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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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레이스 쿨리지는 1879년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버몬트 대학교를 졸업한 후 청각 장애 아동을 가르쳤다. 1905년 캘빈 쿨리지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며,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의 영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백악관에서 다양한 사교 활동을 펼쳤으며,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도 영부인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다. 퇴임 후에도 사회 활동을 지속했으며, 1957년 사망하여 남편 곁에 묻혔다. 그녀는 매력적인 성격과 패션 감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캘빈 쿨리지의 성공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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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쿨리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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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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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미국의 영부인 |
재임 기간 | 1923년 8월 2일 ~ 1929년 3월 4일 |
역할 | 영부인 |
대통령 | 캘빈 쿨리지 |
전임 | 플로렌스 하딩 |
후임 | 루 후버 |
직함1 | 미국 제2 영부인 |
재임 기간1 | 1921년 3월 4일 ~ 1923년 8월 2일 |
역할1 | 제2 영부인 |
부통령1 | 캘빈 쿨리지 |
전임1 | 로이스 마셜 |
후임1 | 캐로 도스 |
직함2 | 매사추세츠주의 영부인 |
재임 기간2 | 1919년 1월 2일 ~ 1921년 1월 6일 |
역할2 | 영부인 |
주지사2 | 캘빈 쿨리지 |
전임2 | 엘라 맥콜 |
후임2 | 메리 콕스 |
직함3 | 매사추세츠주의 제2 영부인 |
재임 기간3 | 1916년 1월 6일 ~ 1919년 1월 2일 |
역할3 | 제2 영부인 |
부지사3 | 캘빈 쿨리지 |
전임3 | 베아트리스 배리 (1915년) |
후임3 | 메리 콕스 |
직함4 | 노샘프턴의 영부인 |
재임 기간4 | 1910년 1월 3일 ~ 1912년 1월 1일 |
역할4 | 영부인 |
시장4 | 캘빈 쿨리지 |
전임4 | 마가렛 오브라이언 |
후임4 | 캐서린 페이커 |
본명 | Grace Anna Goodhue |
출생일 | 1879년 1월 3일 |
출생지 | 미국 버몬트주벌링턴 |
사망일 | 1957년 7월 8일 |
사망지 |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 |
안장지 | 플리머스 노치 묘지 |
정당 | 공화당 |
배우자 | 캘빈 쿨리지 (1905년 결혼, 1933년 사별) |
자녀 | 2명 (존 쿨리지 포함) |
교육 | 버몬트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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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1924년의 쿨리지 |
2. 어린 시절과 교육
그레이스 애나 굿휴(Grace Anna Goodhue)는 1879년 1월 3일 버몬트주 벌링턴에서 태어났다.[5] 그녀는 다섯 살 때 버링턴 공립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교육 과정을 시작했고, 이 시기부터 피아노 개인 레슨을 받으며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5] 1893년에는 버링턴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라틴어, 프랑스어를 포함한 다양한 학문 분야를 공부했으며, 연설법 개인 레슨도 받았다.[5]
1898년 버몬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했다. 이로써 그레이스 쿨리지는 4년제 대학 학사 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영부인이 되었다.[5] 대학 졸업 후, 어린 시절 친구이자 청각 장애 아동 교육에 종사하던 준 예일(June Yale)의 영향을 받아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 있는 클라크 청각 및 언어 학교(Clarke Schools for Hearing and Speech)에 진학했다.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이 학교에서 입술 읽기(lip reading)를 가르쳤으며, 이는 평생에 걸쳐 청각 장애인을 위한 활동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5]
2. 1. 출생과 가족 배경
그레이스 애나 굿휴(Grace Anna Goodhue)는 1879년 1월 3일 버몬트주 벌링턴에서 앤드류 이삭 굿휴(Andrew Issachar Goodhue)와 레미라 배럿 굿휴(Lemira Barrett Goodhue)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통해 1635년 이주한 윌리엄 굿휴(William Goodhue)의 후손이다. 어머니 레미라는 전업주부였고, 그레이스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매우 가까워 바느질, 요리, 청소, 정원 가꾸기 등 가사일을 배우며 도왔다.[5] 매년 여름에는 뉴햄프셔주 핸콕(Hancock)의 친척 집을 방문하거나 외할아버지를 찾아 미국 남북 전쟁 이야기를 듣곤 했다.아버지 앤드류는 처음 제분소 기술자로 일했으며, 가족은 고용주가 제공한 집에서 살았다. 1880년대 초, 아버지는 제분소 인근 메이플 스트리트 123번지에 직접 집을 지었고,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욕조, 난방 시설, 전기 조명 등을 설치했다. 1886년 아버지가 직장에서 사고를 당하자, 그레이스는 잠시 이웃인 예일(Yale) 가족과 지냈다. 이때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의 클라크 청각장애학교(Clarke School for the Deaf) 교사인 준 예일(June Yale)과 가까워졌고, 십대가 되어서는 준이 돌보는 청각 장애 학생들을 돕기도 했다.
