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드리아노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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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드리아노 4세는 1154년부터 1159년까지 재위한 유일한 영국 출신 교황이다. 그는 원래 평민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수도사로 활동하다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눈에 띄어 추기경이 되었고,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어 교회 조직을 정비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는 로마 코뮌을 진압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 교황권의 우위를 놓고 대립했으며, 동로마 제국 및 시칠리아 왕국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아일랜드 정복을 옹호하는 교황 칙서 《라우다빌리테르》를 발표하기도 했다. 하드리아노 4세는 1159년 후두염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교황권 강화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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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하드리아노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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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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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 |
출생 | 기원전 1100년경, 하트퍼드셔, 애버츠 랭리, 잉글랜드 왕국 |
사망 | 1159년 9월 1일, 아나니, 교황령, 신성 로마 제국 |
재임 시작 | 1154년 12월 4일 |
재임 종료 | 1159년 9월 1일 |
이전 교황 | 아나스타시오 4세 |
다음 교황 | 알렉산데르 3세 |
서임 | 1146년 |
추기경 서임 | 에우제니오 3세 |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의 역할 | |
직책 | 로마 주교 |
생애 및 경력 | |
관련 장소 | 아비뇽의 생 루프 수도원 |
기타 | |
관련 항목 |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가톨릭 교회 |
2. 생애 초기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는 평민 출신으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교황 선출 당시 55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 로버트는 훗날 세인트올번스 대성당의 수사가 되었다.[37] 그는 애벗 랭글리 교구의 베드몬드 촌락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2]
프랑스 파리로 간 니콜라스는 아를 인근 성 루포 수도원의 의전율수도회원이 되었다. 남들보다 부지런하여 아빠스로 선출되었는데, 전통적으로 1137년으로 알려져 있지만,[37] 수도원 기록에는 1145년경이었을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38] 아빠스가 된 그는 강력한 개혁 의지를 보였으나, 수도 공동체의 불만이 로마에 전해졌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눈에 띄게 되었고, 에우제니오 3세는 1149년 12월 그를 알바노 교구장 추기경에 서임하였다.[39]
1152년부터 1154년까지 교황 특사로 스칸디나비아에 파견된 니콜라스는 노르웨이 트론헤임에 독립 주교좌를 설정하고, 하마르에 교구를 새로 설정했다. 1153년 오슬로 대성당 학교를 세웠으며,[41] 1164년 감라웁살라에 관구를 세우는 데도 기여하였다.[14]
2. 1. 출생과 가문
니콜라스의 집안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별로 없으나 평민 출신인 듯하다. 그의 아버지 로버트는 훗날 세인트올번스 대성당의 수사가 되었다.[11] 니콜라스는 애벗 랭글리 교구의 베드몬드 촌락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교황 선출 당시 그는 아마도 55세 정도였을 것이다.[2]니콜라스 자신은 수도원 입원을 허락받지 못했는데, 원장에 의해 "학교에서의 학습 상황으로 보아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입원을 유보"(수도원 전)되었기 때문이다.

2. 2. 프랑스 유학과 수도 생활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는 평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로버트는 훗날 세인트올번스 대성당의 수사가 되었다.[11] 니콜라스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고, 이후 아를 인근 성 루포 수도원의 의전율수도회원이 되었다. 그는 남들보다 부지런하여 만장일치로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는 전통적으로 1137년으로 알려져 있지만,[6] 수도원 기록에는 1145년경이었을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12]
아빠스가 된 그는 강력한 개혁 의지를 보였고, 이에 대한 수도 공동체의 불만이 로마에 전해졌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눈에 띄게 되었으며, 에우제니오 3세는 니콜라스를 높이 평가하여 1149년 12월 그를 알바노 교구장 추기경에 서임하였다.[13]
브레이크스피어는 남프랑스 아를에서 교회법을 공부했으며, 로마법의 대가들 밑에서 공부했을 가능성도 있다. 유학 후 아를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아비뇽의 생 루프 수도원에서 정규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곧 수도원장이 되었고, 1140년 바르셀로나에서 헌장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불만이 있었고, 수도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그는 로마로 소환되었다.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사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브레이크스피어는 생 루프에 있는 동안 로마를 세 번 방문했는데, 매번 더 큰 성공을 거두며 여러 달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이어스는 브레이크스피어가 생 루프에 있는 동안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관심을 끌었으며, 교황은 그에게서 유용한 리더십 자질을 보았다고 말한다. 1148년경 브레이크스피어는 존 오브 솔즈베리와 랭스에서 만났고, 그 직후 에우제니오 3세는 그를 알바노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했다. 이로써 아드리아노 4세는 이 직위에 오른 두 번째 영국인이 되었다. 그는 이 자격으로 1148년 11월 랭스 공의회에 참석했다.[39]
2. 3. 스칸디나비아 교황 특사
1152년부터 1154년까지 니콜라스는 교황 특사로 스칸디나비아에 파견되었다. 그는 노르웨이 트론헤임에 새로 설정된 독립 주교좌를 맡고, 그곳에 성 올라프의 이름을 딴 대성당을 지었다.[40] 또한 하마르에 교구를 새로 설정했으며, 1153년 오슬로 대성당 학교를 세운 것도 니콜라스로 알려져 있다.[41] 1164년 니콜라스는 감라웁살라에 관구를 세우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나중에 관구는 웁살라로 이전되었다).[14] 이러한 결정으로 덴마크 룬드 대주교의 관할 구역이 줄어들자,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에게 덴마크와 스웨덴의 교황 사절 및 수석 주교직을 영구히 부여하였다.[39] 이처럼 그의 사절 임무는 성공적이어서 교황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하고, 중요한 교구들이 증설되었으며, 교회가 점차 질서 있게 운영되어 갔다.
