왔다고 한다.

교동향교는 고려 충렬왕 때 안향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공자 초상을 처음 모셨다는 향교이다.[21] 고려 때 목은 이색이 공부했다는 작은 암자인 화개사도 있다.

5. 2. 기타 명소

옛교동교회는 1933년에 지어진 한옥 건물로, 강화군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교회이다. 대룡시장은 6.25 전쟁 때 황해도에서 온 실향민들이 만든 재래시장으로, 황해도 연백군에 있던 연백시장을 본땄다. 망향대는 교동도 북서쪽 해안 율두산(밤머리산)에 있으며, 실향민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제를 올리는 곳이다. 교동 제비집은 교동도 여행 정보와 체험을 제공하는 관광안내소이며, 교동 스튜디오는 1960~70년대 교복과 교련복을 입고 흑백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이다. 강화나들길 교동코스는 강화나들길 9번(교동나들새길. 월선포 ~ 화개산)과 10번(교동머르매길. 대룡시장 ~ 머르매)이다.

6. 교통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되어 강화도와 연결된다. 이전에는 강화 창후리 선착장에서 교동도행 배를 탈 수 있었으나, 교동대교 개통 이후 여객선 운항은 중단되었다. 강화 버스 18번이 교동도를 운행한다.

7. 교육기관

7. 1. 초등학교

교동초등학교(http://kd.icees.kr/main.do)는 교동면에 위치한 초등학교이다. 지석초등학교는 2006년 2월 12일에 폐교되었다. 난정초등학교는 난정리에 위치해 있다.

7. 2. 중학교

교동중학교는 교동면에 있는 중학교이다.

7. 3. 고등학교

교동고등학교는 교동도에 있는 고등학교이다.

8. 무형문화재

강화 교동 진오기굿은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7호이다.

9. 방송

교동도는 여러 방송 프로그램의 촬영지로 활용되었다. 2003년 MBC 코미디 하우스를 시작으로, 2010년 KBS2 1박 2일, 2015년 영화 비밀, 2016년 KBS1 한국인의 밥상, 2017년 SBS 생활경제, 2018년 SBS 드라마 스위치-세상을 바꿔라, 2018년 KBS2 다큐멘터리 3일, 2018년 tvN 알쓸신잡3, 2018년 MBC 생방송 오늘 아침, 2019년 KBS KBS스페셜, KBS2 2TV 생생정보, EBS 한국기행,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교동도에서 촬영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인심 고약한 정주마을이 갯벌로 변한 인천광역시 교동도의 청주펄 https://ncms.ncultur[...]
[2] 문서 江華バス18号の終点である月仙浦はかつて[[喬桐大橋]]が開通するまで対岸の江華島との渡船の船着き場であった。この付近のみフェンスが途切れている。
[3] 뉴스 시간이 멈춘 섬, 인천 강화 교동도 https://www.kgnews.c[...] 경기신문 2022-05-17
[4] 문서 s:삼국사기/지리/고구려
[5] 웹사이트 고구려어 https://db.history.g[...] 한국 고대 제어 계통론, 총설 한국민족
[6] 웹사이트 교동현 https://sillok.histo[...] 세종실록 지리지
[7] 웹인용 소박하고 아늑한 섬 교동도 https://korean.visit[...] 2019-06-02
[8] 웹사이트 통어영 http://dh.aks.ac.kr/[...]
[9] 뉴스 이야기가 있는 섬 - 역대 왕들의 유배지 ‘인천 교동도와 대청도’ https://www.tournews[...] 투어코리아 2020-02-17
[10] 웹사이트 부 http://encykorea.aks[...]
[11] 웹사이트 수군통어사 http://dh.aks.ac.kr/[...]
[12] 웹사이트 현감 http://encykorea.aks[...]
[13] 웹사이트 극적이 태생한 고을을 강등하다 https://sillok.histo[...] 정조실록 4권, 정조 1년 8월 28일 신유
[14] 웹사이트 교동부 http://dh.aks.ac.kr/[...]
[15] 웹사이트 강화 교동도를 ‘평화와 통일의 섬’으로 개발 https://www.mois.go.[...] 행정안전부 2017-03-28
[16] 웹사이트 해병 청룡부대 교동중대 https://www.haebyeon[...] 해병닷컴 2010-05-17
[17] 뉴스 인천 강화주민들 “경기도로 돌아가고파”…김포와 통합 추진 https://cm.asiae.co.[...] 아시아경제 2015-03-20
[18] 뉴스 교동대교 개통 1년… ‘北접경 관광지’로 뜬다 https://www.donga.co[...] 동아일보 2015-07-02
[19] 논문 강화 교동도의 해안저습지 개간과 수리사업 https://scienceon.ki[...] 2003
[20] 웹사이트 인심 고약한 정주마을이 갯벌로 변한 인천광역시 교동도의 청주펄 https://ncms.ncultur[...]
[21] 웹인용 문묘(文廟)의 효시가 된다는 교동 향교 http://silvernetnews[...] 실버넷뉴스 20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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