사고 이후 아버지는 제분소를 그만두고 기계 공장을 공동 설립했다. 그는 민주당원이었는데, 1887년 민주당 소속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 의해 샴플레인 호수 수송 회사(Lake Champlain Transportation Company)의 증기선 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5] 이 덕분에 가족은 지역 사회에서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
그레이스는 엄격한 청교도적 가치관 아래 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가족의 사회 활동은 주로 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본래 가족은 감리교를 믿었으나, 십대 시절 그레이스의 영향으로 회중교회(Congregationalism)로 옮겼다. 1899년에는 메이플 스트리트 312번지에 새 집을 마련했다.
2. 2. 초기 교육과 성장
그레이스 애나 굿휴(Grace Anna Goodhue)는 1879년 1월 3일 버몬트주 버링턴에서 앤드류 이삭 굿휴(Andrew Issachar Goodhue)와 레미라 배럿 굿휴(Lemira Barrett Goodhue)의 외동딸로 태어났다.[5]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분소 기술자로 일했으나, 1886년 직장 사고 이후 기계 공장을 공동 설립했다. 이후 민주당원이었던 그는 1887년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 의해 샴플레인 호수 수송 회사(Lake Champlain Transportation Company)의 증기선 검사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5] 어머니 레미라는 전업주부로, 그레이스에게 바느질을 비롯한 여러 가사일을 가르쳤다.[5] 그레이스는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청교도적 가치관을 배우며 성장했으며, 가족의 사회 활동 대부분은 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가족은 감리교 신자였으나, 십대 시절 그레이스의 영향으로 공립교회(Congregationalism)로 개종했다.그레이스는 다섯 살 때 버링턴의 공립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정규 교육을 시작했다.[5] 이 시기부터 피아노 개인 레슨을 받으며 음악에 관심을 보였다.[5] 1893년에는 버링턴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비롯해 지질학, 생물학, 화학 등 다양한 과목을 공부했다.[2][5] 또한, 연설(Elocution)과 노래 개인 레슨도 꾸준히 받았다. 1897년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방랑자 본능(Tramp Instinct)"이라는 제목으로 직접 연설하기도 했다.
1886년 아버지가 직장 사고로 부상을 입었을 때, 그레이스는 잠시 이웃인 예일(Yale) 가족의 집에서 지냈다. 이때 그 집의 성인 딸인 준 예일(June Yale)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준은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 위치한 클라크 청각장애학교(Clarke School for the Deaf)의 교사였는데, 그레이스는 십대 시절 준이 여름에 버몬트로 데려온 학생들을 돌보는 것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청각 장애 아동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는 훗날 그녀가 클라크 학교에서 입술 읽기(Lip reading)를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5]
2. 3. 버몬트 대학교
1897년 버몬트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시력 문제로 그해 11월 자퇴했다가 1898년에 다시 복학했다. 그녀는 학업보다는 춤, 스케이팅, 썰매 타기, 성경 공부, 크리스천 엔데버, 시 등 대학 내외의 여러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연극 활동에도 참여하여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십이야''에 출연했고,[2] 합창단에서는 알토로 활동했다. 2학년 때는 학급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그레이스는 사교적인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대학 시절 여러 남성과 교제했다. 프랭크 조이너와는 결혼까지 고려할 정도로 깊은 관계였으나, 1903년 캘빈 쿨리지를 만난 후 관계를 정리했다.[2]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이바 게일과 친구가 된 그레이스는 게일 등과 함께 여성 사교 클럽인 파이 베타 파이의 대학 지부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모임은 주로 그레이스의 집에서 열렸다. 1901년에는 사교 클럽의 전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주 시러큐스로 가기도 했다.
그녀는 1902년 버몬트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이로써 4년제 학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영부인이 되었다.[2]
3. 결혼과 가정 생활
그레이스는 버몬트 대학교 재학 중이던 1903년,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 젊은 변호사 캘빈 쿨리지를 만났다.[5] 조용하고 내성적인 캘빈과 사교적인 그레이스는 대조적인 성격이었지만, 대학 교육 배경, 유머 감각, 종교적 신념 등 여러 공통점을 바탕으로 가까워졌다. 1905년 10월 4일, 두 사람은 그레이스의 고향인 버링턴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노샘프턴에 신혼집을 마련했다.[5] 부부는 존(1906년생)과 캘빈 쿨리지 주니어(1908년생) 두 아들을 두었다.