그가 도착했을 당시 노르웨이는 내전 상태였고, 잉에 1세의 권위는 강하지도 존경받지도 못했다. 브레이크스피어는 잠시나마 분쟁 중인 세력을 화해시키고 군주제를 회복시켰다.[40] 공식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행동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모두 관할하는 기존의 룬 대주교구를 두 개의 별개 국가 수도 대주교구로 나누고, 베드로의 헌금 지불을 정리하며, 교회를 이탈리아 및 유럽식으로 재조직하는 것이었다.[40]
브레이크스피어는 니달로스에서 회의를 주재했는데, 이 회의는 "교회의 경제적 지위와 성직자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했다".[40] 성 올라프 숭배의 중심지인[40] 니달로스는 그때까지는 주교구였다.[41] 아드리안의 회의는 교회법을 반포하기 위한 것이었다.[41] 이를 위해 브레이크스피어는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페로 제도,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교구를 만들었다. 또한 유럽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중세 대성당 건물의 확장을 승인했다.[41] 노르웨이에 있는 동안 1152년 니달로스에 세 곳의 성당 부속 학교를 세웠고, 이듬해 베르겐과 하마르에 두 곳을 더 세웠다.[41]
브레이크스피어는 회의가 끝나는 대로 스웨덴으로 항해한 것으로 보인다.[40] 그는 린셰핑에서 다시 회의를 열고, 룬 대주교의 지휘 아래 스웨덴 교회를 재조직했다(이전에는 독일 총대주교의 지배를 받았다).[41] 또한 스웨덴 군주제로부터 베드로의 헌금을 도입하고, 교회에 대한 평신도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41] 그는 노르웨이 트론헤임에서 했던 것과 유사하게,[40] 스웨덴을 위한 대주교 관구를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세 교구 중 하나인 고틀란드의 반대로 실패했다.[40]
아드리안의 북쪽 사절단은 "외교적 승리"였으며,[40] 그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나중에 스칸디나비아의 사도"로 여겨졌다.[41] 그는 스칸디나비아 교회가 교황 수위를 인정하는 재정적 헌금인 '데나리움 산티 페트리'(denarium sancti Petri)라는 새로운 스칸디나비아 십일조를 성공적으로 도입했다.[41] 1154년 가을 스칸디나비아를 떠났으며, 후기 사가는 브레이크스피어를 "선한 추기경...지금은 성인으로 여겨진다"고 언급한다.[41]
3. 교황 선출
교황 아나스타시오 4세에게 크게 환영받은 니콜라스는 아나스타시오 4세가 선종한 후, 1154년 12월 3일 만장일치로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39] 교황 서기관 브래드퍼드 리 에덴은 브레이크스피어가 1154년 12월 4일 토요일에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그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5] 보소는 그의 선출에 대해 "신의 섭리 없이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며, 만장일치로" 하드리아노를 선택했다고 말했다.[39]
하드리아노 4세는 즉위 후 곧바로 로마의 반교황파 지도자인 브레시아의 아르놀도를 축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155년 로마 시내에서 난동이 일어나 추기경이 백주대낮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드리아노 4세는 성지 주일 바로 전날에 로마 전역에 성무 정지를 부과하는 전례 없이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39] 이로 인해 순례자 수가 크게 감소하여 로마 경제에 악영향이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원로원은 즉각 아르놀도를 추방했다.