남편 캘빈이 매사추세츠주 의회 의원, 부지사, 매사추세츠주 주지사를 역임하며 정치 경력을 쌓는 동안, 그레이스는 주로 노샘프턴의 집에서 두 아들을 양육하는 데 전념했다. 캘빈이 보스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레이스는 사실상 혼자 아이들을 돌보았고, 야구를 가르치는 등 전통적으로 아버지의 몫으로 여겨지던 역할까지 수행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지역 사회에서 전쟁 채권 판매 운동을 벌이고 적십자사 활동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1년, 캘빈 쿨리지가 워런 G. 하딩 행정부의 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가족은 워싱턴 D.C.로 이주하여 윌러드 호텔에 거주하게 되었다. 미국의 세컨드 레이디가 된 그레이스는 워싱턴 사교계에서 특유의 활발함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6] 그녀는 정치 문제에 직접 나서기보다는 적십자나 방문 간호 협회(Visiting Nurse Association)와 같은 자선 단체를 지원하는 데 힘썼다. 부통령 부인으로서 상원 부인회 회장을 맡아 적십자 지원 활동을 이어갔으며, 전임자 로이스 아이린 마셜 등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역할에 적응했다. 영부인 플로렌스 하딩이 건강 문제로 활동하기 어려울 때는 잠시 영부인의 공식 접대 임무를 대신하기도 했다. 1923년 8월, 하딩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남편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그레이스는 미국의 영부인이 되었다.
3. 1. 캘빈 쿨리지와의 만남과 결혼
대학 재학 중 그레이스는 여러 남성과 교제했으며, 그중 프랭크 조이너와는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1903년 촉망받는 변호사 캘빈 쿨리지를 만나 조이너와 헤어졌다.[5] 1905년 여름, 캘빈은 그레이스에게 청혼했고 그레이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어머니 레밀라는 결혼에 반대하며 결혼식을 늦추려고 애썼다. 캘빈은 장모와 끝내 원만한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지만, 훗날 레밀라는 사위의 정치적 성공이 딸 그레이스 덕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1905년 10월 4일, 버링턴에 있는 그레이스의 친가에서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 집은 1993년 샴플레인 대학교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 '쿨리지 하우스'로 불린다. 몬트리올에서 일주일간의 신혼여행을 마친 후, 부부는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 정착하여 캘빈 쿨리지 하우스(Calvin Coolidge House)로 알려진 집에서 1930년까지 살았다. 부부 사이에는 존(John Coolidge, 1906년 ~ 2000년)과 캘빈(Calvin Coolidge Jr., 1908년 ~ 1924년) 두 아들이 태어났다.1907년 캘빈 쿨리지가 매사추세츠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그의 정치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후 1916년부터 1919년까지 매사추세츠주 부지사를,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매사추세츠주 주지사를 역임했다. 남편이 이러한 공직을 맡는 동안 그레이스는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그녀는 주도인 보스턴으로 이주하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노샘프턴의 자택에 머물렀다.
3. 2. 가정 생활과 자녀 양육
대학 재학 중 그레이스는 여러 남성과 교제했으며, 프랭크 조이너와는 결혼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3년 변호사 캘빈 쿨리지를 만나면서 조이너와 헤어졌다.[5] 1905년 여름, 캘빈은 그레이스에게 청혼했고 그레이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어머니 레밀라는 결혼에 반대하며 결혼식을 미루려고 애썼다. 캘빈은 장모와 끝내 화해하지 못했지만, 훗날 레밀라는 사위의 정치적 성공이 딸 덕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1905년 10월 4일, 버링턴에 있는 그레이스의 친가에서 소박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이 집은 1993년 샴플레인 대학교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 "쿨리지 하우스"로 불린다. 몬트리올에서 일주일간 신혼여행을 보낸 후, 부부는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 정착하여 1930년까지 캘빈 쿨리지 하우스에서 살았다. 부부 사이에는 존(1906년 ~ 2000년)과 캘빈 주니어(1908년 ~ 1924년) 두 아들이 있었다.1907년 캘빈 쿨리지가 매사추세츠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이후 매사추세츠주 부지사(1916년 ~ 1919년), 매사추세츠주 주지사(1919년 ~ 1921년)를 차례로 역임했다. 남편이 공직에 있는 동안 그레이스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주도인 보스턴으로 이사하는 대신 노샘프턴의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했다.