하드리아노 4세는 성 알반을 존경하고 그 이름을 딴 수도원에 특권을 부여한 하드리아노 1세를 기리기 위해 하드리아노 4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39] 그는 추기경들 사이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지만, 로마 시민의 역할은 무시되었다. 따라서 교황과 로마 시 사이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39]
4. 교황 재위 기간의 주요 사건
1155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고 아풀리아 지역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시칠리아 국왕에 적대적인 시칠리아 내부 반란군과 접촉한 동로마군은 해안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내륙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교황령은 시칠리아의 노르만족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기에, 하드리아노 4세는 남쪽 국경에 동로마 제국을 두는 것이 더 낫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마누엘 황제와 협상하여 동맹을 맺었다.[40]
그러나 이 동맹은 이해타산 때문에 맺어진 것이었고, 동로마군 지휘관의 오만함,[40] 용병들의 몸값 인상 요구, 지방 귀족들의 이탈로 연합군은 수적으로 열세가 되었다.[40] 결국 브린디시 전투에서 패배하여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지배는 끝났으며, 1158년 동로마군은 이탈리아에서 물러났다.[40]
동로마 제국과의 영속적인 동맹은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일치 문제에 대한 하드리아노 4세와 마누엘 황제의 이견으로 좌절되었다. 하드리아노 4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마누엘은 로마 황제인 자신의 세속적 권위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두 교회는 분열된 상태로 남게 되었다.[40]
1155년, 하드리아노 4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에게 《마땅히》(Laudabiliter)라는 교황 칙서를 보내, 헨리 2세에게 아일랜드를 정복해 가톨릭 제도에 따라 교회를 통치하고 개혁하여 아일랜드 섬 전체를 복음화할 것을 촉구했다.[40] 역사학자 에드먼드 커티스는 이 칙서의 진정성에 대해 "역사상 매우 큰 수수께끼"라고 말했다. 윈체스터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아일랜드 침공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헨리 2세의 어머니 마틸다가 반대하여 원정이 연기되었다.[40]
하드리아노 4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지속적으로 교회를 국가의 통치 아래 두려 하였고, 하드리아노 4세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며 대립하였다. 1157년 10월 브장송 회의에서 교황 특사가 프리드리히 1세에게 전달한 교황 서한의 'beneficia'라는 단어는 대관식을 의미했지만, 독일인 법관이 봉건적 종속 관계로 오역하여 프리드리히 1세가 교황의 봉신이라는 오해를 낳았다. 이로 인해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하드리아노 4세는 프리드리히 1세를 파문하려 했으나 1159년 9월 아나니에서 선종하였다.[39]
4. 1. 로마 반교황파 진압
교황 아나스타시오 4세에게 크게 환영받은 니콜라스는 아나스타시오 4세가 선종한 후, 1154년 12월 3일 만장일치로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39] 교황이 된 그는 곧바로 로마의 반교황파 지도자인 브레시아의 아르놀도를 축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155년 로마 시내에서 난동이 일어나 추기경이 백주대낮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드리아노 4세는 성지 주일 바로 전날에 로마 전역에 성무 정지를 부과하는 전례 없이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39] 이로 인해 순례자 수가 크게 감소하여 로마 경제에 악영향이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즉각 아르놀도를 추방했다.[39]하드리아노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협조를 얻어 아르놀도를 처형하고 로마에 내린 성무 정지 조치를 철회하였다.[39] 그는 교회 지도부가 이단으로 규정한 아르놀드를 보호하는 것에 대해 도시에 파문을 가하겠다고 위협했고, 자신의 추기경 중 한 명이 구타당한 후 이 위협을 실행했다.
아르놀드는 1155년 여름 황실 군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단이 아닌 반역죄로 교황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후 목매달아 처형되었고 시신은 불태워졌다.
4. 2.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하드리아노 4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1세는 교회를 국가 통치 아래 두려 했고, 하드리아노 4세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며 대립하였다.[39] 1157년 10월 브장송 회의에서 교황 특사가 프리드리히 1세에게 전달한 교황 서한의 'beneficia'라는 단어는 황제에게 수여된 특혜, 즉 대관식을 의미했지만, 독일인 법관이 이를 봉건적 종속 관계로 오역하여 프리드리히 1세가 교황의 봉신이라는 오해를 낳았다.[28][29] 이 사건으로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155년, 하드리아노 4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제관을 수여했으나, 이후 황제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제국이 교회의 봉토라고 주장했다.[16] 1156년, 황제와 단교하고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조와 동맹을 맺었다.[22] 이에 프리드리히 1세는 북이탈리아에서의 제권을 주장하며 맞섰다.[22] 하드리아노 4세는 이탈리아 중부 아나니에서 황제를 파문하고, 스스로 교황·황제 양쪽 군대의 사령관에 취임할 계획을 세웠으나, 파문 직전인 1159년 9월 1일 편도선염으로 사망했다.[30][39]
4. 3. 동로마 제국 및 시칠리아 왕국과의 관계
1155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고 아풀리아 지역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시칠리아 국왕에 적대적인 시칠리아 내부 반란군과 접촉한 동로마군은 해안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내륙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드리아노 4세는 교황령이 시칠리아의 노르만족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기에, 남쪽 국경에 동로마 제국을 두는 것이 더 낫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마누엘 황제와의 협상을 서둘러 진행하여 동맹을 맺었다.[40]그러나 순전히 이해타산 때문에 동맹이 맺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동로마군 지휘관의 오만함과[40] 용병들의 몸값 인상 요구와 이탈, 지방 귀족들의 이탈로 연합군은 수적으로 열세가 되었다.[40] 결국 브린디시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지배는 완전히 끝났으며, 1158년 동로마군은 이탈리아에서 물러났다.[40]
동로마 제국과의 영속적인 동맹에 대한 희망 또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일치 문제에 있어서 하드리아노 4세와 마누엘 황제의 이견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하드리아노 4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마누엘은 로마 황제인 자신의 세속적 권위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두 교회는 계속 분열된 상태로 남게 되었다.[40]
1154년 마누엘 1세 황제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윌리엄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그는 아드리아노를 기꺼이 동맹으로 삼았다. 아드리아노의 고립은 1156년 동방 제국과의 협약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교황이 무력을 동원하여 남쪽으로 진출했을 때, 이전에도 자주 그랬듯이 노르만의 승리로 끝난, 헛된 비잔틴 계획에 연루되었다. 아드리아노는 로마와 캄파냐 귀족으로 구성된 교황 군대를 조직하여 1155년 9월에 풀리아로 국경을 넘었다.
마누엘이 아드리아노에게 특정 풀리아 도시를 할양하는 대가로 거액의 돈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실제로 실행되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처음에는 그의 작전이 성공하여 1155년까지 안코나에서 타란토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했다. 비잔틴 자금으로 아드리아노는 잠시 동안 자신의 봉신인 로리텔로 백작 로베르토 3세를 복위시켰지만, 윌리엄은 교황의 군자금으로 사용될 마누엘로부터의 금을 빼앗을 수 있었다. 로마 교황과 동방 황제 간의 동맹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협상은 결국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아드리아노는 단일 황제와 단일 교회라는 기본 원칙에는 동의했지만, 서방 교회가 동방 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가 "어머니에게 마땅한 순종"을 하면서 전자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전략적으로 윌리엄 1세의 입장은 좋지 않았고, 교황이 군대를 철수하도록 하기 위해 아드리안 4세에게 막대한 재정적 보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아드리안 4세의 교황청 대다수는 시칠리아인들과의 협상을 꺼렸고, 국왕의 제안은 다소 거만하게 거절되었다. 이는 잘못된 실수로 판명되었다. 윌리엄 1세는 곧 1156년 중반에 그리스군과 풀리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브린디시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최종 패배로 절정에 달했다. 윌리엄 1세가 반란군을 완전히 격파했을 때, 아드리안 4세는 이제 로마 문제에 더욱 얽매이게 되었고 동맹도 없었기에 국왕의 조건에 따라 평화를 구걸해야 했다. 그는 사실상 포로가 되어 3주 후 베네벤토에서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결과, 베네벤토 협약에서 아드리안 4세는 윌리엄 1세에게 남부 이탈리아에서 그가 주장하는 영토를 투자해야 했고, 이는 교황의 페논과 평화의 입맞춤으로 상징되었다. 교황은 윌리엄 1세의 봉건적 주군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국왕의 초청 없이는 시칠리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리하여 윌리엄 1세에게 자신의 영토에서 교회에 대한 사실상의 레가토 권한을 부여했다. 윌리엄 1세는 교황에게 봉신 서약을 하고 연간 조공을 지불하고 요청 시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계약했다. 이 조약은 시칠리아 국왕에게 최소한 향후 40년 동안 누릴 수 있는 확장된 권한을 부여했으며, 이 지역의 봉건 영주로서 교황이 전통적으로 보유했던 교회 임명에 대한 권한을 포함했다. 아드리안 4세와 윌리엄 1세의 조약은 황제를 격분시켰다.
마누엘 1세 군대의 패배는 교황을 취약하게 만들었고, 1156년 6월 아드리안 4세는 시칠리아 국왕과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드리안 4세와 윌리엄 1세의 새로운 동맹은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아드리안 4세는 아마도 다음 해에 윌리엄 1세와 마누엘 1세 사이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다.
1154년부터 1155년까지 하드리아노 4세는 굴리엘모 1세가 교황령 일부를 점령한 것을 비난하며 시칠리아를 왕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굴리엘모는 교황령 남부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다. 1155년 9월,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자군을 준비하여 동맹군에 가세했고, 그 후 로마 교황, 동로마 제국과 현지 귀족으로 구성된 동맹군은 1156년 4월까지 아드리아 해에 면한 풀리아 지방의 대부분을 제압했다. 그러나 그 해 5월 브린디시(풀리아 주) 전투에서 육해상에서 공격해 온 시칠리아 왕국 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교황은 남 이탈리아의 베네벤토에서 시칠리아와의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베네벤토 조약).