캘빈 쿨리지가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워런 G. 하딩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부통령에 당선되자, 1921년 3월 가족은 워싱턴 D.C.로 이주하여 윌러드 호텔에 머물렀다. 미국의 세컨드 레이디가 된 그레이스는 워싱턴 사교계에 데뷔하여 곧 큰 인기를 얻었다.[6] 그녀는 여성의 권리와 같은 당대의 정치적 현안에 대해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적십자나 방문 간호 협회(Visiting Nurse Association)와 같은 단체를 지원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4. 정치 생활 입문
캘빈 쿨리지가 매사추세츠주 주지사를 지내던 시기(1919년~1921년)에는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의 자택에 머물며 두 아들을 양육하는 데 집중했고, 공개 석상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1921년 남편이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가족과 함께 워싱턴 D.C.로 이주한 그레이스는 미국의 세컨드 레이디로서 이전과는 다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워싱턴 사교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빠르게 인기를 얻었고,[6] 적십자와 같은 자선 단체를 지원하는 등 공적인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이는 그가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영부인으로서 활동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4. 1. 매사추세츠 주지사 부인 시절
남편 캘빈 쿨리지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매사추세츠주 주지사를 역임하는 동안, 그레이스는 공개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주도인 보스턴으로 이주하지 않고, 두 아들과 함께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의 자택에 머물렀다.4. 2. 미국의 세컨드 레이디 시절
남편 캘빈 쿨리지가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워런 G. 하딩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자, 1921년 3월 부통령 취임과 함께 가족은 워싱턴 D.C.로 이주하여 윌러드 호텔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남편이 매사추세츠주 주지사 등을 역임할 때는 주도인 보스턴으로 이주하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노샘프턴의 자택에 머물며 공개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미국의 세컨드 레이디가 된 그레이스는 워싱턴 상류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고, 곧 워싱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6] 그녀는 여성의 권리와 같은 당시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언하는 대신, 적십자와 방문 간호 협회(Visiting nurse association) 등의 단체를 지원하는 데 힘썼다.
5. 미국의 영부인
1923년 8월 2일, 남편 캘빈 쿨리지가 워런 G. 하딩 대통령의 급서로 미국의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그레이스는 미국의 영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바람에 따라 “꾸밈없고, 위엄 있는” 영부인으로서 워싱턴 D.C. 사교계에서 활동하며 높은 인기를 누렸다.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스 영화에 출연하여 목소리를 남기기도 했다.[7]
1924년에는 십 대 아들 캘빈 주니어가 테니스를 치다 생긴 물집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으며 국민적인 동정을 받았다. 이전의 영부인들과 달리, 그레이스는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몇 달 후 영부인으로서의 공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영부인으로서 그레이스는 백악관의 안주인 역할을 수행하며, 백악관 보수 공사와 정원 가꾸기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국가의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남편과 거의 논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캘빈 쿨리지가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도 기자회견 발표 전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5. 1. 백악관 안주인
1923년 8월 2일, 워런 G. 하딩 대통령이 유세 도중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부통령이었던 남편 캘빈 쿨리지가 미국의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그레이스는 미국의 영부인이 되었다. 남편 캘빈 쿨리지는 그레이스가 “꾸밈없고, 위엄 있는” 영부인이 되기를 바랐고, 그녀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며 워싱턴 D.C. 사교계에서 활동했다. 영부인이 된 후에도 그녀의 인기는 여전했으며,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스 영화에 출연하여 목소리를 남기기도 했다.[7]1924년, 십 대였던 아들 캘빈 주니어가 테니스를 치다 생긴 물집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다. 이 사건은 많은 미국인들의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이전의 몇몇 영부인들이 가족의 죽음 이후 대중 활동을 중단했던 것과 달리, 그레이스는 아들이 사망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영부인으로서의 공적 임무를 재개했다.
그레이스는 남편과 국가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캘빈 쿨리지가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을 때도, 그레이스는 기자 회견 발표가 있기 며칠 전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남편의 발표 사실 자체를 몰랐지만, 그가 출마하지 않을 의도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주변에 밝히지 않았다.
1927년 백악관은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건축가 찰스 폴렌 맥킴의 초기 설계 변경안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지붕 교체 공사는 그레이스에게 다락방과 상층부를 개조할 기회를 주었다. 이 과정에서 그녀를 위한 선룸이 설치되기도 했다. 공사 기간 동안 쿨리지 부부는 듀폰 서클에 임시로 머물렀다. 그레이스는 백악관 개보수에 직접 참여하여 링컨 침실에 놓일 침대 덮개를 손수 뜨개질했다. 또한 백악관 정원을 가꾸는 데에도 관여하여, 사망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 버몬트 가문비나무를 심고 자작나무와 수련 연못을 추가했다.
듀폰 서클에 머무는 동안, 쿨리지 부부는 유명한 ''성 루이스의 영혼'' 호를 타고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를 접대했다. 린드버그는 그레이스에게 함께 비행할 것을 제안했지만, 남편 캘빈이 영부인 재임 중 비행기 탑승을 금지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같은 시기, 쿨리지 부부는 사우스다코타주의 블랙힐스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레이스는 비밀경호원 짐 헬리와 함께 산책하던 중 지형을 잘못 파악하여 길을 잃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 후 캘빈 대통령은 헬리를 다른 곳으로 전근시켰는데, 이로 인해 그레이스는 몇 안 되는 산책 동반자를 잃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질투심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928년 초, 그레이스는 심한 병을 앓아 봄 내내 요양해야 했다. 남편 캘빈은 그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날까 봐 매우 걱정했다. 집에서 장기간 요양한 후, 그레이스는 건강이 거의 회복될 때까지 위스콘신주 브룰에서 지냈다. 한편, 캘빈 대통령의 건강도 약한 심장과 심각한 천식으로 인해 악화되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남편의 건강 문제를 언론에 알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폈고, 업무량을 줄이도록 설득했다.