4. 4. 《라우다빌리테르》 칙서
켈스 시노드가 있은 지 3년 후인 1155년, 하드리아노 4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에게 《마땅히》(Laudabiliter)라는 교황 칙서를 보냈다. 그는 헨리 2세에게 아일랜드를 정복해 그곳에 가톨릭 제도에 따라 교회의 통치와 개혁을 추진하고, 아일랜드 섬 전체를 복음화할 것을 촉구했다.[40] 이 칙서의 진정성에 대해 역사학자 에드먼드 커티스는 "역사상 매우 큰 수수께끼"라고 말했다. 커티스에 따르면, 윈체스터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아일랜드 침공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헨리 2세의 어머니 마틸다가 반대하여 원정이 연기되었다고 한다.[40]그러나 아일랜드에는 이러한 소식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미 노르만족이 잉글랜드와 웨일스 전역에 걸쳐 서쪽으로 계속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42] 그들의 침공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강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니스트 F. 헨더슨은 아일랜드 침공을 요청한 교황 칙서의 진위 여부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P. S. 오헤거티는 순전히 학문적으로 봤을 때 이 칙서가 과연 존재했었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하드리아노 4세의 후임자들인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교황 루치오 3세가 이 칙서의 내용을 부정하는 일도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1542년 헨리 8세가 발표한 아일랜드 왕위법은 이 문서를 근거로 제정되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43]
노르만족은 두 단계에 걸쳐 아일랜드를 침공했다. 1169년 아일랜드 왕위에서 쫓겨난 디아마트 막 무르하는 잉글랜드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고, 그 요청에 따라 펨브룩 2대 백작 리처드 디 클레어와 그가 이끈 소수의 노르만족 기사들이 와서 땅을 보상으로 받았다. 이에 그들이 자주적 세력으로 성장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한 헨리 2세는 1171년 대군을 아일랜드로 파병했다. 1171년 11월 헨리는 더블린 바이킹족, 게일 왕, 노르만족 기사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러한 헨리의 행동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허용과 1172년 캐셸 시노드의 지지를 받았다. 《마땅히》가 이 과정의 첫 번째 순서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5. 사망과 그 이후
하드리아노 4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1세는 지속적으로 교회를 국가의 통치 아래 두려 하였고, 하드리아노 4세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며 프리드리히 1세와 대치하였다. 그러던 중 1157년 10월 브장송에서 열린 회의에서 교황 특사들은 프리드리히 1세에게 교황 하드리아노 4세의 서찰을 전했는데, 이 서찰에 적힌 문구 하나가 큰 분란을 일으켰다. 문제가 된 단어는 황제에게 수여된 특혜들을 언급한 beneficia인데, 원래 해당 서찰 내용상 대관식으로 이해되는 이 단어를 독일인 법관이 영주와 봉신 간의 봉건적 종속 관계를 나타내는 말인 줄 알고 번역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교황의 봉신이라는 말을 듣고 격분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었다. 하드리아노 4세는 프리드리히 1세를 파문하려고 했으나 1159년 9월 아나니에서 선종하였다.[39] 일설에 의하면 포도주를 마시다가 파리가 날아와 목구멍에 달라붙은 바람에 숨이 막혀 선종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후두염으로 선종한 것으로 보인다.
1159년 가을, 하드리아노의 가신들과 측근들은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짧았지만 어려웠던 그의 교황 재위 기간의 스트레스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교황 하드리아노는 황제의 위협에 대한 안전을 위해 은퇴했던 아나니에서 편도선염으로 사망했다. 1159년 9월 1일에 사망했고, 사흘 후에 "눈에 띄지 않는 3세기 석관"인 반암 무덤에 묻혔다. 1607년, 이탈리아 고고학자 조반니 프란체스코 그리말디는 지하 묘지를 발굴했고 그 과정에서 하드리아노의 무덤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잘 보존된 시신을 "터키 슬리퍼를 신고 손에는 큰 에메랄드가 박힌 반지를 착용한 작은 체구의 남자"이며 어두운 장백의를 입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하드리아노가 사망했을 때, 교황청에 대한 황제의 압력은 하인리히 5세 시대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강했고, 추기경들이 그의 후임자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추기경들은 그가 사망하기 몇 달 전부터 곧 분열이 일어날 가능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노 자신의 정책 덕분에 "추기경단의 분열은 황제의 개입에 관계없이 거의 예정되어 있었다"고 하며, 하드리아노 교황 재위 마지막 몇 달 동안 추기경 개인의 이념적 입장이 교황청을 형성하고 분파를 도입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분열을 직접 조율했다고도 한다.
1159년 9월, 황제의 반대 세력을 이끌고 있던 하드리아노는 바르바로사를 파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또한 그해 여름부터 로마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특사들의 요청을 판단할 시간이 없었는데, 그들은 세인트앤드루스 교구를 관구로 만들 것을 요청했고, 멜로즈의 윌세프의 시복을 요청했다. 그의 마지막 행위 중 하나는 그가 선호하는 후계자 포르토의 베르나르도 추기경-주교를 축복하는 것이었다. 에버하르트 2세 폰 오텔링겐은 콘클라베에 밤베르크의 에버하르트 주교를 증언했다. 황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후보인 베르나르도의 선출은 미래의 분열을 피했을 수도 있다. 추기경들이 결국 하드리아노의 선택에 동의했다는 것은 그가 현명하게 선택했음을 나타낸다.
교황 하드리아노는 1159년 9월 4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혔다. 그가 사망했을 때 교황을 시중들던 세 명의 황제 대사가 참석했다. 그들은 베장송에서 롤랑 추기경을 구타하려 했던 비텔스바흐의 오토, 비안드라테의 귀도, 아헨의 헤리베르트였다. 그러나 황제가 교황의 죽음에 대해 듣자마자, "황제 지지 성향의 후임자 선출을 확보하기 위해 요원 무리와 많은 돈을 로마로 보냈다"고 한다.
1159년 6월, 하드리아노와 도시 사절들의 만남에서 차기 교황 선거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수 있는데, 하드리아노는 시칠리아 친화 정책을 지지하는 13명의 추기경들과 동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드리아노의 후임으로 추기경 롤란도의 선출은 제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시칠리아의 윌리엄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분열은 이탈리아의 교황 정책에도 영향을 미쳐, 교황은 자신의 문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인 관찰자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교황과 황제가 갈등을 겪을 때마다 분쟁 선거는 불가피한 결과였다. 마누엘과 바르바로사 사이의 관계는 이미 좋지 않았는데, 마누엘은 하드리아노와의 불화 이후 그의 서방 상대방을 "난처한 존재"로 여겼다고 하며, 1159년 초 마누엘의 독일인 아내 술츠바흐의 베르타가 사망한 후 완전히 끝이 났다.
하드리아노의 죽음 이후, "교회에 대한 결과는 또 다른 길고 쓰라린 분열이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당들 사이의 긴장은 "상호 용납할 수 없는 후보자"로 인해 이중 선거로 이어졌다. 이는 "수치스러운 장면"이 로마에서 발생하게 만들었지만,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압도할 만큼 강력하지 않아 각 세력은 유럽 열강에 호소했다.
교황군이 바르바로사를 완전히 물리칠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롬바르디아에서의 전쟁은 점차 황제에게 불리하게 돌아섰고,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국이 인정되면서 군사적 상황은 더욱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 제국, 시칠리아, 비잔틴 황제 사이의 평화는 바르바로사가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듬해 베네치아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확립되지 않았다. 분열은 1180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선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황제의 재무처는 일련의 가짜 편지들을 배포했는데, 그 중 일부는 하드리아노가 쓴 것으로 묘사되어 황제 후보를 옹호했다. 그러한 편지 중 하나는, 힐린 주교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것인데, "카롤루스 대제의 황제 칭호 수용에 대한 의도적으로 잘못된 재작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고 한다. 그 안에서 하드리아노는 교황청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 왕들을 비난하는 비난을 쏟아낸다. 이 편지가 제국의 청중을 격분시키기 위한 의도로 분명히 쓰여졌다고 한다. 또 다른 편지는 황제가 주교에게 보낸 것으로, 하드리아노의 교회를 "뱀의 바다", "도둑의 소굴이자 악마의 집"이라고 부르며, 하드리아노 자신을 "베드로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라고 칭했다. 하드리아노는 반대로 황제가 "정신이 나갔다"고 말한다. 이 편지들이 베장송에서의 각 측의 주장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바르바로사가 자신이 하드리아노의 주장 중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을 나타내는 데 가장 흥미롭다고 한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의 위협이 있었다. 베네벤토 조약에서 하드리아노가 시칠리아에 잃은 영토는 다음 세기 초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결국 되찾아졌으며, 이때 시칠리아 왕국은 제국과 합병되었다. 인노첸시오는 하드리아노의 원래 양도가 사도좌의 특권을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탈리아 남부에서 제국을 몰아내기 위한 일관되고 결국 성공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159년 교황 선거는 논쟁의 대상이었고, 추기경단은 하드리아노 4세의 친 윌리엄 정책을 유지하고자 했던 "시칠리아파"와 "제국파"로 종파적 분열을 겪었다. 전자는 로랑 추기경을 지지했고, 후자는 오타비아노 데 몬티첼리 추기경을 지지했다. 로랑은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 선출되었다. 그의 반대자들은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립교황인 빅토르 4세를 선출했다. 제국파는 시칠리아와의 새로운 화해 정책에 반대했고, 제국과의 전통적인 동맹을 선호했다. 선거인단의 제국파 서신은 하드리아노가 추기경 내 시칠리아 파벌의 "속임수"라고 주장했다. 바르바로사의 후보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그가 하드리아노를 섬기는 것을 반대했던 것처럼 빅토르를 섬기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점인데, 예를 들어 대립 교황의 말을 붙잡아 주고 그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과 같았다. 알렉산데르는 단의 3분의 2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빅토르를 지지하는 추기경은 9명에서 5명으로 감소했다. 알렉산데르가 1181년에 사망하기 전에 두 명의 대립 교황이 더 선출되었고, 화합 후보가 찾아졌다. 알렉산데르는 교황청에 황제라는 강력한 적을 보장했던 하드리아노에 의해 문제가 많은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알렉산데르는 일련의 위기를 해결하고 자신의 입장을 유지했다. 1년 안에, 황제 마누엘은 알렉산데르를 인정했고, 영국 왕 헨리 2세도 그렇게 했지만, 헨리는 그렇게 하기까지 9개월을 기다렸다. 옥타비아누스는 콘클라베에서 적은 교황청의 지지를 받았지만, 로마 코뮌의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알렉산데르와 그의 지지자들은 레오닌 보르고의 성역으로 강제로 들어갔다.