대통령 임기 마지막 몇 달 동안 쿨리지 부부는 조지아주 사펠로 섬과 플로리다주 마운틴 레이크에서 시간을 보냈다. 1929년 3월 4일, 쿨리지 부부는 백악관을 떠났다. 수년간 라디오 방송 출연을 꺼려왔던 그레이스는 남편 캘빈이 고별 연설을 라디오로 방송한 직후, 마이크 앞에 서서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이라는 짧고 간결한 작별 인사를 전했다.
5. 2. 대중적 이미지
1923년 8월 2일, 남편 캘빈 쿨리지가 워런 G. 하딩 대통령의 서거로 미국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그레이스는 미국의 영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기대를 따라 “꾸밈없고, 위엄 있는” 영부인으로서 워싱턴 사교계에서 활동했으며, 영부인이 된 후에도 대중적인 인기를 유지했다. 특히,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스 영화에 출연하여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7]1924년, 십대 아들 캘빈 주니어가 패혈증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을 때, 그레이스는 국민적인 애도와 동정을 받았다. 이전의 많은 영부인들이 가족의 비극 이후 공식 석상에서 물러났던 것과 달리, 그레이스는 아들이 사망한 지 몇 달 만에 영부인으로서의 공적인 역할을 다시 수행하며 대중 앞에 섰다.
한편, 그레이스는 국가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남편과 거의 논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에도, 그레이스는 기자회견 발표 전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영부인의 역할과 대외적인 이미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5. 3. 개인적인 삶
1923년 8월 2일, 남편 캘빈 쿨리지가 워런 G. 하딩 대통령의 급서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레이스는 미국의 영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바람대로 “꾸밈없고, 위엄 있는” 영부인으로서 워싱턴 사교계에서 활동하며 높은 인기를 누렸다. 또한,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스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7]1924년, 십 대 아들 캘빈 주니어가 패혈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국민적인 동정을 받았다. 이전의 다른 영부인들과는 달리, 그레이스는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몇 달 후 영부인으로서의 공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1927년 백악관이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칠 때, 그레이스는 건축가 찰스 폴렌 맥킴의 설계와는 별개로 다락방과 상층부를 개조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때 그녀를 위한 선룸이 설치되었다. 공사 기간 동안 쿨리지 부부는 듀폰 서클에 임시로 머물렀다. 그레이스는 백악관 개보수에 직접 참여하여 링컨 침실에 놓을 침대 덮개를 직접 뜨개질했으며, 백악관 정원 확장에도 관여하여 아들을 추모하는 버몬트 가문비나무 외에 자작나무와 수련 연못을 추가했다.
듀폰 서클에 머무는 동안 쿨리지 부부는 성 루이스의 영혼 호로 유명한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 성공 후 그를 접대했다. 린드버그가 함께 비행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레이스는 남편 캘빈이 영부인 재임 중 비행을 금지했기 때문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우스다코타의 블랙힐스 방문 중 그레이스가 경호원 짐 헬리와 산책하다 길을 잃는 일이 발생하자, 캘빈은 헬리를 다른 곳으로 전근시켰다. 이 조치로 그레이스는 함께 걸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반자를 잃었으며, 이는 대통령의 질투심 때문이라는 소문을 낳았다.
그레이스와 캘빈은 국가 문제에 대해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 캘빈이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을 때도, 그레이스는 남편이 이를 기자회견에서 발표할 때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남편의 불출마 발표 자체를 몰랐지만, 그 의도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주변에 밝히지 않았다.
5. 4. 정치적 활동
1923년 8월 2일, 워런 G. 하딩 대통령이 유세 도중 급사하자 부통령이었던 남편 캘빈 쿨리지가 미국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그레이스는 미국의 영부인이 되었다.[7] 그녀는 남편의 바람에 따라 “꾸밈없고, 위엄 있는” 영부인으로서 워싱턴 사회계에서 활동했다.[7] 남편 캘빈 쿨리지는 사회 활동을 자신의 업무에 방해가 되는 요소로 여겼으나, 그레이스는 대통령의 사회적 책임을 상당 부분 맡아 공개 행사와 자선 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사진 촬영을 자주 허용했고 신문에도 자주 등장했지만, 남편의 요청에 따라 인터뷰는 거절했으며 라디오 방송 출연도 조심했다.영부인이 된 후에도 그레이스의 인기는 여전했다. 그녀는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스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7] 대중은 주로 그녀의 사교적인 태도에 대한 간접적인 이야기를 통해 영부인을 알게 되었으며, 1925년 일식 관측이나 그라프 체펠린 비행선 관련 일화 등은 대중이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데 기여했다. 특히 스포츠, 그중에서도 야구를 좋아하여 워싱턴 세네이터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를 응원하며 "야구의 영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베이브 루스의 팬이기도 했다.