6. 평가 및 유산
아드리아노 4세는 전략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윌리엄 1세의 재정적 제안을 거절했지만, 이는 실수로 판명되었다.[4] 윌리엄 1세가 브린디시 전투에서 승리하고[5] 반란군을 진압하면서,[6] 아드리아노 4세는 로마 문제에 얽매이고 동맹도 없이[7] 윌리엄 1세의 조건으로 평화를 요청해야 했다.[8] 이는 아드리아노 4세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외부 사건으로, 그의 교황 재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이다.[9] 그는 사실상 포로 상태로 3주 후 베네벤토에서 조건을 수락해야 했다.[10] 이 사건은 아드리아노 4세의 정책을 영원히 바꾸었다.[11]
베네벤토 협약에서 아드리아노 4세는 윌리엄 1세에게 남부 이탈리아 영토를 투자해야 했고,[12] 윌리엄 1세를 봉건적 주군으로 인정했지만, 시칠리아 입국은 금지되었다.[13] 윌리엄 1세는 교황에게 봉신 서약을 하고 연간 조공을 지불하며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14] 이 조약은 시칠리아 국왕에게 교회 임명 권한을 포함한 확장된 권한을 부여했다.[15] 아드리아노 4세와 윌리엄 1세의 조약은 황제를 격분시켰고,[16] 이후 분쟁 선거의 씨앗을 뿌렸다.[17]
마누엘 1세 군대의 패배로 아드리아노 4세는 1156년 6월 시칠리아 국왕과 조건을 수락해야 했다.[18] 그러나 여기에는 충성 서약, 배상, 로마인에 대한 도움, 시칠리아 교회의 왕실 통제로부터의 자유가 포함되었다.[19] 아드리아노 4세와 윌리엄 1세의 동맹은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고,[20] 교황과 황제 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손상되었다.[21] 아드리아노 4세는 윌리엄 1세와 마누엘 1세 사이의 평화 조약 체결을 중재했을 가능성이 있다.[22]
베네벤토 조약에서 아드리아노 4세를 대표한 추기경들은 교황청이 윌리엄 1세에게 많은 영토, 권리, 수입을 양도하게 했다.[23] 황제는 배신감을 느꼈고,[24] 제국과 교황청의 동맹은 편의적이었을 뿐이었다.[25]
아드리아노 4세는 자신의 직무가 지닌 "엄청난 책임감"을 의식하고 있었고,[27] 존 오브 솔즈베리에게 교황의 관은 "불타는 불꽃처럼 빛난다"고 말했다. 그는 베드로 전통의 역사성을 의식하고 교황 직의 통일 및 조정 역할을 옹호했으며,[28] 자신의 칭호를 ''Servus servorum Dei''로 사용했다.[29]
아드리아노 4세는 서방 교회의 우월성을 강조했으며,[31] 성 베드로의 권위는 세속 통치자들과 공유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32] 그는 자신의 법정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법정이라고 확신했으며,[33] 기독교 세계를 인체에 비유하며 교황을 머리로 보았다.[34] 그는 "교회의 경계를 넓히고, 악행을 제한하며, 덕을 심고, 기독교 종교를 증진시키는 것"을 믿었다.[35] 존 오브 솔즈베리에게 로마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묻고, 시모니에 대한 견해를 배의 우화로 답했다.[36]
아드리아노 4세는 행동가였지만,[37] 주저하는 모습도 보였다.[38] 그는 유능한 행정가였고,[39] 전통주의자였다.[40]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따르며 개혁의 필요성을 믿었고,[41] 혼인 성사 명확화와 자유로운 주교 선거 시행에서 이를 보여주었다.[42] 그는 로마 주교의 지위를 제국과 다른 교회보다 우위에 두었다.[43]
16세기 예수회 주석가는 아드리아노 4세가 여러 작품을 저술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논문 ''De Conceptione Beatissimae Virginis'', 단행본 ''De Legationae sua'', 스칸디나비아 교회를 위한 교리 문답이 포함되었다. 그의 서신 중 일부가 남아있으며, 힐데가르데의 편지는 그에게 로마 코뮌 진압을 촉구한다. 아드리아노 4세와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 존 오브 솔즈베리의 서신도 남아있다.
아드리아노 4세의 주교 등록부는 유실되었지만, 일부 칙령은 남아있다. 여기에는 견습생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제 복귀, 십일조 지불, 자유롭지 못한 자의 결혼 문제가 포함되었다. 아드리아노 4세의 십일조 지불에 대한 생각은 교회법에 반영되었다.
역사가들은 아드리아노 4세의 성격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인다. 그는 강하고 융통성 없는 인물로도, 온화한 사람으로도 보인다. 그는 추기경들에게 휘둘리지도, 프리마돈나도 아닌, 규율을 지키는 실무가였다.
아드리아노 4세의 실장 보소는 그를 온화하고 친절하며 학식 있는 인물로 묘사했다. 그는 웅변적이고 유능하며 뛰어난 외모를 지녔다. 그는 본성적으로 굳건했지만, 변화에 열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특징을 의도적으로 활용했을 수 있다. 존 오브 솔즈베리의 기록에서도 비슷한 점을 감지할 수 있다.
아드리아노 4세는 자신의 직위에 대해 "팔리움은 가시로 가득했고, 광택이 나는 미트라는 그의 머리를 태웠다"고 말했다. 그는 궁정 관료 체제의 사람들을 존경했고, 주변에 잉글랜드인들을 두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효과적인 조직가이자 행정가였으며, 그의 인격적 강점은 교황 선거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전기 작가인 추기경 보소는보소는 인노첸시오 2세, 에우제니오 3세, 알렉산데르 3세의 ''생애''도 썼다. 아드리아노 4세의 가까운 친구였다. 존 오브 솔즈베리의 감정은 사자왕 리처드가 프랑스의 필리프에게 느꼈던 감정과 비교될 정도로 강했다.