대학 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 그레이스의 존재는 대학 내 여성의 기회를 위한 상징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그녀는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명예 학위를 받았는데, 1924년 보스턴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LL.D.) 학위를 받았다.
1924년, 십 대 아들 캘빈 주니어가 패혈증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레이스는 국민적인 동정을 받았다. 다른 영부인들과 달리, 그녀는 아들의 죽음 이후 몇 달 만에 영부인으로서의 공적인 활동을 재개했다.[7]
영부인 재임 기간 동안 그레이스는 캘빈과의 이혼설, 임신설 등 거짓 소문에 시달렸다. 부부는 이러한 소문에 대해 공개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으나, 이혼설 이후에는 공개 석상에 함께 더 자주 모습을 보였다. 또한 비밀경호국 요원 짐 헤일리와의 염문설이나, 캘빈이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에 질투심을 느꼈다는 소문도 돌았다.
1927년 백악관 대대적인 보수 공사 당시, 그레이스는 지붕 교체 공사를 기회로 삼아 건축가 찰스 폴렌 맥킴(Charles Follen McKim)의 기존 설계와는 별개로 다락방과 상층부를 개조하는 데 관여했다. 이때 그녀를 위한 선룸(sunroom)이 설치되었다. 보수 공사 기간 동안 쿨리지 부부는 듀폰 서클(Dupont Circle)에 머물렀는데, 그레이스는 링컨 침실(Lincoln Bedroom)에 놓을 침대 덮개를 직접 뜨개질하기도 했다. 또한 백악관 정원 확장에도 관여하여 아들을 추모하는 버몬트 가문비나무 외에 자작나무와 수련 연못을 추가했다.
듀폰 서클에 머무는 동안 쿨리지 부부는 성 루이스의 영혼(Spirit of St. Louis) 호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를 접대했다. 린드버그가 그레이스에게 함께 비행할 것을 제안했지만, 영부인 재임 중 비행기 탑승을 금지한 캘빈의 규칙 때문에 거절해야 했다. 이후 쿨리지 부부는 사우스다코타의 블랙힐스(Black Hills)를 방문했는데, 이곳에서 그레이스가 비밀경호원 짐 헤일리와 산책 중 길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후 캘빈은 헤일리를 다른 곳으로 전근시켰고, 이는 대통령이 질투심 때문에 조치했다는 소문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레이스는 남편과 국가 문제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캘빈이 192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기자회견에서 발표할 때까지도 그레이스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7] 그녀는 남편의 불출마 발표 사실 자체를 몰랐으며, 그 의도를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5. 5. 백악관 보수와 휴가
1927년 백악관은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쳤다. 건축가 찰스 폴렌 맥킴의 설계 변경은 반발을 야기했을 수 있지만, 지붕 교체 공사는 그레이스에게 맥킴의 작업과는 별개였던 다락방과 상층부를 개조할 기회를 제공했다. 변경 사항 중에는 그녀를 위해 설치된 선룸이 있었다.쿨리지 부부는 공사 기간 동안 듀폰 서클에 머물렀다. 그레이스는 백악관 개보수에 기여하여 링컨 침실을 위한 침대 덮개를 직접 뜨개질했다. 또한 그녀는 백악관 정원 확장에도 관여하여, 아들의 추모를 위해 심은 버몬트 가문비나무 외에도 자작나무와 수련 연못을 정원에 추가했다.
듀폰 서클에 머무는 동안 쿨리지 부부는 유명한 ''성 루이스의 영혼'' 대서양 횡단 비행 후 찰스 린드버그를 접대했다. 그레이스는 린드버그와 함께 비행기를 타자는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는 남편 캘빈이 영부인 재직 중 비행기 탑승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듀폰 서클에서 지낸 후, 쿨리지 부부는 사우스다코타의 블랙힐스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그레이스와 그녀의 비밀경호원 짐 헬리는 지형을 잘못 판단하여 산책 중 길을 잃었다. 이 사건 후 캘빈은 헬리를 다른 곳으로 전근시켰는데, 이 조치는 그레이스가 함께 걸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반자를 잃게 만들었으며, 대통령이 질투심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소문을 낳았다.