현대 역사학은 아드리아노 4세에게 항상 칭찬 일색은 아니었다. 그는 논쟁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고, "성질이 고약한"이라고 불렸으며, 바르바롯세를 향한 "냉소적인" 태도를 비판받았다.
아드리아노 4세는 "위대한 교황"으로 묘사되었고, 그의 교황 재임 기간은 동시대 유럽에 흔적을 남겼다. 그는 12세기 종교의 세계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아드리아노 4세는 "새롭게 풀려난 힘"에 직면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그는 세속 권력이 스스로를 당황하게 하는 것을 막았다. 그는 교황의 지위를 중앙 이탈리아에서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제국과의 관계에서는 덜 성공적이었다. 그는 "우르바노 2세 이후 가장 위대한 교황"으로 불리지만, 그의 후계자에게 가려져 있다. 그는 교황청의 오랜 역사에서 중요한 국면을 안전하게 안내했다.
아드리아노 4세는 "외교적으로 매우 능숙하고 경험이 풍부"했으며, 교황 이론을 실용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십자군 지원에 새로운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아드리아노 4세의 교황 재임 기간에 빚을 지고 있음을 인지했다. 베장송 사건에서 그의 위엄 있는 입장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아드리아노 4세의 교황 재임 직전은 교황청에 어려운 시기였다. 교황청은 영구적인 투쟁과 갈등의 시대였지만, 이에 대한 책임 소재는 불분명하다. 아드리아노 4세의 정책은 사건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는 시칠리아 추기경들과 함께 이후 갈등의 희생양이 되었다.
아드리아노 4세는 "개혁 교황청의 진정한 아들"로 묘사되지만, 그레고리오 개혁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그는 교황들이 유산을 확장하는 과정을 시작했고, 로마를 확고한 교황 통제 하에 가져왔다. 그는 이전 교황들보다 더 강경했으며, 그의 개혁 정책은 13세기에 다시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의 교황 재임 기간은 "정치적 음모와 갈등으로 가득했다." 그는 "신정적 야심"을 가졌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용어가 교황의 동의어가 된 것도 그의 재임 기간이었다.
아드리아노 4세는 죽었을 때 "높은 평판"을 남겼고, 후대 교황들에게 롤 모델이 되었다. 그의 좋지 않은 관계에 대한 비난은 그의 고문들에게도 돌아갈 수 있다. 영국과 교황청의 관계는 13세기까지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그는 성 알반스에 광대한 특권을 부여했다.
아드리아노 4세는 교황 군주제 복원을 시작했고, 인노첸시오 3세는 그가 이끌었던 길을 따랐다. 1963년에 지어진 영국 세인트 알반스의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 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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ニコラスが修道院長として最初に記録に現れるのが1147年1月29日である一方、前任者のフュルシエが最後に修道院長として言及されているのが1143年となっているため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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ニコラス僧正(のちのハドリアヌス4世)ともにスウェーデンに渡り、ウプサラの司教を務めていたのが、イングランド出身のヘンリクである。ヘンリクは、フィンランドへのキリスト教布教の使命を帯びて、スウェーデン君主一覧|スウェーデン王のエリク9世 (スウェーデン王)|エリク9世(聖王)とともに1155年にフィンランド南西部に遠征し、その後も同地にとどまって布教活動をおこなったが、翌年、農民により暗殺された。ヘンリクは、のちにフィンランド最初の聖人「聖ヘンリク」として崇められることと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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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リードリヒ1世のイタリア侵入は6度におよび、1154年の北イタリア遠征はその最初と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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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リードリヒ1世のたび重なるイタリア侵攻に対し、ヴェネツィア共和国|ヴェネツィア、ヴェローナ、ミラノなどを核とする北イタリア諸都市は1167年にロンバルディア同盟をつくって対抗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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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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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レシアは北イタリアのロンバルディア地方に所在する都市。「アルノルド・ダ・ブレシア」は清貧を説き、ローマ教皇庁の世俗的権力と富裕とを厳しく攻撃したが、異端とはみなされなかった。アルノルド・ダ・ブレシア自身は処刑されたが、その影響は大きく、12世紀に成立したヴァルド派と13世紀前半に起こった世直し的な民衆運動である「大ハレルヤ」に影響をあたえ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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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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ハドリアヌス4世は、ヘンリー2世が弟のウィリアムに封土を与えるためにアイルランド侵攻を許可したともいわ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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バルバロッサの宰相ラインハルト・フォン・ダセルは、新約聖書の一節「弟子たちが『主よ、剣なら、このとおりここに二振りあります」と言うと、イエスは『それでよい』と言われた」(「ルカによる福音書」)を、二振りの剣とは教皇権と皇帝権のことであり、イエス・キリストが「それでよい」と言われたのは、どちらも神より聖別されたものだから、教皇権・皇帝権の両権は対等であるという解釈を示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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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스피어 농장은 1960년대에 주택 재개발을 위해 철거되었다. 위치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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