그레이스는 1927년 캘빈이 나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사실을 그가 발표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발표 사실 자체는 몰랐지만, 그가 출마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6. 퇴임 이후의 삶과 죽음
남편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퇴임 후, 그레이스 쿨리지는 노샘프턴으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 사후에도 청각 장애인 지원을 비롯한 사회 활동을 이어갔으며, 1957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남편 곁에 버몬트주 플리머스에 안장되었다.[3]
6. 1. 은퇴 생활
남편 캘빈 쿨리지 대통령 퇴임 후, 부부는 노샘프턴으로 돌아와 이전 집보다 넓은 부지를 가진 저택 "비치스(The Beeches)"를 구입하여 더 조용한 사생활을 추구했다.[3] 캘빈 쿨리지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레이스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거의 25년 동안 그녀는 나의 허약함을 견뎌주었고, 나는 그녀의 장점에 기뻐했다"고 회고했다.[3]그레이스는 미국 사회과학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Social Science)로부터 금메달을 받았으며, 1931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 12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3]
1933년 1월 5일, 남편 캘빈 쿨리지는 '비치스'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6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3][8] 남편의 사망 후에도 그레이스는 청각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또한 적십자사 활동, 민방위 활동 등에 참여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고철 모으기 운동과 노샘프턴의 유대인 난민 지원 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자신의 집을 WAVES(미 해군 여성 예비군)를 위해 제공하기도 했다.[3][8]
그레이스는 1957년 7월 8일, 78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유쾌함과 대중의 관심을 멀리하는 성격을 유지했다. 유해는 버몬트주 플리머스의 플리머스 노치 묘지에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3][8]
6. 2. 사회 활동 지속
남편 캘빈 쿨리지 전 대통령이 1933년 1월 5일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에도, 그레이스 쿨리지는 사회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녀는 평생 관심을 가져온 청각 장애인 지원 활동을 계속했으며,[3][8]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에 기여했다.적십자사 활동과 민방위에 참여했으며, 전쟁 지원을 위한 고철 모으기 운동에도 힘을 보탰다.[3] 또한,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 거주하는 유대인 난민을 돕는 위원회에 참여했고, 자신의 집을 미국 해군 여성 예비군(WAVES) 대원들을 위해 내어주기도 했다.[8]
그레이스는 1957년 7월 8일,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특유의 유쾌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관심에서는 한 발짝 물러나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남편 곁인 버몬트주 플리머스의 플리머스 노치 묘지에 안장되었다.[3][8]
6. 3. 사망
남편 캘빈 쿨리지가 1933년 사망한 후에도 그레이스 쿨리지는 청각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적십자사 활동, 민방위, 고철 모으기 운동, 노샘프턴의 유대인 난민 지원 위원회 활동에 참여하고 자신의 집을 미 해군 여성 예비군(WAVES)에게 제공하는 등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3][8]그녀는 1957년 7월 8일, 노샘프턴의 자택에서 78세의 나이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3][8] 유해는 버몬트주 플리머스의 플리머스 노치 묘지에 남편 캘빈 쿨리지 옆에 안장되었다.[3][8]
7. 유산
그레이스 쿨리지의 영부인으로서의 유산은 주로 그녀의 매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1] 그녀는 영부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워싱턴 D.C.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사회적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2] 그녀의 패션 감각은 1920년대 유행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7] 또한, 그녀의 외향적인 성격은 내성적인 남편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레이스의 높은 인기는 영부인의 역할을 이전보다 훨씬 대중적인 자리로 끌어올렸고, 이는 후대의 영부인들에게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7. 1.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
그레이스 쿨리지의 영부인으로서의 유산은 그녀의 매력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1] 영부인이 되기 전에도 이미 그레이스는 워싱턴 D.C.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사회적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부통령 부인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2] 그녀의 비교적 젊은 나이, 사진 촬영에 적합한 외모, 그리고 패션 감각은 영부인의 역할에 활기를 불어넣었지만, 남편의 요청에 따라 조용한 태도를 유지했다.[3] 언론은 그녀를 "대학생 스타일의 여성"으로 묘사했다.[2] 그녀의 인기는 전 영부인인 프랜시스 클리블랜드[4]와 돌리 매디슨[5][6][3]과의 비교를 불러일으켰다.그레이스의 패션은 특히 모자 선택에서 1920년대 유행에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스타일을 절제된 방식으로 선보이려고 노력했다.[7] 그녀가 영부인으로 입었던 각 드레스는 언론의 면밀한 조사를 받았다.[8] 이는 미래 영부인들의 패션의 중요성과 패션 트렌드를 설정하는 그들의 역할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특히 호워드 챈들러 크리스티가 공식 초상화에서 붉은색 옷을 입은 그녀를 그린 후로 붉은색과 관련되었다. 영부인 전문 작가인 베티 보이드 카롤리는 그레이스가 "당시 플래퍼 스타일을 완벽하게 구현했다"고 말했다.
전기 작가인 로버트 휴 페렐과 크리스티 밀러는 그레이스의 존재를 캘빈의 성공의 이유로 돌리며, 그녀의 성격을 캘빈의 내성적인 성격에 대한 필수적인 균형으로 묘사하여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지지를 잃었을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페렐은 또한 그녀가 캘빈에게 논쟁이나 부부 문제 없는 평온한 가정 생활을 제공할 수 있었던 능력을 언급했다. 캘빈은 쉽게 화를 냈고, 그녀는 종종 그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가말리엘 브래드퍼드와 윌리엄 앨런 화이트와 같은 관찰자들은 캘빈이 그레이스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며, 캘빈 자신도 이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언론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며, ''뉴요커''와 ''굿 하우스키핑'' 등 여러 출판물에서 칭찬하는 프로필을 실었다.[5] 유머 작가인 윌 로저스는 그레이스를 만난 후 그녀를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 1위"라고 묘사했다. 그녀는 당시 활발한 페미니스트 운동과는 대조적으로 일반적으로 더 가정적인 인물로 여겨졌다.[3]
쿨리지 부부와 가까운 사람들도 그레이스가 남편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플로렌스 재프레이 해리먼은 그녀를 "행정부의 가장 큰 성공"으로 여겼다.[5] 의원인 솔 블룸의 딸인 베라 블룸은 그레이스가 공화당에 연간 100만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3] 캘빈의 지지자 중 한 명인 프랭크 스턴스는 그레이스가 친구를 빨리 사귀는 능력과 캘빈의 정치 활동에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자산으로 여겼다. 노동부 장관인 제임스 J. 데이비스는 그녀의 대중 관리 능력을 선거 운동 관리자와 동등한 수준으로 비교했다. 그레이스의 인기는 영부인의 역할을 더 대중적인 역할로 끌어올려 미래 세대의 영부인들에게 지속되는 새로운 측면을 추가했다.
7. 2. 사회 공헌
(내용 없음)7. 3. 평가
그레이스 쿨리지의 영부인으로서의 평가는 주로 그녀의 매력과 관련 깊다. 그녀는 영부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워싱턴 D.C.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교계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워싱턴 사회에서 영부인 역할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겨졌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 사진에 잘 받는 외모, 그리고 패션 감각은 영부인의 역할에 활기를 불어넣었지만, 남편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조용한 태도를 유지했다. 언론은 그녀를 "대학생 스타일의 여성"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녀의 인기는 전 영부인인 프랜시스 클리블랜드나 돌리 매디슨과 비교되었다.그레이스의 패션 감각, 특히 모자 선택은 1920년대 유행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녀는 당시 스타일을 절제된 방식으로 선보이려 노력했다. 영부인 시절 입었던 드레스 하나하나가 언론의 세심한 주목을 받았고, 이는 미래 영부인들의 패션이 갖는 중요성과 그들이 패션 트렌드를 이끄는 역할에 영향을 미쳤다. 화가 호워드 챈들러 크리스티가 공식 초상화에서 그녀를 붉은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린 이후, 그녀는 붉은색과 연관되기도 했다. 영부인 전문 작가 베티 보이드 카롤리는 그레이스가 "당시 플래퍼 스타일을 완벽하게 구현했다"고 평가했다.
전기 작가 로버트 휴 페렐과 크리스티 밀러는 그레이스의 존재 자체가 남편 캘빈의 성공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그레이스의 외향적인 성격이 캘빈의 내성적인 성격을 보완하는 필수적인 균형추 역할을 했으며, 그녀가 없었다면 캘빈이 지지를 잃었을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페렐은 또한 그레이스가 남편에게 논쟁이나 부부 문제 없이 평온한 가정생활을 제공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캘빈은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고, 그레이스는 종종 그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가말리엘 브래드퍼드와 윌리엄 앨런 화이트 같은 동시대 관찰자들은 캘빈이 그레이스에게 정서적으로 크게 의존했으며, 캘빈 자신도 이를 인정했다고 기록했다.
언론 역시 그레이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며, ''뉴요커''나 ''굿 하우스키핑'' 같은 여러 잡지에서 그녀를 칭찬하는 기사를 실었다. 유명한 유머 작가 윌 로저스는 그레이스를 만난 후 그녀를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 1위"라고 묘사했다. 그녀는 당시 활발했던 페미니스트 운동과는 대조적으로, 보다 전통적이고 가정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쿨리지 부부와 가까웠던 인물들 역시 그레이스가 남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던 플로렌스 재프레이 해리먼은 그녀를 "행정부의 가장 큰 성공"이라고 칭했다. 솔 블룸 하원의원의 딸 베라 블룸은 그레이스가 공화당에게 연간 100만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캘빈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던 프랭크 스턴스는 그레이스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능력과 남편의 정치 활동에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높이 평가했다. 제임스 J. 데이비스 노동부 장관은 그녀의 대중 관리 능력을 노련한 선거 운동 관리자에 비견했다. 이처럼 그레이스의 높은 인기는 영부인의 역할을 이전보다 훨씬 대중적인 자리로 끌어올렸고, 이는 후대의 영부인들에게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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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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